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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화 (16/488)
  • 16화

    늑대 소굴에 인간 따위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판단했군. 적안의 남자가 하는 말을 듣던 노아가 대수롭지 않게 곁에 서 있던 늑대 하나에게 이엘을 넘겼다.

    앉아. 노아의 손짓에 남자가 앉았다. 남자의 예리한 눈빛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인간 소년에게로 올곧게 향한다.

    저 인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르네.”

    “…….”

    “다음부턴 미리 예고 좀 하고 찾아와. 주인 없는 집에 함부로 드나드는 게 독수리들은 일상인가?”

    “그 점은 사과한다.”

    옅게 흔들리는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르네가 정중히 사과했다. 머리색만큼이나 타오를 것 같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노아에게 강렬히 닿았다.

    “노아.”

    “말해.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주인도 없는 성에 다짜고짜 찾아왔는지.”

    “우리는. 불가피하다면 이 땅을 버릴 생각이다.”

    그리고 그 붉은 눈동자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던져 버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만큼 이 땅은 이제 회복 불가란 소리다.”

    “…….”

    “농담할 마음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우린 날개가 있다.”

    “그래서 다 버리고 네 종족만 챙겨서 쏙 빠지시겠다?”

    독수리와는 이래서 상성이 안 맞아. 노아의 비죽거림에도 르네는 답이 없었다.

    당연히 날개가 있는 것들은 다리로만 다니는 우리보다는 사정이 나을 테지. 게다가 눈도 좋아서 분명 어딘가 괜찮은 장소를 알아 두었으리라. 굳이 제 영지까지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뒤적거려도 못 찾는 곳이라서?

    그게 아니면 찾는다고 해도 갈 수 없는 곳인가?

    한편 르네는 메마른 눈빛으로 성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래도 10년 전엔 따뜻한 곳들 중 하나였는데……. 정원도 예뻤고. 정원의 주인을 잃은 뒤로는 영지에 생기가 사라졌다. 나날이 차갑고 무거워지는 걸 보니 늑대들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전포고를 하러 몸소 오셨나?”

    “선전포고 같은 게 아니다.”

    “그럼 뭐야. 자랑해? 날개 달렸다고?”

    “노아. 이런 식으로 서로 비꼬아 봤자 달라질 건 없어.”

    “너희가 부러운 건 처음인데. 우리도 여길 좀 벗어나고 싶거든.”

    “…….”

    그러나 르네는 노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데려가 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졸지에 그런 의미가 된 탓에 노아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햇볕이 여전히 찬란하게 내리쬐고 있었으나 어쩐지 차갑기만 한 땅이 되어 버렸다. 축복을 받아 살기 좋은 땅이었던 제국 ‘르뷔’는 이제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줄어 가는 개체수를 부지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들뿐. 비참한 목숨들만 헐떡이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노아는 일순 르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금세 사라졌지만 분명 그 영민한 독수리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르네.”

    “어.”

    “네가 말한 그 땅.”

    “…….”

    “존재하기는 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더는 살아갈 수가 없다면. 결국 본능에 못 이겨 뱀들처럼 미친 행위를 하게 된다면…….

    왕인 자신이 과연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올바른 죽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또다시 신의 노함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노아는 감히 확답할 수 없었다.

    독수리는 영리하고 민첩했으며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며 비행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독수리의 우두머리가 된 르네는 젊지만 노련미가 넘치는 자다. 마치 인간처럼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 땅이 있나.”

    다시 한 번 묻자, 르네는 적안이 담긴 눈꺼풀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미래. 더 이상 종족 번식을 이룰 수 없는 암담한 미래. 나날이 줄어 가는 개체. 그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을 과연 저 영민한 독수리는 찾았던 것일까? 정말 합리적인 비행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삶을 끝내려는 것인가.

    “때론 네 시선이 날카로워 온몸이 시리는군.”

    드물게 독수리가 웃었다. 그 웃음이 더 차갑고 어두워 보여, 노아는 열었던 입을 닫고 말았다.

