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혹한의 계절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그녀의 색이었다.
분분하게 흩날리는 눈송이가 결코 울지 못하는 이의 눈물 같아, 알렉시스는 펜을 멈춘 채로 한참을 응시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물 꽃은 참 오래도 내렸다.
이 세상을 순백으로 가득 메울 때까지.
알렉시스는 마침내 손을 다시 움직여 남기다 만 메모를 이었다.
닐스 지방의 기상 일지를 다시 간결하게 작성하여 보고할 것. 두 부 작성하여 한 부는 리베의 헤일리 필 경에게 전달.
꽃과 차로 유명한 만큼 기후의 이상 증후에 신경 써야 하는 지방이었다.
세실리아가 좋아하는 텔리아 꽃도 닐스에서 기원했으며 마리사가 사랑하는 아잘리아 꽃차 역시 닐스의 특산품이었다.
‘어머니.’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다음 서류로 넘어갔다.
황궁의인 노링 남작이 정갈한 글씨로 선황후의 증세를 기록한 일지로.
마리사의 몸은 분명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깨어야 할 시점은 훨씬 넘겼지.
그녀가 봄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최악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겠다고, 황궁의는 담담하면서도 조심스레 적어 놓았다.
알렉시스는 이번만은 빠르게 서명을 하지 못하며 ‘봄’이란 단어를 오래오래 응시했다.
4월이 가장 잔혹한 달이라는 말처럼, 봄 역시 어쩌면 겨울 보다 더 잔혹할 수 있었다.
겨울은 공평하게 모든 걸 얼리지만 봄은 아니다.
봄에 몇몇 씨앗들은 살아남아 싹을 움트고, 다른 나머지는 끝내 도태되어 썩어 죽으니.
‘처절한 경쟁의 산물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녹아드는 계절.’
바로 봄이었다.
이때 그의 끝도 결정되고, 어머니의 끝도…….
알렉시스는 한숨을 눌러 삼키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은 뒤, 일어나서 이번엔 침대로 향했다.
며칠간 침대를 차지한 이는 주인인 그가 아니라 창백한 안색의 여자였다.
“세실리아.”
나직하게 속삭여 보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꿈속을 헤맸다.
끝끝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금빛을 숨겼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잔뜩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조금은 풀린 것.
하나 끙끙거리는 신음과 힘겨워하는 기색은 여전하여 알렉시스는 이를 사리물어야 했다.
현실이 악몽인 여자를 꿈마저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여자의 가볍게 묶인 손목과 그 주변의 리본을 어루만졌다.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군.’
세실리아는 베르뉴의 습격을 받은 이후부터 매일 밤, 무의식 속에서 제 손톱을 세워 팔의 상처를 헤집었다.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는 여인의 손톱으로 다시 피를 흘렸다.
괴롭고 답답한 여인이 마지막 발악처럼 저지르는 행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미련한 그는 그 꼴마저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걸 막기 위해 리본으로 묶어두곤 했다.
하잘것없는 이기심일 뿐인데. 한데.
‘뭐랄까…….’
기분이 오묘해서.
알렉시스는 리본 끝을 어루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풀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갑자기 풀기가 싫어졌다.
어쩌면 이런 충동 때문에 스스로를 향한 환멸이 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여자의 마음을 묶어두지 못하고 있으니.’
그의 마음속 목소리가 심술궂게 속삭인다.
……세실리아에게 마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강요한다고 해서 따라오는 마음이라면 진작에 강요했을 터.
봄.
늦봄? 아님 초봄?
제 상태를 가늠해 보던 알렉시스는 피식 웃었다.
봄은 무슨, 겨울 끝이겠군.
겨울 끝에 그는 폭주한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겨울 끝까지 아마…… 그를 받아주지 못하지 않을까.
그래, 각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황도 상황이기도 해서.
‘그렇담 후계는…….’
후계라도 생기면 좋을 텐데.
뤼셍의 권좌에 필요한 건 뤼셍의 직계이지 ‘알렉시스 뤼셍’이 아니다.
장성했어도 각인을 맺지 못한 그는 버리고, 그의 아이를 자리에 올리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는 한평생 마탑에 감금되어 살 터다.
그 전에 폭주해버린다면 처형당할 수도 있겠고.
마법사로 태어나는 순간 각오해야 하는 결말들 중 하나인지라 딱히 유감은 없었다.
알렉시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확실히 그의 아이를 가진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제위에 오른다면, 세실리아는 ‘황제의 어머니’로서 안전해진다.
설령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진실이 폭로되더라도.
‘……감히 어린 황제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으려 드는 사람 없겠지.’
이 때문에라도 마음에 드는 후보지였다.
‘애초부터 난…….’
그는 리본에서 손을 떼 여자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자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기절해 있다.
더는 몸부림치지 않을 것 같아 알렉시스는 선선히 리본을 끌러주었다.
서류를 챙겨 이번엔 침실과 연결된 집무실로 향했다. 그 사이의 작은 통로엔 네 명의 가족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가 아주 어렸을 적 황제의 집무실에 찾아가면 아르망이 그를 안아 들어 책상에 앉혀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서류 끄트머리를 챱챱 씹어대면 그러지 말라고 황급히 얼러주셨는데.
아버지가 사탕을 건네주시고 나서야 그는 애꿎은 서류를 괴롭히는 걸 멈췄더랬다.
사실.
사탕을 원했다기보단…… 아버지의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이 더 재밌어서였답니다.
그 사탕 그렇게 맛있진 않았어요.
‘나도 참,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아주…….’
그는 아버지께서 간략히 사과 인사를 건네고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어차피 그분께 구구절절 죄송하다고 말씀 드릴 날이 멀진 않을 터였다.
새벽이 지나 창백한 겨울 햇빛이 들 때까지 알렉시스는 말없이 일을 계속했다.
한시라도 손을 멈추면 이 상황에 대한 체념과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평정을 어그러뜨리니 어쩔 수 없었다.
평정이 어그러지면 광기가 찾아온다.
광기가 쌓이면 폭주할 테고.
마탑에 다시 처박히기 전에 어머니께서 눈뜨시는 모습은 보고 가고 싶으니 열심히 참아야겠지.
다만 그가 예상치 못한 건.
“전, 폐하! 폐하!”
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외치는 시종장의 목소리.
더없이 간절한 부르짖음에 알렉시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야 했다.
“들어와.”
허락이 들려오자마자 쏜살같이 들어온 시종장은 냉큼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의 기사 제목을 읽기도 전에 알렉시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제국의 귀보’라고 불리는, 당장 그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낯.
모든 건 똑같았다.
완벽한 이목구비와 상기된 뺨, 풍성한 속눈썹과 곱디고운 턱 선까지 여전했다.
딱 하나만 빼고.
사진 속 은빛 머리칼을 본 알렉시스는 피식피식 웃어야 했다.
아무래도 그의 빌어 처먹을 인생은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것도 허락지 않을 모양이다.
“전, 아니, 폐하. 대체 이게 무슨…….”
시종장이 더듬더듬 단어들을 끄집어냈고.
알렉시스는 무덤덤하게 신문을 펼쳤다.
카밀 베르뉴
참 큼지막하게도 박아 넣으셨군.
자, 누가 감히 이런 짓을 벌이셨다…….
시엘샤 듀페르를 비롯하여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 그리고 때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떠올려 보던 참이었다.
시종장이 덜덜 떨며 질문했다.
“외람되오나…… 폐하. 이, 이게. 사실, 입니까?”
“응.”
한참 만에 겨우 나온 질문에 그는 아주 간결하게 답해주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셔.”
“…….”
“아시고 입양하셨지.”
시종장의 낯이 오묘하게 변했다.
알렉시스는 한숨을 짧게 내뱉고는 물끄러미 시선을 들어 충직한 이를 쳐다보았다.
그가 얼마나 아버지를 따랐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 충심이 엉뚱한 복수심으로 변하기 전에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 짚자면, 세실리아 뤼셍은 베르뉴의 딸이 아니야.”
“…….”
“그녀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사랑으로 보듬고 키워주신 분은 내 부모님이었다고 생각하는데.”
“…….”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의 사랑을 부정할 셈인가?”
시종장이 형언키 어려운 표정으로 눈을 떨궜다.
알렉시스는 이쯤 말해줬으면 되었겠다 싶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은 침실에서 먹을게.”
“……예, 폐하.”
시종장이 가져온 쟁반을 들고 그는 침실로 향했다.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게도 세실리아 뤼셍은 깨어 있었다.
꼿꼿한 자세로 창밖을 내다보며 설경을 감상한다.
흰색으로 뒤덮인 퐁레프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마치 그녀처럼.
일부러 문을 똑똑 두드리자, 그제야 세실리아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몽롱한 금빛이 포근하게 그를 감쌌다.
쳐다본다고 표현하기엔 눈동자 속의 초점이 여전히 흐리긴 했다.
무엇보다 세실리아는 그를 아득히 먼 무언가처럼 바라보고 있었으니.
“아침입니다.”
차마 ‘좋은’이라고 표현할 수 없어, 그는 형식상의 인사를 건네었다.
상대는 입술을 달싹일 뿐 여전히 어떠한 반응을 내놓지 못하였다.
‘넋이 나갔지.’
제대로 이성을 차린 세실리아라면 그녀가 왜 ‘황녀의 침실’이 아닌 ‘그의 침실’에 있는지부터 질문했을 터였다.
알렉시스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소리 없이 다가갔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으려는지 세실리아가 점차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자코 신문을 건네었다.
사실 숨길까 하긴 했는데…… 하루 이틀 눈 가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또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실리아 본인에 관련된 일이었으며, 그녀에겐 알 자격과 권리가 있었다.
커다란 눈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에서 목울대로, 가슴으로, 그렇게 마침내 손끝으로.
세실리아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알렉시스는 아주 짧은 망설임 끝에 신문을 기어이 쥐여 주었다.
“아.”
첫 면을 보자마자 그녀가 침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재밌어하는 탄성이었을 수도.
어느 쪽이든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 폭로된 주인공다운 반응은 아니었다.
동시에 너무나도 세실리아 뤼셍 같은 반응이지.
알렉시스는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아침 같이 드시지요.”
“드디어 밝혀졌네.”
“……어떤 차를 드시겠습니까?”
“언제 버릴 거니?”
주어는 없었지만 너무나도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렉시스는 이를 악문 채로 뒤돌았다.
새하얀 정경 앞에서 여자가 그 무엇보다 고결하고 반듯한 자태로 화폭처럼 앉아 있다.
누님.
부르려다 말았다.
만약 지금 부른다면, 세실리아 뤼셍은 ‘난 더는 네 누이가 아닌데’ 식의 속 북북 긁는 말만 할 테니.
턱에서 힘을 빼지도 못하며 계속 여인을 감상했다.
한결 명료해진 눈빛, 결연하면서도 홀가분한 표정, 신문을 느슨히 쥐고 있는 손가락, 권태로우면서도 날연한 분위기.
완벽한 황홀이 그의 심장을 뜯었다.
한때 그가 직접 약조한 적 있었다.
‘당신이 내 심장을 여러 번 뜯어가더라도 버틸 만큼 강하니까.’
이럴 줄은 몰랐지.
‘절 짓밟으셔도 되고 모욕하셔도 되고, 하다못해 장난감처럼 신나게 굴리셔도 된다고.’
……이럴 줄은 진짜 몰랐지.
고작 심장이 뜯긴 건데 피비린내가 영혼을 가득 메웠다.
기실 세실리아 뤼셍이 그의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어도, 저렇게 담담하게 얘기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속이 문드러지곤 했다.
알렉시스는 그 모든 감정을 짓씹고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버려야지, 넌. 나를 버려야지?”
“…….”
“알렉. 지금 해결해야─”
알렉시스는 눈을 흘끗 돌렸고,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시종장이 기어이 그의 침실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폐하.”
“무엇이지?”
“……대신들이 긴급회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엔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잔뜩 시달린 투라 알렉시스는 말없이 식지도 않은 아침식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대수롭잖게 붉은 사과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 내리길 바랄게.”
“문은 밖에서 잠그고 갑니다.”
“알렉.”
“조금 있다가 얘기하도록 하죠. 누님께선…….”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은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터다.
알렉시스는 건조한 낯으로 문을, 세실리아를, 밖의 정원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저녁 무렵엔 요청이 달라지셨길 바랍니다.”
“…….”
“진심으로.”
세실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렇게 젓던 고갯짓의 속도가 상당히 빨라져 숫제 제 머리를 털듯이 저어댔다.
‘저래봤자 현기증만 생기지.’
알렉시스는 사과를 먹으며 나가기 전 세실리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가냘픈 목을 쥐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그 손에 그녀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올려다본다.
그는 말없이 새하얀 목덜미를 쥐고 있는 그의 손과 바로 코앞에 자리한 ‘사랑스러워 더욱 미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은 챙겨 드십시오.”
“…….”
“황제로서의 명령입니다.”
그는 사과를 베어 물며 자리를 떴다.
침실에서 나온 그는 손가락을 까딱여 문을 아예 잠가버렸다. 애초에 그가 세실리아에게 건넨 말은 절대로 빈말이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황제의 침실에 쳐들어가진 못할 테지만…….
‘누님께선 자유롭게 나가실 수 있지.’
그리고 세실리아는 이상한 방면에선 참 독한 사람인만큼 충분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죽여달라며.
사과를 먹다 말고 혀까지 짓씹은 모양이다.
알알한 통증이 혀뿌리까지 전달되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밖에서?”
“네.”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다.
급할 수밖에 없긴 하지…….
알렉시스는 사과 한 알을 야무지게 다 먹은 뒤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시종장의 경고대로 사람들이 초조한 낯으로 서성이고 있다가 그를 보자마자 당장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폐하!”
“존경하옵는 황제 폐하…….”
“폐하, 외람되오나 오늘 아침…….”
“조용히.”
아직 예의와 법도를 팔아먹진 않았나 보지. 다행스럽게도.
그의 짤막한 요구에 대신들이 전부 입을 다물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알렉시스는 한숨을 삼키며 느릿느릿 주변을 훑었다.
“복도에서 얘기할 건 아니잖아.”
“…….”
“전부 ‘불새의 방’에 모일까.”
