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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화 (11/488)
  • 11화

    “무슨 생각이야.”

    “글쎄. 그런 것까지 말할 정도로 우리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나. 동맹은 이미 깨진 것 같은데.”

    네 종족이 이 실험에 반대한다는 시점부터 말이지. 로빈의 말에 노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냄새가 나는 2층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뱀들은 인간과 사이가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조차도 꺼려하는 종족이었다. 실험을 명목으로 데리고 있다고 생각해 봐도, 실험실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인간을 굳이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물어본다고 한들 제대로 된 답을 들을지도 의문이고.

    그만 진정해라. 노아의 낮은 음성에 흥분했던 늑대들이 꼬리를 내리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커다랗게 부풀렸던 몸집이 다시 작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의 소굴은 올 때마다 끔찍하군. 덧붙여진 말에 이번엔 뱀들이 성을 냈다.

    “저런. 차가 아직 남았는데 더 마시지 않고 그냥 갈 셈인가?”

    “다시는 이딴 곳에 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 나 역시 개털 날리는 것이 싫으니 여기선 마주하고 싶지 않네.”

    “…….”

    “너무 우리를 나쁘게 몰아가지 말아 줬으면 해. 시간이 지나면 너도 우릴 이해할 거야. 우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거라고. 종족 번성을 위해.”

    로빈의 기분 나쁜 웃음을 뒤로하고 노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남아 있던 늑대들은 이를 보이며 으르렁거리다가 제 주인을 따라 나가기 시작한다.

    로빈은 그들이 다 나가고 나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괴이한 웃음은 점점 커져서, 위층에 있던 이엘에게까지 들렸다. 이엘은 접견실에서 들려오는 로빈의 웃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 귀를 댔다.

    대체 누가 온 건데 저 미친놈이 저러는 거야? 방문에 귀를 대고 들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분명 뱀들의 냄새에 섞인 다른 무언가의 냄새를 맡았다.

    이엘은 커다란 방 한쪽을 그득 채우고 있는 유리창 쪽으로 달려갔다. 조금 전 보았을 땐 캄캄하고 눅진하기만 했던 정원 위로 어떤 무리가 보였다.

    늑대…….

    늑대다.

    그토록 바라던 종족이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그 옛날 가장 가까웠던 종족이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늑대들 틈에 키가 멀쑥한 남자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늑대들이 엄호하다시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보면 저 사람도 늑대인 걸까?

    “우논일까?”

    커다란 늑대들 사이에 서 있던 남자는 습하게 변해 버린 영지를 돌아보다가 2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순 그와 이엘의 눈이 마주 닿았다. 이엘은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의 검은 눈동자에 홀려 창틀에 몸을 지탱한 채 가만히 그를 내려보았다.

    노아도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인간이 저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가? 인간이 아닌 혼혈인가?

    녹안……. 뱀의 눈동자였다. 하지만 바람에 실려 온 작은 냄새엔 순수한 인간 냄새가 옅게 흩뿌려져 있을 뿐이었다.

    “노아 님.”

    “…….”

    “폐하. 어서 이곳을 떠나시죠. 악취가 너무 고약합니다.”

    곁에 선 늑대의 말에 무리가 웅성거렸다. 다들 악취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털을 긁어 가며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노아는 잠시간 저와 마주 닿았던 인간의 눈을 응시하다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멍청한 뱀들이로구나. 결국 과오로 인한 벌은 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노아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레온으로부터 받은 서신이 들려 있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유일한 동맹이었다.

    레온. 그러나 너 역시 걱정하고 있겠군. 실험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기도, 인정하기도 어려울 테니.

    “아……!”

    그의 짙은 시선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이엘은 막혔던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짧은 탄식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서둘러 창틀에서 벗어나 침대 안으로 들어가 제 몸을 숨기고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며 흔들리는 제 몸을 어쩌지 못하고 두려움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그 남자가 이상한 능력을 쓴 모양이었다. 얼마나 힘이 세면 늑대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도 이렇게 위압감을 보이는 거지?

    역시 이종족의 눈을 견뎌 내는 건 어렵다. 보호석이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든 능력을 막아 낼 텐데. 하물며 총이나 검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우논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아……. 오드.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제발 나를 좀 구해 줘.”

