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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화 (23/488)
  • 23화

    이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서이기도 했고, 약 기운에 몽롱해서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별거 아냐. 그보다 좀 쉬고 싶은데. 먼저 들어가도 될까?”

    “나를 죽이지 않았다는 건, 조금 더 큰 성체의 기름이 필요하단 거지?”

    “……똑똑하네.”

    “어디에 쓰려고?”

    “말해 줄 이유 없잖아.”

    “무슨 이유인지 알면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

    “네가? 어떻게? 동족을 죽이기라도 할 거야?”

    “…….”

    “늑대의 기름은 살아 있을 때만 얻을 수 있어. 하지만 그 기름이란 건 아이러니하게도 죽기 직전에만 얻을 수 있지. 그러니까 늑대의 기름은 죽어 가는 늑대가 아니면 얻을 수 없단 얘기잖아.”

    “그래. 그러니까 그 기름이 왜 필요해?”

    “……장례를 위해.”

    “장례?”

    “예전 르뷔 제국은 장례를 치를 때 늑대들의 기름으로 시체를 닦아 냈어. 아주 소중하고 각별한 사람을 위해 끔찍하게도 늑대를 학살하는 행위를 했지. 죽은 시체를 위해 살아 있는 생명을 앗은 거야.”

    이엘의 자조적인 말투에 주드는 살풋 미간이 찌푸려졌다. 끔찍하다는 인식은 있으면서 왜 하려는 거지? 의문만이 남겨진 공간 안에 이엘은 다시 입술을 열었다.

    “……하나뿐인 형제가 있어. 생사의 기로에 있고. 어디 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를 위한 거야.”

    “…….”

    “곧 죽어 갈 내 하나뿐인 혈육을 위해.”

    이제 됐어? 이엘은 그 말을 남겨 두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주드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며 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빚지고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었다. 소량의 기름 정도라면 본인이 죽지 않고도 넘겨 줄 수 있을 테지만, 장례용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주드처럼 어린 개체가 아닌 성체에게서만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

    지금은 사라진 장례법이었다. 오헬의 말처럼 각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니면 하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먹이사슬이 완전히 뒤바뀐 지금, 누가 늑대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이의 장례를 치르려다 제 장례마저 치를 텐데.

    “도움이 되지 못하겠네. 빚지는 건 죽어도 싫은데.”

    한숨이 나왔다. 인간들에게 그렇게나 절실히 도움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아무 답례도 없이 떠나는 건 찝찝해서 싫었다.

    “무슨 방법이 없나. 그 정도 양이면 살아 있는 개체에게 얻는다고 해도 꽤 많이 필요할 텐데. 몇 마리 모아서 구해 볼까.”

    에이,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진 소년이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눈을 감으니 어렴풋하게 지난밤 제 몸을 치료하던 호리호리한 남자가 떠올랐다. 이름이 아마 오드였던가.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색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인간이었다. 작열하는 듯한 고통에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오드의 입에서 나온 주문이 저를 치료한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머리와 눈동자 색. 어릴 적, 형에게 넌지시 건너 들은 그 종족과 비슷한 것도 같다. 하지만 분명 멸족했다고…….

    거기다 저 파란 머리는 또 뭐야.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하는 짓은 완전 바보던데. 대체 저 조합은 무슨 조합이야?

    생각을 곱씹던 주드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코를 찡긋거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며 커다란 늑대로 변해 버렸다. 좁아터진 집을 기어가듯 빠져나가는 소리에 제 방으로 들어갔던 이엘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주드? 너 갑자기 왜……,”

    “형이 왔어!”

    “뭐? 네 형이?”

    찾으러 온 건가? 이렇게 벌써? 괜히 밀려오는 불안에 손이 떨렸다. 이엘의 뒤로 밀로와 오드가 차례대로 나왔다. 커다란 늑대로 변한 주드를 쳐다보며 밀로가 이엘을 제 뒤로 감췄다. 주드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서부터 흔들리는 수풀을 노려봤다.

    이 냄새는……!

    “너희는 집 안으로 들어가.”

    “하지만……,”

    “폐하도 오셨어.”

    “폐하……?”

    “폐하는 인간을 싫어하셔.”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모양이다. 하필 주드가 왕과 관련 있는 자였다니. 오드는 제 이마를 짚으며 서둘러 이엘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엘은 그 자리에 서서 주드를 쳐다볼 뿐이었다.

    뭐 해?! 빨리 들어가! 주드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다른 건 몰라도 폐하까지 오시면 달리 막을 방법이 없다. 어째서 폐하께서 손수 오신 거지?! 주드도 꽤 당황했다.

