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되찾은 이름
열심히 울고 나니 그래도 감정은 후련했다.
세실리아는 눈물을 쓱쓱 닦아낸 뒤, 제 앞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알리샤.”
“컹!”
강아지가 기분 좋다는 듯 몇 번 짖고는 그녀의 턱을 날름 쓸었다.
그러고는 거의 깔아뭉개듯 폭 안기며 애교를 피웠다.
“알리샤.”
“컹컹!”
그래. 고게 내 이름!
앞으로 강아지라 불릴 일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강아지는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앞발로 그녀의 발을 톡톡 쳤다.
배고프니 밥을 내놓으라는 현실적인 신호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주었다.
감동적인 순간이고 나발이고 먹는 게 더 중요한 법이다.
아무렴.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상당히 배가 고파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평상시 몸매 관리를 위해서 안 먹을 때도 이렇게까지 허기를 느낀 적은 없었는데.
‘운동을 격하게 해서 그런가?’
세실리아는 허리를 콩콩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려, 정말 갓 태어난 아기 사슴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걔넨 귀엽기라도 한데 난 뭘까?’
이 나이 먹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데.
세실리아는 작게 구시렁거리며 숄을 걸친 후 어떻게든 문까지 걸어갔다.
알리샤가 뽈뽈 먼저 침실을 나섰다.
신나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아하니 강아지, 아니, 알리샤는 이젠 산책까지 원하는 모양이었다.
“언니 그러다간 죽어……. 진짜 힘이 없단 말이야…….”
“컹컹컹컹!”
알리샤가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예쁜 짓을 시전했다.
세실리아는 허리를 두드리다 말고 결국 항복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지금은 어떻게든 힘을 끌어내야 하는 시점 같았다.
……뭐, 그동안 ‘강아지’라고 부른 게 상당히 미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힘겹게 텅 빈 알렉시스의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수차례 골골대며 발을 멈추는 바람에 평상시보다 시간이 배로 걸린 느낌이었다.
“컹!”
문을 열어주자마자 알리샤가 뛸 듯이 좋아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복도 저 끝까지 우당탕탕 뛰어갔다가 그녀를 재촉하려는 듯 다시 우당탕탕 돌아왔다.
세실리아는 착실하게 발을 옮겨,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 접어들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어도 그동안 어느 누구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조금 기이하게도.
낑낑거리며 부엌에 도착한 그녀는 알리샤를 복도에 내버려 둔 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어렸을 때 알렉시스와 함께 쿠키를 받으러 온 이후론 정말 오래간만인데, 이거.
“전, 아니, 어…… 전하?”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요리 보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겁했다.
세실리아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여기까지 어인 일이세요!”
“……배가 고파서.”
“아니, 아니, 아니. 사람을 부르셨으면 마땅히 대령했을 텐데요?”
“그리고 강, 알리샤가 산책하고 싶댔어.”
컹컹! 맞다 주인! 내가 울 주인을 끌고 왔다!
그렇게 얘기하려는 듯 알리샤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알리샤는 대형견 치고는 굉장히 귀여운 외양을 지니고 있었고, 어린 요리 보조는 당연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아지를 못내 귀여워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어어…… 전하, 그럼 침실에 돌아가 계시겠습니까?”
“으응?”
“그럼 식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난 그냥 수프로 줘. 굳이 진수성찬 대령할 필요 없어.”
요리사의 얼굴이 꽤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세실리아는 강아지를 돌아보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배를 뒤집고 뒹굴뒹굴하는 애완견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알리샤 밥도.”
“……어디로 갖다 드릴까요?”
“여기에 있을 테니 줘.”
요리 보조의 얼굴에 여러모로 물음표가 떴지만, 세실리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지금 당장 먹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든지 등등.
“알, 겠습니다.”
소년이 떨떠름한 얼굴로도 퍽 정중하게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알리샤가 휙 앞발을 들어 그녀에게로 쏟아져, 세실리아는 남은 기력을 전부 짜내어 대형견을 받아주었다.
안 그래도 힘이 없는데 커다란 강아지의 무게가 오롯이 쏟아지니 진짜…….
“언니 죽겠어…… 알…….”
우는 소리를 내자, 강아지가 코웃음이라도 치는 듯 꼬리를 짧게 홱 쳤다.
세실리아는 예법이고 나발이고 다 팔아먹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리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그녀의 무릎 위로 몸을 걸치며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알리샤의 털을 불규칙적으로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사용해 빗질까지 해주자 알리샤가 행복하게 고롱거렸다.
“행복해, 강…… 알리샤?”
“컹컹컹!”
너라도 행복하면 되었다.
세실리아는 피식, 엷게 웃고는 고개를 귀엽게 갸웃하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자니 요리 보조가 접시 두 개를 놓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순박한 소년은 복도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세실리아를 보고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아아악! 전하아아아!”
“으응.”
“왜 거기에 계세요! 바닥도 차가운데!”
차갑나?
“양탄자 있어서 괜찮아.”
세실리아는 현실적으로 대답했지만 보조는 뒷덜미를 잡고 그대로 넘어갈 듯한 기세였다.
쟁반을 떨어뜨리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다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일단 쟁반부터 뺏어 들었다.
제 밥을 발견한 알리샤가 아주 행복하게 코를 들이밀어, 먼저 강아지에게 밥을 건네주었다.
후루룩 챱챱.
아주 맛있게 잘 먹는군. 좋아.
그녀가 알리샤의 밥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뿌듯함이 드는지 모르겠네…….
세실리아는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고찰하며 다음으로 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뜨거운 수프에 입김을 불자,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소년이 초조하게 자리에 꿇어앉았다.
“어머, 편히 앉아.”
“왜 그러세요…….”
“배고파서. 그리고 알리샤가 여기서 먹잖아.”
“강아지와 왜 똑같이 먹으려고 하세요…….”
전하는 인간이잖아요, 라는 면박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맞니?
세실리아는 나직하게 웃으며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냥, 가끔은 일탈을 저지르고 싶어진단다.”
“……폐하께서 아시면 안 좋아하실 거예요.”
“퐁레프 안에 있으니 괜찮아.”
궁 밖으로 떠난 순간 난리가 날 것 같긴 하지만.
세실리아는 잘 식힌 감자수프를 떠넣고는 ‘이제야 드디어 살 것 같다는 감각’을 만끽했다.
텅 빈 배 속이 음식물을 기뻐하며 요동쳤다. 차디찬 몸이 전부 데워지는 기적 같은 느낌이었다.
곳곳이 쓰라리다.
허리는 여전히 아팠고, 너무 많이 운 탓인지 눈이 뻑뻑하면서도 눈매가 따가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 겨울 아침의 공기는 상쾌했으며, 그녀의 강아지는 옆에서 행복하게 밥을 먹고 있었고,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소년이 있었으며, 당장 정말 맛있는 감자수프를 먹고 있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드시고 방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아시겠어요?”
“그래, 그래.”
“황녀 전하께서 바닥에 앉아 감자수프를 먹다니. 전하의 시녀 분들이 아시면 뒤집히실 거예요.”
“그들이랑 유모에겐 비밀로 해줘.”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지금 당장 비에라 백작 부인을 찾아갈까 고민 중이었는데.”
세실리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서도 성실하게 먹어 치운 덕택에 감자수프는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의 걱정스러운 눈길 속에서 그녀는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어 치웠다.
“잘 먹었어. 감사합니다.”
“……전하, 괜찮으세요?”
“응. 아주 완벽하게.”
근데 왜 그렇게 걱정하듯이 보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갸웃하자 미인의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에 주방 보조는 고백하듯 답을 알려주었다.
“뭔가, 많이…… 바뀌신 듯해요.”
“그러니?”
“네.”
세실리아는 숄을 더 꼼꼼하게 여미고는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
허탈해 보이면서도 뭔가 후련해 보이는 미소.
눈이 휘어지지 않았다면 자못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호선이었지만, 그녀는 불긋불긋한 눈매까지 휘고 있었다.
“……이제야.”
세실리아 뤼셍, 아니, 헌트께선 뭐라 더 말을 잇는 대신 침묵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주방 보조의 덥수룩한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너무 맛있었어.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고맙다고 한 거 전해주고.”
“네, 전하.”
“좋은 하루 보내렴.”
“……언제 일어나실 거세요?”
다른 건 모르겠고 전하를 계속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도록 내버려 두면 황제 폐하께서 노하실 것 같은데.
소년의 초조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실리아가 고개를 까딱 기울여 새하얀 강아지를 가리켰다.
알리샤는 행복한 얼굴로 제 밥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알리샤가 다 먹으면.”
“그럼 바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엘레 꽃이 피긴 했어도 아직 한겨울이라서 추워요.”
엘레는 봄이 온다는 걸 알려주는 전령일 뿐이지, 봄 그 자체는 아니었다.
개화만으로도 기적과 희망이긴 하지만.
“알았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넵, 좋은 하루 되세요!”
세실리아는 키들거리며 손등을 내밀었다.
소년이 그동안 보고 배운 귀족들의 예를 따라 새하얀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아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복도엔 다시 침묵이 휘돌았다.
‘……누군가 보고 있으려나.’
보고 있다면 당연히 기겁하고 있겠지?
평상시의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라는 점엔 동의한다.
아까의 소년이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언제나 예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리하여 완벽한 황녀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기분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짜릿함이야 있긴 하지만 세상이 뒤바뀔 정도로 큰일은 아니라는 소리.
세실리아는 알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향해 오롯이 쏟아져 내리는 아침의 볕을 즐겼다.
그러다 문득 하늘이 어두워졌다.
보랏빛 낙뢰 한 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모습에 세실리아는 피식 실소했다.
알리샤는 밖의 기상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열심히 꼬리만 흔들고 있었다.
콰쾅.
두 번째 낙뢰가 땅을 두드리는 굉음.
강아지가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귀엽게 고개를 요리 까딱 조리 까딱 기울였다.
세실리아는 하얀 털을 쓰다듬어 주며 뇌까렸다.
“알렉.”
아까의 폭풍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곧장 하늘이 다시 밝아졌다.
세실리아는 복도 저 끝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인지했다.
절도 있게 다가오는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심장이 가르쳐 준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든 뒤 손을 흔들었다.
“……안녕, 좋은 아침.”
차분히 다가온 구두가 바로 그녀의 앞에서 멈추었다.
세실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젖혀, 그녀 코앞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은빛 머리칼이 자연스럽게 어깨 뒤로 흘러내렸다. 그 자취를 쫓던 보랏빛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머금고 침잠했다.
“움직이실 힘이 있었군요.”
“말도 마,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여기까지 오실 힘이 남아 있었다니. 제가 누님을 얕본 모양입니다.”
과하게 본 것 아닐까?
세실리아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시스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아기 안기듯 그의 품에 빨려 들어가며 그녀는 순순히 남자의 목에 팔을 둘렀다.
슬리퍼가 그녀의 발끝에서 위태롭게 대롱거렸다.
“이름을 부르면 제가 올 줄 알았습니까?”
“응.”
눈치를 못 채면 이상할 정도의 우연성이라.
알렉시스가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언제부터?”
“마탑에서부터.”
눈 내린 설원에서, 그녀는 ‘알면서도’ 알렉시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그녀의 위치를 찾아내 쫓아오리라는 걸 직감하면서도…….
그녀가 암시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알렉시스가 흐릿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지우더니, 대수롭잖게 걸음을 옮겼다.
부드러운 손길은 그녀의 등을 규칙적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알렉, 알렉.”
“예?”
“알리샤…….”
우리 알리샤, 아직 밥 다 안 먹었어.
그녀가 소곤소곤 알려주었을 때, 알리샤가 뒤에서 외롭게 컹컹 짖었다.
잘 먹고 있는 사이 자신의 주인이 도망갔다며 슬퍼하는 울음소리.
“알리샤!”
세실리아가 안긴 채로 손을 파닥거리자 알리샤가 귀를 쫑긋 세운 채로 호다닥 뒤돌았다.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새까만 눈동자가 여러 가지 감정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휙 돌아서 제 밥을, 다시 그녀를, 다시 제 밥을, 다시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와 밥 중에서 뭘 선택할지 심히 궁금해지는걸.’
세실리아는 장난 섞인 호기심을 곱씹다가, 강아지가 슬프게 컹컹 짖는 소리를 듣고는 알렉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리샤 챙겨야지.”
“……알리샤군요, 이젠.”
“응.”
알렉시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밑머리 쪽에 입을 맞췄을 뿐.
그새 저 뒤에선 알리샤와 밥그릇이 허공에 두둥실 떠서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알리샤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상황에 적응하여 냠냠 쩝쩝 식사를 재개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주인을 쫓을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잠은 잤어, 알렉?”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진 건지, 알렉시스의 얼굴은 옛날에 비해선 피로가 덜어져 있었다.
세실리아는 손을 뻗어 눈앞이 수려한 이목구비를 조심조심 매만졌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손길을 즐기는 듯 턱을 젖혔다.
목울대 근처엔 그녀가 남긴 잇자국이 화려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고 회의 간 건 아니지?”
세실리아는 눈을 또로록 굴렸고.
“이러고 갔는데요?”
알렉시스는 평온하게 답해 주었다.
‘얘 꼴 좀 봐, 얘 꼴 좀…….’
세실리아는 잠시 자신의 꼴이 알렉시스의 현재 모습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현실을 망각했다.
‘뭐. 아무래도 좋지.’
그녀는 덤덤하게 결론을 내린 뒤 자신을 껴안은 남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알렉시스가 낮게 웃으며 콧잔등을 작게 깨물었다.
어젯밤부터 휘몰아쳤던 감정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세실리아는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세를 조심조심 고쳤다.
아직 그녀가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머릿속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섞여버리는 듯한 그런 감각은 여러 번 겪었어도 매번 버거웠다.
어느새 그들은 알렉시스의 집무실로 돌아와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장이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자 허공에 둥둥 뜬 알리샤와 밥그릇이 먼저 입장했다.
그들을 집무실 어딘가에 내려준 알렉시스는 그녀만은 놓아주지 않았다.
보듬고 있는 자세 그대로 통로를 지나쳐 침실로 향했을 뿐.
침대에 내려앉은 세실리아는 ‘방금 뭐라도 먹어서 다행이다’라는 태평한 생각을 곱씹었다.
“같이 아침 드시겠습니까?”
흠. 정말 아침이 목적인 것 같진 않은데.
남자의 눈은 약연을 태울 때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게,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매혹적이고 관능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떠한 보석을 가져와도 저 빛깔엔 견주지 못할 테지.
세실리아는 느릿느릿 손을 뻗었다.
알렉시스가 순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손에 제 뺨을 갖다 대었다.
어느새 그녀는 뒤로 누운 상태였다.
어제부터 계속 눈에 담았던 침대의 캐노피가 특유의 따스한 색채를 선보이고 있었다.
“……알렉.”
캐노피와 그녀 사이에 등장한 얼굴.
알렉시스가 눈꺼풀, 뺨, 이마를 비롯한 곳곳에 입을 맞추는 동안 세실리아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의 손은 노골적인 유혹을 머금고 있었다.
“알렉.”
“예.”
“아직, 낮인데.”
“그래서?”
세실리아는 단호한 힘이 제 복사뼈를 잡아 고정하는 것을 느꼈다.
“……알아두라고.”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목을 젖혔다.
캐노피의 색채가 흐릿하면서도 밝아졌고, 다시 밝아지면서도 흐릿해졌다.
한참 만에 남자가 다시 올라와 젖은 입술을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참지 마.”
그녀가 어젯밤과 똑같은 대사를 작게 속삭이자, 알렉시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녀를 결박하듯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세상이 부서지고 그녀가 재조립되는 찰나는 언제나 길면서도 짧았다.
영원이 된 추억처럼.
다신 돌아오지 못할 찬란한 과거처럼.
세실리아는 제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남자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둔한 통증의 순간을 견뎌냈다.
“세실리아.”
남자가 나직하게 부르는 그녀의 이름.
확실히, 알렉시스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면 정말 싫겠지.
이 이불이고 베개고, 이젠 그녀와 그의 향으로 가득한데 다른 여자의 향까지 묻으면 눈이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자격이─
“……집중하셔야지?”
세실리아는 발로 애꿎은 이불을 찼다. 손으론 연신 아래의 시트를 쥐어뜯으며, 남자의 한껏 격해진 심술을 견뎌냈다.
남자는 어제만큼이나 집요했다.
* * *
레니앙 공작은 장미 꽃다발을 든 채로 온실의 오솔길을 따라갔다.
길의 끝에선 할머님께서 체스를 두시거나 신문을 읽으시면서 앉아 계실 터였다.
독서용 안경 너머에서는 현명한 빛을 가득 품은 연륜 가득한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겠지.
“할머님.”
희끗희끗한 은발의 노부인은 적이 없는 체스를 홀로 두고 있었다.
선대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레니앙 공작 대부인은 젊을 적 체스로 별장까지 따내곤 했었다.
‘그분께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드셨더라면 뤼셍의 역사가 바뀌었을걸.’
마리사 뤼셍이 웃으면서 던진 말을 그저 그런 농담으로 치부할 이는 없으리라.
대부인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내심 동의할 법한 명제였다.
“왔니, 빅토르?”
“예.”
“뭐 재밌는 일 있니?”
“할머님께선 뭐만 하면 재밌는 일에 대해 여쭤보시네요.”
“늙어봐라……. 재밌는 일이 너무나 그리워진단다.”
인생이 무료하여.
레니앙 공작 대부인은 한숨을 쉬며 체스 말을 내려놓았다.
평상시는 그에게 체스를 같이 해달라며 조르곤 하시거늘, 오늘만은 영 게임을 하실 기분이 아니신가 보다.
손주는 할머니께 다가가 다정히 양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대부인은 어린 공작을 지극히 사랑했고 어린 공작은 그 이상으로 대부인을 지극히 사랑했다.
2대의 공작이 단명한 레니앙 공작가가 여전히 굳건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엔 대부인의 공이 컸다.
레니앙의 어린 가주는 할머님께서 어떻게 자신과 가문을 지켰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더더욱 감사해했다.
“곧 각인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노부인의 시선이 딸깍 움직였다.
‘흥미로운 주제’가 맞으시군.
공작은 작게 웃으며 회의 때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황제 폐하의 목덜미에.”
“아.”
“누가 봐도 노골적이라서…….”
사실 황제 폐하께선 일부러 그 흔적을 지우지도 않고 나타나셨을 거다.
그분께서 자신의 감정을 공언하셨어도 몇몇 이들은 여전히 ‘다른 여자를 택하라’고 외치며 달달 볶고 있었으니.
예를 들면 벤힐 백작이 있지.
황제의 외조부.
하지만 누구도 그를 ‘황제의 외조부’라 생각지 않다만.
“했군.”
노부인께서 가감 없이 결론 지었다. 어린 손주는 콜록 기침을 한 뒤 동의했다.
“했…… 겠죠.”
알렉시스 뤼셍이 ‘그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겼을 리도 없고.
“그렇구나.”
“네네, 그, 그렇죠.”
