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봄은 어디에 (16/18)

10. 봄은 어디에

황후의 눈꺼풀이 떨리는 모습을 가장 처음 목격한 사람은 바로 세실리아 헌트였다.

여느 아침처럼 그녀는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붉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살짝 들렸다.

세실리아는 숨을 헉 들이켜며 단박에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어머니!”

마리사의 눈꺼풀이 조금 더 위로 들렸다. 세실리아는 애꿎은 어머니의 손만 붙들기보다는 우당탕탕 달려가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곧장 달려온 노링 남작은 선황후께서 마침내 의식을 되찾으셨노라고 아주 행복한 진단을 내렸다.

마리사는 몸이 매우 약해졌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

카밀 베르뉴가 침입한 상황, 그리고 세실리아를 보호해 주려다 기절했던 순간까지 전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가장 먼저 엉엉 우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다음으로 달려온 아들에게 대수롭잖다는 듯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었다.

“……어머니.”

알렉시스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붙들었다.

마리사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다, 모두의 걱정 속에서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다음 날 오전 너무 늦지 않게 깨어났을 때.

퐁레프는 안도했고, 황실 대변인 프랑수아즈는 아주 신나게 선황후의 쾌차를 발표할 수 있었다.

계속 잠들어 있던 탓에 마리사 뤼셍은 거동을 편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몸이 약해진 그녀를 위해 정성껏 수발을 든 사람은 세실리아와 선황후의 시녀, 디엘라 백작 부인이었다.

두 여인은 번갈아 가며 적극적으로 보살폈고, 봄이 완연해졌을 때쯤 마리사는 적어도 휠체어를 타고 퐁레프의 정원들을 둘러볼 정도로 몸을 회복했다.

세실리아는 봄꽃이 흐드러진 길 아래로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예전보다 더 단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마리사가 황후의 일로, 그녀가 황녀의 일로 바빴을 땐 언제나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

하지만 지금만은 단둘이서만 있으니.

세실리아는 마리사에게 많은 소식을 들려주었다.

‘파양되었어요, 어머니.’

‘아.’

마리사는 딱히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절차가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엔 동의했다.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는 세실리아는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약속을 건네었다.

‘알렉시스랑은 어때?’

‘……일단 거의 해결되었는데.’

‘각인은?’

‘아직이요.’

마리사는 ‘둔한 아들놈’이라고 한숨 사이로 씨근덕거렸고, 세실리아는 알렉의 편을 들어주려다 벌써 싸고 도면 안 된다는 야유를 받아야 했다.

‘제 친어머니…… 유페이아 헌트에 대한 진실이 알려졌어요.’

‘그래. 잘했어.’

‘제 성도 이젠…….’

‘세실리아 헌트?’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리사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아니. 음. 기억이, 났나 싶어서.’

‘……그것도 났어요. 통속 소설 나름 재밌었어요.’

‘글쎄, 시씨. 넌 지겨워했어.’

‘어떤 건 감정이 너무 과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해야 할까.’

마리사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세실리아는 뾰로통해진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날 밤 통속 소설 한 권을 다 읽어드려야 했다.

목이 조금 아팠지만 마리사가 너무 좋아해서 기뻤다.

다 읽었을 때쯤에 그녀는 알렉시스에 의해 납치당하듯 집무실로 향했었지…….

“시씨.”

굳이 ‘세실’이라는 애칭을 쓰지 않아도 되는 순간부터 마리사는 줄곧 ‘시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녀를 향해 몸을 숙여 어머니의 숄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이어 무릎에 깔고 있는 담요까지 꼭꼭 펴서 찬바람을 막았다.

“네, 어머니.”

“근심이 있어 보이는데?”

역시나 어머니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세실리아는 쭈뼛쭈뼛 그녀의 눈치를 살폈고, 마리사가 편히 말하라는 듯 신호했다.

“그게요.”

“으응?”

“……왜, 각인이 안 되는지, 잘 모르겠어서…….”

각인을 할 거면 지금이 여러모로 적기였다.

선황후의 쾌차로 인해 국민들은 기뻐했고, 그녀를 향한 여론도 나쁘지 않았다.

