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정한 비극
영상이 끝나자마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드릭과 시엘샤를 비롯하여 다른 척단의 마법사들 전부 찜찜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시 틀까요?”
에드릭의 질문에.
“부디.”
시엘샤는 대답했다.
에드릭이 마법구의 영상을 맨 처음으로 돌리며 가볍게 웃었다.
“맙소사, 선배. ‘부디’가 뭐예요, ‘부디’가. 진짜 웃기네. 평상신 ‘넌 눈치 대가리가 없냐?’라고 하셨을 거면서.”
“넌 눈치 대가리가 없냐, 등신아?”
시엘샤는 잽싸게 반격해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웃기긴 했다.
전투 현장에 있다 보니 그들의 어휘는 보통 쌍욕에 천박한 비속어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세실리아 황녀처럼 ‘부디’라고 표현하다니.
‘맙소사.’
황녀의 그때 그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긴 했나 보다. 무의식적으로 따라 한 걸 보면.
하긴, 나락에 처박혀도 홀로 고고할 사람이긴 했지.
‘남매는 남맨가.’
시엘샤는 피식 웃으며 제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한편, 에드릭이 가볍게 한쪽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하고는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긴장 가득한 분위기를 애써 무마하려는 노력이다.
그 부단한 시도를 잘 알아, 시엘샤는 그의 옆구리를 손으로 퍽 찌르는 것으로 받아주었다.
“아이고, 저 죽어욧!”
에드릭이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튼 뒤 영상을 재생했다.
한 번의 호흡이 지났을까, 세상을 찢을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 아기 내놔아아아아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기겁한 외침.
두 번째 들어도 소름 끼치긴 마찬가지였다. 시엘샤는 제 팔뚝을 매만지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한편, 영상 속 아르망 뤼셍에겐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카밀 베르뉴가 패대기치듯 던진 손을 내려다보다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을 뿐.
분노한 이 특유의 눈매가 선명하게 보인다. 힘이 잔뜩 들어간 턱과 거칠게 일렁이는 목울대까지도.
성군께선 미친 자의 미친 짓에 확실히 진노하셨다.
“다른 구슬은 없지?”
영상의 다음은 별 중요한 것 없었다. 황제와 흉악범 둘이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만이 계속될 뿐.
그마저도 전부 기록되진 못한 게, 아마 중간에 마법구가 바닥에 처박힌 듯했다.
“다른 것들도 있긴 한데, 유의미한 영상들은 없더라고요. 이게 그나마 가장…… 네.”
시엘샤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이 영상엔 뭔가가 의미가 있긴 했다.
에샹 감옥에서 아기가 유리를 삼켰다고 지랄해대던 미치광이께선 관제탑에선 ‘아기를 내놓으라고’ 지랄을 떠셨으니.
시엘샤는 혀로 제 위 어금니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흐…….”
“카밀 베르뉴에게 자식이 있다는 소리일까요?”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차마 하지 못한 질문을, 에드릭이 용감하게 끄집어냈다.
결국 내뱉어야 하는 물음이긴 했다.
시엘샤는 혀로 아랫입술을 쓰윽 훑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딱, 딱, 딱.
“카밀 베르뉴의 자식이라.”
“……자식이라.”
“뭐, ‘자식’에겐 죄가 없겠지만, 저 새끼의 부성애는 상당히 역겹네.”
수많은 목숨을 도려낸 주제에 지 자식은 싸고도는 꼴이라니.
물론 베르뉴가, 진짜 ‘자신이 원해서’ 사람들을 도륙하진 않았을 거다.
광기에 지배당해서 죽였을 뿐.
진짜 카밀 베르뉴의 의식은 광기에 짓눌린 채로 제발 죽이지 말라며 울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시엘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쩌겠나.’
진짜 베르뉴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일단 그 새끼가 어림잡아 수백 명은 족히 죽인 흉악범이라는 현실은 여전했다.
베르뉴는 운이 나빴다.
왜 하필 그렇게나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리고 왜 하필 안정화 방법은 끝끝내 찾지 못하여.
“그래서 선배. 자식이, 있긴 있다는 소리 맞죠?”
에드릭이 물었고, 시엘샤는 누가 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팔을 벌렸다.
하지만 그녀의 두뇌는 재빠르게 움직이며 카밀 베르뉴의 행적을 되짚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뤼셍의 태양 아르망 도미니크 하인리히 르 뤼셍을 시해했고.
생-뢰크의 관제탑을 무너뜨리셨으며.
“베르뉴에게 자식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자식은 어떻게 되나요?”
앳된 목소리가 질문했고, 열심히 과거를 더듬는 시엘샤를 대신하여 에드릭이 답변해주었다.
“마탑에겐 폭주한 마법사의 ‘자식’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헉. 왜요?”
“행여나 자식이 위험에 처할 경우, 마법사의 폭주가 훨씬 더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 혈육의 죽음은 확실한 자극이니까.”
“아.”
“그런 자극은 주지 않는 게 좋잖아.”
샤르텐에 침입하셨지…….
샤르텐 전엔.
에드릭이 잠깐 망설이다 덧붙이는 말이 아스라이 멀게 들려왔다.
“다만 베르뉴처럼 진짜 압도적으로 미친놈의 경우는 다를 수도 있겠다.”
“이 경우는 어떻게 되는대요?”
“……베르뉴를 잡는, 미끼로 쓰일 수 있겠지.”
“…….”
“이쪽도 필사적이니까.”
시엘샤는 잠깐 망설이다가, 회상을 7년 전으로 휙 뛰어넘었다.
미친 새끼가 황녀의 데뷔탕트 도중 감히 생-뢰크에 침입했을 때로.
그 바람에 알렉시스 뤼셍은 처음으로 폭주할 뻔했다.
데뷔탕트를 치르고 계셨던 황녀께서도 꼼짝없이 납치되실 뻔─
‘흠.’
시엘샤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검은색 베일을 착장하고 있던 호리호리한 여인을 떠올렸다.
‘카밀 베르뉴는 황녀를 납치하려 했었다.’
그 간단한 명제가 생각보다 큰 울림을 갖기 시작했다.
베르뉴는 하필 아르망 뤼셍을 찾아가, 자신의 ‘아기’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왜?
미친놈의 소리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건 분명 지양할 일이지만…….
‘미친놈의 소리를 모조리 흘려들을 필요까지도 없긴 해.’
시엘샤는 고개를 몇 번 까딱거린 뒤 마법구를 한 번 공중으로 던졌다가 낚아챘다.
“에드릭.”
“네.”
그녀는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진 못하고,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황녀를 조사해.’
입술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어낸 에드릭이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또다시 벌렸다가 다물었고, 그렇게 한참을 달싹이다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탁할게.”
“네.”
그들이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이들은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에드릭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준 시엘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모두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준 뒤 사이좋게 마탑으로 돌아갔다.
물론 시엘샤와 두 마법사, 그리고 다른 곳에서 빠져야 하는 에드릭을 빼고.
* * *
얼마나 약연을 피워댔는지 방 전체가 진홍색 연기로 가득 찼다.
시엘샤는 한 손으론 약연을 피우면서, 다른 손으론 열심히 휴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약연을 피우는 내내 찢는 바람에 이미 바닥엔 쓰레기가 한 더미였다.
‘약연’ 자체가 하나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시엘샤의 경우 손가락을 놀리고 싶은 욕망이든지 작은 파괴욕이든지 둘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퐁레프의 사용인들이 불평하겠어.’
에드릭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한 시간 뒤에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도 잠시 퐁레프에 머무르는 상황이었다.
‘나까지 욕먹긴 싫은데.’
그는 쓰레기더미를 보며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엘샤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으애어(그래서).”
“약연을 빼고 말씀하세요.”
“그래서. 황녀에게 입양되기 전의 기억이 없다고?”
“네. 뤼셍의 사교계에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혹시라도 그녀를 자극할까 봐 알아서 쉬쉬하며 침묵한다고 하더라고요.”
시엘샤가 다시 약연을 물고 깊게 숨을 마셨다. 그러고는 휘익, 길게 내뱉자 진분홍색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분홍색 채도가 너무 높아지고 있는데, 이거.
그리고 또다시 갈기갈기. 숫제 책 한 권이 찢겼다 싶을 정도였다.
에드릭은 한숨을 내쉬고는 바닥에 쌓인 종이 쓰레기를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근데 선배.”
“으(응).”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 있나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깔끔하게 기억이 지워지지?
맨 처음에 이야기를 듣자마자 에드릭이 떠올린 질문이었다.
시엘샤의 답변이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그는 불쏘시개로 벽난로의 불을 쑤시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선배?”
“마법은 없어.”
“……마법이 없다면.”
다른 게 있다는 뜻이군.
그는 제발 더 말하라는 손짓을 보였고, 시엘샤가 약연을 문 채로 킥킥거렸다.
“시간을 초월하는 마법이 있는 거 알아?”
“네?”
“아. 마법은 아닌가. 어쨌든 과거로 돌아가고 미래를 탐험하는, 그런 능력이 있는 거 아냐고.”
“그게 있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 끝이 거의 비명처럼 갈라졌다.
시엘샤가 피식 웃더니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반응을 보면 사기 치는 건 아닌데.’
간혹 시엘샤 듀페르는, 마법사들이 제 어린 자식을 데려오면 아이에게 소소한 거짓말로 장난을 치곤 했다.
‘물고기를 많이 먹으면 아가미가 돋아난단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짓말로.
에드릭은 선배의 화려한 전적을 돌이켜보며 순간 의심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시엘샤 듀페르는 이런 무거운 이야기로 거짓말할 성정은 아니었다.
“세계의 ‘관리자’라는 게 있어.”
“…….”
“은발에 푸른 눈. 그 푸른 눈은 우리의 친애하는 베르뉴께서 갖고 계신 푸른 눈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돼.”
“관리자들이 전부 똑같은 외양을 갖고 있나요?”
“그렇대.”
시엘샤가 손가락에 들린 약연을 규칙적으로 까딱였다.
“어쨌든…… 그런 관리자께선 두 가지 능력을 갖고 계시지. 하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 다른 하나는, 기억을 지워버리는 최면술.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사용하는 거야.”
“‘관리자’가 황녀의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에드릭은 불쏘시개를 놓고 곧바로 질문을 던졌고.
“자, 여기서.”
시엘샤는 그러든지 말든지 제 할 말을 꿋꿋하게 했다.
“하나,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줄게.”
아주 비장한 목소리라, 에드릭은 홀린 듯이 반문했다.
“뭔데요?”
“베르뉴는 관리자를 사냥했어. 관리자도 사실 베르뉴를 사냥했고. 서로가 서로를 쫓고 쫓기던 사이라고 보면 돼.”
“……네.”
“이런 가정은 어때? ‘관리자’가 ‘베르뉴의 딸’을 찾았다.”
에드릭은 그 문장을 곱씹어 보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약연 때문에 날연해진 음성이 조곤조곤 이어진다.
“그리고 그 딸에게서, 친아버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억 자체를 삭제했다.”
“……네?”
“기억을 잃은 아이를 자신이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베르뉴에게선 오롯이 빼앗고 싶었다. 그래서.”
“자, 자, 자, 자,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선배.”
에드릭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깨닫고 황급하게 끼어들었다.
“지금 선배께선, 세실리아 뤼셍 황녀가 실은 베르뉴의 숨겨진 딸이라는 가정 하에 말씀하시는 건가요?”
시엘샤가 설핏 웃는다. 약연이 팔랑팔랑 흔들리며 진분홍색 연기를 연신 뿜어냈다.
“그래서 황녀와 베르뉴 사이의 관계를 한번 조사해보자는…….”
“이미 했어.”
더없이 권태로운 목소리. 그보다 더 산뜻한 대답이었다.
“딸 맞아.”
* * *
세상이 어지러이 부서지는 것만 같아 세실리아는 숨을 죽였다.
아주 느리게 다시 마시고, 더 느리게 내뱉었다.
미칠 듯한 공포와 불안을 느낄 때면 늘 시도하던 방법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그 바람에 가슴도 아팠고, 현기증에 이어 역함까지 치밀었다.
‘괜찮아.’
세실리아는 손 아래의 이불을 그러쥐었다.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참으며, 어떻게든 생각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카밀 베르뉴입니다.’
몽테-페르트 마탑 소속 척단의 마법사, 시엘샤 듀페르가 씹듯이 내뱉었던 이름.
그녀의 양아버지이자 알렉시스의 친아버지인 아르망 뤼셍을 죽인 범인…… 으로 지목한 이름이었다.
세실리아는 숨을 짧게 뱉으며 어떻게든 심박수를 내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가슴을 가볍게 쳤다. 그러고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하나의 명제를 곱씹으면서.
‘내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면 어떡하지?’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으로 향하면서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그녀가 만약 뤼셍 제국 전체가, 아니, 나아가 대륙 전체가 싫어하는 흉악범의 딸이면 어떡하겠냐고.
그때는 깊게 생각 안 했지만…….
‘어떡하지.’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 모든 게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가 정말 그놈의 친딸이라면.
그녀의 친아버지가 그녀의 양아버지를 죽였다면.
‘내 친아버지가…… 알렉의 친아버지를…… 죽였다면…….’
