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화 (5/488)
  • 5화

    이엘은 그 순간 충격과 비참함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 나도 아버지와 다를 게 없구나. 바라지 않았다는 이유로 딸을 버린 아버지나, 원하는 것 하나 얻겠다고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바치는 나나.

    ― 그 첫아이를 볼모의 대상으로 두지.

    “…….”

    ― 너의 첫아이는 내 것이다. 약속을 어기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내게 바쳐야 한다.

    “나는…….”

    ― 뭐, 네가 갖지 않으면 내가 빼앗을 일도 없으니 그 마음이 변치 않으면 된단다.

    신을 떠난 나는 이미 더러워진 존재가 되었음을. 그 순간 뼈저리게 절감하며 눈을 감았다.

    *

    “엘.”

    “생각 없어. 조금만 잘게.”

    “…….”

    “미안해. 긴장돼서 그런가 봐. 몸이 안 좋아, 정말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오드는 이엘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했다. 이온의 방에서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가 만들었던 결계의 일부가 찢어져 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예상했으리라.

    “미안해, 오드……. 미안해.”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

    “…….”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 내가 선택했으니 내 잘못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신을 버렸다는 죄책감, 지키고 싶지 않은 거래에 관한 거북함. 온갖 감정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쉬어, 나의 엘.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응.”

    “그때쯤이면 선물도 완성될 거고.”

    “응…….”

    이마 위에 다정한 입술이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이엘은 헛헛해진 제 아랫배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

    고요한 땅속과 달리 폐허가 된 땅 위, 북쪽에 자리 잡은 늑대의 영지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쾅 소리와 함께 검은 문이 벌컥 열렸고 크르릉― 짐승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듯 가득 울려 퍼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늑대가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하여 거세게 달려갔다. 커다란 홀을 미친 듯이 달려가던 늑대는 왕좌의 바로 앞에서 순식간에 사람으로 변했다.

    “두 종족이 더 넘어갔습니다.”

    “…….”

    “폐하. 이제는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

    “폐하.”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캄캄한 성 안처럼 그의 옷은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머리도, 눈동자도. 모두 검게 탄 재처럼 새카맸다.

    그러나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초점 없이 제 앞에 선 남자를 볼 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왕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이제 저희도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할 듯합니다.”

    “웃기지 않나. 인간과 똑같은 짓을 하자고 모여들다니.”

    “…….”

    “어리석어.”

    오늘도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제 왕을 바라보며 남자가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남자는 왕의 손에 담긴 잔을 빼앗았다. 그는 가까운 곳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조용히 속삭였다.

    “노아. 그만 마셔.”

    “…….”

    “네가 이럴수록 어린 개체들은 불안해하잖아.”

    “형. 그만.”

    “…….”

    “참견은 거기까지. 그만.”

    짜증이 섞인 왕의 대답에 남자는 무릎을 꿇으며 다시 격식을 차렸다.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던 노아가 한숨을 내쉬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달이 희뿌연 연기와 함께 성 안을 비추고 있었다.

    달이 참 예쁜 밤이었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가 알게 모르게 손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얘기도 더러우니까 그만하자.”

    노아는 그 일에 관하여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었다. 그는 후회를 하지 않는 종족이었고 선택에 따른 책임은 충분히 져야 한다고 여겼다. 20년 전에 인간이 저질렀던 짓을 똑같이 저질러 버린 모든 종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후회를 하게 된다. 왜 놈들을 전부 믿었을까. 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만하고 나가. 안 그래도 머리 터져서 죽겠으니까.”

    남자는 짧은 한숨 끝에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겨진 노아는 창문 밖에서부터 어스름히 느껴지는 달빛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커다란 달을 무척 좋아했다. 달이 비추는 새벽이면 늘 영지 밖을 나가 곳곳을 돌아다니는 게 어린 시절의 행복이었는데.

    텅 비어 버린 영지를 내다보니 허탈함과 후회로 온몸이 괴로웠다. 결국 똑같은 짓을 저질렀으니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우리의 죄였다.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 건지 바닥에 흩어져 있던 늑대 몇 마리가 일어서 다가왔다. 늑대 무리는 노아의 곁으로 감히 다가가지는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그만 나가. 괜찮으니까.”

    끼이잉― 앓는 소리를 내며 여전히 방황하는 늑대들에게 다시 한 번 손짓을 했다. 결국 늑대들은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홀에 홀로 남겨진 노아는 습관처럼 창밖 너머, 엉망이 되어 버린 정원을 쳐다보았다.

    “신께서 용서해 주시길 바라는 건, 인간만큼이나 이기적인 거겠지.”