“……네, 폐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물어물 합창하더니 침묵 속에서 눈짓만 교환한 채로 회의실로 떠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사라지는 발길로 인해 복도가 텅 비어간다.
알렉시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아까 단순히 대신들만이 모인 건 아닌 게, 퐁레프의 사람들 몇몇이 통로 저 끝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중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한 알렉시스는 잠자코 숨을 들이마셨다.
겨울 특유의 서늘한 향이 폐를 가득 채웠다.
……당신의 향이야.
당신만 모르는.
“비에라 백작 부인.”
그의 호명에 저 끝에서 맴돌고 있던 황녀의 유모가 울상 가득한 낯으로 총총 다가왔다.
걱정 가득한 얼굴에 알렉시스는 새삼스럽게도 피로를 느꼈다.
‘정말 새삼스럽군.’
즉위하고 나서부터 그가 제대로 쉰 적이 있었나.
아니지.
시점은 즉위가 아니라, 그의 마력 발현 때부터일 수도 있겠다.
스멀거리는 광기를 억누르느라 그의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광기는 언제나 잊힐 때쯤 다시 나타나 질 나쁜 친구처럼 찾아들었지.
“무슨 일이야?”
백작 부인이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눈 주변을 꾹꾹 지압하며 질문했다.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피로를 아예 묻은 채 살았으면 모를까, 한 번 인식하고 나니 온몸이 얼마나 처절하게 무력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광기와 피로, 체념과 절망, 서운함과 서글픔이 정수리를 가격하고 팔다리를 쥐어뜯었다.
‘참아.’
어쩔 수 없잖나. 이제 와…….
어쩌면 이런 지경까지 되어서도, 그는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도.
알렉시스는 입꼬리를 미미하게 치켜들며 지압하던 손을 떼었다.
비에라 백작 부인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폐하야 변함없이 잘생기셨죠.”
“갑자기?”
너무 뜬금없어 알렉시스는 작게 키들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백작 부인만이 웃음기 하나 없는 담백한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폐하께서 너무…….”
“응.”
“고생하시는 것 아닙니까?”
알렉시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한평생 보듬고 키운 여인을 뜯어보았다.
“내가 고생하길 원하잖아.”
“예.”
비에라 백작 부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누구의 딸이었든, 머리색이 무엇이었든 간에 일단 그녀가 키운 아이였다.
그녀는 뤼셍 황실의 안녕과 황녀의 행복을 바랐으며…….
“폐하께서 그러시리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동네방네 티를 냈나 봐.”
“퐁레프에 오래 머문 이들 중에서 눈치 못 챈 사람이 있을 리가요.”
세실리아 뤼셍이 ‘황녀’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뒤 들어온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에라 백작 부인을 비롯해 다수는 그들 둘을 ‘남매’로 인식하기 전부터 황궁에서 일했다.
그러니 알 수밖에.
“하기야, 퐁레프는 눈치가 빨랐지.”
“가면도 잘 쓰고요.”
가면무도회의 그 ‘주인공’도 세실리아냐는 질문에 알렉시스는 느리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시계를 확인한 뒤 비에라 백작 부인에게 웃어주었다.
“갈게.”
“……행운을 빌어요, 폐하.”
“응.”
하지만 회의실에 도착한 알렉시스는 그의 거지같은 인생이 그를 단단히 골탕 먹이려 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시작하자마자 튀어나온 의견들은 그럭저럭 각오했던 것들이었다.
“그녀는 제국을 기만했습니다!”
“기만한 게 사실입니까? 영상이 조작된 건 아니고요?”
“영상까지 조작할 순 없습니다. 아직은.”
“폐하, 저희는 경애하는 선황 폐하와 선황후 폐하께서 그녀의 비밀을 알았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이 기만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우리에게 최우선은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풀어나갈…….”
“황, 아니, 그 여자에게 일단 책임을 물어야…….”
누굴까.
과연 어떤 새끼가 그의 경고를 어기고 간 크게 비밀을 폭로했을까.
심지어 영상까지 찍었더랬다.
뭐, 회의실에 영상구까지 들여놓을 정도로 간 큰 놈들은 몽테-페르트의 마법사들이겠고.
하지만 그들이 언론에 제보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렇담, 공범이 누구일까.’
알렉시스는 눈을 느리게 굴렸다.
그의 침묵 속에서 토론은 더욱 열띠게 변했다.
황궁 대변인을 비롯하여 몇몇이 그를 초조하게 곁눈질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시스는 ‘떠들려면 떠들어라’라는 심정으로 뻑뻑한 두뇌를 움직였다.
“……누가 제보했나?”
툭 내뱉은 질문에 사위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래. 내 다들 오리발 내밀 줄 알았지.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기도 잠시.
“제가 했습니다.”
범인이 자수했다.
알렉시스는 눈을 들어 마리사 뤼셍의 아버지이자 제 외할아버지인 ‘기드온 벤힐 백작’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이를 까득 간다.
방향을 유추해 보니 아마 황실 대변인인 프랑수아즈인 듯했다.
침묵과 긴장, 걱정과 경악 속에서 알렉시스는 허허롭게 웃었다.
그 실소에 모두가 더 얼어붙으며 그의 심기를 살핀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벽 근처에서 혹시나 지켜보고 있던 몽테-페르트의 마법사들은 저절로 한 걸음 내디뎌야 했다.
혹여나 황제가 벌써 폭주를 했을까 걱정되어서.
……사실 알렉시스 뤼셍은 폭주해도 놀랍지 않은 상황에 처했기도 하고.
본인이 그런 상황을 자초한 주제에 시엘샤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황제가 폭주하면 대체 어떻게 말려야 하나 싶어서.
‘눈을 가려?’
아님 재갈을 물려? 한 대 치면 괜찮을까?
그녀가 열심히 고민하는 사이, 알렉시스는 헛웃음을 멈추고 제 외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다른 놈이라면 곧장 머리를 날리든 뭘 하든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아버지께선.
설령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을지언정 어머니의 아버지셔서.
“왜 그러셨습니까?”
모두에게 하대해도 되는 신분이긴 했어도 감히 외할아버지에게도 하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알렉시스는 맥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질문했다.
“저한테 얘기도 안 하시고, 곧장 언론사에 찾아가신 연유가 궁금하군요.”
“카밀 베르뉴 때문에 제 딸이 그 모양이 되었지요.”
마리사의 혼수상태를 콕 집어 얘기하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어디선가─벤힐을 끔찍이 싫어하는 프랑수아즈 같았다─작게 뇌까리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꼴에 진짜……. 언젠 지 딸을 챙겼다고.”
“쉿!”
마리사 뤼셍이 마력을 발현하고 나서부터 벤힐 백작에게 외면 받았다는 사실을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 없지.
방황하는 어린 영애를 챙겼던 사람이 바로 대모였던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셨다.
선황후께서 레니앙 대부인께 얼마나 극진했는지, 또 벤힐 백작에겐 얼마나 냉담했는지는 알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벤힐 백작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다시 한번 고하겠습니다, 폐하. 누구 말마따나 지금 와서 딸을 챙기냐고 비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카밀 베르뉴 때문에 제 딸이 다쳤습니다.”
“외할아버님.”
“그러니 전 그놈의 딸을 죽여야겠습니다.”
프랑수아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백작을 휙 가리켰다.
“폐하, 속지 마십시오. 제 핏줄보다 제 야욕이 더 중요한 남자입니다.”
“…….”
“저치가 정녕 선황후 폐하를 생각해서 이 일을 저질렀다면, 선황후 폐하께서 목숨 걸고 사랑하신 황녀 전하를 이따위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럼 범죄자의 딸이 제국 전체를 기만하도록 내버려 두란 말인가, 프랑수아즈 밀레 경?”
“당신에게 두뇌와 도리가 있었다면 폭로하기 전에 황제 폐하께 아뢰었겠지!”
언성이 높아졌다.
사람들이 기가 질린 채 그저 둘의 신경전을 관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필 베르뉴의 딸입니다! 베르뉴의 딸만 아니었더라도 전 이렇게까지 굴지─”
“외할아버님.”
단정하면서도 깔끔한 목소리가 고함의 연속을 끊어냈다.
그제야 자신이 체통을 버렸음을 깨달아, 프랑수아즈와 벤힐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알렉시스 뤼셍은 평온하게 미소 지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차분하게.
어쩐지 오싹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 여자를 죽이고 싶다 말씀하셨습니까?”
답을 원하는 듯한 물음이 아니었다.
벤힐 백작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입을 열려던 때.
“전 그걸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폐하─”
“내 사랑입니다.”
참 간결한 문장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생각이 날아간 채로 새하얘진 머릿속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발언.
벤힐 백작이 눈을 부릅뜬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또 어디선가 귀족 하나가 컵을 떨어뜨려, 와장창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대수롭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펜을 빙글 돌리는 흑발의 청년만을 멀거니 응시했을 뿐.
“제가 잘못 들었…….”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외할아버님. 내 목숨을 쥔 여자라고.”
“…….”
“내가 그 여자를 원해요.”
보랏빛 눈은 그 어떠한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아 진솔했다.
“세실리아 뤼셍은 내가 반려로 삼고 싶은 유일한 여자입니다.”
벤힐 백작이 비틀거리다 쓰러지듯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알렉시스 뤼셍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늘 그래왔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
“언제나.”
서글프게까지 들리는 고백이었다.
무슨 파괴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사위가 고요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시엘샤 본인도 충격으로 머리를 싸매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머리야!
‘이게 뭔…….’
사람들은 대체로 황망하거나 미치겠다거나, 아니면 못내 기절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 고매하신 귀족들일 텐데 그 누구도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다.
아. 몇몇은 제외하고.
아마 ‘알렉시스 뤼셍’과 ‘세실리아 뤼셍’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던 이들 아닐까.
시엘샤는 한숨을 꾸역꾸역 소화하며 그 자리서 머리를 쥐어뜯고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니. 이럴 줄 몰랐지!
서로 사이가 각별하다고는 생각했다만 누가 남매끼리!
아니! 아무리! 입양되었다고 해도!
‘……증거는 많았네.’
그녀는 반쯤 넋을 놓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녀가 퐁레프에 방문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셔츠 한쪽 소매가 날아간 채로 알렉시스 뤼셍은 누이였던 세실리아와 함께 등장했었다.
그 이른 새벽에.
어쩌면 늦은 한밤에.
그 밤중에 둘이 왜 함께 있었겠어! 아아아아악!
‘비밀이 폭로되었을 때 왜 그렇게까지 세실리아 뤼셍을 보호하려 들었겠냐고!’
누이라서는 무슨─
참 많은 게 이제 말이 되네!
시엘샤는 골치가 아파 이마에 손바닥 전체를 갖다 대었다.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복장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주범이므로.
벤힐 백작에게 찾아가 영상을 보여준 이는 그녀였다.
저 욕심 많은 치가, 어떻게든 자신이 ‘선황후의 친부’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대중과 사교계의 시선에서 마리사의 부모는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지 ‘벤힐 백작’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그 현실에 못마땅해하고 있었고.
야욕 많은 남자를 꼬드기는 건 옆구르기보다 쉬웠다…….
‘이제 어쩐다?’
시엘샤는 그냥 포기하고 실제로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제비집 같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가는 꼴에 에드릭이 눈총을 주었지만, 도저히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 뤼셍은 절대로 세실리아 뤼셍이 베르뉴를 잡을 미끼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거야.’
지금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랑 고백할 정도로 돌아버린 놈인데, 어떻게 그걸 허락해?
‘나라도 허락 안 하겠다!’
그뿐일까.
지금 세실리아 뤼셍은 제국 전체에서 욕을 먹고 있었다.
이 상황에 알렉시스 뤼셍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을 터.
본의 아니게 그녀가 ‘알렉시스 뤼셍’의 폭주를 더 앞당긴 듯한…….
“선배.”
에드릭이 조용히 속삭였다.
“선배 지금 머리 쥐에게 파먹힌 거 같아요.”
“고맙다, 새끼야.”
“……나갑시다.”
남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결말은 훤했다.
사람들은 알렉시스 뤼셍에게 안달복달할 테지. ‘세실리아 뤼셍’만은 안 된다고.
‘입양했을지언정 폐하의 누이입니다!’
이렇게 외칠 수도 있겠고.
‘카밀 베르뉴의 딸입니다, 폐하. 카밀 베르뉴와 폐하와의 악연을 제가 꼭 언급해야겠습니까?’
이렇게 감히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럼 알렉시스 뤼셍은 이렇게 답할 터.
‘입양된 누이라서 안 된다고 하면 난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는 논리를 내세울 거야.’
너무나 쉽게 상상되지 않는가.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서 안 된다면 난 그녀가 아르망과 마리사가 키운 황녀라는 논리를 내세우면 그만이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느낌의 돌고 도는 말싸움이.
시엘샤는 표현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이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 주제에 눈치껏 도망쳐버렸다.
* * *
가히 뤼셍의 모든 언론사가 모였다 해도 무방했다. 기자들은 한없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곧 그들 앞으로 나서야 하는 프랑수아즈는 잠자코 자세를 고친 채 남색 정장을 고쳐 입었다.
이렇게 황실의 입장을 발표하는 자리는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 그녀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고도 중요하고 뼈저린 자리는 없겠지.
퐁레프 황궁이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의 결혼을 발표할 땐 황실 대변인이 그녀가 아니었거든.
“괜찮으세요?”
부관의 질문에 프랑수아즈는 피식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괜찮아.”
정말이다.
그녀는 이 순간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각오해 왔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알렉시스 뤼셍이 마찬가지로 어렸던 세실리아 뤼셍의 손을 꼭 잡고 있었을 때부터?
잠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세상 맑은 미소로 함박웃음 지었을 때부터?
아니면 마침내 마탑에서 돌아온 황태자가, 너무나 원숙하고 매혹적인 여인으로 자란 누이에게 시선 하나 떼지 못했을 때부터?
모르겠다.
퐁레프에서 지낸 몇십 년의 세월이 눈앞을 스쳤다.
프랑수아즈는 이럴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원인 모를 감회에 젖어 버렸다.
“모두 착석했습니다, 밀레 경.”
