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 죄송합니다. 방을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습니다.”
“그래? 네 방 안에 두 개의 방이 더 있을 거야. 그중 하나가 욕실이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들어가.”
“목이 좀 타는데.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가져다줄 테니 명령이 있기 전까진 방 밖으로 나오지 마라.”
그는 선뜻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이엘은 별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엘이 순순히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로빈은 내내 웃고 있던 미소를 집어치우고 짜증이 섞인 얼굴로 주위에 숨어 있던 자들을 향해 손짓했다. 심복인 리플이 그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가서 인간이 먹는 것을 가져와.”
“왕이시여. 대체 저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납득해 달라는 말은 네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다. 그냥 그 정도로만 알아 두고 시키는 것만 하도록 해라.”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에 리플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측근 몇을 데리고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빈은 계단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까부터 코가 간지러운 것을 보니 성난 개들이 벌써 경계를 넘었나 보군. 쯧, 냄새를 너무 잘 맡아도 문제라니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개들이 먼저 오는 것 또한 문제다. 역시 뱀과 개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란 생각에 혀를 찼다.
“폐하. 노아 님이 오시고 계십니다.”
“냄새를 맡았나 보군. 접견실로 안내해라.”
“예.”
로빈은 제 방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향수를 칙칙 뿌렸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그 지독한 냄새는 10년 전을 기점으로 완전히 뱀의 것으로 전락했다. 늘 축축하고 구린 냄새가 난다는 인간의 악평을 들었던 뱀들이 이제는 인간의 냄새로 탈바꿈한 것이다.
뱀들은 인간을 역겹게 생각하면서도 인간의 것을 탐내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인간 본연의 냄새는 싫어하면서도 인간이 만들어 낸 냄새를 좇았다.
향수를 냉랭한 시선으로 보던 로빈이 향수가 담긴 유리병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곤 와장창 깨진 유리 조각을 구둣발로 자근 밟고 지나갔다.
접견실로 들어서자 성난 늑대 무리 여럿과 검은 제복으로 잘 차려입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로빈은 예의 미소를 지으며 노아의 앞으로 향했다.
노아의 곁에서 엄호하듯 서 있는 늑대 무리가 접견실에 우글거리는 뱀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옆에서 컹컹 짖어 대는 늑대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저런. 남의 집에 올 때는 애완견들은 다 두고 와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내가 왜 왔는지 너도 알고 있지.”
“글쎄. 개 냄새에 머리가 아픈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노아는 부러 제 성질을 건드리는 로빈의 도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접견실에 놓여 있는 검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일 뿐이었다.
로빈은 노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여유가 넘치는 그의 성격만큼은 호감으로 생각했다. 결국 로빈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뭣들 해? 손님을 위한 차를 대접해라.”
“예.”
로빈은 노아의 맞은편에 몸을 틀었다. 테이블 위에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이 나란히 놓였다. 마셔, 향이 아주 좋아. 그렇게 말한 로빈이 먼저 찻잔을 들어 마셨다.
늑대들은 털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킁킁거리며 노아를 톡톡 건드렸다. 노아 역시 로빈의 성에서 풍기는 냄새를 눈치챈 상태였다. 그의 바르게 정리된 이마 위에 주름이 잡혔다.
“로빈.”
“왜.”
“우린 허락하지 않아. 네놈들의 단독 행위에 대한 다른 종족들의 처벌을 각오해라.”
“단독 행위? 과연 단독 행위라고 생각하는 거야, 노아? 우리와 함께하려는 종족이 얼마나 많은데.”
“정신 나간 행위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아.”
“글쎄. 대체 왜 정신 나간 행위라는 거지?”
“…….”
“그리고 누가 우릴 처벌한다고?”
능글맞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빈 찻잔을 흔들거리던 로빈은 노아를 또렷이 응시했다.
