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드디어 닿은
묵직하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강조했다.
“사랑해, 알렉. 정말이야.”
“…….”
“근데 내가 네 아이를…….”
왜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아이인데.
만약 그 아이가 오롯이 그녀의 아이라면 낳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이기 이전에 알렉시스의 아이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 너무나 갖고 싶었고, 그만큼이나 낳고 싶었다.
그녀가 품에 끌어안고 삶을 선물해 줄 수만 있다면.
세실리아는 입술을 달싹이며 일단 고백을 뒤이어 해야 할 말을 고민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그동안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뭐라고 덧붙일까.
‘난 정말 네가 너무너무 소중해.’
믿어달라고 얘기하려던 세실리아는, 오늘은 진짜 운명의 신이 그녀의 편이 아니라는 현실에 맞부닥쳤다.
시선을 들어 마침내 남자를 마주하니, 알렉시스는 더없이 서글프게 웃고 있었다.
고백이 아니라 저주를 들은 것처럼.
“아니요.”
그는 가장 먼저 부정했다.
자기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표정으로.
고백이 거절당했다는 그 충격보다 알렉시스가 짓고 있는 표정이 더욱 끔찍하여, 세실리아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떨어진 심장이 가시덩굴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피를 쏟았다.
“아니요, 세실리아.”
“…….”
“시씨.”
알렉시스가 울듯이 웃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요.”
“……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던 세실리아는 다음 순간 울컥하여 소리 질렀다.
“왜!”
왜 내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 해?
난 정말 이게, 사랑이 맞는…….
그녀의 눈길 속에서 알렉시스가 문득 셔츠를 풀기 시작했다.
맨 위 단추가 풀리고, 다음 단추가 풀리고, 그리하여 다섯 개쯤이 풀렸을 땐 옷깃이 굉장히 널널해졌다.
스르륵 흘러내린 옷깃을 더 젖힌 알렉시스가 무덤덤하게 제 쇄골을 드러냈다.
세실리아는 눈을 부릅뜬 채로 그곳에 새겨진 제 이름을 보았다.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된다. 대체 언제?
그녀는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가 닫으며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 그녀의 쇄골엔 이름이 없다.
하지만 알렉시스의 쇄골엔 있지.
대체 뭐지? 무엇일까?
‘……이상해.’
하지만 그녀가 알렉시스의 쇄골을 본 게 한두 번은 아닌데, 분명 그때까진. 아.
“가렸구나.”
“내 몸엔 당신이 새겨져 있지만, 당신의 몸엔 내 이름이 없어요. 당신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지.”
일방 각인에 대한 짧은 설명이 잇따랐다.
세실리아는 반쯤 기절하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가 알아야 하지만 몰랐던, 그리하여 드디어 들은 비극을 마주했다.
단순히 뒤통수가 깨지는 느낌이 아니다. 두개골이 함몰하다 못해 그냥 뇌가 으스러진 기분이었다.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는 걸 알긴 할까.
미치겠다는 심정을 어떻게 가누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알렉시스가 시선을 떨구더니, 한참 만에 더없이 씁쓸한 낯으로 들었다.
“당신은 다정하니, 그래서 감정을 착각했을 겁니다.”
“…….”
“아니면 불쌍한 남자의 사랑 타령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스스로를 세뇌시켰던 것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부모님께 받은 사랑이 지극히 감사하여, 어떻게든 보답하려던 노력일 수도 있겠지요.”
“…….”
“어쨌거나, 시씨.”
한없이 평온한 낯인데.
한데…….
알렉시스는 완전히 짓밟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참함과 초라함을 절절하게 깨우쳐 이젠 자기 환멸도 익숙하다는 표정을.
세실리아는 어떻게 남의 감정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냐고 항의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각인이 없다.
그 현실이 이토록 어이가 없고 의기소침해질 줄은…….
“당신을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다정하여 더 미치겠는 말이 덧붙여졌다.
“사랑하는 자유가 있다면 사랑을 거절할 자유 역시 있지요.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래도 제 아이를 싫어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왜 나보고 독하다고 하는지 알겠어.”
세실리아는 꽉 졸린 목에서 어떻게든 목소리를 긁어냈다.
“내가, 지금 너무, 기절하고 싶은데 기절이 안 돼.”
“놀라셨죠?”
“그걸 말이라고 해? ……언제까지야.”
알렉시스가 고개를 갸웃했고, 세실리아는 손가락으로 쇄골을 가리켰다.
그가 대답 대신 웃어 세실리아는 진짜 순간 남자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언제까지 숨기려 들었어! 이건 나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럼 적선하려 드셨겠지.”
“…….”
“동정하느라 사랑하시진 못하셨을 겁니다. 뭐, 지금도 안 하시긴 하네요.”
알렉시스가 무덤덤하게 덧붙여, 세실리아는 결국 그의 멱살을 잡듯이 매달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알고 있다.
이 빌어먹을 이름이 없는 거.
왜 각인이 안 되는 건지를 모르겠어.
대체 왜?
“난 내 감정에 정말 확신이 있어, 알렉!”
“……네.”
“이게 각인이 안 되는 것엔 감정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네가 일찍 말해줬다면 함께 원인을 찾았겠지 등의 말은 지금 상황에서 무용하다.
탓하는 건 나중의 문제다.
알렉시스에게 앞으로 또 뭘 숨기기만 해봐, 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 역시 나중의 문제다.
일단 지금은, 그를 반드시 살려야 했다.
어떻게든 각인을 이루어 이 남자를 살려야 했다.
‘대체 네가 왜 이렇게…….’
세실리아는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알렉시스 위로 허물어졌다.
그러고는 너른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난 절대 독박 육아하지 않을 거야.”
“하하.”
“죽기만 해봐, 망할 놈아.”
“이런, 태교 어디 가셨어요?”
“어차피 너 닮았으면 성격은 글렀어.”