때마침 들려온 보고에 프랑수아즈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플래쉬 세례 속으로 발을 내디딜 시간이었다.
그녀는 대충 의례적인 인사를 끝내고는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알다시피, 뤼셍 제국에선 연좌제가 폐지된 지 정확히 83년째입니다. 아비의 죄업을 딸이 물려받을 이유는 없지요.”
열심히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프랑수아즈는 잠자코 자신이 준비한 성명서를 내려다보았다.
“황실의 입장은 단 하나입니다.”
어제 동료들과 열심히 해본 결과, 그들은 구구절절한 변명들은 다 날리고 단 하나만을 발표하기로 결심했다.
왜 ‘세실리아 뤼셍’이 가짜 황녀인지 숨겼냐는 핑계는 중요치 않다.
왜 그녀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진실을 숨겼는지도 기실 중요치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존경하옵는 황제 폐하 알렉시스 하인리히 아르망 르 뤼셍께서는, 세실리아 뤼셍 황녀를 제 반려로 삼고자 하십니다.”
이건 악수다.
프랑수아즈는 변명 대신 인정했다.
하지만 알렉시스 뤼셍이, 자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행해야 하는 악수기도 했다.
펜들이 하나둘씩 끼릭, 끽 멈추었다.
수첩을 내려다보던 고개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들렸다. 고요해진 사위 속에서 누군가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프랑수아즈는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안다며 내리라 신호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
“…….”
“…….”
“황제 폐하 알렉시스 하인리히 아르망 르 뤼셍께서는, 세실리아 황녀와 각인을 이루길 희망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연정을 인정하셨고, 뤼셍의 직계에겐 제 반려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바.”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아무도 안 적는다.
프랑수아즈는 뻔뻔한 표정을 장착한 채로 말을 맺었다.
“제국이 자신의 뜻을 오롯이 존중해주길 원하십니다.”
폭탄아, 터져라.
그리고 실제로 터졌다.
비유하자면 그랬다.
기자들이 전원 일어나서 손을 치켜들고 폴짝거렸으니.
프랑수아즈는 덤덤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얼른 질문하라는 듯한 턱짓에 기자들이 앞 다투어 빼액 외쳐대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날.
똑같은 내용을 지닌 다른 신문들이 뤼셍 제국의 전역을 휩쓸었다.
신문을 읽던 사람들은 모두 기절할 듯이 놀라야 했다.
황실의 막장: 황제의 반려는 바로…… 누이이자 살인마의 딸인 세실리아 황녀!
가히 화려한 제목이었다.
* * *
그 제목을 본 이들 중엔 당연히 세실리아 뤼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제목을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했다.
글자는 분명히 읽혔는데 그 안의 뜻이 전달되지 않아서 바보처럼 단어들을 곱씹어대고만 있었다.
‘알렉, 넌.’
그녀는 숨을 내뱉지도 못하며 손만 덜덜 떨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제…….’
내 말들을 견뎌낸 걸까.
* * *
알렉시스가 떠나면서 ‘황제의 명령’이라고 했기에 세실리아는 어쩔 수 없이 음식을 꾸역꾸역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체해버렸다.
명치가 꼬이는 통증에 황급히 가슴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알렉시스가 약속대로 저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랏빛 눈은 상당히 슬퍼 보였지만 세실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전 내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확고한 결론을 낸 상태였으므로.
‘알렉.’
‘……체하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고 대꾸하기도 전.
알렉시스가 옅은 한숨을 내뱉더니 마법으로 바늘을 만들어 냈다.
그의 손짓에 세실리아가 쭈뼛쭈뼛 다가가자,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마뉴엘 공국의 북부엔 민간요법이 있지요.’
‘뭔데?’
‘바늘로 엄지를 찌르면 체한 게 뚫린다고 합니다.’
세실리아는 커다란 눈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렸다.
자수하면서 여러 번 손가락에 바늘을 찔려 보았지만 그때마다 딱히 달가운 경험은 아니었다.
‘그냥 약 먹으면 안 되냐고 질문하고 싶어지는걸.’
하지만 알렉시스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집중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말없이 남자 눈 밑의 거뭇거뭇한 음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도서관에서.’
결국 울컥해버렸다.
알렉시스가 도서관에서 더없이 따듯한 봄볕처럼 웃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가 황태자와 황녀로써 극장에 오페라를 보러 간 것 역시 바로 어제 같은데.
‘우리의 그 예쁘고 찬란한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그 모든 아름다운 시간들이 찰나뿐임은 잘 알고 있는데도 이건…….
서글펐다. 서러웠고.
지금 그녀의 손에 바늘을 찌르고, 검은색 피를 빼내어 닦고, 부드럽게 손목을 풀어주는 남자가 온화하여 더 절망이 북받쳤다.
‘알렉.’
작게 속삭이자 알렉시스가 지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뉴엘 대공을 위해 열렸던 무도회에서 목격했던 표정보다 더욱 고되어 외로운 표정으로.
그 쓸쓸함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럼에도 세실리아는 말해야 했다.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고, 권력의 흐름을 모른다기엔 황녀로서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겪어서.
만약 알렉시스가 그녀를 내치지 않는다면 뤼셍 황실 자체가 민심을 잃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뤼셍 제국 자체의 근간이 무너질 터.
뤼셍 제국은 기실 올곧고 강하며 현명한 지배자들과 그들에게 아낌없는 존경을 바치는 국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렉시스가 올곧고 강하며 현명하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는 존경받아 마땅한 군주였지만…….
‘이건 네 실수야.’
알렉시스가 작게 실소했다.
‘누가 실수를 평생 한답니까.’
‘날 버려.’
‘…….’
‘날 버려야 해, 알렉. 그래야 네가─’
‘영민하신 누님께서 왜 이러실까…….’
알렉시스가 느릿느릿 말을 늘렸다.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몇 번 끄덕이더니, 다시 얼굴을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헛웃음을 머금었던 입매엔 미소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지금 당신을 버리면 당신은 죽습니다.’
‘차라리 그게 낫지.’
‘죽고 싶어요?’
곧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죽고 싶다’라는 마음이…….
모르겠다. 하지만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은 가득하여.
그녀의 머뭇거림을 읽었는지 남자의 눈빛에 서늘함이 가득 찼다.
그녀를 볼 때면 거의 매번 온유했던 보랏빛이 지옥처럼 싸늘해졌다.
‘정말 죽고 싶어?’
‘죽어도 상관없어.’
‘…….’
‘정말이야, 알렉. 생각을 해봐. 이건 아니잖아.’
맨 처음 그를 거절할 때 정확히 사용했던 표현.
그리고 이제 와 또 사용하고 있다.
세실리아는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이 허망하여, 너무나 지켜주고 싶었던 남자의 심장에 또다시 거대한 가시를 박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어, 손을 더 떨궜다.
어떠한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를 죽였어.’
‘당신을 키운 사람은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입니다.’
‘나도 그 작자를 딱히 친아비로 생각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알렉.’
……지친다.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서 샤르텐은 습격당했다.
그들을 지키려던 마법사들은 전멸했으며 그녀를 사랑으로 보듬고 진심으로 키워주신 어머니께선 혼수상태이시지.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 아르망 뤼셍 역시 살해당한 것일까.
그 간단한 질문을 선뜻 부정할 수 없어 세실리아는 몸부림쳐야 했다.
정말 끔찍한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어쩌면 이 비극을 막을 기회가 있었으리라.
그녀가 ‘그녀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다면. 그리고 ‘그 위치’를 정확히 받아들였다면.
그랬다면 알렉시스와 사랑을 이루겠다는 이상한 꿈을 이루려는…… 그래, 그런 같잖은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남몰래 떠나버렸을 텐데.
그랬더라면 아르망도 마리사도 무사하지 않았을까.
알렉시스 역시 부모님을 잃지…….
‘내 몸에 그자의 피가 흘러.’
‘…….’
‘그리고 제국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지. 내가 네 아버지를 죽은 개새끼의 친딸인 거. 내가 근데 어찌 감히 네 곁에 머물러?’
‘연좌제─’
‘도의적인 책임이란 게 있잖아!’
세실리아는 반쯤 비명을 지르듯 부르짖었다.
‘알렉, 정신 좀 차려 봐! 제발. 제발! 내가 요부가 되는 건 상관없어. 제국 전체를 기만한 사기꾼이 되는 것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너는?’
‘…….’
‘너는 피해자잖아. 근데 고작 가해자의 딸을 감싼다고 네 등에 칼을 꽂으려고? 나 대신 그 모든 칼을 맞으려고?’
‘…….’
‘넌 괜찮다고 하겠지! 하지만 내가 싫어! 내가 왜 네 보호 아래에 숨겠다는 이유로 네가 그 모든 칼을 맞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데?’
알렉시스의 눈매가 붉어졌다.
행여 그가 눈물이라도 떨굴까 두려웠지만, 다행히도 그의 눈은 건조했으며 턱에만 힘이 들어갔을 뿐이었다.
세실리아는 주르륵 내려가 알렉시스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옷깃을, 손에 닿는 건 아무렇게나 다 잡아당기며 애걸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을게. 내가 죽을게. 죽어도 상관없잖아, 난! 내가 죽어봤자 뭐가 달라져?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테지.
봄이 오면 마리사도 깨어날 테고, 너도 날 잊을 테며…….
뤼셍 제국 역시 자신을 기만한 사기꾼을 묻고 새로운 구경거리를 찾아 나설 터였다.
그러니. 그렇게.
그녀만 없어지면 되었다.
‘난?’
‘…….’
‘난 어떡하라고?’
알렉시스가 한참 만에 꺼낸 말에 세실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넌 다른 여자를 찾아야지!’
아름다움은 쉽게 시들어, 알렉.
내 얼굴이 가장 완벽해 보여?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보다 더 예쁜 여자는 잘 찾아보면 있을 테고, 나보다 더 똑똑한 여자도 있을 테며, 나보다 네 취향에 더 적합한 여자도 분명 있을 거야.
‘네게 더 걸맞은, 그 어떠한 악연도 없는…… 그런 여자를 찾아서, 각인해.’
‘…….’
‘알렉. 이정도면 사실 그냥, 운명이 우리 둘은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니? 그만 나 좀 포기해. 제발. 내가 빌게. 내가 진짜 간절하게 빌게. 응?’
‘세실리아.’
알렉시스가 제 옷깃을 붙들고 끌어당기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매정하지도 거칠지도 않은, 그저 단호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손길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고개를 들게 했다.
아스라한 온기에 젖은 채로 순순히 목을 젖힐 수밖에.
세실리아는 똑같은 무게의 희망과 절망에 젖어 남자의 얼굴을 시선으로 하염없이 더듬었다.
제발 그가…… 그녀의 애원을 들어주길 바라면서.
너무나 지쳐 보이는 얼굴에 간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알렉. 난 네 불행이 되기 싫어…….’
난 언제나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는데, 어째서 난 네 불행이자 비극이 된 걸까?
어째서 난 네가 세상으로부터 칼을 맞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또 어째서 난 널 나락까지 끌어들였을까?
나락은 나 혼자 떨어지면 그만인데.
다 내가 ‘나’라서 그런 거지.
그러니 널 위해 내가 떠나야지.
내가 사라져야지.
‘그렇게 버려지고 싶어요?’
‘응.’
‘그렇게 죽고 싶으냐고.’
‘응. 진심이야, 알렉.’
‘……세실리아.’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을 쥔 채 저주 같은 독설을 남겼다.
‘본인 자격을 아세요. 당신에겐 죽을 권리도 없어.’
‘……?’
‘당신이 어디서 감히 죽고 싶다고 해? 내 어머니는 당신을 살리려고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
‘당신 목숨이 당신 건 줄 알아요? 천만에. 당신에겐 수많은 이의 목숨 값이 있는데. 그 빚을 진 채로 죽으려 들었어요? 감히?’
영혼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알렉시스는 더없이 심상하게 마무리 지었다.
‘간도 크네요.’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온전히 뜯어간 밤이었다.
알렉시스가 손을 놓자 세실리아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넋을 놓은 채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허물어지는 여인의 몸을 알렉시스가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러고는 신발을 벗기고, 입고 있던 숄까지 벗긴 뒤 아주 얌전하게 이불 속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주무십시오.’
세실리아는 눕지도 못한 채 앉아만 있었다.
알렉시스는 친절하게 그녀를 눕혀 베개까지 똑바로 베게 해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눈을 깜박이며 알렉시스를 올려다보았다.
하필 마법등을 꺼뜨린 시점이어서일까,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억장이 무너진 채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견뎠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가릴 때까지.
‘주무세요.’
세실리아는 까무러쳤다.
다음 날 아침 시종장이 새로운 신문을 친히 건네주기 전까지.
느릿느릿 눈을 깜박여 마침내 제목을 ‘제대로’ 읽었다.
황실의 막장: 황제의 반려는 바로…… 누이이자 살인마의 딸인 세실리아 황녀!
막장. 반려. 살인마. 누이.
“……진짜 막장이네.”
세실리아는 작게 뇌까리며 고개를 떨궜다.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어,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실소해야 했다.
모든 걸 포기하면 되레 웃음이 나온다더니 정말이었다.
이 미쳐버리겠는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눈을 가린 채 한참을 흐느껴 웃었다.
“내가.”
이렇게 신문에 나오려면 알렉시스가 제 뜻을 적어도 오전 안엔 밝혔다는 소리였다.
황실에서 일한 만큼 상황의 전후를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신문을 건네준 뒤.
그날 오전에 회의를 통해 프랑수아즈에게 진실을 드러냈을 테고…….
밤에 그녀를 찾아와, 열심히 심장을 뜯겼지.
마지막 순간 알렉시스가 기어이 그녀에게 저주를 남기긴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당사자의 속이 더 문드러졌겠지.
그의 눈매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 언제나 초연하고 오만했던 낯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그의 붉은 입매에 자리한 비틀린 미소와 끝없는 한숨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내가 네게…….
세실리아는 흐느끼던 웃음을 멈춘 채로 이마를 쾅 박았다.
신문을 펼칠 때만 해도 대충 ‘황실의 변명’ 따위를 예상하고 있었다.
프랑수아즈는 유능하니 그녀라면 괜찮은 핑계거리를 찾아 황실을 변호했으리라 믿었었다.
