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화 (15/488)

15화

매서운 남자의 눈빛에 입이 절로 다물렸다. 처음 봤을 때나 조금 전 마주쳤을 때의 살기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살벌했다. 싸늘한 눈빛은 뒤적거리듯 온몸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엘은 턱을 억세게 다물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뱀과 작당한 적 없습니다. 도망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소년의 단호한 대답에, 그림처럼 잘생긴 남자의 얼굴 위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노아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품에 끌려와 있던 인간을 홱 내쳤다.

그리 세게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던 이엘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 젠장. 기어이 다리가 말썽이네. 속으로 끙끙 앓으며 부러진 듯한 제 다리를 붙잡았다. 가뜩이나 관절이 약해서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할 텐데…….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확실히 뼈가 부러졌으리라.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일어나려던 몸이 다시 쓰러졌다. 이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금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려 했다.

노아는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인간 소년을 가만히 주시했다. 이렇게 인간과 가깝게 마주한 건 2차 전쟁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기분이 이상했다. 짜증 나고 역겨워야 마땅한데, 이상하리만큼 반대의 감정이…….

아니. 관심을 접자. 고개를 저었다.

“뱀의 소굴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만 말하면 풀어 주겠다.”

“안타깝게도 뱀의 소굴에 갇혀 있던 몸인지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제가 그쪽보다 모를 것 같은데요.”

“…….”

“확실한 건 제가 뱀들에게 있어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거지만요.”

사이렌 소리를 들으신 대로. 그 말을 마치며 완전히 일어섰다. 짧은 머리를 털어 빗물을 떨어뜨리며 창백한 낯으로 노아를 쳐다봤다. 노아가 눈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두렵고 겁에 질린 태도는 금세 사라졌다. 그 모습이 우습고 황당해서 노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인간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왜 웃으십니까? 소년의 물음조차 건방지게 느껴졌다.

이종족을 향해 저렇게 대놓고 건방진 태도를 취하는 인간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쪽에 더 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확인해야 할 건 확실히 해야지. 계속해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남자는 한쪽 눈썹을 틀어 올렸다.

“뱀이 아끼는 이유가 뭔데.”

“제가 여기서 나가도록 도와준다면 당신이 물어보는 걸 답하겠습니다.”

“너도 귀족 나부랭이였나?”

“뭐라고요?”

“말투가 건방지기 짝이 없군.”

아니. 귀족보다 더 높은 계층.

황족에 가까운 억양인데.

자신이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황족이 떠올랐다. 그의 억양과 사뭇 비슷했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모든 황족은 2차 전쟁에서 모조리 죽었다. 아등바등 살아남은 귀족의 자제라 할지라도 이제 저렇게 고압적인 억양과 말투를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이건 대체 뭐지? 남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또 한 번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흑발에 녹안.”

“…….”

“뱀이 아니면 황족일 텐데.”

“황족이면 제일 빨리 당신들 손에 죽었겠죠.”

빤빤하게 말을 돌리는 솜씨가 예상외였다. 비에 젖은 생쥐처럼 파들파들 떨던 모습은 어디 가고. 소년을 위아래로 훑던 노아가 입꼬리를 비죽 올려 웃었다. 이거, 뱀들이 아주 재밌는 걸 주웠네.

장갑을 낀 검은 손이 이엘의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뜻을 몰라 눈을 굴리는데 말릴 새도 없이 다가온 손은 이엘의 허리를 잡아채 안으로 당겼다.

“이, 이거 놔……!”

“조용. 머리가 달린 채로 빠져나가고 싶다면 입을 닥치는 게 좋을 거야.”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고 그저 바닥을 적시는 빗소리만이 차가운 공기를 가득 메울 뿐이었다.

여전히 뱀들은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커다란 성 안에서 저들끼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노아는 잠시 눈을 감고 외투 안에 숨기듯 끌고 들어온 이엘을 놔주었다.

인간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남자의 주위에 언뜻 음울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검은 늑대는 비에 젖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땅 위에 네 발을 딛고 고고하게 섰다. 크기가 보통의 것보다 훨씬 컸으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우논이 맞는 듯했다.

그것도 고위층.

올라오자마자 제일 위험한 우논을 몇 마리나 마주치는 건지……. 오드가 알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이엘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데 검은 늑대는 슬쩍 다가와 그녀의 앞에 앞발을 내려 몸을 낮추었다.

“타.”

그의 말에 이엘이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을 가누며 겨우 발을 들어 올려 그 몸 위에 올라탔다. 그녀가 타자마자 늑대는 푸르릉― 젖은 털을 털더니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육체는 쌓인 피로와 쏟아지는 폭우에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이엘은 탁해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으며 집중하려고 했지만, 늑대의 털을 잡은 손바닥에선 계속해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있다!”

“성문을 사수해!”

들려오는 소리를 뒤로하며 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떨어지는 비를 쫄딱 맞고 풀숲에 다다랐을 때, 노아가 매섭게 달리던 다리를 멈췄다.

