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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3화 (13/488)
  • 13화

    틀린 말은 아니다. 이엘은 10년 전, 황궁을 빠져나오고 알 수 없는 종족의 습격에 의해 목숨을 잃다시피 했다. 오드가 아니었다면 그녀와 이온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로빈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갖고 있는 유일하고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 따위가 아니었지만.

    “웃기는 제안이네.”

    로빈은 순수한 미소와 함께 포도주를 들이켰다. 제법 배짱이 있는 인간이었다. 뱀을 닮은 외모와는 별개로, 그는 인간 소년에게 흥미가 생겼다.

    “이 일이 잘 된다면 네가 가진 재산은 네 목숨 따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

    “네게 귀족의 작위도 내려 줄 의향이 있으니.”

    ……영광입니다. 그 말을 하며 비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로 위치가 뒤바뀌었구나. 이제는 내가 당신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는 위치가 되었구나. 순간순간마다 절감했다.

    “거처는 이곳에 마련해 주도록 하겠다.”

    “영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편이 네게 더 좋지 아니한가? 네게 딸린 식솔이 더 있나? 그러고 보니 네가 차남이라고 했지. 그럼 형도 있겠군.”

    “형님도 전쟁 통에 죽었습니다.”

    “…….”

    “식솔은 따로 없으나 원래 살던 곳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폐하.”

    하긴. 이곳은 인간이 머물기엔 다소 습하고 어둡지. 따뜻한 토양이었으나 분위기 자체가 어두워 인간이 견디기엔 버거울 것이다.

    물론 지금 인간 따위에게 환경을 운운할 자격이 있지는 않겠지만, 로빈은 왕답게 인간 따위에게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어차피 뒤에 감시를 붙이면 될 일이니 구태여 얽맬 필요는 없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이엘은 묵례로 답했다.

    여전히 식사는 더뎠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처음 먹던 것과는 달리, 중반부터는 나이프를 움직이는 모습에 주저함이 이따금 묻어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로빈도 어느새 포도주 두 병을 비우고 있었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식사 시간 때문에 제 왕이 버리는 시간도 길어지자 리플을 비롯한 수하들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한편 이엘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아버지의 죽음을 인식한 이후로 괜찮아졌나 싶었지만,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식사하는 것은 여전히 고역이었다.

    게다가 기다란 식탁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저를 쳐다보는 로빈의 시선은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의 눈빛에서 자꾸만 선황의 눈빛이 겹쳐 보였으니까.

    “이봐. 너로 인하여 로빈 님의 시간이 버려지고 있다. 서둘러 먹도록 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슬슬 짜증 나려던 차거든. 차마 대꾸하진 못했지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마지막 남은 베이컨을 포크로 돌돌 말았다.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마음 같아선 손으로라도 우걱우걱 먹고 싶었지만…….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꾸려진 테이블에선 교양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다년 간 선황으로부터 압박받아 온 어린 날의 습관이었다.

    경고를 주었음에도 인간 소년은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교하고 더 세밀하게, 격식을 차리며 식사를 이어 갈 뿐이었다. 제 말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건지, 서 있던 뱀들 중 하나가 그녀의 앞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그만.”

    “…….”

    “귀빈이라고 말했을 텐데.”

    리플에게만 말했던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이 자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우논만 수십이었고 실제로 은신해 있는 뱀까지 합치면 상당한 수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귀빈이라고 공포한 것은 경고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절대 손대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였다.

    “오헬.”

    “네.”

    “차남이라 해도 간혹 성을 주는 자들이 있던데. 너는 성을 받지 못한 건가?”

    “아버지가 여자아이를 원하셨어요.”

    제가 원치 않은 성별이었던 모양이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냄으로써 드디어 길고 긴 식사를 마무리한 이엘이 여전히 제게 시선을 박고 있는 로빈의 녹안을 마주한다. 그의 눈동자 색은 자신과 같았다.

    뱀을 조심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였다.

    뱀과 그 혼혈은 대체적으로 흑발과 녹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에메랄드빛을 내는 눈동자는 과거 후작가의 친지, 즉 현 왕족밖에 없다고 배웠다. 왕족 혼혈은 개체수도 적은 데다가 순수 왕족도 몇 남지 않아서 로빈과 같은 눈동자를 가진 뱀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제국엔 또 다른 흑발과 녹안이 있었는데 그게 황족이었다. 인간의 황족. 마찬가지로 에메랄드빛을 내는 색은 그중에서도 아주 극히 일부에게만 유전되는 눈동자 색이었다. 그리고 이제 르뷔 제국의 황족은 씨가 말랐다. 흑발과 녹안을 가진 인간은 죄다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뱀을 조심해야만 했다. 다른 이종족들은 깊게 파고들지 않겠지만 뱀들은 다르다. 제 종족의 눈동자 색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함부로 눈을 마주쳤다간 살아남은 황족의 씨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 이엘은 로빈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뜨렸다. 제발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지만 네가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10년 전 그 전쟁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여자였다면 아까웠을 얼굴이군.”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말대로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까운 것들은 많았다.

    어미의 영양분을 나눠 먹었다는 이유로 배 속에서부터 미움을 받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게 내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르뷔 제국에서, 그것도 빌어먹을 선황의 딸로 태어난 게 잘못이다. 이엘은 그렇게 자신을 탓하며 자랐다.

    불쌍하게도 그 당시엔 그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기억을 지워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합리화라도 해야 아비의 학대에 타당한 이유를 붙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탓하는 게 사랑받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게 또 다른 형태의 학대라는 것은,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이엘은 제 앞에 앉아 있는 뱀의 왕을 쳐다보며 운을 뗐다.

