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탄광에서 일을 했다면 손바닥에 그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대부분이 탄광에 있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의 재산에 귀속되어 있는 노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의 재산을 가져오는 것을 거리끼는 게 아니었다. 마음에 든다면 저 인간의 주인 목을 치는 건 어려운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저 타 종족의 고위층에서 보낸 스파이일 경우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는 굳이 사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핏기가 전혀 없군.”
“탄광엔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
“폐하, 의심이 사라지셨다면 이만 식사를 다시 해도 괜찮을까요?”
소년의 대답에 로빈이 설핏 웃고는 손을 놔주었다. 하얀 손바닥 위로 무언가를 꽉 쥐고 놓았던 흔적들이 그득했다. 소년의 말대로 그게 탄광에서 장비를 쥐고 산 흔적이라면 그럴싸한 증거였다. 손톱 사이에 낀 흙도 제법 그럴듯했고.
인간의 신분은 어느 정도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자, 우리는 할 얘기가 더 남아 있지 않았던가.”
“궁금한 건 말씀해 주십시오. 계약이 성립된 것이라 생각하고 저 역시 성실히 대답하겠습니다.”
“네가 대체 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그때도 말했지만 나는 널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제 아버지는 황실의 연구원이셨습니다.”
“…….”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게 많습니다. 폐하께서 원하는 그 실험, 제가 도울 수 있다는 게 그 뜻입니다.”
“네 아버지는 어디 있지?”
기왕이면 눈앞의 소년보다 확실한 성인 남자의 도움이 더 필요했다. 그간 로빈이라고 인간 남자를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탄광을 돌아보고 귀족들의 손 안에 있는 노예들을 돌아봤지만 마땅한 인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나라 중앙에 위치한 황실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 황실은 10년 전 공격을 직통으로 받은 곳이기도 했다. 그곳을 탈출한 이도, 살아남은 이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요?”
아버지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기다란 식탁.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는 화려한 금촛대들. 천장을 수놓듯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샹들리에.
그리고 끝과 끝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자신의 모습.
“오헬?”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로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이프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식사를 멈춘 소년이 식은땀을 흘리는 듯 접시를 응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맛에 맞지 않나?”
“…….”
“폐하께서 묻지 않으시냐. 대답하라.”
리플의 엄한 경고에 이엘이 정신을 바짝 다잡으며 나이프를 다시 꼭 쥐었다. 그래……. 아버지를 물었지.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냐고, 그렇게 물었지.
“죽었습니다.”
“…….”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신들의 손에. 말을 마친 그녀가 밭은 숨을 모조리 모아 크게 내쉬었다.
그래. 죽었다, 아버지는. 10년 전에 이들의 손에서 죽었어. 그러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 식사를 해도 괜찮아. 아무도 내 멱살을 잡아채지 못해. 이제 괜찮아.
원망이 담긴 눈으로 볼 법도 한데 소년은 조금 전과 달리 다시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흐음. 로빈은 포도주를 입에 머금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네 아버지를 죽인 우리를 원망하고 있나?”
궁금했다. 과연 인간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기왕이면 증오하고 혐오하는 쪽이 좋은데. 내가 그러했듯이.
로빈이 엷은 미소를 동반하며 시원하게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글쎄요, 뭘 굳이 원망씩이나. 여유를 되찾은 이엘이 답하며 마주 웃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습니까?”
“…….”
“인간이 먼저 죄를 저질렀으니까.”
“…….”
“신을 대신해 누군가는 벌을 주었어야만 했죠.”
아버지가 죽은 건 아버지의 생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엘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다시 고기를 제 입에 넣었다.
하지만 아직도 손바닥 안이 축축하고 뒷골이 서늘했다. 언제라도 선황의 거센 손아귀에 목덜미가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이 무거웠다. 그는 죽어 없어졌는데도. 왜 아직도 죽어 버린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해야만 하는 건지.
아비란 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존재다.
“싱겁군.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데.”
증오는커녕 시원하다는 식의 표정을 보니 흥미가 떨어졌다. 로빈이 건조한 시선으로 잔을 흔들자 이엘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그보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아시다시피 제 아비가 연구원이었지, 제가 연구원인 것은 아닙니다. 실험을 위해 제게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연구실에 남아 있는 자료를 모아서 제게 주십시오.”
“그럼 네가 연구를 이어 갈 수 있단 건가.”
“네, 폐하. 그 정도면 가능합니다. 저는 어릴 때 연구실을 드나들며 수학했으니까요.”
불타 버린 황궁과 연구실. 그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난자를 보관하던 곳의 일부와 그 벽이 마주 닿아 있는 자료 보관소였다.
오드의 말에 의하면 그 자료 보관소를 습격했던 것은 뱀이었는데, 모두 불태우자는 다른 종족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중 몇 가지를 챙겨 빼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료를 중심으로 현재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로빈은 흥미가 동했다. 턱을 괸 채 그녀를 쳐다보던 로빈은 곁에 서 있던 리플을 향해 손짓했다. 리플은 비어 있는 로빈의 잔에 포도주를 익숙하게 따라 주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며 이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가능하다면 저를 그 연구실에 데려가 주십시오.”
“네가 직접 가겠다는 건가?”
“네, 폐하.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겠습니다.”
로빈으로서는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고작 인간 따위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얻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제안이었다.
이 정도면 오히려 로빈 쪽에서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뱀의 혼혈을 닮은 인간이, 뱀의 소굴에 들어와, 뱀이 원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다? 그것도 왕인 내게 우연히 잡혀 와? 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것은 무엇이지? 이 실험이 완성된다면 네겐 큰 소득이 없을 텐데.”
“제 목숨이죠.”
“…….”
“10년 전에도 살아남은 제 목숨이요. 제가 갖고 있는 유일한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