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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화 (22/488)
  • 22화

    정말 우롱하는 밀로 때문에 소년은 화가 났지만 왠지 저쪽은 이길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본체화를 해서 이 집을 죄 무너뜨리고 싶지만…… 분하다! 인간 따위에게 조롱받다니.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분노 때문에 끅끅 참아 보려 했지만 어린 소년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밀로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쳤다. 악! 소리를 내지르는 밀로에게 조용히 하라며 한 소리를 하고 소년의 앞으로 제 몫의 수프를 밀어 주었다.

    “그래, 우논 님. 지금은 먹는 게 좋아. 네가 우논이어서 회복력이 빠르다고 해도 체력까지 금방 회복되는 건 아니잖아.”

    “너희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부탁할게, 우논 님. 나는 지금 부탁하려고 아부하는 거야, 네게.”

    “…….”

    “이거 먹고 네 무리로 돌아가. 그리고 한 번만 우리를 봐줘.”

    “뭐?”

    “그 암시장을 소탕하는 것까진 좋아. 하지만 이곳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더는 죽이지 말아 줘.”

    이엘의 부탁 아닌 부탁에 훌쩍이던 소년은 눈물을 닦고 그녀를 쳐다봤다. 딱딱하게 굳은 낯의 인간은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살아온 시간은 엇비슷한 것 같은데, 저쪽은 자신과 달리 어른스럽단 생각이 들어 잠시 부끄러워졌다.

    소년은 쓸데없는 눈싸움을 피하며 제 앞에 놓인 수프를 허겁지겁 입에 넣기 시작했다. 평소에 먹던 식사량으론 턱없는 양이었지만 근 이틀을 굶은 처지에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다시 조용해진 식탁 위에 음식이 하나둘 놓였다. 다 기울어져 가는 집이긴 해도 제법 구색이 갖춰져 있긴 했다.

    “근데 오헬. 이쪽은 대체 누구야?”

    습관대로 빠르게 식사를 마친 밀로는 푸른 눈동자로 오드의 곳곳을 훑었다.

    오드는 밀로에게 답하는 대신 이엘을 쳐다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이엘은 맞은편에 앉은 늑대 소년을 감시하듯 쳐다보며 식사를 할 뿐이었다.

    오헬! 밀로의 채근에도 이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오드가 나섰다.

    “나는 오헬의 친구야. 이름은 오드. 반가워.”

    “아, 친구였구나?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밀로야. 돈이 없어서 굶어 죽을 뻔한 걸 오헬이 거둬 줬어. 그동안 내가 저 녀석의 형님 노릇을 좀 했지.”

    해맑게 말하는 밀로를 쳐다보며 오드가 웃었다. 바보처럼 헤헤 웃던 밀로는 동그란 눈을 틀어 이번엔 반대편에 앉은 작은 소년에게 향했다. 거의 접시에 코를 박듯 얼굴을 파묻고 허겁지겁 수프를 들이켜던 늑대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밀로의 시선에 고개를 쳐들었다.

    뭐? 대놓고 인상을 구긴 채 묻는 소년을 보며 밀로가 다시 헤헤 웃었다.

    “이젠 네 이름을 알려 줘야지!”

    “감히 내 이름을 인간에게 알려 줄 것 같아?”

    “그럼 널 어떻게 불러?”

    “하.”

    “늑대야, 우논아, 매번 이럴 순 없잖아.”

    애당초 너 따위가 왜 나를 부르는데?! 늑대 소년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이엘은 식탁에 놓여 있던 남는 고기를 반 잘라 소년의 앞으로 내밀었다. 턱없이 부족한 양 때문에 아직도 배를 곯던 소년은 내키지 않는 척 그 접시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밀로가 빨랐다. 포크로 고기를 콱 찍어 버린 것이다.

    “대답 안 하면 이거 내 거.”

    “뭐?! 이 치사한 인간 놈이!”

    “너를 산 건 오헬이야. 널 치료해 준 건 오드고. 그런데 넌 이들한테 고맙다는 말은 했냐?”

    “뭐? 내가 왜 그런 걸……,”

    “짐승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

    “그리고 서로 통성명하는 건 아주 기본이야.”

    “…….”

    “알겠냐, 꼬맹아?”

    어딘지 모르게 저를 비웃는 듯한 말투에 소년은 기분이 퍽 상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처럼 씩씩대며 소리를 빽 지르진 않았다. 그저 분을 참는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뜰 뿐. 그러고는 여전히 고기 위에 포크를 찍어 누르고 있던 밀로의 손을 거세게 후려쳐, 그 접시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주드.”

    “…….”

    “내 이름은 주드야.”

    살짝 토라진 말투와 함께 주드는 다시 고기를 먹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오드와 이엘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고귀하신 우논 님께서 직접 자신의 이름을 밝힐 줄이야. 이엘은 저도 모르게 터진 웃음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럼 네 이름은 뭔데.”

    “나?”

    “그래, 너. 나를 샀다는 너 말이다.”

    “내 이름은 오헬. 차자라 성은 없어.”

