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이별의 의미 (11/18)

6. 이별의 의미

어둑한 밤이었다.

달빛마저 유난히 희미해 보이는 밤이라, 경비들은 지루한 정경을 바라보다 말고 꾸벅꾸벅 졸 뻔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엎어져서 코가 깨질 법한 마법사였다.

면상이 갈릴 뻔한 위험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팔꿈치로 동료의 명치를 가격해 주었다.

“야야, 깨. 깨어나라!”

“으어어어억……! 난 이래서 야간이 싫어!”

한 달에 고작 세 번뿐인데도, 야간 근무는 딱 질색이었다.

밤을 지새우는 짓은 더럽게 힘들답니다. 젠장할!

“나도 싫다.”

“그래도 너랑 같이 보초 서서 좋네.”

“말은 고맙다만 눈 제대로 뜨고 얘기해라, 자식아.”

“나 과자 좀 주라.”

“맡겨 놨냐?”

그들은 초콜릿을 나눠 물며 기지개를 켰다.

제아무리 졸린다고 해서 경비를 소홀히 할 순 없는 게, 그들이 지키는 곳은 바로 생-뢰크 외곽에 설치된 관제탑이었다.

관제탑.

이동 마법을 시전할 때 필수적인 ‘좌표’를 관리하는 시설.

관제탑이 무너진 순간 이동 마법이 불가해지며, 곧장 교통이 마비된다. 그러니 관제탑의 경비는 철저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뤼셍 제국엔 총 5개의 관제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도인 생-뢰크 그리고 북부, 서부, 남부, 동부 지역에 각각 한 개씩.

개중 생-뢰크의 관제탑은 가장 큰 규모와 가장 삼엄한 경비를 자랑했다. 뤼셍 제국의 수도로써 대륙에서 마법사들이 가장 밀집해 있는 도시인 만큼 당연했다.

마법사는 고개를 쳐들어 관제탑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새벽 세 시의 어둠을 뚫고 마법 기계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중에서 쟤가 가장 성실할 거야.”

그가 농담을 건네자.

“쟤가 성실 안 하면 우린 파국이야.”

“쟤만큼 일하면 연봉이 두 배가 될까?”

“아마도? 근데 저렇게까지 일하고 싶진 않다. 온종일 쉬지도 못하고, 야, 10배여야 한다, 저건.”

“인정.”

이번엔 동료가 마들렌을 꺼냈고, 그들은 과자를 사이좋게 반으로 쪼개 나눠 먹었다.

리베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부터 친했던 그들은 반년을 터울로 각각 안정화에 성공하면서 관제탑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함께 근무를 시작한 지 5년…… 누구도 감히 관제탑을 건드리지 않는 만큼 이 임무는 중요하면서도 지루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사고 가득한 직장 생활보다야 백 배 낫다!

마법사가 뻐근한 몸을 깨우려 기지개를 켰을 때. 어느 순간 그는 새끼 토끼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오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작고 새하얀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귀엽네.”

“그러게.”

“잡아다 키울까?”

“근데 눈이 무섭지 않냐?”

보통 토끼의 새빨간 눈이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이 토끼는 의외로 여름마저 얼려버릴 듯한 새파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숫제 등줄기를 얼려버릴 냉기에 마법사는 머쓱하게 웃었다.

“거 눈 무섭네. 근데 파란 눈의 토끼는 처음 봐서 신기하다.”

보통 검은색이나 붉은색 아니었냐고. 한데 푸른색…… 잠깐.

“피해!”

비명을 지르기도 잠시였다. 그의 바로 곁에 있던 친우가 허물어졌다.

그는 발치를 적시는 붉은 피를 고장 난 채로 내려다봐야 했다.

분명 방금까지…….

“미안해.”

온순한 음성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마법사는 진저리치며 휙 몸을 돌렸다.

푸른 눈의 마법사가 진심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목격했다.

거미줄 친 듯한 진회색 머리칼.

돌아버린 푸른색 눈동자.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서.

저치의 외양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저 정도로 광기에 찌든 눈을 가진 이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여야 했다.

“여긴 안 돼.”

그는 마지막 사명감으로 막아섰다. 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관제탑만은 멀쩡해야 했다.

현재 누군가가 이동 마법을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 관제탑이 망가진다면, 그 마법사는…… 아마.

죽거나. 다른 차원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터.

안 돼.

“오랜, 만이라…… 익숙지 않았어.”

남자가 순순히 사과했다.

미친놈이 뭔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담.

마법사는 조심스레 발을 한 걸음 물리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마력은 충분하다. 저기 있는 저 미친놈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익숙지 않아서 뭐요?”

“한꺼번에 내릴 수 없었지.”

“…….”

“기왕 떠나는 거 같이 떠나는 게 좋더라. 안 그래애?”

카밀 베르뉴가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바로 그 찰나에 저주 마법이 날아드는 걸 보며 마법사는 망설임 없이 제 마력을 발동시켰다.

강력한 녹색 결계가 관제탑을 둘러싸는 동시에 푸른빛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절명한 청년의 손을 짓밟으며 카밀은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 기울였다.

“하하, 책임감 투철하구나?”

마법사가 제 생명을 모조리 긁어내어 만든 보호 마법이 관제탑 주변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역대 최악의 미친 마법사라 해도 쉽게 풀지 못할 마법이.