짧은 흑발이 불어오는 얕은 바람에 흩날리자 노아는 일그러진 얼굴로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여기서 부는 바람은 습하고 기분이 나빴다. 짜증이 한층 더 솟구쳤다. 그는 한 줌 남은 인내심마저 버리고 로빈을 경멸하듯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
“그래도 예의는 차려 주지 그래? 우리가 예전의 그 일개 짐승은 아니잖아.”
“…….”
“한 무리를 이끄는 왕이면 언동도 그래야지, 노아. 고귀한 혈통답게 말이야.”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로빈의 말에 노아의 곁에 있던 늑대들이 더 성이 났다. 개중 일부는 벌써 몸집의 크기를 잔뜩 부풀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태세로 소파 주위를 에워쌌다.
로빈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개들은 제 왕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강한 게 탈이다. 쯧, 저러다 언제 한번 크게 다칠 테지.
“노아. 너도 알잖아.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닥쳐. 인간들이 하던 미친 행위를 하는 게 정상이야? 우리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기억 안 나?”
“그래, 맞아. 우린 그에 화가 나서 전쟁을 일으켰지.”
“…….”
“하지만, 노아. 이것도 알아야지. 우리로 인해 인간 여자마저 모두 죽어 버렸잖아?”
“…….”
“종족이 더 이상 번성할 수 없게 되었다고.”
“…….”
“진짜 멸망이 다가왔어.”
빈 찻잔에 다시 뜨거운 차를 채웠다. 그 차로 목을 축였지만 여전히 입맛은 썼다. 좀처럼 쓴 입맛을 바꿀 수가 없다. 로빈은 헛헛한 기분이 들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공허함을 채우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노아는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소파를 짚었다. 차분하게 깊은 숨을 내쉬며 화를 억눌렀다. 로빈은 지금 부러 제 성질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로빈은 노아를 힐끗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인간들의 말이 맞아. 우린 정말 멍청했어.”
“…….”
“복수랍시고 똑같은 행위를 하다니. 정말 멍청했어, 우린.”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했다.
더는 번식할 수가 없다.
뱀들의 경우도 동성 관계를 허가하고 종용했으나 무리 중 대다수는 여전히 암컷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이종족이다. 종족 번식을 제 1순위로 매기는 짐승, 이종족. 그들이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닌 번식이었다.
“우리라고 엮지 마.”
“오, 이젠 손까지 떼시겠다? 하하, 설마 혼자만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우리는 벌을 받을 거야. 신께서 주시는 벌은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
로빈이 잔을 입에 대며 웃었다. 벌을 받겠다고? 저렇게 멍청할 수 없다. 멍청하게 우리를 버린 신에게 의지하니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노아.
“로빈. 나는 아직도 네가 종족의 어린 자들을 홀려서 인간 여자들을 죽이도록 종용했다고 생각한다.”
“그것 참 끈질기네. 아직도 그런 오해를 받고 있다니. 그 일은 전쟁 이후에 일단락됐던 것 아니었나?”
“물론 죄에 크고 작음은 없으나, 그 끔찍한 계략의 대가는 네놈에게 배가 되어 돌아올 거야.”
10년 전, 인간 여자들이 모조리 죽어 버린 건 이종족들의 계획이 아니었다. 그들의 복수의 대상은 오로지 황족이었고, 황실의 중심지인 연구실이었다. 모든 악의 근원지였던 제도 내 연구소의 뿌리를 뽑는 것과 황족의 씨를 말리는 것만이 목표였다.
그런데 멍청한 몇몇 이종족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무자비하게 인간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땐, 이미 인간 여자는 모조리 죽어 버렸고 남자들 역시 절반 이상이 죽어 있었다. 말 그대로 일방적이고 잔인한 학살의 현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 개체들을 홀리고, 그것도 각 종족에서 마치 계획적으로 뽑아 가듯 홀린 게 정말 너랑 상관이 없다고? 그 멍청한 학살에 너희 뱀들은 일족이 전부 가담했는데도 관계가 없어?”
“심증만으로 날 너무 몰아세우지 마.”