나 닮았어도 글렀긴 하네.
세실리아는 빠짐없이 진실을 짚어내며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진짜, 죽기만 해봐. 개자식.
아냐. 알렉시스는 뤼셍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승리의 뤼셍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의 마음을 앗아가지 않았는가. 그러니 결국에 각인도 무사히 성공하겠지!
그녀의 쇄골에 그의 이름을 기어이 새길 것이다.
“알렉.”
“……예.”
“각인의 조건이 도대체 뭐야? 뭐, 단서나…… 그런 거 없어?”
“뤼셍 직계의 각인에 대해 남아 있는 구절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세실리아는 제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을 음미하며, 오래된 신화 책에 있는 유명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불새가 축복하길,
사랑하는 인간아, 사랑하는 인간아,
너희는 영원토록 함께하리라. 서로의 이름을 나눠 받아 나의 축복 아래에 견고해질 테니,
그리하여 너희는 언제나 승리하리라.
여기서 ‘사랑하는’의 주체로 많이 말이 갈렸었다.
‘불새가 인간을 사랑한다’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해석이 나올 때까지 신학자들과 문학자들은 참 오래도 싸웠더랬다.
세실리아는 구절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가, 약간 흔들리는 목소리로 가설을 내어놓았다.
“내가 너랑 함께할…… 음, 함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하?”
알렉시스가 기가 차겠다는 신음을 뱉었고, 세실리아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휙 시선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알렉. 난 베르뉴의 딸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해결되기 전까진 결혼이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거든.”
“세실리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응당 따라오긴 하지.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그녀가 알렉시스를 사랑하면 그를 위해서라도 떠나줘야 하는 사이였다.
세실리아는 더욱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보랏빛 눈동자가 약간 불안하다는 기색을 품고서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알렉.”
“……예.”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일단 베르뉴가 잡히기 전엔 우리가 결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가, 어, 각인의 조건을 제대로 맞추려면 그의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소리지.”
알렉시스가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셔츠 밑단을 쥐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내가 베르뉴를 잡는 것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 적어도 내가 뤼셍 제국의 황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라 널 위해서라도─”
“시씨.”
“─내 말 좀 들어봐.”
알렉시스가 뭐라 덧붙이려 했지만 세실리아는 아주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미끼가 될게.”
“안 됩니다!”
“그가 날 위험에 빠뜨리진 않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난 샤르텐에서의 두 공격에도 정말 한끝도 다치지 않았잖아.”
“불가합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철벽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어도 알렉시스만큼이나 세실리아 역시 고집이 만만찮았다.
남자가 얼마나 사납고 매정하게 거절하든 그녀는 꿋꿋하게 할 말을 다 했다.
“난 다치지 않을 테고.”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나한테 사흘만 줘.”
“시씨.”
“그럼 그의 기억을 삭제할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나한텐…… 그 능력이 있잖아.”
“사흘?”
알렉시스가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고, 세실리아는 더없이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일주일까지 갈 수도 있겠는데 지금 어떻게든 허락을 받으려면 기간을 줄여야 하니까.
사기부터 치고 보자.
“안 됩니다.”
“알렉, 이건 단순히 내 위험의 문제가 아니잖아. 네가 지금 각인이!”
“어떤 미친 새끼가.”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억누르는 음성. 목까지 거칠게 긁으며 나온 목소리에 세실리아는 기죽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가 위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둬?”
“…….”
“내 목숨 살리겠다고 당신 목숨을 사지에 처넣어? 그것도 내 애를 가졌는데? 내가 등신 천치입니까?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
“알렉!”
“꿈도 꾸지 마십시오.”
세실리아는 울상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지만, 알렉시스는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정도로 냉담했다.
“내 목숨보다 당신 목숨이 소중합니다. 늘 그랬어. 늘 그랬다고.”
“…….”
“그래도 난 오늘 사랑 고백도 받았군요.”
“미친놈아…….”
“그러니 되었습니다.”
붉게 달아오른 눈꼬리에 알렉시스는 경건히 입을 맞춰주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싸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지치지도 않고 매번 끄집어냈으며, 알렉시스는 매번 칼같이 기각했다.
가끔 입을 맞춘 뒤 세실리아가 더듬더듬 말을 끌어낼 때도 있었지만 알렉시스는 입을 다시 맞추는 것으로 막았다.
가끔 침대에서 늘어졌을 때 세실리아가 입을 연 적이 있었다.
그러면 알렉시스는 그냥 가만히 여자의 허리를 잡았다.
또 가끔 세실리아는, 처리한 서류를 내어놓으며 메모에 엄청 길게 써놓기도 했다.
알렉시스는 여자의 예쁘고 정갈한 글씨체를 감상하고는 더없이 아까운 마음을 억누르며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그는 세실리아를 믿었다.
여자는 독하고 오만하면서도 고집불통이었지만, 그래도 천성적으로 다정했다.
그에게서 이미 한 번 도망쳤다.
……그러니, 두 번 도망치진 않을 터였다.
* * *
“근데 피임약은 왜 갖고 계셨어요?”
“알리샤 간식이야.”
“…….”
“내가 아니라 알리샤가 먹었어! 진짜라니까?”
“…….”
“그럴 수도 있지…… 않아……? 봐봐!”
“참 나, 미치겠다……. 정말 맛있게 먹긴 하네요.”
* * *
세실리아가 유독 다정한 밤이었다.
임신하면 예민해진다더니 그 때문일까.
알렉시스는 그녀가 제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침대에 올라오는 모습을 관찰했다.
스르륵 가운이 벗어지며 눈부신 백색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냥 순백이라고 할 순 없는 게, 그는 이미 그 설원에 수많은 동백을 새겨놓았었다.
“알렉.”
그의 무릎 위에 앉히자,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도 순순하게 움직여주었다.
붉어진 뺨이며, 목덜미며, 어깨며, 전부 솔직하여 사랑스럽다.