관제탑은 10분 뒤에 천천히 작동을 멈추리라.

그리고 누구도 감히 자신을 파괴할 수 없도록 깊은 영면에 들겠지.

최고 관리자, 즉 뤼셍의 직계가 직접 나타나서 깨우기 전까진 말이다.

카밀은 박수를 짝짝 치며 즐거워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죽은 이의 손이 이리저리 짓밟혔다.

“으응~”

아르망 뤼셍이 어떤 반응을 취할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그는 눈꼬리를 생긋 휘며 웃다가, 죽은 이의 손목을 휙 잘랐다.

황제께 헌납할 멋진 전리품이었다.

* * *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의 마력 검사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만약 위험 등급을 받는다면…….’

그리하여 증인으로 참석하게 된 리베 아카데미의 교장, 율리케 경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마탑과 뤼셍 제국은 또 열심히 협상에 들어가야겠지.

마탑에겐 ‘폭주 위험에 접어든 마법사’를 관리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

한편 뤼셍 제국은 더는 황태자를 뺏길 수 없었다.

애초에 제국의 황태자가 몽테-페르트에 간 경우도 거의 드물긴 했다.

보통은 제왕학 수업을 비롯하여 군주의 자질을 배우느라 부모의 감시 아래에 퐁레프에 머물렀으니.

“하…….”

율리케는 참지 못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의 곁에서는 블랑슈 휴스턴이 고개를 규칙적으로 까딱이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 같니?”

블랑슈에게 질문하자, 그녀가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그런 것치고 연녹색 눈동자엔 걱정이 가득 깃들어 있긴 했다.

율리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 반려로 정한 분은…….’

블랑슈 휴스턴 생도는, 황족 남매와 둘 다 친한 영애는 과연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는 떠보듯이 질문했다.

“황녀 전하께선 무슨 생각이시래?”

“생각이 문젠가요, 감정이 문제지.”

블랑슈의 무덤덤한 답이 들려왔다.

한 차례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던 스승과 제자는 서로가 ‘진실’을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네 방법은 찾고 있나?”

“……찾고 있어요.”

“연애도 좋다만 안정화 방법도 빨리 찾자.”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를 외칠 때 목소리가 상당히 높았던 터라,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블랑슈가 흠흠 헛기침을 했지만 율리케는 대수롭잖게 코웃음을 쳤다.

“사내 연애인데 모를 수 있나?”

“사내에선 안 했는데!”

“했다면 당장 쫓아냈지. ‘교내’인데.”

“그렇긴 하네요.”

시답잖은 농담을 줄줄 잇노라니, 몽테-페르트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들어섰다.

그들이 현재 있는 장소는 퐁레프에 있는 복층 구조의 응접실.

마력 운용이 어느 정도인지 등등 복잡하게 검사하기보단 ‘마력 안정성’만 측정해도 되는 만큼 검사를 퐁레프에서 하기로 했다.

‘내가 다 초조해지는군.’

율리케는 땀이 가득 찬 손바닥을 바지에 한 차례 문질러 닦았다.

제자인 황태자가 마탑에 끌려가기라도 할까 너무나 걱정되어서.

1층에는 증인으로 참석한 그와 블랑슈 휴스턴, 클라우드 마뉴엘 대공과 몽테-페르트의 세 마법사들이 있었으며.

2층에는 제국의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녀와 몇몇 다른 사용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의 수석 시녀인 칼리아 오페르가 열심히 다과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황녀께선.

그녀는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외양을 뽐내며, 다소 무감한 낯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랑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한 차례 흔들어준다.

홀로 태평해 보여 율리케는 순간 울컥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전하랑 각인 좀 해주면 안 됩니까?’

사람이 마탑으로 끌려갈 것 같잖습니까!

사랑이란 감정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겠냐마는, 뤼셍의 신민으로써 입술을 삐죽일 수밖에 없었다.

“언니 긴장하셨네.”

블랑슈가 작게 중얼거리기 전까진.

“긴장하셨다고?”

“저거 긴장하신 거예요.”

저 무표정이?

황녀의 행동은 평상시처럼 느릿느릿하면서도 정교했고, 우아하면서도 세심했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깃든 기품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저 여유는 오만이다.

뤼셍의 황족이 마땅히 갖춰야 할, 그리하여 갖게 된 오만.

“언니가 별로 티를 안 내긴 해요.”

“아…….”

별로 수준이 아닌데.

율리케가 속으로 뇌까렸을 때, 응접실 문이 휙 열렸다. 그리하여 이 자리의 주인공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다.

더할 나위 없이 반듯한 옷차림. 수려한 낯은 아침 식사를 즐기는 것처럼 마냥 평화로웠으며, 아름다운 보랏빛엔 동요 하나 없었다.

황녀가 독한 것처럼 황태자 역시 만만찮게 독했다.

‘남매란. 아니, 연인이란, 인가?’

각 잡힌 옷차림엔 티 하나 없다.

그뿐일까. 제국의 후계자께서 두르고 계신 분위기엔 권태까지 깃들어 있었다. 모든 게 그저 무료하다는 듯이.

시엘샤 듀페르가 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그럼 전하, 시작할까요? ……준비되셨습니까?”

황태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여주었다.

단언컨대 뤼셍의 제국민이 가장 초조해야 할 순간일 터다.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시엘샤 듀페르의 선언에 황태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계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잠자코 시선을 들어, 2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가족들을 응시했다.

