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아무래도 황궁을 털었다는 저놈의 것이 탐이 나긴 했다. 그대로 보내기는 아쉬워 턱수염이 이엘과 밀로를 향해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턱수염은 소리를 낮추며 두 사람을 끌고 조금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몇 번의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검은 천이 둘러져 있는 곳이었다. 그렇잖아도 지하에 있어서 음습하고 눅눅했는데 온통 새까만 공간으로 들어오니 괜히 기분이 더 나빠졌다.
미간을 찌푸린 이엘은 밀로가 잘 따라오는지 계속 확인하며 턱수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좁고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찝찝하고 더러운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소름 끼치는 기운도 느껴졌다.
꼭 뭔가 나올 것만 같은…….
쾅―! 그때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움찔 놀란 이엘은 본능적으로 밀로의 손을 움켜쥐었다. 정말 제 형인 것처럼 저를 챙기는 이엘을 보며 밀로가 작게 웃었다. 밖에선 내가 형인데 여기선 네가 형이야? 그의 작은 속삭임에 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밀로는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가는 이엘의 작은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저를 잡은 이엘의 손을 당겼다.
“오헬. 더는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도 느껴져?”
“응. 느낌이 안 좋아. 그만 들어가자.”
“아니.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어. 뭐가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그래. 네가 원한다면.”
후회해도 난 몰라. 답지 않게 제법 진지한 밀로의 말에도 이엘은 턱수염의 뒤를 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들어갔을까. 쾅쾅거리는 소리가 이젠 쉴 틈 없이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동굴처럼 이루어진 공간이라 작은 소리도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하지만 소리가 계속 커지는 걸로 보아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참고로 저 녀석은 황금을 바가지로 갖다줘도 팔지 않을 거다.”
“저 녀석이라니 무슨…… 아…….”
덜덜 떨리던 손이 줄곧 붙어 있던 밀로에게서 떨어졌다. 이엘은 기나긴 터널을 지나쳐 들어온 공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지하 암시장에 더 깊은 지하.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곳을 가득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커다란 철창에 갇힌 늑대는 울부짖으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몸을 잔뜩 부풀리며 짐승의 울음소리로 포효하고 있었으나 철창을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몸 곳곳에 박힌 창으로 인해 철창 주위는 피 웅덩이가 잔뜩 고여 있었다.
늑대는 울부짖으며 철창에 제 몸을 몇 번이고 갖다 박았다. 그로 인해 창들이 계속해서 늑대의 몸 안을 파고들었고 그럴수록 늑대는 사납게 포효하기를 반복했다.
아우우―! 늑대의 울음소리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안에 실린 감정만큼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엘은 참혹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채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턱수염은 그런 이엘을 쳐다보며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겨우 잡은 우논이다.”
“우논이라고요……?”
“그래. 1계급, 우논.”
이종족에는 계급이 있다.
첫 번째 계급은 ‘우논’이라 불렀으며, 며칠 전에 봤던 로빈이나 노아처럼 인간의 모습과 본체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계급을 말한다. 계급에 따라 그 힘과 능력이 커지기 때문에 제 1계급은 보통 왕족 혹은 귀족인 경우가 많았다.
즉, 우논은 지배 계층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계층이란 소리다.
두 번째 계급은 ‘둔’이라 불렀으며, 1계급 우논과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개체들만을 말한다. 선조에서 피가 섞인 혼혈과는 좀 달랐다. 둔은 성체가 되는 나이에 인간이 될지, 이종족이 될지 선택하게 되는데 필요에 따라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선택했다. 그리고 인간을 택한 둔들은 20년 전 학살에 휩쓸려 대부분 죽어 버렸다.
세 번째 계급은 ‘테르’라고 불렀으며, 인간의 모습은 될 수 없고 오직 본체의 모습만을 갖는 계급이었다. 계급에 따라 갖고 있는 고유의 힘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서열은 당연히 테르가 가장 낮았다. 간혹 테르들 중엔 인간들보다 힘이 약하거나 능력이 발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전에도 쉽게 사냥되거나 거래되곤 했다.
그런데 가장 약한 계급인 테르도 아니고 우논이라고? 인간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한 현재, 그 현 체제의 먹이사슬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계급이 우논이었다. 그 우논을 잡았다니……. 이엘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턱수염을 쳐다봤다.
“생포하기 어려웠지.”
“여긴 늑대들의 영토예요. 아까 늑대들은 냄새를 잘 맡으니 위험하다고……,”
“여긴 대대로 개미들이 쓰던 땅굴이다. 바로 옆방이 새끼를 까던 여왕개미가 머물던 방이기도 하고. 비록 20년도 전에 폐쇄된 곳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영역 냄새가 강하지. 일부러 암시장을 이런 곳에 잡은 이유기도 하단다, 꼬맹아.”
“너무…… 비인도적이지 않나요? 어떻게 저런 취급을……,”
“비인도? 지금 비인도적이라고 했냐?”
턱수염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튀어나온 배까지 잡으며 폭소했다. 우리 처지에 무슨 인도적인 것을 바라? 우리가 인도적인 취급을 못 받는데. 턱수염의 말에 이엘은 항변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날뛰던 늑대는 제풀에 지쳐 혀를 밖으로 내민 채 기운 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앞으로 가려던 이엘을 잡은 건 줄곧 조용히 서 있던 밀로였다.
“안 돼, 오헬. 그만 돌아가자.”
“하지만……,”
“더 이상 깊게 관여하면 네가 있을 곳이 사라져.”