알렉시스는 양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었고, 그가 샅샅이 관찰하는 눈빛 속에서 세실리아는 입술을 벌린 채 할딱였다.
시작이라 더욱 과한 감각을 버티려 그녀가 미미하게 턱을 들었다.
알렉시스는 날카로운 선을 핥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그녀가 버티는 얼굴을 빼곡하게 감상했다.
이 얼굴만은 절대로 잊지 못하겠지…….
그만이 볼 수 있는 표정이다.
몽롱하게 풀리는 금빛, 송골송골 땀 맺힌 이마, 젖은 채 살짝 벌어진 입술과 뜨끈하게 열기 오른 뺨까지 전부.
“……좋, 아?”
“당연히.”
그녀가 훌쩍이며 그의 목에 단단히 팔을 감았다.
뺨에 묻어 있던 눈물 자국이 그의 쇄골로 옮겨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부위로.
“도, 도와줘.”
“능동적인 분께서 어쩐 일로?”
“뭐?”
여자가 곧장 어이없다는 반문을 내놓았지만, 알렉시스는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뻔뻔한 표정을 장착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천진한 눈빛을 보내자 세실리아가 곧장 그녀의 이를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아야, 아픕니다.”
“나빴어!”
“기대하고 있답니다.”
해 봐.
그는 빙글 웃으며 그녀에게 제 양손을 전부 건네주었다.
세실리아가 그의 손에 손을 올려놓고, 몸 전체를 지탱한 채로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요청에 따른다.
알렉시스는 수치로 붉어진 사랑스러운 얼굴에 연신 키스를 흩뿌렸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그가 이토록이나 늦게 잠을 잔 적이 있었을까…….
알렉시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언제 떠났는지는 몰라도 온기 하나 없었다.
다만 쪽지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안.
알렉시스는 동글동글하게 쓰인 글씨의 마지막을, ‘미안’이라고 적힌 단어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폭주하고 있으니 이건 분명 현실이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비현실적이라서.
미안.
여자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게 들리는 기분이다.
미안.
그렇게 미안하면, 하질 마셨어야지!
억누르지 못할 격노였다. 방 안 전체를 전부 폭파한 알렉시스는 너덜너덜해진 문짝을 넘어 밖으로 걸어갔다.
소음에 놀라 달려온 건지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몽테-페르트와 리베의 마법사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어딨어.”
“그, 그게…….”
알렉시스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가장 먼저 시엘샤 듀페르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기 전에 블랑슈 휴스턴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널 먼저 죽일까, 휴스턴?”
“어, 언니가 내게 부탁했어요!”
“…….”
“폐하가 설령 미친 짓을 하면 말리라고!”
“하!”
알렉시스는 빈정거리듯 토막 난 웃음을 내뱉었다.
웃기지도 않아.
내가 미친 짓을 하는 게 싫었다면 떠나질 말았어야지! 내가 그토록 애걸했는데, 왜 항상 난 당신의 가장 끝에 있지?
왜 당신은 항상 날 짓밟고 떠나?
“폐하. 그, 그러니까…….”
……당신은 참 나쁜 여자다.
진짜 지독하게 나쁜 여자. 심장을 그렇게 잔인하게 쥐어뜯는데, 사람이 언제까지라도 버틸 수 있을 줄 알아?
그럴 줄 아느냐고!
안 찾을 거다.
알렉시스는 블랑슈 휴스턴의 목을 쥐려던 손을 꺾어 벽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결코, 찾지, 않을 거야. 내가 미쳤다고 날 기만한 당신을…….
“어딨어.”
그는 노호를 내질렀다.
“어딨냐고!”
“그, 그게…….”
시엘샤가 벌벌 떨며, 눈까지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속삭였다.
헐렁한 가운을 입고 있는 만큼 그의 각인이 드러난 모양이다.
그들이 황제의 각인을 가진 여자를 두고 감히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나 보지.
“그분께서, 관리자의 핏줄이시라…….”
알렉시스는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실소했다.
눈앞이 새까매 눈을 감은 상태인지 뜬 상태인지 도무지 모를 지경이었다.
“위치 추적이, 잘, 안 됩니다.”
“참 나.”
“일단 관제탑에서의 이동 마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당신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는 소리인가.
“아직 기록이 없는 만큼 생-뢰크를 벗어나진 못했을…… 폐하!”
욕실까지 뛰어갈 기력도 의욕도 없다.
알렉시스는 그냥 몸을 숙여 각혈했다.
새빨간 선혈에 주변이 미쳐 날뛰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며 입술을 대충 닦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친다.
여러모로 죽고 싶군.
죽기 직전이 삶이 참 아름답기도 하지…….
난 그냥 당신 품에 끌어 안겨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그게 내 마지막 이기심이었는데, 그토록 힘든 소망인가 봐.
“생-뢰크를 봉쇄하라.”
그는 지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시각부로, 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생-뢰크를 제외한 제국 관제탑들의 운영을 전부 중지시킨다.”
절망 가득한 한숨이 제 알아서 튀어나왔다.
“율리케. 리베의 전원 준비시키도록.”
“예, 폐하.”
“목표는 황후다.”
그는 시엘샤 듀페르를 비롯하여 세실리아의 계획에 찬성했을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참고로.”
세실리아가 잘못되면 그는 죽을 때 죽더라도 몽테-페르트는 세상에서 지우고 떠날 작정이었다.
반드시.
정말 맹세코.
“그녀는 현재 뤼셍의 후계를 가진 상태이니, 유의하라.”
* * *
세실리아는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습관처럼 침대의 캐노피를 기대했다가, 낡은 나무 천장을 보고 흠칫해야 했다.
황급히 배를 감싸며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할 것을 조건으로 그녀는 미끼가 되었었다.