세실리아는 정신없이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연신 팔랑거리며 베개 표면을 긁었다.
‘내가 그의 딸이라면. 그 진실을 과연.’
알렉시스나 어머니께서 알고 계실까? 알고도 입양하신 걸까? 설마. 아니시겠지?
그럼 난, 난, 어떡해?
세실리아는 순간 호흡을 멈췄다가 다시 내쉬었다.
일단 그녀가 정말 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딸이라면.
‘난 죽어도 돼.’
정말이었다.
알렉시스나 어머니께 피해를 끼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아버지께서 양아버지를 죽이셨다는데 계속 살아 있을 면목도 없었고.
그녀에겐 아무 죄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죄를 지은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도의적으로, 그렇게 쉽게 넘어가선 안 된다.
‘도의적으로 안 돼. 절대 안 돼.’
연좌제가 폐지된 만큼 죽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더라도, 그녀는 어머니와 알렉시스의 품을 떠나야 했다…….
애초에 알렉시스도 그녀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날, 날 버리겠지.’
세실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릴 거다. 버려야 했고.
알렉시스의 사랑을 과소평가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이 세상에서 세실리아만큼 잘 아는 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친아버지를 죽인 놈의 딸을 계속 사랑해?’
대체 어떻게.
친아버지와의 사이가 나쁘다면 그럴 수 있겠다만, 알렉시스는 아르망을 존경했고 아르망은 알렉시스를 사랑했다.
그러니 그녀를 내치겠지.
‘어머니도 마찬가지실 거야.’
그토록 사랑한 남편을 죽인 가해자의 딸을 어찌 계속 붙들겠어…….
세실리아는 혀끝을 꾹 깨물었다.
이 모든 생각은 도돌이표처럼 원점으로 돌아간다.
‘내가 과연 카밀 베르뉴의 친딸일까?’
친딸일 경우, 그에 따라올 모든 결과를 각오…… 각오, 하고 있다.
해야지.
세실리아는 더듬더듬 자신을 다독이며 베개에 얼굴을 더 깊게 파묻었다.
그 바람에 코가 눌려 숨이 막혔지만,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아까처럼 과호흡 증상이 온다면 심장이 터져 죽을 테니까.
‘알렉시스에게…….’
내가 베르뉴의 친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볼까?
아니.
……아니. 잠깐만.
‘내가 뭔갈 잊었는데.’
퐁레프의 황궁 도서관에서 카밀 베르뉴에 관한 기록을 전부 삭제하라 지시한 사람은─
세실리아가 선득한 의문을 마무리하기 전이었다.
문득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져, 세실리아는 벌떡 몸을 일으켜 돌아보았다.
역시나, 더없이 피로한 얼굴의 알렉시스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그는 나날이 더 지쳐가는 느낌이었다.
“괜찮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제대로 갈음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일은 계속해서 쌓였고, 알렉시스는 비통을 소화하기도 전에 일에 치여 살게 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지칠 수밖에.
“……네.”
“…….”
“괜찮습니다.”
세실리아는 황급히 팔을 벌렸고, 알렉시스가 순순히 몸을 숙여 그녀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있는 힘껏 팔에 힘을 줘서 남자를 끌어안았다.
‘가끔 난 널 세상에서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를 사리물며 울컥 치솟은 감정을 삼켜냈다. 한없는 미안함. 그보다 더 강렬한…….
알렉시스는 제 가장 약한 모습을 그녀에게만 허락하곤 했다. 그때마다 세실리아는 상당히 많이 슬퍼졌다.
‘내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있길 바라. 내가 그의 딸이 아니길.
부디. 부디. 부디.
실은 처음부터 그녀가 그의 곁에 서 있을 자격은 없었다.
황녀였고, 그와 남매로 자란 누이였다. 입양되었다고 한들 패륜은 패륜. 배덕은 배덕.
그러니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어도.
‘감히 꿈꾸려 하긴 했었는데.’
그런데 이젠 더 확고하게 안 되는 이유가…….
아니야.
‘확정된 건 없어.’
세실리아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품 안에 안긴 남자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알렉시스의 손이 점차 움직이더니, 이번엔 그녀를 마주 껴안았다.
둘은 한 치의 틈새도 없이 붙은 채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조금 살 것 같네요.”
“많이 피곤해?”
“……괜찮습니다. 불면증은 익숙하니. 그리고 사실 지금 일이 많이 밀려 있는 터라, 처리할 시간이 많으니 좋지요.”
잠을 안 자고 일하는 건 건강에 최악인 버릇인데!
세실리아는 잔소리를 하려다 눈앞의 남자가 더는 그의 동생이 아닌, 제국 전체를 통솔해야 하는 군주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자 알렉시스가 옅게 키득거렸다.
“잔소리하십시오.”
“…….”
“그게 더 좋아요.”
“이상한 취향이야…….”
세실리아는 투덜거리며 그의 품속을 더 파고들었다.
둘 다 침묵하자마자 서글픔이 내려앉는다.
떠나간 이의 부재를 여실히 겪고 있어서겠지.
마리사는 모든 걸 놓은 채 제 침실에 틀어박혔고, 알렉시스는 아직도 황제의 집무실을 사용하지 못하며 그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세실리아 역시 차마 세레인을 산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종종 간식을 주던 남자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알리샤 역시 풀이 죽었다.
가끔 짖어대는 소리는 쾌활하긴커녕 한없이 서글펐다.
“일이 너무 많아?”
“그래도 누님께서 도와주시니까요.”
세실리아는 마리사의 일을 대신하며 알렉시스의 일까지 조금은 맡아서 하고 있었다.
간혹 떠오르는 악몽 같은 전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일에 미쳐 있다 보면, 그래도 ‘카밀 베르뉴’라는 이름이 잊히곤 했다.
“오늘……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어때?”
“좋은 생각입니다. 지금 곧 회의가 있는데.”
“응.”
알렉시스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여느 때처럼 온기 가득한 손길이 서럽게도 다정하다.
‘네가 빨리…….’
각인을 해야 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각인을 나랑 하기로…… 했었…….’
내가 만약 그의 딸이라면 각인해선 안 되는데.
세실리아의 머릿속이 핑핑 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시스가 그녀의 뺨을 콕 찔러 집중하게 만들었다.
“회의에 나도 참석해야 해?”
“아니요. 하지 마십시오.”
“…….”
“참석하시면 안 됩니다.”
“경고처럼 들리는데?”
세실리아가 짐짓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하자, 알렉시스가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고입니다. 부디 참석하지 마십시오.”
“알았어.”
무슨 회의인지는 몰라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안 할게. 걱정하지 마.”
세실리아는 입꼬리를 휘어,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정확히 한 시간 뒤.
칼리아가 그녀의 침실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절규했다.
세실리아는 기절할 듯이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편 문밖에서는 칼리아가 너무나 다급하게, 숫제 문을 주먹으로 치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전하! 전하! 폐하께서!”
‘폐하’?
곧바로 떠오른 불길한 가정에 세실리아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칼리아가 거의 무너지듯이 앞으로 엎어졌다.
“폐하께서 지금 회의실에! 폭주하실 것! 같다─”
“어디야, 키리? 회의실 어디야!”
세실리아는 시녀를 반쯤 흔들면서 질문했고, 칼리아가 허겁지겁 답을 알려주었다.
“‘사자의 방’이랬어요!”
“넌 따라오지 마, 키리. 일단 어머니께 알려드려!”
“알겠습니다!”
둘은 곧바로 방을 뛰쳐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불안으로 머리가 곤죽이 된 상태였다.
세실리아는 계단을 세 개씩 뛰어 내려가다 결국 발목을 살짝 삐끗했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빌어먹게도 굽 높은 구두를 휙 벗어 내던졌다.
맨발로 뜀박질하니 그래도 속도가 더 빨라져 다행이었다.
‘알렉.’
세실리아는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며 정신을 긁었다.
‘괜, 괜찮을 거야.’
알렉시스는 늘 기적적으로 폭주를 멈추곤 했다.
그녀의 데뷔탕트 때도, 세레인에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광기와의 싸움에서 이겼었지.
‘승리의 뤼셍’답게.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세실리아는 간절히 소원하며 덜덜 떨리는 손을 가누려 노력했다.
무릎이 꺾일 듯이 위태로워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다리가 풀릴 듯해 공포와 불안이 동시에 등허리를 찔렀다.
안 돼. 속도를 낮추면 안 된다.
‘네 고통을 사라지게 만들진 못할지라도…….’
무너져 내리는 널 받아 안아줄 수만 있다면.
부디.
알렉시스가 홀로 지난한 싸움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지언정,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곁에서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세실리아는 다시 간절하게 애원했다.
불안 때문인지, 격한 운동 때문인지 호흡이 밭았다. 폐가 불타며 다리에 힘이 더 빠진다. 스러졌던 두통이 치밀어 오르며 세상을 시뻘겋게 달궜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타들어 가는 종아리로 속도를 높였다.
‘쉬면 안 돼!’
달려, 빨리!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여러 번 미끄러질 뻔했지만, 세실리아는 악착같이 발을 놀렸다. 지옥에서 아득바득 기어 나온 꼬락서니를 한 채로.
이윽고. 마침내 ‘사자의 방’에 도착한 순간.
세실리아는 곧장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려 했다. 문득 치민 생각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어 고꾸라지게 만들기 전엔.
반사적으로 뒤로 미끄러지며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어라.’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했다.
마법사가 폭주하려는 순간 근처의 사람들이 얼마나 공포에 질리는지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지금, 강대한 마력을 지녔기로 손꼽히는 알렉시스가 폭주한다는데 방이 이렇게나 고요하다고?
‘사람들이 이미 다 빠져나간 걸까?’
그럼 방 안엔, 알렉시스만 남아 있으려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번 든 의혹은 사라지질 않아, 세실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가쁜 숨부터 가다듬었다.
폐에 공기가 들어오니 머리도 제대로 굴러가는 기분이었다.
‘알렉은 분명 안정되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폭주를 할까……?
세실리아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듯 쥐어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바로 부정의 답을 내놓기엔 알렉시스의 현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떠나간 가족을 제대로 추모하지도 못했다.
비통을 추스르기도 전에 제위에 올라야 했으며, 황제로서 그 많은 업무를 전부 떠맡아 처리해야 했다.
어머니께선 식음을 전폐하고 계시고 마탑은 마탑대로 감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각인은 각인대로 못 하고 있지.
세실리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래서 알렉이…….
‘폭주했을까?’
방음이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실리아는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안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아닌지 궁금해서.
‘참석하시면 안 됩니다.’
알렉시스가 건넨 경고가 귓가를 다시 때렸다.
세실리아는 다시 한 걸음 주춤 물러서며, 지금 이 순간이 함정인지 가늠해 보았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갈 뻔했다.
‘……나는.’
알렉을 믿어.
알렉시스는 이유가 있어서 그녀에게 경고했으리라.
그리고 그의 이유는, 늘 그렇듯,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일 테고.
칼리아가 그녀를 ‘일부러’ 속였다곤 생각하진 않는다. 그보다는.
‘누군가가 키리를 속였고…… 그래서 키리가 내게 달려왔겠지.’
눈치 빠른 칼리아를 어떻게 그리 감쪽같이 속여 넘겼을까?
세실리아가 차마 떠나지는 못하고, 회의장 문밖에서 계속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서성이던 때였다.
참다못해 엄지를 베어 물던 순간, 그녀는 어슬렁 걸어오는 ‘아는 얼굴’을 목격했다.
시엘샤 듀페르.
몽테-페르트 소속 마법사.
잠옷을 입은 채 그녀는 편안하게 머리를 긁으며 막대사탕을 먹고 있었다.
오도독 사탕이 씹히는 소리가 선득하게 울려 퍼진다.
여자의 몽환적인 눈은 현실을 담고 있되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세실리아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시엘샤 듀페르가 숨을 훅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듀페르 양.”
“여기에 무슨 일이세요? 꼴 한 번 대단하시네.”
세실리아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았고, 그녀의 꼴이 시엘샤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발은 구두도 없이 맨발이었다. 있는 힘껏 옷자락을 움켜쥐고 달린 까닭에 무릎 아래의 치마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정말 엉망이네.’
수치심이 차올랐지만, 세실리아는 일단 평온한 낯을 깔고 보았다.
“그, 그게. 알렉이…… 폭주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아. 진짜요?”
시엘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고.
“…….”
세실리아는 확언해주는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가 눈치 빠른 탓도 있겠지만, 일단 이 상황이 너무나 이상했다. 비정상적이었다.
‘알렉시스의 폭주’에 가장 예민하게 굴 이들이 바로 마탑의 마법사들일 텐데.
몽테-페르트는 분명 알렉시스를 데려가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 않았었나.
분명 그랬는데…… 다른 이도 아닌 총책임자인 시엘샤가 미적지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흠.’
세실리아는 습관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여러 가지 사실이 얽히고설키며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칼리아에게 감히 ‘황제가 폭주하려 한다’라는, 그런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할 법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눈치 빠르고 영민한 칼리아가 의심 없이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설핏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
“그래도 한번 확인하시지요.”
“……괜찮아. 난 알렉을 믿어.”
“그렇군요.”
대수롭잖은 음성.
