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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화 (21/488)
  • 21화

    그제야 오드는 이엘의 눈에 서린 두려움을 읽었다. 제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땅 위로 나오자마자 우논과 엮이다니. 게다가 그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저 커다란 남자도 마음에 걸린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순한 얼굴인데도 오드의 예민한 감이, 좋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오드!”

    “알겠어, 알겠어. 우선 여길 벗어나자. 우논이 여기 잡혀 있었다는 말이 들리면 여기도 곧 매장되겠구나. 다른 곳으로 가자.”

    오드는 지팡이를 들고 쉴 새 없이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신과 그의 언어가 얼마간 지속되는 동안에도 이엘은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밀로는 그런 이엘에게 괜찮을 거라며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그 순간 오드의 지팡이가 땅을 내려치며 네 사람은 순식간에 암시장이 있던 지하를 벗어났다.

    *

    “약속해. 다음부턴 절대로 우논과 엮이지 않겠다고.”

    “알겠어. 그럴게, 약속해.”

    그녀의 다짐을 듣고 나서야 오드는 안심했다.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이엘만큼이나 오드도 애간장이 탄 채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을 가지러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괴로워하던 이엘이 사라져 버렸다. 근처에 그녀가 있었던 흔적까지 모조리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알 방법이 없어 애가 탔다.

    오드는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냄새로 간신히 뱀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뱀의 영지로 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곳은 너무 사악한 기운이 머무는 곳이라 오드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걸 견디며 가까스로 영지 근처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그쪽도 한차례 소동을 일으키고 간 ‘인간 소년’을 찾기 위해 수색 중이었다. 오드는 아마 탈출에 성공한 거라 짐작하고 그녀가 갈 만한 곳을 침착하게 골랐다.

    타이곤은 찾기가 어렵고, 독수리는 둥지가 높은 곳에 있을 테니 아마도 늑대의 소굴. 특히 달에 한두 번 열리는 암시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서둘러 암시장에 도착했던 것이다.

    “오헬. 건강하게 지낸 거니? 그동안 대체 어디서 뭘 하며 지낸 거야.”

    “말하자면 길어. 우선은 밀로 재우고 나올게.”

    “밀로? 저…… 남자? 여태 저 남자랑 지냈던 거야?”

    “응. 저래 보여도 착해. 잠깐만 기다려 줘, 오드. 나와서 얘기하자.”

    “그래.”

    오드의 눈엔 위험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엘의 말은 잘 듣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이엘의 말에 순순히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밀로는 방긋 웃으며 오드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얼결에 손을 마주 흔들어 준 오드는 이엘과 밀로, 그리고 잠든 우논 늑대 소년까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이었다. 그녀의 넓었던 황궁과 대비되는 곳을 바라보며 씁쓸함을 삼켰다.

    걱정 어린 오드의 시선은 암시장이 있는 방향에 닿았다. 걸쳐 있기는 해도 분명한 늑대의 영지 안이다. 냄새를 잘 맡는 늑대들의 눈을 피해 암시장을 연 걸로도 모자라 늑대 우논을 생포하다니. 자신이 치료해 주었으니 저 우논이 정신을 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우논은 동료를 모아 보복을 하겠지.

    오드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 어린 우논 늑대를 살려 두면 머지않아 3차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 겨우 살아남은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땐 정말 인간이라는 종족의 씨를 말려 버릴지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사이에 또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구나. 혀를 차며 골머리를 앓았다.

    “오드. 잠깐 걷자.”

    “그래, 나의 엘.”

    다리를 절뚝이며 집에서 나온 이엘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 늑대를 치료해 주면서 부목을 대고 있던 이엘의 다리도 함께 치료해 주었지만, 꽤 오랜 시간을 방치해 둔 탓에 치료를 해도 엉망이었다. 원래도 좋지 않은 다리였으니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

    상당히 아팠을 텐데도 이엘은 티 내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밀로가 이엘의 다리도 치료해 달라며 손가락질을 하기 전까진 오드도 몰랐으니까.

    기특하게도 저 없는 새에 적응은 제법 잘한 모양이었다. 이걸 두고 기특하다고 말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오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땅 아래 생활보다 더 열악하고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엘의 뺨에는 생기가 물씬 묻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에겐 땅 위의 공기가, 태양이, 그리고 달이, 그 모든 게 이로웠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늑대들의 영지에 머물고 있었던 거야. 기름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암시장에선 얻을 수 없었나 보구나.”

    “응. 그쪽은 방법이 전혀 없네.”

    “저 우논은 기름 때문에 데려온 거니?”

    “그럴 리가. 어린 개체는 기름의 양이 턱없이 부족해서 소용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작은 웃음이 섞인 이엘의 목소리에 오드도 마주 웃어 주었다. 농담이 오갈 정도로 상황이 진정됐다. 이엘은 달빛을 등지고 오드와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탄광지의 일로 손끝이 죄 거뭇해진 제 손가락을 내려보며 이엘이 웃었다. 그녀는 그간 겪었던 모든 일을 오드에게 다 털어놓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충격의 연속이었어.”

    “이엘.”

    “이렇게까지 황폐하게 변해 있을 줄은 몰랐거든.”

    미치광이 아비가 벌인 일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인간들의 삶만 망가진 게 아니라 대륙 전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비옥했던 토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으며 이종족은 자연에 순응할 뿐, 고치거나 건축할 마음 따윈 없어 보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삶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마치 죽기만을 기다리며 억지로 생을 이어 가는 것처럼.

    그나마 암컷을 만든다는 명분을 운운하는 뱀족과 그 외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저 숨 쉬는 대로 흘러가며 살아갈 뿐이었다.