알렉시스가 알면 노할 게 분명하니 몰래 계획을 짰었지…….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지금쯤 깨어났을 연인을 떠올렸다.
‘미안해.’
……알렉시스는 그녀를 믿었다.
아니, 어쩌면 두 번은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그녀의 ‘도의’를 믿었을 수도.
그 허점을 사용해서 도망친 세실리아는 현재 알렉시스가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을지를 알아 더 서글퍼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알렉시스와 함께할 수 있을 자격을 가져야 했다.
그것도, 한시라도 빨리.
알렉시스의 수명은 나날이 깎여가고 있었으며 각인에 성공하지 않는 이상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은 몸이었다.
‘살 거야.’
세실리아는 불길한 생각을 접으려 노력했다.
배를 감싸며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밖에.
‘미안해, 아가야.’
뤼셍의 다음 태양이 될 아이였다. 그런 만큼 고초 하나 겪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데 이런 일에 휩싸여 버렸다.
‘네 아빠를 위해서였어.’
이해해 달라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세실리아는 일단 조심스레 침대 아래를 살폈다.
놀랍게도 슬리퍼 한 쌍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안에 칼이나 바늘 등등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조심조심 슬리퍼를 신었다.
나갈까, 말까.
일단 그녀가 있는 방은 투박한 침대와 창문.
그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에 그녀 혼자라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방에 머물렀겠지만…….
아이가 있어서.
그뿐일까.
일단 카밀 베르뉴가 그녀에게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최대한 빨리 익숙해져야 그녀가 알렉시스에게로, 퐁레프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세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삐꺽거리는 계단을 최대한 조심스레 내려가자, 1층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선득한 푸른색 눈.
그리고 헝클어진 잿빛 머리.
……카밀 베르뉴.
마냥 ‘선득하다’고 표현하기엔 세실리아는 저 눈동자에 퍽 익숙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친아버지가 번득이고 있는 저 눈동자 색은 그녀의 친어머니가 지녔던 눈동자 색과 완전히 똑같았다.
세실리아는 문지방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안녕.”
베르뉴가 먼저 속삭였고.
“안녕.”
그녀 역시 차분하게 받아쳤다.
“여기가 어디지?”
“생-뢰크 외곽의 어딘가.”
광기에 찌들었다는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답해 주었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쳐다보았다.
생-뢰크에서 자주 보이는 가로수가 새하얀 눈에 뒤덮인 채로 서 있었다.
……눈이라.
겨울에서 봄이 된 지가 언제인데, 이 남자는 홀로 계속 겨울에 머무르는 모양이었다.
문득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세실리아는 진저리를 치며 돌아보았다.
“예뻐.”
베르뉴가 그녀의 머리칼을 탐욕스레 콱 움켜쥐며 속삭였다.
“잠, 잠깐─!”
하지만 미친놈이 말을 제대로 들을 리가 없지.
어느새 낫이 나타났고, 세실리아는 쨍 얼어붙은 채 남자가 가차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을 베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날붙이가 갑자기 나타난 탓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손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배를 가리고 있었다.
‘임신한 사실, 들키면, 안 되는데…….’
세실리아는 부디 베르뉴가 눈치가 없길 바라며 느리게 손을 내렸다.
“예쁘네…….”
미친놈이, 머리칼을 베어갔으면 이만 날붙이를 집어넣든지 해야지 그러질 않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퍼런 빛을 의식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아가, 미안.’
그녀가 배 속의 아기한테 다시금 미안하다고 사과를 읊조린 순간이었다.
베르뉴가 천천히 낫을 들더니 끝으로 제 손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카밀 베르뉴는 미쳤다.
완전히 돌아버린 놈이 손톱을 정리한다고 해서 정말 ‘손톱’만 정리한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세실리아는 반쯤 구역질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날붙이는 여전히 시퍼렇다.
그녀는 티가 나지 않게 시선을 돌려, 유혈 사태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뉴는 아주 성실하게 제 ‘손톱과 손끝’을 정리했다.
마무리했을 땐 나무 바닥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
“……예뻐.”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던 세실리아는 또다시 뻗어오는 손길을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매섭게.
그렇게 때리고 나서 되레 더 겁에 질린 건 당연히 세실리아였다.
“미안, 미안해!”
일단 빌고 보자.
베르뉴의 곁에 사흘 이상 머물러야 할 텐데…… 일단 베르뉴가 그녀에게 몹쓸 짓을 저지를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못 볼 꼴을 보고 싶지 않으려면 최대한 비위를 맞춰야 했다.
“내가 잘못…….”
“유피.”
세실리아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혀야 했다.
‘유피’가 누굴 가리키는지 모를 수 없다.
유페이아 헌트.
그녀의 친어머니.
그러고 보니, 대체 둘의 관계는 어땠으려나? 일방적이었을까, 아니면 쌍방이었을까.
전자인지 후자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유피!”
비명을 빽 내지른 베르뉴가 어딘가로 낫을 내동댕이치더니, 이번엔 그녀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기 시작했다.
한 손에서 계속 흘러내리던 피가 어깨 부분을 엉망진창으로 물들였다.
‘대체 왜 이래?’
대체 왜 갑자기!
세실리아는 덜덜 경련하며 종이 인형처럼 너울거렸다.
머리가 혼탁했고 빈속이 메스꺼웠다.
헛구역질을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렇게 하염없이 남자의 일방적인─어째 좀 절박하게 느껴지는─힘을 감내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갑작스러운, 그러나 말이 되는 것 같은, 그런 추측이 떠오른 탓이었다.
‘날 어머니로 착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혹시나 하는 맘으로 속삭여보았다.
“……카밀.”
우뚝 멈춘 손. 그녀를 요란하게 흔들어대던 손은 멈췄지만, 일단 손은 계속 어깨를 쥐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입술을 다시 달싹였다.
“카밀.”
“…….”
“카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을 떨쳐냈다.
