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엘이 암시장을 알아낸 건 탄광지의 중년 남자들에게서였다. 그들은 모였다 하면 낄낄거리며 시답잖은 농지거리 따위나 했는데 그저께 그들에게서 예상외의 소득을 얻었다.
달에 한 번, 지하에서 이종족의 눈을 피해 암시장이 열린다는 이야기였다.
“여기는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야?”
“응. 미르, 조심해야 돼. 너는 키나 덩치가 크니까 오해받을 수 있어. 내 말 알아들었지?”
“뭘? 내가 뭐로 오해를 받는데?”
“여긴 밀매가 이루어지는 곳이야.”
“밀매?”
“그래. 이종족을 밀매하는 곳이라고.”
밀로의 눈이 일순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엘은 처음 보는 밀로의 표정에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내 평소처럼 돌아온 밀로는 헤실거리며 그 커다란 손으로 이엘의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그러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사람들이 여기서 이종족을 판다고? 밀로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 정확히 말하면 이종족의 사체나 물건을 파는 거지만. 그밖에도 우리가 예전에 쓰던 물건도 판다고 했어. 여긴 이종족들이 알지 못하는 곳이거든. 출입증이 없으면 절대 들어올 수 없다나 봐.”
“그럼 우리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위조했지.”
낮에 치근덕대던 그 변태 놈을 후려치면서 주머니에서 몰래 출입증을 빼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기 같은 건 사용할 수 없는 곳이라 출입증엔 직인을 비롯한 간단한 신분 확인 정도만 적혀 있었다. 이렇게 허술하면 이종족이 눈치채는 것도 시간문제겠지만.
다행히 사람이 꽤 몰린 시간이라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었다. 다만 밀로의 커다란 키가 눈에 띄는 터라 지나가는 곳마다 이엘과 밀로를 향한 시선이 따갑게 닿았을 뿐.
확실히 두 사람은 눈에 띄었다. 아무리 후드로 덮어쓰고 가리고 있다지만 커다란 키와 작은 체구까지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이엘은 여자치고 큰 키였지만 성인 남자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반면 밀로는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키가 컸지만 무엇보다 그 덩치가 위압적이었다. 상대를 짓누를 듯한 압도적인 분위기로 인해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꼬맹이가 제법 값이 나가는 걸 가져온 모양이군.”
“비켜 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얘는 제 동생입니다. 인간이라구요.”
“흠. 전혀 믿기지 않는구나, 꼬맹아. 못해도 최소 혼혈이야, 저 덩치는.”
“비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후의 일은 저도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이엘의 협박에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밀로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웬만하면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터라 이엘은 밀로의 손을 붙잡고 옆길로 새려고 했다. 그러나 호리호리하고 주근깨가 달라붙은 남자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뒤에 서 있던 4명의 장정들에게 손짓을 하며 밀로를 가리켰다. 이엘은 본능적으로 밀로를 뒤로 감싸 밀쳐 냈다.
그렇잖아도 혼혈로 오해받는데 저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 주먹이라도 휘둘렀다간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 턱뼈가 죄 날아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지. 여길 오늘 하루만 올 것도 아닌데. 상황 파악이 안 된 밀로를 완전히 제 뒤로 감쌌다.
결국 이엘은 옷 안쪽에서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를 꺼내 들었다. 성치 않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억누르며 짧게 심호흡했다. 한 손으로 막대를 홱홱 돌리던 이엘은 순식간에 가벼운 발돋움을 하며 웃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배를 잡고 웃고 있다가 난데없이 달려오는 작은 소년을 발견한 남자들이 서둘러 검을 휘둘렀지만 역부족이었다. 뾰족한 막대가 푹푹 몸을 찌르고 지나갈 때마다 추풍낙엽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검에 비하면 그렇게 큰 흉기도 아니었는데 어찌나 발이 날래던지, 눈이 발견하고 손을 뻗었을 땐 이미 자신의 몸뚱어리가 바닥에 넘어진 뒤였다. 쓰러진 남자들은 피가 쏟아지는 부위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이엘은 작은 체구를 활용해 이리저리 달려드는 공격을 피하며 손쉽게 남자들에게서 검까지 뺏었다. 그러나 심해지는 통증까지 무시하진 못했다. 별것 아닌 일이었음에도 이마 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이엘은 고통을 삼키고 쓰러진 남자들을 차갑게 내려봤다.
“분명 제게 책임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너……!”
“어차피 여긴 목숨이 달아나도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면서요. 계속하시겠어요?”
구질구질하게 제 발목을 잡아채려는 남자의 얼굴까지 뒤로 돌며 발로 후려친 이엘이, 빼앗은 검으로 바닥에 엎드린 남자들에게 바싹 갖다 댔다. 무리하게 가격한 탓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지만, 그 또한 빠르게 갈무리했다.
끝까지 하실래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살벌한 말을 잘도 하는 소년을 보며 구경꾼들이 헛기침과 함께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요새는 어린놈들이 더 무섭다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자자. 그만하면 됐다.”
뒤에서 박수 치는 소리와 함께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동시에 제 발 아래 엎어져 있던 남자들도 서둘러 몸을 추스르더니 그쪽으로 와다다 달려가 버렸다. 이엘은 차분하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로 돌렸다.
“아저씨가 여기 대장인가 보군요.”
“그래, 꼬마야. 소란이 났길래 와 봤더니 어른들에게 참 무례하구나.”
히죽 웃으며 턱수염이 난 남자가 이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엘의 배짱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입맛까지 다시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려고 하자, 뒤에 멀찌감치 서 있던 밀로가 알아채고 이엘의 옆으로 다가왔다.