몽테-페르트에서 카밀 베르뉴의 권속을 적발해 낸 것을 계기로 평판이 좋아졌다지.

그뿐일까.

알렉시스 역시 베르뉴의 권속을 화려하게 처치한 이후로 국민들의 지지를 많이 회복했다고 한다.

각인을 안 한 것치곤 그의 마력은 굉장히 안정적이라 주변에선 ‘하루빨리 각인만 이뤄지면 된다’며 희망을 내비치고 있다고.

아직도 알렉시스와 그녀 사이의 결합을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만…….

일단 황실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은 지금 일을 저지른 게 나아 보이는걸.

“……알렉을 좋아하니?”

그녀에게 몇 번이나 쏟아지는 질문이었다.

세실리아가 단 한 번도 제대로 답한 적이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 까닭은 단 하나.

그 질문을 물어본 상대가 ‘알렉시스 뤼셍’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마리사에게도 바로 답변을 주는 대신 난처하게 얼굴을 긁었지만, 딸의 성장 과정을 빼곡하게 지켜보았던 어머니는 어렵지 않게 감정을 눈치챘다.

“각인이 안 되는 이유를 잘 모르겠긴 해……. 왜냐하면 나랑 아르망은 정말 쉽고 빠르게 각인했거든.”

애초에 아르망 뤼셍은 맨 처음 보자마자 석 달 안에 결혼할 거라며 조금 미친 청혼을 날렸었다.

‘차라리 알렉이 그런 식의 고집을 부려본다면 어떻게 될까?’

마리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다, 거기에 넘어가기엔 그녀와 세실리아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미쳤나 봐’ 하면서 관심을 가질 성격이었지만 세실리아는 ‘미쳤나 봐’ 하며 관심을 완전히 꺼버릴 성격이었다.

“어떻게 각인하셨는지…….”

세실리아가 어물어물 질문을 던져, 마리사는 휠체어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내가 고백했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고백이면 말이지.

마리사는 적당히 과거를 왜곡했다. 어차피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딱딱한 말에 비해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각인에 더 유리할 터였다.

딸아이가 뒤에 있는 만큼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충분히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더없이 진지한 낯으로 눈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리고 있겠지.

‘너무나 사랑스럽게도 말이야.’

그리고 어머니의 예상이 참 정확하게도, 세실리아는 눈을 요리조리 굴리면서 ‘고백’이란 단어를 곱씹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알렉시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정확하게 해준 적이 없었다.

그의 곁에 머무르겠다는, 하지만 그의 곁에 ‘당당하게’ 머무르진 못 한다는, 그런 못된 말만 넘치게 했을 뿐.

“……곧 장미가 피겠네.”

“두 달 뒤 아닌가요?”

“그럼 곧이지.”

마리사의 이상한 기준에 세실리아가 엷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휠체어를 다시 천천히 끌기 시작했다.

분홍색 꽃잎의 비가 축복이 내려지듯 그들 위로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마리사가 손을 뻗어 마침 떨어지는 꽃잎 하나를 잡았다.

“예쁘구나.”

그녀가 말없이 세실리아에게 꽃잎을 건네었고, 눈치 빠른 세실리아는 책들 사이에 꽃잎을 끼워 넣었다.

언제 어느 순간 불쑥 이 책을 열면 작은 추억 하나를 찾을 수 있을 터.

“어머니께서 조금 더 쾌차하시거든 듀블렌으로 소풍 가요.”

“듀블렌?”

“네네, 생-뢰크 외곽 지역에 있는 숲이요. 알렉과 블랑슈와 함께 종종 갔는데 사계절이 전부 예쁘답니다.”

“어머, 휴스턴 후작 영애라니. 오랜만에 이름 듣네.”

마리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고, 세실리아는 녹색 눈 한가운데에 적힌 호기심을 눈치챘다.

‘블랑슈 휴스턴은 과연 각인에 성공했을까?’─를 여쭤보고 싶으신 거겠지.

“불행히도 아직입니다.”

“……어머. 영애 마력이 꽤 강하지 않았어?”

“네, 그렇습니다.”

“서둘러 노력해야겠는데?”

“곧 운이 따라주겠죠.”