두 손은 의외로 힘없이 떨어졌고, 세실리아는 눈치를 잘 살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거리를 벌리는 순간까지도 베르뉴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세실리아는 놀람에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세상에.’
……더는 선득한 그 푸른빛 눈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온화한, 그녀와 딱 똑같은, 금빛 눈이었을 뿐.
광기 하나 없이 말간 눈빛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세실리아는 당황하여 눈을 파드득 떨었고, 남자는 그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페이아와 무슨 관계지?”
“딸, 이야.”
그는 가만히 자신의 것과 똑같은 그녀의 눈을 뜯어보았다.
그러고는 그들 둘 역시 혈연이긴 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피식 웃으며 자조했다.
“고생했겠네.”
“응?”
“내 딸 아닌가?”
당신이 날 키웠어야 아버지 취급을 해주지.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세실리아는 침묵을 고집했다.
베르뉴가 몇 번 더 실소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내 딸이라고 하기엔 내가 널 키운 기억이 없군.”
“당신 도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지금은 멀쩡한 거지?
당신 정말 미친놈이 맞나?
왜 당신은 미치면…… 내 어머니와 같은 눈을…….
‘관리자’의 푸른 눈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증거.
아니, 어쩌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자가 푸른 눈을 지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실리아는 흘끗 눈을 굴려, 온 세상이 봄인데 홀로 겨울인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진 분명 눈이 쌓였는데, 세상은 다시 봄으로 변한 건지 나무가 어여쁜 연녹색 잎사귀를 자랑하고 있었다.
시간을 뒤틀던 결계가 사라졌다는 소리.
“……정신을 되찾을 때가 있어.”
베르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끔.”
“…….”
“……아주 가끔.”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 뭐라도 먹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베르뉴가 먹을 걸 구해 와서 독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뒤, 음식을 건네줄 때까지 세실리아는 그를 유심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결말은 예상치 못했는데.’
그래도 이미 미친 남자보단 도로 미치게 될 남자와 함께 지내는 편이 백배, 천배 나았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운에 감사하기로 했다.
정신을 되찾은 미치광이께선 대체로 머나먼 허공을 쳐다보며 멍을 때렸다.
이지를 되찾은 몇 안 되는 순간들을 그렇게 흘려보내는 듯했다.
베르뉴에게 그녀를 빠르게 인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세실리아는 말을 걸었다.
의외로 베르뉴는 퍽 순순하게 답변을 내어주었다.
‘가끔 이렇게 정신을, 차리는 거야? 광기에서 벗어나서?’
‘그랬었는데……. 마지막으로 정신 차린 건 10년 전이었나.’
‘…….’
‘다시 돌아오리라 예상은 못 했는데.’
‘근데 왜……?’
‘나도 모르지. 그쪽 핏줄 문제일 수도.’
확실친 않아, 베르뉴는 공허하게 뇌까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디 출신이야?’
‘이글릿.’
‘이글릿이면…… 마뉴엘? 마뉴엘 공국 출신이었어?’
‘그래.’
생각보다 질문에 너무 쉽게 답을 주는걸.
세실리아는 빵을 뜯어 먹으며 베르뉴의 고개가 천천히 젖혀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긴 방랑에 지쳐 모든 걸 포기한 탕자의 모습이었다. 살고자 하는 기력도, 의욕도 전부 사라진.
그는 마치, 죽을힘이 없어 겨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살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의 명령으로 인해 꾸역꾸역 살아가는 듯한…….
제 삶이 나락이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느낌.
만약 세실리아가 지금 칼을 들어 그의 심장을 찌르고자 하면 말없이 찔려줄 듯했다.
물론 그녀는 그럴 용기도 없었으며 그런 도박을 저지를 상황도 아니었다.
만약 찌르려 하다가 중간에 저치가 다시 미쳐 버리면 어떡해.
그럼 진짜 그녀도, 그녀 배 속에 있는 아가도 위험하게 된다.
‘원래 마법이 정신 쪽이었어?’
‘그래. 그래서 더 위험했지.’
‘언제 폭주했어?’
더 위험했다길래 열둘이나 열셋, 그 정도 나이를 예상했거늘.
‘열아홉.’
생각보다 늦은 나이에 세실리아는 턱을 괴었다.
베르뉴가 피식 웃었다.
‘광기 증세를 처음 겪은 건 열둘. 미쳤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미쳤다가, 제정신으로 돌아갔지.’
‘아.’
‘열아홉 때…… 그래, 그때부터 제정신인 상태보다 미친 상태가 더 많았었군.’
‘…….’
‘폭주한 내가 가장 먼저 저지른 짓이 뭔지 아니?’
세실리아는 감히 후보를 던지느니 그냥 빵을 먹는 걸 택했다.
베르뉴가 천천히 딸기잼을 건네주며 뇌까렸다.
‘내 고향을 태웠지.’
‘…….’
‘쓰레기 소굴이었어. 그것만은 후회되지 않는군.’
세실리아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문답은 늘어나면서도 늘어졌다.
그들은 대체로 별 쓸데없는 얘기들을 나눴는데, 그 까닭은 하나였다.
둘 중 누구도 ‘유페이아’에 대해 얘기하는 건 꺼렸기 때문이다.
베르뉴는 처음에 ‘유피’라고 간절하게 외쳤던 것치곤 유페이아를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세실리아는 못내 궁금하긴 했어도, 지금만은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페이아는 둘의 혀끝에 머물 뿐 곧바로 튀어나오진 못했다.
‘당신, 죽지 못해서 사는 것 같아.’
‘뭐…… 죽을 용기가 없는 건 아닌데.’
하지만 주머니 안에 있는 못이 결국 윤곽을 드러내듯이, 딱히 다루고 싶지 않은 화제는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왜 살아?’