“…….”
“내가 우리가 살 곳을 찾아 준다고 했잖아. 우논은 위험해. 신경 쓰지 마, 오헬.”
그의 말이 맞다. 우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쩌면 이 암시장도 곧 사라질지 모르겠다. 저 우논에게 가족이라도 있다면……. 아니. 늑대의 왕인 노아가 알게 되기만 해도 이곳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테르도 아니고 감히 우논을 잡다니.
이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밀로의 말처럼 물러나야 할 때이다. 지금은 저런 늑대 따위에 온정을 베풀 시간이 없다.
“사, 살려 주세요…….”
늑대가 순식간에 어린 소년으로 돌아갔다. 끽해야 열 살 언저리쯤 되어 보이는 어린 꼬마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커다란 늑대의 몸 위에 박혀 있던 무수한 창들이, 이젠 어린 소년의 등 위로 빼곡하게 박혀 있다. 피를 토해 내며 어린 꼬마가 된 늑대는 잔뜩 쉰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위로 어린 날의 이온이 겹쳐 보였다. 오드와 함께 달려왔으나 이미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던 그 어린 날의 이온이…….
“얼마예요?”
“하하. 이봐, 내가 아까 한 말 기억 못 하나? 저건 파는 게 아냐.”
“얼마예요.”
“꼬마야. 저건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야. 우논을 사로잡기 위해 우리 쪽도 목숨을 걸어야 했거든.”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철창이 흔들렸다. 대화를 들은 소년이 마지막 힘을 다해 철창을 흔들며 일어서고 있었다.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저것도 얼마 못 갈 터였다. 이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건 어때요?”
그녀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황녀에게만 주어진 붉은색 루비 반지였다. 붉은 루비가 화롯불에 반사돼 빛이 나자 턱수염의 눈동자가 밝아졌다. 루비?! 그의 외침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땅속에서 나올 때 갖고 나왔던 귀중품 중 남자의 환심을 살 만한 것으로는 이것만큼 적합한 게 없었으니까.
“황녀의 루비 반지로 알려져 있죠.”
“이렇게 귀한 것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돈이 될 만한 건 다 들고 나왔으니까요. 어떻습니까? 이제 거래하실 마음이 생기셨나요?”
“흠. 글쎄, 아직은 좀.”
“이봐, 아저씨. 그쯤 하지?”
불량배처럼 헐렁하게 서 있던 밀로가 성큼성큼 걸어와 이엘의 손에서 루비 반지를 빼서 턱수염의 앞으로 내밀었다. 받고 그만 풀어 줘. 그의 목소리에 턱수염이 헛기침을 했다.
멀리 서 있을 땐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혼혈도 아니란 놈이 눈빛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만들고 있었다.
흠흠, 그래 뭐…… 루비라면 말이 다르지. 마음 같아선 밖에 대기시켜 놓은 경비들을 불러서 루비만 빼앗고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턱수염은 일단 한 보 물러나기로 했다. 아마 경비들 중 저 기골을 이길 놈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작은 쪽도 아까 보니 싸움깨나 하는 놈인 것 같고.
결국 밀로의 위압감에 질린 남자가 철창에 다가가 무언가를 잔뜩 누르며 우논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이봐. 꼬맹이. 너 이 녀석을 달라는 이유가 뭐야.”
“보면 모르세요? 우논이라면서요. 늑대로 변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늑대의 기름을 얻기 위해서 달라고 하는 거냐?”
“네. 당연하죠.”
“그럼 기름만 얻고 바로 죽여라. 이 녀석 성질이 보통이 아니야. 여길 빠져나가면 공격할지도 모른다. 아직 각성 전인 건지 힘을 쓰진 못하지만 얕볼 순 없다.”
턱수염은 마지막 문을 열기 전, 들고 왔던 마취 총으로 울부짖는 늑대 꼬마의 등을 쐈다. 철창에 매달려 간신히 버티던 꼬마는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지더니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이엘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밀로가 냉정하게 그녀를 막아 세우고 검지로 제 입에 대며 고개를 저었다. 쉿, 그래서는 안 돼, 오헬. 위험하다고. 그의 목소리에 이엘은 주먹을 꾹 쥐며 숨을 참아 냈다. 그래……. 여길 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 그게 우선이야.
“그럼 좋은 재미 보라고.”
남자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이엘과 밀로는 암시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밀로의 품 안에 잠든 어린 남자아이는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고 이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리 우논이라고 해도 이렇게 어린아이를 대체……. 피를 너무 많이 흘린다. 어떻게 해야……,
“이……, 아니. 오헬?”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던 이엘이 시선을 옮겼다. 푸른색 로브로 얼굴을 잔뜩 가리고 있던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후드를 벗었다. 오헬! 그가 달려와 기쁜 낯으로 이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동시에 이엘의 눈에도 눈물이 터져 흘렀다. 잔뜩 긴장하고 지냈던 긴 시간이 이제야 끝이 난 것이다.
오드와 만났다.
“오드!”
“오, 나의 엘. 잘 지냈나 보구나. 정말 다행이야.”
“오드, 너 대체 어디서…… 아니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오드, 저 아이를 치료할 수 있니?”
“세상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급해. 상처 치료가 우선이야.”
“잠깐…… 우논 아니야?”
“…….”
“안 돼, 오헬. 우논과 엮여서는 안 된다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이가 다쳤어. 피가 흐른다고!”
“오헬. 우선 진정을……,”
“이온처럼 되면 어떡해, 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