마리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봄이 깊다.

일단 보이는 정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세실리아는 기실 이 계절이 가장 잔혹하다는 진실을 잊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못되게 군 만큼 정말 예쁜 고백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

* * *

세실리아가 집무실에 없는 걸 보니, 아마 어머니와 함께 산책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세레인과 노트르를 비롯한 정원 곳곳에 꽃이 만발한 만큼 그들의 산책은 점점 잦아졌다.

“컹컹!”

알렉시스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 자신에게로 돌진하는 강아지를 받아 안았다.

녀석이 제 몸무게마저 잊은 채 마냥 좋아한다.

“시씨한테는 이러지 마라.”

알렉시스는 서늘하게 경고했지만, 인간이 짖거나 말거나 강아지는 마냥 행복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바닥으로 다시 내려주니 녀석이 이리 데굴, 저리 데굴 신나게 양탄자 위를 굴러다녔다.

‘기분이 매우 좋나 보군.’

그래. 최소 한 명, 아니, 한 마리라도 좋아야지.

알렉시스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서류를 뒤적였다.

‘리베의 작년 재작년 후원 기록서가 어디에 있더라.’

이윽고 찾아낸 그는 늦지 않게 욕실로 도착한 뒤 피를 토할 수 있었다.

봄이 된 만큼 각혈은 잦아지면 잦아졌지, 뜸해지진 않았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심장의 통증은 여전했고.

그는 대체 언제 죽을까…….

알렉시스는 서류에 붙어 있는 세실리아의 메모를 읽었다.

꼼꼼한 성격답게 메모엔 작년과 재작년의 후원자 변화, 액수 변화를 비롯해 그녀의 사견이 적혀 있었다.

‘어째 글씨도 예뻐.’

알렉시스는 살짝 우울한 낯으로 유려한 필기체를 눈으로 덧그렸다.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회복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 바람에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줄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밤.

아니면 새벽.

그마저도 그들은 말의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몸이나 서류의 대화를 했지.’

알렉시스는 세실리아의 쪽지를 톡톡 치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과연, 여인의 사랑을 얻는 것에 성공했을까.

옛날과는 다르게 그는 확실히 부정할 순 없었다.

너무나 예쁜 금빛 눈은 그를 볼 때마다 가장 찬연하게 반짝였으므로.

그리고 누군가의 눈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사랑에 비슷한 호감이라고 믿는다.

가끔 세실리아가 그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입을 맞추곤 했다.

그녀의 성정을 고려하면 맘에 없는 남자에게 접촉을 할 리는 없을 터.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세실리아는 그를 보며 웃고, 그와 함께여서 웃고, 또 가끔은 그에게 먼저 입을 맞추며 제 감정을 표현하곤 한다.

단순히 그와의 밤이 좋아서는 아닐 테고.

그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각인은.’

아직도 안 이루어졌다.

심장이 불현듯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말없이 턱을 괸 채로 발작 같은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심장 안에서 못된 장난꾸러기가 발차기라도 하듯 곳곳이 쓰라렸다.

그는 결국 다시 욕실로 향했고, 수차례 피를 토해냈다.

이번에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는 어지럼증과 두통이 함께 일고 있었다.

그는 반쯤 쓰러질 듯이 안락의자에 앉았고, 알리샤가 총총 다가와서 그의 무릎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아야.”

그러더니 이빨 끝으로 그의 바짓단을 물었다.

얼른 따라와 달라는 몸짓에 알렉시스는 몸을 일으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새하얀 강아지께선 주인 못지않게 강한 고집을 갖고 계시므로, 그냥 재깍재깍 요구를 들어주는 게 편했다.

알리샤가 마침내 멈춘 곳은 그렇게까지 많이 쓰지 않는 찬장이었다.

강아지가 경쾌하게 몇 번 짖어 알렉시스는 흘끗 내려다보았다.

“여기 열어달라고?”

“커엉컹!”

맞아, 눈치 빠른 인간! 얼른 열어라!

알리샤는 행복하게 앞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의 얄미운 주인은 요즘 들어 사탕의 개수를 제한했다.