세실리아는 다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그녀는 지금 ‘제정신 상태인 카밀 베르뉴’가 ‘미쳐 버린 상태의 카밀 베르뉴’를 지긋지긋해하다 못해 경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자신이 미쳐 다른 이들을 학살한다고 하면, 본인의 자살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 같거든.
특히 자신이 좀 악명이 높은 경우인 만큼 더더욱.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어.’
세실리아는 포크를 꼭 쥔 채로 베르뉴의 눈 한쪽이 금색에서 선득한 푸른색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금색에서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다시 금색으로. 연신 깜박거리던 남자는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광기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력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마침내 고개를 든 남자는 정상적인 금색 눈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안 그래도 없는 기력이 더 바닥 친 듯한 낯을 선보이고 있었다.
‘……네 엄마는.’
베르뉴가 한참 끝에 속삭였다.
‘어때?’
죽었다.
세실리아는 그 간단한 진실을 알려주기 전,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리사와 ‘미친 카밀 베르뉴’가 서로 대치했을 때 베르뉴는 ‘유페이아 헌트의 죽음’에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둘이 사랑했었어?’
설마, 설마, 하면서도 질문을 던진 순간, 베르뉴가 엷게 웃었다.
‘그게 사랑인가…….’
‘…….’
‘……그래서…… 유페이아 헌트는 어때? 잘은 살고 있나?’
세실리아는 또다시 침묵했다.
화제를 바꾸려는 시도가 무용함을 깨달으면서.
그녀의 적막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다시금 눈이 미치도록 깜박거리며, 주인이 광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실리아는 숨을 가다듬고는 그녀와 베르뉴가 총 며칠을 같이 보냈는지 세어 보았다.
나흘.
참 기이하고도 미친 듯한 나흘.
보통 최면을 안정적으로 행하기 위해서 ‘이상적으로 손꼽히는 기간’은 닷새였다.
하루만 더 버티면 좋겠는데, 세실리아는 치마를 쿡 움켜쥐며 기도했다.
부디. 부디 하루만 더.
하지만 이 기도는…….
결국 통하지 못하여…….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에서 회까닥 돈 푸른빛 눈이 선연하게 번득였다.
그녀를 잔악하게 꿰뚫을 정도로 미쳐 버린 빛깔. 시체를 갈기갈기 찢으며 그 아래에서 맨발로 춤을 추는 소녀도 저 정도로 섬뜩하진 않을 터였다.
세실리아는 앉은 자세 그대로 멈춘 채 무릎 부근의 치맛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아가.”
“…….”
“유리를 뱉으려면, 네 입이 찢길까?”
싱글거리는 웃음이 뚝 멈춘 순간.
세실리아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피했고, 그녀가 있던 자리를 기습했던 베르뉴가 이를 까득 갈았다.
시퍼런 낫이 그의 손에 들린 채 위풍당당한 기세를 자랑했다.
“하늘의 시꺼먼 별이~”
음도 박자도 가사도 맞지 않은 듯한 노랫소리.
베르뉴가 낫을 아무렇게나 휙 집어던지더니 이번엔 양손을 든 채 귀신처럼 춤을 추며 달려들었다.
세실리아는 재빠르게 도망치려 했지만 끝내 머리카락이 잡혔다.
“아아아악!”
“내놔! 이건 내 거야!”
그녀의 머리칼을 휙휙 잡아당기는 잔악한 손길에 머리가 뽑히다 못해 목이 뒤로 꺾일 듯했다.
베르뉴가 기어이 그녀의 귀를 낚아채어 잡았을 때, 세실리아는 불쑥 손을 들어 남자의 턱을 단단히 붙들었다.
“……알렉!”
* * *
여자가 사라진 나흘 동안 시간이 멈췄다.
그의 숨도 멈췄으며, 그의 태양과 달과 별은 전부 빛을 잃었는데 여전히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어째서.
알렉시스는 폭우와 낙뢰를 있는 힘껏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단순히 마법을 쓰면 쓸수록 심장이 찢어지는 격통이 치밀기 때문은 아니었다.
리베의 마법사들이 원활하게 수색하기 위해서라도 날씨는 함부로 바꿀 수 없어, 알렉시스는 온 세상을 찢고 싶은 충동을 끈질기게 참아야 했다.
‘세실리아.’
시씨.
시씨, 제발…….
정무를 전부 어머니께 떠넘긴 채로 생-뢰크를 미친 듯이 떠돈 지 나흘째.
세실리아가 베르뉴 그 미친 새끼와 함께 있다는 생각만으로 온몸의 피가 바작바작 말랐다.
돌아버린 작자가 어떤 미친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탑의 ‘사냥’에 종종 참여했던 알렉시스는 광기에 돌아버린 마법사들을 지나치게 많이 목격했다.
그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악도.
‘안 돼.’
세실리아만은 안 된다.
물론 그녀가 죽기 위해 베르뉴에게 간 건 아닐 터다.
정말 위험하다면 언제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겠지.
그러겠, 지?
그러리라고, 세실리아가 그만큼 무모하진 않으리라 믿으면서도 알렉시스는 자신이 없었다.
더는…….
그는 감히 여자를 잘 파악한다고 단정 지었었지만, 지금 이 꼴을 봐라.
오만의 대가를 아주 처절하게 잘 치르고 있지 않나.
그래서 그는 자신하는 대신 불안에 돌았다.
‘불러줘야 해, 시씨.’
꼭. 제발…….
나흘간 해가 떠오를 때마다 알렉시스는 주저앉아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감히 원해선 안 될 이를 탐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런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거듭하는 것이려나.
나락에도 끝이 있다더니 거짓이었다.
그의 나락에는 또 다른 나락이 있어 알렉시스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세실리아.’
이름을 한번 뇌까린 것뿐인데 온몸이 휘청였다.
알렉시스는 버티지 못하여,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녀가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된 맨 처음 순간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는, 나흘 동안 깎이고 깎여 이젠 하잘것없었다. 부스러기조차 바스러지고 없다.