한데.
‘너는 왜…… 나 따위를 위해서.’
지금 제국은 ‘살인마의 딸’인 세실리아 뤼셍에게 집중하지 않을 터였다.
집중하지 못하겠지.
당장 그들의 황제가 ‘살인마의 딸’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제국의 비난과 화살은 대다수 세실리아가 아닌 알렉시스에게로 꽂힐 터였다.
‘난 그런 네게…….’
네가 죽으면 자긴 어떡하느냐는 외침이 귀에 선득하게 내다 꽂혔다.
속울음을 도저히 내뱉을 수 없어, 세실리아는 머리를 여러 번 쾅쾅 박으며 꺽꺽거렸다.
내가 네게.
대체 무슨 짓을…….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 다정한 말이라도 해줄걸.
왜 기어이 네 영혼을 뜯으려 들었을까.
아니, 근데 왜 그런 짓을 해서…….
“아아아아악!”
세실리아는 반쯤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무 싫었다.
현실이 믿을 수 없이 끔찍했고, 그녀가 더없이 추한 쓰레기가 된 기분이라 스스로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너저분하다.
사람이 이토록 최악일 수가 있을까.
언제나 고귀해야 하는 남자를 그녀가 그따위로 만들었다.
언제나 존경받아야 하는 남자를 그녀가,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도록…….
책상에 머리를 쾅쾅 찧었다.
스스로에게 흠집을 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 모든 비난과 불명예를 무릅쓴 남자에게 그녀가 고작 던진 말은.
“알렉…….”
세실리아는 울듯이 속삭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물은 나오지 않고 잔뜩 젖은 숨결만 토해진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대체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른 거니…….
고작 나 따위를 위해.
그녀는 머리를 처박고 속절없이 추락했다.
* * *
제국에 충격을 떨어뜨리고 나니 딱 하나는 좋았다.
밀려들던 업무의 속도가 늦춰졌다.
덕분에 알렉시스는 평상시 속도대로 서류를 성실하게 처리한 뒤 마리사를 보러 떠날 수 있었다.
잿빛 머리칼의 여인은 여느 때처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축 늘어진 손의 새끼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짓궂은 그 손길에도 어머니는 깨지 않았다.
“곧 일어나시리라 믿어요.”
“…….”
“사고 좀 쳤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선 그렇게 화내실 것 같진 않네요.
알렉시스는 그 말도 꺼내려다가, 만약 지금 마리사가 듣고 있다면 나중에 깨어나서 등짝이라도 때릴 것 같아 참았다.
대신 어머니의 새끼손가락 마디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거, 어렸을 때 버릇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기억하실까요? 어머니께서 절 사하라로 데려가셨던 거.”
안 그래도 알렉시스는 어릴 적부터 마력이 매우 강했다.
마리사는 그래서 여름마다 어린 그를 데리고 서부로 향했었다.
사하라 산맥에서 적당한 시간을 보내면 마력량이 조금은 줄어든다는 속설을 믿어서.
추후에 밝혀진 바로는 전혀 근거 없는 미신이었지만…….
그래도 그 경험이 그와 마리사 그리고 아르망의 인생 전체를 확실하게 뒤바꿨더랬다.
마리사가 어린 알렉시스를 부탁한 사람이 바로 어렸던 세실리아였으니.
‘……아직도 기억해.’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채 날 못마땅히 내려다보던 당신의 금빛 눈.
바람결에 살랑이던 은빛 머리칼까지 전부.
사실 처음부터 난 당신을 예쁘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걸 티 내기 싫어 애처럼, 그래, 철없는 어린애답게 ‘못생긴 마녀’라고 툴툴거렸지만 말이야.
“어머니께선 후회하실까요?”
알렉시스는 대답 없는 이에게 여쭤보았다.
만약 어린 그를 어린 세실리아에게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아닌가.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는 어떻게든 세실리아를 만났으려나.
알렉시스는 엷게 웃었다.
“어머니께서 물어보셨죠. 사실 아버지께서도 제게 여러 번 물어보셨어요. 후회하느냐고.”
창백한 겨울 햇빛이 커튼 사이를 통과하여 어룽거렸다.
사위를 확실하게 밝히는 볕 속에서 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이윽고 다시 떴을 땐 햇빛은 여전히 성실하게 그들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그가 황궁으로 돌아온 여름이 떠났고, 풍요를 상징했던 가을은 지나갔으며, 이젠 겨울이었다.
혹한의 계절. 만물을 얼리는 자비 없는 추위.
“죄송합니다.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후회는 되지 않아요. 다만.”
그는 잠든 어머니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기도하는 자세로.
속죄하는 죄인의 자세이기도 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리광 한 번 피워보자면.
“……봄이 오기 전에 일어나 안아주세요.”
춥습니다.
이 시간이.
* * *
세실리아는 허우적거리는 몸을 애써 가눠 문으로 다가갔다.
그렇다고 바로 문손잡이를 돌리진 못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꽉 붙들기만 했다.
며칠간 그녀는 이 방에만 계속 칩거해 있었다.
완전히 나갈 용기는 없었어도 집무실에 알렉시스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
마침내 용기를 긁어모아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녀는 당연하게도 작은 통로에 걸린 초상화를 목격했다.
겨울의 안온한 햇볕이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가족 초상화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알렉과 어린 그녀가 옹기종기 모여 선 채로 웃고 있었다.
어딜 맞기라도 한 듯 정신이 얼얼했고 가슴이 휑했다.
세실리아는 속절없이 굳은 채로 오래오래 그림을 쳐다보았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을 텐데, 어째 아주 오랜 옛날처럼 느껴지는…… 너무나 화목한 가족의 초상을.
지금 계절은 겨울인데 그림 속 계절은 한없이 따사로운 봄이었다. 만물이 태어나는. 그리하여 창조의 기쁨에 날뛰는.
집무실로 끝내 발을 내딛지 못하며 세실리아는 텅 빈 눈으로 그림을 계속 보듬었다.
햇빛이 기울고, 느려지다 못해, 끝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알렉시스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림의 맞은편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우뚝 선 채로 안락의자에 구겨져 있는 여인을 감상했다.
손가락을 딱 튕기자 오랫동안 여인의 머리칼에 질기게 남아 있던 염색 마법이 마침내 수명을 다했다.
제 머리칼이 흑색에서 은색으로 돌아갔는데도 세실리아는 별다른 미동도 없었다.
그저 유리잔을 까딱이다가 천천히 술을 계속 들이켤 뿐.
“취하셨습니까?”
“……아니.”
먹은 게 제대로 없을 텐데.
실제로 취했을 때의 발음이 아니었다.
그땐 뭉개지고 늘어져 마냥 귀여운 소리였다면 지금은 아주 또렷하고도 정확했다.
어느 것 하나 흘리지 않고 또박또박 속삭이는 음성.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니.”
세실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의자 등받이 너머로 머리가 넘어가며 흰 목덜미가 창백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른 핏줄까지 보일 정도로 적나라하게.
여자는 지나치게 무방비했다.
안 그래도 몸의 곡선이 뚜렷하게 비치는 레이스 잠옷일 뿐더러 발목 아래는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황실 수석 무용수마저 그녀의 우아한 움직임은 따라 할 순 없을 테지.
머리가 은발이어서일까.
유려한 동작이며 새하얀 빛깔이며 세실리아 뤼셍은 오롯이 백조 같았다.
달 밝은 한밤, 호수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유유히 유영하는.
공기가 따갑다.
알렉시스는 차마 통로 안으로 발을 들이밀지 못했다.
그의 인내심은 이렇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여자의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따라 목이 탔다.
그는 정확히 거리를 지킨 채로 여자의 목덜미를, 잠옷 아래의 선을, 얇은 종아리와 그 아래로 이어진 발목까지 전부 훑었다.
‘발등에 입을 맞출 수만 있다면.’
의자와 여자의 몸 사이에 끼어 있던 머리칼이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등받이 너머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달빛이 아스라이 내리쬐는 듯한 황홀한 정경.
남자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일순 바뀌어버리는 공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처연한 백조께선 홀로 목을 계속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을 아낌없이 흘려보내면서.
남자는 그저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세실리아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끌어당겨 흐트러진 자세를 고쳤다.
평상시처럼 똑바로 앉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의자 속에서 구겨졌다.
가냘프지만 작은 키는 아닌 체구를 어떻게든 안락의자 안으로 밀어 넣더니 알렉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
그의 이름.
와인을 마셔선지 입술이 더 붉고 촉촉해 보인다.
그 젖은 부분을 눈으로만 지분거리던 남자는 최대한 덤덤하게 자세를 고쳤다.
길고 새하얀 손가락에 걸린 유리잔이 아슬아슬하게 까딱였다.
“알렉. 알렉.”
“…….”
“……알렉.”
“예.”
그는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계속 속삭이는 모습을 만끽했다.
입술이 귀엽게 오물거리며 그의 이름대로 정확히 움직인다.
세실리아가 기어이 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톡.
포도주 방울이 그녀의 입술 너머로 떨어져 목덜미를 타고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하얀 피부와 하얀 잠옷이 와인색으로 붉게 물든다.
알렉시스는 색이 변하는 그 자취를 덧그려 보았다.
길을 따라 입술을 붙이고 싶었다. 여자의 얼굴이 와인의 색으로 변할 때까지.
“네가 여기서…….”
세실리아가 이리저리 손짓하며 통로를 우아하게 가리켰다.
아까까지 억누르던 취기가 올라오긴 하셨는지 손짓이 상당히 권태로워졌다.
여전히 통로 안으로 들어갈 자신은 없어, 그는 와인병을 노려보았다.
마법을 써서 가져올까.
“아주 당당하게…….”
“…….”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조금씩 늘어지는 발음.
그러나 계속하여 명료한 눈빛.
태양 같은 금색은 황홀할 정도로 이글거리며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정말 태양인 걸까, 감당할 수 없는 열기가 그를 덮쳐 뒷덜미가 뻐근했다.
상황에 맞지 않은 욕망을 짓씹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만약 지금 정말 이성을 잃는다면.
짐승 취급을 하실 텐데.
“내게 입 맞출 수 있어?”
아. 누구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데, 상대는 아주 천진한 낯으로 불을 지르고 계신다.
알렉시스는 작게 실소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의 움직임에 맞게 세실리아 역시 조용히 턱을 기울였다.
시선은 끊일 듯 끊이지 않으며 면면하게 이어진 상태였다.
그는 눈으로 대답했고, 여자 역시 눈으로 반문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증명해드릴까요?”
세실리아 뤼셍은 취한 게 맞다.
평상시면 당연히 거부했을 지금 상황에서 더욱 오연하게 고개를 치켜들었으니.
살짝 들린 턱이 당당하면서도 귀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해봐.”
알렉시스는 바로 성큼 들어가는 대신 잠자코 시간을 끌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울여 선 채로 여자의 움직임을 빼곡하게 눈에 담았다.
그녀가 몸을 숙여 와인 잔을 다시 내려놓고, 어쩔 거냐는 듯 팔을 벌릴 때까지 계속.
그녀의 차디찬 금빛이 식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할 때까지 끝끝내 인내했다.
취기에 잔뜩 녹아내린 여인과 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처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연신 달싹이던 세실리아의 입술이 열리며 서늘한 조롱이 잇따랐다.
“자신 있다며?”
그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있다.
알렉시스는 그제야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기세에 놀란 건지는 몰라도 세실리아가 불현듯 술에서 완전히 깨어난 낯을 하더니 안락의자 속으로 몸을 더 구겼다.
자못 피하려는 움직임에 알렉시스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먼저 도발하셨다.
그가 한 게 아니라.
“정말, 여기서.”
안락의자 바로 앞에 도착하자, 세실리아가 잇새 사이로 짓씹듯이 내뱉었다.
잔뜩 날이 선 시선은 그를 넘어서 뒤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할 수 있다고?”
분에 가득 찬 음성. 알렉시스는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여자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이었다.
안락의자 위로 반쯤 올라탄 그는 단호하게 여인의 턱을 붙들었다.
와인 향이 강해졌다.
여인의 달콤한 체향과 섞여 온몸을 불태우는 듯했다.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드는 욕망에 충실해질 수밖에.
“……알…….”
이름을 끝내도록 내버려 둘 리가.
그는 일부러 이를 세웠고, 안 그래도 와인 때문에 붉디붉었던 입술은 기어이 피를 보았다.
와인의 탁한 맛과 피 특유의 비린내가 동시에 혀끝을 간질인다.
여인의 달콤함과 대비되는 정반대의 맛.
그리하여 서로가 더 강해져 남자는 게걸스레 탐했다.
한편 세실리아는 저 위로 드리운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밀어낼 힘도 없고 끌어당길 용기도 없어 그저 손만 올려놓아야 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호흡이 가쁘고 온몸이 묵직했으며 시야 저 끝에 걸린 그림에 속이 답답했다.
갑갑함이 차오른다. 익숙한 속울음이다.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한꺼번에 귓가를 간지럽혔다.
남자의 달뜬 숨소리, 더없이 청량한 체향, 손끝에 닿는 온기와 단단하고 부드러운 무게감까지.
의자가 연신 삐꺽거렸다.
모든 감각은 위압적일지언정 다정한데.
근데 어째서.
세실리아는 눈을 떠서 저와 정신없이 얽혀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눈을 뜬 채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어선지, 금빛과 보랏빛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로 서로를 동여맸다.
찬란한 홍채 한가운데 새까만 동공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넌 무슨 감정일까.
난 또 무슨 감정이고.
우리는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기에 지금…….
세실리아가 숨이 막히는지 헐떡여 알렉시스는 한 번 자비를 베풀었다.
이윽고 그녀가 호흡을 되찾으며 뒤로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남자는 아까부터 계속 상상했던 욕망을 그대로 풀어헤쳤다.
포도주가 그려냈던 자취를 따라 입맞춤이 흘렀다.
입술을 따라 하얀색이 와인의 빛깔로 붉게 물든다.
세실리아가 짧게 신음을 터뜨렸다.
알렉시스는 그대로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분명 한 남자의 체격일 뿐인데 세상 전체를 가릴 정도로 컸다.
아니면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가릴 만큼 큰 것일 수도.