산뜻하고 시원시원한 대꾸인지라 세실리아는 ‘저 사람이 정말 함정을 판 게 맞나’라는 의문에 잠길 뻔했다.
……뭐, 누가 함정을 팠는지는 따로 알아보면 그만이다.
지금은 일단 벗어나야 해.
“이런 꼴을 보여줘서 미안해.”
세실리아는 빈말을 건네고는 휘리릭 돌아서려 했다.
문득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팔뚝을 붙들더니 가차 없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무자비하면서도 잔혹한 힘에 세실리아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하지만 ‘척단의 마법사’로서 수많은 전투에 임한 이의 손힘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
그녀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여자에게 단단히 잡힌 채, 세실리아는 정말 ‘질질’ 끌려갔다.
“왜 이래, 대체!”
소리 높여 항의해 보았지만, 시엘샤 듀페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얼굴 하나 보여주지 않으며 단호하게 끌고 갔다.
벽에 손톱을 박아 버티려는 시도는 무용했다. 결박에서 빠져나오려 낑낑거렸어도 실패했다.
목줄 잡힌 개처럼 꼼짝없이 딸려 갈 뿐.
그렇게 세실리아를 붙잡은 시엘샤는…….
쾅─!
회의실 문을 경쾌하게 발로 차서 열고는 자신이 먼저 입장했다. 무뢰배 같은 짓과는 달리, 한없이 위풍당당한 자태로.
그 소음에 놀랐는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시엘샤가 그녀의 팔에 힘주어 끌어당기는 것에, 세실리아는 문지방을 잡고 버텼다.
‘참석하시면 안 됩니다.’
알렉시스의 경고가 귓가에 어른거린다.
‘함정이었구나.’
왜 회의실 앞에서 그렇게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었담?
그녀는 이를 악물며 정말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숫제 팔이 뽑히려 들고 있었지만, 정말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되었다.
안 그래도 힘든 알렉시스에게 그녀마저 속을 썩일 순 없었다.
‘안 돼. 절대로!’
회의실 안이 크게 술렁였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그녀를 놀란 낯으로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익히 아는 얼굴들도 있었고 잘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이는…….
회의실 탁자의 중앙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자신의 경고에도 그녀가 오리라 예감했다는 듯이, 알렉시스는 짧게 놀라긴 했어도 ‘분노’하진 않았다.
적어도 그의 얼굴엔 그녀를 향한 분노는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한 불쾌함은 있을지언정.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내심 안도한 탓인지, 세실리아는 급박한 상황도 잊으며 방심해버렸다.
어어─ 하기도 잠시.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는 두 힘에서 균형이 어긋나면 다른 힘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 법.
세실리아의 반항이 약해지자마자 시엘샤는 더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 힘에 못 이겨 앞으로 풀썩 무너져 내렸다.
몸이 기울며 기어이 문지방을 넘어선다. 다리에 힘까지 풀려, 초라한 꼴로 주저앉을 수밖에.
동시에 사람들이 더 큰 경악을 내뱉었다.
“헉!”
“─신이시여.”
“맙소사.”
“이게 무슨!”
무엇 때문이지? 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시엘샤가 배우처럼 허리를 숙이며 익살맞게 외쳤다.
“여러분, ‘베르뉴의 딸’을 소개해드립니다!”
무슨…….
세실리아는 얼어붙은 채 눈동자만 또로록 굴렸다.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이 되어 온몸이 줄에 묶인 기분이었다.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시엘샤가 문득 그녀의 머리칼을 휙 움켜잡아 들어올렸다.
“아.”
……익숙해졌으면서도.
실은 익숙하지 않은 색.
‘은색.’
자신이 너무나 두려워했던 악몽이다.
그 꿈이 구체화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뎠다.
그녀의 의식이 느렸을 수도. 무슨 말을 했는지 인지했으면서도 인정할 수 없어, 세실리아는 멍하니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항의도.
그게 정말 진짜냐는 질문도.
마음 깊이 스며드는 절망도.
머리 잡혀 느껴지는 고통도 전부 느끼지 못하면서.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을 힘도 없었다. 눈이 따가워지고 나서야 겨우 깜박였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의…….
딸이라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입술은 무용하게 파드득 경련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되물어볼 정신도 없어, 세실리아는 그저 넋을 놓았다.
그녀의 아비라는 작자가 그냥 그런 연쇄살인마면 되레 나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필.
‘아버지를…….’
그녀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양아버지를.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 피해자의 아들이 있다.
알렉시스가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그녀를 상처 입은 눈으로 바라볼지 혐오하는 낯으로 바라볼지 마주할 수 없어 그냥 정신을 놓고 싶었다.
‘내가 진짜 독하긴 하구나.’
너무나 기절하고 싶은데.
이 상황이 너무 끔찍해서 초라한 회피라도 하고 싶은데…….
도무지 실신할 수가 없어.
그녀보다 빠르게 회복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솜에 낀 것처럼 뭉개져 들려왔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흑발이 아니었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오?”
“전하께서, 어, 흑발이 아닌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베르뉴의 딸이라는 증거는─”
“베르뉴의 딸이라고? 하지만!”
“자~”
시엘샤는 은빛 머리칼을 여전히 손에 붙든 채, 다른 손으로 파닥파닥 손짓했다.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은 ‘카밀 베르뉴를 체포하거나 즉결 처형하기 위해’ 열린 회의.
그런 만큼 격렬한 반응이 돌아오리라 예상했고, 지금 돌아온 이 반응에 더없이 흡족했다.
“여러분~ 제게 집중 좀~”
세실리아 뤼셍이 기실 ‘베르뉴의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가 ‘흑발이 아님’은 짐작했었다.
하지만 은발인 줄은 몰랐지.
보통 머리가 세어 생기는 은발이 아니다.
날 때부터 타고난, 달빛처럼 몽환적이고 그 무엇보다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관리자’처럼.
‘……관리자의 딸이었군.’
관리자와 베르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
시엘샤는 어이없는 실소를 살짝 눌러 담아야 했다.
관리자께선 정녕 베르뉴에게 사냥당하셨던 모양이었다.
관리자의 이름이 아깝네.
대체.
‘그래서 딸의 기억을 지우고, 아이를 버리다시피 뤼셍 황실에 보내버린 건가.’
자신이 돌보긴 싫어서. 차마 돌볼 수가 없어서.
하지만 어지간한 가정에 입양했다간 베르뉴가 그 가정을 풍비박산 낼 수 있으니, 놈을 막을 저력이 있는 ‘뤼셍’에게 보낸 거고.
‘말이 되는군.’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버려진 듯한 이 여자가 가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할 일이 있어서.
카밀 베르뉴. 이름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 작자였다. 마탑의 동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던가.
그런 개새끼가 간절히 딸을 찾고 있다니…….
‘좋은 미끼지.’
시엘샤는 마탑이 율법보다 결과를 우선시한다는 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실리아 뤼셍이 위험하든 뭘 하든 일단 베르뉴를 찾아 죽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만약 여자가 죽는다면?’
유감이지만, 운이 나쁜 게지, 뭐.
그 아비의 딸로 태어난 것부터가 문제였다. 뤼셍의 호의 덕분에 불운을 잠시나마 피한 것뿐이고.
“선배애애액!”
에드릭의 비명에 시엘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려.
“와아악!”
잽싸게 은발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의 손이 있던 바로 그 자리를 날카로운 펜촉이 정확히 스치고 지나갔다.
빠각!
뒤에서 들려오는 선득한 소리에 돌아보니, 몰래 설치한 ‘마력 제거 장치’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파편 더미 사이로 작은 톱니바퀴가 데굴데굴 구르다 쓰러졌다.
“나도 감히 못 잡는 걸 네가 왜 잡아.”
날연함 속에서도 불쾌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시엘샤는 황망하게 입을 벌린 채로, 펜을 인정사정없이 내다꽂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만약 손을 피하지 않았다면.
‘꿰뚫렸겠지.’
공포와 망연함, 경악과 충격에 젖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알렉시스 뤼셍은 더없이 태연한 낯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여 깨달았다.
‘뤼셍은 저 여자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구나.’
관리자가 뤼셍 황실을 속였으리라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렸다.
고인이 된 선황과 황후, 그리고 저기 서 있는 남자에게 강렬한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가 얼마나 절실하게 쫓았는지를 알면서!’
그런데 어떻게 그 새끼의 딸을 숨겨?
치를 떨던 그녀는 퍼뜩 세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 여자도 진실을 알면서 숨기고 있던 건 아니겠지!
“황녀 전─ 아, 이젠 아가씨군요. 아가씨. 아가씨의 친부가 카밀 베르뉴라는 진실을 아셨습니까?”
초점 없는 금빛 눈이 그녀를 어설프게 담았다. 줄줄 흘러내리는 그 시선 덕에, 시엘샤는 답을 찾아냈다.
‘세실리아 뤼셍만 몰랐다.’
어이구. 누구보다 알고 있어야 할 사람께서 모르셨군.
불쌍함이 커지긴 했지만 시엘샤는 부러 무시했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이 동정은, 여인의 압도적으로 강렬한 처연함 때문에 증폭되었을 거라서.
‘얼굴 한 번 더럽게 예뻐.’
상황에 맞지 않은 생각을 중얼거리던 순간.
이윽고 그들에게 도착한 알렉시스가 손을 뻗어 여자의 머리칼을 다시 제 색으로 물들였다.
검은색으로.
그들이 전부 속고 있던 그…….
“하?”
시엘샤는 실소를 내뱉어야 했다.
“뭐 하세요 지금? 이 아가씨가─”
“황녀다.”
“……네?”
“마땅한 예를 갖춰, 시엘샤 듀페르.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은 세실리아 뤼셍의 파양을 결정한 적 없으며, 그런 만큼 현재 그녀는 황실의 호적에 남아 있는 황녀다.”
눈을 깜박.
깜박 깜박 깜박.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연신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긁어냈다.
“돌아버리셨어요?”
정말로? 정말 지금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시엘샤가 기함하여 뒤로 넘어가려든 말든, 알렉시스 뤼셍은 제 누이를 아주 소중히 챙겨 자리로 돌아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을 다루듯 그의 바로 옆자리에 곱게 앉혔다.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린 채로 계속 쳐다보는 건 그에게 하등 문제가 되지 않나 보다.
줄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는 여인을 세심하게 대해주고만 있었으니.
“폐하.”
시엘샤는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저 여자가 누구의 딸인지 잊으셨습니까?”
“알고 있는데?”
“…….”
“뤼셍 제국에서 연좌제가 폐지된 지 정확하게 83년째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그가 아주 덤덤하게 지적하고는 조심스레 누이의 뺨에 묻은 머리칼을 떼어냈다.
금빛 눈이 드디어 한 차례 움직이더니, 본인 역시 살짝 기함한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바라보는 여인의 초점을 붙들어 맨 채 하염없이 금빛에 빠져들었을 뿐.
심지어 그의 손은 덜덜 경련하는 여자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오누이는 그렇게, ‘같잖은 교감’을 나누는 듯했다.
시엘샤와 다른 이들만 기가 차서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 피식거릴 뿐이었다.
“누님께서 기실 흉악범의 딸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녀가 직접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야! 야, 이 미친 새끼가!
시엘샤는 거의 파들파들 떨며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앞뒤 다 잘라먹고 외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왜 이러시는 겁니까!”
“…….”
“저 여자가 누구 딸인데! 그걸 어찌 그렇게 가뿐하게 넘어가!”
베르뉴의 딸임을 알고 입양했다.
좋아.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이것도 그래, 좋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태도를 조금 달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뤼셍이 카밀 베르뉴에게 누굴 잃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
제국의 모든 사람이 너그러워져도 당신만큼은 그래선 안 되지!
“내 딸이야, 시엘샤 듀페르.”
문득 들려온 덤덤한 목소리에 시엘샤는 명치를 세게 처맞은 기분으로 돌아섰다.
검은색 레이스 베일을 드리운 여인이 한없이 고아하면서도 우미한 자태로 입장하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길고 붉었던 머리칼은 이젠 짧은 회색이었다.
‘뤼셍 황실이 단체로 미쳤나…….’
시엘샤는 포기하듯 한숨을 쉬며 하늘을 향해 눈을 굴렸다.
저기요. 위로 떠나신 분?
이 미친 꼴을 보고 계실까요? 보고 계신다면 당신 아내랑 당신 아들에게 뭐라고 좀 해보시죠?
시엘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를 짚고 싶은 기분을 참아내는 사이, 마리사가 차갑게 일갈했다.
“그 새끼의 딸이 아니고 ‘내’ 딸이야.”
“폐하.”
“너흰 내 남편을 지키지 못했어!”
비명 섞인 추궁이었다.
시엘샤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원색적인 호통.
실제로 아르망 뤼셍은 몽테-페르트의 두 마법사들을 지키려다 살해당했다.
따지고 보면 베르뉴를 막아서야 하는 쪽은 그가 아니었다. 마탑 소속 척단의 마법사들이었지.
마탑은 뤼셍 제국에게 ‘빚을 진 셈’이었다.
선황이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진실은 바래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젠 내 딸까지 뺏어가겠다고? 너희가 무슨 염치로!”
“…….”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이래! 수치를 알아?”
“…….”
“너희에게 적어도 인간다운 부끄러움이 있다면, 내 딸만은 건들지 말아야지!”
