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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화 (3/488)
  • 3화

    오드의 마지막 말은 끔찍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일순 숨이 멈추기까지 했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웠다. 컴컴하고 갑갑한 공간에서 무려 9년을 숨어 살았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하나 붙잡고 그렇게 살았는데, 왜…….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황궁에서의 생활도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폭언과 감금에 진저리가 났지만, 그럼에도 숨 쉴 만한 곳은 존재했다.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땅 위로 올라가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숨만 쉬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거야? 그냥 빛 좀 보고, 숨 좀 쉬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왜 나한텐 이렇게도 어려운 거야……. 이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 돼. 안 된다고.”

    “이엘.”

    이엘은 제 머리를 부여잡고 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신이시여. 정녕 저를 버리신 건가요? 제가 또 당신의 시련을 견뎌야만 합니까? 안 됩니다, 제발 저를 이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세요. 제발 저 좀…….

    작은 등이 잘게 떨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슬픔으로 짙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제 아버지의 벌을 자신이 홀로 받아 내고 있는 것이라고. 언젠가 저질렀던 그 미친 짓이 결국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핏줄이기에 대신 벌을 받고 있노라고.

    아― 아버지. 선황이시여. 당신이 지은 죄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암컷을 죽여 버렸기에, 그들도 인간 여자를 모두 죽였답니다. 당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받지 못한 딸인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하다니.

    당신의 존재는 왜…… 죽어서도 나를 괴롭히는 걸까.

    “이엘.”

    “…….”

    “이제 정신이 들어?”

    오드가 조심스럽게 물어 오며 한 발짝 다가왔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실을 억지로 받아들였다.

    그래, 오드의 말이 맞다. 그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인간이 그 수많은 이종족들의 암컷을 죽였던 것이 사실이듯, 그들 또한 인간 여자들을 죽였다.

    인간은 너무 약하고 여자는 그중에서도 더 약한 위치였다. 전세가 뒤바뀐 형국에 인간 여자를 몰살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그들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대로 돌려받았구나. 결국 신께선 인간을 완전히 버리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네가 클 때까지 조금 기다려야 했던 거야, 이엘.”

    “그래…….”

    “이제야 이런 소식을 전해 줘서 미안해.”

    “아냐. 일찍 알게 되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 오히려…….”

    오히려 공포에 떠는 시간만 길어졌겠지. 뒷말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나는 땅 아래 사는 것이 최선인 걸까. 이온이 깨어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나은 삶일까? 깨어날지, 깨어나지 못할지 알 수 없는 오라비를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인 걸까?

    이엘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젖어 있다가 작은 입술을 열어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오드는 묵묵히 이엘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주저함 끝에 터져 나온 대목은 그녀의 전부를 묻는 물음이었다.

    “오드. 오빠가 깨어날 확률은 얼마니?”

    “글쎄. 나도 자신할 수는 없어.”

    “그러면…… 너의 결계가 사라지면…… 우리 오빠는 죽어?”

    안타깝게도. 오드는 작게 말하며 이엘을 바라보았다.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다. 자신의 처지조차 버거운 이엘에게 짐을 주는 것 같아, 오드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땅 아래서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는 말했지만 이온이 깨어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결국 이엘은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나서야 했다.

    “잠깐만. 조금만 더 생각할게.”

    이엘은 이온이 필요했다. 유일한 황족, 저와 이온. 세상에 하나뿐인 피붙이, 쌍둥이. 그가 있어야 인간이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할 수는 없다. 보란 듯이 잘살 수는 없더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해지고 싶었다.

    “엘. 괜찮겠어? 네가 이온을 책임질 필요는 없어. 그런 것까지 떠안지 않아도 돼.”

    “…….”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네 말대로 정말 1년이 찰나처럼 빠르게 흐르겠어. 이엘은 작게 읊조리며 돌아서 제 침실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엘이 사라진 뒤에도 오드는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이엘의 뒤를 지켜봤다. 저 작은 등이 단단해지기까지. 겪어야 할 것들이 제 눈엔 선하게 보여, 오드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

    우스갯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정말 찰나처럼 지나갔다. 그사이 이엘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다만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이 조금 줄었고, 이온을 찾아가는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그리고 그를 대신해 검과 총을 손에 쥐는 시간이 늘었다. 땅 위에서 생활했을 때처럼 좋은 스승은 없었지만 터무니없이 긴 하루는 사람보다 좋은 스승이 되었다.