자신의 뒤로 바닥에 떨어져 버린 인간이 보였다. 재빨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떨어진 소년을 품에 안아 올렸다. 부러 열기를 키운 자신보다 더 체온이 높았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이엘을 품에 고쳐 안고는 풀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빠르게 달렸다.

뱀의 소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그는 하울링으로 동료를 불러 모았다. 혹시 몰라 근처에 잠복하고 있던 잿빛 늑대 하나가 달려와 주변을 맴돌았다.

노아는 손짓으로 그를 낮추고 등 위에 이엘을 태웠다.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듯 눈도 못 뜨는 그녀를 앉히고 바로 뒤에 올라탔다. 잿빛 늑대는 노아와 인간을 태우고 빠른 속도로 저수지 쪽으로 달렸다.

“노아 님. 그 인간은 대체 누구입니까?”

“인질.”

“예?”

“로빈이 눈치를 채고 금방 돌아올지도 모른다. 때마침 비가 내렸으니 우리 냄새가 씻겨 내려가겠지만 방심하기는 일러.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도록.”

“예.”

며칠 전 낮에 로빈의 성에 찾아갔던 노아는 성 안에 있던 한 인간을 발견했다. 다른 종들이었다면 노예로 부렸겠거니, 하고 넘겼을 테지만 뱀의 소굴에 인간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그 흑발과 녹안……. 기분 나쁜 조합이 내내 눈앞에 떠다녔다.

뱀의 혼혈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혼혈은 거의 없는 데다가 로빈이 혼혈을 제 성에 들일 리도 없었다.

성 안에 고이 모셔 두고 있다는 것은 필시 뱀에게 이익이 되거나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노아는 계획을 짜고 뱀의 소굴로 잠입했다.

지금쯤 늑대 무리가 연구소 쪽을 뒤적거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로빈이 다시 성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제도의 북쪽에 위치했던 연구소에는 이제 별다른 것들이 없을 텐데도 로빈은 그곳을 포기하지 못했다.

새근새근. 고른 듯, 고르지 않은 숨소리가 제 품 안쪽에서 들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고열의 인간은 몸짓을 잘게 떨었다. 뱀이라면 동성 간 관계도 허락된 종족이니 인간 남자아이라고 거부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로빈은 아니다. 고결한 귀족으로 태어나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한 로빈이 몸이 달았다고 인간 남자아이를 탐한다? 누가 들으면 웃다가 기절할 일이겠군.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연구에 필요한 인간일 것이다. 그쪽이 더 수지에 맞아.

잿빛 늑대는 자신의 왕과 인간을 태운 채 한참을 달렸다. 최대한 속도를 냈는데도 늑대의 영지까지는 며칠을 더 달려야만 했다. 그 며칠 동안 뜨거운 늑대의 체온 속에서도 소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인간은 괜찮은 겁니까?”

“숨은 붙어 있어.”

시름시름 앓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불안했다. 늑대는 제 왕이 인간에 관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금세 화제를 돌렸다.

“폐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좀 안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어요.”

“뭔데.”

“뱀들의 연구에 참여하겠다는 종족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말에 노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왕은 그 일에 지쳐 버린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려, 드디어 늑대의 권역에 들어섰다. 커다란 잿빛 늑대는 길고 높은 담장이 보이는 수풀에 다다르고 나서야 달리던 속도를 줄였다.

숲 언저리에 도착해 몸을 아래로 숙인 늑대의 등에서 노아가 풀썩 뛰어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의식을 잃고 끙끙 앓는 이엘을 단숨에 안아 내렸다.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잿빛 늑대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인간 남자를 바라보았다.

“되게 어려 보이네요.”

“왜. 너도 인간한테 관심 있어?”

“예? 그럴 리가요. 제 동생과 실제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그런 겁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청년은 이엘에게 잠시간 두었던 시선을 재빨리 거두었다. 괜한 오해를 사서 축출당하는 건 싫은 모양이다.

노아는 다시금 이엘을 고쳐 안고 왕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쉴 새 없이 옆에서 종알거리던 청년이 응접실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으악, 노아 님!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노아가 남자를 돌아보자, 청년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치고 들어온 음성이 있었다.

“노아. 할 말이 있어 왔다.”

응접실에서 튀어나온 손님이 노아의 시선을 붙잡았다.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던 노아의 이마가 버석 갈라졌다. 어쩐지 흐릿하게 이상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더라니. 청년은 노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뒤로 물러났다. 아차, 제가 잊어버려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노아는 한껏 느른해진 표정으로 손님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뭐야. 너도 설마 뱀들이랑 동업하겠다고 선포하러 왔어?”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내 말부터 듣도록 해.”

“뭔데.”

“그보다……. 그 인간은 뭐지? 좀 치워라.”

쓰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벗은 남자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노아의 품에 안기듯 기절한 인간을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