    “폐하.”

    “말해라.”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줄곧 와인 잔을 흔들던 로빈의 손짓이 멈췄다. 무람없는 물음이군. 로빈의 대답에 리플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그 경고가 없었더라면 이번엔 리플이 직접 나섰을 것이다.

    로빈 역시 리플을 비롯한 제 수하들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후회라…….”

    “…….”

    “그럴 수도 있겠군. 지금 이게 전부 후회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보복에 눈이 어두워 그 너머의 미래까지 보지 못했다. 20년 전의 무차별적인 암컷들의 학살 이전에도 뱀들은 하루에도 수십 마리씩 죽어 나갔다. 다른 종족들보다 일찌감치 암컷들은 인간의 손에 사라졌다.

    그럼에도 뱀들은 인간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후작 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황족들의 발닦개를 자처하며 살아남았던 선대들의 눈물 덕분이었다. 그래서 뱀들은 눈앞에서 암컷들이 사라져도 항명할 수 없었다.

    핑계라면 핑계고,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겁쟁이였을 수도 있고, 이미 자존심 따윈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결국 쌓이고 쌓인 분노는 10년 전 제 2차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릇된 곳으로 터지고 말았다. 잘못된 분풀이였다. 신의 노여움을 대신하겠다는 말로 위장한 멍청한 복수였다.

    로빈은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게 무너진 이후에야, 왜 신이 자신들이 아닌 인간을 택한 것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우리가 신께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우매한 짓을 반복한 거겠지.”

    “…….”

    “그러나 너희 인간의 씨를 말린 것엔 후회가 없다.”

    “…….”

    “몇 번의 선택이 오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아.”

    늑대를 이끄는 노아나 독수리를 이끄는 르네와 같은 자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건 정말 신의 노여움을 대신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더러워진 세상을 청소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하지만 로빈이 속한 뱀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런 정의로움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던 게 아니었다. 언제나 억눌려 지내야만 했던 억압과 치욕을 갚아 주고, 그들의 위치까지 뒤바꾸고 싶은 원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러니 몇 번의 선택이 오더라도, 그날이 몇 번이나 오더라도.

    “너희가 멸망하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길고 길었던 식사가 끝이 났다. 그녀는 응접실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먹은 솜처럼 한 발 한 발이 무겁고 버겁기만 했다. 계단을 세 개쯤 오르고 나서 난간을 부여잡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너무 꼬였어……. 오드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내가 없어진 걸 알고는 있는 걸까? 무릎이 또 욱신거리며 시렸다. 주먹으로 제 무릎을 콩콩 내려치며 난간 너머의 아래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로빈이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너희가 멸망하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역시 우리가 멸망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신께선 우리를 완전히 버리셨어. 우리가 신을 먼저 떠나 버렸거든……. 하지만 그의 또 다른 말은 어쩐지 이엘조차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께 선택받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신께 잘 보이려 노력해도 신의 시선은 인간에게 있었으니까.

    그건 마치 자신 같았다. 날 때부터 시선을 받지 못한 그녀의 처지와 비슷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선황의 눈은 황자에게 향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로빈을 조금이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창틀 위에 걸터앉아 바닥으로 내려뜨린 제 다리를 올려 끌어안았다. 창문에는 이슬 같은 물방울이 점점이 맺혀 있었다.

    매섭게 내리던 소나기는 금세 그쳤지만 창밖은 여전히 스산했다. 이엘이 손을 뻗어 잠가 놓았던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하얀 뺨 위를 긁고 지나가 작은 생채기를 남긴다. 따끔거리는 뺨을 무심히 쓸다가 문득 삐걱거리는 제 무릎을 가만히 보았다.

    “땅 위로 올라와서도 갇혀 지내야 하다니.”

    제 몸뚱어리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마치 갓 태어나 걸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발바닥이 폭신하고 촉촉하다. 하지만 이엘이 바란 것은 이런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여느 누구처럼 거칠고 까끌까끌한 삶을 원했다. 사람 사는 것처럼 발바닥은 마르고 갈라지길 원한다. 이딴 성 안에 갇히기 위해 10년을 버틴 것이 아니었다.

    문 쪽으로 다가간 이엘이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열린 문틈으로 분주한 밖의 상황이 보인다. 방 안에 갇히다시피 지낸 지 열흘이 넘었다. 모종의 거래를 약속했던 로빈이 성을 떠난 지도 열흘이 지난 것이다.

    잡혀 온 그날 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어디 가겠다는 기별도 없이 성의 주인이 떠났다. 아니. 말을 하고 떠나는 것도 웃기지만.

    꽤 급한 일로 나간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부하들에게 이엘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명령은 잊지 않았다.

    주인의 외출에 뱀들은 더 기민하게 반응하며 상당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식사를 위해 몇 번 내려갈 때마다 숨어 있던 뱀들까지 모조리 나와 식탁을 둘러싸듯 감시하는 태세를 취했다. 덕분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흡입하듯 삼켜야만 했다.

    “오드에게 연락할 만한 수단이라도 찾아야 되는데.”

    무슨 신호라도 있다면 주고받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오드와 이엘은 땅 위로 나오자마자 헤어지고 말았다. 아마 지금 오드는 이엘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해도 올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쪽도 이쪽의 상황을 몰라 애가 타고 있을 테지.

    밭은 숨을 몰아쉬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곤 날랜 발걸음으로 단숨에 창틈까지 다가가 삐걱거리는 창문을 더 활짝 열었다.

    “네가 올 수 없다면 내가 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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