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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화 (4/488)

4화

중성적인 목소리는 듣기에 따라 거칠게 느껴지기도 했고, 부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안에 실린 위압감 때문인지 그녀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잔뜩 짓눌렸다.

저렇게 협박하는 게 ‘자신이 믿는 신’일 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자신의 뒤엔 볼모가 될지도 모르는 이온이 잠들어 있어서.

마치 그녀를 반겨 주기라도 하는 양, 조그맣던 틈새가 와자작 찢어지고 갈라지더니 금세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엘은 주저함을 삼키고 그 공간 너머로 건너갔다.

새하얗다. 언제나 어두컴컴하던 땅굴과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단지 환한 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숨통이 터졌다.

― 어서 오렴, 착한 아이야.

“……왜 저를 부르셨나요?”

― 나는 네가 믿는 신이니까.

“…….”

― 저런. 이걸 두고 믿음이 좋다고 해야 할지, 믿음이 없다고 해야 할지.

형체 없는 목소리뿐인데도 그가 비죽 웃는 듯한 모습이 그려졌다. 이엘은 긴장을 놓지 않고 주먹을 바르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온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건너오기는 했지만, 제 삶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의지를 눈치챈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다정하게 말을 붙여 왔다.

―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네 편이란다.

“그걸 어떻게 믿죠?”

― 나는 많고 많은 인간들 중에 너를 골랐어. 땅 위엔 너만큼 괴롭고 힘든 인간들이 수두룩한데도 말이야.

“당신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데,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제겐 어떤 이익도 없어요.”

― 맹랑하구나.

흐음, 그래. 어디 보자……. 목소리는 한참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주변을 뱅뱅 도는 듯했다. 이엘은 허벅지에 묶어 두었던 단검의 위치를 떠올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들어왔던 구멍은 여전히 뚫려 있는 상태였다. 여차하면 돌아가면 돼. 돌아가서 이온부터 숨기면…….

― 그래, 구멍은 계속 놔둘 테니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가렴.

“…….”

― 나는 이토록 네게 호의적인데, 너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 서글프구나.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이제 말씀해 주세요.”

벼랑 끝으로 몰렸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고, 더 나아질 것도 없다. 그래서 이엘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오빠의 생명을 갉아먹고 대신 살아야 했던 그날부터, 아니. 아주 오래전, 오라비의 양분을 빼앗아 먹었던 어머니의 배 속부터. 이온을 위해 사는 게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무서울 것도 없다. 아득한 상황에서 더 굴러떨어져 봤자,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밖에 없을 텐데. 괜찮아, 네 안전만 확보한다면 나는 괜찮아.

― 너는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나는 신을 저주하는 존재이다.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비틀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괜찮아…….

― 신이 너를 남겨 둔 이유는, 너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였겠지만.

“…….”

― 나는 너를 통해 신이 만든 이곳을 무너뜨릴 생각이란다.

“제가 싫다고 대답하면요?”

손바닥 안에 손톱자국이 생길 만큼 주먹을 꽉 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신을 버리는 일. 너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면…….

다음 순간 이엘의 눈앞에 보인 건 곤하게 잠든 이온의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힘에 이온이 무력하게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갈라졌던 틈새로 이온을 보여 준 목소리는 다시 그녀를 향해 사근사근히 말을 건넸다.

― 네 마음속에 있는 원한. 너를 이렇게 땅으로 처박아 버린 이종족들과 이 사달을 만들어 낸 인간들. 복수하고 싶지 않니?

“…….”

― 자, 얘야. 내가 힘을 빌려줄 테니, 내 손을 잡으렴.

내 존재는 오로지 오빠를 위해서 쓰였다. 스푼을 들 때도, 걸음걸이 하나에도, 심지어 드레스를 입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용당했다. 선택권을 쥔 적도 없었고 쥘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원망한다. 계속해서 떠밀리고 굴려지는 자신의 삶이 너무 통탄스러워서, 신께 감히 원망을 품었다. 그렇게 희생만 당했는데도 결과가 이 모양이라서. 그래. 그분이 그토록 사랑했다던 이 세상 따위……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지 않나. 이깟 세상이 무너지든 말든, 버려진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 이종족은 번식 욕구를 억누르지 못할 것이고, 인간 남자는 성욕에 눈이 멀 테니.

“저는 또 이용을 당하겠네요.”

― 네가 역으로 이용하는 수도 있지.

“제가 무슨 수로요? 아무런 힘도 없는 제가요?”

― 전쟁.

그 끔찍한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숨 쉬던 피붙이를 앗아 간 그날이 떠올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 이종족을 이용해 인간 남자들을 죽이고 억누르렴. 서로 싸움을 붙이는 거야.

“어, 어떻게 그런…….”

― 왜? 두렵니? 네가 먼저 찌르지 않으면 찔리는 건 네가 될 텐데?

“…….”

― 이종족을 이용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네가 새끼를 낳아 준다고만 하면 알아서 들러붙을 테니. 놈들은 흘레붙기 위해 눈이 멀어 있거든.

이엘은 참담함으로 물든 얼굴을 두 손바닥 안에 숨겼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야…….

― 네 오라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야지.

끔찍할 정도로 똑같은 소리였다. 아버지였던 선황이 저를 볼 때마다 했던 말이 또다시 들려왔다.

― 살리고 싶다며.

“제발…….”

― 얘야. 네게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란다. 네가 굳이 새끼를 낳아서 후손을 남길 이유가 뭐니? 너만 아이를 갖지 않으면 어차피 모두가 멸종할 텐데.