화가 난 여인이 사납게 내뱉는 그 모든 말에 시엘샤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바닥을 내려 보았다.
한편 마리사는 곧바로 몸을 돌려 회의가 벌어지는 원탁을 응시했다.
선황후께 예를 표하기 위해 모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덤덤한 표정의 알렉시스와 겨우 정신을 조금이나 차린 세실리아까지도.
마리사는 레이스 베일을 휙 걷어 마침내 자신의 낯을 드러냈다.
녹색 눈이 이글거리며 거침없는 진노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 새끼 딸이기 전에 언제나 나와 아르망의 딸이었어.”
“…….”
“불만 있는 자 있으면 나와.”
만약 나간다면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칠 태세였다.
사람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렸고, 그녀는 척척 걸어가 팔짱을 낀 채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이 꼴을 두고 볼 거니?”
“몽테-페르트에겐 마땅히 죄를 묻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제대로 물어.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시엘샤는 화들짝 놀라 ‘우리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알렉시스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려주었다.
“왜요? 저희가 뭘 했다고!”
“퐁레프에 감히 마력 제거 장치를 멋대로 설치한 주제에?”
“작은 거잖아요!”
어차피 큰 제거 마법은 퐁레프의 결계에 막혀 통하지 않는다.
퐁레프가 허용하는 마력은 ‘뤼셍 황실의 마력’이거나, 아니면 아주 작고 소소하고 귀여운 마력뿐이었다.
녹화한다거나, 통신한다거나, 꽃에 물을 뿌린다거나. 뭐 그런 거.
간단한 제거 장치로도 염색 마법이 제거되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터.
시엘샤가 못내 억울하다는 듯 팔을 벌리는 모습에 알렉시스는 신랄한 조소를 머금었다.
“아아, 그럼 나도 몽테-페르트에 녹화구를 설치해도 되겠군. 어차피 작은 거니.”
“아아니, 전, 아니, 폐하!”
“지은 죄 있으면 입 다물어, 듀페르.”
“아아악! 악!”
시엘샤는 당장 제 머리를 감싸 쥐며 광분했다.
그녀가 발까지 쿵쿵 구르려 들었을 때 알렉시스는 미련 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의 볼펜을 뺏어들었다.
이번에 날아간 펜은 시엘샤의 이마를 거세게 치고 툭 떨어졌다.
“깍!”
실제로 어디 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사람들은 저 마법사의 두개골이 멀쩡한지 고민해야 했다.
“너희가 왜 내 누이의 비밀을 밝혔는지 모르겠다만, 시엘샤 듀페르.”
“그야─”
“이게 어디서 말을 끊어?”
“…….”
“현재 몽테-페르트엔 폭주한 마법사들의 친자식을 철저히 보호하는 규율이 있다고 알고 있어. 나도 아는 걸 네가 모르진 않을 테지.”
……당신이 알 줄은 몰랐는데.
“미끼로 쓰는 일은 없으리라 믿겠다.”
시엘샤가 입안 여린 살을 질근 깨무는 동안, 알렉시스 뤼셍은 싸늘한 음성으로 마무리했다.
“애초에 베르뉴의 딸이기 이전에 뤼셍의 귀보지만.”
아직도 ‘귀보’냐고 되쏘고 싶었다. 실제로 그의 옆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도 황망하게 바뀌어 있었고.
시엘샤가 씨근덕거리는 숨을 고르는 동안, 젊은 황제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선득한 협박 같은 약조를 내뱉었다.
“현재 베르뉴는 내 제국에서 내 제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지. 그대들도 알고 있겠지만.”
“…….”
“현재 그가 잡히지 않은 만큼, 난 안 그래도 미친 마법사를 더 자극하는 짓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
“…….”
“예를 들면…… 베르뉴의 친딸이 나타났다고 고래고래 외치는 그런 짓 말이지.”
황제가 서늘하게 웃으며 결론지었다.
“그 짓 때문에 베르뉴가 더 날뛴다면, 글쎄.”
알렉시스 뤼셍은 굳이 협박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적당히 머리 돌아가는 이라면 뤼셍, 특히 그의 분노와는 맞서고 싶어 하지 않겠지.
베르뉴만큼이나 알렉시스 뤼셍도 ‘위험한 마법사’였으니까.
그는 물끄러미 어머니와 세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세실리아는 여전히 영혼이 반쯤 끌려 나온 낯이었으며, 마리사는 그럭저럭 만족했는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있었다.
어차피 시엘샤 듀페르에게 너무나 큰 벌을 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치가 ‘몽테-페르트’ 소속일 뿐만이 아니라, 애초에 그녀가 한 짓은 그냥 세실리아의 비밀을 멋대로 폭로한 것일 뿐이었다.
반역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감히 황족을 시해하지도 않았다. 성에 찰 만큼 치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가 갈리는군.’
그냥 저 여자의 목을 그대로 물어뜯어 분리하고 싶은 지경인데. 하필 그가 황제라.
‘그냥 본분을 잊어볼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녕 피와 광기에 젖은 폭군처럼 군다면 세실리아가 한없이 슬퍼할 터.
그가 이렇게 된 건 제 탓이라며 바닥을 파고 또 팔 여인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세실리아의 뺨을 엄지로 문질렀다. 혈색 하나 없는 창백한 낯이 그렇듯, 온기 하나 없어 아득해졌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그냥 날려버릴 순 없는 건지.
……저들의 눈을 다 뽑아버리면 알아서 기억을 삭제해주지 않으려나.
뭐, 적당히 온건하게 가려면 저들의 가족을 붙들어 협박하는 수도 있긴 해.
알렉시스는 진지하게 고민해봤다가, 일단 그런 참상을 세실리아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이성에 귀 기울여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세실.”
마리사가 세실리아를 부드럽게 불렀다.
온화하고 포근한 목소리에 황금빛 눈이 엉망으로 배회하다 겨우 초점을 되찾았다. 화병을 막 깬 어린 소녀처럼 어쩔 줄 모르는 모습.
독하디독한 여인이 저 정도로 깨졌고.
그러면서도 독하디독해 여전히 울지 않고 있었다.
“어…….”
어머니, 라고 부르려던 거겠지.
단어를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실리아가 절망 가득한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세실을 데려가마.”
동시에 마리사의 입매가 와르르 허물어졌다. 그녀의 속이 무너졌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알렉시스는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황제의 자리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중한 이들의 절망을 막아내지도 못하는데. 그런 감정을 선물한 이에게 내키는 만큼의 보복을 해주지도 못하는데.
그는 잠자코 마리사가 세실리아의 손을 잡는 모습을, 그리하여 부드럽게 이끌어 방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모든 게 꿈같았다.
세실리아는 손끝에 닿는 어머니의 다정한 온기를 느끼며 멍하니 궁금해했다.
그녀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마리사는 여전히 그녀를 딸로 대해주고 있었고 알렉시스 역시 너무나 다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정말, 도무지,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세실리아는 그냥 모든 걸 놓은 채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감각, 영혼, 정신…… 그 모든 걸 그저 어머니께 맡기면서.
어느새 그들은 복도 몇 개와 계단을 지나쳐 황후의 응접실로 향하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즉위한 이상 마리사 역시 ‘황후의 방’을 옮겨야 했지만, 퐁레프의 누구도 감히 마리사에게 떠나라 할 수 없었다.
세실리아는 눈을 깜박여 그들이 천천히 문지방을 넘어가는 풍경을 목도했다.
그렇게 그녀는 어머니의 별실에 들어왔고…….
언제나 다과회를 같이 하던 곳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머리를 염색했더랬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매달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철저히 비밀 속에서.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지.’
사람들 여럿이 알게 된 만큼 곧 뤼셍 제국 전체에 퍼지리라.
아니다.
‘알렉시스가 입막음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입막음이 아니었나?
세실리아는 눈을 찡그리며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어보려 노력했다.
불과 몇 분 전의 일인데, 모든 게 안개에 낀 듯 희뿌옇기만 하다.
‘여러분, 베르뉴의 딸을 소개해드립니다!’
다분히 즐거워하던 음성이 귓가를 후려친 순간.
어마어마한 현기증이 두개골을 강타한다.
세상 전체가 빙글빙글 돌며, 저 깊은 곳에서부터 구역질이 치밀었다.
토할 것 같다.
하지만 역함보다 더 심각한 건…….
“세실? 세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가슴이 압박될 정도로 세차게 뛰는 심장에 세실리아는 숨이 막혔다.
갈비뼈를 뚫고 나오지는 않을까, 바보 같은 걱정이 들 만큼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
그녀는 덜덜 떨며 몸을 숙였다.
‘……숨, 천천히…….’
천천히 마셨다가 뱉으면 도움이 되던데.
“세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잖아.
정신 안 차릴래? 호흡만 느리게 하면 될 것 아냐!
하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그녀의 정신력이 그녀를 배신한다.
애써 스스로를 달래보려 했어도 모든 시도가 무용했다. 손끝, 발끝을 비롯하여 온몸의 끝이 전부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추워.
한겨울 냉수로 마찰해도 이 정도로 춥진 않으리라.
몸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이빨이 연신 부딪히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입에 거품이라도 문 기분이었다.
“……세실! 제발!”
다급히 울려 퍼지는 어머니의 목소리.
마리사의 음성은 확연히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터뜨릴 듯이.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손에 맥없이 흔들리다,
그 물기 가득한 애원에야 겨우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까는 몸이 얼음물을 맞은 기분이라면 지금은 정신이 맞은 기분이었다.
‘어머니.’
그녀가 철천지원수의 딸임을 알면서도 변함없이 다정하게 대해주신 이였다.
그녀만은 울리면 안 된다. 절대로.
세실리아는 황급히 몸을 앞으로 숙이며 옷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옷감에 묻어 있는 아련한 작약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 향기에만 집중하려 노력하며 세실리아는 숫자를 천천히 세었다.
5초 세고, 마시고, 5초 세고, 내뱉고.
호흡이 점차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숨을 달라며 온몸이 아우성쳤지만, 그녀는 모든 인내심을 끌어내어 버텼다.
폐가 정말 불타오를 때까지.
호흡이 잠잠해지다 못해 그녀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끌어내릴 때까지.
세실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신경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물밀 듯이 들어왔다.
‘황후의 별실’ 특유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공기. 어머니에게서 묻어 나오는 수선화 향.
그리고 그녀 자신의 옷에 묻어 있는 작약의 향.
혀를 말라붙게 만드는 텁텁함.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바로 앞에서 울듯이 지켜보는 마리사의 손을 만졌다.
손가락을 가만히 얽은 채로 있자 마리사가 어깨를 들썩이다 말고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차마 울지 말라는 말씀은 드릴 수 없어 그저 어머니의 눈물을 훔쳤다.
따뜻하고 눅눅하기보단, 그저 아리기만 한 눈물을.
“……세실…….”
“죄송해요.”
“뭐가……. 네가 뭘 잘못했다고…….”
저도 함께 못 울어드려서…… 그래서 죄송해요.
저도 사실 제가 왜 울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나 슬픈데.
‘안에 가득 뭉쳐 있어서 뭐라도 내뱉고 싶은데…….’
그런데 못 울고 있어요.
세실리아는 그 모든 말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어머니께 비수를 꽂을 가능성이 있는 말이라면 모조리 피하고 싶었다.
대신 팔을 뻗어,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리사가 그녀를 끌어안았는데.
마리사가 이번엔 그녀에게로 허물어지며 쏟아져 내렸다. 잿빛으로 변한 머리칼이 오롯이 흘러넘쳤다.
세실리아는 피하지 않으며 모조리 받아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마리사가 참았던 눈물을 전부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드디어.
……세실리아는 끝끝내 울지 못했다.
이윽고 진정한 마리사가 손수건을 건네받고는 신나게 코를 풀었다.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유려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장난 아닌 장난을 쳤다.
냉큼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일어날까요?”
그들은 체통이고 나발이고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세실리아의 질문에 마리사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이곳에 앉아본 적이 없네…….”
“…….”
“지금이라도 해봐야지.”
어머니, 라고 부르려던 세실리아는 단어가 목구멍에 걸려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마 못 부르는 거겠지.’
악몽이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녀가 겪었던 오늘의 일이 더욱 강한 채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리사가 시엘샤 듀페르에게 뭐라 일갈했는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너희가 무슨 염치로!’
맞아, 그녀가 무슨 염치로…….
세실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그 모습을 마리사가 줄곧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세실.”
“……네.”
“숨겨서 미안해.”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박였다.
평상시라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 눈치 빠르게 ‘주어’를 알아차렸을 텐데, 어째 지금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무엇을?’
아. 못내 다행스럽게도, 너무 늦기 전에 유추해냈다.
그녀가. 그자의. 딸이라는. 진실.
“저라도, 숨겼을 것 같아요.”
미친 마법사에게 동정표가 쏟아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운이 나빠 마력을 갖고 태어나, 운이 나빠 안정화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카밀 베르뉴는 동정표를 받기엔 너무 과한 짓들을 저질렀다.
당장 제국의 아버지를 시해하지 않았나.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세실리아는 살짝 쉰 목소리로 다시금 속삭였다.
아. 그래서.
왜 마리사와 알렉시스가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지 이해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으니.
