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맞잡은 손을
“컹!”
강아지가 경쾌하게 짖는 소리에 남자는 노곤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몇 년간 불면증으로 고생한 게 무색하게도 요즘 그는 퍽 잠을 잘 청하고 있었다.
“컹컹!”
“고만 짖어…….”
동시에 그의 배에 주먹질이 느껴졌다.
알렉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복부를 규칙적으로 때리는 솜방망이 주먹을 쳐다보았다.
그의 어린 아들은 귀엽고도 맹랑했다.
제 아버지가 제 어머니를 고생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걸까, 아기이면서도 아주 야무지게 제 아빠를 밟고 가거나 때리곤 했다.
“뺘!”
알렉시스는 아들을 단단히 붙들어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아기가 금세 방긋방긋 웃으며 즐거워했고, 그는 아주 성실하게 놀아주었다.
10분쯤 놀았을까.
변덕스러운 아드님께서 이젠 지루해하고 계셔, 그는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얌전하게 지켜보고 있던 알리샤가 냉큼 아기 코앞으로 다가가 꼬리를 쫄래쫄래 흔들었다.
“꺄!”
아이의 손이 새하얀 털을 한 움큼 쥐었다.
“먹지 마라, 루이.”
알렉시스는 짐짓 엄격하게 경고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원래 쟨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아니다.
흠, 알아듣는데도 얄밉게 못 알아듣는 척한다는 심증은 있지만.
그래도 뭐.
제 엄마 말은 잘 들으니까 되었지…….
물론 세실리아는 눈치 없는 편이 아니었고, 자신에겐 너무나 착하고 순한 아들이 남에게는 꽤 못되고 심술궂다는 면까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그녀는 아들의 볼을 아프지 않게 콕콕 찌르며.
‘엄마 꽤 똑똑해~’
이러곤 했다.
그러고 나서 덧붙이는 말이.
‘이런 것까지 네 아빠를 닮으면 안 돼~’
……라서 알렉시스는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세실리아가 툴툴거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들은 그를 닮았다.
머리가 흑발인 건 당연하니 넘어가더라도, 보랏빛 눈에 이목구비까지 비슷했다.
루이가 가진 세실리아의 흔적은 그녀 특유의 세심한 선밖에 없다.
이마저도 아이가 자라면 사라지기 쉬운 부분이지.
‘난 네가 외모론 네 아빠를 닮아서 기쁜데.’
세실리아가 아들에게 작게 속닥거리는 모습을 알렉시스는 물끄러미 지켜보았었다.
‘근데 성격은 나나 네 아빠를 닮으면 안 돼?’
……문제는 닮아버렸다는 거고.
미안하지만 딱히 놀라운 결과는 아닌 것 같아, 시씨.
알렉시스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웬일로 착하게 강아지 털을 먹지 않은 아들께선 이젠 꼬리 붙잡기 놀이를 하고 계셨다.
알리샤는 있는 힘껏 꼬리를 흔들었고, 아이가 챱챱 열심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거의 성년이 되어가는 강아지의 속도와 아이의 몸 움직이는 속도가 같을 리 없는 법.
실패만 거듭하던 아기의 커다란 보랏빛 눈에 눈물이 아롱다롱 맺혔다.
알렉시스는 작게 실소하며 몸을 숙여, 와아아앙 요란하게 울어대는 아들을 안아 들었다.
울음소리에 되레 놀랐는지 알리샤가 작게 낑낑댔다.
“괜찮아.”
한 손으론 아기를 어르며 다른 손으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컹!”
알리샤가 시무룩하게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아이의 맨발에 제 콧잔등을 비볐다.
루이가 울음을 멈추고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엔 바로 코앞에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꼬리는 못 잡았어도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어 기분이 좋나 보다.
역시나 변덕스러운 아기께선 언제 울었냐는 듯 행복하게 방긋방긋 웃었다.
“엄마 마중하러 나갈까?”
“먀!”
“그래, 엄마.”
세실리아는 마리사와 함께 생-뢰크에 열리는 바자회에 참석하러 나갔다.
그녀를 보고 싶어 몰려든 군중들에게 예쁘게 웃어주었겠지.
베르뉴의 딸이라는 인식을 온전히 정리하면서부터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빠르게 되찾았다.
어차피 각인까지 다 이룬 마당이었다.
반대의 목소리는 당연히도 금방 죽을 수밖에.
알렉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반듯하게 가다듬었다.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도 단정하게 정리하며, 세실리아가 가장 좋아할 법한 모습으로 준비를 마쳤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알리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콩콩 뛰어나갔다.
저 멀리 사라지는 강아지와는 달리 루이는 그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은 채 얌전히 발을 대롱거렸다.
황제와 황자를 목격한 사람들이 공손히 예를 피하며 복도를 내주었다.
여자를 닮은 하오의 금빛 햇살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든다.