초조하게 낯을 굳히고 있는 아버지, 앞으로 몸을 숙인 어머니와 무감한 얼굴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누이를.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폭주하다가 기적적으로 멈출 경우, 마력이 일시적으로 안정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데뷔탕트 즈음 폭주했던 블랑슈도 연회에 무사히 참석할 수 있다 했었지.

세실리아는 가장된 평정을 얼굴 위에 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알렉시스가 직접 말해준 만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찮겠지.’

아주 안정적으로 나올 거다.

알렉시스는 실제로 세레인에서 폭주할 뻔했다가 멈췄으니까.

하지만 알고 있는데도 불안해할 수밖에 없어서.

어머니의 호흡이 불안정했다.

그녀가 지탱할 사람들을 찾으려는지 양손을 뻗어 한쪽은 아버지의 손을, 다른 쪽은 세실리아의 손을 꼭 붙들었다.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시엘샤 듀페르가 나직이 선언하는 소리.

뻣뻣한 종이를 펴던 그녀가 곧바로 눈을 부릅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초조하게 몸을 기울일 수밖에.

세실리아의 손을 잡은 마리사의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손 전체를 쥐어짤 정도로 간절한 힘에 세실리아는 가만히 어머니의 손등을 덮어주었다.

결과 괜찮을 거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거니, 알렉.

……아.

‘행여 내게 부담을 줄까 일부러 그런 건가.’

남자의 행동, 선택 하나하나엔 오롯이 그녀가 있었다.

그 진실이 주는 무게에 세실리아는 순간 서글퍼졌다.

‘너는 내게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난 네게 무엇을 해주나?’

기실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은 관계였다.

그녀는 알렉시스와 각인하지 않아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의 계획은 적당한 때에 퐁레프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다 죽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알렉시스는 달랐다.

그는 그녀와 무조건 각인했으며, 그녀도 모르는 어릴 적 언젠가부터 그녀를 사랑해왔고, 그리하여 그 사랑을 갈구했다.

‘사랑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게 편하다더니…….’

거짓말.

마냥 받는 것부터가 슬펐다.

알렉시스를 기다리게 만들어 미안했고, 똑같이 보답해줄 수 없는 그녀가 한심하고 답답했다.

‘난 대체 무엇을 원할까?’

일단 네가 몽테-페르트로 가지 않길 바라. 네가 언제나 퐁레프에 있어 주기를. 그리하여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황태자로서의 권위를 세우길.

그리고 네가.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를.’

부모님을 바라보던 보랏빛 눈동자는 이젠 그녀를 담고 있었다.

지금은 무료한 빛까지 품은 강건한 시선인데 왜 세레인에서의 순간이 다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길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던 그 보랏빛.

껴안고 다독여주고 싶은 그 여린 색채가 선명하게 어른거려서.

‘네가, 행복하려면.’

세실리아는 잠자코 숨을 골랐다.

“말도 안 돼.”

마탑 소속 마법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적막을 깼다. 그러고 보니, 침묵이 의외로 면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알렉시스에서 시엘샤에게로 돌아본 순간.

마법사가 검사지를 붙들고 눈을 크게 뜬 모습을 목격했다.

“읊어.”

알렉시스가 무덤덤하게 명령한다.

“그대로.”

“…….”

“…….”

“stabilité.”

폭주의 위험 하나 없이, 지극히 안정하다는 결과를 알려주는 단어.

마리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했다.

아르망이 의아하면서도 안도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조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세실리아는 알렉시스만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다시 얽혔다. 무감한 표정 아래에 감춰진 주인들의 본 심정을 까발리면서.

……알렉시스는 기뻐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예상 외의 결과에 황망해진 마탑의 마법사들을 버려둔 채 응접실을 나섰다.

‘일시적인 안정이지.’

지금 위기를 넘긴 건 사실이었으나, 곧 다시 위험해지리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지지?

알렉시스는 걸음을 멈춘 채로 이리저리 가늠해 보았다.

본디 늦가을에서 초겨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태가 다시 안정으로 돌아간 만큼, 시간은 조금 벌었고……. 그러니까.

‘늦겨울. 아니면 초봄.’

그 안에 세실리아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을까.

사랑은 끊이지 않는 보슬비였다. 끊이지 ‘못 하는’ 보슬비일 수도.

우산 없는 그는 매 순간 계속 젖어 드는데, 우산을 지닌 그녀는 아주 가끔 빗물이 튈 뿐 여전했다.

차마 우산을 버리라 할 수 없어 그는 보슬비가 폭우가 되길 기원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신발이라도 젖길.

흠뻑 젖은 그를 돌아보며 작은 온정이나마 베풀어 주기를.

“전하.”

율리케의 목소리.

흘끗 돌아보자, 리베의 교장이자 옛 스승이었던 이가 흰둥이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전하.”

블랑슈 휴스턴이 쾌활하게 속삭였고.

“하셨습니까?”

율리케는 앞뒤 잘라먹은 질문을 내던졌다. 아마 그도 검사 결과에 의아해하고 있을 터였다.

생-뢰크로 돌아온 여름, 리베에서 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마력은 ‘안정 수준’까진 아니었다.

그리고 각인을 못 한 만큼 폭주 가능성은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질 리는 없을 테고.