만약 그들의 태도가 바뀌었을 거라면, 지금이 아니라 ‘선황께서 시해되셨을 때’ 바뀌었어야 했다.
“세실.”
마리사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네 머리칼이 이 색이 아니더라도 넌 내 딸이야.”
“네.”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알렉이 불렀어.”
세실리아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마리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딸이 위험한데 안 올 거냐고.”
“…….”
“그래서 달려갔지. 듀페르 머리채를 완전히 쥐어뜯어 놓을 걸 그랬나……. 조금 후회되네.”
“감사드려요. 와주셔서.”
“그럼, 딸의 일인데.”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는다.
마리사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 세실리아는 어떻게든 단어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고, 그녀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스스로의 감정마저 죽여버리는 질문을 뇌까렸다.
“제가…….”
“응.”
“제가, 밉지 않으세요?”
연좌제가 제아무리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감정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어떤 평민은 제 딸을 죽인 영주의 여동생을 죽였다.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사람들은 그 형벌이 당연하다는 편과 과하다는 편으로 나뉘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야만적이라 한들,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선 남몰래 이해하곤 하는 원초적인 사고방식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
‘업보’라는 말이 왜 생겼겠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려 든다면 자신도 상처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려 든다면 자신 역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세실리아는 이를 악물며 돌아올 답변을 각오했다.
마리사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그 가해자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감정은 마땅했다.
“내가 널 왜 미워하니…….”
마리사가 꺼질 듯이 속삭인다.
“넌 내 딸이야. 내 딸이라고 했잖아.”
“제가 그럴…….”
“…….”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세실.”
그가 친아비라고 하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그녀에게 지금껏 사랑을 주고, 다정히 보듬어주었던 아버지께선 단 한 분이셨다.
그리고 바로 그분께서 친아비에게 살해당하셨지.
세실리아는 어떤 의미에선 딱 죽고 싶었다.
속죄할 이유가 없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친아비의 모든 게 미웠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 자신도 혐오스러웠다.
왜.
‘어째서…….’
만약 다른 이가 ‘카밀 베르뉴의 자식’이었다면 증오까진 안 했을 수 있겠다.
연좌제는 폐지되었고 저치는 무고하다면서 스스로를 달래었겠지.
하지만 그 자식이 그녀 자신이 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세실. 아가.”
“네.”
“우리, 잠깐 떠나 있을까?”
세실리아는 멍한 표정이 되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불그스름한 눈매는 더없이 진지했으며, 녹색 눈은 며칠간 처음으로 ‘의욕’ 비스무리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기나긴 암흑을 벗어나 희미한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떠나요? 어디로요?”
“샤르텐으로. 응, 가자. 우리 꼭 가자, 지금.”
“샤르텐? 별궁으로요?”
“응, 떠나자꾸나. 여긴 너무…… 가득해서.”
내가 힘들어.
마리사가 작게 속삭였다.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덜덜 떨리는 손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발 같이 가달라는 암묵적인 부탁. 어쩌면 애원 같기도 했다.
그 가냘픈 손짓이 심장을 두드려, 세실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이지, 세실? 같이 가주는 거지?”
“물론이죠. 같이 떠나요.”
여행 같이 떠나는 게 뭐가 대수라고요.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정말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었다.
목숨을 주라면 줄 수 있었고, 심장을 갈라 바치라면 바칠 수 있었다.
맹세코. 한 틈의 거짓도 없이.
마리사가 아이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세실리아는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그들 주변으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한 아름 내리는 순간이었다.
* * *
“세실, 세실.”
컹컹! 강아지가 경쾌하게 짖는 소리 사이로 어머니께서 부르셨다.
세실리아는 읽고 있던 책에서 서둘러 눈을 들어 올렸다.
샤르텐의 가을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그들이 샤르텐에 도착한 지도 벌써 2주째였다.
수도인 생-뢰크보다 계절이 느린 만큼 별궁은 여전히 완연한 가을을 자랑한 채로 그들을 환영해주었더랬다.
‘생-뢰크는 이제 겨울 초입이겠지.’
세실리아는 짧게 스친 생각을 지우며 마리사에게 미소 지어주었다.
장난스러운 손길이 그녀가 쓰고 있던 독서용 안경을 부드럽게 벗겨냈다.
“왜 부르셨나요?”
“손.”
“손이요?”
“응.”
그녀가 얌전하게 손을 펼치자, 마리사가 가져온 낙엽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예쁜 것들만 골라 가져왔단다.”
“감사드려요. 정말 완벽한데요?”
빈말이 아니었다.
색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낙엽들은 깨끗해 티끌 하나 없었다.
마리사가 작게 키들거리며 그녀의 옆자리에 스르륵 앉았다.
“우리 딸은 뭐 읽고 있어?”
“<햇빛 일기>입니다.”
“레토 드 자크?”
“네.”
“그 사람 좋지……. 그 작가 문장을 참 좋아했는데.”
마리사가 한 차례 기지개를 켜더니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마침 달려온 알리샤가 발치에 앉아 꼬리를 챱챱 흔들었다.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작게 질문했다.
“읽어드릴까요?”
“응. 좋아.”
그녀는 마리사의 손가락에 대롱대롱 달린 안경을 되찾고는 부드럽게 낭독하기 시작했다.
“……새벽 호수의 서늘함은 기실 다정함입니다. 지친 말에게 기꺼이 제 품을 선사하는, 그러나 바다처럼 광활하지도 강처럼 매정하지도 않은 이 물을 난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요.”
마리사가 마치 장난치듯 그녀의 무릎을 꾹꾹 눌렀다. 녹색 눈의 고양이가 연상되는 동작이었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저 멀리 동쪽에서 태양이 뜹니다. 그리운 언니, 당신이 너무나도 사랑할 정경이어요. 당신께선 분명 저 황홀할 색채를 무엇으로 묘사할지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알리샤가 제 꼬리를 잡으려 여러 바퀴 뱅뱅 돌다 다시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앞발로 잔디밭을 콩콩 때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실리아는 다음 문장을 읊었다.
“당신께선, 늘 저보다 현명하셨으니까요.”
이어 나온 문장은, ‘보고 싶습니다’다.
너무나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는 솔직한 진심.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투박한 일상의 언어가 가끔은 더 효과적인 법이다.
세실리아는 마지막 문장을 속으로만 삼켜내며 한 장 팔랑 넘겼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등장한 문장은.
‘오늘도 그대를 닮은 태양이 떴습니다.’
왜 하필 이 책을 골랐담?
세실리아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다음 일기로 넘어갔다.
“오늘은 마사가 고양이를 한 마리 데려왔습니다. 강아지가 있으니 응당 고양이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저는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었답니다.”
“우리도 고양이를 키워볼까?”
마리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세실리아는 흘끔 시선을 내려 알리샤를 확인했다.
거대 사모예드께서는 앞발로 잔디를 퍽퍽 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꼬리를 위로 쫑긋 세운 채 흔들지도 않는다.
“……전 자신이 없는데요.”
“그런가?”
“네. 알리샤가 충분히 사고를…….”
“많이 치긴 하네.”
애완견을 내려다보던 마리사가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금 편안하게 몸을 뉘었다.
어머니께서 제 머리칼을 갖고 노는 동안 세실리아는 성실하게 책을 읽었다.
“네트는 제 친구가 굉장히 맘에 드나 봐요. 새 친구─해리엇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의 꼬리를 붙잡으려다가 콧잔등을 야무지게 얻어맞았건만, 지금도 또 시도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폭신폭신한 일상이었다.
햇빛 좋은 날이면 평화롭게 낮잠을 자고, 비 오는 밤이면 등불 아래서 독서하는 삶.
큰 강아지와 작은 고양이와 함께 이루는 소소한 전원생활.
물론 레토 드 자크가 평민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일기 내내 노동을 했단 이야기는 없으며, 무엇보다 그녀는 백작 딸이었거든.
‘……생각이 딴 데 샜군.’
세실리아는 더 읽을까 고민하다 그녀의 무릎을 벤 어머니께서 고롱고롱 잠이 드셨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책을 조용히 덮자 알리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았다.
‘쉿.’
영리한 강아지는 꼬리를 홱홱 치더니 심심한 지 저 멀리 뛰어가 버렸다.
세실리아는 어머니께로 내리쬐는 볕을 막으며 목을 뒤로 꺾었다. 얼굴과 하늘이 거의 마주 볼 때까지.
소리 내어 한숨을 쉬고 싶다. 참아야지. 한 손으로 책등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올려다보자, 푸르른 하늘엔 햇솜 같은 구름이 두어 개 두둥실 떠 있었다.
‘……알렉.’
고요한 순간이면 늘 떠오르는 이름.
그녀와 마리사가 샤르텐에 온 지 2주째라는 뜻은 알렉시스가 홀로 모든 업무를 처리한 지 2주째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몸은 괜찮을까. 지금쯤 굉장히 축나고 있을 텐데.
아르망과 마리사는 거의 온종일 매달려서 하루 치 업무량을 겨우 끝내곤 했다.
그리고 지금 뤼셍 제국의 황후가 부재한 만큼 알렉시스가 ‘황제와 황후’의 업무량을 동시에 처리하고 있을 터.
‘잠을 거의 못 자겠지.’
불면이라 낮 같은 밤은 익숙하다지만 그게 절대로 좋진 않을 터였다.
세실리아는 걱정에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감기는 조심하고 있으려나?’
뱅쇼라도 꼬박꼬박 마시고 있기를.
생-뢰크의 초겨울은 다른 곳의 초겨울에 비해 더 독하곤 했다.
사실 샤르텐에 오기 전에 알렉시스에게 함께 오자고 제안했었다.
그럼 그녀도 눈치껏 틈틈이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마법도 있는데 업무 조달이 뭐가 힘들겠나 싶었고.
‘괜찮습니다.’
알렉시스는 덤덤하게 거절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껜 제가 없는 편이 나을 겁니다.’
세실리아가 기겁하기 전 그가 잠자코 제 얼굴을 가리켰다.
‘닮았으니까요.’
……그리운 이와 너무 닮으면 자식마저도 아픔일 수 있는 법이었다.
마리사가 퐁레프에서 샤르텐으로 온 이유는 하나일 터.
아르망이 곳곳에 살아 숨쉬는 퐁레프와는 달리, 샤르텐에선 그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이를 잊으려 왔으니.
그를 닮은 아들이 함께 올 수 없었겠지……. 차마.
‘알렉은…… 괜찮을까.’
또 다시 질문이 솟구쳤다.
괜찮을 터다.
그렇게 머리론 믿더라도 가슴으론 그러질 못했다.
비단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알렉시스 홀로 몽테-페르트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므로.
마탑이 그녀를 원한다는 건 확실했다. 그 사이를 가로막으며 보호해주고 있는 이가 바로 알렉시스였고.
‘여러분, 카밀 베르뉴의─’
망할.
한숨 깊은 밤, 악몽 사이에서 울려 퍼지곤 하는 그 문장.
익살스러운 음성이 들릴 때마다 세실리아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당연히 잠은 다시 오지 않았고 그녀는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로 긴 긴 밤을 버텼다.
태양이 뜨길 기다리면서.
여기에 없는 이의 온기가 그립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악하며.
‘나는.’
알렉시스가 그 진실을 숨겼다는 점이 너무나 감사했다.
알고 있다.
만약 진실이 드러나면 그녀는 산 채로 돌팔매질을 당하겠지.
알렉시스가 선수를 쳐서 입을 막은 이유가 따로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죄책감은 끊임없이 쌓였다.
폭설처럼 강하게 내리진 않더라도 면면히 쌓여, 아주 깊고 단단한 얼음이 되어 그녀를 가둔다.
답답했다.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아득했고.
‘뤼셍의 방계가 아니라는 진실’을 숨길 땐…… 그럭저럭 버틸 만하긴 했다. 실제로 버텼지 않나.
하지만 지금은.
‘선황을 죽인 흉악 범죄자의 핏줄이라는 진실’을 숨겨야 하는 지금은…… 죽고 싶었다.
세실리아는 처절할 정도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뤼셍 제국에겐 이 진실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다는 걸.
제국이 그걸 알게 되는 순간 그녀가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질지라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으려나.’
언제까지 숨겨야 할까.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는 법이라던데.
그녀의 친아비라는 작자가 돌이킬 수 없는 업보를 쌓고, 쌓고, 또 쌓을 때까지 얌전히 입 다문 채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소리라면.
‘도저히 모르겠어.’
뒤로 젖혔던 고개가 슬슬 아팠다. 머리에 잔뜩 피가 쏠려 기묘한 느낌까지 자아내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머리를 빙글 돌려 조심스레 다시 똑바로 세웠다.
저 멀리서 한 소녀가 쟁반을 든 채 총총 다가온다.
소녀는 세실리아를 보자마자 냉큼 머리를 숙이면서 예를 표했다.
‘……난 그걸 받을 자격이 없는데.’
세실리아는 저절로 슬퍼져, 티 내지 않게 최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아이가 뭐라 말하려 하기 전 재빨리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흘끗 눈으로 아래를 가리키자,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꼭꼭 막았다.
‘나도 저러던 때가 있었는데.’
저때 입양되었을까…….
흉악범의 딸이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입양하셨다니.