맨 처음엔 두 개, 세 개 넙죽넙죽 주더니, 요즘은 ‘이빨 관리해야지, 안 돼’ 등등의 잔소리를 하면서 사탕을 한 개 내지 두 개밖에 안 줬다.

나쁜 주인!

알리샤는 나름의 꼼수를 써서, 주인이 없을 때 주인이랑 친한 남자를 데려왔다.

이 남자라면 분명 사탕을 여러 개 줄 테지!

알리샤는 기분이 좋아 빙글빙글 돌았다.

한편 알렉시스는, 새하얀 강아지가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찬장을 열었다.

별로 쓰지 않는 찬장인 만큼 별것 없었다.

새하얀 종이 뭉치, 펜과 잉크, 레터 나이프 그리고…….

알렉시스는 물끄러미 사탕 꾸러미들을 쳐다보았다.

아래서 알리샤가 빨리 건네 달라며 있는 난리 없는 난리를 피우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쓰지 못했다.

‘설마.’

하지만 ‘설마’라고 하기엔 그는 마법사였고, 해당 제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나 마법사의 파트너가 되었을 경우 피임을 위해 먹는 약.

알렉시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 내쉬었다.

……그러니까.

‘피임약.’

이게 여기에 있는 연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이곳에 들락날락하며 살다시피 하는 사람이 그와 세실리아를 제외하곤 또 있었나.

자신이 모르는 새, 그녀는 피임하고 있던 모양이다.

알렉시스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사탕 한 개를 끄집어냈다.

알리샤가 이젠 숫제 앞발로 그의 신발을 난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황제는 피임하지 않는다.

그리고 황가에서 태어나 후계의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황실의 손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는 세실리아 역시, 저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알렉시스는 쓰게 웃었다.

‘차라리 내게 해달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수도.’

그래. 뭐.

임신은 철저히 여자 몸의 부담이다.

그러니 그는, 아이를 보고 싶다고 희망을 비출 수 있을지언정 아이를 낳아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영혼이 날아간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계속 아팠던 심장이 이젠 갈라질 정도로 절규하고 있어서.

그래도 이번 건 신체적인 통증은 아니고 정신적인 통증이라 다행일까.

서글픔? 설움?

……모르겠다.

어쩌면 세실리아는 그냥 아기만 갖기 싫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는데…… 어째 그와 그녀가 나눈 그 무수한 밤이, 서로에게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끌어안았던 그 모든 시간이, 모조리 부정당한 느낌이라서…….

아팠다.

알렉시스는 계속 끄덕이고만 있던 고개를 푹 떨구고는 손에 들린 피임약을 쳐다보았다.

‘내가 당신에게 부담이었을까.’

‘일방 각인’을 했다는 현실을 숨긴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각인을 한 걸 안다면, 세실리아는 성실하고 공평한 성격답게 어떻게든 그를 사랑하려 노력했겠지.

그리고 사랑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서.

노력하면 할수록 정이 떨어지지, 정이 붙긴 쉽지 않다.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그냥 그가 정말 오롯이 좋을 때 그에게로 오면 되도록, 그렇게 환경을 만들기 위해 숨겼다.

그는 절대 부담을 지워서 사랑을 쟁취하고 싶진 않았다.

고작 그런 사랑을 위해서 기다린 게 아니기도 하고.

알렉시스는 기나긴 날숨을 내뱉으며 제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아무리 야단법석을 떨어도 사탕을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알리샤가 그를 원망스레 째려보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알렉시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영혼에 화인이라도 찍힌 기분이라.

‘당신은 내가…….’

당신이 너무나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당신은 그냥 내가 지겨운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변함없이 집착하고 달라붙는 내가 소름 끼치는데, 그냥 내가 좋은 척 연기를 해주는 걸까.

긍휼을 베풀어서.

당신이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이곳에 머무르려면 내 허락이 필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가장 슬픈 점은, 그 모든 생각이 전부 일리가 있게 느껴지는 것.

그래요, 시씨.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애초에 처음부터 알지 않았나.

감정은 결코 동등하게 흐르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가 좋아서 미쳐 죽더라도 그 누군가는 내가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고 갈 수 있다.

그렇게 매혹적이고 불공평하면서도 차마 놓을 수 없는 감정이 사랑이다.