    “엘. 어서 와. 고생했어.”

    “뭐 하는 거야? 봐도 돼?”

    “물론. 가까이 와서 봐도 돼.”

    “응.”

    열일곱의 이엘은 지난해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자랐다. 더는 키가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통 인간 여자의 키를 웃돌 만큼은 자랐다. 또 1년 간 수련해 온 덕분인지, 빼빼 마르기만 했던 몸에 살이 오르고 탄탄해졌다. 고된 수련으로 손바닥 안에 생긴 굳은살과 생채기는 훈장처럼 남았고, 손톱 끝은 흙이 끼거나 짓눌려 더 이상 황녀의 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잔병치레가 잦았고 마른 건 매한가지였다. 오드는 그 생각을 하며 그녀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검술을 마친 이엘에게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땀내가 언뜻 나는 듯했다. 오드는 엷게 웃으며 이엘에게서 시선을 돌려 손에 쥔 나뭇가지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의 잇새로 새어 나온 언어가 성력과 함께 나뭇가지를 감쌌다.

    “무슨 말을 한 거야?”

    “축복을 담은, 일종의 기도야.”

    그는 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었고 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오드의 종족을, 그들이 살던 지명을 붙여 나자르라고 불렀다. 처음엔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며 모두가 나자르인들과 함께 신을 섬겼으나, 종내에는 그들을 질투하여 모두 죽이고 신을 배신했다.

    은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오드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오드는 나자르를 모두 죽인 선황의 딸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이엘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여자이듯이, 그 역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자르였다. 이엘의 묘한 시선에 오드가 웃으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오늘따라 빤히 보네.”

    “아니야, 그냥……. 근데 그건 뭐야?”

    “네게 선물을 하나 줘야 할 것 같아서.”

    “선물?”

    “응. 며칠만 더 기다리면 될 거 같아.”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야?”

    이엘이 답지 않게 상기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어 왔다. 글쎄. 좋아하려나. 오드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작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오드는 느티나무 가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싹을 틔우고 있던 가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라비틀어지더니, 결국 바닥으로 싹을 툭툭 떨어뜨렸다. 오드는 그 싹을 주워 준비된 항아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게 내 선물이야? 저 안엔 뭘 그렇게 넣고 있는 거야?”

    “엘이 10년 동안 자랐듯이 항아리의 것들도 자라고 있어.”

    여전히 이해 못 할 말들이었다. 이엘은 항아리에서 관심을 거두고 땀에 달라붙은 제 머리카락을 떼어 내는 것에 집중했다.

    오드는 가만히 이엘을 바라보다가 항아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이것이 정말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온갖 이종족이 들끓는 땅 위 세상은 이엘에게 너무 위험했다. 적어도 이게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자, 나의 엘. 이제는 네가 말해 줄 차례야. 나흘 후면 네 생일이 지나. 내가 널 땅 위로 데리고 나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날이야.”

    “벌써 그렇게 됐구나.”

    그래, 생각하기에 따라 1년이 짧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잖아. 오드가 작게 속삭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는 그녀를 맹목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엘의 선택이 무엇이든, 오드는 그녀를 존중할 것이다.

    이엘은 물을 적신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아 내고는 결연한 눈동자로 오드를 바라보았다. 언뜻 푸른 바다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보는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녹안에 이채가 어렸다.

    “바깥세상으로 가겠어.”

    “그래. 결정을 내렸구나.”

    “하지만 죽기 위해 가는 건 절대 아니야.”

    “응.”

    “살아남을 거야.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꼭 있으니까.”

    오빠를 살릴 거야. 황실을 다시 세우고, 그곳에 이온의 자리를 만들 거야. 이엘은 제법 담담한 어조로 오드를 향하여 말을 이었다. 오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을 뿐이었다.

    이엘은 닦아 낸 수건을 탁상에 내려놓고 선반 위에 있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오드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이엘이 길고 탐스럽던 검은 머리카락을 순식간에 귀 바로 아래까지 싹둑 잘라 버린 것이다.

    “이엘.”

    “나를 지키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어.”