턱수염 난 남자의 시선이 자연히 이엘에게서 밀로로 옮겨 갔다. 비상한 키와 다부진 몸을 바라보며 남자가 조금 전보다 욕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너희 아주 재밌는 놈들이구나.”
“거래를 하고 싶은데요. 어때요?”
“어린놈이 간도 크구나. 너 어디 출신이냐?”
“레타 출신입니다.”
“저놈도 레타 출신이야?”
“네. 제 동생이에요.”
“뭐? 네가 동생이 아니고?!”
“네. 제가 친형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닮고 동생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그래도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제법 농치는 법을 배웠다. 능구렁이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빠져나간 이엘은 서둘러 턱수염을 장내 밖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술렁이던 장내를 힐끔 돌아보던 턱수염이 밀로를 향해 검지를 까딱거렸다. 이엘의 눈을 쳐다보던 밀로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흠……. 제법 쓸모 있게 생겼구나. 밀로의 곳곳을 쳐다보던 턱수염이 만족한 건지 금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들어주실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저놈을 판다면 말이다.”
“아뇨, 동생을 팔려고 데려온 게 아닙니다. 말씀드렸지만 제 동생은 완전한 인간이에요. 사고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럼 나와 뭘 거래하고 싶다는 게냐?”
“듣자 하니 새로 터를 알아보고 계신다면서요. 제가 그 자금을 넉넉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네가? 레타 출신인 네가 무슨 능력으로?”
“10년 전, 그 불타는 황궁을 알고 계십니까?”
“황궁이라……. 그래. 우리에게도 황궁이 있던 시절이 있었지.”
“레타는 철저하게 버려진 곳이라 저희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피해 제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곳이 근원지인지도 모르고요.”
“그럼 그날 황실에 들어갔다던 게, 네놈들이구나?”
“네, 알고 계셨군요. 거기서 가져온 것들이 꽤 됩니다.”
구미가 당긴 것인지 턱수염이 제 턱을 쓸며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엘은 가슴 한편에 묻고 살았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탓에 주먹을 꾹 쥐며 울화를 참았다. 모두에게 버려진 불타는 황궁에서 유모와 함께 울기 바빴던 이엘이 마주한 건 황실기사단이 아닌 레타의 도적들이었다.
버려진 땅, 빈민가 레타에서 도망친 그들은 제도로 달려와 노략질을 시작했다.
이엘은 그날의 고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 겁에 질려 유모와 함께 도망치던 그녀는 옥탑까지 그들을 피해 도망을 쳤다. 종내에는 유모마저 창에 찔려 죽고, 살아남은 건 유모의 몸뚱이를 안고 우는 저 하나뿐이었다.
아냐. 아니야, 괜찮아. 잊어버려. 잊어버리자……. 나쁜 기억은 되도록 떠올리지 말자.
“좋아. 레타 출신이라면 흔쾌히 허가한다. 벼랑 끝에서 도적질을 하는 놈들은 믿을 만하거든.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늑대들의 기름입니다.”
“뭐? 늑대들의 기름이라고?”
“네. 여기선 구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런. 어디서 잘못 들었나 보군. 우린 기름은 취급하지 않는다. 안타깝구나.”
“어째서죠? 왜……,”
“이 암시장은 늑대들의 영토에 걸쳐 있다. 혹여 늑대 놈들이 냄새라도 맡을까, 늑대들의 것은 절대 취급하지 않아.”
“하지만 분명……!”
“꼬맹아. 다른 건 어떠냐. 용의 심장 같은 것 말이다.”
“풉! 푸하하!”
갑자기 터진 밀로의 웃음소리에 턱수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덩달아 이엘도 인상을 쓰고 밀로를 쳐다봤다. 한번 터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모양인지, 밀로는 낄낄거리며 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아이고, 나 죽네! 커다란 덩치가 바닥에서 뒹구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그만해, 밀로! 이엘의 고함에도 밀로는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닦아 내기만 할 뿐,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만 웃어, 밀로.”
“웃기잖아. 어떻게 안 웃어?”
“대체 넌 뭐가 웃기다는 게냐.”
“아니, 웃기잖아요. 용의 심장이라니! 용은 허구의 종족이에요. 동화책에나 나올 얘기를 하네, 이 아저씨는?”
샐샐 웃는 꼴이 약 올리는 것 같아서 턱수염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로는 낄낄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엘이 밀로의 등짝을 세게 후려치고 나서야 그 망할 웃음이 멈췄다. 한 번만 더 웃으면 죽을 줄 알아. 이엘의 으르렁거림에 밀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꼬리를 내렸다. 미안해, 나의 엘∼, 그렇게 말하며 샐쭉 웃는 모습을 보니 한 대 더 후려칠 걸 그랬다.
“동생이 버릇이 없구나.”
“오냐오냐 자라서 그래요. 부모님이 편애하셨거든요. 아무튼 늑대의 기름은 여기서 구할 수 없단 얘긴가요?”
“그래. 네가 말한 그 기름이란 게 살아 있는 늑대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거라면 말이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네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늑대들의 영지에 걸쳐 있으니 분명 여기서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다른 영지의 암시장에 가거나 직접 늑대에게서 구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직접 늑대에게 구하는 건 어렵다. 살아 있는 늑대와 대치해야 하는 상황을 각오해야 하니까.
“아, 참. 그러고 보니 그놈이 있었지.”
“네? 그놈이요?”
“쉿. 나를 따라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