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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화 (14/488)

14화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지친다. 자신은 더 이상 불타는 황궁에서 구해 주기만을 기다리던 황녀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대충 계획을 정리한 이엘이 짤막하게 한숨을 토해 냈다.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원래 예정이었던 연구실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수월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경비가 삼엄할수록 되레 허술해지는 부분이 존재하니까.

어느새 짧아진 머리가 익숙해졌다. 정수리부터 쓸어내린 머리는 귀 밑에서 끊어진다. 제 머리를 정리하던 이엘이 창문에 걸린 커튼을 있는 힘껏 잡아 뜯었다. 두두둑 실밥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여러 갈래로 찢기듯 뜯어진 천 조각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커튼을 바라보며 축축해진 손을 모았다.

잡히면 어쩌지?

아니야. 나약한 소리 하지 말자, 멍청하게. 시작도 안 하고 겁부터 먹는 짓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잖아. 저를 향한 비난을 되뇌며 커튼을 서로 엮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침대 시트까지 전부 끌어냈고 종내에는 입고 있던 옷의 일부마저 벗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천이란 천을 모조리 끌어모았어도 이엘이 머무르는 곳은 굉장히 높은 곳이라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이대로 창문에 달아내려도 결국 몇 미터 정도는 뛰어내릴 것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리 하나 버리더라도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거침없이 침대 다리에 천을 묶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앞으로 보름 정도…….”

시간이 없었다. 남은 약효는 고작 보름 정도. 그사이 오드를 만나지 못하면 체향과 호르몬으로 이종족에게 들키게 될 것이다. 인간들 틈에 있었다면 눈을 속여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보다 감각이 예민한 그들의 눈과 코를 가리는 건 무리였다. 보름 안으로 반드시 오드를 만나야 하며, 적어도 이종족들의 무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밖에서 쉭쉭거리는 뱀들의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이엘은 방을 밝히던 촛불을 모조리 껐다. 그러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져왔던 포크를 들었다. 주저 없이 바닥에 꽂자, 비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포크를 비추었다. 바닥으로 옅게 늘어졌던 그림자가 점차 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시간은 보초가 바뀌는 시간이었다. 영민한 뱀들은 성의 중요 순서에 따라 위치를 바꾼다. 제일 먼저는 성의 주인인 로빈의 방과 서재였으며, 그다음은 아마도 어딘가로 통하는 비밀 공간이었고 바로 그다음이 이엘이 있는 방이었다.

요컨대 지금을 놓치면 다음 기회는 다시 보초가 바뀔 대낮밖에는 없다는 소리였다.

새벽을 틈타는 편이 수월했다. 이엘은 짐승의 것처럼 한껏 예민해진 귀를 쫑긋하며 밖에서 들려오는 뱀의 소리를 들었다. 점차 소리가 작아지는 것으로 보아 지금 보초가 바뀌는 곳은 서재 쪽일 것이다.

이엘은 많지 않은 소지품을 챙겨 단숨에 천을 잡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려뜨렸다. 조금 멎었던 비가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땅 아래에서 보냈던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다. 비를 맞으며 내려가는데도 미끄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숨소리조차 간헐적으로 참아 냈다.

이엘은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잠시 고개 들어 하늘을 향해 제 얼굴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이했다. 차가운 빗물을 양껏 느끼며 땅속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목이 말라…….’

‘기다려. 물을 가져다줄게.’

‘비가…….’

‘…….’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너무 음습했던 그곳이 떠올랐다. 어둡고 축축했으며 건조함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뭄에 말라 죽기 직전인 잡초처럼 늘 비를 갈망했다. 어디든 살 수 있는 잡초에게도 마른 땅은 너무 가혹했다. 죽어 가는 잡초는 비를 간절히 바랐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으니, 이제야 자신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그토록 갈구하던 지상의 삶이 드디어 손안에 쥐여졌다. 그러니 탈출해야 한다. 이곳을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야.

점점 거세지는 비에 온몸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입고 있던 옷마저 벗어서 끈에 함께 묶어 버렸으니 지금 그녀가 몸에 걸친 것이라곤 가슴을 가려 줄 가리개와 속옷, 그리고 그 위로 입은 목이 늘어난 얇은 옷이 전부였다.

이대로라면 감기에 걸리는 것도 순식간이겠다. 낮게 읊조리며 전보다 빠른 속도로 줄을 타기 시작했다.