알렉시스는 어깨를 으쓱했고.

“하…….”

율리케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좋은 게 좋은 거죠~”

곁에서 블랑슈가 단순한 결론을 내려버려 이 시대 진정한 교육자께선 더 환장하겠다는 낯을 내비쳤다.

“모쪼록 빨리 각인에 성공하십시오.”

율리케가 나직이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의 안위와 뤼셍의 무궁한 번창을 위하여.”

“……그래.”

“그 얼굴과 그 몸을 가지고 성공 못 하는 건 죄악입니다.”

“아, 상대가 나보다 더 잘나서.”

차마 황녀의 외모를 인정 못 할 수는 없었는지, 율리케는 블랑슈가 킥킥거리는 동안 한숨을 내쉬었다.

뤼셍의 황태자는 확실히 운이 좋았다.

검사지와 검사 기계를 가지고 쑥덕거리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구경하며 클라우드 마뉴엘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눈에도 알렉시스 뤼셍은 확실히 위태로웠다.

‘그래서 속에 불을 질러봤지.’

언제 어느 정도까지 견디나 싶어서.

견뎠을까, 아니면 견디지 못했다 기적이 벌어졌을까.

어느 쪽이든 저치가 행운아인 건 확실하다.

마뉴엘은 다리를 길게 꼰 채로 발끝을 까딱였다.

‘승리의 뤼셍.’

마뉴엘 공국의 군주로선 상당히 짜증스러운 호칭이다. 뤼셍 제국과의 전쟁에서 매번 패했었거든.

발끝을 계속 까딱이던 그는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황태자가 떠난 뒤에도 황녀는 우수 가득한 표정으로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쳐다봤더랬다.

마뉴엘은 뤼셍 제국에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짜증과 자신이 황태자를 뒤흔들긴 했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잠깐 고민해보았다.

‘흐음…….’

클라우드 마뉴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태자의 폭주 위험 때문에 일정이 어영부영 길어진 바였다. 하지만 이젠 그만 공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 * *

마뉴엘 대공의 귀환 선언은 갑작스레 이루어졌지만 퐁레프의 누구도 놀라진 않았다.

원래 마뉴엘 공국인들은 예민하고 변덕스럽기로 유명했다. 클라우드 마뉴엘은 그런 공국의 군주답게 공국인들의 본질 중 본질을 갖춘 이였고.

‘언제 돌아가시겠습니까?’

제국 황제의 정중한 질문에.

‘오후로 생각 중입니다.’

마뉴엘 대공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황제와 황후가 당황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워둔 듯합니다. 일정이 길어지긴 했잖습니까.’

마뉴엘 대공은 ‘난 곧 떠날 예정이니 너희들은 날 배웅할 준비나 해라’라는 암시를 내건 채 휘리릭 떠났다.

공국의 사절단은 주군의 변덕에 익숙한지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마리사와 세실리아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국빈의 배웅을 소홀히 할 순 없는 법.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반나절을 투자해 번듯한 자리를 마련해낼 수 있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세실리아는 방긋방긋 미소를 머금은 채로 푸르뎅뎅한 남자가 부모님께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공.”

알렉시스와의 인사.

“만나서 즐거웠어요.”

“저 역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인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뉴엘 대공이 태평하게 돌아섰다.

세실리아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떠나기 직전 찾아와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머리색을 염색하십시오.’

‘……네?’

그녀의 머리칼 색이 염색되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진 건가……?

세실리아가 공포에 질렸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 못 챘는지, 마뉴엘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둘 다 흑발이면 너무 오누이 같습니다.’

‘…….’

‘그나마 다른 머리색인 게 제국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쉬울 겁니다.’

언제까지 오누이로 남아 있을 건데?

대공의 눈빛이 빈정거리듯 가늘어졌었지. 세실리아는 잠깐 멈칫하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귀한 조언이군요. 공께서 건네주실 줄은 몰랐지만.’

‘저도 몰랐습니다.’

얄미운 남자답게, 마뉴일 대공은 그녀의 지적을 끝끝내 받아치고 방을 나갔었다.

‘다른 머리색이라.’

세실리아는 크게 심호흡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알렉시스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가 잠깐 돌아보더니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소년처럼. 더없이 청량하게.

그에 정신이 뺏긴 나머지, 세실리아는 사태를 다소 늦게 파악했다.

갑자기 주변이 부산스러워진다. 아르망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마리사 역시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팔짱을 꼈다.

“이동 마법이 안 됩니다!”

마뉴엘 공국의 마법사가 우렁우렁 외쳤다.

대공과 함께 돌아가려던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도, 사절단에 끼어 있던 마법사들도 모조리 당황한 상태였다.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려는 알렉시스를 아르망과 마리사가 동시에 저지했다.

“이동 마법이 안 통하나?”

“네, 네!”

“마력이 부족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마법사가 다시금 진에 마력을 넣었다. 평상시라면 빛을 내뱉어야 하는 진이 이번만큼은 잠잠하고도 평화로웠다.

아르망이 서늘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재빠르게 마법진을 검토하더니, 이것저것 수정하고는 직접 진을 발동시켰다.

이번에는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멈춰라.”

그가 엄한 목소리로 한 마법사가 발을 내디디려는 걸 저지시켰다.

“무슨 일이십니까?”

“좌표가 불안정해.”