    “…….”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올 거야. 이온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땅굴 안에서 이엘의 짧아진 머리카락이 오드의 날숨에 잠시간 흔들렸다. 제멋대로 잘려진 머리카락이 엉성하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던 오드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나의 엘. 내 선물이 네게 필요할 만한 것이라서.”

    “대체 선물이 뭔데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금방 완성될 거야.”

    지금의 네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일 테니. 오드가 그렇게 속삭이고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며 지팡이를 들고 사라졌다.

    오드마저 사라진 땅굴 안은 적막만 흐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나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나흘만 지나면 땅을 밟을 수 있게 된다.

    과연 내 선택이 옳은 것일까? 내가 그들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가……. 내가 오빠의 치료제를 구할 수가 있을까?

    이엘은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돌려 이온이 누워 있는 침실로 향했다. 이온은 10년 전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날 기사들과 함께 도망쳤더라면 지금쯤 이온은 바깥세상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을 텐데…….

    차갑게 식어 흙 속으로 돌아가는 건 내 몫이어야 했다.

    이엘은 그 생각을 하며 침대 맡에 앉았다. 성력으로 연명하는 그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절실했다. 어쩌면 사경을 넘나들고 있는 이온보다 이엘 자신에게 더.

    “오빠. 나 곧 위로 떠나.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게 됐어, 오빠. 무려 10년이나 염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려고 해. 정말 좋겠지?”

    “…….”

    “근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오빠, 나는 왜 이렇게 무섭고 떨리는 걸까.”

    오빠. 제발 눈 좀 떠 봐. 제발 나 좀 봐 줘, 이온. 나 너 때문에 땅 위로 올라가려는 거야. 너의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올라가는 거라고.

    아. 대체 너는 언제까지 날 홀로 두려는 거니, 이온. 괴로워? 썩지 못하게 억지로 붙잡고 있는 내가 미워? 아니야. 넌 날 미워해선 안 돼. 네가 살려 준 목숨으로 나는 이렇게 죽지 못해 살고 있잖아. 나도 너 때문에 살아가고 있잖아…….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말 거야.

    이온은 그녀가 살아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만일 이온이 잘못 되었더라면 이엘은 진작 이 삶을 포기하고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온이 살아 있다. 억지로나마 붙잡아 두며 연명하고 있다.

    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도 살아 있다. 네가 내 삶의 유일한 미련이라서. 너를 두고는 내가 눈을 감지 못해서.

    “다녀올게, 오빠. 조금만 기다려 줘.”

    이엘은 드러난 이온의 이마에 작은 입술을 묻어 짧은 입맞춤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녀가 늘 기도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검을 잡고 체력을 단련하면서 무릎은 전보다는 사정이 나아졌다. 여전히 비가 오기 전날이면 시리고 아픈 것은 똑같았지만 적어도 일어서고 앉는 것은 그럭저럭 나은 형편이었다.

    기도실에 들어가 이엘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이엘은 간절한 바람을 토해 냈다. 딱 하나만 들어달라고, 제발. 제발 신이시여, 나의 소원을 하나만 들어달라고.

    그때 오드가 쳐 둔 결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이엘이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우드드득, 뭔가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가 이엘이 머무는 공간 바로 옆을 빠른 속도로 훅 지나갔다.

    “꺄악!”

    흔들리는 지반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이엘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다행히 결계를 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되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오드의 결계에 영향을 준 모양인지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지면이 흔들렸다.

    “지긋지긋해.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

    무릎을 끌어 모은 채로 주저앉은 이엘이 양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사납게 고개를 흔들어 댔다. 전쟁이 났던 그 밤을 떠올리게 한다. 폭음과 화약에 온갖 감각이 얼얼한 고통을 받았던 그 밤이 떠올라 숨이 막혔다.

    오드가 필요하다. 밀려드는 공포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더욱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땅속에서 생활할 때조차 오드가 없으면 불안정한데, 땅 위로 올라가서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이엘은 밀려드는 회의감에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 냈다.

    ― 두렵니?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음성이 그녀의 정신을 번뜩 차리게 만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엘이 뒤로 넘어지려던 몸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바로 눈앞에 공간이 찢어진 것처럼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너머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음성은 그 너머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 이쪽으로 건너오지 않으련?

    “누, 누구세요?!”

    ― 네가 믿는 신이지.

    “…….”

    ― 어서. 부디 내가 네게 힘을 쓰지 않게 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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