세실리아는 느리게 시선을 끌어 올려, 자신을 보호해주는 듯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필 그녀가 안락의자에 구겨져 있고 그가 그녀의 위로 몸을 드리웠기 때문일까.
그녀에게로 쏟아지는 그 무수한 세상의 칼과 창과 가시들을 알렉시스가 오롯이 막아주는 느낌이었다.
“하라며.”
남자의 엄지가 그녀의 뺨을 꾹 눌렀다.
그제야 세실리아는, 그녀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어쩌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포도주가 만들어 낸 자취를 따라 입술이 흘렀듯이 이번엔 눈물이 만들어 낸 자취를 손끝이 덧그렸다.
남자의 표정은 형언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세실리아는 이를 파드득 떨다가 겨우 다물어야 했다. 울음을 참아내는 어깨가 한 차례 들썩였다.
알렉시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해도 된다며.”
“……응.”
그녀의 긍정에 남자의 타는 듯한 보랏빛이 내리꽂혔다.
손끝과 엄지의 궤적을 따라 작열하는 감각이 꽃처럼 흐드러졌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매였다.
남자가 사뭇 난폭하게 손깍지를 끼며 손가락을 아프게 조이고는 기어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세실리아는 이번엔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너는 왜 나를 선택해서.’
네 그 완벽한 인생을 스스로 망치는 건지.
그리고 난 왜 내가 널 망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바보처럼…….
첫 번째가 빠르고도 강렬했다면 두 번째 키스는 느리면서도 온화했다.
알렉시스가 입맞춤을 끝내고 그녀의 달아오른 눈매를 핥았을 때, 세실리아는 자신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이 숨죽여 울고 있다는 것도.
울지 않던 여자가 마침내 터뜨린 눈물은 다디달았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죽고 싶었다.
세실리아가 울고 싶어도 못 운다는 걸 깨달았던 때, 오만하게 곱씹었던 다짐이 기억나서.
‘난 당신을 뿌리째 뽑고 싶어 했었지.’
……뽑는 데 성공한 것 같긴 해.
이런 결말을 맞이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 * *
알렉시스는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녀의 눈물 자국을 지분거렸다.
그러고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은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세실리아 홀로 새벽의 푸른빛 속에서 하염없이 침잠해야 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남자가 있었던 곳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족 초상화.
환히 웃는 아버지와 다정다감하게 미소 짓는 어머니.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낯의 그녀와 저때만은 그래도 쾌활했던 알렉시스.
“답을 모르겠어요.”
작게 속삭이고 나자 언젠가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열에 달뜬 알렉시스는 그녀의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었고, 그녀는 이 순간처럼 새벽을 헤치며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본질적으론 사랑의 문제 아닐까.’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조언.
‘그 어떠한 가시밭길도 기꺼이 함께 걷도록 해주잖니.’
아버지의 그 가치관을 알렉시스도 물려받은 걸까요
그래서 나만 걷고 싶은 이 가시밭길을 기꺼이 자신도 걷겠다고 뛰어든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걸을 가시밭길을 도저히 참지 못하여, 자신이 대신 걷겠다고 나선 것일까요?
질문해 봤자 떠난 이는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안락의자 위에 늘어진 채 눈만 연신 깜박거렸다.
여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여명이 깃들었다.
밤의 끝이면서 낮의 처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증거.
세실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딸이 되어줘서 고마워, 아가.’
그림 속의 여인이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는 여전히 상흔이 남아 있는 제 팔을 내려다보다가 질질 발을 끌며 앞으로 내디뎠다.
통로를 지나쳐 며칠 만에 처음으로 알렉시스의 집무실로 나왔다.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은 언제 봐도 압도적이었다.
그녀는 다소 기가 질린 낯으로 응시하다가 발 바로 아래에 떨어진 서류를 대충 주워 올려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정말 마침내.
밖으로 나섰다.
제아무리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해도, 퐁레프 안에서는 위험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베르뉴의 딸’이면서 동시에 ‘알렉시스 뤼셍이 반려로 삼고자 하는 여자’였다.
‘……퐁레프가 아닌 곳에서는 위험할 수 있겠지.’
하지만 황제의 반려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 퐁레프에선 그녀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없었다.
적대적인 시선을 보낼지언정 그녀에게 강압적으로 굴거나, 때리거나, 욕설을 지껄이거나…… 그럴 순 없다는 소리였다.
아마 그래서 알렉시스도 문을 딱히 잠그진 않았을 터였다.
세실리아는 덤덤한 걸음을 옮겨 밖에 나왔다. 아직도 레이스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새하얀 목덜미에 붉은 꽃이 울긋불긋하게 피었으며, 잠옷 어딘가엔 와인 흘린 자국이 남아 있다는 현실을 모르는 채로.
드디어 맡은 바깥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상쾌했다.
세실리아는 숨을 들이켜며 여백에 남아 있는 겨울 향을 음미했다.
시원하고 청량하다.
알렉시스의 향이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움직이려던 그녀는 복도 저 끝에서부터 쏜살같이 달려오는 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컹컹!
요란하게 짖어대는 소리.
알리샤가 거의 부딪힐 듯이 날아와 그녀에게 격렬한 환영을 표했다. 세실리아는 뒤로 휘청이다 늦지 않게 강아지를 받아 안아주었다.
주인아, 주인아!
며칠 만에 겨우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는 기뻐 죽겠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를 샅샅이 핥았다.
이어 배를 뒤집으면서 있는 대로 뒹굴거렸다.
세실리아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을 피하지 않으며 알리샤의 격한 인사를 받아주었다.
거대 사모예드는 이젠 그녀의 맨발을 깨물어대고 있었다.
“아야, 강아지.”
컹컹! 강아지 아니랬잖아!
근데 주인 왜 머리가 새하얘? 늙었어? 주인이랑 나랑 색깔 거의 비슷해!
“언니 오늘은 슬리퍼 안 신었어…….”
앞발이 연신 그녀의 발을 타닥타닥 두들겨 팼다.
평상시는 신발을 신어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맨발이라 조금 타격이 있었다.
하지만 강아지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어 세실리아는 내버려두었다.
새하얀 목덜미를 끌어안고는 귀 뒤를 긁어주었을 뿐.
컹컹컹!
주인아, 나 좀 계속 안아줘!
알리샤가 다시금 열렬하게 핥았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다 결국 항복했다.
“안 돼, 강아지. 언니 지금 밥 제대로 안 먹어서 너 들면 떨어뜨려…….”
네 몸무게를 생각해 보렴.
네가 어렸을 땐 내가 많이 안아주었다지만 지금은 쉽게 못 든다고.
너한테서 양심이 사라진 건 나한테 양심이 없기 때문이니? 반려동물은 주인을 닮는 법이라?
‘내가 양심이 없긴 하지…….’
세실리아는 헛헛하게 실소하며 터덜터덜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알리샤가 꼬리를 흔들며 이리 폴짝 저리 폴짝 뛰었다.
“어머니 만나러 갈 거야.”
커엉!
“같이 갈래?”
그래, 주인!
알리샤는 영민한 강아지답게 쫄래쫄래 앞장서기 시작했다.
퐁레프 전원이 활동하기엔 이른 시각이긴 했어도, 몇몇은 분명 깨어났을 터였다.
누군가는 그녀를 분명 발견했겠지…….
‘하라 그래.’
뒤에서 가끔 인기척이 들렸지만 세실리아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눈을 또록 굴려 제 어깨를 간지럽히는 새하얀 머리칼을 확인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칼이 검은색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은색인 걸 보니…….
어느 틈에 알렉시스가 염색 마법을 완전히 해제한 모양이었다.
‘알려질 거 다 알려졌으니.’
세실리아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아지를 계속 따라갔다.
알리샤가 도착하여 챱 얌전하게 앉은 곳은 다름 아닌 황후의 침실 앞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방 앞에서 조금 망설였다.
커엉?
녀석이 꼬리를 열심히 흔들더니,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세실리아는 잽싸게 문손잡이를 잡아 열리지 않도록 붙들 수 있었다.
“내가 열 거야, 강아지.”
컹! 그럼 빨리 열어라, 주인!
알리샤의 재촉이 느껴져, 세실리아는 짧게 헛웃음을 내뱉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퐁레프의 문답게도 당연히 끼이익─ 하는 소리는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기척 없이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응접실에 있던 시종이 그녀를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들어가도 되니?”
시종이 눈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리더니,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세실리아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고는 알리샤와 함께 어머니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리사는…… 평온히 잠든 상태였다.
‘단 한 번도 깨지 않으셨다고 했지.’
정신을 반쯤 놓고 폐인처럼 구는 동안에도 알렉시스는 성실하게 소식들을 알려주곤 했다.
스치듯 흘려들었던 정보들을 되새겨 보았다.
다행히도 무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머니께선 아직도 안 깨어나셨습니다.’
알렉시스가 거짓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속삭였었다.
‘봄이 오시기 전엔 깨어나셔야 할 텐데요.’
알리샤가 얌전하게 자리에 앉아 꼬리만 흔들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 바로 옆에 앉아 서늘한 손을 붙들었다.
환자의 손은 그녀의 안색만큼이나 창백했다.
게으른 겨울 햇볕이 슬금슬금 기어와 얼굴이며 손이며 간지럽히는데도 도저히 깨어나시지 않으신다.
“……어머니.”
세실리아는 나직이 속삭였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당신께서 제게 해주신 그 모든 걸 떠올리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 곁에 붙어 있어야 했는데.
제가 감히 정신을 놓아서.
그래서.
세실리아는 과거를 변명하는 대신 어머니의 손을 들어 제 이마에 대었다.
서늘한 온도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차려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일찍 답을 들려드려야 했는데.”
당신이 샤르텐에서 남기셨던 말.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꿋꿋하게 건네주셨던…… 바로 그 말.
“저야말로, 제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당신께선 이미 아시겠지만.
그 말이 당신의 유언이 되지만 않게 해주세요.
봄이 되기 전엔 반드시 깨어나시겠지요.
‘그렇게 믿어요.’
어머니께선 늘 다정하셨으니까…….
“늑장 부린 채로 찾아와서, 이런 말만 드려서 죄송한데.”
세실리아는 반쯤 고자질하듯이 일러바쳤다.
“알렉시스가 조금 큰 사고를 쳤거든요.”
제가 살인마의 딸이란 게 밝혀졌는데 그 ‘살인마의 딸’을 사랑한다고 동네방네 홍보를 했답니다.
농담이라고 무마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근데 그걸, 어떻게 수습할지를 모르겠네요. ……옛날에, 아버지와 사랑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마리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으스대셨던 순간은 말씀드리지 않아야지.
그랬다간 나아아중에 아르망이 마리사에게 등짝을 얻어맞을 수도 있어 보였다.
세실리아는 아주 흐릿한 미소를 겨우 끄집어내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면…… 함께 걸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사람을 빼내고 자신이 대신 걸어야 할까요?”
아버지께선 함께 걷는 것을 선택하셨다.
어머니께서도 그러실까.
확실히 아르망과 마리사는 언제 어느 순간이든 함께였다.
기쁠 때고 슬플 때고, 행복할 때고 우울할 때고 전부.
그들의 유대는 정말 눈부시게 찬란했었지.
세실리아는 가만히 목을 젖혀 하늘을 응시했다.
천장의 그림을 노려보며 한참 눈을 여닫자 울컥했던 눈물이 겨우 들어갔다.
그녀는 겨우 고개를 다시 내리고는 어머니를 응시했다.
뒤늦게야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꼴인지를 깨달아, 세실리아는 주섬주섬이나마 제 머리칼을 정돈해보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못생겨서 조금 부끄럽네요.”
어머니는 제가 예쁜 모습을 정말 좋아하셨는데.
파리한 손을 한번 꼭 맞잡은 뒤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래도 자랑 하나 해도 될까요?”
세실리아는 한숨을 참으며 치맛자락을 꼭 구겼다가 놓았다.
“저 드디어, 울 수 있어요.”
자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못 우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요.
겨울 햇볕 특유의 파리함이 조금 가실 때까지 세실리아는 오래오래 방에 머물렀다.
마리사가 행여라도 눈을 뜰지 기적을 고대하면서.
하지만 긴 잠에 빠진 이의 눈꺼풀은 고집스럽기만 했다.
세실리아는 더는 미적거리지 못하며 질질 발을 끌고 나섰다.
밖에선 아까의 시종이 예상치 못한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전, 전하.”
‘전하’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 모양이다.
소년이 순간 더듬거리더니, 그래도 여전히 황녀에 대한 예우를 표했다.
굳이 할 필요는 없는데도.
“춥습니다. 숄을 걸치세요.”
“……아. 고마워.”
세실리아는 시종이 건넨 거대한 숄로 제 몸을 칭칭 동여맸다.
거대한 박쥐가 되어버린 우스운 꼴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외양은 나락으로 갔다.
본판이 예뻐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짜 보는 이를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을걸.
세실리아는 ‘지금이라도 유모나 시녀들이 그녀의 몰골을 목격한다면 뒤로 넘어가리라’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무시했다.
숄이 어찌나 큰지 목 바로 아래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가려졌다.
세실리아는 뒷부분을 바닥에 끌지 않도록 고심하다가 그냥 포기했다.
퐁레프의 복도엔 먼지도 별로 없을 텐데 그냥 끌고 다니지 뭐.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어머니의 별실에서 완전히 나섰을 때였다.
그녀는 제 강아지가 크르렁거리며 적대감을 표출하는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알리샤가 이렇게까지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대는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알리샤.”
그녀의 부름에도 녀석은 여전히 사납게 짖어댔다.
마치 화라도 난 듯이.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잔망스럽긴 해도 확실히 착한 제 강아지를 분노케 만든 범인에게로 다가갔다.
아침 햇살이 들지 않는 터라 상대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누구일까.
누구길래 알리샤가, 이토록…….
“아.”
세실리아는 짧게 침음을 뗐다.
상대는 치켜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벤힐 백작.”
“그대인가.”
아까 시종과는 달리, 이 남자는 그녀를 아예 황녀로 대우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이게 정확하지.
세실리아는 물끄러미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짧게 숙였다.
“네게 염치가 없다는 건 확실하군.”
