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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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막혔던 숨이 탁― 풀렸다. 이엘은 눈을 홉뜬 채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을 비롯하여 얼굴 일부분을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당황한 그녀는 눈알을 굴리며 제 몸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이엘의 눈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높다란 천장이었고 그보다 조금 아래, 시야에 더 가까운 것은 투명한 유리였다. 오드의 결계와 비슷한 용도이겠으나 눈에 보인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제 얼굴은 이상한 기구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 기구를 통해 인공적인 공기가 주입되고 있었다.
“깼나?”
낮은 음성이 부드럽게 들려왔다. 오드를 제외하곤 오랜만에 듣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몸을 뚫고 뛰쳐나올 것처럼 세차게 날뛰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동요하며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저 남자…… 대체 누구지? 왜 내가 여기에…….
“저런. 숨을 쉬어야지. 놀랐구나.”
다정한 음성에도 소년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로빈이 눈가를 휘어 접으며 유리창을 손등으로 쓸었다. 수집품처럼 전시해 놓은 모양새가 퍽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깨어나면 발버둥 칠 것을 고려하여 조치해 둔 것이었다.
쉬이― 놀란 인간을 진정시키려 한 목소리는 되레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가 낸 음성은 인간보다는 뱀에 더 가까운 소리였으니까.
“정말 아이로군.”
미간을 구기고 혀를 찼다. 그는 아이를 싫어했다. 거기에 인간의 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엘을 거리낌 없이 제 성으로 데려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로빈은 건조한 시선으로 겁에 질린 녹안을 바라보았다. 인간 소년의 눈동자는 마치 뱀의 혼혈처럼 아름다운 녹안이었다. 아니. 영롱한 빛을 내는 소년의 눈동자는 흉흉한 뱀의 것보다 더 반짝였다.
혼혈도 아닌 것이 혼혈의 것을 갖고 있다니. 너는 대체 뭘까.
“숨을 제대로 쉬어야지, 죽고 싶지 않다면.”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납치범이라고 보기엔 아무런 악의도 없는 눈동자였다. 멍하니 로빈을 쳐다보던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적으로 그의 목소리에 홀리듯 시선을 박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대체 오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긴 대체 어디야? 그리고 저 남자는 누구지? 인간인가? ……아니면 이종족? 저 남자가 이종족이라면, 검은 머리색과 녹색 눈동자. 그 종족밖에 없을 텐데.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메마른 눈빛으로 유리를 보던 남자가 옆에 서 있던 수하에게 턱짓을 했다.
“리플.”
“예.”
“유리를 치워라.”
“하지만 그건……,”
“괴로워하니 풀어 줘야겠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유리관을 응시하며 멀찍이 서 있던 리플이 긴 다리로 터벅터벅 걸어와 무언가를 눌러 유리를 걷어 냈다. 여전히 호흡기를 차고 두려운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는 소년에게 로빈은 손을 뻗었다. 순간 이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는 호흡기를 치우고 그녀의 목과 허리 뒤로 손을 넣어 몸을 세워 앉혀 줄 뿐이었다. 이엘은 끔찍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견디기 위해 애를 썼다.
“이름이 무엇이냐?”
“……누, 누구세어?”
역시 마취 때문인가. 딱딱한 혀가 잔뜩 꼬여 발음이 샜다. 이엘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로빈에게서 옆으로 조금 떨어졌다. 이엘의 움직임을 가만히 관망하던 로빈의 미간이 멈칫했다.
“성년이 지나지 않은 건가?”
“여긴 어디죠……?”
“미성?”
인간이라면 변성기는 한참 지났을 나이인데. 로빈의 중얼거림을 듣던 이엘이 순간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나 지금 남장으로 변복했지. 잠긴 목을 다듬지 않고 이엘이 텁텁한 음성을 그대로 내뱉었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은 내가 한다.”
별안간 손을 뻗어 제 턱을 거세게 콱 움켜쥔 로빈의 악력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빈은 그 상태로 이엘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바빴다.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 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것처럼 빼빼 말랐다. 게다가 어디가 아픈 건지 얼굴엔 혈색 따윈 보이지 않았고 또래 인간들보다 키도 좀 작은 것 같다.
그는 오랜만에 인간을 마주했다. 인간이라면 끔찍할 정도로 혐오하니, 그의 성에 인간의 냄새가 풍긴 적이 없었다. 역한 인간 냄새……. 저 멀리 서 있던 리플이 제 코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몇 살이지?”
“……열일곱을 넘었습니다.”
“이름은?”
“그걸, 말할 이유는 없잖아요.”
“제법이구나. 인간 주제에 함부로 대들기도 하고.”