공작은 머쓱한 얼굴로 대화를 마무리 짓느라,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 체스 말을 내려다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다.
대부인은 한참을 체스판을 내려다보다가 흑백 무늬의 밖에 있는 화이트 퀸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출발점에 고요히 내려놓았다.
* * *
퐁레프는 소문이 빨랐다.
회의에서 시작된 소식은 반나절도 안 되어 퐁레프를 두 번 휩쓸었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그 정보는 퐁레프의 담을 넘어 밖까지 뻗어나갔다.
하루가 지났을 땐 생-뢰크의 모든 귀족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각인인가?’
‘아마도.’
‘일단 각인부터 하고 보지.’
‘하……. 하지만 꼭 그 여자랑?’
‘어쩔 수 없잖나.’
몇몇 이들은 쑥덕거렸고, 몇몇 이들은 여상하게 넘겼으며, 또 몇몇 이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혀에서 혀로. 소문은 아주 착실하게 퍼져나갔다.
당연히도 그 이야기는 리베 아카데미의 문까지 넘어 때마침 귀경한 블랑슈 휴스턴의 귀에도 닿는다.
‘이번 주 안으로 보고서 작성하고, 그다음 언니를 찾아봬야지!’
—하고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던 휴스턴 후작 영애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기겁해 보고서고 나발이고 전부 미뤘다.
그러고는 퐁레프로 뛰어갔다.
신나게 복도를 내달리던 블랑슈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휙 돌아보았다.
칼리아 오페르와 비에라 백작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블랑슈 휴스턴이야 예법을 팔아먹고 사는 인간이더라도 저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법은 꼭 지키는 사람들이었는데.
“블랑슈, 블랑슈!”
칼리아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의 소맷자락을 꼭 붙들었다.
비에라 백작 부인은 ‘옷차림이 어쩌고저쩌고’의 잔소리를 퍼붓기엔 지나치게 경황이 없으신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어어, 소식 들었어.”
그…… 어…… 그래, 그들의 태양께서 마침내 꿈을 이루셨다는 소식 말이지.
블랑슈는 삐딱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못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녀가 황궁으로 뛰어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물론 알렉시스 뤼셍이 세실리아를 이길 리 없지만.
그녀의 의지를 멋대로 꺾을 리도 없고, 여자의 눈물 한 방울이면 곧장 무너져 내릴 그런 사람이지만.
그래도 만일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뵐 작정이었다.
‘혹시나’면.
‘미안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블랑슈는 휴스턴 후작 내외에게 미리 사죄의 인사를 드렸다.
혹여나 제가 생각하던 일이 벌어진 게 맞는다면 아마, 음, 딸은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든지 반역의 주인공이 되든지 둘 중 하나로 전락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
부디 평안하시기를…….
“지금 찾아뵐 거야?”
“응.”
칼리아가 골로 가려는 블랑슈의 망상을 뚫고 들어와 황급히 질문했다.
블랑슈는 한숨을 뱉으며 긍정했다.
“황녀 전하께선 현재 황제 폐하의 침실에 계셔.”
“작정했구먼.”
“응?”
“아니야.”
칼리아 앞에서 눈을 굴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블랑슈는 ‘황제의 방’을 향해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칼리아와 비에라 백작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따라잡았다.
“우리도 같이 가도 되니?”
“음. 일단 제가 먼저 들어가서 언니에게 여쭤볼게요.”
“내가…….”
칼리아가 코를 훌쩍였다.
“내가 바보 같은 함정에 빠졌었는데 그걸 제대로 사죄드리기도 전에…… 크흥.”
“언니가 널 탓할 리 없지 않을까, 키리?”
“그, 그야, 전하께선 늘 다정하시니까…….”
블랑슈는 칼리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둘을 데리고 동시에 황제의 방으로 돌격했다.
관제탑을 돌아보라는 명분으로 그녀와 티에리를 출장 보내기 전, 알렉시스는 참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둘의 ‘주기적인 만남’을 허락해 주었다.
‘누님께선 넌 반가워하실 테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 짤막한 발언에서 블랑슈는 앞뒤 맥락을 추론해 낼 수 있었다.
세실리아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감금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긴.
세실리아 언니라면 당연히 그럴 성정이긴 했다. 알렉시스 뤼셍은 그걸 말리기는커녕 부추길 성정이었고.
‘언니가 안 나가는 것에 대해 오히려 매우 기뻐하고 있을걸.’
블랑슈는 지고한 태양의 속내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냈다.
복도를 걷고 걸어 황제의 방 앞까지 도착하는 동안, 칼리아와 비에라 백작 부인은 사뭇 소심한 표정으로 졸졸 따라왔다.
시종장을 본 블랑슈는 방긋방긋 예쁘게 웃으며 손을 팔랑였다.
“오랜만이에요, 미하엘 경.”
“오랜만입니다, 휴스턴 후작 영애. 무사히 귀경하셨군요.”
“예. 폐하께선 안에 계실까요?”
“잠시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다만 휴스턴 후작 영애의 방문을 허락하시긴 했습니다.”
폐하께서 웬일이시래요? 감사하긴 합니다.
블랑슈는 속으로 꿍얼거린 뒤 더욱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혹시 언니께, 제가 왔다고 전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입니다, 영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장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내 칼리아와 비에라 백작 부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초조해하는 분위기라 블랑슈는 둘의 손을 꼭 잡아줘야 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블, 블랑슈. 잘 말씀드려줘, 응?”
칼리아와 백작 부인이 동시에 그녀의 옷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블랑슈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세실리아는 독서용 안경을 낀 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녀의 신발이 놓여 있는 부근엔 알리샤가 고롱고롱 잠들어 있었다.
여자 홀로 열심히 집중하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황녀의 자리에 내려왔는데도 서류의 굴레는 벗어나시지 못한 건가.’
블랑슈는 눈의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려 노력하며 바싹 다가갔다.
“안녕, 블랑슈. 출장은 잘 다녀왔니?”
세실리아가 느긋하게 펜을 까딱이며 질문했다.
“네네.”
“에스디어 경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금색 눈동자가 온화하게 휘어졌다.
아련한 금빛 감정 웅덩이 속으로 퐁당 빠지려던 블랑슈는, 그제야 여러모로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세실리아가 이렇게나 방만한 자세로 서류 작업을 하다니.
보통 그녀라면,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며 책상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로 작업했다.
황녀의 외양이 외양인 만큼 더없이 우아하게 보였지만…… 동시에 빡빡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뿐일까.
세실리아는 맨발과 발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빙빙 돌려서 묻는 ‘귀족식 화법’ 따윈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저번에도 사용하지 않긴 했다.
문제는 그때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는 거지.
지금과는 달리.
현재의 세실리아 헌트는 누가 봐도 또렷하고도 침착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왜 그래, 블랑슈?”
“……언니가 조금,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변하신 것 같네요.”
“내가?”
“네.”
세실리아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수면 위로 달빛이 넘쳐흐르듯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햇빛을 부서뜨렸다. 곳곳에 흩어지는 반짝임에 눈이 멀 지경이다.
블랑슈는 마른침을 삼키며 난처하게 입술을 짓쳐 물었다.
머릿속으론 대체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옛날의 ‘세실리아 뤼셍’은…… 적어도 데뷔탕트 이후 때부터는 확고하게 ‘황녀’처럼 살았다.
누구보다 엄격하게 예법을 지켰으며, 그 무엇보다도 확고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고, 보기만 해도 박수가 나올 만큼 완벽한 삶을 유지했다.
다만 ‘완벽주의자’라고 표현하기엔 애매했다.
완벽주의자에게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세실리아는 약간 강박적이었거든.
‘입양된 황녀’라 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하여튼 세실리아는 제 가치를 더 갈고닦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순간에도 언제나 고고하게 보이기 위하여.
오죽하면 열넷의 블랑슈가 그렇게 묻기도 했을까.
‘언니, 그냥 싫으면 다 때려치워도 되지 않아요?’
그때 세실리아 뤼셍이 어찌 반응했더라.
그저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 잠깐.
기억났다.
그녀가 자조하듯 스스로를 빗대었던, 너무나 쓰라린 표현이.
‘기왕 눈요깃감이 되려면 완벽한 게 좋지.’
‘……네?’
‘탁월한 구경거리잖니.’
기자들 때문이에요? 순수하게 질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열넷의 블랑슈 휴스턴은 세실리아 뤼셍의 복잡한 속내를 가늠하기엔 너무 어리고 천진난만했었다.
아마 그때 세실리아 뤼셍은…… 뤼셍 제국 전체가 그녀를 하나의 ‘장식물’처럼 찬양하는 것에 질렸을 수도.
질린 것과 별개로 여전히 완벽한 황녀의 역할을 다했지만.
블랑슈는 고개를 짧게 털며 과거들을 털어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소파에 반쯤 늘어져 있는 ‘세실리아 헌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여자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다.
……이 세상과 유리된 분위기.
손 뻗어 붙잡으면 그대로 아스라이 스러질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과거의 여자가 세상의 시선 속에 갇혀 조각상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여자는 세상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 버릴 듯했다.
금빛 나비 같다.
나풀거리며 어디로든 자유로이 방랑하는.
그 무엇도 그 나비를 붙잡을 수 없을 터다. 뒤를 쫓으며 계속 달릴 수는 있을지언정.
세실리아의 아득하게 초연한 눈빛 속에서 블랑슈는 다시금 마른세수를 퍼부었다.
“언니가…….”
언제든지 우리 곁을 떠날 것만 같아요.
우리 곁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언제든 내키면 그냥 떠났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스러질 것 같아요.
그 무수한 표현들이 혀끝에 감돌다가 녹아내렸다.
‘알렉시스 뤼셍은 이런 분위기를 달가워하려나?’
그 소유욕 많은 황제께서?
아니. 잠깐. 우리 폐하…… 각인엔 성공하실 수 있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인은 곧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
그리고 사랑엔 반드시 소속감과 소유욕이 따라온다.
이미 요란한 연애를 하고 있는 블랑슈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더욱 머리가 아팠다.
“언니, 대체…….”
왜 이렇게 변하셨어요? 라고 질문할 수도 없지. 시비 터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해, 말을. 블랑슈, 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변했는데?”
“떠나실 거예요?”
“알렉이 여기 있는데 내가 왜?”
아아.
‘그나마 다행이네.’
블랑슈가 ‘뤼셍의 각인’에 대해 비교적 희망적인 추론을 내리려던 무렵이었다.
파드득 잠에서 깨어난 알리샤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너무나 기뻐하는 자세로 폴짝폴짝 문으로 뛰어갔다.
잠깐!
블랑슈가 속으로 외치기도 전, 영민한 강아지는 알아서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던 이들에게로 달려들었다.
황녀의 유모와 수석 시녀였던 그 둘은 당연히 애완견인 알리샤와 친할 수밖에 없었다…….
“알리샤!”
“알!”
칼리아 오페르와 비에라 백작 부인은 동시에 강아지를 껴안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들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를 정확히 마주했기 때문에.
“컹!”
알리샤 어색한 침묵을 깨며 신나게 부르짖었다.
꼬리를 요리조리 흔들더니, 이번엔 도도도 다시 달려와 제 주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대형견이 연신 애교를 피우는 모습에 세실리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언제 네 몸무게를 깨달을래?”
“컹컹컹!”
나 가볍다, 주인!
“너 어렸을 때 비해 엄청 무겁거든?”
“컹!”
주인 너무해!
알리샤가 폴짝거리며 난리를 쳤다.
세실리아는 마구 달려들려는 흰색 주둥이를 늦지 않게 밀어냈다.
지금 밀어내지 않으면 진짜 지겨울 정도로 얼굴이 핥아지거든.
“들어와, 유모. 들어와, 키리.”
“……저, 저희 들어가도 되나요?”
칼리아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얼굴로 질문해 세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잽싸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팔을 벌리자마자 비에라 백작 부인과 칼리아는 동시에 달려들었다.
으스러질 듯이 꼭 껴안는 팔에 세실리아는 울 수도 없었다.
그들의 원망 섞인 반가움이 살갗에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어서.
“전하…….”
이젠 전하가 아닌데.
세실리아는 코를 찡긋하며 호칭을 고쳐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퐁레프의 곳곳에서 그녀를 여전히 ‘전하’라고 부르고 있어 조금 난감해질 지경이었다.
“미안해. 많이 걱정했어?”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옷!”
유모가 빼액 외치는 바람에 세실리아는 뺨을 살짝 긁적어야 했다.
칼리아가 대성통곡을 하다가 멈추더니, 그녀의 얼굴과 몸을 보고는 다시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아주 잡아먹었어!”
그 새끼, 라는 호칭이 잇따르는 것 같은데 착각이지, 키리?
설마.
‘대상이 뤼셍의 군주잖니.’
세실리아는 머쓱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비에라 백작 부인의 손에 얼굴이 붙잡혔다.
사랑으로 키운 아이의 뺨을 양손으로 붙든 부인은 또다시 눈물을 와르르 쏟았다.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
“먹이지도 않았냐고!”
아냐, 유모. 잘 먹였어. 엄청 먹이려 들었어.
문제는 첫 번째로, 그녀가 안 먹었고 두 번째로, 먹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운동을 했을 뿐이야.
세실리아는 현명하게도 비에라 백작 부인과 칼리아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동시에 꼭 끌어안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
“보고 싶었어.”
그녀의 솔직한 인사에 둘이 다시 와르르 울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어흐흑, 제가 언론사에 불을 지르려 했다니까요!”
“사실 불을 지르려 했는데, 끕, 프란츠가 말려서, 흑! 나쁜 새끼! 도와주진 못할망정!”
아니…… 불 지르는 건 안 되지.
“나한테 말하지 그랬니, 키리! 내가 도와줬을 텐데!”
세실리아는 눈을 굴려 블랑슈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안 만나줬으니 지금 대가를 감수해라’라는 표정이니, 블랑슈? 그런 거야?
……너무하네.
* * *
비에라 백작 부인과 칼리아는 퐁레프의 분위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그녀를 ‘기만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황녀가 직접 염색 마법을 쓸 수는 없지 않았겠냐는 논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고.
퐁레프가 세실리아 뤼셍의 기만에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세실리아 뤼셍의 머리색을 숨긴 이들이 아르망 뤼셍, 마리사 뤼셍 그리고 알렉시스 뤼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퐁레프는 뤼셍의 직계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뤼셍의 군주들께서 직접 세실리아의 머리를 염색했고 비밀을 지금껏 숨기셨다?
그럼 그게 옳은 것이다.
다른 진실 따위 없다.
세상 사람들이 기만이니 사기니 욕하고 나발이고, 그들은 철저하게 황제의 뜻에 순종했다.
그리하여 퐁레프는 언론들이 시끄러워지는 동안 알렉시스와 세실리아의 절대적인 아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나와 알렉의 사이는?”
세실리아의 질문에 칼리아는 찻잔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저어는 잘 몰랐는데요……. 사실 그렇게까지 놀랍진 않았어요.”
폐하께서 제 목줄을 쥐여 준 듯이 대하셨던 여자는 전하 한 분이시니까요.
‘숨기기엔 사랑이 너무 티 났다는 것인가.’
세실리아는 정확하게 해석했다.
한편, 칼리아에게서 순번을 넘겨받은 비에라 백작 부인은 피식 실소하며 잔에 차를 더 부었다.
“저는 전하께서 입궁하시기 전부터 퐁레프에서 일했습니다.”
“으응.”
“저를 비롯한 퐁레프의 몇몇 이는 폐하와 전하를 딱히 오누이로 보진 않았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전하께서 확실히 선황과 선황후 폐하의 딸처럼 느껴지시긴 했는데…….”
세실리아는 안경다리만 만지작거렸다. 뒤따라올 말을 완벽하게 짐작할 수 있어서.
“현재의 황제 폐하께선 전하를 그렇게까지 누이처럼 대하진 않아서요.”
“……어어, 그래도 우린 어릴 때만큼은 우애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우애가 좋으니 오누이가 아닌 겁니다.”
블랑슈가 불쑥 끼어들자 비에라 백작 부인이 그 말이 옳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화목해서 ‘남매’로 안 보인 거구나.
‘그렇군요.’
어쨌든 간에, 퐁레프가 그들을 그렇게까지 적대하지 않아줘서 다행이었다.
그녀야 거의 매일 알렉시스만을 만나니 상관없지만 알렉시스는 퐁레프 전체를 상대해야 하니까.
퐁레프가 만약 언론과 비슷한 태세를 취했더라면 알렉시스의 삶이 훨씬 더 고달파졌겠지.
요즘 들어 유독 창백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세실리아는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괜찮은 거니, 알렉?’
물론 그녀가 직접 물어봤자 그는 매번 괜찮다고 답하겠지.
그러고는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쓸거나 귓바퀴를 어루만질 거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찡그린 미간을 지압하며 폈다.
비에라 백작 부인과 칼리아가 그녀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변함없이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실리아는 끝끝내 마음에 가장 걸리는 질문을 던지진 못하였다.
‘내가 카밀 베르뉴의 친딸이어도 괜찮아?’
그 질문만큼은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할 수 없어서.
그러니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그들의 미소에 화답할 수밖에.
* * *
칼리아와 비에라 백작 부인은 각자 맡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산해야 했다.
하지만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던 이를 마침내 만난 덕분일까.
그들은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배웅하며 환히 미소 짓던 세실리아는 저들이 떠나자마자 나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독서용 안경을 낀 채로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너도 도와줄래, 블랑슈?”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도와줄래?”
“싫어요.”
딱히 맡기지도 않을 거면서, 세실리아가 귀엽게 입술을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블랑슈는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언니.”
“응.”
“……그, 하셨다고 들었어요.”
직진하듯 본론을 내다 꽂자 세실리아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래도 옛날처럼 ‘귀족식 화법 어쩌고저쩌고’의 잔소리를 안 해서 좋다.
“그래?”
“네.”
소문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세실리아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적당히 생략했다.
다만 영민하신 여인께선 이미 전후 상황을 추론하신 모양이었다.
잇자국…….
그렇게 작게 뇌까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으니.
“그…….”
“응.”
“합의죠?”
“당연하지.”
세실리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답해 주어 블랑슈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역도가 될 일도 없어졌고 주검이 될 일도 없어졌다.
만세!
“어어, 폐하께서 피임은 하셨…….”
결혼을 안 했으니 피임은…… 아니다.
그냥 피임을 안 하는 게 낫나?
아기를 가지면 뤼셍 제국이 어쩔 수 없이라도 세실리아를 황후로 인정하지 않을까?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조금 환멸이 일었지만, 블랑슈는 일단 냉정하게 정치적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황제가 피임을 왜 하니?”
세실리아가 서류 앞장을 뒤적이며 게으르게 되물었다.
“네?”
“안 그래도 뤼셍 황실은 손이 귀하잖아. 황제는 절대로 피임하면 안 되지.”
황제의 가장 큰 의무가 바로 후계자의 생산이다.
반려가 아닌 다른 여자랑 자더라도 결코 피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바로 황제였다.
그러니 알렉시스는 피임하지 않았다. 세실리아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었고.