아들의 질문에 대답한 황제는 잠자코 턱을 쓸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어느 쪽 방향을 돌아보았다.

“관제탑을 살펴봐야겠군.”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가마. 몽테-페르트도 함께 가겠지?”

권유가 아닌 명령이다.

시엘샤 듀페르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와 함께 온 두 마법사가 황제의 뒤에 따라붙었다.

“일단 우리는 관제탑을 살펴보러 갈 테고…… 마리사.”

국빈들을 챙겨달라는 부탁에 황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한 차례 포옹하고, 서로의 뺨에 입맞춤을 남긴 뒤 떨어졌다.

자식들의 머리를 나란히 헝클어뜨린 뒤에야 황제는 자리를 떠났다. 마리사는 어수선해지려는 주변을 솜씨 좋게 정돈했다.

“그럼 공. 우리의 만남이 더 길어질 듯해서 기쁩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동 마법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퐁레프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도 참 대단하셨다.

‘반나절 내내 미친 듯이 뛰어다니게 만든 남자에게 저런 친절을 베풀어 주시다니.’

나라면 뒤통수를 한 대 딱 때리고 시작했을 텐데 말이야.

세실리아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다른 이들과 함께 퐁레프로 돌아갔다.

대공은 꾸덕꾸덕한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갔다.

마리사와 세실리아 그리고 알렉시스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마리사가 제 몫의 푸딩을 숟가락으로 통 두드렸다. 젤리가 탄력 있게 흔들리자 반투명한 그림자 역시 일렁였다.

“이제 우리 셋인데, 그냥 온실로 갈까?”

마리사의 제안에 세실리아와 알렉시스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실엔 금빛 나비 한 마리가 햇빛 속에서 게으르게 노닐고 있었다.

나비가 내려앉은 꽃이 웃음을 머금으며 나풀거렸다.

알렉시스의 시선이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꽃술의 단맛을 상상해보려는 듯이.

세실리아는 그의 시선을 쫓아 나비와 꽃을 바라보았다가, 나비가 변덕스럽게 꽃을 떠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겨진 꽃이 홀로 쓸쓸하게 너울거렸다. 그 위로 쏟아지는 금빛 햇살마저도 슬픔을 위로할 수 없는 듯했다.

“다들 고생 많았어.”

마리사의 목소리가 정적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알렉시스는 아침부터 마력 검사를 받아야 했다. 마리사와 세실리아는 마뉴엘 대공의 변덕에 의해 부리나케 뛰어다녀야 했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알렉시스가 느리게 화답했고.

“고생하셨어요.”

세실리아 역시 평온하게 속삭였다.

“마력이 더 안정되었더구나.”

이어 들려온 말에 알렉시스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표정에 마리사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덕분에…… 아마 늦겨울에서 초봄까지는 안전할 겁니다.”

“늘어났네?”

“다행이죠.”

화제를 교묘하게 바꿔버리는 아들의 노력을 알아차렸지만, 마리사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알렉시스는 폭주할 뻔했겠지.

그러다 기적적으로 멈췄을 테고.

그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이 누군지는 명백했다.

7년 전, 끝내 폭주할 뻔한 알렉시스를 말렸던 사람은 바로…….

“절 파양해 주세요.”

딸내미가 화법을 때려치우고 곧장 내민 말에, 마리사는 푸딩을 주르륵 뱉을 뻔했다.

그녀는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은 채 콜록콜록 기침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세실리아가 ‘미안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음성으로 사과했고, 마리사는 사레가 들린 채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뭔가 위화감이. 아.

‘저 약혼할까 봐요.’

공교롭게도 딱 이 자리였다. 딱 이 자리서 벼락 떨어질 듯한 선언을 했었지.

그리고 오늘도 또.

‘아이고…….’

마리사는 마침내 기침을 참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송구함으로 물들었다.

“괜찮…… 으신가요?”

“어어, 괜찮아.”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놀랐을 뿐이란다.

난 딸한테 분명 화술을 잘 가르쳤다고 생각하는데, 왜 요즘 들어 듣는 이의 심장을 철렁 떨어지게 만드는 말만 골라서 내뱉을까?

마리사는 재빠르게 미소를 지은 뒤 계속 말하라 손짓했다.

한편, 알렉시스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파양’은 확실히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였다…….

“제 친부모가.”

마리사와 알렉시스는 동시에 움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제 머리카락을 흑색으로 염색해서…… 절 뤼셍의 방계라고 속였다는 이유를 들면 파양되지 않을까요?”

“본 머리칼 색도 드러내게?”

“네.”

세실리아의 답은 간결하고도 명료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임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안의 확신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리사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제 아들이 대단한 놈인 줄은 이미 알았지만, 이토록 대단한 놈인 줄은 몰랐었다.

저를 버리고 약혼하겠다는 여자에게 매달리고 매달려 이런 성과까지 만들어 내다니.

이건 진짜 ‘승리’였다.

‘승리의 뤼셍 맞구나…….’

문득 아르망과 맨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춤을 신청한 그는, 호기롭다 못해 미쳤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말했었다.

‘우리는 석 달 안에 결혼할 겁니다.’

결혼이 쉬우세요? 그리고 당신은 황제이고, 이건 국혼이고, 국혼을 석 달 안에 치른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여러 말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지려 했지만, 그 순간 그녀가 선택한 답은 하나였다.

