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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화 (9/488)

9화

로빈은 침묵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 그건 바로 이 실험의 완성이었다.

이종족. 그들은 인간에 비하면 극히 무능력했다. 인간은 갖고 있지만 그들에겐 없는 것, 바로 지식의 욕구였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인간의 지식과 변함없는 이종족의 무식. 둘 사이의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지기만 했다.

전쟁으로 인간을 죄 몰살하고 난 이후로도 이종족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퇴보하는 세상을 넋 놓고 바라만 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뱀은 실험에 손을 대려 했다. 종족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인간들이 하던 실험을 잇기 위해 손을 댔다.

하지만 역시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 또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 실험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설계를 했던 ‘인간’의 힘이 필요했다. 지금 소년은 자신이 그 실험을 도울 수 있다며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엘은 고민하는 로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자는 분명 높은 신분의 우논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뱀의 왕과 연결될 터. 저 남자도 그 실험에 관심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그녀가 뱀에게 던질 수 있는 미끼는 하나였다.

“실험을 하고 계시죠? 제가 그 실험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이엘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전에 오드로부터 들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실험이었다.

생명의 창조. 인간이 감히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했던 멍청한 짓이었다. 인간은 유전자를 선별하고 조합하여 계속해서 다양한 개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종내에는 인간의 유전자와 이종족의 유전자를 섞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교만함은 10년 전의 공격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인류의 획기적이며 비도덕적인 실험이 어두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뱀을 비롯한 몇몇 종족에서 그 실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신들이 완전히 멸망시켜 버린 종족의 미래를 위해, 또다시 악행을 되풀이하려고.

“네가 어떻게 완성시킨다는 거지?”

“지금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반드시 약속드리겠습니다. 뱀들은 실험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관심이 아주 많지. 그 멍청이 같은 장난질에 세상이 파괴됐으니까.

“풀어 줘야 입을 열겠다는 건가?”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놈이군.”

그녀의 부모를 자처하던 오드의 목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뱀은 인간을 싫어해, 나의 엘. 그들과는 되도록 마주하지 않는 게 좋아. 그들이 네 몸을 꽉 조이면 넌 단숨에 삼켜질 거야. 위험은 미리 피하는 게 좋단다. 하지만.

“절 풀어 준다고 해서 당신이 손해 보는 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저는 겨우 인간 하나일 뿐인데.”

뱀이 한 번 똬리를 틀었다가 풀어 주면.

그때는.

“부디.”

넌 뱀보다 더 우위에 있게 되는 거야.

그때를 노려서 공격을 하렴, 나의 엘. 뱀의 머리를 콱 밟아 주렴. 그리고 도망치는 거야. 그게 뱀을 만났을 때 살아남는 길.

“자세한 건 당신들의 왕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을 뵐 수 있는 자리를 부탁드립니다.”

어느덧 우위를 점한 것은 인간 소년이었다. 소년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리자,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로빈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눈빛에서 이상하게 뱀의 냄새가 묻어났다.

로빈은 손을 뻗어 유리를 치워 버렸다. 소년에게서 그와 같은 냄새가 났다. 순수한 인간에게서 뱀의 지독한 냄새가…….

“목소리가 미성이라 여자애 같군.”

검은 뱀이 소년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의 차가운 손등이 닿을 때마다 불쾌한 기분이 들어 이엘은 미간을 찡그렸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피하지 않았다. 로빈은 한참이나 소년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처럼 소년의 등과 허벅지 뒤로 손을 넣어 품에 안아 올린 채 일어섰다.

“어, 어딜 가는 건가요?”

“풀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하지만 성을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 이상은 나도 허락하지 않아. 널 믿을 수도 없고.”

로빈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렇게 순해 보일 수 없었다. 이엘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져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감각이 돌아올수록 맞닿은 뱀의 가죽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차갑고 미끈한 그의 피부가 온전히 느껴진다.

이상하게 뱀과 닿은 부위가 차갑지만 또 뜨거웠다.

“다시 한 번 묻지. 네 이름이 뭐지?”

“……엘.”

“엘?”

“……오헬입니다. 제 이름은…….”

“성은?”

“차자였기 때문에 성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헬이라.”

기분 좋게 감기는 발음에 로빈이 또 피실 미소를 흩뿌렸다. 그가 웃을 때마다 왼쪽 눈 밑에 난 점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로빈은 한 번 더 힘을 줘 이엘을 제대로 고쳐 안은 채 제 방을 빠져나가 복도를 걸었다. 그의 발밑으로 뱀 여러 마리가 사사삭― 움직이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엘은 마취가 풀려 뻐근해진 목을 돌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바닥엔 온갖 거대한 뱀들이 잔뜩 우글거리고 있었다. 은신이 가능한 종족이니 보이지 않는 곳에 또 수백이 있겠지. 대놓고 정문으로 도망치는 건 어려울 것이라고 빠른 판단을 내렸다.