……속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감각을 버티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녀가 움찔거릴 때마다 알렉시스는 손을 꼭 맞잡아 주었었다.
그녀만 홀로 달아오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남자의 눈매 역시 관능적으로 붉어져 있었으니.
이마에 연신 퍼부어지던 베이비키스.
자잘하게 깨물리던 손가락 끝.
너무나 간절하게 끌어안던 팔과…….
세실리아는 숨을 고르며 다리를 바꿔 꼬았다.
무얼 얘기하고 있었더라.
아. 피임.
아이가 정녕 싫다면…… 그녀 쪽에서 피임을 해야겠지.
블랑슈가 당황한 낯으로 눈을 굴리고 또 굴리다가, 문득 손을 치켜들었다.
“언니.”
“응.”
연녹색 사랑스러운 눈망울이 너무나 진지한 빛을 머금었다.
“언니는요? 언니는 아이를 원해요?”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나?”
“네. 아기를 가지려면 언니 뜻도 중요할 거 아니에요.”
그, 그렇긴 하지.
일단 아기를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는 사람은 그녀니까.
세실리아는 눈을 이리 또로록, 저리 또로록 구르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블랑슈의 분위기가 새삼스레 심각해졌다.
“언니.”
“나와 알렉의 아이가…….”
“네.”
“싫진 않아.”
솔직히 말해, 좋다.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뤼셍인 만큼 아이 역시 흑발일 터.
눈이 보라색일지 금색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알렉시스를 닮았으면 좋겠다.
아들이면 좋겠어.
세실리아는 부지런히 상상의 나래를 폈다.
‘아니면 어머니를 닮은 녹색 눈도…… 괜찮지.’
흑발에 또랑또랑한 녹색 눈망울을 간직한 아이라.
너무나 사랑스럽겠지.
특히나 알렉시스를 닮았다면 귀엽게도 홍조가 어린 뺨을 갖고 있을 터였다.
아이가 달음박질로 뛰어와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엄마!’
그렇게 귀엽게 외쳐준다면…….
세실리아는 눈을 느리게 내리깔았다.
헛된 망상이라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단꿈이긴 했다.
아이는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특히 그녀가 ‘황녀’일 때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흑발인데 그녀의 아이가 흑발이 아니면 말이 나올 테니…… 결혼도 글렀고 아이는 더더욱 글렀네, 라고 간단하게 결론 내렸을 뿐이었거든.
어차피 그녀의 맘에 차는 남자들도 없었으니 더더욱.
“언니.”
블랑슈가 그녀를 향해 초조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싫지’ 않으면요?”
“으응…… 그냥 내 친부가 친부다 보니……. 생각해 봐, 블랑슈. 내가 낳은 아이는 외조부가 친조부를 죽인 셈이야. 이게 말이 되는 가족 상태니?”
“……그렇긴 한데.”
블랑슈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제 머리칼을 이리저리 헝클어뜨렸다.
저러다가 행여 머리라도 뽑힐까 걱정이 들 정도로 격렬하게.
“언니.”
“응. 나도 알아.”
일단 알렉시스 뤼셍은 철저하게 그녀만을 원했다.
너무나 기쁘게도. 동시에 조금, 난처하게도.
현재 뤼셍의 직계는 단 한 명, 알렉시스 뤼셍인 만큼 차기 직계는 그가 선택한 그녀만이 낳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알렉시스는 세실리아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터.
만약을 가정하기엔 그들은 이미 여름의 샤르텐에서 결과를 목도했었다.
“언니, 여기요.”
세실리아는 내리깔았던 눈을 떠 블랑슈가 건네는 물건을 쳐다보았다.
……초록색 사탕?
“이건 사후피임약.”
“아?”
“그리고 이건 그냥 일상적인 피임약.”
일상적인 피임약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블랑슈가 꺼낸 두 개의 사탕을 멀뚱멀뚱 내려다보다가, 일단 요 아이도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 근데 왜 딸아이 뺏긴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거람?’
세실리아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티에리 에스디어의 등짝을 패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왜 하필 티에리가 피임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블랑슈가 피임하는 건데?
그녀가 속으로 불을 뿜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랑슈가 사탕 두 개를 쥐여 주었다.
“마법을 사용한 피임약이에요.”
“아?”
세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랑슈가 머리를 작게 헝클어뜨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 본인이 마법사거나 상대가 마법사일 경우에 먹으면 효과가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엔 티에리가 먹어도 상관은 없었는데, 맛있어서 제가 먹겠다고 했어요.”
……네?
아니. 아니, 블랑슈. 이유가 말이 되니?
세실리아는 황당하다는 눈초리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 눈빛을 받은 블랑슈가 자못 억울하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쌉싸름해서 맛있더라고요. 에이브리가 들어 있어서 동물들도 좋아해요. 이거…… 강아지도 좋아할걸요?”
“……에이브리? 아, 약초 중 하나인가.”
“네.”
여러모로 환장하겠네.
“아, 강아지들은 그냥 먹어도 괜찮아요. 애초에 강아지에겐 마력이 없으니까 걔네한텐 그냥 간식입니다.”
“…….”
“그래서 몇몇은 그냥 강아지 간식으로 사가더라고요.”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하질 못하겠다.
세실리아는 녹색 사탕을 내려다보다가 껍질을 벗겨냈다. 귀여운 리본 모양의 사탕이 진녹색 자태를 드러냈다.
“알리샤!”
그녀의 부름에 알리샤가 퍼뜩 일어나 총총 다가왔다.
사탕을 입가에 대어주자 녀석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챱 아주 맛있게 먹었다.
막대를 제외한 사탕이 전부 강아지의 입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강아지가 되게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알리샤가 컹컹 행복하게 짖으며 양탄자를 열심히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넓은 집무실을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데굴데굴 굴러다니기에 세실리아는 눈치껏 집무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알리샤가 계속 데굴데굴 굴러 이젠 복도 전체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사탕이 너무너무 맛있고 자신은 너무너무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되게 좋아하네.”
“강아지들한테도 인기가 많다니까요. 사실 고양이도 좋아한다던데.”
“아아, 그렇구나.”
세실리아는 그녀에게 남은 푸른색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물은 몇 번이고 엎질러졌으니, 만약에 먹어야 한다면 푸른색이 아니라 녹색을 먹어야 했겠지.
지금 와서 푸른색을 먹어봤자…….
“언니.”
“이거 좀 더 갖다 줄 수 있어? 돈은 따로 보내줄게.”
“돈은 괜찮은데…….”
세실리아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알리샤가 너무 좋아해서.”
블랑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복잡해졌다.
“언니가 먹을 거예요, 알리샤가 먹을 거예요?”
“당연히 알리샤가.”
블랑슈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지더니, 그녀가 아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여 가져오겠다며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열의를 불태우는 그 귀여운 모습에 세실리아는 엷게 웃어야 했다.
* * *
세실리아가 서류를 열심히 처리하는 동안 블랑슈는 다시 데굴데굴 굴러서 돌아온 알리샤와 놀아주었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그들만의 ‘시간 보내기’였다.
노을이 뉘엿뉘엿 질 때쯤에야 블랑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렉시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 저녁을 같이 들자고 청해 보았지만 그녀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단번에 거절했다.
“그랬다간 눈치 없다고 욕먹을 거예요.”
“…….”
“진짜예요.”
……어어, 그건 차마 반박할 수 없다.
알렉시스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럴 것 같아, 세실리아는 더 종용하지 않았다.
금방 떠날 것처럼 일어섰던 블랑슈는 의외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녀가 문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더니 불쑥 돌아섰다.
“블랑슈?”
배웅해 주려 일어섰던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응, 편히 말해.”
“진짜 편하게 물어봐도 될까요?”
뭘 물어보려는 거지?
블랑슈의 이번 질문만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세실리아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에이, 언니. 설마 제가 언니가 대답 못 할 질문은 할까요?”
……알렉시스를 사랑하냐, 그런 질문이라면 아직 답변을 못 해줄 것 같다.
세실리아는 어정쩡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알렉시스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니. 사랑하나?
사랑, 하긴, 하지.
그녀의 인생에서 알렉시스만큼 유일하다 싶은 존재는 없었다.
그녀는 알렉시스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줄 수 있었고.
이런 용기가 사랑이라면 사랑일 터.
하지만 서로 사랑을 통하면 ‘각인’이 이루어진다는데 아직 그녀의 몸에 알렉시스의 이름이, 알렉시스의 몸에 그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아니면 사랑은 하되, 알렉시스와 비슷할 만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거나…….
세실리아는 숨을 고르며 겨우 블랑슈에게로 집중을 돌렸다.
장난기가 쏙 빠진 진중한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응.”
“딱 하나 여쭤볼게요.”
“으응.”
“……언니가.”
블랑슈가 그녀답지 않게 다시 머뭇거리더니, 이번엔 비교적 망설임 없이 질문을 메다꽂았다.
“뤼셍의 아이를 갖길 원한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나도 모르겠어.
‘알렉의 아이는 원해.’
그 귀여운 아이를 내가 사랑으로 보듬어 낳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키웠으면…… 아르망과 마리사가 가르쳐 준 부모님의 사랑을, 내가 그 아이에게 베풀어 줄 수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생각이 분수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왔지만, 전부 다 주르륵 흘러내려 무엇도 말할 수가 없었다.
세실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며 창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겨울 석양에 잠긴 생-뢰크가 창 너머에서 붉은빛을 뽐내었다. 숨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경을 진열하면서.
저 화려한 도시의 길거리에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터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마침내 자신의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그리고 저들 중 몇몇은 그녀를 분명 반대하겠지.
어찌 감히 살인마의 딸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냐며 성을 낼 수도 있겠다.
알렉시스와 그녀가 한때 오누이였다는 점을 꼬집을 수도 있겠고, 알렉시스의 친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친부에게 암살당했다는 진실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일단 블랑슈, 내가 황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황후가 아니라면 ‘황후가 아닌 여자의 자식’이 될 아기는 얼마나 큰 정치적 곤경에 처할지,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세실리아는 상념을 달래려 빙긋 웃었다.
블랑슈가 여러 차례 입술을 달싹이며, 손으로 제 코끝을 짧게 비틀었다.
생각에 잠긴 녹색 눈이 어슴푸레 반짝이다 말고 문득 크게 홉뜨였다.
어여쁜 녹음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헌트’가, 언니 어머니의 성이죠?”
세실리아는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녀가 ‘헌트’라는 성을 받은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질문한 적은 없었다.
“아마, 그렇겠지?”
“‘아마’라니요, 언니?”
“알렉시스한테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네. 그때 난 세실리아 베르뉴가 아니라는 사실에만 감사했었거든.”
“아.”
블랑슈가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튕겼다.
맨 처음엔 맑았던 그 소리는 갈수록 점차 무뎌졌다.
“그게요, 언니.”
“응.”
“언니도 아시다시피 역사를 보면 ‘반역자 부모’를 둔 귀족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나오잖아요.”
“그렇지?”
실제로 뤼셍 황실에 반역을 저지르는 귀족들은 없었다.
그냥, 매국 행위나 제국을 어지럽히는 짓을 한 귀족들에게 ‘반역’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지.
아버지나 어머니가 ‘반역도’가 된 귀족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제 꼬리표를 떼었다.
‘어머니’가 반역자다?
그럼 어머니와의 절연을 선언한 뒤 ‘아버지’가 뤼셍 제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낱낱이 설명했다.
만약 ‘아버지’가 반역자인 경우, ‘어머니’의 공적을 아주 자세하게 늘어놓았었고.
“네가 어떤 방법을 제시하려는지는 알아.”
세실리아는 느리게 어휘를 골랐다.
사실 그녀도 그런 방법을 생각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일단 첫째로, 그녀의 친아버지가 저지른 짓이 너무 과했다.
그녀의 친어머니가 과연 ‘카밀 베르뉴가 저지른 그 무수한 범죄’를 덮을 만한 공을 세웠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둘째로, 가장 중요하게도 마리사를 두고 친어머니에 대해 조사하는 건, 뭐랄까…… 배은망덕한 짓 같아서.
세실리아는 이마를 느리게 문질렀다.
피투성이가 된 마리사가, ‘자신의 딸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던 순간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사지를 물어뜯고 목을 졸랐다.
이대로 속절없이 무너져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어지는 기분이라 표현해야 할까.
최대한 덤덤하게 이유를 알려주자, 블랑슈가 제 손으로 머리를 요란하게 헝클어뜨렸다.
“일단 언니, 1번은요.”
“응.”
“찾아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고요.”
그건 그래.
‘친어머니’를 조사하는 건 절대로 나쁜 선택은 아닐 터였다.
“둘째로…… 선황후 폐하께선 사실 언니가 ‘친어머니’에 대해 조사하셔도 절대 기분 나빠 하시진 않을 것 같아요. 누가 봐도 언니는 그분을 어머니로 여기고 따르셨으니까.”
“…….”
“그리고 그분께선, 언니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는 상황을 더욱 서글퍼하실 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세실리아 역시 이성적으론 블랑슈처럼 생각했다.
어머니께선 상처 입지 않으실 거라고, 되레 그녀가 안전하길 바라실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언하고 움직이기엔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만약 마리사가 깨어나서 상황을 알게 된 후, 상처를 받을까 너무나 두려워서…… 그래서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하루에도 매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휩쓸렸었지.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가 등을 떠밀어주길 바랐을 수도 있겠다.
“네.”
“…….”
“일단 언니는 ‘베르뉴의 딸’이라는 인식을 지우고 싶은 거잖아요. 그러면 이게 가장 정확하고 빠른 해결책인 거죠.”
“…….”
“만일 언니의 어머니가 제국의 안녕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면 당연히 언니의 이름은 다시 빛이 날 테고……. 그리고 나아아중에 베르뉴까지 잡히면 언니는 ‘베르뉴의 친딸’이라는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겠죠.”
세실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복잡한 눈길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바닥의 틈과 틈 사이를 공연히 눈으로 덧그리자, 블랑슈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언니, 언니는 선황후 폐하를 정말 ‘어머니’로 여기셨잖아요.”
으응. 그렇긴 한데……. 아냐. 블랑슈.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마리사 뤼셍은 그녀를 친딸처럼 생각했지만, ‘세실리아 뤼셍’은 마리사와 아르망을, 더 나아가 알렉시스를.
가족이 아니라 그녀가 평생 감사해하며 빚을 갚아야 하는 은인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분명 그런 적도 있었다.
“언니 안에 답이 있어요.”
블랑슈가 그녀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여름 샤르텐으로 피서를 떠났을 때, 저랑 티에리 경이랑 폐하를 따라 어떤 의문의 여인을 쫓아간 적이 있어요.”
“응?”
“뱃놀이 타기 직전에. 기억하실까요?”
세실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안하다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여자의 머리칼.”
“…….”
“은색이었어요. 무엇보다 당시 황태자셨던 황제 폐하께선 그 여자를 ‘아시는 듯’했고요.”
은색 머리칼.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검은색이 아니라 은색으로 바뀌면서부터 그녀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을 조금씩 줄여나갔었다.
되찾은 머리색이 어색해서일 수도…….
세실리아는 손을 뻗어 제 손바닥 위로 한 아름 고인 은빛을 쳐다보았다.
“늙어서 희끗희끗해진 머리칼이 아니었습니다. 언니와 비슷한, 정확히는 같은 색이었어요.”
블랑슈가 조곤조곤하게 설명했고, 세실리아는 ‘헌트’라는 성을 알려주던 알렉시스를 떠올렸다.
한참 동안 우수에 차 있던 남자를.
“……‘헌트’가 정말 내 어머니의 성이라면…….”
세실리아는 느리게 입을 뗐다.
똑같은 생각을 지닌 황금색과 연녹색이 서로를 오롯이 마주 보았다.
그래. ‘헌트’가 그녀 어머니의 성이라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친어머니를 알고 있다.
* * *
‘제가 그 만찬에 참석하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남긴 블랑슈는 양 뺨에 키스를 남겨준 뒤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세실리아는 소파에 꼿꼿이 앉은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몸을 흐트러뜨리고, 의식적으로 편하게 앉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습관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사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이 자세가 편해…….’
세실리아는 머리칼을 움켜쥐었다가 펴며 미간을 느리게 문질렀다.
초조한 맘 때문인지 그녀는 다른 손을 연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내 친어머니를 정말 알고 있을까.’
거기서부터 시작된 생각은 끝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알렉시스는 정치적인 감각이 그녀보다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았으니, 분명 ‘어머니의 공헌’으로 ‘아버지의 죄악’을 가린다는 방법을 고려했을 터였다.
한데.
‘알렉시스가 내 친어머니를 입에 올리지 않은 건…….’
그녀가 그렇게까지 유의미한 인물은 아니라는 소리려나…….
세실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도로 앉았다.
‘일단 내게서 베르뉴의 딸이라는 인식을 지우긴 해야 해.’
그게 아니면, ‘현 황후는 살인마의 딸’이라는 말이 알렉시스의 제위 내내 이어지고 또 이어질 터.
알렉시스의 권위에 커다란 타격이 갈 게 명백했다.
‘어쩐다.’
세실리아는 한숨을 쉬며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생각이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고 똑똑 끊겼다.
“정말 어쩌지?”
알렉시스는 그녀를 황후로 삼겠노라 말했었다.
그녀가 오만한 고집불통이라 하면, 알렉시스는 그보다 더한 ‘오만한 고집불통’이었다.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특히나 그 고집의 ‘이유’가 세실리아인 만큼.
단순히 그녀가 황후가 되고 말고의 문제였다면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알렉시스와 잠자리를 함께했으며, 이대로 나아가다간 정말 아기를 갖게 될 터였다.
뤼셍의 다음 직계를 위해서라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편이 나았다.
‘황후가 되어야 한다면…….’
생각이 배배 꼬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친어머니. 알렉시스.
‘잠깐만.’
세실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샤르텐에서 베르뉴가 침입했을 때 마리사가 그녀의 ‘친어머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마법진을 그리면서 베르뉴에게 아주 신랄한 목소리로 쏘아붙이셨지.
‘헛소리하고 앉아 있네. 걘 죽었어.’
아, 그녀의 친어머니께선 일찌감치 돌아가신 모양이다.
‘죽었다니까, 등신아.’
베르뉴는 그 사실을 몰랐던 걸까?
세실리아는 눈을 찡그리며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나열해 보았다.
성은 헌트.
머리는 은발.
베르뉴와…… 정을 통한 사이이며 일단 현재는 사망한 상태.
‘솔직히 내 친어머니가 궁금해지긴 하네.’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뉴와 정을 통하다니.
조금 많이 신기했다.
카밀 베르뉴가 폭주하기 전에 연인이었던 걸까?
그리고 그가 폭주한 바람에 사랑이 깨졌던 거고?
‘아무래도 어머니와 내 친어머니께서 서로 친분이 있으셨던 거겠지?’
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양어머니 마리사가 그녀를 입양했다고 하면 아귀가 맞다.
세실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있는 베개를 집어다 끌어안았다.
입양되기 전의 기억.
그곳에 분명 친어머니께서 계실 듯한데…….