‘힘내세요.’

마치 제 일이 아니라는 듯한 응답에 아르망은 재밌다는 듯이 크게 웃었지.

마리사는 인상을 쓰며 떠나 대모인 레니앙 공작 대부인께 속삭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조금, 조금 많이, 이상하시네요.’

‘그래야 뤼셍이지.’

‘그런가요?’

‘응.’

이 나라가 조금 걱정되는데. 이민해야 할까?

마리사는 진담 반 농담 반의 고민을 하며 아르망 뤼셍이 연회장의 상석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봤었다.

그녀와의 춤을 추려 내려왔었는지 그는 다른 영애들하고는 말을 섞지도 않았다.

‘참 이상한 분이세요. 안 그래요, 대모님?’

‘내 눈엔 영리해 보이는데?’

‘……네?’

‘너 지금 계속 생각하고 있잖니.’

그제야 마리사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황태자가 남긴 미친 발언을 계속 계속 곱씹고 있다는 사실을.

결혼.

그래, 결혼.

할 수야 있겠다. 하지만 설마 그의 장담대로 ‘석 달’ 안에 결혼하겠어.

……그들의 결과야 뤼셍 제국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첫 만남 후 정확히 두 달하고 열흘이 지났을 때, 그녀는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마리사는 오래 전의 추억에서 벗어나 딸아이가 조심조심 건네는 말에 귀 기울였다.

“파양에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

“저를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언제나 너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도요.”

그녀의 침묵에 더욱 움츠러든 건지, 세실리아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무슨 대답이라도 하라는 듯 재촉하는 눈길로 쳐다본다.

‘……아들 키워봤자 쓸모가 없어, 쓸모가!’

마리사는 아들의 잘생긴 이마를 한 대 딱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최대한 밝게, 최대한 환하게 미소 지었다.

“딸.”

“네, 어머니.”

세실리아의 금빛 눈을 바라보며 마리사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머리색을 되찾은 딸아이는 지금보다 훨씬, 배로 예쁠 테다.

알렉시스가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그 모습이 기대되면서도 약간 쓸쓸해져,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는 게 힘들었다.

딸과 아들이 둘 다 장성하여 그녀의 품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파양한다고 하더라도 넌 내 딸이야, 알지?”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네 어머니로서 난 정말 행복했거든.”

정말이다.

어린 소녀의 머리칼을 맨 처음 물들였을 때부터 최근의 다과회까지, 그 모든 기억이 촤르륵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발을 동동거리던 예쁜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

제국에서 가장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단순히 뤼셍과 퐁레프의 귀보가 아닌 그녀의 보물이 되어.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절차를 밟자꾸나.”

“네, 어머니.”

“사랑한다, 딸.”

“……저도요.”

마리사는 딸의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언제까지고 그들이, 가족으로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면서.

불행히도 마리사 뤼셍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음 날 새벽, 아르망 뤼셍은 관에 담긴 채 귀궁했다.

동트기 직전이었다.

가장 어둑한 시간 도착한 관을, 정확히 그 안을 확인한 시종장은 손을 덜덜 떨었다.

수십 년간 퐁레프에서 일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절망을 감추지 못하였다.

노회한 얼굴이 세월의 풍파를 더 깊게 드러냈고, 미간이 일그러지며 황망한 시선을 강조했다.

“장난이. 장난이, 과하십니다…….”

그가 더듬더듬 내뱉은 말에 분명 황제와 함께 떠났던 마탑의 마법사들이 고개를 떨궜다.

더없이 송구하다는 낯에 시종장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 절대, 안 된다.

알렉시스 뤼셍 때문에 기록이 깨졌다고 한들, 아르망 뤼셍 역시 강대한 마력을 자랑하는 뤼셍의 직계였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한 대마법사 중 한 명.

한데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절망으로 이지를 잃어버린 상사의 곁에서, 부시종장이 나직하게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황후 폐하와 두 분 전하께 비보를 알려드려야 했다.

때마침 퐁레프에서 어슬렁 나온 건 두 마법사의 상관인 시엘샤 듀페르였다.

“왔…… 어?”

관을 보자마자 그녀가 당황하여 굳었고,

마법사들은 고개를 더 깊게 숙여야 했다. 시엘샤는 설마, 설마, 하면서 질문했다.

“누구셔?”

존대였다. 그녀가 진실을 추측했음을 드러내는 경어.

두 마법사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고, 시엘샤는 황급히 다가와 관 속을 확인했다.

설마…….

‘말도, 안 돼.’

관에 누운 이는 더없이 평화로운 얼굴에 영면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없어, 더 비현실적이라, 시엘샤는 입술만 벌린 채로 기함했다.

동시에 시종장은 그녀의 멱살을 단단히 잡았다.

“뤼셍은 몽테-페르트에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아니. 우리 애들 잘못이 아닐─”

“왜 당신은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몽테-페르트가 계략을 꾸민 건 아니냐는 의혹에 시엘샤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오해입니다! 전 그냥 아무런 일도 아닐 것 같아서 둘만! 아니, 정말로!”

“뤼셍은.”

시종장이 씹듯이 뱉었다.

눈시울엔 핏발이 가득 서려 괴기스러울 지경이었으나, 시엘샤는 얌전히 멱살을 잡힌 채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상대의 절망을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척단의 마법사로 행동하면서 수없는 동료의 죽음을 겪었대도, 이별은 언제나 버거웠다.