알렉시스는 그 위를 부드러이 가로지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퐁레프 안에서처럼 밖에서도 여름 볕이 가장 화려하고 따스한 금빛 시간을 자아내고 있었다.
저 시간을 가로질러 그의 사랑이 그에게로 올 테지.
역시나.
저 멀리 퐁레프 황궁의 입구에서 화려한 검은색 마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다소 걸음을 재촉하여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루이는 보채지도 않고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아가.”
“뺘!”
“엄마 얼굴 만지면 안 돼, 알겠지?”
아이의 보랏빛 눈이 못마땅한 빛을 머금고 가늘어졌다.
세실리아가 짜증을 낼 때와 비슷한 표정이라 솔직히 조금 웃겼다.
알렉시스가 키들거리면서 궁 밖으로 나서는 동안, 루이는 뾰로통한 낯을 유지한 채로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통통한 볼을 하고 분기탱천한 표정을 해봤자 귀여울 뿐이랍니다.
알렉시스는 현명하게도 그 진실을 아기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풀밭을 가로질러 계속 걸어가기 전에 그는 두리번거리며 알리샤를 찾았다.
휘파람을 짧게 불 때까지만 해도 등장하지 않던 강아지는 제 이름을 길게 부르자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
“갈까?”
“컹컹!”
알리샤가 폴짝폴짝 내달리는 곁에서 알렉시스는 루이를 안아 든 채로 유유히 뒤따랐다.
작게만 보였던 검은 마차는 이제 확연하게 제 크기를 되찾았다.
말들이 부드럽게 멈추며 마차가 정지했다.
때마침 도착한 알렉시스는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손을 내어주었다.
“안녕, 루이!”
아들에게 관대히 눈짓 한 번 건네준 마리사가 손주에게 인사했다
까르륵 웃어대는 아기가 못내 귀여운지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손 씻었어.”
그러니 이제 내가 안겠어.
그 요구에 알렉시스는 순순히 아기를 넘겨주었다.
아버지의 품에서 할머니의 품으로 넘어가면서도 루이는 마차 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미인이 마차에서 내려오도록 도와주었다.
바자회라 조금 수수한 장식을 택했을까.
세실리아는 굉장히 옅은 화장에 그가 선물한 자수정 귀걸이만 착용하고 있었다.
쇄골을 드러내는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은 터라 그가 아득바득 새겨 넣은 그의 이름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알렉.”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보자마자 곧장 휘었다.
알렉시스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 숙여주었고, 세실리아가 발돋움하던 자세에서 뒤꿈치를 도로 내리며 그의 목을 휘감았다.
남자의 청량한 체향과 여자의 달큰한 체향이 엉키며 반가움과 사랑의 시를 지었다.
여인의 입술을 아쉽게 놓아준 알렉시스는 완전히 떨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야.”
“잘 다녀왔어요?”
“으응……. 루이랑 잘 놀고 있었어?”
그의 품에 쏙 안겼던 세실리아가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마리사의 품에 안긴 아들을 향해 곱게 웃어준다.
여느 때처럼 예쁜 제 엄마를 또다시 만져 보고 싶었는지, 루이가 휙 손을 뻗어 세실리아의 얼굴을 만지려 들었다.
“안 돼요.”
세실리아가 잽싸게 턱을 들며 거절할 줄은 모르고.
“엄마 화장했잖니.”
“땨!”
아기는 잔뜩 토라져 분명 울려들었지만, 시각적인 유혹에 결국 넘어가 버렸다.
엄마가 눈을 곱게 휘며 더 환히 웃어주자마자 우와아─ 표정이 되어 눈을 깜박였으니.
마리사가 키득거리며 루이를 안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즐겁게 손주를 어르는 소리 그리고 아기가 까르륵거리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오후의 평화를 간지럽혔다.
“컹!”
마침 알리샤가 짖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세실리아는 손을 내려 새하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리샤도 잘 있었어?”
“컹컹!”
“루이랑 잘 놀아줬고?”
“컹!”
“언제나 고마워.”
나도 안다 주인!
강아지가 그렇게 말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다시 짖었다.
그러고는 아기를 쫓아 우당탕탕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자코 기다려 주던 알렉시스는 세실리아가 그를 향해 빙글 도는 모습을 관찰했다.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자, 그녀가 아들처럼 까르르 웃었다.
“알렉.”
“응.”
그녀가 팔을 벌렸고, 알렉시스는 순순히 다가가서 끌어 안겼다.
자기보다 체구가 배로 더 큰 남자를 포옥 끌어안는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춤추듯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손깍지를 낀 채 어머니와 아들, 강아지를 뒤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햇빛 드리운 길과 함께 걷는 사랑. 영원 같은 찰나와 그보다 더 굳건한 감정.
결코 떨어지지 않을, 그렇게 꼭 맞잡은 손을 강조하듯이,
눈부신 여름이 내려앉았다.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