    무능력함이 이렇게도 치가 떨리는 것이었나. 이엘은 두 눈을 꾹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난 괜찮을 거야. 호흡이 일정해질수록 머리가 다시 맑아졌다.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엘은 조금 전 보았던 희망을 떠올렸다.

    늑대. 분명 늑대 무리였다. 자신이 지상에서 찾아야만 하는 그 늑대를 조금 전 보았다.

    그래. 이온을 살리려면 늑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니 나는 이 성을 나가야 해. 이곳에 마냥 머무르며 오드의 도움을 바라기만 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 스스로 타개해야만 한다.

    깊은 숨을 돌린 소녀는 머릿속으로 탈출 계획을 하나하나 세우기 시작했다.

    *

    방 안은 지루했다. 갖추어진 것이라곤 그저 목조 가구와 크리스털 소재의 장식품이 전부였다. 커다란 침실에 단출한 가구들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엘은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으며 샹들리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유리 테이블로 발길을 돌렸다.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던 문명이 사라졌다. 이 커다란 공간에 딱 필요한 것만 갖춰진 것처럼, 그저 생존에 필요한 것들만 남은 땅은 활력을 잃어 간다. 그 속에 서 있는 자신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똑똑― 길게 늘어지는 노크 소리와 함께 창백한 낯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름이 리플……이라고 했던가? 이엘은 리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리플은 못마땅한 낯을 숨기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공기조차 공유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의 명령에 더 이상 불복할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들어선 그를 위해 이엘이 먼저 운을 뗐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녁 식사가 마련되었다. 나와서 들도록.”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리플의 시선에도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조차 체력 소모라고 생각했다.

    이엘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힐끔 쳐다보곤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뱀은 그녀의 그 작은 행동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역겹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엘이 땅 아래서 10년을 보내는 동안 그들의 먹이사슬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는 인간이 최하위 계층이었다. 이엘은 리플의 시선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알현실에서 늘 바짝 엎드려 있던 귀족들을 깔보던 아비의 눈빛이 딱 저랬다.

    특히 그들은 뱀을 저렇게 봤던 것 같다. 더럽고 냄새나고 역겹다고.

    이제는 내가 그런 위치가 되었구나. 그 사실이 딱히 충격적인 건 아니었다. 모두에게 칭송받고 사랑받는 황녀였던 시절에도 자신을 그렇게 버러지 취급하던 존재는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온이 아닌 이엘에겐 이 시선이 익숙했다.

    “내려왔나.”

    우습게도 1층 다이닝 룸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환하게 맞아 준 것은 로빈이었다. 제 왕이 선뜻 반겨 주니 다른 놈들도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게 이곳의 룰이었다. 이엘은 로빈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며 그가 안내한 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과거 귀족이었던 이종족들은 왕권을 각각 이어받아 왕이 되었다. 하나였던 제국 ‘르뷔’는 쪼개져 사라지고, 대신 여러 종족의 왕이 제게 속했던 영지를 하나의 나라처럼 다스리게 되었다.

    차기 후계자가 된다는 건 선대의 직계나 가능한 일이었다. 종종 승계권을 놓고 다툼이 있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순리대로 직계들이 작위를 세습했다.

    그러니 지금 이엘의 눈앞에 앉아 웃고 있는 뱀의 왕, 로빈도 선대 후작의 직계 아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뱀의 경우 방계도 승계권을 갖고 있지만, 능력이나 세력은 직계가 월등하므로 이렇게 탄탄한 지지층을 얻을 수 있는 건 직계뿐이다.

    땅을 올라오자마자 만난 게 방계도 아닌 직계라니. 그것도 그 끔찍한 뱀의 왕일 줄이야. 우논―이종족의 계급 중 제 1계급으로 제일 높은 계급―을 만나지 않게 조심하라던 오드의 말이 떠올랐다. 오드, 놀랍게도 이 사람은 우논일 뿐 아니라 뱀의 왕이란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전개라고 생각했다.