‘차라리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찾아볼까?’
이리저리 고민을 굴리느라, 세실리아는 알렉시스가 들어와 딸깍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닫았다는 사실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기척을 느꼈을 땐 이미 남자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좋은 하루 보내셨습니까?”
“으응.”
“비에라 백작 부인과 오페르 영애가 방문하였다 들었습니다.”
“블랑슈도 방문했어.”
“흰둥이?”
세실리아는 눈초리에 찌릿 힘을 주어 째려보았고, 알렉시스가 빙긋 웃었다.
무언갈 마시고 온 건지 그의 입술이 유난히 젖어 촉촉했다.
아니네.
귀 아래며 콧잔등이며 곳곳에 물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아마 세수를 한 모양이었다.
세실리아는 손을 내려 자신을 꼭 껴안은 남자의 손등을 문질렀다.
그 간단한 접촉에 남자가 옅게 웃었다.
“알렉.”
“예.”
내 어머니를 알고 있어?─라는 간단한 질문.
한데 그 물음을 꺼내지 못하는 연유는 대체 무엇인지.
세실리아는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가라앉히려 벌떡 일어섰다.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테이블 위의 찻잔을 집어 들고는, 다소 다급하게 보일 만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마르셨나요?”
“으응. 그보다, 궁금한 게…….”
어라. 알렉시스가 왜 둘이지?
세실리아는 놀라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알렉시스가 당황하여 그녀를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알, 렉.”
뭔가 이상해. 차에 독이라도…….
문장을 마무리하기도 전, 세실리아는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은빛 머리칼이 물결처럼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달빛 고인 호수처럼 그토록 아름답고 처절한 풍경이 알렉시스의 눈에 똑바로 새겨졌다.
하여 남자는, 맨 처음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의 손을 반사적으로 잡아 쥐었으면서도.
그녀를 끌어안아 품에 가뒀으면서도,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도저히 알지 못하였다.
“……세실리아?”
여인이 눈을 뜨지 않는다.
“세실리아?”
알렉시스는 덜덜 떠는 손을 들어 세실리아의 귀밑에 갖다 대었다.
심장은 다행히도 규칙적으로 뛴다.
하지만 손이 너무나 차갑고, 얼굴은 그보다 더 식어 있어서…….
“세실리아!”
그는 마침내 상황을 인지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찢어질 듯한 고함에도 여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미쳐 가는 남자만이 공포에 질려 경련할 뿐.
* * *
시끄럽게 줄이 울리는 소리에 노링 남작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나왔다.
“남작! 남작!”
시종장인 미하엘 경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그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경우는 처음인지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무슨 일이죠?”
“전하께서!”
“네?”
다음 순간, 노링 남작은 의료가방을 짊어진 채 미친 듯이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쉽게 들락날락해서는 안 되는 황제의 집무실은 문이 훤히 열려 있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구석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노링 남작은 집무실을 지나, 통로를 내달려, 마침내 침실로 들어섰다.
침실은 집무실보다 더 엉망인 꼴이었다.
모든 게 망가지고 깨져 버린.
“폐하? 전하!”
그녀가 다급하게 부르자,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굽어보던 황제가 흘끗 눈을 움직였다.
걱정과 공포로 이미 반쯤 돌아버린 눈동자였다.
“그대.”
얼음장처럼 스산한 목소리.
하지만 그건 협박성이라 싸늘하기보단, 그냥 남자가 지닌 두려움이 진득하게 깃들어 있어 싸늘했다.
남작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렉시스 뤼셍이 반쯤 씹듯이 내뱉었다.
“너희가 날 단 한 번이라도 의미 있게 생각했다면.”
“……폐하.”
“살려. 당장.”
실체 없는 약속을 할 여유 따위 없었다.
“어쩌다─”
“독을 먹었다.”
노링 남작은 서둘러 침대로 다가가, 기절해 있는 여인을 관찰했다.
평상시 붉고 도톰했던 입술은 파리하게 질려 거의 보랏빛이었다.
황급히 세실리아의 얼굴에 손을 대자 손끝을 얼릴 정도의 냉기가 기습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뗄 수밖에.
황제가 눈으로 바닥에 있는 찻잔을 가리켰고, 노링 남작은 당장 내려가 찻잔을 살펴보았다.
무색무취.
‘그런 형태의 독 중에서 환자의 체온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건…….’
정확하게 세 종류의 독을 떠올린 남작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다시 환자를 살폈다.
다른 두 개는 그나마 해독제가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 ‘에브’만큼은 해독제가 없어서…….
이를 꽉 악물었다.
어떤 독인지 알아야 제대로 된 해독제를 내어 줄 터.
까딱하다가 다른 해독제를 내어 주었다간 환자를 정말 죽일 수 있었다.
‘에브인지부터 확인하자.’
그것만은 절대 아니어야 하지만…….
남작은 간절하게 바라며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소독한 바늘로 손끝을 콕 찔러, 끝에서부터 검은 피를 한 방울 뽑아냈다.
다른 두 개의 독이라면 이런 짓을 해도 별 차이는 없을 터다.
‘……하지만 에브는.’
세실리아의 입술이 순식간에 본래의 혈색을 되찾았다.
시종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노링 남작 홀로 절망을 곱씹어야 했다.
안 돼. 설마!
하지만 세실리아의 체온은 계속 급격하게 오르다 못해 이젠 펄펄 끓기 시작했다.
열이 가득 오른 여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에브의 특징.
맨 처음엔 음독한 이의 체온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다가, 상처가 생긴 순간 곧장 열을 치솟게 만든다.
물론 에브가 악명 높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에브가 진실로 위험한 독초인 까닭은, 그것이 만들어 낸 끔찍한 ‘복통’ 때문.
에브는 음독한 이의 내장에서 무더기로 피어나며 사람을 말려 죽였다.
‘어, 어, 어떡하지?’
에브의 해독제는 없을 텐데?
에브가.
에브는…….
에브는 세덴 왕국에서만 나오는 독초로 만들어졌다.
세덴에서 해독제를 발견해 냈나? 그녀가 알기론 아직인데…… 세덴.
세덴…….
노링 남작은 거의 공포에 질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바로 그때, 기절해 있던 여자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노링 남작은 몸을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시종장 역시 뒤에서 흠칫했다.
“알, 렉…….”
띄엄띄엄 부르는 목소리.
그녀가 힘겹게 손을 내뻗었고, 알렉시스 뤼셍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 손에 제 뺨을 대었다.
“너, 왜 이렇게, 차가워…….”
“그렇습니까?”
당신이 뜨거운 거야, 그렇게 속삭이며 알렉시스는 이번엔 여자의 손에 입을 맞췄다.
너무나 다정하게.
그보다 더 간절하게.
세실리아가 흠뻑 젖은 눈을 깜박이더니 팔을 더 간절하게 뻗었다.
목을 끌어안으려는 동작에 알렉시스가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상체를 숙여주었다. 새하얀 팔이 마치 포도 넝쿨처럼 남자의 목을 휘감았다.
“아파요?”
“……아니. 그냥, 네가…….”
“네.”
“흐릿하게 보여.”
여자가 낮게 속삭인 말에 황제가 이를 까득 갈았다.
둘이 계속 그들만의 세상에 빠지기 전에 노링 남작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전하, 황녀 전하!”
“……누구?”
“노링입니다. 혹시 복통이 있으십니까?”
세실리아가 눈을 이리 또로록 저리 또로록 굴리더니, 아주 미미하게나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배가 너무 아프다며 몸을 말거나 그러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목을 끌어안으려 들 뿐.
“춥기만 해…….”
“그렇, 습니까?”
“조금, 많이…….”
세실리아는 약간 울상을 지은 채 조금 많이 춥다고 속삭였다.
한편 노링은 최대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체온이 낮아졌다가 상처가 생기면 다시 급격하게 높아지는 독초.
그건 진짜 에브밖에 없다.
그녀가 모르는 새로운 독초가 발견되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에브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복통’을 선사하는데, 현재 세실리아가 복통을 겪고 있지 않다면…….
‘복통이 오는 시기가 느린 건가?’
아닌데.
보통 첫 모금 마시면서부터 증세가 진행될 텐데. 어째서?
애초에 세덴 왕국이 금지한 독초가 어째 지금, 하필 황제의 여자에게…….
“설명을 해, 노링.”
황제의 서늘한 목소리에 노링은 띄엄띄엄 속삭였다.
사실 세실리아가 ‘복통’을 겪어야 하는데 안 겪고 있다는 점과 바로 그 ‘복통’이 사람을 죽이는 증세라는 것까지 전부.
알렉시스 뤼셍은 가만히 듣다 말고 세실리아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녀가 손으로 더듬더듬 그의 콧대를 어루만졌다.
“알렉.”
칭얼거리는 소리.
여인의 부름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다시 노링을 쳐다보았다.
가까이 오라는 눈짓에 황궁의는 총총 다가가 세실리아의 온도를 재었다.
……낮아진다.
“열이 떨어지는군.”
“다, 다, 다, 다행입니다!”
이제 정상 온도로만 돌아오면 세실리아는 그 에브를 이겨냈다는 뜻!
‘세상에, 이게 가능은 했었냐고!’
노링 남작이 속으로 호들갑을 떤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시스가 잠자코 손짓했다.
축객령을 의미하는 동작에 노링 남작은 황급히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폐하! 전하를 계속 살펴봐야…….”
“알렉.”
세실리아가 황제를 잡아끌더니 품을 반쯤 파고들었다.
“추워.”
작게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알렉시스는 그저 머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춥단 말이야…….”
“알아요.”
“알렉…….”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새 셔츠 깃 아래를 파고들고 있었다.
열에 이성이 잠식된 건지, 세실리아는 정말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여자의 바르작거리는 손을 떼어내다 말고 어여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목격했다.
어리광 같은 그 눈물 한줄기 너머로 금빛 눈이 잔뜩 토라져 있었다.
“안 돼요.”
그가 작게 신음하며 속삭였고, 노링 남작은 시종장에 의해 알아서 끌려 나갔다.
“하지만…….”
“당신 아프다고. 독 먹었어요.”
“응?”
독을 먹었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딴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번엔 알렉시스의 뺨을 붙들었다.
숙여달라는 간절한 힘에 머리를 다시 숙이자, 그녀가 그의 입술에 짧게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간절하게 느껴질 만큼.
그리고 그보다 더 달콤하게.
“안 돼요.”
알렉시스는 거의 한탄하듯 애걸했고.
“……추워.”
세실리아는 뭔가 고집 부리듯 속삭였다.
그러고는 기어이 남자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고는 몸과 옷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느리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알렉시스는 이를 까득 악물었다.
혼몽한 금빛은 그를 오롯이 담으며 재촉하고 있었다.
“당신 진짜…….”
잇따른 사나운 욕설.
“알렉?”
세실리아가 또다시 속삭였고, 알렉시스는 그녀의 입술에 제 목덜미를 내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체온과 고열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여자는 조금이나마 기력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가장 잘 견디는 자세로 그를 이끌었으니.
“제발, 세실리아. 당신 아프다니까.”
“……상관없어.”
알렉시스는 끝내 항복하듯 여자의 입술을 핥았다.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달큰한 향에 의식 전체가 날아갔다.
“알렉.”
여자의 손이 기어이 그의 셔츠를 벗겨냈다.
말릴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세실리아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으니.
깍지 낀 여자의 손을 단단하게 움켜쥐자, 그제야 제 혈색을 되찾은 입술이 조금이나마 휘어졌다.
느슨하게 풀린 입매가 얄미워 그는 귓불을 힘주어 빨았다.
“참지 마, 알렉…….”
뭐가 ‘참지 마’야, 이 잔인한 여자야.
* * *
세실리아가 눈을 떴을 땐 새벽의 푸르른 빛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잠깐 떠난 건지는 몰라도 침대에 없었다.
하지만 옆엔 그의 온기가 남아 있어, 빙그르르 굴러 그의 향이 남아 있는 자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원하고 청량한 체향이 폐를 가득 메웠다.
그걸 넘어서서 그녀의 의식, 영혼, 정신 전체가 전부 그에게로 지배된 느낌이었다.
알렉시스는 정말 그녀를 뿌리째 뽑았더랬다…….
세실리아는 눈을 감고는 혼몽했던 어젯밤을 떠올렸다.
독을 먹었다는 기억은 난다.
그리고 그 독으로 인해 체온이 미친 듯이 떨어졌던 것과 어느 순간 갑자기 열이 치솟았던 것까지.
들끓는 열 속에서 그녀는 미친 듯이 한 사람만을 찾았다.
‘……알렉.’
흐느끼듯 불렀던 이름.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남자의 이름을 불러대었던 건지.
쓰러지면서 본 남자의 표정 때문일까?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그리하여 가장 아득한 절망과 가장 비참한 나락을 동시에 경험하는 죄인의 낯이어서일까?
세실리아는 계속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손을 맞잡아 그에게 온기를 주고 싶었고 그의 온기를 받고 싶었다.
그러니까, 안아주고 싶었다.
독을 먹었음을 알면서도 끝끝내 그를 부르고 유혹했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실리아는 살아 있었고, 그 순간 알렉시스와 그녀가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깨닫고 싶었다.
알렉시스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었고.
그래서 그의 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미친 듯이 뛰는 맥박을 찾아, 그가 오롯이 그녀 곁에 살아 있다는 현실을 곱씹으며.
‘알렉.’
그녀가 얼마나 자주 남자의 이름을 불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막판에 그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었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소지부터 엄지까지, 다시 엄지부터 소지까지.
그렇게 세 번 돌고 돌 때까지도 세실리아는 정말 간절하게 이름을 불렀다.
‘알렉, 알렉, 알렉…….’
남자는 계속 경건하게 입을 맞췄을 뿐이었다.
갈라진 음성으로 끈질기게 부른 까닭은…….
세실리아는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끔은 궁금해져.’
내가 너의 비극인지 희망인지. 혹은 네가 나의 비극인지 희망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넌 적어도 내 세상의 가장 커다란 주춧돌이야.
* * *
남자는 세면대를 붙들며 허물어졌다.
여자와 몸을 섞으면서 조금 줄어들었던 통증은 갑작스러울 정도로 굉장히 심각해졌다.
심장을 쥐어뜯어 작신작신 짓밟아도 이토록 아프진 않을 테지.
알렉시스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며 물을 틀었다.
새빨간 선혈이 물과 함께 아래로 사라져 내린다. 그는 콜록거리며 몇 번 더 피를 토해 낸 뒤, 가만히 앞에 있는 거울을 뜯어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창백한 낯.
그리고 그보다 더 음울한 표정.
알렉시스 뤼셍은 다시금 제 죽음의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 * *
황제의 침실까지 ‘독’이 들어왔다.
그건 당연히도 퐁레프의 수치인지라, 다음 날 난리가 나며 궁 전체가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인 알렉시스 뤼셍과 세실리아가 멀쩡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시종장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기가 막히는 순발력으로 찻잔을 챙겼던 황궁의 노링 남작은 독초 에브가 맞다고 공언했다.
해독제가 없어 악명 높다는 바로 그 ‘에브.’
퐁레프의 분노 속에서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조건들이 세세한 만큼 사람들은 범인을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그들이 진실로 예상치 못했던 건 독살당할 뻔한 피해자인 ‘세실리아 헌트’가 직접 수사 중지를 요청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도 퐁레프는 발칵 뒤집혔다.
피해자 본인께서 수사 중지를 요청하셨다니 대체 왜! 도대체 왜 중지하신 거지?
‘설마 스스로 음독하신 건 아니죠?’
누군가의 가설에 쟌느 비에라 백작 부인이 불을 뿜으며 열을 내는 동안, 여러모로 화젯거리인 세실리아는 황제의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눈만 깜박이며 천장의 무늬를 새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정확히 그녀는 블랑슈를 기다리며 자신의 추리를 되짚고 있었다.
‘독살의 배후는 과연 누구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여러 단서를 조합해야 했다.
첫째, 세덴 왕국과 관련 있는 자.
둘째, 황제의 방에 감히 독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배짱이 큰 사람.
셋째, ……그것도 하필이면 독을 에브로 선택한 연유는?
퐁레프의 수사 인력과 달리, 세실리아는 더 많은 정보를 거머쥐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저는 에브에 내성이 있습니다.’
알렉시스가 조용히 알려준 정보.
‘흔히들 해독제가 없다고 알려진 독초지만 굳이 따지자면 해독제가 있긴 합니다. 독초 그 자체지요. 어렸을 때부터 독을 소량으로 복용을 하면, 해당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에브를 먹었구나.’
‘예.’
하긴, 독을 먹은 그녀의 입술에 너무 스스럼없이 입을 맞춘다 싶었다.
그때 그녀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생각조차 못 했지만, 알렉시스는 자신의 내성을 믿고 독을 먹은 여자에게 입을 맞췄다는 소리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행동인걸.
그녀도 그렇고 알렉시스도 그렇고…….
‘다신 하지 말라고 잔소리해야지.’
내가 들이대더라도 본인이 밀어냈어야 할 것 아니냐고!
세실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애써 자신의 추리 과정으로 돌아갔다.
자, 이제.
‘알렉시스가 에브에 내성이 있다는 걸 범인이 알았다면’의 경우.
일단 그러면 그자의 목표가 알렉시스가 아닌 그녀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어쩌면, 황제가 에브에 내성이 있기에 더더욱 그 독초를 고집했다는 소리 아닐까.
알렉시스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다만 여기엔 맹점이 있다.
‘범인은 대체 어떻게 알렉시스의 내성을 알게 되었는가’지.
‘흠…….’
세실리아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까딱이며 두 번째 가정으로 넘어갔다.
‘범인이 알렉시스의 내성을 몰랐다면’의 경우.
그렇담 독을 보낸 배후는 그녀든 알렉시스든 둘 중 하나를 죽이기 위해 독을 밀어 넣었다는 소리였다.
다만 여기서 조금 이상한 게…….
‘타 왕국의 희귀 독초란 에브까지 어찌어찌 구할 정도로 지극정성이라면, 목표물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알렉시스고 그녀고 추가 기습이나 독살 시도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뿐일까.
에브는 암살용으로 그렇게까지 인기 있는 독초가 아니다.
뤼셍 제국에서 세덴 왕국과 교역을 하는 상단은 많지 않거든.
그런 만큼, 에브를 사용하면 추적될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
이런 위험성을 참작하면서까지 에브를 썼다고?
……글쎄.
‘몰랐다면’보단 ‘알았다면’의 경우가 더 말이 될 수밖에.
문제는 ‘알았다면’의 경우로 간다면 독을 보낸 장본인의 후보가 단 한 명이 된다는 것.
세덴 왕국과 관련이 있고, 알렉시스가 에브에 내성을 가졌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법한 사람.
그러면서도 절대로 알렉시스만은 건드리지 않을 사람.
세실리아는 소리 내지 않으며 입속말로만 정체를 중얼거렸다.
‘레니앙 공작 대부인.’
세덴의 왕족 출신이자 선황후 마리사의 대모. 알렉시스의 ‘외조모’ 격인 레니앙 공작가의 정신적 지주.