‘내가, 그냥…… 지겨웠을까.’

아니면 애새끼 같아 보였으려나.

갖지도 못할 사랑을 갖겠다고 아등바등 악을 써대는, 주제도 모르는 등신 천치?

그랬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는 그 집착에 소름이 끼쳤을 수도 있겠지.

“하…….”

알렉시스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손에 쥔 사탕을 결국 다시 찬장에 넣어 두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던 강아지의 새까만 눈에 배신감과 절망이 서렸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그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척 찬장을 닫았다.

그가 참 발전 없고 이기적인 개새끼이긴 한 모양이다.

그가 싫으냐고, 그가 꺼림칙하냐고 질문을 던져야 하거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긍정의 답을 들을까 두려워서.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주고 있는 지금의 세실리아가 너무 곱고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가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이런 거짓 낙원에 빠져 살 수도 있지 않냐고.

어차피 살날이 그렇게 길지도 않은데 말이야.

알렉시스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금방이라도 아득한 절망에 빠져 죽고 싶은 자신을 정돈하고는 자세를 단정하게 폈다.

그는 여자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사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세실리아였으며 거짓을 읊는 여자 역시 세실리아였기 때문에.

그렇담 그는, 여자의 진실에 기꺼이 빠져 죽을 자신이 있는 만큼 여자의 거짓에도 속절없이 침잠할 자신이 있었다.

……사랑해.

덧없는 고백이 소리 없이 메아리친다.

어쩌면 이 진심이 터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고여 썩고 있어, 그래서 심장이 아픈 것일 수도.

* * *

포플러 나무가 연녹색 잎을 자랑하기 시작했을 때, 세실리아와 알렉시스는 마리사를 모시고 듀블렌 숲으로 떠났다.

황후의 짐을 내려놓게 된 마리사는 바쁜 탓에 하지 못했던 모든 걸 아주 알차게 경험하고 있었다.

마리사가 디엘라 백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숲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동안, 알렉시스는 세실리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거의 8년 전 그들이 어렸을 때처럼.

그때 세실리아의 머리카락 색과 지금 세실리아의 머리카락 색은 다르다.

그때 알렉시스의 오만함과 지금 알렉시스의 오만함은 달랐다.

과거의 파편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그들은 7년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생각했다.

세실리아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머리칼을 쓸어 잘생긴 이마를 덧그렸다.

한편 알렉시스는, 여인의 가냘픈 턱선과 그 아래 그가 빼곡하게 새긴 붉은색 흔적들을 눈에 담았다.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색이어서일까. 새하얀 설원 위에 피어난 동백 같다.

“알렉.”

세실리아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지금 불고 있는 봄날의 안온한 바람보다 더 다정하고 포근한 목소리.

“……예.”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제 위에서 흩날리는 여자의 머리칼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세실리아가 느리게 몸을 숙이고, 그가 천천히 일어나려던 순간.

바로 옆에 있던 바구니의 뚜껑이 스르륵 열리더니 종이 한 장을 뱉었다.

세실리아가 화들짝 놀라는 사이, 날렵하게 몸을 일으킨 알렉시스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종이를 주웠다.

다정한 온기를 주던 품은 그렇게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알렉시스가 벌떡 일어나며 종이를 반쯤 움켜쥔 까닭이었다.

“알렉?”

무슨 일이지?

세실리아는 혼란과 걱정을 섞어 올려다보았고, 알렉시스는 짓쳐 물고 있던 입술을 겨우 떼어냈다.

“몽테-페르트의 전갈입니다. 카밀 베르뉴의 흔적이 생-뢰크 외곽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쨍. 무언가 깨지는 듯한 신음이 환청처럼 들리는 기분이었다.

봄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베르뉴가 외곽에 있는 만큼 그들은 소풍을 하겠다며 질질 끌 수 없었다.

숲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낭만을 위해 마차를 탔었지만 이젠 생-뢰크의 안위가 더 시급했다.

사람들이 황급히 모여들었고, 알렉시스는 곧장 마법진을 사용하여 퐁레프까지로 이동했다.

“전, 폐하!”

