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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화 (17/488)
  • 17화

    인간의 제법 당찬 질문에 노아와 늑대들이 눈을 부릅떴다. 앤디는 제법 놀란 건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노아 님은 그딴 연구에 관심 없으시다고! 차마 말은 못 하고 황당함에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나 이엘에겐 사활이 걸린 질문이었다. 오드로부터 뱀들이 그 미친 연구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늑대들이 그 연구에 동참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반대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묻는다고 제대로 답해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글쎄. 그걸 답해야 할 의무가 내 쪽에선 없지 않나.”

    ……역시. 실망은 뒤로하고 다른 계책을 찾기 위해 눈알을 굴리는데,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끔 돌렸다.

    “나와 이야기할 땐 다른 곳을 보지 마.”

    “죄송합니다.”

    “연구 때문이라고 한 걸 보면, 피험자 아니면 연구원으로 잡혔던 모양인데.”

    “…….”

    소년이 입을 꾹 다물자 노아도 추궁하던 것을 멈췄다. 그는 이엘에게서 손을 떼고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런 멍청한 짓에 동의하지 않아. 우린 뱀과 틀어졌다.”

    “…….”

    “긴장 풀어. 네가 도망쳤을 때부터 널 뱀에게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

    “그러니 너도 말해라. 왜 네가 거기 있었고, 뱀이 너를 필요로 하는 건지.”

    “과거에 아비가 연구소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연구 과정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어요. 그것 때문에 거기 붙잡혀 있었고요.”

    도망쳤다는 건 연구를 반대한다는 의미인가? 노아는 한쪽 눈썹을 틀어 올리며 이엘의 표정을 주시하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앤디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냉큼 다가온 앤디는 움직이지 못하는 소년을 들어 올려 다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건 올려놓았다기보다는 내던진 쪽에 더 가까워서, 이엘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을 삭여야 했다.

    “날이 밝으면 곧장 나가도록.”

    간결하게 할 말만 남긴 노아가 방을 나갔고 그를 따라 늑대들이 속속히 빠져나갔다. 남겨진 앤디만 창가에 기대고 혀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인간 녀석이 저렇게 당돌한 거지? 무릎을 감싸고 끙끙 앓는 소리를 참는 모습이 참 불쌍하기 짝이 없다마는.

    “그나저나 너도 참, 간덩이가 부었다. 그걸 폐하 앞에서 물어보다니.”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오늘따라 왕께서 피곤하신 것에 감사해라. 평소 같았으면 넌 그대로 추방이었어. 추방이 뭐야, 모가지가 붙어 있지도 못했을 거다.”

    역시 왕이었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뱀의 왕에게서 도망쳐 도착한 곳이 늑대의 왕이라니. 이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아무 쓸모 없는 뱀의 소굴이 아니라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엘은 침대 시트 끝을 꾹 붙잡았다. 로빈과는 다르게 노아는 저를 쉬이 풀어 줄 생각인 것 같다. 인간에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앤디의 말처럼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런 건지, 어쨌든 그 덕에 불필요한 의심은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야, 인간.”

    “네?”

    “너 몇 살이냐?”

    아니, 근데 이 늑대 놈은 왜 안 나가고 얼쩡거리는 거지? 이엘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만났던 이종족들과 다르게 전혀 악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는 앤디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몇 살이냐니까? 재차 물어 오는 질문에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년을 막 넘었습니다.”

    “아, 그래? 내 동생이랑 조금 차이 나겠네? 신기하다. 나 인간 가까이서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거든.”

    “아, 네.”

    이 정도 딱딱한 대답이 들려오면 눈치껏 알아서 나갈 줄 알았는데 앤디는 무슨 수도꼭지가 틀어진 것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물어보는 건 또 얼마나 많던지, 결국 이엘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엘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으나 앤디의 수다는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 다물어질 것 같지 않던 잿빛 늑대의 입이 멈춘 건 그만 나오라는 동료의 부름이 들리고 나서였다.

    “그럼 푹 쉬어, 오헬.”

    “저기, 앤디 님.”

    “왜?”

    “혹시 늑대분들의 영지에도 노예가 있나요?”