적대적인 말이 쏟아져 내렸다.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말이야. 죄책감이라는 게 없나? 수치라는 건?”
“…….”
“그래서, 세실리아. 기어이 동생까지 홀린 요부가 된 심정은 어떠한지?”
글쎄다.
가감 없이 얘기하자면, ‘요부가 된 심정’은 미안하지만 별 것 없다.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보든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에.
마녀라 욕하든 탕녀라 욕하든 알아서 하라 그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조롱해봤자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없었다.
세실리아는,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기실 뼈저린 점은.
“황실의 평판이 아주 바닥으로 떨어졌지. 제국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고. 지금 사람들이 다 길거리로 뛰쳐나왔다는 현실을 알고 있긴 하나? 다 너 때문이지.”
“…….”
“거의 20년 가까이 우릴 속여온 너 때문에! 지금 광장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 너에 대한 걸 다 태우려는 모양이야.”
‘제국’이 어수선해졌다.
‘황실’의 명예가 빛이 바래었고…….
아르망과 마리사, 알렉시스까지 전부 추락했다는 현실만큼은 지독하게 비참했다.
사랑으로 보듬어주셨는데. 친딸처럼 키워주셨는데.
그녀가 항상 감사해하던 이들의 ‘비극’이 되어버렸다니.
그 현실이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해서…….
“사랑에 미친 남자가 널 보호하려 대신 칼을 맞았어. 아니, 맞고 있지. 이제 만족해? 만족하냐고, 요부.”
세실리아는 허탈한 실소를 내뱉었다.
영혼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찬바람이 심장을 들쑤셨다.
아파 죽겠네.
한편 그녀의 공허한 웃음에 더 짜증이 치밀었는지, 벤힐 백작이 알아서 상황을 더 고해바쳤다.
“생-뢰크 전체가 난리가 났어! 다른 지방은 아닌 줄 알아?”
“…….”
“왜, 널 한평생 키워주신 이들은 따로 있는데 베르뉴의 체포에 협력하고 싶지 않았나? 그래서 널 사랑한다는 남자의 등 뒤에 숨어? 목숨이 그렇게도 아까웠어? 그들은 널 위해서 목숨 바쳐 지켰는데!”
“아…… 그렇게도 보이는군요.”
“아? 지금 ‘아’라고 했나?”
벤힐 백작은 신경질을 냈고,
“네. 그랬습니다.”
세실리아는 멍하니 입술만 움직여 대답했다.
벤힐 백작이 분에 못 이겨 기어이 손을 치켜든 순간.
알리샤가 휙 끼어들어 연신 짖어대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숫제 그의 바짓단을 물어뜯을 정도로 거세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황급히 정신을 차려, 컁컁대는 알리샤를 달래었다.
“자, 알리샤. 자, 자.”
“…….”
“언니는 괜찮아.”
원체 대형종인지라, 알리샤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다른 종의 성견보다 컸다.
그런 강아지가 이를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구니 벤힐 백작이라도 주춤댈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아는 대충 다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여러모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
“…….”
“그리고 하나 말하자면, 어머니께서 나중에 깨어나신 뒤 당신의 행동에 대해 뭐라 말씀하실지 궁금해지긴 했어요.”
이 자리에서 염치가 없는 건 비단 그녀만은 아니지 않을까.
전혀 놀랍지 않게도, 벤힐 백작은 숨겨진 뜻을 정확히 읽어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남자가 분기탱천한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세실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름의 퐁레프가 화려하고 발랄하다면 겨울의 퐁레프는 장엄하면서도 정적이었다.
‘이곳에서 사계절을 몇 번을 보냈더라…….’
알리샤가 발로 바닥의 융단을 콩콩 두드려 패는 동안, 세실리아는 발을 멈춰 서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백작의 말대로 서늘한 푸른빛을 띤 하늘 곳곳에 검은색 연기가 맴돌고 있었다.
……광장 쪽이네.
그녀의 얼굴이나 카메오나, 뭐 그런 걸 태우려는 시위겠지.
알렉시스만 아니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지만, 세실리아는 차마 속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어쩌면 그녀보다 알렉시스가 더 많은 욕을 먹고 있겠지.
‘어쩌면 알렉시스만이 욕을 먹고 있을 수도.’
지금 제국은 ‘그녀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었다’라는 진실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라고 선언한 황제가 더 기가 찰 터였다.
‘가시밭길.’
그 단어를 속으로 다시 뇌까려보았다.
가시밭길을, 어머니와 아버지께선 함께 걸으셨다.
그런데 정작 자식인 그들은 그 부분만큼은 부모님께 배우질 못한 모양이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튕겨내고 홀로 걸으려 한다.
그리고 그녀는 알렉시스를 쫓아내고 이제 홀로 걸으려 하지.
‘미안해, 알렉.’
네가 날 지키기 위해서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는 알겠는데…… 나 역시 널 다시 올려 보내기 위해선 날 기꺼이 망가뜨릴 거야.
이 길을 난 걸어도 되지만 너만은 걸으면 안 돼.
‘너만은.’
난 이미 네게 충분히 많은 상처와 고통을 줬잖니. 더 줄 수는 없어.
그러니 안 돼.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다치면 정말 죽고 싶어지니까,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더욱 안 돼.
‘사실 이건 내 의무 아닐까.’
나 때문에 망가진 널, 그리고 네 권위를…… 어떻게든 내가 직접 바로잡는 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이야.
그게 내 최대의 도리이자 가치겠지.
세실리아는 칭칭 두르고 있던 숄을 더 싸맸다.
‘언제까지 넋을 놓고 살 수도 없는 법이고.’
이미 바닥까지 떨어졌다.
산산조각이 났다고 해서 그대로 계속 쓰러져 있을 수는 없다.
한평생 남의 눈요깃거리로써 생을 마감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딱 되었네.
‘……더 나은 가치를 찾은 거잖아.’
세실리아는 검은색 연기 한 줄기를 무감하게 감상하다 다시 발을 옮겼다.
* * *
“이제 어쩔 거예요, 선배?”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왜 네가 해?”
시엘샤가 펜을 휙 던져, 에드릭은 고개를 까딱 기울여 피했다.
본래 황궁에 머물기로 한 세 명의 마법사가 아닌데도 어쩌다 보니 그까지 퐁레프에 머물게 되었다.
“선배.”
“응.”
“……이러다 정말 알렉시스 뤼셍이 폭주하면 어쩌려고요? 현 황제는 카밀 베르뉴보다 더 마력이 강해요. 그뿐일까, 그 인간 전투 능력치까지 종합하면.”
“나도 알아.”
알렉시스 뤼셍이 폭주하면 지금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여럿 발생할 터.
아마 퐁레프는 날아가고 그 안의 사람들은 전원 사망하는 결말이 시작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세실리아 뤼셍이 어떻게든 각인해 주길 바라야…… 아닌가.
시엘샤는 ‘베르뉴의 친딸’이라는 문구를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모두가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결말은, 알렉시스 뤼셍이 제 마음을 정리하고 세실리아 뤼셍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각인을 이루는 것이리라.
그게 모두를 위한 최선이었다.
그렇담 세실리아 뤼셍은 제 아비의 죄를 직접 처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며, 제국은 지배 가문의 막장 짓을 잊을 수 있을 테다.
알렉시스 뤼셍은 원만하게 다른 이와 사랑을 이루고는 이상적인 군주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테지.
‘……가능, 할까?’
관리자를 불러서 알렉시스 뤼셍의 기억을 날려달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사랑도 잊힐까?
아니.
애초에.
관리자는 지금 대체 뭐 한대? 자기 딸이 이렇게까지 끌려…….
“선배.”
“응?”
에드릭이 문을 향해 눈짓했다.
그제야 시엘샤는 누군가가 규칙적으로 노크하는 소리를 들었다.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쿵 뛰어 숨을 훅 들이켜야 했다.
이윽고 천천히 문을 열어주었을 때.
“안녕.”
비현실적인 머리색을 자랑하는 여자가 선선히 인사를 건네었다.
세실리아 뤼셍.
방금까지 그녀의 생각을 차지했던 주인공께서.
달빛을 곱게 빗어 촘촘히 땋은 듯한 은색.
그런 색채를 품은 머리칼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는데도, 시엘샤는 순간 넋을 잃었다.
파리하고 초췌한 낯의 여인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지독했다.
첫눈에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참 독한 미모라는 감상까지 일었다.
‘……무서운 얼굴이네.’
얼굴만은 아니긴 하지.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나직한 와인 향, 비 오는 밤처럼 쓸쓸하고 아스라한 분위기, 눈 밑에 자리한 서글픈 음영과 체념이 언뜻 묻어 있는 미소.
살이 빠진 탓에 더 날카로워진 턱선과 전체적으로 무덤덤한 표정까지 여자는 모든 부분에서 고혹적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냥 넋을 잃고 하염없이 감상했을 터다.
‘요부’라는 표현은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세실리아 뤼셍은 손짓 한번으로 모든 사람을 무릎꿇릴 수 있어 보였다.
당장 시엘샤 자신만 해도 발밑에 몸을 던져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라고 사죄하고 싶어지는걸.
“이른 아침입니다, 전하.”
“미안. 너무 일렀을까?”
“……그건, 아니요.”
시엘샤는 눈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하다가 문득 방을 돌아보았다.
노숙도 많이 하는 그들인지라 원체 방의 위생이나 청결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머무른 지 사흘도 안 되어, 퐁레프의 방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소리다.
“어, 전하. 지금, 방이 너무 엉망이라…….”
“괜찮아.”
세실리아가 명료하게 대꾸했하는 바람에, 시엘샤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비켜 여자를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발을 올려놓은 채 진을 개발하고 있던 에드릭이 의자에 굴러 떨어질 듯이 놀란다.
“저, 저, 저, 전하?”
“아직 파양되지 않았나.”
“…….”
“으응, 아직 않았구나.”
세실리아는 덤덤하게 뇌까린 뒤 의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시엘샤는 저가 앉고 있던 안락의자를 건넨 뒤 자신은 근처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전하. 그래서 어인 일로.”
화내러 오셨습니까?
여자가 너무 예뻐서일까,
시엘샤는 자신의 뺨 한 대, 아니, 세 대는 내어줄 수 있다는 멍청한 생각을 해버렸다.
지금이라도 뺨을 내어드려?
“본디라면 돌고 돌려 부드럽고 매끄럽게 본론으로 진입해야 하지만.”
“……네.”
“지금은 그럴 때도 아니고. 그대도 그런 화법엔 지루해할 테니.”
붉은 입매에 슬쩍 스며든 웃음이 기가 막히게 환상적이었다.
상황에 안 맞지만, 약간 짓궂어 보이기도 한 호선.
알렉시스 뤼셍이 종종 보여주는 미소였다.
남매라서? 아님 연인이라서?
시엘샤는 빙긋 휜 입꼬리를 보며 자신이 떠올렸던 생각을 철회했다.
‘알렉시스 뤼셍이 다른 여자를 찾긴 무슨…….’
악연도 연이라지.
저 둘은 운명이 반대하여 더 강한 인연이었다.
“날 미끼로 베르뉴를 잡으려 한다고 들었어.”
“……그게 원래의…… 목표긴 했습니다.”
“되어줄게. 대신 날 마탑으로 데려가줘.”
“아니, 애초에 미끼가 되어주신다면 마탑으로 가야 하긴 합니다만.”
시엘샤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검지로 짚었다.
지금 대체 무엇을 들은 거지? 무슨 말을?
‘……세상에.’
반쯤 경악한 눈으로 황녀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자자자자자자잠깐.
내가 꿈결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정말? 정말 우리의 미끼가 되어주신다고? 정말로?
세상에! 뭐지, 내가 오늘 운세가 좋은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복권을 살까?
시엘샤는 기쁨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숨기려 노력하며, 일단 더듬더듬 질문을 내뱉었다.
거슬리는 점부터 하나 짚고 넘어가자.
“그…… 러니까.”
“…….”
“황제께서 당신을 반려로 삼고 싶어 하시는…… 건…… 아시…… 죠?”
세실리아는 그저 웃었다.
맥없는 미소는 빗속에서 시들어가는 백합꽃과도 닮았다.
어여쁘다. 그만큼 처연했고.
“알지, 잘 알지.”
“…….”
“나만큼 잘 아는 이가 또 있을까…….”
“어어, 어. 그럼.”
“그럼에도.”
흐릿한 목소리일지언정 확언이었다.
짧기에 더욱 확고한 대답.
뭔가 이상한데.
시엘샤는 연신 눈을 또록또록 굴리다가, 본인의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을 긁어모아 경고했다.
“……저흰 전하를 지키려 최선을 다할 거긴 하거든요.”
“응.”
“근데 생존은 보장은 못 드려요. 그 보장은 베르뉴 그 새끼가 하지 저희가 하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전하께선 최악의 경우, 납치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 알아.”
이번에도 선선히 나온 대답.
시엘샤는 살짝 얼이 빠져 황녀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위험하고 다칠 수도 있다는데 이렇게까지 쉽게 동의를 해?
아니, 그 전에.
‘알렉시스 뤼셍은 어떡하고?’
각인을 제발 해달라 청하는 남자는…….
아. 그렇구나.
시엘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렉시스 뤼셍은 그들 사이의 미쳐 버린 악연을, 그들을 반대하는 세상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다만 세실리아 뤼셍은 그러지 못할 뿐이다.
시엘샤는 희열 사이로 스멀스멀 치켜들려는 죄책감을 휙 짓밟았다.
폭주한 마법사의 체포와 아직 폭주하지 않은 마법사의 관리.
그중에서 그들의 첫 번째 의무는 전자였다.
몽테-페르트에겐 카밀 베르뉴를 잡아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었으므로…….
그러니 잡아야 했다.
잡을 것이다.
‘지금 이 기회에 집중해.’
……무엇보다 그들은 여자의 결정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베르뉴를 잡아야지.’
그 뒤 황녀를 요리조리 구슬려서, 다시 알렉시스 뤼셍에게 돌려주면 그만일 터였다.
“알겠습니다.”
시엘샤는 기뻐 날뛰는 심정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마탑으로 데려가 드리지요.”
“그래. 고마워.”
“잘 부탁드립니다.”