세실리아는 잠자코 손을 뻗어 아이가 건네는 쟁반을 받아들었다.
사과주와 탄산수를 섞어 얼음을 띄운 음료가 투명한 유리 잔 속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고맙구나.’
그녀는 입 모양으로 속삭인 뒤, 수줍어하는 아이에게 손 키스를 건네주었다.
* * *
“잘 녹화되었어?”
“네. 여기 보시면…… 흑발에서 은발로 변하는 거 보이세요? 잘 찍혔죠?”
“응. 수고했다.”
“저……근데요, 선배. 이걸로 뭐하시게요? 황제 그 인간 성질머리는 저보다 선배가 더 잘 알 텐데?”
“…….”
“정말로?”
“응.”
“선배는 미쳤어!”
* * *
소녀는 담벼락 위에 앉은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양이의 푸른 눈 역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코스모스가 휘날리는 동안, 그들은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으며 유치한 눈싸움만 벌였다.
먼저 항복을 선언한 쪽은 어린 소녀였다.
그녀는 입을 열어 또랑또랑하게 알려주었다.
“고양아, 넌 여기 오면 안 돼.”
카라멜 색 귀가 쫑긋거렸다.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읽은 소녀는 손을 뻗어 귀 뒤를 규칙적으로 긁어주었다.
긁어주는 손길은 그래도 맘에 들었는지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며 꼬리를 말았다.
“네 눈은 푸른색이잖아.”
고양이가 앞발을 들고 하악대는 소리.
왜 푸른 눈을 차별하느냐는 앙탈 같아, 소녀는 고양이의 발을 얌전히 주물러주었다.
“당분간 푸른색 눈은 샤르텐에서 금지래.”
푸른 눈을 지닌 동물을 들여보내면 무시무시한 악몽이 펼쳐질 수도 있다고 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지옥이 도래할 거라며 요리사 아주머니께서 아주 겁을 주셨지.
소녀는 ‘지옥’이나 ‘악몽’ 따윈 믿진 않았지만─내 나이가 몇인데!─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건 잘 깨우친 나이였다.
그러니 소녀는 함부로 일탈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모시는 샤르텐의 주인이 제국에서 아아아주 손꼽히게 귀한 분들이라고 알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녀가 한 발짝을 떼자 고양이 역시 한 발짝 떼어 따라왔다.
“아이참, 오면 안 된다니까?”
한 발짝. 또 사뿐한 한 발짝.
소녀는 아주 깊은 망설임 끝에 제 허리끈을 풀었다.
엄마에게서 물려 입은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이 단숨에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고양이가 만약 이대로 샤르텐의 문턱을 넘어선다면 아주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고양이가 반항하듯 하악댔지만, 그녀는 대충 고양이의 앞발을 작은 묘목에 묶었다.
“느슨하게 묶었어.”
아이는 고양이에게 부러 으름장을 놓았다.
실제로 고양이가 조금만 반항하면 금방 풀릴 정도로 헐렁했다.
고양이가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째려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나 가고 나면 대충 떠나. 알았지?”
캬아아아아악!
대충 나 버리고 떠나면 무릎 깨질 거다, 라는 협박 소리였지만 소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힘겹게 모아 쥐고는 와다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고양이는 신경질적으로 제 앞발을 묶은 신발 끈을 내리쳤다.
두어 번의 발길질로 동물은 단번에 우습기 짝이 없는 덫에서 벗어났다.
“그래.”
소녀가 사라지고 고양이가 자유를 되찾은 지 10분은 되었을까.
어느 순간 남자가 나타나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직하게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부드러운 손길을 더 재촉했다.
동물이 조르는 대로 계속 쓰다듬으며 그는 빙긋 웃었다.
고양이가 만약에 샤르텐의 문턱을 넘었더라면 더 좋았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알아내야 할 정보를 확실히 얻었으니.
‘세실리아 뤼셍’은 샤르텐에 있다.
* * *
책상 옆을 내다보니 강아지 방석이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역시 떠돌아다닐 모양이지.
소중한 이의 상실은 결코 메꿔질 수 없는 법인지라, 동물이고 사람이고 구분 없이 공허함에 몸부림쳐야 할 때가 있었다.
세실리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지금껏 마무리한 계산을 검토했다.
아득한 서글픔과 오싹한 죄책감을 어찌어찌 감내하려 노력하면서.
단단히 체한 듯 속이 거북했다. 켜켜이 쌓인 감정 찌꺼기는 뭘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구역질을 하면 아주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상상이 일 정도로 단단히 얹혔을 뿐.
‘여러분, 베르뉴의 딸을 소개해드립니다!’
시엘샤 듀페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아무리 잊으려 해보아도 절대로 잊히지 않는 음성이다.
처음 몇 번은 진저리쳤었지만, 이젠 그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
세실리아는 가만히 펜을 꾹 움켜쥐고는 애써 숫자로 집중을 돌렸다.
“3에 5면 8, 3에 1이고…….”
정확히 계산이.
안 돼.
집중해야지, 알렉시스를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하잖아.
마음을 다독여 보던 세실리아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치를 떨었다.
애초에 그녀가 알렉시스를 도울 자격은 있나?
아니면 이 도움은 속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걸까?
마리사와 알렉시스는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그녀에게 오롯이 사랑만을 계속 주고 있었다.
그녀의 친아비라는 작자가…… 그랬었는데도.
물론 법정에 선다면 그녀는 무죄다.
뤼셍 제국에 연좌제가 폐지된 건 오래고,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녀는 목숨 걸고 아르망 뤼셍을 지켰을 테지 한 번도 얼굴 못 본 친아비를 택하진 않았을 테니.
하지만 도의적인 죄책감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어서.
‘……지옥 같아.’
그냥 이 현실이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 하염없이 떨어지기만 해야 하는 나락 같다.
손을 거세게 움켜쥐었다가 폈다.
‘언제 드러날까?’
그녀가 카밀 베르뉴의 딸이라는 진실이.
일부러 숨기는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된다고 믿는다.
마냥 낙관적으로 ‘잘 숨기면 되지’라고 생각하기엔 그녀가 퍽 비관적인 성품이라.
그리고 그때가 지금 이 나락의 끝이겠지. 오래 떨어진 만큼 더욱 아프게 깨지리라.
‘일단 지금은 안 돼.’
세실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팔랑 넘겼다.
아직은 알렉시스의 제위 초기였다.
‘각인하지 않은 채’로 황위에 오른 첫 황제인 만큼 그를 향한 지지가 불안정했다.
이 상황에서 ‘뤼셍 황실이 범죄자의 딸을 입적했다’라는 진실이 드러나면.
‘타격이야.’
언제나 황권이 강했던 뤼셍 제국의 기반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타격.
그리고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감싸고 있는 마리사가 진실이 드러난 순간 무슨 행동을 취할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보호하려…….’
드시려나, 질문하려던 세실리아는 묻자마자 답을 깨달았다.
그분은 그런 성품이시니까.
언제나 다정하고, 올곧고, 상냥하고.
늘 잘못하는 건 그녀다.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긴커녕 대못을 박는 그런 나쁜…… 애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어도 ‘황후의 별실’에서 나오면서부터 그녀는 도무지 ‘어머니’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실 그녀를 키워준 이는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유일한 ‘어머니’는 마리사 뤼셍뿐인데도.
‘내겐 자격이 없으니까.’
책상 위에 결국 철퍼덕 엎어졌다.
“걘 대체 무슨 생각일까…….”
여전히 나랑 각인하고 싶은 걸까?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이 ‘각인’이 제국에 축복을 받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가 ‘가짜 황녀’일 적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고.
설령 제국 모두의 눈을 숨기고 각인한 상태로 황후가 되었다고 쳐도.
‘그 이후는?’
황후일 때 ‘베르뉴의 딸이라는 진실’이 폭로되면 뤼셍 황실의 평판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아르망과 마리사가 평생 일궈온 황실을 절대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요부라고 기록되는 건 괜찮아.’
어차피 역사에서 예쁜 여자의 끝은 10%가 현숙한 여자고 90%가 요부니까.
‘하지만…… 두 분이, 평생을, 헌신하셨는데…….’
숨이 턱 막히며 불안이 치밀기 전, 세실리아는 펜을 꼬옥 움켜쥐며 호흡을 느리게 내뱉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10에서부터 거꾸로, 미쳐버릴 만큼 느리게 세었다.
‘……2…… 1.’
심장은 그제야 겨우 다시 느릿해지며 안정을 되찾았다.
세실리아는 몸을 일으킨 채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우울하게 내려다보던 서류를 둘둘 말고 제 머리를 가볍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종이뿐이라 아프지는 않은데도 몇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연신 때리던 그녀는 서류가 철저히 구겨지기 전에 겨우 자학을 멈추었다.
‘돌아가면 얘기해봐야겠다.’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찾으라…… 하.
또다시 원점.
그리고 알렉시스는 또다시 상처를 입겠지. 그녀 때문에.
죄책감에 죄책감이 더해져서 온몸을 자근자근 물어뜯었다.
사지가 괴물에게 물린 것처럼 손가락 꼼짝도 하지 못 하겠는 기분이었다.
뭘 어떡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하지만, 알렉.’
이건 아니잖아.
나도 네게 상처 주기 싫은데…… 이건 아니잖아.
먼 미래를 생각해 봐, 응?
‘비밀이 폭로된다면 너도, 그리고 부모님까지, 전부…….’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 세실리아는 제 몸 상태에 허탈해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 순간 머리를 스치는 건 그동안 목격했던 알렉시스의 처참한 표정들일 뿐이라 더 강한 자괴감이 치밀었다.
기억한다.
그녀가 대공과 춤을 추고 난 뒤, 알렉시스가 언뜻 내비쳤던 낯을.
너무나 고독해 보이는 얼굴.
가만히 손을 잡고 혼자가 아니라 위로해주고 싶었던.
‘그 얼굴을, 다시 봐야 하겠…….’
세실리아는 이를 악물며 미간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다소 매섭게 제 뺨을 찰싹 때렸다.
감정에 매몰되어야 할 때가 아니었다. 알렉시스는 이 순간에도 쌓여가는 일을 어찌어찌 견디고 있을 테니까.
“사치 부리지 마.”
자책 끝에서 계산을 재개하려던 때.
갑작스러운 오한이 온몸을 스쳤다. 저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스산한 바람.
세실리아는 펜을 쥔 상태로 움찔하며 느릿느릿 눈을 굴렸다.
방은 똑같았다.
변함없이 호화스러운 황녀의 침실.
중앙에 있는 침대에선 베개 여러 개가 곱게 뉘어 있었다. 시곗바늘은 규칙적인 똑딱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내달린다.
화려한 그림, 천장의 프레스코화, 이국적 무늬의 양탄자와 고급 도자기 화병까지.
바뀐 건 아무것도 없는데.
펜을 터질세라 움켜쥐었다.
숨을 진정하려 노력했어도 불길한 감각은 끊이지 않는다.
세실리아는 귀를 쫑긋 세우며 다시 느릿느릿 눈을 굴렸다.
‘익숙해.’
뭔가 한 번 경험해 보았던 감각이야.
떠올려 내.
세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펜을 놓았다.
퍼뜩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의 그림자만이 평온하게 너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담.
퍼뜩 든 생각에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하여 올려다본 밤하늘엔…….
“망할.”
여름 별자리만이 가득했다.
이미 시간이 훨씬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인데도.
세실리아는 욕을 짓씹으며 황급히 창문에서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썩 풀렸지만 생존 본능이 어떻게든 기력을 불어 넣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도망쳐야지!
더듬더듬 다시 발을 물렸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세 발짝.
창문을 계속 바라보는 상태로 뒷걸음질 쳐 마침내 등이 문에 부딪혔을 때.
까악!
불현듯 얄미운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에 무언가 휙 날아들었다. 유리창에 퍽 맞아 주르륵 떨어졌지만.
그리고 또다시 까악!
‘움직여.’
마음속 목소리가 애원했지만 손가락이 곱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계속 헛짓을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입술만 파드득 달싹이며 창문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깜박일 수도 없었다.
무슨 악마에게 목줄 매인 것처럼, 올가미에 단단히 옭아 매인 것처럼 ‘붙들려’ 버려서.
‘제발 도망쳐!’
더 있어봤자 좋은 꼴 못 볼 거면서 왜 그대로 있어?
속마음이 애원하고 이성이 경고한다. 그런데도 쓸모없는 몸뚱어리는 들어먹질 않았다.
세실리아는 악몽 같은 이 두려움을 견디려 최대한으로 반항했다.
‘눈이라도 감아, 차라리!’
까악, 까악, 깍!
연신 들려오는 날짐승 우짖는 소리.
망자의 시체 옆을 떠도는 흉수의 울음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공포 속에서 홉뜬 여자의 시야 속에 선득할 정도로 푸른 눈 한 쌍이 등장했다.
정확히는 ‘푸른 눈’만.
본디 검은 깃털을 가진 새는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푸른 눈 한 쌍만 어둠 속에서 동동 떠 있었다.
기절할 듯 휘청이던 세실리아는 끝내 가장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풍경을 목격해야 했다.
푸른 눈 한 쌍. 두 쌍. 세 쌍. 네 쌍.
그리고…….