똑똑.
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에 세실리아는 들어오라고 허락해 주었다.
빼꼼 얼굴을 보인 블랑슈가 알리샤를 향해 깜찍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알리샤!”
“컹컹!”
“언니가 간식 가져왔다~”
간식이라는 단어에 알리샤의 꼬리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흥분한 건지 새하얀 색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컹컹컹컹!”
주인아, 내 간식 내놔, 간식!
세실리아는 가장 먼저 초록색 사탕을 알리샤의 입에 물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든 말든, 강아지는 제 간식을 얻었으니 되었다는 듯 복도 저 멀리로 굴러가고 있었다.
……잘 놀고 있으렴, 알리샤.
“오늘 시간 돼, 블랑슈?”
“네? 아, 물론이죠. 언니. 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 무슨 일이신가요?”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독살당할 뻔했는데─”
“네에에에에엑?”
몰랐군.
세실리아는 제때 한쪽 귀를 틀어막아 자신의 청력을 보호했다.
블랑슈는 숫제 목을 잡고선 뒤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우렁찬 외침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어떤 새끼야! 어떤 놈이에요! 누구야, 그 개새끼가! 잡았어요!”
“아직.”
“퐁레프는 대체 뭐 합니까! 황제는 대체 뭐 하고!”
“……인데, 일단 그 사람 만나러 가보려고.”
“네에에에엑?”
블랑슈가 또다시 빼애애액 외치고 나서 황망하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턱 짚었다.
“범인이 누군지…… 아신다는 소리세요?”
“대충 짐작이 가네. 그 사람인지 확실친 않지만.”
하지만 거의 확실할 터다.
감히 황제의 침실에 독을 넣을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거든.
애초에 그분은, 알렉시스가 어머니를 봐서라도 눈감아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어어, 어, 어…….”
블랑슈가 말이 꼬였는지 에베베 하며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세실리아 홀로 담담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을 뿐이다.
“어쨌든, 블랑슈. 가자.”
“그 새끼가 대체 누굽니까? 우리 어디로 가는 건데요!”
“레니앙 공작저.”
“빅토르 레니앙, 이 썩을─”
“공작 아니야.”
세실리아는 제때 비명을 끊어 냈고, 블랑슈는 또다시 눈을 크게 홉떴다.
이번엔 입까지 떡 벌리며 대체 누구냐고 묻고 있다.
“……공작의 할머님.”
“네에에에에에에엑?”
이로써 세 번째 격한 비명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반응’보다는 ‘그 사람이 대체 돌았냐는 반응’에 가까워 다행이었다.
블랑슈는 늘 그녀를 믿어주긴 했다만.
세실리아는 귀청 떨어질 듯한 부르짖음이 끝나서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공작 대부인 만나러 가려고. 근데 나 홀로 떠나기가 좀…….”
“당연히 저랑 같이 가셔야죠, 언니.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근데 언니에게 독을 먹인 분을 만나서 뭐 하시게요?”
세실리아는 제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 마리사의 ‘대모’이셨던 만큼, 마리사와 친분이 있던 상대들도 얼추 알지 않을까─ 그런 생각.
그리고 마리사는 그녀의 친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다.
즉, 조금의 논리적인 비약을 섞자면,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 어쩌면 그녀의 친어머니를 알 수도 있다는 소리지.
“……독을 먹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세실리아는 느리게 운을 띄었다.
“그녀가 저지른 일을 덮어 주는 대가로…… 요구할 정보가 있기도 하고.”
부디 일이 잘 풀리기를.
알렉시스가 그녀에게만 ‘자신의 내성’에 대해 정보를 흘린 건, 아마 그 역시 범인을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겠지.
알렉시스 뤼셍은 그녀보다 눈치가 빠르고 추리력이 더 좋으면 좋았지 덜 좋을 사람인 아니었다.
‘……어떻게 흘러가든, 일이 잘 끝나면 좋겠네.’
알렉시스에게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마차에 올라타며 그녀가 곱씹은 생각이었다.
레니앙 공작 대부인은 친손주 빅토르뿐만이 아니라 알렉시스에게도 좋은 할머님이 되어주셨다.
그래. 정보를 못 얻어도 괜찮다.
그냥 대부인이 에브까지 쓴 것에 부디 합당한 이유가 있길 바라야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독살 사건이 끝난 만큼, 대부인에게 이해할 만한 사정이 있다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부디.’
세실리아는 더없이 간절하게 기원했다.
* * *
레니앙 공작저는 기꺼이 문을 열어 세실리아를 환대해 주었다.
그녀를 둘러싼 비밀이 전부 드러났는데도 빅토르 레니앙은 여느 때처럼 친절하고 정중했다.
“……대부인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그녀의 요청에.
“물론입니다, 레이디.”
즉각적으로 반응해 줬으니.
“근데 조금 재밌군요.”
“예?”
“공교롭게도, 할머님께서 레이디가 찾아오시거든 곧장 자신에게로 데려와 달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내가 찾아오리라는 걸 알았다는 소린가.
세실리아가 그저 미소를 머금으며 옆에서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랑슈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얼른 표정 관리하라는 신호에 블랑슈가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팽 돌렸다.
“대부인께선 언제나 통찰력이 뛰어나셨지요.”
“그렇죠, 제 할머님이시지만 대단하십니다.”
빅토르가 자랑하는 어조로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우쭐대는 듯한 표정이 조금 귀엽긴 했다.
“다만 제가 거짓말을 할 땐 조금 안 좋아요.”
“아, 그런 단점이.”
“빅토르 레니앙, 이라고 부르면 일단 긴장부터 하게 된답니다. 또 무슨 거짓말을 들켰나 하고요. 이래 봬도 연기는 꽤 잘한다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공작이 투덜거리며 실내 정원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퐁레프의 유리온실과 정원들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공작가의 정원인 만큼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진귀한 풀과 수목이 무성함을 자랑하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정원의 한쪽 벽에 꾸며진 거대한 폭포를 보며 세실리아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물 떨어지는 시원하고도 청량한 소리가 한겨울의 햇빛 속에서 아스라이 퍼져나갔다.
“아침엔 잠시 안개가 생기는데, 그 역시 장관이지요.”
“예쁘겠어요.”
“그리고 그 너머에 무지개까지 생길 때는 오늘은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길 잘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잠이 많으신가 봐요, 공작께선.”
“부끄럽군요.”
어린 공작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는 모습을 보며 세실리아는 ‘기뻐하셔야지요, 우리 알렉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단 말입니다!’라는 유치한 발언을 해버릴 뻔했다.
때마침 나타난 풍경이 그녀의 혀뿌리를 붙들어 주었다.
폭포의 저 끝, 무지개 일렁이는 곳에서 한 노부인이 담요를 두른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도 고아했다. 그저 눈길 한 번만으로도 주인공의 품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러다 문득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 연륜 가득한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손주에게서 블랑슈에게로, 블랑슈에게서 마침내 그녀에게로.
눈이 정확히 마주친 순간 노부인은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래서 확신했다.
‘정말, 저분이 하셨구나.’
애초에 확신하고 왔거늘…… 정말 확신하게 되니 마음이 착잡해지는걸.
세실리아는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거짓된 평정의 가면을 둘러썼다.
빅토르 레니앙이 서둘러 걸어가 할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노부인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숄을 다시 덮어 주는 모습은 화목하고도 다정했다.
“춥습니다, 할머님.”
“고맙구나.”
“그리고 할머님의 말씀대로 레이디께서 오셨습니다.”
“으흠. 내 눈에도 보인단다.”
노부인은 그저 지켜보았고, 세실리아와 블랑슈가 적당히 눈치껏 다가가야 했다.
만약 세실리아가 황녀였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겠다만…… 이젠 아니라서.
가까이 다가가자 대부인이 손을 뻗어 맞은편의 좌석을 가리켰다.
앉으라는 신호에 세실리아는 느릿느릿 눈을 한 차례 깜박인 뒤 자리에 앉았다.
“빅토르, 혹시 휴스턴 후작 영애에게 ‘새의 낙원’을 보여줄 수 있겠니?”
적당히 자리를 피해 달라는 요청. 아니. 어쩌면 권고.
어린 공작이 눈치 빠르게 블랑슈에게로 손을 내밀자 블랑슈는 어린 공작을 쳐다보다 말고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짧게 끄덕여 가라고 허락해 주었다.
빅토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떠나기 전, 블랑슈는 입 모양으로 열심히 벙긋댔다.
‘문제 있으면 불러요, 언니! 꼭 불러!’
대충 이런 말을.
문제는 그걸 레니앙 공작 대부인도 정확히 보고 있었다는 거지.
블랑슈 휴스턴은 마무리로 아주 야무지게 대부인을 흘겨보고 떠났다.
한참 어린 영애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받게 된 대부인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충성스러워.”
“……블랑슈는 정말 좋은 친우지요.”
“그래요, 그렇지. 그대의 그 모든 비밀이 까발려졌는데도 한결같은 사람은 거의 드물었을 테야.”
블랑슈만은 아니었다. 퐁레프는 그녀에게 변함없이 친절했다. 대체로.
세실리아는 그렇게 반박하려다 말았다.
퐁레프가 여전히 그녀에게 친절한 까닭을, 그 본질적인 이유를 잘 알고 있어서.
‘알렉시스가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퐁레프 역시 그녀를 가차 없이 버렸겠지.
“압니다, 대부인.”
“…….”
“블랑슈 같은 사람이 굉장히 드물다는 걸 잘 알고 있고, 그에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
“당장 대부인께서도 제게 다른 반응을 내비치셨으니까요.”
황녀였을 때 대부인은 그녀에게 호의적이면 호의적이지 절대로 적대적이진 않았다.
그녀가 만약 여전히 황녀였다면 이렇게 ‘독’을 보냈을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 대부인이 그녀에게 독을 먹일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세실리아는 눈을 느리게 내리깔았다.
귀부인의 발치에는 두툼한 털실과 그걸로 만들고 있는 뜨개질감이 바구니 안에 곱게 들어 있었다.
“우리의 레이디께서 잊으신 듯한데.”
대부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을 팔랑 넘겼다.
그러고는 탁, 소리 내어 책을 완전히 덮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레이디께서도 에브에 내성이 있지요.”
“…….”
“그러니 그대가 지금 무사한 것 아닙니까.”
“제가…… 에브에 내성이 있었음을 아셨습니까?”
알았다고? 그럼 대체 왜 에브를 넣은…… 아.
빅토르 레니앙의 말이 그녀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공교롭게도, 할머님께서 레이디가 찾아오시거든 곧장 자신에게로 데려와 달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녀가 찾아올 줄 알았다’라면.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녀가 찾아오길 바랐다는 뜻이었다.
세실리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설마 에브를, 전령으로 쓰신 건 아니죠?”
“왜 안 되지?”
누가 독초를 그런 용도로 써요!
세실리아는 황당하여 입술을 달싹였지만, 대부인은 대수롭잖게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결국 레이디께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앞에 앉아 있잖습니까.”
“…….”
“아주 곱고 멀쩡하게.”
“방법이 너무 과격하셨습니다!”
“그건 인정하지요.”
너무 빠른 수긍에 상대가 되레 기가 찰 지경이었다.
세실리아는 ‘알렉시스가 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아느냐,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고 싶었느냐’라고 곧장 쏘아붙이려던 걸 참았다.
그러고는 정말 많이 가공하여 속삭였다.
“알렉시스가 슬퍼했어요.”
“폐하께서도 모르셨나 보군요. 당신이 에브에 내성이 있음을.”
이쯤 되면 대부인이 뭘 말하려 하는지 모를 수 없다.
이 대화 자체가 노부인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건 딱히 기껍진 않았지만, 세실리아는 일단 사감을 내려놓았다.
어쩌면, 노부인께서 알아서 그녀가 원했던 정보를 주실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어서.
“대부인께선 절 잘 아시나 봅니다.”
“…….”
“저와 폐하 둘 다 모르는, 저에 대한 정보를 알고 계신다니 놀랍네요.”
“글쎄, 제가 레이디 본인보다 레이디에 대한 정보를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특히나 레이디께서 입양되기 이전의 기억이 없음을 반추해 보면 말이지요.”
“알려주실 겁니까?”
세실리아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하나 더 여쭙고 싶습니다. 대부인께선……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를 정확하게 짚으시겠지요.”
뭘 물어볼 거냐는 듯 대부인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녀는 편안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있었다.
“제 어머니를 아십니까?”
“지금 나보고 내 대녀를 아느냐 질문하는 겁니까?”
경고 섞인 반문에 세실리아는 선선히 제 표현을 수정했다.
확실히 이번 건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사 뤼셍이니.
“절 낳아주신, 제 친어머니를 아십니까, 대부인?”
“알지요.”
너무나 빠르고 선선한 대답에 세실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발뺌을 하시거나 대답해 주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렇게나 확고하게 답을 내어 주시다니.
세상에.
“질문엔 질문이겠지요. 그럼 이제 이 늙은이가 레이디에게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세실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공작 대부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머리칼, 턱, 눈 그리고 곳곳에 쏟아졌다가 멈췄다.
“사랑하십니까?”
“…….”
“이 몸도 뤼셍 제국의 신민인지라, 우리의 폐하께서 상당히 걱정되실 수밖에 없어서.”
연륜 깊은 시선이 세실리아에게로 오롯이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의 황제 폐하를, 사랑하십니까?”
“……내 대답이 무엇이 되었든 대부인께는 말씀드리진 않을 겁니다.”
“…….”
“아직 그이도 내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부인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책의 겉표지를 톡톡 치더니,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녀의 반편 같은 대답도 기꺼이 받아주겠다는 듯.
“그럼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레이디.”
“언제든지 질문하십시오, 대부인.”
“……기억을 감당할 자신은 있으십니까?”
아. 이런.
이런 건 예상치 못했었는데.
세실리아는 다소 황망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건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 몇 개의 단서를 흘리거나 아니면 단편적인 일화를 얘기해주고 그녀가 추리하는 방식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통째로’ 찾게 될 줄은.
‘이런 전개는 정말, 어…….’
세실리아는 느리게 숨을 골랐다.
문득 그녀가 알렉시스를 매정하게 거절했던 시절의 파편 하나가 마음을 스쳤다.
세레인의 정자에서 그들은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에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더랬다.
‘내가 알기론 기억을 지우는 마법은 없다 들었어.’
‘정확하십니다.’
‘그럼 모종의 이유로 내 기억이 날아갔다는 소리인데, 사람의 기억까지 날아갈 정도면 큰 문제가 터진 것 아닐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일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찾지 않겠다.
그렇게 에둘러서 기억 찾는 걸 거절했었지.
세실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재빠르게 자신을 추슬렀다.
그녀 홀로 있는 것도 아니고 레니앙 공작 대부인과 함께이니, 그녀에게 약해빠진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을 자신이 있느냐고.’
동시에 세실리아는, 그녀가 종종 목격했던 알렉시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더없이 고독하고 쓸쓸했던 표정들을,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짙디짙은 외로움을.
한겨울의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듯 남자는 그렇게 한없이 서러웠다.
서러워서 더 눈부셨고…….
‘알렉.’
세실리아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를 불러보았다.
네 고통을, 네 외로움을, 네 가장 깊숙한 상처를 눈부시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야.
그런 상처를 이고도 강건하게 버티고 있는 네가 눈부신 거지.
확실히, ‘알렉시스 뤼셍’은 강인했다.
그러니 세실리아가 더 괴로운 거겠지.
그 굳센 이가 그녀 때문에 상처 입는 걸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대부인.”
그녀는 한숨 토해내듯 상대를 불렀다.
줄곧 기다려 주고 있던 노부인은 말없이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전 확실히 제가 잃어버린 기억이 두렵긴 합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을 잃음으로써, 더한 고독에 갇힌 사람이 있습니다.”
둘의 기억을 자기 홀로 추억하는 것만큼 씁쓸한 행위가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실’을 두려워하는 거겠지.
떠난 이는 홀가분할지언정 남은 사람은 계속 남아, 그들 사이의 추억을 외롭게 곱씹고, 곱씹고 곱씹을 수밖에 없거든.
그녀가 어이하여 기억을 잃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을 잃음으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던 알렉시스를 그 시간에 버려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건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가요?”
“저는 찾아야 합니다.”
말로 확실히 내뱉은 순간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그래. 그녀는 찾아야 했다.
무조건.
그 기억 속엔 그녀의 친어머니도 있겠지.
그러니 ‘친어머니’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도 훨씬 더 쉬울 터다.
알렉시스도 있겠지.
그녀의 기억 속보다 더 어린 알렉시스를 알게 된다면 기쁠 터.
“그러니 도와주세요.”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 ‘그녀를 부르겠답시고’ 독을 먹였고 안 먹였고는 중요치 않다.
상당히 과격한 방법이지만 일단 효과적이었기에 넘어가자.
기실 중요한 건, 대부인이 그녀의 기억에 대한 열쇠를 지고 있다는 것.
“부탁드립니다.”
세실리아는 황녀로 입적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부탁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 * *
공작저의 텅 빈 방에 도착한 세실리아는 말없이 손에 놓인 마법구를 쳐다보았다.
영상을 녹화하는 구슬.
이것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알려준 대부인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한 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이제, 작동만 하면 돼.’
그러면…… 알렉, 적어도 네 외로움은 조금이나마 줄어들겠지.
세실리아는 어느새 자신이 턱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답지 않게.
‘나 참.’
기억을 되찾는 게 뭐가 큰 대수라고.
어차피 누군가의 전기를 읽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연극이라고 여기자.
최면 같은 다독임이 도움이 되었는지, 전신이 그래도 이완되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마법구를 작동시켰다.
-사랑하는 딸.
어머니?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마법구가 비춘 영상 속에서 ‘마리사’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네가 만약 이 마법구를 보고 있다면, 그건 아마 내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겠지. 내가 의식 불명이나 그런 상태가 아니라면 이 마법구를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고 대모님께 부탁드렸거든.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어머니의 손을 잡아보려 노력했다.
고작 영상이 투영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머니.”
그녀가 나직이 불렀다는 사실을 안 걸까, 마리사가 흐릿하게 웃었다.
약간은 쓰라려 보이기도 한 미소가 입매에 어여쁘게 자리 잡혔다.
-사랑하는 딸.
짧은 침묵.
-이건 네가 내 딸이기 이전의 이야기란다.
……리본으로 은색 머리칼을 질끈 묶은 소녀가 등장했다.
* * *
까르륵대는 웃음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알렉시스는 관료들과 함께 지나치다 말고 걸음을 멈춰 돌아보았다.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하는지 바로 곁에 있던 소녀의 아버지가 황급히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딸아이가 처음으로 궁에 와본 탓에…….”
“괜찮아.”
알렉시스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딸기 모양의 리본을 정수리에 야무지게 묶은 소녀는 정말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리본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걸까.
정수리에도 큼지막한 리본이 달려 있더니 허리 양쪽에도 달려 있었다.
너무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의 뒤에 있는 관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한가득하였다.
“안녕.”
알렉시스는 몸을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황제세요?”