“넌 분명 벌을 받을 거다. 네가 일을 저지르고, 수습하기 위해 또 일을 저지르는 멍청한 짓으로 인해 네 종족이 벌을 받는다는 걸 잊지 마라.”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넌 날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정말 우린 이 일에 무결해. 우리도 뭐에 홀린 것처럼 죽인 것뿐이라니까.”
로빈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여유롭게 대꾸했다. 노아는 로빈의 저 뻔뻔한 변명에 환멸이 났다.
전쟁이 끝나고 남겨진 끔찍한 미래에 각 종족들이 모두 책임을 떠안았다. 모든 종족의 일부가 인간들을 학살하는 것에 가담했기 때문에 결국 이 모든 일의 책임은 각 종족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되고 만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떠넘길 수도 없었다.
결국 같은 죄였다. 인간이나 저희나 모두 같은 죄를 짓고 말았다.
“우리 종족이 마음에 안 들겠지. 심증으로는 우리가 너희를 홀렸다고 생각할 테고, 지금 와서는 해서는 안 될 짓까지도 한다고 여기니까. 이해해. 그건 늑대와 뱀의 이해 차야. 그걸 굳이 늑대들에게 바라지는 않아.”
“…….”
“하지만, 노아. 정말 멸망이란 것이 오지 않으려면 지금 이 실험을 할 수밖에 없어. 실험실엔 여전히 인간의 난자가 남아 있으니까.”
물론 수는 극히 일부였고 살아 있는지조차 확인이 불가했다. 파괴됐던 황실 안에서 대다수가 불타 버렸고 아주 일부의 난자만이 보존되었다. 그것도 당시엔 다른 생물의 세포라고 착각하고 보존했던 것인데 뒤늦게 인간의 난자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유일하게 남아 버린 암컷의 존재. 흔적에 가까운 존재였다.
종족의 마지막 희망이지. 낮게 중얼거리던 로빈이 잔을 흔들며 웃었다.
“동의해 달라는 말은 안 하지만 전쟁은 하지 말자. 지금은 쓸데없는 것에 힘쓰기 싫어.”
“…….”
“게다가 지금 너희 종족들도 수가 꽤 줄어 있지 않나?”
이전의 뱀과 늑대의 수는 비슷비슷했으나, 당시 뱀은 암컷의 수가 훨씬 적었고 늑대는 암컷과 수컷의 수가 비슷했다. 로빈의 말대로 암컷이 전부 죽은 지금에 와서는 두 종족 사이엔 비교할 수 없는 전력 차가 존재했다.
노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게 아니어도 굳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 또 다른 종족 전쟁을 벌였다가는 이 땅 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게다가 공통의 적이 사라지긴 했으나 안심하긴 일렀다. 인간 여자는 사라졌을지라도 인간 남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끈질기고 영리한 생물들이다. 언제 또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타 종족과 전쟁을 해서 남는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노아는 욕심보다는 종족의 안위가 우선인 왕이었으니까.
“로빈.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네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린 그따위 멍청한 짓에 동의하지 않아. 우리 종족뿐만 아니라 타 종족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벌어지는 모든 일은 너희 뱀들이 온전히 책임져라.”
“당연히. 개들한테까지 빌붙을 생각 없어.”
끝까지 고상한 척하는구나.
너희 개들은 정말 잔인하지 않나. 우리가 인간에게 천대받고 더러운 시궁창에서 굴려지고 있을 때 너흰 뭘 했지? 역겨운 인간들과 한데 섞여 친구랍시고 웃고 지내지 않았던가?
아, 돌이켜 보면 제일 불쌍한 건 역시 늑대들인 셈이구나.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니 말이야. 로빈이 입꼬리를 비죽 올려 보란 듯이 비웃었다.
그의 말에 성난 늑대들이 참지 못하고 더욱 크게 몸집을 키우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노아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늑대들을 막아섰다.
“성 안에 숨겨 둔 인간은 뭐지?”
“역시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