새까만 창 전체를 빼곡하게 메울 정도로 선득한 푸른 눈들이 나타나 여인을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게 역치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세실리아는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그 덕분일까.
온몸을 경직시킨 마법이 풀린 것처럼 몸이 드디어 제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문손잡이를 잡아 돌린 후 복도로 뛰쳐나갔다.
‘나만 갇힌 걸까?’
텅 빈 복도를 뛰어가며 세실리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까마귀 떼가 그녀를 따라오는지, 복도의 통 창에는 푸르디푸른 눈들이 계속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커튼을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세실리아는 바보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저번에야 알렉이 구하러 왔지.’
지금은 아니야.
애초에 그는 저 머나먼 퐁레프에서 서류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터.
마리사를 떠올렸던 그녀는 곧장 후보에서 제쳤다.
‘그분은 안 돼.’
절대로 안 된다.
이미 알렉시스는 제 아버지를 잃었다. 그런 그의 어머니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절대로.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대로 평생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몽테-페르트와 연락할 수 있는…… 아니, 마탑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카밀 베르뉴를 늘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또 샤르텐에 침입하도록 내버려 둔 거야?
‘대체!’
알렉시스가 왜 그들보고 ‘무능하다며’ 비판했는지 처절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몽테-페르트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어떻게─
세실리아는 문득 뜀박질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래도 이 짓을 두 번째 하고 있어선지, 첫 번째 기절할 만큼 공포에 질렸던 것과는 달리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어.’
평상시라면 3분이면 달려 통과할 복도가 오래오래 끝나지 않는다 싶었다.
그녀가 달려온 길은 온데간데없었고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만 남아 있었다.
시간을 조작하는 결계를 만든 남자가 공간이라고 조작 못 할까.
‘이런 일도 당연히 가능하겠지…….’
세실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마탑이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밀 베르뉴가 기어이 샤르텐을 다시 침입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녀를 노린 꼴을 보면 분명 목표가 ‘세실리아 뤼셍’이라는 소리일 터.
입술이 기어이 찢어져 피가 났다.
안을 가득 채운 비린 맛에 정신이 아득해지긴커녕 더욱 되살아난 기분이다.
‘해야 할 일을 찾아.’
따지고 보면 이 남자는 그녀의 친혈육이기 전에 철저한 원수 아닌가.
그녀를 다정하게 보듬어주고 사랑으로 키워주신 양아버지를 죽인 원수.
‘찾아. 세실리아 뤼셍.’
마탑이 느려 터져서 아직 도착하지 못 했으니,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이자를 체포해야 할 것 아니냐고!’
복수를 위해서라도, 속죄를 위해서라도.
더는 이 남자가 뤼셍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너무나 필사적인 바람 때문이었을까.
그땐 흘려들었던 알렉시스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미끼로 쓰는 일은 없으리라 믿어.’
……저 말은.
마탑이 그녀를 ‘미끼’로 사용하려 했다는 뜻이겠지.
세실리아는 시엘샤 듀페르의 성격을 모르지 않았다.
척단의 마법사는 ‘미끼’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진 않으리라.
다만 여기서 맹점은.
그녀에겐 미끼로서의 이용 가치라도 있다는 것.
입안 가득 고인 피를 삼켰다.
‘그럼 미끼라도 되자.’
어쩌면 이건 그녀 스스로에게 베푼 기회일 수도 있겠다.
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속죄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기회.
허리를 단정하게 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옷차림까지 가다듬었다.
“우리.”
허공을 향해 아무렇게나 말해보았다.
“얘기를 할까?”
마치 미친 인간처럼.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실리아는 도박하고 보았다.
숨 죽여 몇 분을 기다렸을까.
뚜벅.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뚜벅.
이번엔 앞에서부터 들려온 소리.
또다시 몸을 돌렸지만, 이번에도 아무도 없었다.
세실리아는 벽에 기대어 선 채로 황급히 양옆을 곁눈질했다.
‘어디서 오는 거지?’
대체 어디 있는 거람?
그녀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왼쪽과 오른쪽에서 번갈아 가며 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계속 움직이다 보니 두통이 치밀어 이마를 짚었을 때.
“……처음 만나는구나, 아가.”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손을 내려 그녀의 바로 앞에, 정확히는 창문턱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기가 찰 만큼 짓궂게.
곧장 입술 사이로 욕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세실리아는 치맛자락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며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잔뜩 바랜 회색 머리칼.
그 아래서 번득이는, 더없이 괴기스러운 ‘푸른색 눈.’
누가 봐도 광기가 질척하게 눌어붙은 그 시선은 마주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세실리아는 오기를 섞어 견뎌냈다.
‘모순투성이구나.’
주름 가득한 피부와 천진해 보이는 표정.
지긋한 회색 머리칼과 옴폭 패어 있는 보조개.
‘……빌어 처먹을.’
하지만 가장 욕하고 싶었던 부분은, 보자마자 곧장 천박한 비속어를 내뱉고 싶었던 대상은, 바로 그의 얼굴이었다.
세월의 풍파라곤 있는 대로 다 맞았으면서 여전히 선이 고운 그 낯짝.
제국이 찬양하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알 것 같다.
세실리아는 환멸이 일어 지금이라도 제 얼굴에 칼을 대어 망가뜨릴까 고민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녀가 눈앞의 저 작자를 고스란히 빼닮은 건 아니었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분명 달랐으니…….
하지만 분위기며 선이며 퍽 비슷해서.
피가 통했다는 건 확신할 수 있는 그런 유사함이었다.
어이가 없어 실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대면을 각오했을 때 이런 감정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와 그녀가 닮았다니. 그게 설령 외양뿐이라도.
‘……역겹다.’
현실이 참 지독하게도 끔찍했다.
누가 제발 이 지옥에서 나 좀 구출해줘.
부질없는 소망이 저절로 튀어나올 만큼.
“우리 아가가…… 왜 웃을까?”
가만가만히 나온 질문. 우습게도 이 남자는 지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세실리아는 마디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쥐고 있던 손에서 겨우 힘을 풀었다.
“그러게요.”
도발을 해야 할까, 아니면 천천히 시간을 끌어야 할까.
핏발 선 눈동자로 가만히 응시했다.
베르뉴는 그녀의 태도에 살짝 불안해진 것처럼,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쭈뼛 다가왔다.
시무룩하게까지 보이는 낯짝에 기가 찼다.
당신은 그런 얼굴로 대체 몇이나 학살했을까.
이렇게 된 게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는 ‘진실’은 알고 있다.
당신은 운이 없었고, 마력은 지나치게 강대했으며, 그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했을 뿐일 테니.
하지만.
“왜! 왜 그랬어? 꼭 그랬어야만 했어?”
세실리아는 참다못해 악을 썼다.
베르뉴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그가 갸웃하는 사이 분노에 겨워 노려볼 수밖에.
“방금 까마귀 한 마리 죽이긴 했어. 딸기 꼬치는 맛있긴 하단다. 네가 언제 과일을 먹었지?”
뭐라는 거─
아.
미친놈이었지.
남자가 한 발짝 더 다가온 바람에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벽에 더욱 가까이 붙어야 했다.
“먹을 수는 있니? 이빨은 다 자랐을까?”
“…….”
“아가, 사과 먹어볼래?”
베르뉴의 손이 기어이 그녀의 턱을 쥐려던 순간.
콰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복도 저 끝이 깨졌다.
‘깨졌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거칠게 공간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샤르텐에 함께 온 황궁 소속 마법사들.
그리고.
“내 딸에게서 떨어져!”
마리사 뤼셍.
세실리아가 기겁하기도 전이었다.
새파란 눈이 흥미로 번쩍이며 미치광이의 고개가 끼기긱 돌아갔다.
몸은 전혀 움직이지도 않은 채 머리만 삐꺼덕 삐꺼덕 움직이는 모습이 소름끼칠 정도로 오싹했다.
머리 물어뜯긴 시체라도 보는 기분.
마법사들이 흠칫하고 세실리아가 파들파들 떠는 속에서 마리사 홀로 분기탱천할 뿐이었다.
“쥐새끼가…….”
“…….”
“여기 있었구나?”
이어진 모든 장면은 사뭇 비현실적이었다.
눈 한 번 깜박이기도 힘든 시간이었는데.
카밀 베르뉴가 더없이 사뿐하게 몸을 움직여 날랜 발걸음으로 마법사들을 통과했다.
그들이 당황하면서 마법을 시전하기도 잠시.
광인의 잔악한 손은 마리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어머니─!”
세실리아는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안 돼. 제발. 부디─!
아버지, 당신께서 사랑한 사람이라도 무사하게 해주세요. 제발.
떠나버린 망자에게 애원하며 세실리아는 허겁지겁 몸을 날렸다.
마력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일단 어떻게든 뭐라도 해볼 작정이었다.
“어머니!”
또다시 울려 퍼진 그녀의 새된 비명이 뭔가 의미라도 있던 걸까.
베르뉴가 멈칫했다.
마리사는 정신을 차렸으며 마법사들은 뒤늦게나마 뭐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리사가 황급히 몸을 숙여 피하는 동안 마법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남자를 칭칭 동여맸다.
“가세요, 전하!”
“폐하를 모시고 퐁레프로 가세요! 저흰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 당장!”
여러 목소리가 한꺼번에 울려 퍼졌다. 세실리아는 감사 인사조차 제대로 표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마리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안 돼, 난 여기서 저 새끼를─”
“어머니.”
제발. 그녀는 무언으로 애원했다.
반항하듯 버티던 마리사의 몸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세실리아는 어머니를 이끌고 복도 끝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너무나 뼈저리게 절감하여 목이 메고 가슴이 무너진다.
그들 뒤에 남겨진 마법사들은.
……그들이 떠나버린 후 저들은.
마법사들은 여럿이고 베르뉴는 한 명뿐이라는 진실은 전혀 안도를 주지 못했다.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그녀를 위해, 그녀와 마리사를 위해 희생했다.
이윽고 결계를 빠져나왔을 때 세실리아는 마리사를 돌아보았다.
비참함에 하염없이 매몰되어 있기엔 어떻게든 마리사를 퐁레프로 돌려보내야 했다.
“퐁레프로 돌아가세요.”
마리사는 여전히 뤼셍이다.
퐁레프로의 이동 마법은 충분히 쓸 수 있을 터.
“베르뉴는 저를 쫓고 있으니까…… 일단 여기 남아서 시간을 끌어볼게요. 미친놈이지만 설마 저를 죽이겠나요.”
설마는 무슨.
‘죽일 확률이 높긴 하지.’
저놈은 앞뒤 분간 못 할 정도로 미쳤잖아.
속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세실리아는 최대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을 체포해서 즉결 처형을 하든 감옥에 가두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했으니까.
그들 곁을 떠난 아르망 뤼셍을 위해서라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니, 세실?”
“…….”
“너 없이 내가 어딜 가?”
“하지만.”
“나도 남아 있으마.”
어머니, 라고 부르려던 세실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실랑이를 할 때가 아니었다.
너무나 불길한 촉이 그녀에게 일단 마리사를 퐁레프로 무조건 돌려보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녀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최악의 상상을 억눌렀다.
아버지에 이어서 어머니까진. 절대로 안 된다. 허락지 않으리라.
“저도 가요, 그럼.”
“너만 가렴. 나는 저 새끼를…….”
“어머니. 제발. 그 앤 이미 아버지를 잃었어요.”
당신까지 잃으면 안 된다.
알렉시스가 버틸 수 있는 현실에도 한계가 있을 터.
아들을 꼭 짚어 내민 이유에 마리사의 턱이 딱딱해졌다.
이를 짓쳐 물던 그녀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꾸나.”
마력이 드디어 휘몰아치며 익숙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주변을 망보던 세실리아는 뚜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뚜벅. 또다시 뚜벅.
익숙한 소리에 경기까지 일으킬 것 같다.
아까처럼 거지같은 장난을 치려는 건 아닌지, 이번엔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남자가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선 피가 몇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남의 피겠지.’
방금까진 분명 살아 있던…….
무력한 자는 분노할 자격도 없었다.
허망해하고 미안해하다가 끝내 고개를 떨굴 뿐.
세실리아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그의 시야에서 마리사를 감추려 노력했다.
제발 어머니라도.
“어디 가니, 아가?”
“…….”
“네 엄마가 찾을 텐데.”
“헛소리하고 앉아 있네. 걘 죽었어.”
더없이 건조한 목소리.
메마른 음성에 세실리아는 퍼뜩 돌아보았다.
마리사가 망쳐진 이동 마법진을 다시 그리며 뇌까렸다.
“널 데려가면 네 엄마도…….”
“죽었다니까, 등신아.”
지나치게 평온한 어조긴 했어도 분명한 ‘도발’이었다.
세실리아는 쩌적 얼어붙은 채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베르뉴는 밀랍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왜. 넌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녔으면서, 정작 네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니 싫어?”
“…….”
“양심 없는 개새끼. 그러니 세실을 네 딸이라 주장하지.”
“어머니!”
미친놈은 말로 상대할 수 없음을 증명하듯 곧장 마법이 날아왔다.
세실리아는 몸을 날려 마리사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푸른색 마력이 반쯤 완성되어 가던 마법진을 강타했고, 퐁레프로 향하는 진은 그대로 박살났다.