    대충 생각을 갈무리하며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이엘은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녀에겐 10년 만에 마주하는 첫 음식이었다. 그간 오드가 성력으로 구현한 허상을 씹어 삼키며 연명했다. 이따금 오드가 땅 위로부터 약초를 비롯한 열매를 가져와 먹기는 했지만 음식이라고 부를 만한 건 이게 처음이다.

    로빈은 잘 구워진 베이컨을 손수 접시에 담아 이엘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고 이엘은 접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로비엔 고아하고 차분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뱀의 왕은 제 잔에 담긴 포도주만을 입술에 적시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맛은 있나.”

    “네. 맛있습니다.”

    오헬― 로빈이 이엘의 이름을 길게 불렀다. 그녀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황족의 이름은 제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10년 전 전쟁의 목적을 추측해 볼 때 그들의 최종 목적은 황실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을 터였다. 치밀하게 이름을 지워 가면서 하나하나 제거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자신과 이온은 선황의 친자였으니까.

    물론 이엘과 이온이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닌 애칭이긴 했지만, 그녀는 땅 아래에 이온과 함께 자신의 모든 순간을 다 버려두기로 했다.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자기 자신은 땅 아래 묻어 두고 지금은 온전히 이온을 위해 살아가야 할 때였다.

    오헬. 오드가 땅 아래서 지어 준 이름은 이엘조차 여전히 어색한 이름이었다. 소녀는 쉬이 감기지 않는 제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로빈을 바라보았다. 로빈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혼혈은 아닌 것 같은데.”

    “네, 순수한 인간이에요.”

    “그럼 우리는 불순한가?”

    “…….”

    “생김새는 뱀의 혼혈인 줄 알았는데.”

    혼혈. 이종족과 인간이 정확하게 반씩 섞인 개체를 이르는 말로, 그들의 계급으로 따지자면 제 2계급에 해당하는 ‘둔’을 이르는 말이었다. 둔은 아니란 말이구나. 이어진 로빈의 말에 이엘은 포도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다. 뱀들은 인간이란 종족 자체를 싫어하기에 혼혈에도 차별을 심하게 두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신을 혼혈로 착각하고 흥미가 동하여 이곳까지 데려왔다는 건 정말 의외의 사실이었다. 이엘은 일전에 보았던 책의 내용을 곱씹어 보며 베이컨을 입에 담았다.

    로빈은 제 눈앞의 인간을 동공에 담았다. 흑발과 녹안을 동시에 가진 자는 뱀 종족밖에 없을 텐데.

    이전에 죽어 버린 황족 몇을 제외하고는.

    “어디 살지?”

    그의 추궁이 시작됐다. 이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숨겼지만 속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질문부터 그는 과거가 전혀 없는 그녀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은 10년 전, 2차 종족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인구가 반토막이 났다. 무려 절반 이상이 죽어 버린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여자를 죽인 이종족들에 의해 남겨진 건 힘없는 노인을 비롯한 어린 남자아이들뿐이었다. 겨우 살아남은 성인 남자의 일부는 최하위 계급인 노예로 전락했고 또 일부는 각 종족의 귀족층에 귀속되어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인간이 이룬 것을 송두리째 앗아 갔다. 생산적인 일이라곤 탄광업과 같은 것들뿐이었다. 심지어 폐허가 된 땅에서 농업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였다.

    애초에 이종족들은 인간의 식량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먹이사슬의 관계였기에 농사를 비롯한 것들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거기다 서로의 영역이 불가침 구역이니 통신과 운송 수단 역시 없어도 무관했다.

    그러나 반대로 통신과 운송 수단이 사라지니, 흩어진 인간들은 서로 만날 수단이 없어졌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인간들의 삶을 완전히 퇴보시켰다. 인류와 문명이라며 자랑하던 그들의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탄광이라…….”

    “…….”

    “잠깐 손을 내밀어 보거라.”

    의심을 쉽게 버리지 않던 로빈은 이엘의 앞으로 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이프로 고기를 썰던 이엘이 그 말에 손동작을 멈추었다. 밭은 숨을 참아 내며 이엘이 창백해진 낯으로 제 손바닥을 로빈의 앞으로 내밀었다. 로빈은 그녀의 손바닥을 낚아채 제 앞으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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