이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여전히 따라 주지 않았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누가 조종이라도 하는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만 놔주세요.”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것인가?”
“대체 누구시죠? 여긴 어딥니까.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법 당돌하게 나오는 소년을 바라보며 로빈이 작게 웃었다. 그래, 맞아. 인간은 원래 이렇게 건방졌지. 언제나 저 더럽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경멸했었지. 한동안 보질 못했으니 이런 감각도 오랜만이구나.
한참이나 낄낄 웃고 있던 로빈이 줄곧 띠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 차갑게 이엘을 내려보았다. 이엘은 순간적으로 그의 시선에서 아버지의 시선이 겹쳐져,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긴 뱀의 영역이다.”
“배, 뱀?”
“그래. 뱀의 소굴이지.”
뱀의 소굴이란 말에 적잖게 당황한 인간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로빈은 리플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제 손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마치 불결한 것을 만졌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사이 다가온 리플은 아직도 마취가 풀리지 않아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이엘을 밀치다시피 다시 눕히고 유리를 덮어 버렸다. 이엘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쓰면서도 뱀의 영역에 와 있다는 현실에 좌절했다.
“인간을 어떻게 할까요?”
“첫 번째 실험실로 보내도록 해.”
“하지만 신원이 불분명한 자는 위험성도 높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은 줄 아나? 위험하고 자시고 그냥 실험실로 보내라면 보내. 내 말에 토 달지 마라.”
로빈이 딱딱하게 명령하자 리플이 고개를 조아렸다가 커다란 뱀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빈은 여전히 제 손에서 나는 듯한 인간의 냄새에 미간을 찡그렸다. 냄새가 지독하군. 잠깐 스쳤을 뿐인데도 이렇게 잔향이 심하게 남다니.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잠깐만요……!”
로빈이 걷던 걸음을 우뚝 세웠다. 겁에 질려 있던 것치고는 제법 강단이 실린 어조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르르 떠는 모양은 여전한데 눈빛엔 생존을 향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또 기분이 나빠진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나.”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풀어 주십시오.”
“뭐?”
“제발 저를 보내 주십시오.”
뱀에겐 볼일이 없었다. 그녀는 한시가 급했다.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라는 것을 감출 수 있는 건 겨우 열한 달. 그마저도 오드를 만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약을 받지 못하면 앞으로 겨우 한 달 정도를 버틸 수 있을 뿐이다.
한편 로빈은 굽히지 않는 인간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다. 살려 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풀어 달라니? 보내 달라니? 단순한 공포 때문에 조아리는 게 아니라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구는 소년의 태도가 비위를 거슬렀다.
저런 뻗대는 태도는 1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구는 인간이 존재했나?
“부탁드립니다. 제발 풀어 주세요.”
“계속 입을 나불거리면, 정말로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릴 것이다.”
“저를 이렇게 가두시면 당신은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미쳐 버린 놈인가?”
로빈의 얼굴은 경멸과 환멸로 뒤덮였다. 마치 죽이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이 이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녀였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것은 굴욕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으니까.
뱀. 이종족이면서 저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은 계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제 1계급, ‘우논’. 게다가 우논 수하가 있는 걸로 보아, 못해도 귀족 이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확률이 크다. 뱀은 이종족 중에서도 가장 인간을 혐오하던 종족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매달려야지.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몸을 굽히는 것 따위 아무렇지 않으니까.
“부디 저를 나가게 해 주십시오!”
“…….”
“부탁드립니다, 제발.”
감히 제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꼿꼿한 인간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형형했다.
같은 빛깔의 눈동자라 할지라도, 그가 갖고 있는 어두운 눈동자와 저 인간의 밝은 눈동자는 전혀 같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로빈은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눈동자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늘 저런 눈동자로 나를, 우리를…….
로빈이 그대로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지 인간은 유리창을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취가 덜 풀려 움직이는 데 꽤 힘이 들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게 아니라 멍청한 건가. 건조한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홀리듯이 그 유리창으로 걸음이 향하는 건…… 오로지 제 눈동자와 같지만 다른 색의 저 녹안 탓이다.
뱀의 혼혈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색을 내고 있는 것일까. 검은 뱀은 점점 인간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을 홀리는 건 늘 제 역할이었는데 지금만큼은 저 아름다운 눈동자에 자신이 홀리고 있었다. 저조차도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답고 투명한 눈동자.
탁한 내 것과는 본질부터 다르다.
“내가 널 풀어 줘야 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 감히 내게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만한 가치인지 설명해라.”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뭐?”
“지금은 답할 수 없지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가장 원하는 걸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