    르네는 한참이나 제 손만 만지작거리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 역시. 늑대들은 냄새를 참 잘 맡는단 말이야. 눈치가 빠르군. 르네의 읊조림이 응접실을 조용히 채웠다.

    “……작은 섬이 하나 있어.”

    “섬?”

    “고작 물새 따위나 거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곳이다.”

    “…….”

    “물론 우리가 거기서 사는 건 불가능해. 가는 길은…… 짧지만 바다를 건너긴 해야 하니, 쉽지 않고.”

    르네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마른침을 몇 번이고 삼키며 말을 고르던 르네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마지막은 거기가 좋을 듯해서.”

    “…….”

    “썩 괜찮은 곳이야.”

    “네 종족들은 동의한 건가?”

    “……그래.”

    무능한 리더는 아니었다. 땅 위 그 어떤 짐승보다 인간에 가까울 정도로 영특한 동물이 독수리였으니. 그중에서도 르네는 어떤 시대의 왕들보다 이상적인 왕에 적합했다. 그의 오점이라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것과 10년 전 전쟁에서 제 무리의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

    결국 그의 무리도 인간을 몰살시키는 것에 가담했다. 심지어 앞장섰다. 신이 주신 선물로 우를 범했다. 안타깝게도 이 세계에선 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왕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다.

    “우리는 용맹스럽게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그다지 용맹스러운 건 아닌 듯한데.”

    “뱀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어.”

    르네가 마른 웃음을 삼켰다. 긴 생을 이토록 허무하게 마감하는 건 미련한 짓일까. 아니면 이렇게라도 어그러진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르네와 같은 생각에 잠겼던 노아는 제 앞에 앉은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부릅뜬 눈엔 여전히 총명함이 그득 차 있었다.

    독수리의 눈은 참 아름답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눈이 부셨다. 그래서 과거에 인간의 피해를 많이 받은 종족이기도 했지만.

    공작의 직계였던 르네는 공과 사에 뚜렷했고 유독 영특해서 차기 후계자로 일찍이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직계 자식들이 으레 그렇듯, 공작의 자식들도 어릴 때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자랐다. 그 결과 형제들은 모조리 죽어 버렸고 르네에게는 딱 하나, 사랑하는 여동생만이 남겨졌다.

    르네는 제 여동생 앞에선 공과 사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졌다. 아버지를 따라 이따금 둥지를 떠날 때도 제 여동생이 눈에 밟혀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랬던 그는 누이를 잃고 난 뒤로 웃음이 거의 사라졌다.

    거듭된 전쟁 이후로 그에겐 냉랭한 이성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이성이 꿰찬 셈이었다.

    그 독수리가 지금, 종족의 파국을 막기 위해 종족의 멸망을 선택하려 한다. 감정적으로 선택한 결정이 아니란 소리였다.

    집단 자살은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은데. 노아의 목소리에도 르네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단어를 곱씹어 볼 뿐.

    집단 자살…….

    “그런 것까지 굳이 알려 주는 이유는.”

    “그래도 한때는 함께 싸웠던 동료로서. 조금은 의지하고 싶었다.”

    “…….”

    “너라도. 너의 종족만이라도 우리 독수리가 존재했음을 알아 달라고. 부탁하려고 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르네는 주저함 없이 늑대의 소굴을 빠져나갔다. 코를 간지럽히던 깃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르네가 떠났음에도 노아는 한참이나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기억해 달라고. 알아 달라고. 그게…… 옛 동료의 부탁이라고.

    옛 동료는 얼어 죽을 옛 동료……. 절대적인 원수가 있었기에 맺어진 동맹일 뿐,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결국 먹이를 두고 다투는 관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노아는 르네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에 제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는 걸 느꼈다.

    앞으로 살아갈 무수한 날 동안 독수리라는 종족은 서서히 잊히겠지. 멸족한 종족의 말로가 다 그러했듯.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더해졌다. 남 얘기 같지 않은 미래였다.

    “폐하. 인간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마실 것을 좀 갖다줘라.”

    “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을 꾹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창을 열었다. 거세게 퍼붓던 비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한기가 성을 가득 메울 만큼 음습하고 어두운 새벽 공기만 머물 뿐이었다.