“네, 그렇습니다.”
옆에서 아버지가 기겁을 했지만, 알렉시스는 괜찮다고 눈짓해 주었다.
안 그래도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기 시작했다.
“우와, 만나서 기뻐요!”
“그래?”
“네에!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엄마한테 자랑할래요!”
“그래요, 자랑 실컷 해.”
“마법도 부리실 줄 아세요?”
뒤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안 돌아봐도 알 것 같은걸.
알렉시스는 그의 등에 걱정 가득한 눈초리가 휙휙 꽂히는 걸 느꼈다.
그러고는 다시 피식 웃으며 아이에게 은색 리본을 달고 있는 갈색곰 인형을 만들어 건네주었다.
커다란 인형을 본 아이가 손뼉을 짝짝 치며 즐거워했다.
“우와아아아!”
“맘에 들어?”
“네에!”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루시.”
아버지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루시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말하는 대신 총총 걸어가 알렉시스의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꼬마 레이디가 맘에 들어 하니 다행이네.”
알렉시스는 어린아이의 정수리에 달린 리본을 손으로 톡 건드려 보았다.
“폐하가 아주아주 착한 분이라고 말할 거예요.”
“아?”
“옆집에 베네딕트라고 있는데요, 걔가 만날 우리 폐하께선 언제 미칠 줄 모른다고 만날 그런단 말이에요!”
루시의 아버지고, 그의 뒤에 있는 관료고 할 것 없이 전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추락했다.
겨울의 하벨 강에 입수해도 이 정도의 싸늘함은 아닐 터였다.
몇몇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또 몇몇은 슬금슬금 발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울상을 넘어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황제 앞에서 아이를 낚아채고 튈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이.
어둡게 가라앉은 사람들 속에서 태평한 건 폭탄을 터뜨린 소녀와 그 폭탄을 맞은 당사자인 알렉시스뿐이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란.’
그는 가장 먼저 아이의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손사래 쳤다.
딸의 안위를 확신한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걸 지켜보고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안 미치실 거죠?”
“안 그러겠습니다.”
“정말이죠, 약속!”
미치진 않고 아마 죽을걸.
알렉시스는 아이의 동심을 와장창 깨뜨릴 대답을 현명하게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허리를 숙여 아이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도 걸었을 뿐.
더는 자신의 약한 신경을 버틸 수가 없는지, 황제와 감히 약속까지 한 아이를 아버지가 납치하듯 안아 들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가 엉엉 울고 싶어 하는 듯해 알렉시스는 피식 웃어주었다.
“됐어, 이래야 애지. 나 어렸을 땐 이보다 더 심했다고.”
“…….”
“…….”
“…….”
저기요. 당신은 아주 악명이 높으셨잖아요!
주변에서 그렇게 아우성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시스는 다소 해맑은 미소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폐하, 부디 지고한 빛이 뤼셍의 영광에 언제나 함께하시길. 폐하의 곁엔 승리가 함께할 것입니다.”
“고마워. 어린 레이디도 잘 가고.”
루시가 뭐라 얘기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가 잽싸게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예법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한 채 쌩 하니 도망쳤다.
알렉시스는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고, 다른 관료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여 너그러이 넘어갔다.
“……폐하.”
“응.”
알렉시스는 습관적으로 대답하다 말고 문득 소녀와 아버지가 사라진 쪽을 돌아보았다.
소녀의 정수리에 묶여 있던 리본이 환상처럼 나풀거리는 것만 같다.
아.
기억은 원래 방심한 순간에 끌려 나오는 법이다.
묻고 묻어 두었던 과거가 둑처럼 터져 나왔고, 알렉시스는 속절없이 추억 속으로 침잠했다.
세실리아, 그거 알아요?
‘어린 당신도 저렇게 리본을 묶고 있었어.’
오죽하면 난 당신이 할 수 있는 머리 모양이 그뿐이라 만날 리본을 묶는 거로 의심했었는데.
* * *
알렉시스 뤼셍은 굉장히 어린 나이에 마력을 발현했다.
아마 어머니인 마리사 뤼셍도 마법사였고, 아버지인 아르망 뤼셍도 뤼셍의 직계 중에서도 손꼽히는 마력을 지녔기 때문일 터였다.
어린 나이에 발현하면 할수록 마력 양이 클 수밖에 없다.
알렉시스 뤼셍은 ‘아르망 뤼셍’보다도 이른 나이에 발현했고, 그래서 퐁레프의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특히 그의 부모님이.
‘알렉…… 괜찮을까요?’
‘마력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이가 성년 때까지만 무사히 버티면 좋겠는데.’
그를 재워주고 난 뒤—정확히는 재웠다고 믿은 뒤—부모님께서 나누셨던 대화는 어린 알렉시스의 뇌리에 똑똑히 남았다.
그는 영리했고, 특히나 예민했다.
그래서 주변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능했고.
알렉시스는 마력을 발현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퐁레프의 다른 이들이 그를 알게 모르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멋있게 들릴 수 있을지언정 실제론 딱히 좋지 않았다.
그가 뭐라 조금 발끈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두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어머니나 아버지는 ‘평정을 유지해야 해, 알렉’이라는 말을 거의 달고 사셨고.
알렉시스는 결국 심술이 났다.
그놈의 마력이 무엇인지, 안 그래도 기분이 계속 오락가락해 짜증 나는데.
‘근데 주변 사람들까지 서럽게 만들고 앉아 있어!’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발을 쾅쾅 구르거나 ‘나 심술 났어’라는 의사 표현만 해도 곧장 아버지나 어머니가 달려오곤 했다.
황제와 황후셔서 바쁘실 텐데도 그들은 아들이 ‘성만 내도’ 달려왔다.
‘되게 귀찮네!’
그래서 어린 알렉시스는, 성도 제대로 못 내고 매번 토라진 채 있어야 했다.
방실방실한 뺨을 통통하게 부풀린 채로.
그놈의 ‘참을성’이라는 단어는 정말 귀에 딱지가 얹힐 정도로 들려왔고, 그는 ‘난 충분히 참고 있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정말이다.
그는 정말 잘 참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길면서도 또 생각보다 짧은 법이라, 그는 사람들에게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아르망과 마리사는 화를 내지 못하고 참는 아들을 걱정스럽게 지켜봐야 했다.
‘화를 내지 않는 건 안 좋단다.’
‘화를 내는 건 안 좋다면서요?’
‘정확히는…… 화 자체가 없애야 해.’
‘뭐라는 거예요……?’
알렉시스는 어떠한 상황 자체에서 왜 감정 자체를 느끼면 안 되는지를 납득하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아듣겠다.
뭐,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거겠지. 대충.
누군가가 그의 책을 찢었다!
화가 날 법한 상황이지만 화 자체를 느끼지 말라는 말씀 아니실까.
‘뭐 그럴 수도 있지, 쟤가 내 책을 찢고 싶었나 보다’ 등등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합리화하면서.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하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무서워했다.
덕분에 알렉시스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퐁레프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그가 넘어지거나 다친다면 곧장 달려와 치료하곤 했다. 그리고 다시 떠났다.
그를 경계하면서.
그가 언제 그 폭주라는 걸 할지 가늠하면서.
그렇게 아이는, 감정을 계속 쌓고, 쌓고 또 쌓고 있었다.
만약 마리사가 그를 사하라 산맥으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어린 알렉시스는 정말 폭주했을 수도 있겠다.
위험 수위에서 충분히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니.
마리사가 ‘사하라 산맥’에 대한 풍문을 들은 건 지극한 우연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하라 산맥이 마력을 흐트러뜨린다는 그 낭설에 한 번 도박을 걸어보고 싶었고, 그래서 남편과의 상의 끝에 아들을 사하라로 데려갔었다.
거기엔 그녀의 오랜 친우이자 ‘관리자’인 유페이아 헌트가 머물고 있었다.
‘유페이아에게 잠깐 부탁을 하든…… 아니면 집이라도 빌려달라고 하든 해야지.’
다만 마리사가 미처 몰랐던 건, 유페이아가 그녀 모르는 새 딸을 낳았다는 점.
아들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친구의 오두막집 문을 두드린 마리사는 새로이 등장한 소녀를 보며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벗의 딸이긴 했다.
그 신비로운 은색 머리칼을 누구에게서 물려받았겠어.
당연히 유페이아에게서 물려받았겠지.
다만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정말 놀랐던 건.
‘안녕하세요.’
예의 바르면서도 냉담하게 인사한 소녀가 너무 예뻐서.
유페이아도 예쁘긴 했지만 정석적인 미인은 아니었다.
오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쪽이었지.
하지만 그녀의 딸일 저 소녀는─아버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좋은 점만 쏙쏙 물려받았는지, 가히 압도적인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외모면 커서는 진짜 기가 질릴 수준이겠구나.
그렇게 확신할 만큼.
알렉시스도 정말 잘생겼는데…… 일단 저 소녀는 보자마자 박수를 짝짝 칠 정도였다.
‘어, 안녕. 유페이아의 딸이니?’
‘……네.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세실이라고 부르면 될까?’
‘애칭을 물어보시는 거면 시씨예요.’
‘만나서 반가워, 시씨.’
세실리아가 눈을 또로록 굴리더니 일단 다시 공손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만…… 혹시 누구세요?’
그제야 마리사는 자신이 어린아이의 외모에 홀려 제 소개조차 못했음을 깨달았다.
‘마리사. 뤼셍의 황후인 마리사 뤼셍이란다. 요 아이는 내 아들인 알렉시스 뤼셍이고.’
‘……아아. 네.’
소녀의 얼굴엔 대충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권태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유페이아는?’
‘떠나셨어요. 아마 다른 시간대로.’
‘홀로 있는 거니?’
‘네.’
흠. 이건 이것대로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관리자’인 유페이아가 ‘떠나는 걸’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사는 머리를 요리조리 헝클어뜨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친우의 딸을 예상치는 못했기 때문에 지금 꽤 많이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그런데…… 어머니를 찾아오신 건가요?’
‘아. 그. 실은 당분간 아들을, 잠깐, 부탁할 수 있을까, 물어보려 했었지.’
‘여기에요?’
세실리아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고, 마리사는 마력 폭주와 사하라 산맥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줘야 했다.
대충 사하라 산맥에 머무르면 마력이 흐트러질 수 있단다…… 까지 설명해 주니 세실리아가 아까보다는 성의 있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혹, 혹시…… 시씨.’
‘예.’
‘혹시 괜찮다면 말이야…….’
마리사는 흘끔 소녀의 눈치를 살폈고, 세실리아가 심드렁하게 속내를 짚었다.
‘네. 여기에 머무르게 해주면 안 되냐고요?’
‘으응.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말해 보렴. 다 해줄게, 내가. 진짜야.’
세실리아가 손을 뻗어 제 정수리 위에 자리한 리본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리본의 모양을 바로잡으려는 행위 같았는데, 보는 사람의 눈엔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어떻게든 안 될까, 시씨?’
‘어…….’
세실리아가 눈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리더니 알렉시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엄마와 난생처음 보는 여자애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관망하던 알렉시스는 다소 삐딱한 눈으로 소녀를 마주 보았다.
제 속에 들어 있는 신랄함을 숨기며.
‘뭘 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엄마한테 혼나겠지.
칫.
‘뭐, 떨구고 가실 거면 상관은 없는데요.’
‘정말?’
마리사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새, 세실리아가 대수롭잖게 덧붙였다.
‘제가 애 키우는 일엔 소질이 없어서.’
‘……괜찮아, 괜찮아. 머무르게라도 해준다니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구나.’
‘아니. 뭐. 그게 뭐가 대수라고요. 사고만 안 치면 됩니다.’
‘사고 안 쳐!’
알렉시스는 앙칼지게 반항했고.
‘그래야지.’
세실리아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무시하는 쪽이 어째 그를 슬금슬금 피하는 퐁레프의 사람들보다 더 짜증 났다.
그래서였다.
심술이 치솟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꾸역꾸역 내뱉은 이유는.
‘숲속의 마녀 같아. 못생긴 게.’
마리사가 곁에서 기겁하든 말든 알렉시스는 있는 힘껏 성질을 부렸고.
‘애새끼, 넌 눈이 삐었구나?’
세실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확실히 저 소녀가 못생긴 건 절대 아닌지라 알렉시스는 마지막 말만은 분하게도 받아치지 못했다.
마리사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는 사실을 알긴 할까.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칫.’
한편 세실리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마리사를 돌아보았다.
‘맡기고 가세요, 아주머니.’
‘애가, 평상시엔 착한데, 오늘따라 왜 이럴까……. 미안해, 시씨.’
‘네.’
‘정말이야…….’
'원래 저 나이 대의 애는 다 애새끼죠.’
세실리아가 신랄한 건지 다정한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네었다.
‘저도 저랬어요.’
응. 그랬을 것 같아.
알렉시스는 속으로 심술궂게 대꾸했다.
그가 살짝 놀랐던 건 세실리아의 살림 솜씨가 정말 좋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요리를 뚝딱뚝딱 만들었고, 약간 큰 오두막집을 아주 예쁘게 정돈했다.
그러기 위해 하루를 전부 바쳤다.
‘여기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알렉시스는 소파에서 뒹굴다 말고 질문했고.
‘아서라. 함부로 나가면 길 잃어버린다.’
세실리아는 못내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조금, 사실 조금 많이, 자존심이 상했다.
‘너무하잖아!’
퐁레프의 사람들은 그를 아주 대단하고 무서운 존재처럼 모셔서 짜증 났는데 눈앞의 소녀는 아예 그를 빗자루만도 못한 취급을 해서 열 받았다.
‘……내가 뭐 어때서!’
그래서 그는 가끔 심술궂은 장난을 쳤다.
소녀가 가지런히 정리한 책장의 책을 엉망진창으로 꽂아놓는다든지, 화분을 몰래 숨겨놓는다든지, 뭐 그런 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께선 늘 그보고 ‘분노’ 자체를 없애라고 하셨다.
세실리아도 그런 쪽인 걸까.
그녀는 알렉시스가 심술을 부린 모습을 목격하고도 어깨를 으쓱하고는 넘어갈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원상태로 만들어 놓았고.
‘대체 어떤 성격이길래 저게 가능하지?’
장난에 장난을 거듭해도 상대가 일절 반응을 안 하면 흥미가 떨어지는 법이다.
알렉시스는 결국 소녀를 건드리는 걸 포기하고는 그냥 사하라 산맥으로 나섰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그가 슬슬 밖으로 나돈다는 걸 눈치채고는 세실리아가 경고했다.
약간 ‘넌 되게 귀찮은 존재고 나한테 일 또 떠넘기기만 해봐’라는 어조라는 것을 눈치챈 알렉시스는 어린아이답게 울컥했다.
‘내가 뭐!’
날 그렇게 귀찮아하는 넌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
그는 속으로 연신 구시렁거리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세실리아의 엄명을 대차게 어겼다.
평상시는 오두막집이 보이는 거리 안에서 놀았는데 어쩐지 그날따라 더 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사하라 산맥은 생각보다 재밌는 곳이었다.
알렉시스는 버섯과 딸기 그리고 다양한 동물들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보내었다.
가끔 금빛 나비 떼들이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정경이었다.
‘산맥은 예쁘다.’
어차피 오두막집엔 재미없고 딱딱한 여자애만 있는데…….
특히 그를 거의 자연 조형물 내지 가구 취급하는 여자애만 있는데!
‘앞으로 난 여기서 놀아야지!’
알렉시스가 비장하게 다짐하며 몸을 척, 돌린 순간이었다.
지극히 ‘마법사’답게 그는 방향을 잃었고, 오두막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주제에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반쯤 겁을 먹은 채 계속 돌아다니는 동안 태양과 시간은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점심에서 저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마침내 밤으로.
태양 역시 정수리에서 서쪽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숲의 꼭대기 아래로 잠겨 완전히 빛을 잃어버렸다.
이젠 그의 눈동자와 비슷한 색으로 변한 하늘을 쳐다보며 알렉시스는 공포에 질렸다.
‘어떡하지?’
부모님께서 읽어주시는 동화에 보면 가끔 숲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물론 그런 동화를 믿을 만큼 그가 절대 어리숙하진 않지만, 근데, 근데…….
무섭긴 해서.
알렉시스는 다시 한두 시간 열심히 쏘다니며 오두막집을 찾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휙 넘어졌다.
‘손바닥이 쓸려 아파.’
그는 작게 훌쩍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그를 귀찮은 짐 덩이 취급하는 세실리아는 그를 데리러 오지 않을 테고……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살아남지?’
그, 그래도 모닥불은 피울 수가 있을 듯한데.
‘아무거나 피우면 되려나?’
알렉시스는 코를 훌쩍이며 일단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긁어모았다.
적당한 마법진을 그려서 불꽃을 피워냈지만, 의외로 모닥불 자체를 만들어 내는 건 너무나 버거웠다.
요령이 있다면 당연히 쉬웠겠지만 그가 요령 자체를 익혔을 리 없었다.
갓 발현한 마법사인 그는 노력하고 노력해서 결국 반쯤 울 지경이 되어서야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하늘 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알렉시스는 우울해졌다.
연기가 하필 은색을 닮아서 세실리아 헌트 생각이 난다.
그 머리칼이 예쁘긴 했는데…….
‘……하긴, 내가 너무 유치하게 장난을 쳤나?’
본인이 유치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소년은 더욱 시무룩해졌다.
나를 짐짝 취급해서 너무 짜증 났단 말이야, 라고 하기엔 세실리아는 그에게 피해를 준 게 없었다.
그는 세실리아의 신경을 있는 대로 콕콕 찌르려 들었지만.
‘……만약에 만난다면 사과해야지.’
만날 수는 있나? 근데 나 진짜 어떡해?
이동 마법진은 모르는데. 마법 까딱 잘못했다간 몸이 절반으로 분리된다고 엄마 아빠가 절대로 금지한 마법이잖아.
‘그럼, 나,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해?’
알렉시스는 어린아이다운 걱정에 빠져 모닥불의 열기에 손을 쬐었다.
조금 따뜻해졌을까, 그는 다소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횃불을 만들어 냈다.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사하라 산맥의 마력 폭풍은 그의 방향 감각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인데다가 사하라 산맥에 왜 왔는지조차 잘 모르는 알렉시스는 위의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횃불을 들고 이리 콩콩, 저리 콩콩 뛰다 말고 넘어질 수밖에.
하필 축축한 이끼 부분에 넘어진 탓인지 안 그래도 미약하게 타던 횃불이 결국 꺼졌다.
알렉시스는 울상이 된 채로 버둥거려야 했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나?’
애초에 말 잘 들을걸.
배고파. 그리고 슬퍼.
‘나 서러워…….’
안 그래도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글썽 달렸다.
어린 알렉시스는 ‘어린애처럼 울기 싫은데’ 생각하면서도 히끅거리며 애써 눈물을 훔치려 했다.
‘멀리도 놀러 나왔네.’
평온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를 휙 끄집어 올렸다.
반강제로 서게 된 알렉시스는 가장 먼저 태양처럼 쏟아져 내리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만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끄트머리가 살짝 깨져 있었다.
