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1화
콰쾅―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오금이 저리게 할 만한 소리였다.
잇단 폭발음과 함께 빛이 나던 제국의 거리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에 뒤덮여 매캐하고 꿉꿉한 냄새가 온몸에 웃돌아 휘몰아친다.
이미 반쯤 타 버린 망토 자락을 작은 손으로 거침없이 털어 낸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달리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작은 아이의 행동 하나로 인해, 앞서 있던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뒤따르던 수많은 기사단원들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황자님! 이러실 시간이 없습니다!”
결국 제일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큰 보폭으로 다가와 아이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연이어 터진 폭발로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 버렸다.
제국의 유일한 황자는 폭발음에 묻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기사단장의 입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어. 이엘을 데려가야 해.”
“안 됩니다. 성을 빠져나오고 시간이 꽤 오래 지났습니다. 황녀님께서도 이미 다른 탈출구로 나가셨을 겁니다. 시간을 더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황자님.”
‘오빠. 우리 꼭 함께하자. 함께 잡은 이 손, 절대로 놓지 말자.’
맑고도 높았던 목소리가 황자의 귓등을 무수히 치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만약 내가 너로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방 안에만 처박혀, 너와는 다르게 바보처럼 울며 살진 않았을까. 내가 누렸던 것을 네가 누렸다면 어땠을까. 네가 나였다면……. 아니, 사실 이건 전부 네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황자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황자님.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엘이 가지 않는다면 나 역시 가지 않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저희는 목숨을 바쳐 황자님을 구하라는 명을 받았고 여기에 더 있을 수는 없습니다.”
“루스 경.”
“황자님.”
“엘을 찾아오라.”
“황자님!”
“이건, 네 주군으로서 내리는 첫 명령이다. 당장 엘을 데려와!”
감히 그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죽어 버린 황제가 아닌 살아남은 황자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루스는 그 어린 황자의 위엄 앞에 서 있자니, 마치 젊은 날의 황제를 맞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묘한 기시감이었다. 과연 그 옛날의 황제가 성군이었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황자의 그림자가 그렇게 증명하는 듯했다. 짧았던 시간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루스 경. 다녀와라.”
“예, 전하.”
기사단장의 지휘 아래 몇 남아 있지 않던 기사단의 일부가 걸음을 반대로 돌려 황실 쪽으로 달려갔다. 성을 떠난 지 꽤 긴 시간이 지났으니 달려온 거리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설령 빨리 달려 성에 도착한다고 한들 황녀가 살아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게다가 그녀는 황녀로서는커녕, 사람으로서의 대우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이엘.”
작게 읊조리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던 황자가 염려 섞인 눈동자에 불타는 거리를 담았다. 잿더미 속에서 너를 구해야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라고. 황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기사단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다. 차라리 동생을 포기하고 제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현명했을 텐데. 뒤이어 찾아온 급습을, 남은 인원으로는 이겨 낼 도리가 없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소년의 눈가에서 눈물이 똑 떨어졌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불복하고 동생을 구출하려 했던 행동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
캄캄한 동굴 안에서 이엘은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맞부딪친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누가 들을 것인가, 누구를 향한 것인가. 그런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황홀하지만 괴로웠던 그녀의 황궁 생활은 7년 만에 사라져 버렸고 세상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왜였을까. 왜 하필 내가 황녀였을 때 이러한 사달이 일어났단 말인가. 어린 이엘은 늘 그런 생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부모를 원망했다. 또한 나를 이렇게 살려 버린 너 역시 저주한다.
“이엘.”
“…….”
“기도 중이구나.”
이엘의 기도하는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오드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원래도 가볍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유독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소곤소곤― 대상 없이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속삭이던 이엘이 깊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던 눈썹이 흔들리며 녹안이 커다랗게 드러났다.
“엘. 기도 끝났니?”
“기도는 했는데 들어주실지는 모르겠네.”
“…….”
“신께선 내 기도에 관심이 없으시니까.”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기 위해 동굴 벽을 바싹 마른 흰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러나 완전히 서기도 전에 무릎이 앞으로 푹 꺾이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아래로 뻗으려는 이엘의 허리를 오드가 재빨리 잡아챘다.
“엘. 그렇게 갑자기 일어서는 건 무리라고 했잖아.”
“역시. 오늘도 내 기도가 닿지 않았나 봐. 이렇게 힘이 빠지는 걸 보면.”
“…….”
“오드. 나도 널 따라서 한 번만 밖으로 나가면 안 될까?”
오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리한 부탁이었음을 깨달은 이엘이 자조하듯 야트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햇빛을 보지 못하고 동굴 같은 지하에 갇혀 산 지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둠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이엘은 성년을 코앞에 두고도 덜 자란 모습이었다. 되레 시간이 지날수록 잔병치레가 잦아졌고 온몸이 맥없이 무거워졌다.