    “혹시 노아 님을 말하는 거야?”

    “폐하를 알아?!”

    깜짝 놀란 주드가 이엘을 향해 소리를 칠 때였다. 한기를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얼음이 바닥을 뚫고 세차게 들이닥쳤다. 주드를 지나쳐 세 사람이 있는 곳까지 엄청난 속도로 뻗친 얼음을 오드의 결계로 겨우 막아 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된 결계를 치지 못한 오드가 비틀거리는 새에 다시 한 번 공격이 닥쳤다. 이번에도 오드는 온전치 못한 결계로 겨우 막아 냈다.

    “형! 무슨 짓이야!”

    “주드? 너 괜찮냐?!”

    그 목소리와 함께 어두움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이 이는 것처럼 순간적인 바람이 불더니 흉흉하게 빛나던 눈동자들 몇이 사람으로 변했다. 개중 앞쪽에 있던 남자가 주드가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달려왔다. 주드도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달려오는 남자에게 뛰어가 안겼다.

    “형!”

    “너 이 자식아!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미안해, 형…….”

    “다친 데는 없냐? 어딜 갔던 거야!”

    “그냥 길을 잃어서…….”

    주드는 이엘과 눈을 마주치며 거짓말을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사냥을 하러 밖에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발을 헛디뎌서 굴러떨어졌다. 강으로 떨어진 뒤에 흘러 내려오다가 정신을 잃은 자신을 저 인간들이 구해 줬더라.

    제법 앞뒤가 잘 맞는 말로 제 형을 구슬리던 주드 덕분에 오드는 안도했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적대적이더니 그래도 은혜는 갚을 줄 아나 보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드의 형은 제 동생의 말을 들으며 그를 품에 안아 올렸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며 주드를 고쳐 안던 남자는 일순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알지도 못하면서 공격을 했구나. 아무리 인간이라도 동생의 은인인데 갑작스런 공격을 가한 것이 미안해진 그는 사과의 말이라도 할 요량으로 인간들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오헬?!”

    남자의 말에 밀로의 등 뒤에 있던 이엘이 오드를 부축하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놀란 건 남자만이 아니었다. 이엘도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앤디 님?”

    “뭐야. 너였냐? 네가 내 동생을 구해 준 거야?!”

    앤디가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엘은 그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앤디의 옆에 나타난 커다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봤던 늑대의 왕. 노아가 정말 이곳에 왔다.

    그는 처음 봤을 때완 다르게 흐트러짐이 하나 없는 옷차림으로 올곧게 서 있었다. 음영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얼굴은 그때 본 그 남자가 분명했다. 노아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그때 그 뱀의 인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천천히 몸을 접고 엎드린 이엘을 따라 오드도 제 지팡이를 내려놓고 바싹 엎드렸다. 밀로만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과 노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밀로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다가 흥미를 잃은 건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아는 저벅저벅 걸어와 엎드린 두 인간 가까이에 멈췄다.

    “고개를 들어라.”

    “예, 폐하.”

    전에 봤을 때는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얼굴이더니 지금은 그래도 낯빛이 좋아 보였다. 생기 있는 표정의 인간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내리깐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처음 봤을 때의 그 호기와 거만한 말투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그동안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것이 고생깨나 하고 세상에 적응한 것처럼.

    노아는 별 흥미 없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다가 투명한 머리카락에 눈을 박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투명한 것은 아니었으나 달빛에 비친 은빛 머리색이 신비로움을 고아냈다.

    “너도 인간이냐.”

    “네, 폐하. 맞습니다.”

    “혹시 네가 주드를 치료해 준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오드는 정성껏 대답했다. 노아는 말없이 잠시간 이엘과 오드를 쳐다봤다.

    “주드를 살려 줬으니 보답을 하지.”

    “…….”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

    이엘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 아까 주드의 입에서 노아의 존재가 나올 때부터 예견한 상황이었다.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그의 비위를 맞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곳에 머무른다고 해도 늑대들의 기름을 얻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늑대들의 소굴로 가는 수밖에.

    “폐하의 성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뭐?”

    “저희를 거둬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노아의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성 안에 인간을 들이는 것 자체가 그에겐 역겹고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

    “폐하. 무슨 일이든 맡겨 주십시오.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

    “하다못해 정원을 가꾸는 일일지라도요.”

    이종족은 섬세하지 못하다. 그 섬세함을 저가 채우겠다, 그건가? 노아는 고개를 옆으로 틀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그 성 안에 인간의 체취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던가. 이제는 어렴풋한 기억마저 사라져 가고 있었다.

    노아는 한참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도록.”

    이엘은 불안한 표정의 오드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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