    그의 시야에는 검은 숲이 보였다. 한때는 인간과 함께 어울려 그곳에서 훈련을 하던 때도 있었다. 영원한 시간 속에선 찰나와도 같은 순간일 뿐인데, 도리어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아 버렸다.

    무엇 하나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 같군. 단호하게 창을 등지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간이 머물고 있는 곳까지 걸음을 옮기면서도 노아는 독수리들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좋은 벗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이 사라지고 나면, 우린 정말 본능에만 충실케 되겠군. 피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층계를 올라온 노아는 안내를 받아 열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열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이 눈을 뜨고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며칠씩 앓아누웠던 것치고는 양호한 낯이었다.

    그는 노아를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신이 드나?”

    “아……. 네. 감사합니다.”

    이엘은 옆에서 건네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경계의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뱀의 성을 탈출했더니 이번엔 또 늑대의 성이었다. 그래도 늑대는 뱀보다 사정이 낫다. 그녀의 목적 중에 하나가 늑대의 기름이니까. 적어도 목표 근처에 다다른 셈이다.

    어떻게 기름을 구하지? 일단 오드를 만나 약물을 받아 마신 이후엔 이 근방에서 머무는 게 좋겠어.

    노아는 약간 탁해진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 커다란 창밖을 응시했다. 비가 그치고 을씨년스러운 빛이 드넓은 평야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곧 날이 밝겠지.

    10년이었다. 자그마치 10년. 사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영원한 시간을 살게 될 이들에게 10년이라고 하면, 그건 시간이라고 볼 수도 없는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찰나의 10년은 이들에게 고역이었고 기나긴 세월이 되었다.

    “저기…….”

    이엘은 마시던 컵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침대 헤드에 더 깊게 기대며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들어와서는 제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다. 로빈과는 다른 타입의 남자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왕께 저기요, 라니. 너도 참 대단하다.”

    이곳까지 이엘을 업고 왔던 잿빛 늑대, 앤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킬킬 웃었다. 로빈의 성에서 만났던 그의 심복 리플과는 또 달랐다. 이쪽은 조금 서글서글한 것 같은데……. 이엘이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줄곧 앉아 있던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곁에 있던 늑대들 일부가 허리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급해진 이엘은 아무 생각 없이 바닥으로 제 발을 내렸다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악!”

    “야, 괜찮냐?”

    앤디의 물음에도 이엘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다리가 완전히 부서진 모양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인지하고 나니 뒤늦게 부상의 아픔이 찾아왔다. 퉁퉁 부어오른 환부를 손으로 누르며 고통을 삼켰지만 얼굴은 통증으로 일그러진 뒤였다.

    “뱀들이 어지간히 괴롭힌 모양이군.”

    나가는 줄로만 알았던 노아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제 무릎을 살피고 있었다. 가만히 소년의 다리를 살피던 노아의 이마가 퍼석 갈라졌다.

    다리와 그 아래로 이어진 발. 폭신하고 말랑한 발바닥에 의문이 생겼다.

    마치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발바닥처럼 부드럽기만 했다. 짐승인 저희와 다른 건 당연하겠지만, 소년의 발은 보통의 인간의 것과도 상이했다.

    이엘은 흠칫 놀라며 노아에게 잡혀 있던 제 다리를 쏙 뺐다. 그러고는 침대 시트를 아래로 잡아당겨 하얀 다리를 덮어 버렸다. 땅 위의 인간들은 노동을 하느라 이렇게 성한 다리를 갖고 있지 않을 텐데. 혹시나 들켰을까, 손바닥 안이 축축하게 젖었다.

    “날이 밝으면 영지를 나가도록 해 줄 테니 너도 내가 묻는 말에 답하도록 해라.”

    “……네.”

    다행히 노아는 그녀의 발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너는 뱀들의 소굴에서 뭘 하고 있었지?”

    “뱀들의 연구 때문에 잡혀 있었습니다.”

    “네가 실험 대상인가.”

    “한 가지 여쭤봐도 되나요?”

    “…….”

    “늑대들도 그 연구를 하실 생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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