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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화 (2/488)
  • 2화

    이온은 자신의 전부였다.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에 삶을 택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오로지 이온 하나였다. 그는 허무한 삶에 남겨진 유일한 미련이었다. 오드의 성력으로 억지로 연명시키면서까지, 이엘은 이온을 놓지 못했다.

    “오빠는 두고 갈 거야.”

    “…….”

    “네가 결계를 쳐 두면 다른 이종족들이 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그게 좋겠구나.”

    그런데 나의 엘. 정말 이온이 없어도 혼자 나갈 생각이니? 이온을 이곳에 두고 홀로 나갈 수 있겠어? 땅속과 땅 위는 정말 천양지차야, 나의 엘. 이온이 없이 너 혼자 가능할까?

    오드가 거듭 그녀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황녀가 아니었다.

    “오빠가 죽으면 안 돼. 다시 황위를 되찾아야 하니까. 이온은 황실을 이을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 돼.”

    “…….”

    “오빠를 깨울 약을 찾을 거야. 반드시 이온을 깨워야 해.”

    그래야만 내가 바라던 세상이…….

    중얼거리던 말을 끊고 꾹 눌러 삼켰다. 자신이 바라던 세상은 화려한 게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세상에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나 어렵구나.

    황족은 날 때부터 고귀한 혈통으로 대접받아 깨끗하고 푹신한 길만 걸었다.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같은 황손이었음에도 제 앞엔 가시밭길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비로드 융단이 깔린 길을 걷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도 되어 보고 싶었다.

    “약속했어. 이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오빠가 그랬단 말이야.”

    9년 전에 있었던 전쟁은 최소한의 행복만 갖고 살았던 황녀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유일하게 갖고 있던 오라비마저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상실을 경험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위치가 뒤바뀐 인간에겐, 가장 낮고 가장 저급하고 가장 어두운 자리가 주어졌다. 함부로 먹이사슬에 끼어들었던 죗값으로 그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놓여졌다.

    “이엘. 바깥은…… 이제 너무 변해 버렸어. 네가 기억하던 시절과는 달라.”

    이엘은 땅 위 세상에서 고작 7년을 살았고, 땅 아래 세상에선 9년을 살았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바깥은 빠르게 변했고 좋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 땅굴에서의 생활이 밖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이엘이 그토록 원하는 햇빛만 바라보고 가기엔 참혹한 곳이었다.

    “오드. 변하는 게 맞잖아.”

    “…….”

    “이제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니까. 그건 아주 당연한 거야. 그것 때문에 나를 막겠다는 거야?”

    아무리 인간이 하층민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처럼 숨어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저를 막는 오드를 이해할 수 없다.

    냉소적인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오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인간이 싫니, 엘?”

    “응. 싫어. 내가 인간인 것도 싫어.”

    가진 건 신의 축복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빼앗겨 버린 지금, 인간이라 해서 나을 게 뭐가 있겠어. 사악하고 음흉한 건 이종족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나약한 육신은 아무리 단련한다고 한들, 이종족과 같아질 수 없다.

    하물며 인간 여자는. 간극을 좁힐 수가 없는 위치였다.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을 차지할 때조차 여자는 그곳에 함께할 수 없었는걸.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쳐다보던 오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땅 위의 인간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어. 그건 내가 말해 줬지?”

    “응.”

    “어쩌면 이곳에 있는 것이 너에겐 최선책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나의 엘.”

    “그건 내가 내린 판단이 아니야.”

    이엘은 오드의 부축을 손으로 차갑게 쳐 냈다. 차박차박 땅을 밟고 걸을 때마다 진흙이 발을 타고 종아리까지 튀었다. 옷자락이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더러운 게 묻어도 견디고 버텨야만 했다.

    오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이엘은 너무 어린 나이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끝도 없이 떨어졌다. 비록 그곳에서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을지라도 지금의 네게 이곳은 지옥 같을 테니.

    그래서 너는 더더욱 올라가려 하겠지.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그림자에 숨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니까. 빛이 필요하니까.

    “오드.”

    “응.”

    “왜 너는 내게 10년이란 시간을 준 거야?”

    이엘의 물음에 오드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약속한 기한은 10년. 10년을 꽉 채우면 반드시 너를 땅 위로 데려가 줄게, 나의 엘. 오드는 그렇게 약속했다. 성년을 넘겨야만 했던 이유는 대체 뭘까.

