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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화 (6/488)
  • 6화

    요즘 레온이 괴로워할 때면 아랫것들은 이 어린 새끼를 레온에게 데려다주곤 했다. 예민하지만 또 그만큼 여린 제 왕께 휴식을 드리고자 하는 그들의 작은 배려였다.

    “나드. 잘 있었니?”

    마치 아기를 안아 들 듯 레온이 작은 사자를 품에 안아 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새끼는 타이곤(범사자)이었다. 아직 갈기가 미세하게 있었기 때문에 사자보다는 언뜻 호랑이의 새끼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저를 닮았다.

    소년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걸쳐졌다. 손가락을 새끼 타이곤의 입 안에 코옥 찔러 넣자, 작은 이빨로 그 손가락을 갉아 대며 크르릉―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레온이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 나드. 우유 먹으러 가자.”

    실험실에서 첫 번째로 만들어진 소년은, 실험실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새끼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땅 위 세상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엘이 머물고 있는 땅속은 여전히 고요했다. 오드는 깊게 잠든 이엘을 깨웠다.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한 뒤로 선잠을 자거나, 깊게 잠들었다 하더라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깨어 버리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오드가 한참이나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이엘은 오드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반대로 몸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이렇게 푹 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이엘. 잘 잤니?”

    “응.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아.”

    “아침이야. 뭐 좀 먹는 게 좋겠다.”

    “좋아.”

    이엘이 미소 지으며 침대 바닥을 손으로 짚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평소였다면 힘을 잔뜩 실어 발을 디뎌야 무릎이 펴졌을 텐데 어쩐 일인지 별다른 고통 없이 일어섰다. 두 손을 위로 치켜올려 기지개를 켰다. 뼈가 곧게 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과 상반되게 몸은 더없이 가볍기만 했다. 억지로 웃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다 잊고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러나 그 모습이 되레 죽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여, 오드는 안타까움에 시선을 돌렸다.

    *

    이 세계엔 크게 두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다. 하나는 신에게 선택받아 지적 능력으로 세상을 아울렀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똑같은 말과 생각을 하지만 그들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만 했던 ‘이종족’이다.

    인간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승리감에 도취됐고, 자신들 외의 존재를 하찮게 생각하더니 끝내 그들을 생명체로도 취급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간이 그렇게 무자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도 처음엔 모든 생물의 일부였다. 그들처럼 숨을 쉬었고,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했다. 그랬던 인간이 변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욕구’ 때문이었다.

    지적 욕구. 그것은 오로지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인간 본연의 것이었다. 인간들은 생존의 본능보다 지적인 것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똑똑해질수록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멀어졌고, 이기적이었던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인간은 더 이상 그 외의 존재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신에게 선택받은 유일한 종족이라는 미명 아래,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결국 인간은 그들 외의 이종족을 발아래 두겠다는 욕망을 품었고, 세상 모든 종족의 암컷을 죽여 버리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 때로는 그들의 친구였고, 때로는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이들을 죄악감 없이.

    20년 전에 일어난 1차 종족 전쟁이 바로 그 전쟁이었다. 말이 좋아 전쟁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대량 학살이었다.

    그리고 그런 미친 행위가 10년 전의 2차 종족 전쟁을 발발시켰다. 마찬가지였다. 1차 전쟁이 인간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면, 2차 전쟁은 이종족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뿌린 대로 거두었다. 결국 모든 건 인간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인간은 신의 노여움을 사고 커다란 죗값을 받고 만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이엘은 제 맞은편에 앉아 주변을 정리하는 오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인간은 이종족만 학살한 게 아니라 동족도 학살한 종족이다. 오드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오드. 너는 네 종족이 그립지 않아?”

    “글쎄.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너희를 멸족시킨 인간이 밉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우린 그런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 종말을 만든 건 인간이야.”

    “우리 종족도 인간이지.”

    “…….”

    “이엘. 나는 다 잊었어. 괜찮아.”

    그의 담담한 대답에 이엘은 말없이 빈 그릇만 쳐다봤다.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분노하고 증오한다는 답이 돌아왔다면, 이엘은 언제라도 그가 제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게 됐을 테니.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혐오스럽고 끔찍했다.

    “……너희를 죽인 건 인간인데, 왜 넌 아직도 인간을 두둔하는 거야?”

    오드의 종족은 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었고 신의 일을 대신하는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보통의 인간보다 오래 살았으며 더 똑똑하고 방대한 지식을 안고 태어난 자들이었다.