    “왜 나를 산 거야? 왜 나를 구한 거지? 나는 늑대야. 그것도 우논. 살려서 치료해 줄 이유가 없잖아.”

    “너를 모른 척할 이유도 없잖아.”

    “뭐?”

    “그뿐이야. 네가 늑대이든 우논이든,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뱀이었어도, 설령 테르―이종족의 제 3계급―였어도. 난 널 구했을 거야.”

    정말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 감히 인간 따위가, 겨우 인간 주제에 누굴…….

    하지만 분명 저 작은 인간의 도움으로 주드는 살아남았다. 그 철창 안에 갇혔을 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집안 내력으로 능력이 늦게 발현된 터라 통제력이 부족했다. 인간들에게 생포된 뒤로는 집중력이 떨어져 어린 테르들이나 할 법한 실수를 연발했다.

    하지만 오헬 덕분에 자신은 살았다. 창에 찔려 죽을 것처럼 뜨겁던 몸은 다시 온도를 찾아 내려갔다. 두려움에 벌벌 떨던 밤이 지나가고 평온이 찾아왔다. 모든 건 저 작은 인간 남자 덕분이었다.

    밀로의 말처럼 저 인간은 주드에게 생명의 은인이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 할 상대였다. 기사도를 아는 늑대들은 제 목숨을 빚진 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드는 지금, 아주 기본적인 종족의 룰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왜 그래? 더 안 먹어?”

    오헬은 잘 먹다가 말고 저를 뚱하게 쳐다보는 주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 성장기인 것 같은데. 평상시엔 이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먹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할 텐데. 아직 속이 좋지 않나? 별의별 걱정을 하며 주드를 쳐다보았다.

    “속 안 좋아?”

    “내일 아침에 떠나겠어.”

    “그럴래?”

    “그래. 아마 지금쯤 형님이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챘을 거야. 근방을 뒤지기 시작하면 내 냄새를 맡고 마을을 소탕할지도 몰라.”

    “그럼 지금 떠나 주라!”

    “미르.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아직 환자야.”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밀로의 농담에 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마저 하며 이엘을 또 쳐다봤다. 소년의 시선이 느껴져 이엘은 고개를 돌렸다.

    “왜 쳐다봐?”

    “고마워.”

    “뭐?”

    “……살려 줘서 고맙다고.”

    어린아이에게서 듣는 고맙다는 말에 이엘은 헛웃음이 터졌다. 비록 퉁명스럽고 서투른 사과였으나 붉어진 귓불이 소년의 진심을 방증하는 듯했다.

    저녁이 되니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이엘은 낮에 오드와 함께 전에 살던 지하에 다녀왔다.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한 약을 보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혼자 잠들어 있을 이온의 안위가 걱정된 탓이 훨씬 컸다.

    오드가 혼자 가도 된다는데도 굳이 쫓아가겠다며 함께 향했다. 제 두 눈으로 이온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다행히 이온의 상태는 한 달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숨은 붙어 있으나 미약했고, 성장은 했지만 생기는 없었다.

    “서둘러 재료를 구해야겠어.”

    “그래. 하지만 네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란 걸 잊지 마, 이엘.”

    단숨에 쓴 약을 마신 이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오드의 팔을 붙잡았다. 오드는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천장을 지팡이로 여러 번 두드려 주문을 외웠다. 땅 위로 올라왔을 땐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이엘은 달빛을 맘껏 느끼며 깊게 호흡했다.

    땅 위에서 고작 한 달을 살았다고 땅 아래에서 숨 쉬는 게 버거웠다. 평생의 반을 땅 아래서 살았고 겨우 한 달 남짓 공기를 마셨을 뿐인데, 그새 공기 없는 게 고통이 되었다니. 당연한 사실인데도, 그 작은 변화가 괜히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버리듯 땅 아래에 두고 온 제 하나뿐인 혈육의 존재가.

    “어디 다녀와?”

    집 안을 구경하고 있던 주드는 들어오는 이엘과 오드를 못내 반겼다. 밀로와 단둘이 몇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얼마나 어색하고 찝찝하던지. 한시라도 빨리 이엘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오드는 구역질을 참는 이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제 방으로 먼저 돌아갔다. 이엘은 주드를 본 척 만 척 지나쳤다. 입 안에서 여전히 쓴맛이 나는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달려가 여러 번 헹구기 바빴다.

    “……어디 아파?”

    주드는 아닌 척하면서도 이엘을 계속 따라다녔다.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아이를 힐끔 돌아보며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으니까 너도 들어가서 자.

    억지로 제 등을 떠미는 이엘 때문에 주드는 기분이 상한 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다가 힘을 써서 이엘의 손을 쳐 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외견이 이따위여도 너랑 나이는 비슷하다고.”

    “미안. 알았으니까 그만 좀 들어갈래? 너랑 맞장구치면서 장난칠 기분 아니야.”

    “왜 늑대의 기름이 필요한 거야?”

    “너…….”

    “다 들었어. 아무리 의식을 잃어도 안 들렸을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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