황녀는 딱히 대꾸하지 않고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풀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달빛처럼 아련했다.
* * *
몽테-페르트 소속 마법사들의 방을 떠난 뒤, 세실리아는 이번엔 제 방으로 향했다.
한평생 살았던 자신의 방이었는데도 어째 아득히 머나먼 옛날의 일 같았다.
그녀는 다소 생경한 심정으로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변치 않았다.
칼리아가 울다가 만들어 낸 카펫의 눈물 자국도, 어린 알리샤가 물어뜯어 터지게 만든 쿠션도.
어느 것 하나 자리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바뀐 건 그녀 혼자일 뿐.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방을 지키던 시종인 콜린이 휙 일어서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안녕.”
“……저, 저, 저, 저, 저, 전하?”
“그것참 격한 반응이구나.”
세실리아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다 말고 아이의 울먹이는 얼굴을 보았다.
커다란 눈엔 눈물이 글썽글썽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든 씩씩하게 눈물을 닦으려 들지만 실패했다.
결국 콜린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아이구우, 왜 울어어.”
세실리아는 시종의 머리칼을 휙휙 쓸어주었다.
“왜 울어, 응?”
“하지마아안, 전하께서어…….”
“난 괜찮아.”
“만날 괜찮다고 하시잖아욧!”
그건 그래.
세실리아는 흘끗 눈을 굴려 알리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었다.
평상시는 기민하게 제 뜻을 알아차리던 강아지는 이번만은 배은망덕하게 굴었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했으면서도 휙 고개를 돌려 외면했으니.
대충 네가 만든 일이니 네가 책임져라…… 라는 거니, 강아지?
너무 매정한데?
그녀는 시종의 옆에 앉아서, 아이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원체 씩씩한 아이인 덕분에 눈물은 비교적 빨리 그쳤다.
손수건에 코를 팽 풀던 콜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세요, 전하? 지금 밖에서…….”
“난 문제 없지.”
아이의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한편 제 얼굴이 얼마나 초췌한지 모르는 세실리아는 최대한 천연덕스레 웃었다.
“내가 아니라 알렉이 고생이잖니.”
“하지만.”
콜린은 끝내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세실리아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어주고는 제 침실로 쏙 들어갔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느낌이니 ‘그것’ 역시 서랍 안에 있을 테지.
세실리아는 서랍을 열고 안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의 질감이 손끝에 감겼다.
‘……찾았다.’
그녀가 유독 잠을 이루지 못하자, 노링 남작이 신신당부와 함께 건네주었던 수면제 약병.
반투명한 병을 내려다보며 세실리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여보았다.
‘한 방울만 쓰라고 했었지.’
세실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엔 책상 위를 뒤적였다.
밖으로 나섰을 땐 알리샤와 놀아주고 있던 콜린이 다시 쪼르륵 달려왔다.
눈을 귀엽게 깜박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실리아는 아이의 뺨을 장난스레 콕콕 찔러준 뒤 쪽지를 건네었다.
“하나는 블랑슈에게.”
“블랑슈 휴스턴 후작 영애에게요?”
“응. 이거. 또 다른 하나는 알렉에게.”
“네!”
콜린이 쪽지 두 개를 들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아이에게로 살짝 숙였던 허리를 펴고는 꼿꼿하게 세웠다.
“다른 사람들은? 유모는 어때? 키리는?”
“어제저녁에 오셔서 청소 좀 하시고 가셨어요.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안부 전해주렴.”
“네!”
“늘 고맙구나.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알았지?”
“네!”
세실리아가 얼른 출발하라고 손짓하자, 아이는 심부름을 처리하기 위해 밖으로 총총 달려 나갔다.
손을 흔들며 배웅해준 뒤 침실 문을 다시 열었다.
그녀보다 알리샤가 먼저 더 위풍당당하게 입장했다.
녀석이 제 전용 쿠션에 냉큼 올라앉는 동안, 세실리아는 화장대로 가서 빗을 집어 들었다.
그간 시녀들에게만 시중을 맡기긴 했어도 그녀 본인이 아예 못 꾸미는 건 아니었다.
“이런.”
처참하다. 맙소사.
유모나 칼리아가 보았더라면 곧장 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세실리아는 거울 안을 들여다보며 분주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조금의 분칠만으로도 초췌함을 덜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세실리아는 제 얼굴이 그럭저럭 봐줄 만한 수준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 뒤, 흘끗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20분 전.
유리 온실까진 10분 정도 걸리니, 아직 10분 정도의 여유 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옷장을 뒤져 스스로 입을 만한 옷을 골라보았다.
“이게 가장 낫나?”
연보라색 이브닝드레스를 꺼내 입으며 그녀는 피식피식 웃었다.
한평생 구경거리로 살아온 탓일까, 이 순간에도 그녀는 외모를 신경 쓰고 있었다.
우습다는 감정 사이에 참담함이 확연히 끼어 있었지만 무시했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떠나는 순간만은 예쁘게 보이고 싶잖아.’
드레스의 주름이 없도록 편 뒤 머리를 재차 다듬었다.
마냥 산발이었던 머리칼은 이제 다듬어져 그래도 깔끔해 보이고 있었다.
컹!
뒤에서 알리샤가 눈치 빠르게 짖어주어, 세실리아는 시계를 늦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오전 9시 48분.
신발만 찾아 신으면 그만이었다.
도도도 달려가 진보라색 플랫슈즈를 찾아 신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친 걸 깨달았는지 알리샤가 꼬리를 흔들며 쫄래쫄래 다가왔다.
“같이 갈래?”
컹컹!
세실리아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알리샤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를 뛰어가는 강아지의 꼬리는 정말 신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했더니…….’
세실리아는 어질어질한 머릿속을 가다듬으려 중간 중간에 쉬어야 했다.
저 앞으로 뛰쳐나가던 알리샤는 참 성실하게도 그녀에게 돌아왔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애교에 세실리아는 번번이 손을 내려 새하얀 귓등을 긁어주어야 했다.
그러면 알리샤는 다시 내달리기 시작해, 세실리아는 헉헉대며 강아지를 쫓아가야 했다.
누가 주인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추격전이었다.
“……고마워.”
열심히 끌려온 덕분일까, 그래도 약속 시각 3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리 온실의 문 앞에 도착한 세실리아는 완전히 주저앉아 알리샤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거대 사모예드가 못내 기분이 좋은지 앞발로 바닥을 콩콩 내리친다.
숫제 혀로 그녀의 얼굴을 핥으려 들어, 세실리아는 재빠르게 피했다.
“안 돼. 언니가 화장했을 땐 안 된다고 했지!”
그러게 왜 화장했냐, 주인아!
알리샤는 심술을 담아 진보라색 신발을 콩콩 때려주었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온실을 지키고 있는 시종을 돌아보았다.
“들어갈 수 없니?”
“……있습니다.”
“…….”
“아직까진 황녀 전하시니까요.”
전하께선 파양되지 않으셨습니다.
시종은 정석적인 답변을 내어 준 뒤 문을 열어주었다. 알리샤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다닥 뛰어 들어갔다.
녹색 사이로 강아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세실리아는 시종을 다시 쳐다보았다.
피곤한 미소 속에 깃든 질문을 읽었는지 그가 알아서 대답했다.
“폐하께선 아직 도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안온한 아침 보내시길 바랍니다, 전하.”
그녀가 들어가는 동안 시종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세실리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돔의 꼭대기에 새겨진 뤼셍의 문장이 여느 때처럼 그녀를 굽어보았다. 그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덧그리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겨울인데도 변함없는 녹색이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때마침 날아온 금색 나비가 한 차례 나풀거리다 다시 사라졌고, 또 어디선가 새가 경쾌하게 지저귀었다.
나이팅게일. 아니.
울새?
‘푸른 눈만 아니면 되었지.’
세실리아는 엷게 실소하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안으로 내디뎠다.
밖은 추운 지옥이거늘 안은 다정한 낙원이다. 그 차이가 그녀를 더욱 헤집었다.
‘네 삶은 이랬어야 했지.’
온실의 지붕을 뚫고 햇빛이 한아름 쏟아져 내렸다.
아래에 수놓인 빛의 길을 감상하며, 세실리아는 그늘을 골라 걸었다.
하지만 발길의 끝, 그들의 약속 장소인 테이블만큼은 그림자가 없었다.
대리석 식탁엔 오롯이 빛이 깃들어 있어 세실리아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반들거리는 표면이 햇빛을 부수며 흩뿌렸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채광이 영혼까지 꿰뚫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장 아픈 건, 가장 참담하게 심장을 뜯어내는 건.
‘텅 빈 네 개의 의자.’
저 의자들이 다시 찰 리는 없을…….
어린 소녀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세실리아는 홀린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어린 소년이 작게 투정부리는 목소리마저도 들리는 듯했다.
또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어 들려오는 성인 남자의 다정한 타이름, 성인 여성의 맑은 잔소리.
식탁에 바싹 붙어 선 채, 세실리아는 천천히 손을 표면에 내려놓았다.
대리석 특유의 차갑고 고운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토록 볕을 받고 있었는데도 달궈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세실리아는 속절없이 침잠했다.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시간과 추억을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식탁에 넷이 아닌 셋이 앉아 있을 때도 있었으리라.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인 그녀가 없었던 시절.
젊은 부부와 아주 어린 사내아이가 화목하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을…….
세실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양지바른 곳인 만큼 빛이 곧장 그녀의 얼굴을 찌르듯이 강타했다.
제 머리칼이 뒤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도록 내버려 두며 한참을 견뎠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그리고 스스로를 찢어보고 싶다는 잔혹한 충동을.
‘……나만 없었으면 되었을 텐데.’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아니면 내가 내 분수를 깨닫고 일찍이 이 자리를 떠났더라면.
그들이 주는 다정함에 취해 본디 자리를 잊었었다…….
그때 단단한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그 손은 천천히 고개를 들게 만들더니, 똑바로 기립하게 했다.
손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주며 세실리아는 느리게 눈을 떴다.
역시나.
알렉시스가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계시지 마십시오.”
“왜?”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습니다.”
신기루처럼.
아니면 무지개처럼.
가장 황홀한 순간을 선물해주고는 미련 없이 떠나는 그런 매정한 자연현상처럼.
세실리아가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자 알렉시스는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며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커다란 손 위에 은빛이 웅덩이가 되어 고였다.
“아니, 첫눈이겠네요.”
“……뭐래.”
“함부로 녹지 마십시오.”
“한평생 겨울에 살게, 알렉?”
“그것도 괜찮겠습니다.”
알렉시스가 말없이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칼 끝에 입을 맞추었다.
담백하게 떨어지고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이어 손을 경쾌하게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의 수신호에 시종들이 아침 식사를 대령했다.
그들은 예법을 정확히 지키며, 황제와 황녀를…… 아니, 황제와 그의 여인을 흘끔거리지 않은 채 접시를 내려놓았다.
준비가 마무리되자마자 그들은 기척 없이 다시 떠났다.
알렉시스가 말없이 식기를 내려다보는 동안 세실리아는 그린 페퍼를 그쪽으로 건네주었다.
그녀가 며칠간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듯이 알렉시스 역시 대체로 굶은 상태였다.
마리사가 깨어나면 기절할 만큼 그들은 홀쭉해져 있었다.
“드시지요.”
알렉시스가 이윽고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세실리아는 손을 뻗어 사과 주스부터 홀짝였다.
느긋하게 흐르는 아침 속에서 스크램블드에그를 써는 손동작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누님께서.”
알렉시스가 느릿하게 속삭였다.
“이런 자리에 먼저 초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콜린에게 부탁하여 알렉시스에게 건네었던 쪽지는 퍽 간결했다.
온실에서의 아침 식사에 초대하고자 한다는 내용.
세실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야 할 내용들은 많은데.”
“…….”
“우리 둘 다, 제대로 대화한 적이 없으니까.”
알렉시스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빙긋 웃고는 물컵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예법은 때려치우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
“파양해줘, 알렉. 호적에서 나갈게.”
알렉시스가 서늘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물로 입을 헹구고는 말끔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불가합니다.”
“왜?”
“지금 상황에서 파양한다면─”
“지금 상황이 가장 파양하기에 좋지.”
세실리아는 거침없이 말을 끊었다.
맞은편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자, 그의 보랏빛 눈이 거칠게 너울거렸다.
햇빛 아래에서도 머리칼은 여전히 짙디짙다.
그녀가 한때 지녔던…… 아니, 지녔다고 믿었던 흑색.
“당신이 현재 황녀여야 안전한 상황임은 인지하고 부탁하시는 겁니까?”
“난 파양해달라고 했었잖니. 이, 비극이 오기 전부터.”
“…….”
“어차피 앞으로 파양되어야 하는 거 지금 하는 게 낫지. 지금 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기도 하고.”
그녀의 생각을 가늠하려는 듯 알렉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실리아는 발끝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그게 파양 이유입니까?”
세실리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선선히 대답했다.
“……이유는, 난 널 더는 동생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뭐로 보십니까?”
비슷한 대화를 나눴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그녀는 아주 호기롭게도, 알렉시스를 ‘동생’으로만 본다며 강조했었다. 이후 그들은 세레인에서 유치한 몸싸움이나 벌였었지.
그 순간의 안온한 햇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싱그러운 풀의 향취도, 잎을 간질이던 산들바람도, 늦여름 특유의 뭉게구름도 전부 사라지고 지금은.
이젠 창백한 햇빛만이 남아 있을 뿐.
오랜 시간이 걸려 그녀는 알렉시스를 ‘이성’으로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뼈저릴 정도로 너무 많은 걸 잃었다.
“……파양해줘, 알렉.”
세실리아는 흐릿하게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알렉시스가 무덤덤하게 대답한 뒤 스크램블드에그 한 조각을 쿡 찔렀다.
“오늘 중으로 프랑수아즈와 니콜라에게 얘기하겠습니다. 호적은 깔끔하게 정리될 겁니다.”
“부디.”
알렉시스가 눈짓으로 그녀의 식기를 가리켜, 세실리아는 덤덤히 식전빵을 뜯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입 베어 먹었을 때 알렉시스는 잠자코 질문했다.
“그래서. 얼마나 넣으셨습니까?”
“응?”