    “우리? 우린 노예 없어. 노아 님이 인간 냄새 나는 걸 싫어하셔서 죄다 탄광으로 보냈어. 왜? 너 갈 데 없냐?”

    “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

    “뭐, 보아하니 너도 고아인 모양인 것 같은데. 갈 곳 없으면 우리 소관하에 있는 탄광지로 보내 줄 수도 있어. 일단은 노아 님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겠지만.”

    “정말인가요? 그러면 폐하를 뵈러……,”

    “일단 자. 그 온전치 못한 다리로 어딜 가려고? 내가 적당히 분위기 봐서 폐하께 아뢰어 줄게.”

    “감사합니다!”

    비교적 좋은 낯으로 꾸벅 인사하는 인간 아이를 보니 앤디는 흐뭇한 미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 그리고 혹시 뱀의 영지에서 이곳까지 며칠이나 걸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 세어 보진 않았는데……. 음, 보자. 좀 돌아서 왔으니까 닷새쯤 됐으려나. 그건 왜?”

    “그냥요. 궁금해서.”

    “싱겁기는. 푹 쉬기나 해.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올게.”

    그 말과 함께 앤디는 방문을 닫아 주고 나갔다. 이엘은 녹초가 된 몸을 베개에 파묻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오드를 만나는 게 우선이다. 빠듯하게 세면 보름 정도 남은 건가. 그 안에 오드를 만나야 할 텐데……. 이 넓은 땅에서 오드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눈앞이 아득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이종족의 손에서 벗어나면 오드가 제 위치를 알고 찾아와 줄 확률이 높으니 그쪽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오드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앤디가 소개해 준 탄광지에 며칠 머물러 기회를 볼 생각이다. 이곳에서 늑대의 기름을 얻어야 하니까.

    이엘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 건지, 괜히 하얀 손바닥을 쥐었다가 펴기만 했다.

    솔직히 뱀의 소굴에서 탈출할 계획은 짰지만 정말로 탈출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거의 버린 상태였다.

    뱀에게서 탈출하고 늑대를 만난 건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엘은 모로 누운 채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지금 신의 뜻을 따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의 체스 말이 된 걸까.

    “야! 노아 님이 허락해 주셨어!”

    결국 동이 트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선잠에 들었는데, 그마저도 벌컥 열고 들어선 앤디 탓에 깨 버렸다.

    “감사합니다, 앤디 님.”

    “그래, 그래. 내가 다 힘써 준 덕분이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럴 필요까지 있냐. 다 왕께서 하신 일인데. 아무튼 잘 지내라, 오헬. 오랜만에 만난 인간 소년아.”

    절뚝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내려왔다.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으니 앤디와의 관계도 중요했다. 여차하면 그의 기름을 훔치는 수밖에. 이엘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앤디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마쳤다.

    늑대의 커다란 성을 빠져나오자 옅은 장미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이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황폐한 들엔 꽃 한 송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미…….”

    황녀의 궁 주변에도 같은 향이 나는 장미가 잔뜩 피어 있었다. 희미하게 동동 떠다니는 장미 향이 노아의 정원에 머물러 있다. 이엘은 그 정원을 빠져나가며 공허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늑대는 인간과 가장 가까웠던 존재. 기사단 하나가 전부 늑대로 이루어질 정도로 충성했던 존재였다.

    고개를 돌려 성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 흑안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노아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 소녀와 늑대의 사이엔 장미 봉오리 하나가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

    탄광지의 일은 손에 익지 않아 어려웠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직접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비단 탄광지의 일뿐만이 아니었다. 땅 위는 책으로만 접하던 것과 상이한 세계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각오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이엘은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봐. 네 형, 언제까지 저렇게 둘 셈이야?”

    탄광지의 대장쯤 되는 남자가 이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가 가리키는 쪽엔 부드러운 푸른빛 머리의 남자가 헤실헤실 웃으며 들고 있는 장비로 탄광 벽을 치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적응 안 되는 미친 짓을 하는 중이었다. 이엘은 한숨을 쉬며 등 떠밀리듯 남자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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