애초에 그가 세실리아에게 화를 낼 수 있을 리도 없고.
대신 머릿속이 수많은 가정을 내뱉기 시작했다.
만약에 알렉시스 뤼셍이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그랬다면 세실리아가 임신한 상태로 베르뉴를 찾아갔을까. 그녀가 대중 앞에서 미친 듯이 난도질당해야 했을까.
스스로를 정부 취급할 만큼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야 했을까.
설령 그가 황제이더라도 그녀에게 감정이 없었다면…….
세실리아가 요구했던 대로, 그저 평범한 오누이다운 감정만 간직했더라면.
그의 이기적인 감정과 이기적인 욕망을 버린 채로 그렇게 아름다운 관계만 남겼더라면.
그렇다면…….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들 그는 늘 같은 선택을 내렸겠지.
애초에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하나였으며 그가 갈망하는 대상 역시 오롯이 하나였다.
……그러니 그 모든 가정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는 스스로를 거듭 난도질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미칠 것 같은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해, 시씨.’
그는 심장 가르는 기분으로 사죄를 뇌까렸다.
순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가 ‘그’가 아니었더라면, 세실리아는 비참해지지도 나락에 빠지지도 않았을 터다.
‘미안해.’
내가 나라서 미안해.
그는 심장을 긁어냈다.
다 타들어 간 감정의 부스러기마저도 사랑이었다.
사죄였고, 집착이었으며, 그리하여 이기심이었고 갈망이었다.
미안해, 시씨.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당신은 내게 선택이 아니라 당연이었어.
내가 어찌 감히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알렉시스는 손바닥을 틀어막고는 몇 번 헛구역질했다.
몸이 끝에 도달한 건지 이젠 날숨만 뱉어도 피비린내가 난다.
‘안 돼.’
세실리아를 찾고 베르뉴를 처단할 때까진 버텨야 했다.
알렉시스는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고꾸라졌다.
턱엔 흙이, 입가에 피가 묻은 채로 남자는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어떻게든 똑바로 앉았을 때, 나비가 나풀거리며 다가와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봄이니 꽃이 있고 꽃이 있으니 나비가 있는 것 역시 당연할 텐데, 알렉시스는 피식피식 실소하며 오랫동안 그 나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날개가 금빛인 까닭이다.
우연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우연이, 기막히게 지독한 우연이라…….
내가 무너지는 순간마다 당신은 내게 와.
그런데 내가, 어찌 감히.
알렉시스는 다음 순간 자리에 튕기듯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곧장 이동했다.
* * *
“……알렉.”
그렇게 속삭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속도가 바뀌어 그렇게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바로 코앞에 단단히 미쳐 버린 마법사가 있었는데도 의식은 전부 다른 곳에만 쏠렸다.
세실리아는 파드득 떠는 심장을 느끼며 느리게 몸을 돌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지.
아니면 충동이 이끄는 대로 사랑한다고 말할까.
넌. 날…….
알렉시스만 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마법사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베르뉴에게로 뛰어들었다.
안 그래도 낡은 저택이 더 혼란해졌다.
곳곳에서 질러대는 고함, 뭔가 많이 망가져 가고 있는 아수라장 속의 굉음과 미치광이의 울부짖음까지.
넋을 놓을 상황이 아닌데도 그러고 있었다.
현실을 잊고 꿈을 꾸게 만드는 게 낭만이라면, 그녀의 낭만이 여기에 있는 까닭이다.
피로로 침잠한 보랏빛이 그녀에게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감정이 참 가득하면서도 뭐라 차마 말을 하지 못 하겠다는 시선.
‘알렉.’
손을 뻗으며 그에게로 내달리려 했을 때.
“언니!”
다급한 부름과 함께 세실리아는 어디론가 이동했다.
세상이, 알렉시스가, 녹아내렸다.
* * *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을 때 그녀는 어딘가의 풀밭에 앉아 있었다.
뻣뻣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자, 여기가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퐁레프 황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초입에 있는 풀밭이었다.
하긴, 퐁레프로 바로 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블랑슈에게는 여기가 최선이었을 터다.
세실리아가 상황을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도 잠시, 블랑슈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조리 그녀에게로 뛰어들다시피 했다.
“폐하!”
“폐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저희가 얼마나 걱정─”
“누구 있어? 다들 폐하께 숄이라도 걸쳐 드려!”
“언니, 언니! 아, 망할! 저것들은 뭐야!”
블랑슈의 새된 비명에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기자들이 사진기를 들이밀며 연신 그녀를 찍어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와 퐁레프의 사람들이 전부 기가 질렸다는 사실을 알긴 할까,
언론은 정말 제 욕망과 업무에 충실했다.
기자 한 명이 요란하게 앞으로 뛰어들기 전, 노링 남작이 불 뿜는 듯한 어조로 호령했다.
“다들 비키십시오오오!”
황궁의를 위해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고 세실리아는 의사의 으르렁거리는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는 당장 눈을 아래로 떨구며 얌전하게 속삭였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진짜야. 위험한 건 안 겪었어.”
머리카락 한 줌이 날아가긴 했어도 말이지.
그리고 태교에 조금 위험한 풍경을 많이 보긴 했지만 앞으로는 예쁘고 좋은 것들만 볼 테니까.
그녀가 순순하게 내놓은 대답에 황궁의는 더욱 속 터지겠다는 낯만 내비쳤다.
“선황후와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는 아십니까!”
“……나중에 죄송하다고 말할 거야.”
“비셔야 할 겁니다.”
“그럼 빌어야지 뭐.”
세실리아의 명쾌한 결론에 황궁의는 투덜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신문이고 나발이고 언론과의 인터뷰고 나발이고, 황후 폐하께선 현재 면밀하게 검사를 받으셔야 한다.
‘안정이 필수적이라고요, 폐하…… 하.’
