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8화 (18/488)

18화

“미르.”

“와, 이거 되게 신기하다.”

“밀로!”

그제야 밀로의 시선이 제 쪽으로 향했다. 오헬? 화났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이엘 가까이 다가온 밀로가 품에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덥석 내밀었다.

하얀 꽃 한 송이였다. 화가 났던 이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고작 며칠 봤다고, 밀로는 그녀의 약점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꽃을 건네받으려던 이엘의 손을 지나친 밀로는 그 꽃을 그녀의 귀 뒤로 꽂았다. 역시 꽃과 인간은 참 아름다워. 그의 헛소리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꽃을 빼 제 손에 내려놓았다.

“꽃 함부로 꺾지 말라고 했잖아.”

“땅에 떨어져 있던 거야. 괜찮아.”

밀로는 시원스레 웃으며 이엘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우, 너무 매정하게 노려보지 마. 응? 그의 낙천적인 웃음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흐르는데 아직도 오드를 만나지 못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약효가 떨어질 터였다. 밀려든 생각으로 초조해져 손톱을 입술로 가져가려는데 밀로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그가 그녀의 손을 감싸 내렸다.

“알겠어. 일 열심히 할게. 내가 우리 오헬을 먹여 살리지, 뭐.”

그의 허풍을 들으며 이엘은 시선을 돌렸다. 혼자 숨어 살기에도 버거운데 내가 미쳤지. 배를 곯아 길거리에 쓰러진 소년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빵을 조금 나눠 준 게 화근이었다. 그 뒤로는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며칠 전 겨우 구한 좁아터진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어서 아는 거라곤 제 이름밖에 없다던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왜, 오헬? 화를 낼 수조차 없게 여전히 해맑은 낯이었다. 밀로를 쳐다보던 이엘이 포기하듯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덩달아 밀로도 주저앉았다.

“미르.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없어?”

“응.”

“네 부모라든가 형제는? 친척이나 친구도 전혀 기억이 안 나?”

“응. 전부 기억이 안 나는걸.”

참 속 편하다. 이엘은 한심하단 낯으로 밀로를 올려 봤다. 밀로는 저를 쳐다보는 이엘의 눈동자에 아리송한 표정으로 답할 뿐이었다.

됐어, 일이나 하자. 이엘의 말에 밀로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채굴 도구들을 저가 대신 들고 일어섰다.

“나의 엘. 넌 저쪽에 가서 조금 쉬도록 해.”

이따금 밀로는 이엘의 이름을 오드와 같이 불렀다. 나의 헬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너는 나의 지옥이 아닌걸. 우스갯소리를 하며 넌지시 그렇게 불렀다. 이곳의 모두가 이엘을 오헬이라 불렀지만 가끔씩 밀로에게서 듣는 제 이름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엘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잠도 잘 자지 못하는 상태였다. 땅 위로 올라와 처음 마주한 게 이종족, 그것도 우논이었으니 인간을 만나면 덜 힘들 거라고 생각한 게 우스웠다. 인간들과 부딪치며 사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이, 너도 저기로 가는 건 어떠냐? 너 정도면 수입이 꽤 짭짤할 텐데.”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와 휘파람이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막대기를 휘둘렀다. 으악! 비명을 내지르며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손의 위치를 보니 또 제 엉덩이를 만질 생각이었나 보다. 이엘은 창백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다가, 자빠진 남자의 얼굴 위에 침을 뱉었다.

“아저씨나 아랫도리 간수 잘하시죠?”

“뭐, 뭐?!”

“그렇게 늙고 축 처져서 어떻게 살아가시려고?”

조금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매음굴에 팔아먹는 놈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더러울 줄은 몰랐다. 대놓고 치근대는 인간들은 물론이고 남의 집에 불쑥 찾아와 손목을 끌어당기는 놈들도 넘쳐났다. 처음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여긴 뱀의 소굴보다 더했다. 흘레붙는 것밖에 모르는 건 인간 남자들이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역질이 밀려왔다.

울분을 참지 못한 이엘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위로 들어 올려 남자의 머리통이라도 때리려고 했다. 겨우 일주일 남짓 지내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배운 방법이었다. 다시는 허튼짓하지 못하게 혼쭐을 내 줘야 이 지독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여기도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저 대가리를 깨부숴야 내가……,

“그만.”

“놔!”

“오헬. 더러운 짓은 네가 할 필요 없어.”

어느새 다가온 밀로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막대기를 빼앗았다. 밀로는 이엘의 손을 놔주고 쓰러진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제 발로 짓이겼다.

“으아악!!”