시엘샤 듀페르를 위시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법진에서 나오는 동안, 세실리아는 약간의 역함을 느꼈다.

헛구역질을 참으려 이를 악물자, 알렉시스가 눈치 빠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냐, 그냥…… 멀미가 좀 심해서.”

걱정스러운 보랏빛이 그녀의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못내 초조해하는 시선에 세실리아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 알렉. 알렉. 넌 얼른 회의 참석해야지.”

“하지만 당신─”

“노링 남작에게 찾아갈게. 진단받고 있을 테니까 얼른 가, 응?”

알렉시스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내려앉았지만, 그 역시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 노링 남작을 만나라고 강권한 뒤 회의에 참석하는 수밖에는.

알렉시스가 몽테-페르트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회의하는 동안, 세실리아는 천천히 노링 남작의 사무실로 향했다.

평상시라면 의사를 호출했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은 걸으면서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베르뉴가 나타났어.’

기어이.

그리고 어쩌면.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선 크게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그녀가 베르뉴가 아닌 ‘유페이아 헌트’의 딸임을 강조할 것.

다른 하나는, 그녀가 직접 베르뉴의 체포에 도움을 줄 것.

세실리아는 이미 마탑에서 베르뉴의 권속을 붙잡았었다.

실제로 그 모습 덕분에 언론들은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변했었지.

동시에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부족해.’

그녀가 만약 정말 ‘연쇄살인마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다면, 그녀가 직접 아버지의 광기를 끊는 게 답이었다.

마탑의 정예 마법사도 못 잡는 ‘카밀 베르뉴’를 어떻게 잡아낼 것인가.

어떻게 그의 광기를 끊어내고 체포하든 죽이든 할 것인가…….

여기서 ‘중점’은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중요한 역할을 해야 사람들이 그녀를 그럭저럭 인정해 줄 터.

세실리아는 제 머리칼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눈을 나붓하게 내리깔았다.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그녀를 연쇄살인마의 딸이라 취급하든 말든, 그녀를 아예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긴 했다.

애초에 그녀의 본성 자체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쪽이 아니라서.

하지만 그녀에겐 ‘황후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황후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지…….’

세실리아는 드레스를 가볍게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그녀에겐 마법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건 괜찮은 겉껍데기와 퍽 잘 돌아가는 머리, 눈치와…….

‘기억 최면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능력.

그녀 본인에게 쓴 적을 제외하곤 한 번도 쓴 적이 없지만,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최면은 상대의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즉, 상대가 그녀를 충분히 믿고 있을 경우.

혹은 그녀가 상대에게 ‘시각적으로 익숙한 존재’인 경우.

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면 상대의 기억을 삭제할 수 있었다.

‘만약 베르뉴의 미끼가 되어 잡히면…….’

기억삭제술이 성공할 만큼 시각적으로 익숙한 존재가 되기까지는 짧으면 사흘에서 길면 일주일 정도 걸린다.

그렇게 시간을 투자한 뒤, 베르뉴의 기억을 삭제하는 거지.

기억을 전부 잃으면 마력을 어떻게 다뤘는지도 잊게 될 터.

그럼 카밀 베르뉴는 무력해지거나 굉장히 약해질 테니, 알렉시스와 몽테-페르트가 능히 그를 잡지 않을까.

‘……알렉을 잘, 설득해야, 할 텐데.’

노링 남작의 의무실 앞에서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이놈의 습관은 도저히 버려지지 않았다─허리를 단정하게 펴고는 문을 두드렸다.

* * *

집중이 되질 않는다.

알렉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몽테-페르트와 리베가 각각 설전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율리케는 몽테-페르트가 얼마나 무능한지에 대해 설파하고 있었고, 몽테-페르트는 리베가 얼마나 치기 어린지에 대해 역설하고 있었다.

그의 눈엔 둘 다 똑같다…….

“폐하, 이번 일은 저희 뤼셍이 오롯이 맡아야 합니다!”

율리케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몽테-페르트는 이미 카밀 베르뉴를 잡을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무능했던 건 그놈의 빌어먹을 권속이 몰래 끼어 있어서고─”

“그것부터가 문제 아닙니까!”

“우리는 나름 최선을 다했─”

“둘이 합의해.”