    “매미라는 종족은 땅속에서 10년을 살고 바깥세상으로 나가.”

    “…….”

    “그리고 한 달도 채 살지 못하고 죽어 버려.”

    “나는 매미가 아니야.”

    “그래, 넌 인간이야.”

    “…….”

    “가장 연약한 인간.”

    이엘은 침묵했다. 반은 동의하고 반은 부정한다. 가장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매미처럼 죽기 위해 올라가고자 하는 게 아니다.

    “엘. 네겐 10년도 턱없이 부족해. 성년도 되지 않은 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라간다면, 너는 매미보다 먼저 죽게 될 거야.”

    “그럼 내가 여기서 뭘 더 준비할 수 있는데? 이런 땅굴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네가 가르쳐 준 지식이 전부야. 그것도 이제 한계고.”

    “엘. 그게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네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난 너와 달라, 오드. 이제 우린 너희처럼 똑똑하지 않단 말이야.”

    “인내를 길러야 해. 이엘, 그건 모든 종족들에게 필수적인 거야.”

    “…….”

    “이종족도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잊어버리면 안 되지.”

    조금만 더 참아 보자. 할 수 있어, 엘.

    오드의 다정한 응원에 이엘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네게, 남은 1년이 얼마나 길지 이해해. 하지만, 엘. 1년은 찰나와 같아. 네가 어떤 마음을 먹는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니까.”

    “하나만 물어볼게. 만약 정신을 잃은 게 나고, 눈을 뜨고 있던 게 이온이라면. 그래도 이온을 10년 동안 여기서 살게 했을 거야?”

    “아니.”

    “…….”

    “이온이었다면 바로 땅 위로 보냈을 거야.”

    그래, 역시……. 자신과 이온의 차이라곤 성별 하나밖에 없다. 특이점이랄 것도 없는 쌍둥이다. 되레 검술이나 체술 쪽은 자신이 더 나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묻혀 살고, 이온은 바로 올라갈 수 있다면……. 너 역시 내가 아닌 이온을 바랐던 거구나, 오드.

    “그래. 역시 내가 저기에 누워 있었어야 했어.”

    “나의 엘. 그런 뜻이 아니야.”

    “…….”

    “땅 위는 지금 네게 매우 위험하단 소리야.”

    “대체 뭐가. 왜 이온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왜! 내가 이온보다 부족한 게 뭔데? 이제 내가 이온보다 더 건강해. 저렇게 누워만 있는 오빠보다 내가 더 낫다고! 그렇게 아득바득해도 내가 오빠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나를 벌레만도 못하게 바라보던 아버지가 죽었고 너는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도, 왜. 왜 나는 이렇게 못한 취급을 받는 건데. 왜.

    아무것도 없는 땅 아래 세상에서조차 나는 너보다 못하다는 거야? 왜……. 대체 왜?

    오드는 그런 이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조심스레 한 발짝 다가왔다. 분노로 물들어 가던 이엘의 차가운 손등 위에 제 손바닥을 덮으며 천천히 다독거렸다. 그게 아니야, 이엘.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이엘. 우선 진정해. 네게 해 줄 말이 있어. 중요하니까, 진정하고 들어 줘.”

    “…….”

    “밖이 네게 위험해서 그래. 달라졌잖아. 이전에 네가 살던 세상과 완전히 달라졌어, 엘.”

    이제 그만해, 그런 말. 자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로 납득시키려는 오드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 열렸던 입은 도로 다물리고 말았다.

    “바깥엔 여자가 없어.”

    “……뭐?”

    “그리고 이곳 땅속에도 여자는 없어.”

    “무슨……,”

    “너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이엘이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하고 크게 홉뜨며 오드에게서 빠르게 떨어졌다. 오드의 온기가 사라진 제 손등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감싸고 뒤로 숨겼다. 여자가 없다고? 인간 여자가 없어? 그러면. 그렇다면…….

    “그래, 맞아.”

    “…….”

    “이엘. 네가 유일한 여자가 되었단 소리야.”

    “말도 안 돼.”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약해서 나가지 못한 게 아니야, 이엘. 나의 엘. 너는 약한 게 아니라.

    “세상의 암컷은 네가 유일해, 나의 엘.”

    너는 너무 특별해져 버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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