“수면제 말입니다.”
저건 확신이다.
세실리아는 굳이 발뺌하기보단 딸기를 콕 찍으며 대답했다.
“그, 노링 남작 말로는 세 방울이면 물소도 기절한다던데…….”
“설마 세 방울 넣진 않으셨겠죠, 누님?”
알렉시스가 기겁하며 되묻는 것에 세실리아는 흘끔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쭈뼛쭈뼛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검지만 치켜들자 남자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한 방울이면…… 일곱 시간은 족히 잔댔어서…….”
“저라면 한 세 시간 자겠군요.”
“……물소니?”
알렉시스는 대답 대신 피식 웃더니, 방울토마토를 우물거렸다.
그의 동작은 식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확연하게 느려져 있었다.
나른하고 게으른, 졸음기가 가득 묻어 있는 움직임들.
수면을 예감했는지 그가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마지막으로 머리 모양을 가다듬는다.
더없이 우아한 자태를 지켜보며 세실리아는 숨을 죽였다.
“세 시간.”
남자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선언했다.
“세 시간 동안 살아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
“행여 죽기라도 하시면, 이 세상도 그냥 함께 끌고 가드리지요. 협박도 농담도 아닙니다.”
“그렇게 들린다.”
알렉시스의 입꼬리가 다시 장난스레 휘어졌다가 멈췄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더듬자, 다정한 손이 나타나 그녀의 손등을 감싸주었다.
“미안해.”
“그러셔야죠.”
“……알면서도, 왜 먹었어?”
“당신이 주었으니까.”
눈물을 흘린 순간부터 울음이 고장 난 모양이었다.
속에서부터 뜨거운 응어리가 치솟아, 세실리아는 다소 힘겹게 씹어 삼켰다.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경련을 눈치챘는지 알렉시스가 말없이 손을 끌었다.
나비가 꽃 위에 내려앉듯이, 손마디 위로 입맞춤이 나붓하게 깃들었다.
수마에 속절없이 공격당하는 주제에 남자는 끝의 끝까지 야무지게 입을 맞추었다.
“누님.”
“응.”
“이러실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높낮이 변화 하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한없이 평연한 어조로.
“……안 그러시길 바랐습니다.”
원망을 읊는다.
“너무 울진 마시고요.”
그녀는 정말 끝의 끝까지 알렉시스의 부탁을 못 들어주나 보다.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며 남자의 뺨을 적셨다.
그가 움찔하며 손을 들었지만, 그 손은 그녀의 뺨에 닿기 전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풀썩 아래로 쓰러져 내렸다.
“……잘 자, 알렉.”
세실리아, 남자의 붉은 입술이 마지막으로 속삭인 듯했다.
약물에 취한 보랏빛은 기어이 눈꺼풀 뒤로 스러졌다.
세실리아는 기껏 공들인 화장이 지워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계속 눈물을 떨궜다.
멈추고 싶어도 도저히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서럽고, 너무 속상하고, 또 너무, 참담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알렉.
“잘못했어…….”
뜨거운 눈물이 계속 떨어져 내리며 남자의 옷을 적셨다.
너무 울진 말랬는데, 그런데…….
하필 ‘유리 온실’이었다.
그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훨씬 더 아프디아플 이곳에서 그를 속였다.
이제 곧 그를 등지고 떠날 테고.
그냥 단둘이 있을 익숙한 장소를 택한 것일 뿐인데, 저도 모르게 장소를 너무 잘못 선정해버렸다.
세실리아는 힘겹게 울음을 삼켜내며 눈물을 쓱쓱 닦았다.
“미, 안해…….”
하지만 이래야 하잖아, 알렉.
널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게 최선이잖아.
‘난 도저히 네가 나 때문에 칼을 대신 맞는 꼴을 못 보겠어.’
세상이 꽂는 그 칼들, 전부 내가 맞아야 하는데 왜 네가 대신 맞는 건데.
너는.
빛의 길을 걷는 게 마땅한 사람이잖아.
그럴 만한 자격도 권리도 전부 갖고 있고…….
무엇보다 넌 눈부시게 찬란한 사람이니까.
나와는 달리.
‘세 시간.’
세실리아는 헐떡이며 애써 울음을 멈추었다.
알렉시스가 직접 공언한 만큼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세 시간이었다.
‘세 시간 동안 살아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안 죽어.
안 죽을 거야.
난 죽으려고 가는 거 아니야. 네 곁을 평생 떠나기 위해서 가는 건 더더욱 아니고.
“……돌아, 올게…….”
세실리아는 냅킨으로 흥건한 눈물을 닦아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욕실에 들러 화장을 전부 지워낸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오랜만에 발을 딛게 된 퐁레프의 정문 밖은 역시나 기자들과 구경꾼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기자들 너머에 자리한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수의 시위대다.
그들은 전부 알렉시스를 말리겠다는 일념으로 찬 겨울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뤼셍은 그들의 지배 가문을 사랑했다.
더없이 존경했고, 그들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뤼셍 황실 역시 제국에게 마땅한 존중으로 표해줘야 했다.
“그 여자는 아니지!”
누군가가 씨근덕거렸고,
“누이잖아. 아니, 누이이기 전에 그놈 딸이라며!”
또 다른 이가 발을 쾅 굴렀다.
기자들은 시위대의 모습을 빼곡하게 기록하며 어떻게 해야 가장 자극적인 문구를 뽑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크흠. 다들 조용!]
마법으로 인해 증폭된 시엘샤의 음성이 전부를 꿰뚫은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 바로 곁에 있던 세실리아가 눈을 또로록 굴리는 동안, 시엘샤는 그녀의 팔뚝을 단단히 잡은 채로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집중, 집중!]
동시에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빛 세례에 익숙한 세실리아와는 달리, 몽테-페르트 소속의 다른 마법사들은 경악한 모양이었다.
얼굴을 가리려는 둥 머리를 단장하려는 둥 있는 대로 허둥거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들이 요란법석을 떠는 동안 세실리아는 말없이 기자들을 마주했다.
기자들 역시 고요하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사진 기자들만이 제 임무를 다하겠다는 듯 미친 듯이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
누군가가 탄식했으며.
“걸작이네.”
또 누군가가 체념했다.
‘세실리아 뤼셍’, 아니지, ‘뤼셍’인지는 모르겠으니까, 어쨌든 그들의 ‘황녀’였던 여자를 보자마자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감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저 여자를 포기할 리 없다.’
머리를 쳐서 제 기억을 삭제라도 하지 않는 한, 저 여자를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을 터였다.
가히 기가 질리는 외모였다.
무서울 정도로 압도적인 미.
흑발이 은발로 바뀐 지금, 그 미모는 강조되었으면 강조되었지 절대로 덜해지진 않았다.
여자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한겨울 깨끗한 눈 속에서 피어난 은방울꽃처럼.
꽃에 독성이 있다는 사실도 고려하면 정말 완벽한 비유일 수도.
어쨌든 간에 그녀는 더없이 맑고 청초해 보였으며, 그만큼이나 처연하고 아련해 보였고, 몽환적이고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채로 보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천사 같은 미모에 악마 같은 매혹.
‘미쳤다.’
그런 표현을 쓰며 비속어까지 저절로 내뱉을 수밖에.
그녀에게 돌을 던지려 드는 사람은 많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보는 것만으로 영혼이 후려쳐지는 감각을 선사하시는데, 어찌 그러겠어.
어찌.
‘지금 여론이 그녀에게 적대적이라고?’
사진이 신문에 실린 순간 정반대로 뒤바뀌어도 전혀 놀랍지 않겠다.
기자들이 다소 질린 낯으로 황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사이, 시엘샤가 비교적 진정하여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는 박수를 짝짝 치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자자자자. 그럼 여러분.”
황녀에게로 쏠렸던 관심이 겨우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좋은 아침이네요~ 저는 몽테-페르트 마탑 소속 척단의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는 시엘샤 듀페르라고 하고요.”
“…….”
“그럼 뭐, 기자 회견 겸 하나 얘기하자면.”
“…….”
“우리의 황녀, 음, 네, 세실리아 전하께선 베르뉴 그 개자식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노라고 약조하셨어요.”
기자들의 얼굴은, 그 속에 쓰여 있는 질문은 전부 똑같았다.
그럼 황제는?
그들의 하나뿐인 태양, 알렉시스 뤼셍 황제 폐하께서 ‘저 여자만이 유일하다’며 고백을 공언한 지 사흘도 안 지났다.
‘……이게, 답인 건가?’
세실리아 뤼셍을 그들의 황후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정작 저 여자가 그 자리를 걷어차니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찜찜한 표정으로 서로를 흘깃거렸다.
한편 은빛의 여인은 백합 같은 자태로 고요히 선 채, 뒤의 퐁레프를 향해 머나먼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감정이 너무 많이 채워져 있으면 되레 공허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여인의 분위기엔 여백이 가득했으며, 그만큼 허허롭고도 초연해 보였다.
저 무감한 얼굴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저절로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호기심 어린 눈초리 속에서 세실리아는 오래오래 침묵을 지켰다.
시엘샤와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출발하기 전 퐁레프의 사람들은 거의 모조리 달려 나와 그녀를 제지했다.
유모도, 칼리아도, 다른 시녀들도, 심지어 프랑수아즈와 니콜라까지, 신발이 벗겨질 듯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었다.
‘안 됩니다. 지금 대체 어디를!’
‘자자, 여러분. 진정하시고요. 저희가 전하를 곧 죽을 곳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사지 맞잖아!’
누군가가 울음 섞어 울부짖었다.
세실리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 우는 시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했다.
그들을 기만했다는 진실은 변함없는데, 그들이 기만당했다는 현실 역시 변치 않는데, 저들은 그녀를 위해 울어주고 있었으니까.
‘폐, 폐하는…… 어쩌시고…….’
히끅 우는 소리 사이로 던져진 질문.
세실리아는 새삼스레 제 강아지를 온실에 두고 왔음에 감사했다.
만약 알리샤가 달려 나와 그녀의 옷깃을 물고 늘어졌다면 정말 무너질 수도 있었을 테니.
‘돌아올 거야. 기다려 줘.’
그녀의 약조에 사람들의 표정이 계속 일그러졌다.
유모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로 간절한 협박을 읊조렸다.
‘안 돌아오시기만 해보세요!’
‘그래.’
‘약속하셨어요!’
‘그래, 그래. ……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정말로.’
알렉시스가 그녀에게 일깨운 뼈저린 말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마리사가 깨어났을 때 행여라도 그녀가 죽어 있다면, 마리사는 평생 용서치 않겠지.
나이를 스물셋이나 먹어도 화난 어머니는 무서운 법이다.
그러니. 세실리아는 반드시 살아야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녀 본인이 생각해도 딱히 통하지 않을 듯한 당부긴 했다.
‘여전히 울고 있으려나.’
유모의 눈물범벅인 얼굴을 떠올리며 세실리아는 치마를 살짝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뒤에선 퐁레프와 전혀 다른 태세를 내비치는 이들이, 공교롭게도 퐁레프의 이들과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황제는요?’
실제로 이 물음을 입 밖으로 내민 자들은 없긴 했다.
하지만 저들의 낯에 깃든 질문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자신들의 황제는 어떡하냐고.
그와의 각인은 어떡할 거냐고.
“……너흰 그가, 나 말고 다른 여자와 각인하길 바라겠지.”
세실리아는 짧게 뇌까렸다.
기자들은 펜을 움직이지도 못하며 숨을 죽였다.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대던 사진 기자들 역시 손을 멈춘 상태였다.
“마찬가지야.”
말을 뱉고 나서야 살짝 후회가 된다.
만약 이 독백이 알렉시스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안 가서.
‘하지만, 알렉.’
진심이야.
네가 선택한 여자가 ‘세실리아 뤼셍’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쯤 훨씬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그런 상상을 자주 하거든.
‘널 사랑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선택했더라면, 그 누군가는 당연히 널 선택해줬겠지.
퐁레프로 돌아오자마자 넌 곧바로 쌍방 각인에 성공했을 테고…….
언제 폭주할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다음 날을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진 않았을 테지.
세실리아는 해가 뜨는 다음 날을 두려워하며 잠드는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설치고 설쳐 새벽에 깨어나면 너울거리는 푸른빛이 커다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새벽은 바다와도 같았다.
침잠하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가라앉고 또 가라앉다가 결국 집어 삼켜지는.
“나 역시 그가…….”
다른 여자랑 각인하여, 그렇게 행복하길 바라.
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목이 멨다.
뒷말을 도저히 마무리할 수 없어 문장을 어중간한 곳에서 끊어버렸다.
굳이 어설프게 목소리를 긁어내어 촌극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터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돌아서서 기자들을 응시했다.
“전하.”
시엘샤 듀페르가 눈치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에스코트라도 해주려는 모양새에 세실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실래요?”
“응.”
“자자자자자잠깐만요, 황녀 전하. 지금 대체 어디로 가십니까!”
한 질문이 드디어 우렁차게 들려왔다. 기자들의 경악이 깨지며 그들은 일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펜들이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실리아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몽테-페르트.”
“네? 어째서요? ……무슨 연유로?”
“미끼가 되러.”
세실리아는 지독히 간략하게 답을 건네었다.
허둥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건 시엘샤와 에드릭의 몫이었다.
카밀 베르뉴를 잡으려면 어쩌고저쩌고 미끼 어쩌고저쩌고…….
척단의 마법사들이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는 동안, 세실리아는 다시 퐁레프를 쳐다보았다.
‘저기 어딘가엔 알렉시스와 알리샤가 있겠지.’
굳이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여 제 피투성이 심장을 더 뜯어 발길 필요는 없을 터다.
세실리아는 눈을 감고는, 떠오르려는 장면들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정식으로 잡힌 자리가 아니었던 만큼 과정은 상당히 삐꺽거렸다. 하지만 결과는 꽤 흡족했다.
기자들은 원하는 정보를 다 얻었으며, 세실리아 역시 흘려줘야 하는 정보를 다 흘렸으니까.
겨우 회견이 종료되었을 땐 에드릭이 기가 빨린 낯으로 이동 마법을 시전 해주었다.
“출발하실까요, 전하?”
“응.”
세실리아는 진 안으로 평온히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