“햇빛을 보고 싶어, 오드.”
“엘.”
“무릎이 아파, 오드.”
“…….”
“비가 오고 있니?”
그녀의 물음에 오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이엘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읊조리고는 오드의 부축을 받으며 차박차박 걸음을 옮겼다.
습기가 그득한 땅굴 안이었지만 그래도 이엘이 머무는 곳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건 곁에 있는 오드의 덕분이다. 만일 오드가 없었더라면……. 이엘은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오드의 부축을 받아 도착한 곳은 이온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이엘의 일상은 늘 똑같았다. 하릴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 아닌 기도를 하다, 시간이 되면 이온이 잠든 침실로 향하여 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곤 했다.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일.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들이었다.
오드는 이엘이 다시 무릎을 꿇으려 하자 그녀를 말리기 위해 손에 힘을 더했다.
“이온의 얼굴만 보고 침실로 가자.”
“기도를 해야지.”
“이엘.”
“나를 살려 낸 오빠를 위해 기도를 해야지.”
9년 전, 불타는 황궁을 뚫고 이온의 정예기사단이 이엘을 구하러 달려왔다. 유모와 함께 도망쳤다던 황녀는 황궁의 가장 높은 옥탑에 숨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악을 지르고 있었다.
황제는 유일한 후계인 황자만을 인정했고, 그 아이만 살아남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제 아들이 멀리멀리 달아날 수 있도록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딸은 여전히 불구덩이에 있는데도.
아, 내가 언제는 그들에게 자식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이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텁텁한 한숨을 내뱉었다. 잡티 하나 없이 말간 얼굴로 고요히 눈을 감고 잠이 든 이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까지 날 버리면 안 돼.”
“…….”
“정말 용서 안 할 거야.”
“…….”
“정신 차려. 날 언제까지 이 진흙탕에서 살게 만들 건데.”
“…….”
“일어나. 다시 돌려놔. 약속했잖아……. 더 좋은 세상을…… 준다며…….”
기도라기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이엘은 이온의 손을 꾹 쥐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너를 향한 애증일까.
나는 네가 죽었으면 싶다가도, 네가 없는 세상이 너무 아득해서 숨이 턱턱 막혀 와. 나만 버리고 간 네가 원망스럽다가도, 이렇게라도 숨이 붙어 있는 것에 감사해. 이건 배 속에서부터 이어져 온 애증일까?
무릎이 시렸다. 며칠 전에 앓았던 감기의 흔적인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오빠. 나 너무 아파……. 오빠 너만큼 나도 아파.”
햇빛을 보지 못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땅 위로 오가는 건 오드만 가능한 데다 제한적이라, 식량을 구해 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부족한 열량은 오드의 성력으로 구현한 허상에 의지하며 연명했다.
잘 먹고 잘 자도 부족할 성장기를 이토록 암울하게 보냈으니 속이 말도 못하게 엉망이 되는 건 당연했다.
이곳은 그 무엇 하나 제 손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없는 곳이었다. 정말로 비참하구나. 결계마저 오드에게 의존하고 있으니……. 이엘은 이를 사리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까 안 돼. 이온. 정신 차려, 이온. 너는 날 버리면 안 돼. 너까지 날 이 시궁창에 버리고 세상을 떠나면 난 어떻게 살아? 안 돼. 안 돼, 오빠……. 제발 가지 마. 제발 너까지 날 버리지 마.
오빠. 제발 눈을 떠 줘.
“엘. 너의 침실로 돌아가자.”
“오드.”
“응.”
“너도 날 버리지 마. 그러면 안 돼.”
“당연하잖아.”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응, 떠나지 않을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오드.”
“나의 엘. 내겐 무슨 말이든 해도 돼.”
“오빠가 눈을 뜨면.”
“…….”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
“우리가 이 무너진 제국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땅 위로 올라갈 수는 있으려나. 이엘은 초점 없는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칠 것 같다. ……이젠 정말 미쳐 가는 것 같아. 땅 위 세상 이야기만 나오면 안광이 번뜩이다가도 다시 흙빛으로 물들어 식어 갔다. 바랄 수 없는 것을 감히 바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오빠가 깨어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미쳐 버리겠어.
이엘은 오드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서 일어났다. 걸으면서도 삐걱거리는 듯한 관절 때문에 또 한 번 주춤했지만 이번엔 스스로 바로 섰다.
“오드.”
“응.”
“약속 꼭 지켜 줘.”
“그래.”
“내년이 되면 약속한 10년이야.”
“그렇지.”
“날 데리고 여기서 나가야 돼. 알았니?”
“그런데 나의 엘. 이온은 어떻게 할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