콰장창!
귀를 찢는 듯한 굉음.
얼어붙은 세실리아가 뭘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마리사가 그녀를 밀쳐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녀를 향해 베르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럼 아가는 내 딸이지, 내 딸이 아닌가?”
“어디서 남의 딸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앉아 있어? 개새끼야, 네가 버렸잖아!”
베르뉴가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마리사는 대답 대신 마법을 날려 보냈다.
서로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하는 마법이 희번덕거리며 복도 전체를 휘돈다.
세실리아는 머리를 싸맨 채 엉금엉금 벽 쪽으로 기어가 몸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를 구슬려 퐁레프로 돌려보낼지 고민하면서.
……마리사의 마력량은 평상시 수준이 아니었다.
아르망이 살아 있을 땐 각인한 반려와 마력을 공유했기에 압도적인 마력량을 지녔겠지만.
지금은.
“어머니…….”
세실리아는 더듬더듬 속삭였다.
마리사의 집중을 방해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저 지켜볼 수도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제발 답을 알려주었으면.’
그녀가 애타게 발을 동동거린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사는 이를 악문 채로 달려들 뿐이었다.
“왜 그렇게 막아?”
베르뉴가 못내 억울하다는 음성으로 항의했다.
“왜 그래, 대체? 유피가 아가를 기다린다니까?”
“내 딸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개새끼야! 내 남편 데려간 걸로 족하지 않아? 내가 딸까지 뺏길 것 같아? 내가 미쳤다고?”
“…….”
“너한테 더는 아무것도 안 내줄 거야!”
“그래?”
베르뉴가 순간 손을 멈추더니,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잘못을 저지른 뒤 쩔쩔매는 순박한 표정에 마리사가 역겨워하던 순간.
“그럼 반만 가져갈게.”
그가 적선이라도 베푸는 듯 뇌까렸다.
‘반’만?
숨죽인 채로 엿듣던 세실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편 마리사는 그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세실리아가 오지 말라며 손을 내저을 틈도 없었다.
콰드득!
간발의 차이로 둘은 공격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들이 있던 벽만은 오롯이 노출되어야 했다.
벽이 심하게 훼손되며 거대한 굉음을 내질렀다.
걸려 있던 거대한 그림이 아슬아슬 흔들리다 결국 휘청 앞으로 쓰러져 내렸다.
“어머니!”
세실리아는 마리사를 밀쳐내려 했지만 위험을 껴안은 어머니는 비키지 않았다.
액자가 기어이 둘에게로 쏟아지며 산산조각 났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여인의 등에 알알이 박혔다. 그러지 못한 나머지는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세실리아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액자를 막으려던 제 손에 파편들이 박혔다는 것도 모르는 채.
그리하여 손등에, 손에, 그리고 손목에, 요란한 상처가 생겼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오롯이 그녀는 더듬더듬 피를 흘리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어디에 맞았는지는 몰라도 마리사의 이마 한 구석은 찢어져 그녀의 뺨 위로 피를 뚝뚝 떨구고 있었다.
“……안…… 돼…….”
“…….”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반쯤 악을 쓰자 ‘괜찮다’라는 무의미한 말이 돌아왔다.
“괜찮아. 괜찮아…….”
“제발…….”
“세실.”
마리사가 그녀를 한 차례 아주 미약한 힘을 더 주어 끌어안았다.
온통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다.
“내 딸이 되어줘서 고마워, 아가.”
마리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며 녹색이 가늘어졌다.
세실리아는 눈을 부릅뜬 채 어머니가 힘겹게 지어주는 미소를 마주했다.
온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망 속에서 바보같이 한 단어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안 돼…….”
조심조심 마리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모든 게 축축했다.
무슨 액체지? 너무 비릿한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
“아가.”
“아아아아아아아악!”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세실리아는 마리사를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등에 박혀 있던 유리 조각이 이젠 그녀의 손과 손목에 박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품 안으로 쓰러진 이 여인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어서.
마리사는 이제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듯 축 늘어져 있었고, 세실리아 홀로 저 미친놈을 쳐다보고 있었다.
경쾌하게…… 마치 춤이라도 추듯, 그렇게 걸어온다.
이 비극을 만들어 낸 주제에 홀로 기뻐하는 꼴이라니.
‘……미친놈.’
정말, 치가 떨리게 싫어…….
고작 네 걸음 남았다.
그리고 세 걸음.
‘당신이 증오스러워.’
세실리아는 마리사를 꼭 끌어안고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죽어도 안 뱉을 이름.
하지만 나락의 끝에 도달하고 나서도 결코 잊지 못할 이름을.
“……알렉.”
여기에 오길 바라는 맘은 아니었다.
이 지옥이 대체 어디라고 와.
그를 절대로 위험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지금 이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생각나는 단어가 그뿐이라.
“알렉…….”
세실리아는 마리사를 꼭 끌어안은 채로 정신을 놓아버린 여인의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묻었다.
차디찬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저 새끼는 내 친아비라는 주제에 왜 내게 마력을 안 물려줬대?’
자신의 무력함이 너무나도 절망적이라 눈앞이 돌았다.
돌다 못해 어두컴컴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를 갚고 싶었고, 어머니를 이곳에서 빼돌려 당장 치료받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자기 자신을 보호할 힘도 없었다.
안 그래도 피가 터진 입술을 꼭 깨물었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모습을 재밌게 감상하던 미친 새끼가 또 한 걸음 내디딘다.
이제 진짜.
한 걸음.
손을 내뻗으면 잡힐─
“알렉!”
널 불러서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한데…… 근데 제발, 여기에 와줘.
내가 아무리 불러도 넌 못 듣겠지만 제발, 제발, 신이시여, 부디 기적을.
“아가, 사과가 싫으면 사탕을 줄까?”
“사탕 처먹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세실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고, 베르뉴는 한 박자 늦게 뒤돌았다.
거세게 복부를 차이는 결말을 위하여.
폭주한 마법사를 망설임 없이 걷어찬 알렉시스는 다음으로 피투성이가 된 두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마리사는 완전히 의식을 놓은 상태였으며 세실리아는 인형보다 더 창백하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한겨울에 알몸으로 나앉은 상태보다 더 심각한 경련.
“아가, 사탕이 싫으면 설탕을 줄게─!”
나동그라졌다가 일어난 베르뉴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지만, 곧이어 도착한 몽테-페르트의 마법사들이 쏟아졌다.
그들이 서로를 상대하도록 내버려 두며 알렉시스는 누이에게서 어머니를 받았다.
“알렉, 어, 머니가─”
“압니다.”
처절하게 깨진 음성.
비참하게 망가진 현실 속에서, 도저히 믿기 싫은 이 비극 속에서, 알렉시스는 목소리를 겨우 긁어냈다.
세실리아가 짐승 같은 절규를 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녀의 손이며 팔이며 모조리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나고 있는데도.
그는 누이를 겨우 일으켜 세우며 속삭였다.
“……알고 있어요.”
죽고 싶었다.
* * *
알렉.
너는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건 비극이라 했어.
그리고 제 위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 더한 비극이라고 했었지.
그럼 이 비극은 무엇에서 기인했을까?
내가 내 위치를 몰라서?
아니면 인정하지 못해서?
아니면 그냥…….
내가 ‘나’라서?
* * *
카밀 베르뉴와의 추격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시엘샤가 어느 해변에서 멈추자, 그녀를 따라 에드릭을 비롯한 다른 마법사들이 근처에 내려앉았다.
이번 추격전은 저번에 비해 뼈아팠다.
둘.
그들의 끄트머리에서 함께하던 애송이 마법사 둘이 비명횡사했으니.
마법사들의 낯은 긴장과 짜증, 환멸과 체념, 비통과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시엘샤는 눈을 감고는 그들을 위해 헌신해주었던 두 어린 별에게 묵념을 표했다.
“선배.”
“놓쳤지?”
“……네. 왜 이렇게 베르뉴의 흔적을 쫓기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동감해.”
몽테-페르트 소속 척단의 마법사들은 그렇게까지 나쁜 검거율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들의 실패율을 높인 천적은 딱 한 명.
바로 카밀 베르뉴였다.
사실 그 새끼는 폭주하지만 않았다면 마법사에 한 획을 그은 대마법사가 되었을 터.
이 세상 그 모든 마법사 중에서 시공간에 대한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유는 알겠네.”
시엘샤는 어물거리며 정정했다.
“윽.”
주변에서 침음을 흘렸다.
에드릭이 신경질 난다는 듯 바다를 향해 돌멩이를 빵 차서 던져 넣었다.
마찬가지로 애꿎은 돌들을 패대기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시엘샤는 털썩 주저앉았다.
‘알렉시스 뤼셍은 어떡하냐.’
젊은 황제에게 가진 진실한 사감은 제쳐 두고 정말 오롯이 걱정되고 있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보통 사람이라도 억장이 무너질 상황을 안 그래도 ‘정신이 간당간당한 마법사’가 견뎌야 한다니.
그뿐일까.
누가 봐도 지금 황제의 집안 상황이 ‘반려를 찾을 만한 상태’는 아니지.
아버지께선 서거하셨고 어머니께선─상태가 어떤진 나중에 들어야 하지만─공격당하셨으며 하나뿐인 누이는 아주 거대한 폭탄을 안고 계신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이면.
‘베르뉴의 딸이라니.’
시엘샤는 제 왼쪽 위 어금니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선배, 이제 어쩔 거예요?”
“선황후 폐하께선?”
“치료를 마치고 퐁레프로 모셔졌을 겁니다.”
“그럼 퐁레프로 가야지.”
그분께서 모쪼록 무사하시길.
그리고…….
그 예쁜 황녀는 아예 넋을 놓은 상태였다.
눈에 초점을 잃은 채로 줄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앉아 있었지.
그녀가 정신을 되찾을 때는 선황후 마리사를 담당한 황궁의가 들락날락할 때뿐이었다.
“에드릭.”
바닷가에서 연신 돌멩이를 던지던 에드릭이 터덜터덜 돌아섰다.
남자의 얼굴엔 일이 잘 안 풀리는 자 특유의 초조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전음을 보냈다.
[습격을 세 번이나 받았어.]
데뷔탕트 때 한 번. 샤르텐에서 두 번.
[그리고 한 번도 다치지 않았지.]
[……아.]
주어는 없었지만 누굴 언급한 건지 알아챈 모양이다.
에드릭은 한숨을 내쉬며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정말 하게요, 선배?]
[이 정도 확률이면…… 안전할 것 같지 않아?]
베르뉴 새끼가 꼴에 자기 딸이라고 아끼긴 하는 건가. 그 정도로 광기가 잠식된 상태에서도.
시엘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관리자’의 흔적은 찾고 있어, 에드릭?]
[찾고는 있지만, 원래 ‘관리자’는 추적 불가능한 거 아시잖아요. 애초에 저들이 가진 능력부터가 지들 존재 지우는 최면술이라며.]
[그건 그렇지.]
에드릭이 천천히 뻗은 손을 맞잡으며 시엘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턴 뒤 바닷가를 흘끗 흘겨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파도는 면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바다 특유의 짠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발끝까지 밀려드는 새하얀 거품과 밤을 머금어 더욱 깊어진 바다의 색.
밤바다는 푸른색이 아니라 검은색이다.
뤼셍의 머리칼처럼.
시엘샤는 아래의 바다에서 위의 달을, 위의 달에서 아래의 바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색이 바뀔 날도 머지않았다.
* * *
샤르텐으로 떠난 안주인들께서 맞이한 비극에 퐁레프 역시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애타게 소식을 기다렸고, 그리하여 결국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선황후께서는 다행스럽게도 심각한 상처는 피하셨다고 한다.
액자가 떨어진 바람에 유리 파편이 등에 꽂혔지만 내부 장기는 모조리 피해갔다고.
황녀께서도 다행스럽게 큰 상처가 없으셨다고 한다. 손이나 팔에 유리가 자잘하게 박혔을 뿐.
무엇보다 ‘얼굴’이 다치지 않으셨으며 손과 팔에 남은 상처는 흉터 없이 잘 아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다만 그녀의 위태로운 정신 건강이 걱정이었다.
황제에게 돌돌 안긴 채 등장한 황녀께서는 기절하신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녀의 침실’이 아닌 ‘황제의 침실’로 넣어졌다.
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등장한 황제께서는 모두의 의아함을 무시한 채 그대로 침실로 향했더랬다.
한참 만에 돌아왔을 때 그의 품은 자유로웠다.
황녀의 시녀들을 비롯하여 지켜보던 이들은 전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뜻밖의 사태에 당황해야 했다.
그마저도 비에라 백작 부인께서 해산을 명령하시는 바람에 끝나야 했지만.
선황후께선 편찮으신 데다가 황녀께선…… 곁에 안 계신 만큼 분위기가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닐 줄은.
다음 날 아침, 황제께 신문을 갖다 드리던 시종장은 맨 첫 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쟁반과 신문 모두를 떨어뜨릴 뻔했다.
“말도 안 돼.”
그는 황급히 문을 두드리며 허락을 듣기도 전에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사 제목이 가히 충격적이라.
신문의 첫 면에는.
뤼셍의 귀보가 숨기고 있던 출생의 비밀
그렇게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