그래서 보았다.
세실리아 헌트의 마음속 어딘가에 깃들어 있던 걱정과 안도를.
알렉시스는 눈을 부릅뜬 채로 소녀에게서 처음 본 ‘인간적인 온기’에 빨려들었다.
그뿐일까.
소녀는 그냥 빛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눈이 태양을 닮았다면 머리칼은 달을 닮았다.
휘영청 떠오른 가장 환한 보름달조차도 저렇게 반짝거리는 은색을 지니진 못할 터였다.
알렉시스는 얼어붙은 채로 올려다보며 세실리아가 평온하게 고개를 까딱 기울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을 듣지 않았다며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오히려…….
‘……맹랑한 애새끼.’
세실리아의 눈꼬리가 문득 휘어지더니, 퍽 재밌다는 듯한 미소가 입매에 아롱다롱 맺혔다.
그녀가 바로 코앞에서 휙 무릎을 꿇고는 등을 드러냈다.
‘업혀.’
‘하, 하지만…….’
‘멀리 나왔으니 피곤할 거 아냐.’
알렉시스는 허기와 피로 속에서 허덕이다가, 결국 얌전하게 소녀의 등에 업힐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으로 그를 받친 세실리아는 가장 먼저 그가 처음 만들어 낸 모닥불로 가서 불을 완전히 짓밟아 껐다.
그러고는 방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척척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갈 땐 어려웠던 길은 세실리아가 걸으니 쉬웠다.
몇 걸음 옮긴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저 멀리 오두막집이 보이고 있었다.
‘……나, 안 혼내?’
그가 시무룩해져서 묻자, 세실리아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재밌어하는 희소인데 어째 메마르게 느껴지는 걸까.
알렉시스는 그녀의 목을 더 끌어안았다.
‘됐어, 애들은 원래 사고 치면서 노는 거지.’
‘자기도 애면서.’
‘너보단 나이 많다, 얘.’
‘연장자 대우 해줘?’
‘응.’
‘알았어, 누나.’
알렉시스는 얌전하게 호칭을 붙였고, 세실리아가 다시금 실소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못 찾으면 어쩌지, 하고 진짜 걱정했어. 그러니 내일부터는 너무 멀리 놀러 가진 말아주라.’
‘걱정했어?’
‘그럼 걱정하지?’
나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더니!
적어도 세실리아에게 그가 아무것도 아닌 무기질이나 공기덩어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알렉시스는 비교적 신이 났고,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얌전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쨌든 알아들었냐고. 너무 멀리 가진 마, 알겠어?’
‘내일부턴 딱 달라붙을게!’
‘어딜 달라붙어?’
세실리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물론 그녀는 바로 다음 날 답을 알 수 있었다.
어디에 달라붙긴.
알렉시스는 세실리아에게 딱 달라붙었다.
세실리아 헌트는 나름 귀찮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받아주었다.
적어도 그저 그런 바람 덩어리로 취급당하진 않는다는 생각에 알렉시스는 대단히 만족했다.
그래서였을까.
마리사가 그를 데리러 왔을 때, 그는 세실리아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같이 퐁레프로 가자는 암묵적인 요구였지만 어머니도, 세실리아도 왜곡되게 해석한 듯했다.
‘어머, 시씨. 알렉이 널 이토록 따를 줄 몰랐는데.’
‘저도 몰랐습니다.’
‘그…… 사실 지금 알렉의 마력이 굉장히 안정되어 보이는데.’
‘예.’
‘조, 조, 조, 금만 더 머무르게 해주면 안 될까?’
세실리아의 금빛 눈동자가 스르륵 흘러내려 그에게로 고정되었다.
사실 ‘이제 애새끼 돌보기 귀찮아요’라는 식으로 거절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치밀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답했다.
‘네.’
‘고마워, 시씨! 뭐 필요한 건 없니? 언제든지 말해!’
마리사가 뛸 듯이 기뻐하는 동안, 알렉시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은발 소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착각일까?’
세실리아는 어째 그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안도하면서 기뻐하는 느낌이었다.
워낙 표정에 변화가 없어 별다른 티가 나진 않았지만.
어리광부리듯 소매를 잡아당기자 세실리아가 순순히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아.’
알렉시스는 벼락 맞듯 깨달았다.
세실리아는 ‘누군가가 떠나는 것’에 약했다.
‘누군가가 떠나는 걸 보기 싫다면 본인도 함께 떠나면 그만이지!’
알렉시스는 어린아이답게 아주 깔끔하고도 단순하게 생각했고, 다음번에 어머니께서 데리러 오셨을 때 다시 세실리아의 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안 돼, 알렉. 이제 진짜 가야 한단다. 너 교육도 받아야지!’
‘그렇대. 가라.’
‘같이 가.’
같이 가자는 소리가 어째서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알렉시스는 지르고 보았고, 세실리아는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눈을 껌벅였다.
‘나?’
‘응.’
‘난 우리 엄마 기다려야 하는데?’
그 말에 알렉시스의 세상이 쿠쿠쿵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알긴 할까.
세실리아가 그의 머리칼을 대수롭잖게 쓰다듬고는 손을 떼어버렸다.
‘잘 가라, 그럼.’
정말 너무하게도, 미련 하나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아아아악! 짜증 나!’
그렇게 알렉시스 뤼셍은 차였다.
물론 한 번 차였다고 해서 포기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알렉시스는 열심히 합리화한 뒤, ‘성실하게 공부하고 화를 많이 내지 않으면 사하라로 놀러 가자’라는 어머니와의 약속 조건을 수행하려 노력했다.
많이 참고 많이 공부한 덕택에 그는 비교적 빨리 사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떠났다가 돌아올 때까지도 세실리아 헌트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그의 엄마는 그가 찾기만 하면 늘 달려오시는데 소녀의 어머니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딸이 그렇게나 기다리는데도 안 돌아오는지 모르겠다.
‘왔어?’
맨 처음 그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던 것과는 달리, 세실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퍽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무기물에서 겨우 탈출한 존재에서 ‘꽤 의미 있는 존재’로 변했다는 뜻 아닐까!
알렉시스는 상당히 신이 났다.
소녀가 어머니 없이 상당 기간 홀로 있다는 점이 맘에 걸리는지, 그뿐만이 아니라 마리사 역시 세실리아를 아주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가끔은 그녀가 좋아하는 통속 소설을 세실리아에게 건네주곤 했다.
‘짝사랑에 실패하는 남자 조연이 소꿉친구라는 설정은 조금 진부하지 않나요…….’
‘진부한 게 매력이란다, 시씨!’
‘아니. 근데 남자 주인공들은 왜 다 까칠한가요?’
‘그게 중요한 거야! 쉬운 남자는 매력 없잖니!’
‘성질만 더러워 보이는데요…….’
아마 마리사야말로 그녀와 통속 소설을 같이 읽어줄 그런 친구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세실리아는 해당 소설을 한 세 권 읽고 난 뒤 독서를 멈추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다 그게 그거 아닌가…….’
내가 이런 소설과 안 맞는 건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알렉시스는 모르는 척했다.
대신 그는, 어머니를 졸라 배운 핫 초코를 타는 방법을 활용하여 그녀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주었다.
‘어때?’
‘맛있어.’
세실리아는 코코아를 홀짝이며 다시금 독서에 빠졌다.
겨울 햇빛이 어룽거리며 소녀를 세심하게 감쌌고, 이른 아침 특유의 그 눈부신 정경을 알렉시스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언제까지고 이런 시간이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유페이아가 이토록 오래 시간을 비운 건 처음 아니니, 시씨?’
‘사실 그렇긴 해요.’
‘흐음. 시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을까?’
‘……모르죠. 최대한 걱정은 안 하려 합니다.’
마리사와 세실리아는 가끔, 아주 가끔, 세실리아의 어머니인 ‘유페이아 헌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알렉시스는 퍼즐 맞추듯이 단서를 끼워 맞춰 진실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다.
유추해 보면…….
일단 세실리아의 어머니, 유페이아 헌트는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마법사, 즉, 관리자인 듯했다.
어느 시간대, 어느 공간으로 이동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으로 홀로 떠난 바람에 세실리아를 외롭게 남겨두게 되었고.
이번 여행은 길어지는 듯해서 어머니와 세실리아가 둘 다 걱정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만.
‘저한텐 그 능력이 없거든요. 관리자들은 전부 은발에 푸른 눈인데, 보시다시피 전 푸른 눈은 아니라서…….’
세실리아에겐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약간 슬퍼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못 해서겠지.
알렉시스는 풀이 죽어, 얼굴 알지도 못하는 한 여자에게 질투심을 곱씹었다.
그래도 그는…… 어어어어어엄청 이기적으로 생각하자면 세실리아에게 이동 능력이 없어서 기뻤다.
세실리아는 유페이아를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을지언정 알렉시스에겐 그럴 자신이 없었거든.
‘누나의 엄마가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세실리아가 그래도 너무 근심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아주 착하게 기도했다.
그렇게 돌아오시면 세실리아 누나랑 누나의 엄마랑 전부 퐁레프로 와서 다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긴 했다.
뭐, 유페이아 헌트까지 온 건 아니었어도 일단 세실리아 헌트는 ‘세실리아 뤼셍’이 되어 그와 함께 퐁레프에 살게 되었으니.
알렉시스는 과정에서 가장 끔찍했던 부분을 건너뛰었다.
그 부분은, 성년이 된 지금마저도 떠올릴 때마다 비참해지고 화가 날 뿐이라서.
‘유페이아 헌트.’
세레인과 샤르텐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알렉시스는 살짝 더 짜증이 치밀었다.
여자는 매번 알렉시스를 약 올리듯이 등장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너무나 간절히 찾았던 딸을 찾기는커녕 그에게만 대화를 걸었지.
‘당신에게 세실리아는 대체 뭐였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에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알렉시스는 심장 부근에 느껴지는 뻐근한 격통에 겨우 화를 잠재웠다.
그의 옆에선 관료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의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난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그의 인사에 대신들이 전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알렉시스는 반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그의 침실로 향했다.
확실히, 유페이아 헌트에게 세실리아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적어도 그에게 세실리아는 그의 세상이었다.
‘……어쩌면 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에게 반했을 수도.’
그 얼굴을 감히 ‘못생겼다고’ 표현할 정도로 성격 비틀린 꼬맹이이긴 했지만 말이야.
‘당신은 멋모르는 철없는 어린애의 눈에도 예쁘긴 했어.’
그렇게 말하면 세실리아는 둘 중 하나의 반응을 취하겠지.
헤프다고 말하며 새초롬히 쏘아보거나, 아니면 ‘나도 알아’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머리를 휙 어깨 너머로 넘기거나.
둘 중 어떤 반응이든 귀엽고 사랑스러울 터.
저 멀리 문이 보이자마자 알렉시스는 거의 뜀박질을 했다.
지금 당장 세실리아가 필요했다.
이젠 그를 비교적 똑바로 담아주는 금색 눈이. 그를 볼 때마다 감정을 담은 채 변하는 표정이.
그를 향해 뻗어오는 나긋한 팔과 부드럽게 안겨 오는 몸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했다.
콰앙!
너무 큰 소리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던 때, 알렉시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텅 빈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서류들을 확인할 틈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목을 졸라맨 뒤 척추를 후려쳤다.
설마…….
설마, 절대로 안 된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잡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내 곁으로 끌고 왔는데.
‘절대 안 되지.’
알렉시스는 반쯤 이를 갈 듯이 통로로 뛰어 들어갔다.
통로에도 없다.
‘낮잠을 주무시는 건가?’
아, 어쩌면 그럴 수도.
알렉시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끝내 발견한 건 아무도 없는 텅 빈 침실이었다.
곧장 이성이 날아갔다.
일방 각인이 없었다면 당장 폭주해도 이상치 않은, 그 정도의 광기였으므로.
이어 퐁레프, 아니, 황궁을 넘어서 생-뢰크의 사람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쾌청하던 하늘이 새까맣게 어둑해지는 풍경을 목격해야 했다.
콰쾅.
낙뢰가 연신 떨어져 내렸다.
* * *
“아.”
세실리아는 마법구의 작동을 끄고 머리를 감쌌다.
머리를 쪼갤 듯한 두통 사이로 과거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기억이, 나.’
네가 친 소소한 장난들이 기억 나. 너무 귀여웠었는데. 널 알게 모르게 놀린 걸 알고 있을까.
기억이…….
피가 역류하여 두개골과 뇌를 전부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세실리아는 휘청이다가 결국 쓰러져 바닥을 짚었다.
너무 어지럽다. 이명이 삐익 울리면서 세상이 녹아내렸다. 시야가 명멸했고 새까만 풍경 앞으로 드러난 건.
‘어머니!’
오랜만에 돌아온 유페이아가 너무 반갑고 그리워 한달음에 달려가서 품에 뛰어들었었지.
어머니의 품이 비교적 냉담하다는 사실까지 잊은 채.
그날 저녁 그들은 1년하고 4개월 만에 다시 저녁 식사를 같이했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실리아는 기뻤다.
유페이아는 언제나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는 늘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순간이 너무나 소중할 수밖에 없지.
그녀는 재잘거리며 마리사가 선물해 준 통속 소설 이야기, 알렉시스 뤼셍 이야기 그리고 사하라에서 일어났던 재미없는 기상 현상들을 모조리 토해 내듯 알려주었었다.
‘알렉시스?’
‘네. 그, 어머니의 친우 분이신 마리사 아주머니, 아니, 폐하의 아들이요. 그쪽도 뤼셍의 직계여선지 머리가 새까매요.’
‘알렉시스. 블랑슈.’
‘네?’
‘그리고 어쩌면 티에리까지.’
갑작스러운 이름의 향연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페이아가 나직이 속삭였었다.
‘외워두렴.’
‘네?’
‘통속 소설이랑 엮어서 외우든가.’
‘아, 알렉시스의 짝이 블랑슈인가요?’
‘아니. 걔 짝은 티에리.’
지금 우리가 뭘 얘기하는 거죠?
알렉시스에게서 통속 소설은 왜 튀어나왔어?
‘설마 내가 방금 통속 소설 얘기를 꺼내서?’
블랑슈는 누구래? 티에리는 또 누구고?
세실리아는 못내 당황하여 그런 생각을 곱씹었지만, 이내 그럭저럭 합리화를 시작했다.
어머니께선 오랜 여행을 다녀오신 날이면 늘 이해가 안 가는 말씀을 줄줄 늘어놓곤 하셨다.
지금도 그러신 모양이지.
‘블랑슈는 장밋빛 문양을 가지고 있어. 갖고 태어났어.’
‘아아. 네.’
‘장미의 달에 태어났고.’
근데 그게 대체 왜 중요하죠?
세실리아는 그 질문을 연신 곱씹다가, 어머니께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 어조로 티에리의 외양까지 묘사하자 도저히 참지 못하였다.
‘어머니, 근데 그게 왜 중요한가요?’
‘……그래도 네 곁에 있어줄 애들이거든.’
‘네?’
‘네가 뭔 짓을 하고 뭔 짓을 당해도 네 곁에 있어줄 애들이더라고.’
‘어, 전 사하라에 계속 남아 있을 텐데 뭔 일이 생길까요? ……전 어머니만 곁에 있으면 돼요.’
유페이아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비웃는다기보단 자조적인 실소라 세실리아는 공연히 죄송해졌다.
‘어머니, 음, 그러니까, 부담을 드리려는 건 아니고…….’
‘그러게. 나도 그냥 네 곁에만 있으면 더 나았을까.’
‘…….’
‘이딴 운명 따위 벗어던지고…….’
세실리아는 조오오오금 서운해지긴 했다.
평상시는 2주, 길어봤자 한 달 정도만 사라졌던 어머니께서 1년하고도 4개월 만에 돌아오셨는데, 도저히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정말 그리워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투정밖에 안 되겠지.
알고 있다.
그녀에겐 유페이아를 찾으러 갈 능력도, 그녀의 일을 대신해 줄 능력도 없다는 것을.
관리자의 능력은 둘.
은발과 연결된 ‘기억 삭제술’과 푸른 눈과 연결된 ‘시공간 조작술’이다.
세실리아는 푸른 눈이 아닌 은발을 물려받았고, 기억 삭제술을 아주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었다.
완전한 관리자인 어머니만큼 능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외딴곳에서 홀로 살다 보면 ‘이 능력이 대체 왜 중요하며 어디에 써먹는 거지’ 수준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지금까지 세실리아는 그 능력을 딱 한 번 사용했다.
그녀를 뒤쫓아 오는 곰에게.
어쨌거나 그녀에겐 시공간 조작술은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릴 수 없다는 소리였다.
‘시씨.’
조금 시무룩해져서 시선을 떨구고 있었을 때, 어머니께서 그녀를 부르셨다.
‘미안해.’
‘네?’
‘미안해, 딸.’
* * *
당신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 없던 당신은, 마지막은 미안하다고 하며 떠났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했을까?
당신이 곧 내게 저지를 일이?
아니면 날 끝끝내 사랑하지 못했다는 게?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여기서 ‘이별’은 시공간을 거슬러 이동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의 이별은…….
* * *
유페이아 헌트는 본래 시간대로 돌아온 날 밤, 자는 딸아이의 침대 바로 옆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잠에서 깨어난 세실리아가 가장 먼저 본 건 어머니의 시체였던 터라 소녀는 넋을 놓은 채 하염없이 죽은 이만을 바라보았다.
시체 옆에서, 나흘 내내.
기습 방문을 한 마리사와 알렉시스가 기겁하며 그녀를 끌어낼 때까지…… 계속.
알렉시스에 의해 반쯤 끌려 나온 세실리아는 픽 쓰러져 기절하며 오래오래 잠들었다.
드디어 깨어났을 때 소녀는 제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은 ‘세실리아’를 황녀로 입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때부터 기억이 다시 시작되었지…….’
세실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왜 그녀가 기억을 잃었는지 되새겼다.
아마 그녀가 스스로 기억을 지웠을 터다.
친어머니와의 마지막이 좀 끔찍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알렉시스가 왜 그녀의 기억을 되찾는 것에 대해 달갑잖게 생각했는지도 알겠다.
‘마지막 순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릴까 걱정되었겠지.’
절대로 좋은 기억이 아니니까.
세실리아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래, 이는 알렉시스가 왜 ‘유페이아 헌트’의 존재를 알면서 끄집어내지 않았는지와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는 바닥을 짚은 채 허물어져 있던 자세에서 벗어나 휘청휘청 일어섰다.
‘생각을 정리해야…….’
콰쾅!
갑자기 들려온 거대한 소리에 세실리아는 펄쩍 뛰듯이 놀라며 발코니로 뛰쳐나갔다.
폭우가 세차다.
비단 퐁레프뿐만이 아니라 생-뢰크 전체가 어마어마한 비에 휘감겨 있었다.
차마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거칠었으며,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물을 퍼와 양동이째 쏟아 붓는 것처럼.
간간이 보랏빛 낙뢰가 내리쳤다.