“아저씨. 시끄럽잖아요! 쉿, 조용. 목소리가 너무 크면 대장님한테 우리 혼난다구요.”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밀로가 행패를 부려도 탄광지의 인간들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힐끔 밀로와 남자를 쳐다봤다가 다시 제 일을 하기 시작할 뿐이었다. 그들에겐 이미 연대라는 것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기도 버거운 존재가 되었으니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자비한 밀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결국 보다 못한 이엘이 그의 손을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그만해, 미르. 그제야 혈색이 돌아온 밀로가 웃으며 발을 치웠다.

“아저씨. 또 한 번 내 동생한테 손대면 죽어요, 진짜!”

죽인다는 말을 어쩜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이엘은 혀를 차며 밀로를 데리고 현장을 벗어났다.

“미르. 제발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왜?”

“왜긴 뭘 왜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네가 나서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다고.”

“형이 동생을 지켜 주는 게 잘못된 거야?”

“…….”

“내가 널 지켜 준다고 했잖아, 오헬.”

참 퍽도 지켜 주겠다. 진짜 형도 아니면서 무슨 형 노릇이야. 말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했지만 저보다 한참 커다란 밀로가 의지되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친형제도 아닌데 너무 가깝게 지내는 건 서로에게 위험 부담만 안겨 주는 꼴이니까.

게다가 곧 오드를 만나면 헤어질 사이였고…….

사실은 저 멍청하고 순수한 얼굴로 자신 없이 살아갈 밀로가 걱정이었다. 기억은 영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이고 할 줄 아는 건 힘쓰는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는 이 갑갑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미르. 손에 일이 익지 않아도 노력해야 돼. 여기서 먹고살기 위해선 탄광지에서 일하는 방법밖에 없어.”

“알겠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언제까지고 난 네 옆에 있어 줄 수 없어, 미르.”

“어째서? 다른 곳으로 갈 거야?”

“그래. 상황이 좋지 않으면 난 떠날 거야.”

“같이 가면 되잖아?”

“너까지 데리고 다닐 수 없어. 나는 할 일이 많아.”

“내가 도와줄게!”

“기억도 못 찾았으면서 뭘 도와주겠다는 거야.”

화풀이를 해 버렸다. 시간은 점점 흐르는데 좀처럼 오드를 만날 수가 없어서. 이엘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헤집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더러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짧게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잠을 푹 잤으면 좋겠다. 푹신한 침대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혼자 눈 붙일 곳이라도 있길 바랐다. 벌써 일주일째 잠을 자지 못해 눈이 뻑뻑했고 다리는 여전히 지탱해 줄 부목이 없으면 펴지지 않는다.

“꽃이 떨어졌어, 오헬.”

“…….”

“생명은 귀하다고, 네가 그랬잖아?”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밀로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떨어진 꽃을 손바닥에 올렸다. 그러곤 이엘의 손을 끌어와 제 손바닥을 포갰다. 꽃이 그녀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엘은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았다.

땅 위의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아니. 그냥 전부를 사랑한다. 발에 밟히는 따가운 모래마저 사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작은 꽃이었다. 밀로는 저도 인간이면서 꽃이 인간처럼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이엘은 그런 이유로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아득바득 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마치 저와 닮은 것 같아서……. 그래서 좋아했다.

“오헬.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까?”

“…….”

“네가 있을 곳을 내가 만들어 줄까?”

밀로가 티 없는 미소로 환하게 웃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바보면서 허세 부리긴. 하지만 이엘은 밀로의 그 한마디에, 그를 버리고 떠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밀로는 땅 위에 올라와 처음 마주한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정말 따뜻한 인간.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 틈에서 만난 작은 꽃 같은 인간이다.

*

“여긴 어디야?”

“쉿. 목소리를 낮춰, 미르.”

주의를 주었지만 밀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신기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데려온 이상 저 철부지가 제 말을 들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이엘은 다시금 밀로의 손을 낚아채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러곤 밀로의 머리 위로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씌웠다.

“내 손을 놓치면 안 돼. 알았지?”

“여기가 대체 어딘데?”

“암시장.”

“암시장? 그게 뭐야?”

“쉿. 일단 고개 숙여.”

인간이라고 치기엔 밀로는 키나 덩치가 너무 컸다. 이엘의 말대로 잔뜩 우그러진 채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밀로는 연신 주위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암시장이라고? 밀로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곳이었다. 워낙에 인간들과 교류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흐음, 이름부터 을씨년스럽네. 일단은 저 작은 손에 의지하며 따라갈 뿐이었다.

이엘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컴컴한 골목 어귀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훌쩍 넘겼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 지도 한참 지났다.

늑대들은 통행금지 시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탄광지를 막고 인간들을 서둘러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의 그 예리한 코를 피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전부 비 덕분이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이엘이 밀로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저도, 밀로도 밀매업자들에게 끌려갈지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