    “이온을 황위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이엘.”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니까. 내 백성은 아닐 테니까.”

    이온이 다시 제국을 건국하고 황위에 오르면, 자연히 자신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그게 답이었다. 자신은 그러기 위해 태어난 거였으니까.

    ‘그’의 미혹과 협박에 넘어갔던 것은, 반절은 제 의지이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앞으로의 미래 따위,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지 않은가. 내가 왜 이온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하는가.

    신이 사랑했다던 이 땅의 모습이 사라져도 나와는 관계없잖아. 라고.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

    “밀로는 전쟁으로 어릴 때 부모를 잃었대. 이 근방에는 그런 아이들이 넘쳐나. 심지어 매음굴에 팔려 간 아이들도 있어. 나는 오드, 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이곳엔 나보다 더 극악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아. 그들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전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파멸시킨 건 황족과 그의 측근들이었다.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친구를 잃었고 가족을 잃었을 뿐이었다.

    모든 건 욕심 많은 제 아비의 폭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모든 인간과 이종족에게 돌아갔다. 한쪽은 무지와 방관으로, 또 다른 한쪽은 어리석은 복수심으로. 그게 죄목이 되어 폐허가 된 터전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약자는 휩쓸리고 떠밀려져 책임만 져야 하는 위치였다.

    이곳은 허무할 정도로 희망이 없는 곳이다. 오히려 삶을 끝내는 게 더 편한 미래 같았다. ‘목소리’가 저를 이용해 망가뜨리지 않아도, 이곳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는 중이었다.

    “이엘.”

    “응, 알아. 저 늑대 아이를 죽여야 하는 거지?”

    “모든 건 네 뜻이야. 네 의지고.”

    “네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 거야?”

    “글쎄.”

    오드는 늘 그렇듯 해답을 주지 않았다. 이엘은 마른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곳에서 구하면 안 됐던 걸까? 오지랖 넓게 쓸데없는 일을 벌인 건 아닐까. 저 아이를 풀어 주면 이 지역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10년 전처럼 늑대들에게 무참히 짓밟히지 않을까.

    턱수염은 밀로의 협박에 못 이겨 아이를 보내 주었지만 이엘이 기름을 얻고 아이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아이를 살려 보내면 인간들이 또 죽는다. 죄 없는 사람들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나의 엘. 괜찮아. 일단은 들어가서 좀 쉬는 게 좋겠어.”

    이온. 네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

    “잠깐.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시끄러워! 다가오지 마!”

    이마를 짚으며 이엘이 탄식을 내뱉었다. 저 멀리 스푼을 입에 물고 있던 밀로는 키득키득 웃고 있을 뿐이었고 오드는 식사가 담긴 그릇을 든 채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진정해, 일단. 어린아이 타이르듯 어르는 말투에 소년은 씩씩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집을 허물어 버릴 것 같은 태세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그럼 아침도 안 먹을 거야?”

    “그래! 네놈들을 어떻게 믿고 그런 걸 먹겠어?”

    “좋아. 그럼 먹지 마. 네가 한 말이니까 책임져.”

    “흥.”

    이엘은 잔뜩 경계하며 날을 세우는 우논 소년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았으면 버티고 악을 쓸 게 아니라 밥이라도 먹어야 할 것 아냐. 겉나이처럼 철없이 행동하는 우논 소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우논은 성장이 느리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어린 소년이라 할지라도 실제 살아온 나이는 이엘과 비슷하거나 더 많을 터였다. 자신은 저 소년의 겉나이만 한 나이일 때도 저렇게 철없이 굴지 않았다.

    물론 저렇게 고집을 부릴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앞뒤 안 가리고 씩씩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제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건 저쪽이 아니던가.

    이엘은 동정 어린 시선을 떼고 소년에게서 완전히 등을 졌다.

    소년은 이 허름한 집 안에 놓여 있던 유일한 무기인 가느다란 장대를 손에 움켜쥐고 씩씩거리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곤 식탁 근처로 모여든 인간들을 예의 주시했다.

    체구가 작아서 소년에 가까운 남자와 덩치가 커다란 남자, 그리고 호리호리하고 마른 남자. 저 키가 큰 남자만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 텐데……. 본체화를 할까? 그러면 이 집은 무너지겠지? 혼란이 생긴 틈을 타서 잽싸게……,

    꼬르르륵―

    우레 치는 듯한 소리였다. 우논 소년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아침을 먹고 있던 밀로는 푸하하! 큰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밀로는 곧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소년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했다. 쟤 봐 봐! 뻗대다가 배에서 소리 난다! 그의 목소리에 오드도 작게 웃었다.

    소년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고 있었다. 창피해! 속으로는 끙끙 앓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씨근덕거렸다.

    “봐. 배고프지?”

    “…….”

    “그만 버티고 와서 먹어. 널 비싼 값에 산 내 체면도 좀 봐줘.”

    “너…… 너! 내가 그런다고 시키는 대로 할 줄 알아?! 감히 우논을 우롱해?”

    “말은 바로 하자. 나는 널 우롱한 적 없고 네게 뭔가를 시킬 마음은 더더욱 없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으면 네 무리로 가. 우린 널 치료해 줬을 뿐, 네게 어떤 족쇄도 채우지 않았다고.”

    다소 냉소적인 이엘의 목소리에 소년은 점차 씩씩거림을 죽여 나갔다. 소년은 차가운 표정의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흥! 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걸어와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허름한 곳에서 인간 따위의 음식은 먹고 싶지 않지만 살아남기 위해 먹는 거야. 자기 위로를 하며 식탁에 올라온 고기를 가져가 먹기 시작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갬히 인걘 때위걔!”

    “너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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