어느덧 줄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내려왔는지, 마찰 때문에 손바닥이 쓸려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잠깐의 쓰라림에 움찔하던 이엘의 눈으로 빗물이 쏟아져 내렸다. 부연 시야에 혼미해진 정신을 다잡기도 전에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시간은 극히 짧았는데도 엄청난 속도를 고스란히 느꼈다. 빌어먹을! 안 돼! 사납게 욕설을 내뱉으며 죽을힘을 다해 천 끝으로 손을 뻗었다. 우악스럽게 펼친 손가락에 천이 닿았다. 이엘은 온 힘을 다해 천을 움켜쥐었다.

“헉……!”

그야말로 끝이었다. 길이가 다소 모자라던 커튼과 옷가지의 끝. 바닥과는 2, 3미터 정도 간격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거리였다. 아니. 제대로 떨어진다고 해도 어디 하나쯤은 부러지지 않을까?

헛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엘이 아랫입술을 거세게 깨물더니 거침없이 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퍼억! 진흙에 파묻히는 소리가 퍼졌다.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과 진흙이 어느 정도 충격을 흡수해 주기는 했으나 문제는 다리였다. 머리는 잘 보호했는데 계산을 잘못한 탓에 무릎이 꺾인 채 떨어졌다. 접힌 오른쪽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젠장, 제발! 또 한 번 욕지기를 토하며 무릎을 부여잡았다. 애초에 다리 하나는 포기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이엘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손바닥으로 누른 채 고통을 삼켰다.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고꾸라지듯 엎어져 고통을 참던 그녀의 머리 위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이엘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

“…….”

숨을 죽였다. 이 시간에 여기엔 보초가 서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오늘은 교대 순서가 바뀐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고통으로 물든 두려움에 틀어막은 손바닥으로 숨까지 억눌렀다. 이엘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등으로 받아 냈다. 어떡하지? 이 다리로는 도망치는 건 어려울 텐데. 어떻게 하면 탈출을…….

“인간?”

이엘이 줄곧 땅으로 처박고 있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새카만 눈동자가 녹안의 주인을 집어삼켰다.

지난번…… 낮에 봤던 그 늑대다. 상당히 높은 위치로 보였던 그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또다시 두려움에 몸이 바들바들 떨려 오기 시작했다.

본능이었다. 우논의 눈동자는 상상 이상의 위압감이 실려 있다. 알고 있었지만 일단 한번 마주치니 피하거나 견딜 수가 없었다.

“…….”

“…….”

인간이 비를 맞은 생쥐처럼 숨도 못 쉴 만큼 덜덜 떠는 모습을 바라보던 노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도 모르게 눈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노아가 습관처럼 쳐다보던 시선을 조금 부드럽게 틀었다.

딱히 눈앞의 인간에 대한 호의는 아니었다. 굳이 공격적인 태세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째서 뱀의 소굴에 있는 거지?”

조금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으나 여전히 몸이 달달 떨렸다. 눈앞에 그토록 원하던 늑대가 있는데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모양새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제 모습에 한숨을 집어삼켰다. 과거엔 절대 느껴 보지 못했을 감정을 느끼며 이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너. 뱀들이랑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건지 말해라.”

이젠 아예 취조로 몰아갈 생각인 듯했다. 노아는 단숨에 허리를 접어 내려와 이엘의 얇은 옷의 목 부근을 잡아채 비틀었다. 목이라도 졸린 듯 숨을 컥컥거리는 인간을 노려보며 노아가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지르려 할 때였다.

“탈출했다! 인간이 탈출했다!”

“비상사태! 비상사태!”

“출입구를 모두 봉쇄하라!”

노아는 본능적으로 이엘을 들어 올린 채, 성벽 부근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몸을 숨길 생각이었더라면 인간은 그 자리에 두고 홀로 숨었어야 했다. 귀찮게 됐군. 그 생각에 혀를 찼다.

사이렌 소리가 거세게 울리며 뱀들 특유의 쉭쉭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펴졌다. 대체 이 인간이 뭐길래? 노아는 제 손에 끌려오듯 안긴 인간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몸이 비에 홀딱 젖어 파들파들 떠는 모양새가 몹시 불쌍하기도 하고 퍽 안타깝기도 했다.

쯧. 이 정도 비로 바들바들 떨다니. 한심한 인간을 내려다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온정을 베풀었다.

노아가 제 몸에 힘을 조금 더하자 짐승 본연의 냄새가 풍기며 몸이 살짝 커졌다. 동시에 마치 털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품에 안기듯 끌려온 인간의 몸 위로 체온이 나른하게 덮였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엄청난 추위에 심장부터 피부까지 달달 떨렸는데, 한순간 찾아온 온기에 긴장이 느른히 풀어졌다. 이엘은 제 양팔을 비비며 달뜬 숨을 감추려고 했다.

“보아하니 뱀들이 꽤나 아끼는 것 같은데.”

“…….”

“난 누구랑은 달라서 납치는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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