알렉시스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는 딱히 이 의미도 없어 보이고 이유는 더더욱 없어 보이는 언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당장 그는 피해자의 아들이었으며 제국 신민들을 지켜야 하는 군주의 입장이었다.

저들이 유치하게 말다툼하고 있는 꼴을 보니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안 나왔다.

“폐하.”

시엘샤 듀페르가 허겁지겁 부르든 말든, 알렉시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자리를 비우도록 하지.”

“하지만─”

“그때까지 그대들이 나름의 합의점이 이르렀길 바라.”

알렉시스는 리베나 몽테-페르트가 그를 막아서기 전에 재빠르게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그의 발길이 당연히도 향한 곳은 황제의 방이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집무실에도 침실에도 없어, 그는 이번엔 노링 남작의 의무실이 있는 복도로 이동했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벌컥 열자, 세실리아와 노링 남작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노링 남작이 당장 뭐라 외치려 들었지만 세실리아가 그녀의 옷소매를 붙들어 막았다.

‘무엇이지?’

심장이 불길하게 뛴다.

알렉시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노링 남작이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을 뛰쳐나가는 모습을 관망했다.

‘정말, 무슨 일인 거지?’

주인 둘이 떠나고 손님 둘이서 방을 차지하다니. 대체…….

“……알렉.”

무섭다.

그의 죽음은 언제나 가정해 보았지만 세실리아의 위험은 가정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안온하고 행복하게,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그가 얼어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세실리아가 황급히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끝의 온기와 온기가 뒤엉키며 그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순간 호흡이 정말 멈춘 상태로 ‘죽을까’ 고민했던 남자는 겨우 이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알렉.”

“듣고, 있습니다.”

여자가 멈칫했다.

귓불이 살짝 붉어진 느낌도 있어, 알렉시스는 다음 순간 살짝 얼떨떨해졌다.

그녀가 중병에 걸렸다거나, 위태롭거나, 그런 건 아닌 걸까? 무엇이지?

“……세실리아?”

더듬더듬 이름을 부르자, 세실리아가 태양처럼 밝다 못해 찬연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해치우듯이, 한 숨결 안에 도도도 고백했다.

“나 임신했대.”

응?

알렉시스는 곧장 반응을 취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라,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기겁할 수밖에 없어서.

하지만 세실리아는……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지?

그 제품이 하자가 있던 건 아닐 테고…….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일단 최대한으로 가장 차가운 이성을 끄집어냈다.

잘 되었다.

세실리아가 만약 임신했다면, 그리고 그 아이를 무사히 낳는다면, 차기 황제의 어머니가 될 터.

그러면 누구도 그녀를 감히 건드리지 못할 테지.

설령 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생각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동안 침묵은 길어지고 있었다.

의외로 긴 침묵에 세실리아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이를, 원했던 게…… 그녀만일까?

아닐 텐데.

알렉시스가 황제인 이상 일단 후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은 언제나 희소식…… 이어야…… 할 텐데…….

아닌 건가?

‘피임이라도 했어야 했나?’

……알렉은 너무 당황한 건지 생각이 뚝뚝 끊겼다.

온몸의 피를 따라 얼음이 덜그럭거리는 느낌이었다.

피가 얼어붙고 황망함이 정신을 먹어 치우는 속에서 세실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알렉이 아이를 지우라고 하면 어떡하지?’

알렉이 싫어하면, 지워야 하긴 할…… 싫어. 지우긴 진짜 싫은데…….

‘아이를 낳자고 어떻게 설득해?’

그녀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알렉시스가 먼저 선수 치듯 말을 쏟아냈다.

“……설령 아이를 원치 않으시더라도, 낳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디 재고해 주세요.”

“응?”

이건 이것대로 황당해 세실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그동안 알렉시스는 얄미울 정도의 평정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에게 모든 경악과 놀람을 안겨준 채로.

“아니, 알렉!”

“……예.”

“내가 네 아이를 원치 않을 리가 없잖아!”

세실리아는 비명을 내지르다, 이성과 논리와 나머지 그 모든 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기 전에 고백했다.

“사랑해.”

심장에서부터 끄집어진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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