“여기 묵도록 해라.”

복도 끝에 위치한 커다란 방에 들어선 로빈은 이엘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와 발끝까지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된 이엘이 뻑뻑한 제 몸을 움직이며 풀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내려놓았던 그의 숨이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앉았다. 무거운 공기를 뚫고 남자의 숨결이 이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어찌…….”

“네가 싫다면 밖에 따로 경비를 붙이지 않겠다.”

“…….”

“왕을 만나 계약을 하고 싶다고?”

“네.”

로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치 귀중한 수집품을 모은 것처럼 그녀를 내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엘은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역시 뱀은 기분이 나쁘다.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거북함을 숨겼다.

“이미 넌 왕과 계약을 했구나.”

“네?”

“내가 바로 네가 찾는 왕이니까.”

당황으로 물든 눈이 조금 커졌다. 저 미치광이가 왕이었어?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산 너머 산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새에 침대 위에 다리를 접고 올라선 로빈이 시선을 맞춰 왔다. 그는 이엘의 짧은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 위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빨아들였다.

역시나 완전한 인간의 냄새다.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완전한 냄새. 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이종족의 것도 섞이지 않았다. 무결하고 순수한 인간의 피만 있을 뿐이다. 로빈은 숨을 확 들이켠 채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 소년을 놓아 주었다.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

“너는 내가 주웠다.”

그 순간 이엘이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오드가 덧붙였던 경고를.

“대답을 해야지, 오헬.”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겨우 그 정도로 떨어서야 되겠나?”

“…….”

“내 영역에선 모든 게 내 소유다.”

뱀은 지금 동성 간의 관계가 허용되고 있어. 특히 그들의 왕의 눈에 띄어서는 안 돼. 그 왕은 아름다운 자라면 닥치는 대로 모을 테니까. 나의 엘, 조심해야 돼. 알겠니?

“오헬. 계약 조건을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그는 네가 어떤 모습이 되었든,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아.

로빈이 나가자마자 이엘은 발끝부터 저려 오던 몸을 추슬러 상체를 겨우 세웠다. 머리카락과 맞닿은 살 곳곳에 차가운 뱀의 숨결이 남아 있는 기분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입술을 깨물며 무거운 발을 바닥에 내려 디뎠다. 다소 놀랐던 모양인지 심장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뱀은 무서운 집단이었다. 이곳에 오래 잡혀 있는 것은 좋지 않아…….

“오드. 어디 있는 거야, 대체.”

되짚어 보자.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 오드는 물을 찾으러 잠시 떠났고 자신은 뱀에게 잡혀 이곳까지 끌려왔다. 차라리 여기가 늑대나 타이곤, 혹은 독수리의 본거지였다면 사정이 나쁘지 않았을 텐데. 뱀은 좋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 돼.

이엘은 한참을 고뇌에 빠져 있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창가로 몸을 틀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칙칙하고 어두웠다. 분명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데도 땅굴보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자꾸만 보유스름하게 보이는 시야 탓에 뻑뻑한 눈을 박박 비벼 댔다. 탁해진 시야로 주변을 살폈다.

“나가야 돼.”

중얼거리듯 입술만 깨물며 창가 근처를 배회했다.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수선하던 마음을 정리하고 커다란 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이 머물게 된 방은 땅 아래서 살던 공간을 다 합친 것만큼 넓고 컸다. 조금 전에 정신을 차렸던 남자의 방은 이곳의 두 배쯤 됐다. 그가 자신을 왕이라고 소개했으니 여긴 왕성일 테고…….

“……뱀의 왕이라면 ‘로빈’이겠지.”

로빈의 얼굴을 떠올리던 이엘은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아냐. 그가 귀족이든 왕이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신경 쓰지 말자. 왕성의 전체적인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하겠지만 그래도 탈출구는 분명 있을 거야.

이엘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잠겨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문은 열려 있었다. 방 밖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로빈이 말한 대로 그녀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엘의 어깨는 누군가로 인해 뒤로 젖혀졌다. 끈적하고 짙은 향이 바람결에 밀려 들어오더니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왜 나왔지?”

로빈은 여전히 창백한 낯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정한 미소를 잊지 않았는데 그 대조적인 모습에 입이 절로 다물렸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욕실을 좀 사용하고 싶어서…….”

“안에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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