어두컴컴한 공간이 망치로 얻어맞듯 갈라지는 느낌.
세실리아는 황망하게 입술을 달싹이다, 이번엔 낙뢰가 비처럼 쏟아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생-뢰크 전체가 폭우로 떠내려가겠어!
“알렉!”
그녀는 목놓아 부르짖었다.
“……알렉!”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모든 장대비와 벼락이 멈추었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하여 새까맸지만, 적어도 세상이 붕괴한다는 착각까지 일게 만드는 비와 번개는 그치었다.
세실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위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샤르텐에서 그녀를 데리러 올 때처럼, 남자가 유유하면서도 고고하게 하늘을 짓밟고 내려오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감정으로 번득이는 눈동자가 그녀만을 정확히 담았다. 박제된 동물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며.
세실리아는 그저 올려다보았고, 알렉시스는 그저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들 사이의 시간이 멈추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더라도 그들의 감정은 영원할 것처럼.
어차피 그들은 언제나 영원 같은 찰나를, 찰나 같은 영원을 살고 있었다.
“……알렉.”
세실리아가 먼저 입을 떼며 속삭였고, 알렉시스는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감정을 토해 낼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쩌면, 그동안 인내하고 참고 또 삼켜 왔던 남자는 정말 무슨 감정을 표출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겠다.
세실리아는 그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선수 쳤다.
“나 네 책상에 쪽지 남겨 놨어.”
알렉시스의 눈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도망치려 한 거 아니야. 정말이야.”
“……왜?”
뒤이어 들려온 반문이 생뚱맞아 세실리아는 멀거니 쳐다봐야 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라서.
“왜 도망 안 쳤어?”
젖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비가 멎었어도 공기 중에 남은 수분이 엄청나, 바람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흠뻑 젖었다.
옷감이 반투명하게 변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세실리아는 당황하여 입술을 연신 달싹였다.
‘왜 도망 안 쳤어?’
왜 안 치다니.
내가 말했잖아. 난 네 곁에 있어주고…….
“됐어요.”
알렉시스가 발코니 아래로 쏟아지듯이 안착하며 속삭였다.
“안 궁금해.”
뭐라 항의하기도 잠시, 입술이 집어삼켜졌다.
남자는 비를 몰고 온 만큼 그 역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피부는 서늘한데 왜 그녀를 집어삼키려 드는 혀만은 뜨겁고도 부드러울까.
세실리아는 손을 뻗어 남자의 목을 껴안고는 그 너머의 등에 손톱을 박았다.
자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버릇이었다.
고치긴 고쳐야 할 습관인 게, 그녀가 자국을 만들어 낼 때마다 남자는 더 좋다는 듯이 난폭해지곤 해서.
“……아, 알렉!”
그녀가 호흡이 부족하여 어질어질할 때까지 알렉시스는 참 질기게 탐했다.
축한 천은 더는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
시각적으로 가리지도 못하였으며, 촉각적으로 막아내지도 못했다.
천 위를 훑는 남자의 손길이 지독하게 색정적이었다.
남자의 엄지가 그녀의 목덜미에서부터 상의로, 젖은 궤적이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방랑했다.
“알렉.”
“세실…….”
“그게 아니잖아.”
세실리아가 속삭이자마자 알렉시스가 손을 흠칫 떼어내고는 쳐다보았다.
세실리아는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아, 그가 제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알렉.’
있지, 너는 모르겠지만 어린 넌 내게 너무나도 큰 의미였어.
늘 텅 빈 집을 홀로 지켰다.
어머니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내일은 오실지 모레는 오실지 궁금하면서.
그리고 간혹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면은 내일은 떠나시지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떠나시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유페이아 헌트는 ‘나쁜 엄마’는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겐 딸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명이 세계 전체를 위한 거라 세실리아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넌 항상 나만 봤어.’
알렉시스가 오면서부터 세실리아는 늘 혼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깊은 밤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도 고독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롱고롱 잠든 소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세실리아 역시 겨우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를 데려가려 마리사가 찾아왔을 때.
‘네가 남겠다고 고집을 부린 게…….’
내게 어떤 의미였을지 넌 모르겠지.
알렉.
아마 난.
“……시씨.”
기나긴 세월을 건너 마침내 남자는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애칭을 불렀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고, 알렉시스는 자신이 방금 물어뜯었던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눅눅하게 젖은 천은 이제 방해일 뿐이었다.
알렉시스는 세실리아를 안아 들었고, 그 잠시도 못 버티겠다는 듯이 여자가 입술을 붙였다.
며칠 굶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들은 허겁지겁 서로를 먹어 치웠다.
끝의 끝에 다다른 촛불이 마지막으로 가장 강렬한 꽃을 피워낼 때처럼.
어느새 그들이 있던 레니앙 공작저는 사라지고 다시 퐁레프의 침실에 도착해 있었다.
침대까지 갈 정신과 여유 따위 없었다.
서로의 손길에서 젖은 옷가지는 사라지고 그들은 다시 갈급하게 서로를 찾았다.
“시씨…….”
서로에게 여유가 없어진 만큼 세실리아는 더욱 아득하고 버거운 느낌을 견뎌야 했다.
그녀는 할딱이면서 이리저리 곱은 발끝으로 허공을 찼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반쯤 접듯이 짓누르고 있었다.
“시씨.”
“응.”
밀려나지 않으려 양탄자에 손을 짚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바닥에서 움직였고, 알렉시스가 어느 순간 그녀의 발목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세실리아는 미끄러지듯이 그의 바로 곁에 안착했고, 남자는 다시 저가 새긴 붉은 꽃들을 찾았다.
물기에 흠뻑 젖었던 만큼 온몸이 눅눅했다.
손가락은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는 부분들과 완벽하게 마른 부분들을 전부 빠짐없이 더듬었다.
“알…… 알렉.”
세실리아가 헐떡이며 부른 순간.
알렉시스가 그녀를 낚아채듯이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세실리아가 크게 홉뜬 눈으로 정신없이 도리질 치는 걸 알긴 할까.
그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이끌어 어깨를 짚도록 했다.
“영민하시잖습니까.”
반쯤 잠긴 목소리가 귓가 바로 근처에서 울려 퍼졌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단어들이 괜히 그녀의 고막에 달라붙은 느낌이다.
“……배움도 빠르시고.”
그녀의 고집도 그의 고집 만만찮게 강하다고 믿는데, 어째 이런 상황에선 늘 지는지 모르겠다.
세실리아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곤 훌쩍였다.
“너, 무해…….”
너무, 벅찬데…….
히끅거리며 속삭이자, 알렉시스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옴폭 들어간 곡선을 따라 검지가 천천히 움직였고, 세실리아는 숨을 집어삼키다 결국 다시 움직여 버렸다.
“잘 배우고 계신데요?”
“뭐라는 거야…….”
세실리아는 결국 젖은 얼굴을 알렉시스의 어깨에 처박아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시스는 매정할 만큼 도와주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제 나락까지 전부 까발리고 나서야 지쳐 쓰러지듯 허물어졌다.
알렉시스는 여전히 자비가 없었다.
세실리아가 울며 고개를 젓는데도 기어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았으니. 그녀를 추락시켜 버리는 힘은 참 잔악하기 짝이 없었다.
“아!”
“버티세요.”
더는 못 버틴다고 애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이 남자가 씨알이라도 들을까.
세실리아는 혼탁해진 머릿속을 더듬으며 생존의 방법을 모색했다. 한번 붙은 불이 쉽게 꺼지지 않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
“독하시잖습니까.”
알렉시스가 장난치듯 속삭였고, 마지막 말이 너무 얄미워 세실리아는 이를 세워 남자의 귓불을 콱 깨물어 주었다.
물론 역효과였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방향대로 해주긴커녕 정반대의 짓거리나 일삼았으니.
대가는 그녀가 치렀으니 되었다고…… 하자…….
* * *
다음 날 새벽.
세실리아는 움찔하며 깨어났다가, 몸을 반사적으로 말며 신음했다.
여전히 있다.
어젯밤 죽어라 한 것 아니냐고!
거의 남의 몸을 반으로 빠갰으면서!
세실리아는 얼굴을 팔로 가린 채 끙끙거려야 했다.
알렉시스가 간만에 잠든 만큼 깨우지 않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미친, 놈이.’
세실리아는 결국 오랜만에 천박한 욕설들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로 조심조심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남자의 팔을 간지럽히거나 짚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한 번, 두 번.
그녀가 낑낑거리며 겨우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을 때.
“떠나진 마시라 했잖습니까.”
알렉시스의 스산한 목소리가 귀청을 스쳤고, 세실리아는 다시 잡혀가듯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졌다.
아침이기 때문일까.
몸이 예민했고 감각이 과했다.
그녀는 알렉시스의 팔을 붙잡은 채로 세상이 빛으로 흩어지는 순간을 경험해야 했다.
알렉시스가 얄밉게도 그녀의 귓가에 나직한 신음을 내뱉은 뒤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채로 자세를 고쳤다.
세실리아는 뺨을 시트에 묻고는 손으로 베개를 쥐어뜯어야 했다.
한편 알렉시스는 자신이 팔로 껴안았던 부분을 느긋하게 지분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아!”
누르지 마, 미친놈아…….
“얼마나 말랐으면 이게 가능해?”
알렉시스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따라 들려왔다.
세실리아는 시선을 흘끗 움직였다가, 제 배에 만들어진 윤곽에 이를 꽉 깨물어야 했다.
내가 마른 탓이니? 네가…… 이건 전부 네 탓이지!
“나, 힘들어…….”
최대한 징징거려 보았지만 알렉시스는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버티시라니까.”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시씨.”
알렉시스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에 듣는 애칭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는 야무지게 그 눈물까지 먹어 치웠다.
“─시씨.”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시씨.”
예전에 그녀가 그의 이름을 줄기차게 부른 것에 대한 복수일까.
알렉시스는 참 집요하게도 불렀다.
시씨, 시씨, 시씨…….
이름이 불리는 속도에 맞춰 세실리아는 신음을 터뜨리며 베개를 쥐어뜯었다.
아주 가끔 그녀의 얼굴 바로 옆을 짚고 있는 손목에 손톱을 박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무너지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을 때.
세실리아는 한숨 쉬듯 속삭였다.
“……알렉.”
“예.”
“양심 없는 개새끼.”
“그 욕 참 오랜만인데?”
“어제도…….”
그렇게까지 했으면서!
세실리아가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항의하는 모습을 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그가 목에 핀 가장 커다란 꽃을 다시 핥았다.
“양심을 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욕을 들으니 억울하군요.”
“……응?”
“그럼 아예 그냥 팔아먹도록 해볼까요?”
“아!”
세실리아는 아냐, 너 양심 있어, 내가 잘못 생각했어! 미안해 잘못했어!─라는 뜻을 담은 상당히 다급한 대답을 토해 냈지만 늦었다.
그녀는 거의 눈 뜬 채로 기절했다.
* * *
노부인은 코웃음을 치지도 않으며, 한없이 잔잔한 시선으로 밖을 감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친 폭우와 번개가 내렸으면서 오늘만은 잔잔하고도 평화로웠다.
쾌청한 겨울 하늘을 보며 그녀는 미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가 이렇게 평온할 때는 아닌 듯합니다, 대부인.”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뒤돌았다.
전혀 놀랍지 않게도, 알렉시스 뤼셍이 체스판 앞에 앉아 블랙 킹을 톡톡 치고 있었다.
“이 늙은이에게 폐하께서 무슨 볼일이 계신지.”
“나보다 대부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
보랏빛 눈동자는 분노 하나 없이 담담했다.
노부인은 가만히 발을 옮겨, 창가에서부터 테이블로 다가가 청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뤼셍의 황제다운 흑발, 그리고 그 아래의 미려한 이목구비가 빼곡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손주가 회의에서 받은 소감을 알겠군.
대부인은 눈썹을 까딱이며 황제의 목덜미에 찍힌 잇자국을 바라보았다.
울긋불긋하다 못해 물어뜯은 자국까지 남아 있는 게 상당히 강렬했다.
대부인은 체스판 옆에 있는 말을 정리하며 충고를 건네었다.
“제대로 흔적을 남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서투른 게 귀엽습니다.”
먼저 말을 꺼낸 그녀 잘못이다.
대부인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어머니의 대모님께 그런 대답을 꺼낸 청년만이 홀로 태연자약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폐하.”
“좋아요, 대부인. 단 두 개를 질문하겠습니다. 세실리아가 에브에 내성이 있었음을 알았습니까?”
“예.”
애초에 세실리아 헌트…… 이제 곧 다시 뤼셍이 될 여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제 반려, 혹은 반려라고 생각되는 대상을 향한 뤼셍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대녀인 마리사와 선황 아르망 뤼셍의 강렬한 연애를 시작부터 낱낱이 옆에서 관람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거든.
“그분께서 폐하가 선택한 반려임을 압니다.”
“……하.”
“뤼셍에겐 제 반려를 자유로이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며, 저는 뤼셍의 신민으로 폐하의 그 권리를 철저하게 지지하고 있답니다.”
해명이 끝나고 나서도 알렉시스 뤼셍은 꽤 한참을 쳐다보았다.
퍽 대담한 그녀마저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오래오래.
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 지그시 떴다.
보랏빛엔 분노 하나 없었지만, 대부인은 문득 그녀가 사교계에서 들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샤르텐에서의 피서 때, 한 귀부인이 감히 알렉시스 뤼셍의 크라바트에 손을 뻗었다고 했다.
그때 황제는 화를 내지도 째려보지도 않고선 한 마디 말했다지.
‘적당히.’
그 단어 하나로 분위기가 살얼음판으로 변했다고 들었다.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알렉시스 뤼셍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거늘 그녀 홀로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려웠다.
그가 노인을 겁박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의 어디에도 살기는 묻어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
“대부인.”
젊은 황제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어떠한 행동이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여 그 행동을 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그걸 알고 계시리라 믿는데.”
“…….”
“지켜야 할 선을 어기셨으니, 사실 저 역시 그대의 어린 손주에게 손을 뻗을까 했었습니다.”
대부인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체스판 옆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져 소음을 내기 전 황제는 마법으로 말들을 전부 들어 올렸다.
“하지만 시씨가 원치 않더군요.”
“…….”
“이번은 넘어가겠습니다. 어쩌면 나와 대부인의 세대가 달라서 생긴 갈등일 수도 있겠지요. 대부인께선 선을 어겨야 살아남는 세상을 견디셨겠지만, 일단 현재는 내 시대입니다. 전 선을 어기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녀의 다급한 약조가 끝나자마자 말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사라졌다.
황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대부인.”
“예.”
“세실리아에게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레이디께서 기억을 되찾으셨습니까?”
알렉시스의 턱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대부인은 무릎 위에 곱게 손을 포개었다.
“……되찾았는데.”
한참 만에 속삭인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다리를 길게 꼰 자세에서 여유와 관능이 묻어 나온다.
방만이 아니라 여유, 과함이 아니라 관능으로 느껴지는 건 그 대상이 황제이기 때문이겠지.
“전 그게 마냥 달갑지는 않군요.”
“어이하여?”
알렉시스는 입을 다물며 침묵을 고집했고, 대부인은 찌르는 듯한 보랏빛 시선에 못 이겨 순순히 답을 알려주었다.
“선황후 폐하께서 녹화하신 영상구가 있습니다.”
“아.”
“그걸 보여드렸습니다. 마법구를 가져올까요?”
그의 어머니께선 세실리아에게 얼마나 알려줬을까.
일단 세실리아는, ‘시씨’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어린 그를 기억한다는 듯이 행동하고.
알렉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대부인에게 물어본 건, 기억을 되찾게 된 원인을 확인하고 싶어서이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아니었다.
기억 삭제술은 최면을 바탕으로 한 주술.
그러니 누군가가 하나의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도와주거든 다른 기억들까지 한꺼번에 줄줄 따라올 수밖에 없다.
호수의 가운데에 돌을 던져 파문을 만들면 그게 호숫가 끝까지 퍼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아니요, 대부인.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예, 폐하.”
알렉시스 뤼셍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고한 태양을 배웅하려 대부인 역시 의자에서 일어섰다.
“고귀한 빛이 언제나 폐하의 앞을 드리우길.”
“감사합니다, 대부인.”
“……사교계가 조금 시끄러워지겠군요.”
대부인의 떠보는 듯한 말에 알렉시스는 짧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세실리아가 왜 그녀의 ‘친어머니’를 찾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대강 눈치채고 있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접근 방식은 옳았다.
왜냐하면 ‘유페이아 헌트’가 관리자로서 이룬 공적은, ‘카밀 베르뉴’가 폭주한 마법사로서 끼친 피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가 지금껏 ‘유페이아 헌트’를 들먹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세실리아가 스스로의 기억까지 지울 정도로 최악의 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끝이 나락이다 못해 끔찍했는데, 굳이 유페이아 헌트에 관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야 할까.
‘굳이.’
알렉시스는 세실리아가 견디다 못해 지워 버린 마지막 장면만은 기억하지 말길 바랐지만…….
‘했겠지.’
하지만 전부 기억해 내버렸다.
그 진실을 확신한 남자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가볍지도 묵직하지도 않은 발은 남자의 감정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는다.
늘 인내해 왔던 터라 제 본인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도 능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온전히 떠나려던 그를 노부인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붙들었다.
“곧 봄이 옵니다.”
알렉시스는 흘끗 뒤돌아, 그의 어머니의 대모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부디 전하께도, 봄이 깃들길 바랍니다.”
그는 가볍게 턱을 까딱이고는 떠났다.
* * *
관리자의 역할 중 하나는 미래에 있을 재앙을 과거의 이들에게 알려주어 피해를 막는 ‘선지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페이아 헌트는 어림잡아 적게는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의 인명을 구해 냈다.
관리자에 대한 뤼셍 황실의 기록과 마뉴엘 공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기록, 그리고 몽테-페르트의 기록이 전부 공개되었다.
언제나 비밀리에 숨겨져야 하는 ‘관리자’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널리 알려졌다.
‘관리자의 딸이라고?’
‘……재밌는 핏줄이네. 어머니는 영웅인데 아버지는 쓰레기라니.’
‘우리는 영웅의 딸이라 간주하기로 했지.’
‘하긴. 세실리아 뤼, 헌트는 카밀 베르뉴하고 마주치지도 않은 사이라고 했지 않았나?’
‘뭐…… 그래. 일단 관리자의 딸. 그렇게 생각해야겠군.’
첫 매화가 피었을 때쯤에 세실리아 헌트는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기보단 ‘유페이아 헌트의 딸’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몇몇은 여전히 그녀를 욕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핏줄은 어디 안 간다며, 그녀가 연쇄살인마의 딸인 건 진실이 아니냐고 지적했었지.
하지만 여론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알렉시스 뤼셍이 반려를 골라 버린 만큼, 그들은 그 반려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으므로.
황제가 반려를 바꿀 리 없어 보였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선, 세실리아 헌트가 ‘관리자의 딸’인 편이 백배 천배 더 나았다.
* * *
매화가 지고 목련이 피었을 때, 선대 황후 마리사 뤼셍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