어느 순간부터 이엘은 제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자꾸만 자신을 붙잡고 옭아맸다. 차갑고 무거운 쇠사슬이 목덜미를 옥죄며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 저들이 잘못한 짓을 왜 네가 책임져. 너는 그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어.

“…….”

― 저들은, 황가의 핏줄인 너희 남매를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인간이라고 뭐가 다르겠니. 이 꼴을 만든 너희를 그들이 순순히 받아 줄까?

“왜…….”

― 하지만 네겐 저들 모두를 흔들 열쇠가 있단다. 응? 네 오라비는 네 손에 달렸어.

악마의 속삭임이 이토록 지독하고 괴로울 줄이야. 흐려진 눈앞에 악마의 손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 손을 잡으면 신을 버리는 꼴이 된다. 하지만 잡지 않으면 이온이…….

― 자, 어서. 네 오라비가 깨어났을 때 위태로웠으면 좋겠어? 흔들리는 지지기반에서 네 오라비는 목숨이 노려질 텐데?

“…….”

― 신을 버려. 네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신 말고, 나를 택하렴. 나는 네게 힘을 주고 지켜 주지. 네 오라비와 너, 지켜 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닌걸.

“…….”

― 깨어난 네 오라비를 위험으로부터 지켜 줄게. 이미 신은 너흴 버렸고, 버려진 너희가 갈 곳이란 아무 데도 없어.

“…….”

― 새로이 만들 내 세상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니.

어차피 이온은 살아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황제가 되어도 너무 약해서 위태로울 거야. 아버지의 말씀이 옳아……. 나는 이온을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내가…… 오빠의 지지기반이 되어야만 해.

황좌에 앉은 이온의 모습을 상상했다. 멸망을 목전에 둔 땅이지만, 그래도 그 자리가 네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미 버려진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네가 새롭게 통치하는 걸 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듯해.

그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렇게라도, 내가 존재했다는 걸 네게도 알려 주고 싶어.

나는 이런 지독한 방식으로 너를 사랑하고 아껴. 내 하나뿐인 피붙이.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거야.

설령 신을 버려 악마와 손을 잡더라도.

신께 벌을 받더라도…….

― 걱정 마렴. 나는 너의 안전을 책임져 줄 테니까. 나를 부르면 네게 나타나 주마. 피하고 싶으면 내게로 피하면 된다. 내가, 너를 감춰 줄 테니.

그렇게 계속해서 신에게서 멀어지고 악에게 가까워지는 거겠지. 그의 수법이 선하게 보이는데도 신을 떠난 지금, 달리 갈 곳이 없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텅 빈 공간 안에서 찬바람이 불어와 이엘의 뺨을 긁었다. 샅샅이 훑는 것처럼 한기는 그녀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흘렀다. 갑작스런 한기에 몸을 움츠리던 이엘은 별안간 찾아온 복통에 상체를 숙였다.

“아……!”

뭔가가 몸 안에서…….

― 씨앗은 네가 원할 때까지 내가 갖고 있으마. 갖고 싶으면 다시 나를 불러.

“……피임을 말하는 거예요?”

― 내 계획을 이뤄 주려면 네가 아이를 갖지 않는 편이 좋거든.

“저는 불임이 된 건가요?”

― 아니. 불임은 쓸모가 없어. 그래서는 이용만 당할 텐데.

“…….”

― 적어도 이종족을 협박할 상태는 되어야지.

내 ‘쓸모’의 기준은 그런 거구나. 이엘이 자조하듯 웃었다. 그래, 아예 불임이 되면 쓸모가 사라지겠지. 적어도 임신이 가능해야 이종족에겐 가치가 있을 테니……. 흘레붙는…… 됐어. 됐어, 그만 생각할래.

그래도 아이를 갖는 것 정도는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좋아요. 네, 그럴게요. 당신이 준 그 ‘힘’을 이용하고 악용해서……. 그래요, 보란 듯이 망가뜨릴게요. 다만 부탁이 있어요.”

― 말하렴.

“오빠를 깨워 주세요. 살려 주세요…….”

― 저런. 죽은 생명을 살리려면 대가가 필요하단다. 그건 부탁이 아니라 거래야.

“…….”

―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

그건 생명이다. 목소리는 그녀에게 또 다른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 네 목숨을 주겠니?

“…….”

입이 벌어진 채 다물리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지만, 입 밖으로 나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깟 목숨, 이온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웃었다. 깔깔깔, 소름 끼치는 쇳소리에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 그래, 너도 살고 오라비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나는 너희 남매가 모두 살아남길 바라, 나의 세상에서.

“…….”

― 땅 위에서 구한 재료로 네 오라비는 살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하렴. 그편이 내겐 더 재밌거든.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온을 살리기 위한 것들이, ‘그’에게 재미를 주는 건지. 그게 얼마나 자신을 괴롭게 만들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 그런데 말이야. 혹시나 네가 아이를 가지고 싶을 수도 있잖니?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만나서 아이를 갖고 싶다고 나를 찾으면, 나를 속이면, 내가 널 선택한 의미가 사라지는 건데. 내가 방심한 틈에 네가 씨앗을 남겨 두면 곤란해.

“그럴 일 없어요.”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자신에겐 누군가의 부모가 될 자격이 없었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자격도 없었다.

― 네가 나를 믿지 못하듯, 나도 너를 믿지 못하겠는걸.

“그럼 당신이 아이를……,”

― 그래. 네가 갖게 될지 모르는 첫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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