깊은 밤이면 침상에서 뒤척이며 떠나간 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만큼.

그래서 시엘샤는 얌전히 상대의 절규를 받아주었고, 그 사이 시종장은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미약하게 밝아지는 밤공기 속에서 비탄이 흐드러졌다.

“무슨 일입니까?”

가장 먼저 나타난 건, 불면증으로 인해 여느 때처럼 밤을 지새우고 있던 황태자였다.

그는 시엘샤의 멱살을 잡고 있는 시종장과 시종장에게 붙들려 흔들리는 시엘샤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다,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관에게로.

그리고 관에 담긴…….

보랏빛 눈이 멍해졌고, 다음 순간 화들짝 커졌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황태자는 손끝 하나 까딱이지 못하며 고장 나 있었다.

다른 발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올 때까지.

황후와 황녀가 동시에 나타났다.

황후는 두툼한 녹색 숄을 두른 채 작게 하품했으며, 황녀는 어여쁜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은 가장 먼저 황태자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황태자가 바라보고 있는 관 쪽으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황녀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파들파들 떨다 도로 다물었다.

황후는 숄을 꼭 움켜쥔 채 경직했다가, 마침내, 정말 마침내, 작게 속삭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

“재미없는 악몽을 보는 것 같은데.”

“폐하.”

시엘샤 듀페르가 미약하게 속삭였고.

“확실히 그대도 나타난 걸 보면 악몽은 악몽이군.”

“폐하!”

시엘샤가 목소리를 다소 높여 외쳤다.

싸늘한 새벽 사이로 날 선 비명이 무형의 선을 그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의식과 무의식을, 꿈과 실제를 구분 짓는 선을.

그제야 황후가 덜덜 떨리는 발을 내디뎌 관으로 한 발짝씩 느리게 다가갔다.

시종장이 시엘샤를 턱 놓는 바람에 시엘샤는 바닥으로 엉덩방아 찧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냉큼 일어나는 대신 황후가 계속 관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르망 뤼셍과 마리사 뤼셍은 서로에게 각인했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서로에게 영원한 행복이 되어주겠노라 약속하면서.

마리사의 손끝이 남편의 창백한 얼굴을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아내의 애끓는 부름에도 황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여자의 하염없는 목소리만 서글픈 적막을 깨었을 뿐.

“아아아아아악!”

현실이 끝끝내 내려앉았는지, 황후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혼절했다.

붉은 머리칼이 너른 가슴팍 위로 흩어지는 모습에 황태자와 황녀가 다급히 어머니를 붙들었다.

붙든 채로, 그렇게 멍하니 아버지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넋을 놓으며. 이 잔혹한 새벽을 인지하면서도 인정할 수 없었기에.

비보를 들었는지 퐁레프에선 사람들이 계속 달려 나와 황제의 죽음을 마주했다.

기절해버린 황후를, 그녀를 애써 지탱하는 오누이를 본 눈들이 한결같이 멍해졌다.

제국의 아버지였다.

군주의 죽음은 잔혹한 독처럼 스며들어, 보는 이들을 모조리 마비시키고 있었다. 황망함이 켜켜이 쌓일 뿐.

“전하!”

시종장의 비명에 모두가 얼음물이라도 맞은 듯 경련했다.

황태자가 볼품없는 나뭇가지처럼 휘청였고, 사람들은 숨을 헉 들이켜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 받은 이가 끝내 폭주하나 싶은 두려움에.

그를 제지할 수 있는, 퐁레프에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인 황후께선 현재 기절하신 상태였다.

황태자의 목덜미에 핏대가 섰고, 그의 주먹은 꾹 움켜쥐어 있었다.

덜덜 떨리는 온몸과 꾹 깨문 입술엔 분노와 절망이 가득 묻어 있다.

곧장…… 폭주해도, 놀랍지 않을…….

“……알렉.”

부드러운 목소리. 잔뜩 젖은 종이처럼 일렁였지만, 찢기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음성.

황녀가 손을 뻗어 황태자를 꼭 끌어안았다. 누이의 품속에서 경직해 있던 황태자는, 겨우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녀를 마주 안았다.

“……들어가 있어.”

“…….”

“눈 가리고.”

“…….”

“제발.”

황녀의 가냘픈 애원이 묵직한 심장을 두드렸는지, 황태자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아버지의 관을 돌아보며 뻣뻣한 고개를 이리저리 젓던 그가 결국 모습을 감추었다.

“……디엘라 백작 부인.”

황녀가 숨을 내뱉으며 단번에 속삭였다.

그녀의 힘겨운 목소리를 알아들은 백작 부인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고, 황녀는 말없이 어머니를 건네주었다.

황후의 시녀들이 전부 다가와 기절한 여인을 모셔갔다.

모두의 눈이 지켜보는 그 속에서 이젠 단 한 명의 황족이 자리를 지켰다.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고장 나 있긴 했어도.

시엘샤가 ‘그래도 한 명이라도 침착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완연히 동이 텄다.

유난히 창백하게 느껴지는 햇살을, 황녀가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로 관만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점 밝아지는 아침 속에서 떠나버린 이의 마지막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세실리아는 숨을 제대로 내쉬지도 못하며 꺽꺽거렸다. 호흡이 가빴지만 신경 쓸 수도 없었다.