    처음에 인간들은 그들을 신의 대리자라 생각하며 추앙하고 존귀하게 여겼다. 성력으로 도움을 받았고 겸손한 그들을 동경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욕심은 늘어갔고, 신의 뜻과 어그러진 짓을 일삼던 인간과 신의 뜻만 따르는 나자르인들이 대치하는 경우도 조금씩 많아졌다. 마찰이 극심해지던 와중, 인간은 그들을 모조리 학살해 신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다.

    이엘은 유일한 생존자인 오드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그는 그녀에게 좋은 친구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죄의 꼬리표이기도 했다.

    “이엘. 우리는 모든 인간을 이해해. 인간은 나약하지. 하지만 신께선 그런 나약함마저 사랑하시는 분이야.”

    “과연 그럴까? 신께선 우리의 나약함을 사랑하시긴 해도, 우리의 악함마저 사랑하시지는 않을 텐데.”

    “엘. 그렇게 말하지 마. 나는, 우리는 너희를 원망하지 않아. 너도 네 자신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

    “이미 늦었어.”

    “황손은 너와 이온이 유일해. 스스로를 미워해서는 안 돼. 그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면 충분하니까.”

    “……홀로 남았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그동안은 잘 몰랐어. 미안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란 걸 알잖아. 나의 엘, 그런 생각 하지 마.”

    아니. 이제야 절감했다. 자신은 그간 알면서도 외면해 온 것이다. 오드를 볼 때마다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죄악감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온이라도 있었다면 그와 반씩 나눴을 죄책감을, 오롯이 홀로 감당하는 게 버거워 외면하고 말았다.

    오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놔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드가 없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이엘이 오드를 향한 제 양심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1년 전 그날부터였다.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인간 여자, 그리고 동시에 유일한 암컷. 그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위치였다.

    인간은 나약했다. 만일 신께 선택받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절대 모든 생물 위에 군림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 인간 중에서도 힘이 없는 여자는 인간 사이에서도 유린당하는 존재였다.

    그런 여자가 이제 저 자신뿐이다? 홀로 남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당한 고통을 동반해야만 했다. 땅 위 세상에서 여자인 이엘은 바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자식을 낳아 줄 암컷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이종족들이 태세를 전환해 그녀를 통해 강제로 종족 번성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전자든 후자든 역겹고 괴로운 건 매한가지였다. 내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삶은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엘. 아직 피곤하니? 조금 더 자도 괜찮은데.”

    “아니, 괜찮아. 지금 내겐 잠잘 시간도 아까운걸.”

    그리고 내 의지로 고른 첫 선택엔 이온의 목숨이 묶여 있었다. 목소리는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유혹했지만 이엘은 그런 거창한 이유로 결계를 넘었던 게 아니다.

    이온을 죽일 것만 같아서. 그나마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미련을, 그가 가볍게 끊어 버릴까 봐. 그저 그뿐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앗아 가, 자신의 존재를 지울 것만 같아서. 내 삶의 의지를 끊어 버릴까 두려워서.

    이엘은 물끄러미 납작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괜히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뭐가 있던 것도 아닌데, 괜히 공허함이 번져 간다.

    “엘. 다른 생각은 하지 마.”

    “…….”

    “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미 날 때부터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데, 과연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애당초 행복이란 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건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물끄러미 이엘을 바라보던 오드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엘. 네게 줄 선물이 완성됐어. 받아 줄래?”

    “대체 그게 뭐야?”

    그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오드는 대체 뭘 만들었던 것일까? 줄곧 지켜보면서도 잘 몰랐지만, 확실한 건 오드가 그것에 온 정성을 들였다는 사실이다.

    “이건…….”

    미간을 찌푸리는 이엘의 앞으로 녹색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다가왔다. 지독한 향이 코를 찔렀다. 어디선가 맡아 본 것 같으면서도 생경하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유리병에서 고개를 돌리자, 오드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며 다시금 건넸다.

    “이게 뭐야, 오드. 냄새가 지독해.”

    “마셔야 돼.”

    “뭐? 이게 대체 뭔데? 토 나올 것 같아.”

    “네게 꼭 필요한 액체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냄새가 너무……,”

    “성별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니까.”

    “…….”

    “바깥세상의 이종족들은 냄새를 비롯한 온 감각이 예민해.”

    보통의 인간보다 후각이 조금 더 예민해진 이엘에겐 괴로울 만큼 끔찍한 악취였다. 소매로 코를 가리며 미간을 찡그리는 이엘을 대신해 오드가 손수 마개를 열어 주었다.

    “지금 네 모습으로 땅 위로 올라간다면 넌 바로 들키고 말 거야. 그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네 자신을 지키고 싶다고 했잖아. 나지막한 말과 함께 그녀를 향해 거듭 내밀었다. 이엘은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유리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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