    신의 용서를 바라고, 그분이 원치 않으시는 일을 막는다면……. 우리는 이 끔찍한 멸족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신께서 용서해 주실까. 노아는 후회로 뒤범벅된 눈을 감아 버렸다.

    *

    만월도 아닌데 커다랗게 뜬 달을 바라보며 금발의 소년이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의 친구는 언젠가부터 이런 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 지금쯤 또 어디서 헛구역질을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혼자 후회하고 있겠지.

    소년은 의자에 앉아 노곤한 눈을 꾸욱 눌렀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겪어 본 이 밤이지만 최근 들어 유독 음산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풍겼다. 짐승의 본능은 정확했다. 며칠 이내로 무슨 사달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로.”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조금 작은 체구의 꼬마 아이가 안으로 총총 뛰어 들어왔다. 로를 바라보는 소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로는 이제 겨우 서른 살을 넘긴 어린 이종족이었다.

    소년의 무리는 모두 작은 편에 속했는데 그중에서도 로는 눈에 띄게 작았다. 연구실에 붙잡혀 온갖 실험을 당하느라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 봤을 땐 더 작았다. 지금은 제법 살도 올랐고 군데군데 보이던 상처도 희미해졌다. 확실히 성장이 더디긴 했지만, 그래도 잘 자라고 있었다.

    소년 왕은 로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로.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노아에게 다녀올 수 있어?”

    “노아 님이요? 하,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로의 표정이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그런 로를 바라보며 소년이 다시 빙긋 웃더니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들고 가면서 이것을 보여 주면 돼. 그러면 괜찮을 거야.”

    “알겠습니다.”

    “미안해, 로. 이런 일을 네게만 시켜서.”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명령하시는 건데, 왜 제게 미안해하세요!”

    로는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보이면서까지 거세게 흔들었다. 그런 로를 바라보며 레온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직 어린 개체임에도 제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건 로뿐이었다. 왕으로서 내리는 마땅한 명령임에도, 소년은 자신이 없어 미안함을 느꼈다.

    “이 편지를 들고 가서 노아에게 보여 줘.”

    “네, 알겠습니다!”

    로는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갑작스레 사라진 온기에 레온이 쓸쓸한 건지 괜히 꺼칠해진 제 팔뚝을 슥슥 쓰다듬었다.

    최근 들어 종족 간 신경전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공통의 적이 없어지다 보니 이제 슬슬 저희끼리의 먹이사슬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동맹으로 엮인 늑대들과는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체들은 다른 종족의 영지로 가는 것을 꺼려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우람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레온은 보던 서류를 정리하며 그를 맞았다.

    “무슨 일인가?”

    “폐하. 아무래도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일?”

    “뱀이 실험을 재개할 듯합니다.”

    “뭐?”

    “게다가 뱀과 손을 잡는 종족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종족 간 전쟁이 벌어질 수 있어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이 정보는 다 퍼진 건가?”

    “네, 폐하. 아마 늑대 무리에도 전달이 갔을 겁니다.”

    “늑대들은? 뱀의 손을 잡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러나 대놓고 맞서지도 않습니다. 그냥 두고 보시려는 것 같습니다.”

    “멍청한 인간들이 했던 짓을 또 하겠다고…….”

    완전히 돌았군. 레온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나가 보게. 수고했네.”

    “예, 폐하.”

    레온은 갑작스레 밀려온 피곤함에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금빛 머리를 흔들어 댔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밝게 빛났다.

    일단 아직까진 노아가 왕위에 있으니 늑대도 그 미친 짓에 참여하진 않을 것이다. 신실하고 책임감 있는 그가 신을 저버릴 리 없으니. 그러나 대놓고 비난하거나 대치하지는 않겠지. 그러기엔 여러 가지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버렸으니까.

    소년은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메스꺼움에 잠시 눈을 감았다. 인간이 저희에게 한 짓을 잊어버리고 지금 그 일을 따라 하고 있다니. 완전히 미쳤다. 그깟 종족 번식이 뭐라고……. 레온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멍청한 놈들이구나.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는 제 손에 걸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은 그 연구를 혐오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둔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 미친 행위로 인해 태어난 것이 제 종족들이기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종족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모순된 마음을 안고 소년은 한숨만 내쉬었다. 부디 더는 그 미친 행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할 텐데. 더는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안고 태어나는 종은 없어야만 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때였다. 밖에서 낑낑거리는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던 레온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소년은 서둘러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는 카펫 위에서 몸을 데구르르 굴리고 있는 작은 짐승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