물론 황제 폐하께서 일방 각인을 하셨으니 황후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신 거겠지.
세실리아는 지금 퐁레프로 돌아가려는 이 순간마저도 배를 한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자신보다 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속내를 내비치면서.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노링 남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퐁레프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때마침 들려온 커다란 굉음에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어도…….
마치 거대한 화재라도 난 것처럼, 도시 한쪽이 속절없이 폭발에 휩쓸린 것처럼, 새파란 하늘에서 딱 한구석만이 어둑했다.
미친 듯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은 사람의 생각을 선득하게 얼리기 충분했다.
“……안 돼.”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토해냈다.
머리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을 마음이 인지하고 있었다.
알렉이다.
알렉시스, 다른 마법사들과 베르뉴의 대치에서 생긴 일 아닐까.
‘알렉.’
괜찮을 거야, 그는 승리의 뤼셍이잖아.
마음속 목소리가 애써 그녀를 달래었지만 세실리아는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그저 반쯤 미친 듯이 절규하면서 무너져 내렸을 뿐.
눈에선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비정상적으로 불길하게 뛰는 심장에 생각만 폭주할 뿐이다.
알렉. 안 돼.
세상 모든 사람이 뭐라 한들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남자.
그를 온전히 가지기 위해서 그녀가 어떤 짓까지 했는데.
절대 안 된다.
죽음 따위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안 돼.
넌 감히 날 버리고 죽을 수 없어!
네가 왜 죽어. 네가 어떻게 죽어!
아득바득 살고 버텨서 내게 와야지!
네가 날 내 손에 쥐여 줬잖아,
세상의 것도 아니고 내 거라며! 오롯이 내 거라며!
난 이제 너뿐인데, 너 빼곤 아무것도 없는데,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머저리 등신 천치가 되었는데, 날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고서 어떻게 감히 떠나려 해?
어떻게?
“아아아아아아악!”
세실리아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변에서 그녀를 뭐라 만류하든 상관없었다.
듣지도 못하였다.
미친 듯이 계속 뜯어대다가 몸을 일으켜, 고꾸라지듯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갈 거야.’
가야 했다.
그와 함께해야 했다.
그가 죽으면 그녀도 죽을 테니, 나락에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그 바닥까지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겠지.
세실리아는 공중으로 휙 날아올랐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너무나 많은 현실을 함축하고 있었지만, 세실리아는 어느 것 하나 유추해 내지 못했다.
검은색 연기 쪽으로 미친 듯이 날아가는 것에 집중했을 뿐.
조금만 더 생각하면 알렉시스 뤼셍이 살아 있기에, 그녀가 드디어 그에게 각인했다는 것을 눈치챘겠지만 그럴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세실리아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무렵엔 의외로 검은색 연기가 빠르게 흩어지고 없었다.
말끔하게 변하는 시야 속에서 세실리아는 익숙한 장소를 발견했다.
……듀블렌.
그녀와 알렉시스가 종종 소풍을 왔던, 생-뢰크 외곽의 작은 숲.
불과 몇 주 전에도 다녀왔었지.
고즈넉한 정경을 자랑하던 숲은 오늘만은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강렬한 화마가 딱 한가운데만 파먹고 내버린 것처럼.
세실리아는 주변을 유심하게 지켜보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확실히 이곳에서 불이 난 건 맞는 모양이다.
잔디밭은 새까맣게 타 있었고, 곳곳에 나뒹굴고 있는 나뭇가지에는 채 꺼지지 못한 잔불이 일렁이며 타닥타닥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느라 신발은 어딘가에 떨어뜨려 버리고 없었다.
밟자마자 부서지는 잿더미가 그녀의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세실리아는 검게 변하는 발끝을 내려다보다 말고 느릿느릿 고개를 끌어 올렸다.
모든 게 망가진 폐허 속에서 부드럽고 안온한 햇빛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나타난 잿빛 머리의 남자를 마주 보았다.
평상시 선득하기만 했던 푸른 눈은 오늘만은 쇠약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가 대체 어디에 있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는 아득한 시선.
세실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저렇게 만들었으므로.
기억 잃은 남자는 당연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놀람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며 경계할 뿐이었다.
길 잃은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낯을 그는 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저 지켜보았다.
때마침 내려친 보랏빛 낙뢰가 남자를 고스란히 집어삼켰고…….
카밀 베르뉴는 절명했다.
세실리아는 죽은 이에게서 눈을 들어 때마침 등장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격렬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그의 셔츠 자락은 너덜너덜했다.
그 바람에 드러난 쇄골에선, 그녀의 이름이 뿌듯하게도 새겨져 있었다.
남자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마냥 무감했던 낯에 흐릿한 미소가 피어올랐고, 기어이 무지개를 잡은 아이가 된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세실리아는 고꾸라지듯이 내달렸다.
그녀에게 눈물을 되찾아준 남자에게로 엉엉 울며 달려갔다.
너른 품속으로 무너져 내리자마자 그의 팔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심장에서 심장으로 전해지는 고백.
이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담백하게 펼쳐졌다.
세실리아가 휘청이며 주저앉자, 그녀를 안고 있던 알렉시스 역시 마찬가지로 허물어졌다.
“압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알고 있어요.”
세실리아는 울음 맺힌 얼굴을 들어, 부드럽게 남자의 뺨을 쓸었다.
보랏빛 눈에도 마찬가지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알고, 있어요.”
매캐한 연기와 재가 굴러다니는 폐허. 한때 생명의 녹색으로 가득했던 숲은 화마의 흔적을 간직한 채 검게 물들었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잔불이며 제 끝을 다한 나무들까지.
어느 것 하나 예쁘게 표현할 수 없는 장소인데도 상대가 있어 낙원이었다.
서로만 있으면, 늘 그랬듯이.
폐허에 볕이 깃든다. 그들은 마침내 나락의 끝에 도착하였고…….
이는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