오로지 모든 의식은, 잠들어 계신 아버지에게 향하고 있었기에.

평상시의 짓궂은 미소는 없었다. 머쓱해 하는 표정도 없었으며, 간혹 보여주시곤 하던 보조개도 없었다.

아버지께선 그저 무덤덤한 낯으로 잠들어 계실 뿐.

가슴 속 응어리가 기도까지 올라왔다.

세실리아는 반쯤 넋을 놓은 채,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매만졌다.

차갑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언제나 따듯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곤 하셨는데.

그런데…….

‘아버지.’

그 단어를 내뱉자마자 무너질 듯했다. 실제로 그녀의 온몸은 한겨울 속에 외따로이 서 있는 것처럼 너울거렸다.

무릎이 휘청 꺾였다.

세실리아는 속절없이 허물어지며 관에 이마를 대었다.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은 차갑기만 했다.

‘난 당신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도 하지 못했는데.

가장 비참한 건 이 순간마저도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속이 답답하고 눈이 터질 듯해서 눈물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불가능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 속에서, 마침내 땅에 닿은 찬란한 햇빛 속에서, 암흑 같은 절망과 비통을 씹을 뿐.

남겨진 이들의 나락 속에서 떠난 이만 고요히 잠들어 있다.

“아버지…….”

이윽고 단어를 내뱉은 그녀는 다른 손으로 관을 꼭 붙들었다.

이대로 이마를 박아 기절하고 싶었다.

온몸이 계속 떨리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황녀께서 황후처럼 기절하셨다 믿었으리라.

새하얀 잠옷을 입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령 같았다.

슬픔이 얼마나 진득하게 묻어 있었는지, 지켜보던 이들은 감히 뭐라 말도 못 걸며 그저 쳐다봐야 했다.

감히 용기를 끄집어낸 건, 가장 먼저 무너져 내렸었던 시종장이었다.

어떻게든 제 슬픔을 갈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는 천천히 다가가 귀한 분의 어깨를 감쌌다.

숄을 끌어올려 다시 덮어주는 손길에 황녀가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가슴은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전하.”

멍한 금빛이 파들파들 떨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퐁레프를 둘러보았다. 아침 햇살 속에 망연히 선 채, 사람들은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퍼뜩 깨달았는지 황녀가 휘청휘청 일어섰다.

새하얀 손이 창백하게 질린 채 치맛자락을 꾹 움켜쥔다. 그거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듯이.

“뤼셍…….”

잔뜩 쉬고 메인 목소리로, 황녀가 어떻게든 말을 끄집어냈다.

“에…… 알리도록.”

“…….”

“그들의 아버지께서.”

황녀는 굳이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전부 알아들었다.

성군이 잠들었다.

* * *

그날 정오, 뤼셍 제국의 전역에서 정확히 44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가신 군주의 나이를 기리는 횟수.

종소리를 듣던 이들은 전부 고개 숙여 떠나간 이에게 묵념을 바쳤다.

아르망 도미니크 하인리히 르 뤼셍은 제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성군이었으며, 그들이 존경하며 사랑했던 아버지셨다.

이어진 3분의 침묵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겨우 목소리를 내어 작게 떠들었다.

황제가 가까우면서도 먼 ‘제국의 태양’이셨던 만큼 그들은 비탄에 잠기진 않았어도 충분히 슬퍼했으며, 그만큼 불안해했다.

어수선하면서도 뒤숭숭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서 즉위하셔야 하잖아.”

“그렇지.”

“각인하셨나?”

“아직.”

아르망 뤼셍께서 서거하셨으니, 현재 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직계는 황태자인 ‘알렉시스 뤼셍’일 터.

돌아가신 황제의 부모님이신 선선대 황제와 황후께서도 아마 살아계실 테지만…….

일단 그들의 행방은 묘연했으며, 무엇보다 아들의 후계로 아버지가 다시 지목된 적은 없었다.

도리도 아니었고.

“어쩔까?”

황태자께선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강대한 마력을 지니셨다.

오죽했으면 폭주 위험으로 몽테-페르트 마탑에까지 가셨을까.

뤼셍의 황족들이 강대한 마력으로 유명했지만 실제로 마탑까지 갔던 이들은 손에 꼽았다.

아니. 알렉시스 뤼셍이 유일할걸.

그렇게 불안정하고 강대한 마력을 지닌 황태자가 각인을 아직 이루지 못한 채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니 불안해질 수밖에.

“나도 모르겠네.”

누군가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분께서…… 하루빨리 각인하시길 바라야지.”

“근데 감히 누가 제국의 아버지를 살해했을까? 어떤 미친놈이?”

“폭주한 마법사겠지. 누구였든.”

뤼셍 제국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귀청이 따가울 만큼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시엘샤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그 소리를 착실하게 세었다.

총 44번.

아르망 뤼셍의 나이.

그녀는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같은 방에 있던 두 수하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선 관제탑을 보시자마자 저흴 밖에 두고 홀로 들어가셨습니다.’

‘뭐?’

‘저희도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황제가 문을 걸어 잠갔다지.

관제탑을 건드렸다면 당연히 마법사라는 뜻이겠고…… 하필 ‘관제탑’을 건드렸으니 폭주한 마법사일 터다.

그들 중 아르망 뤼셍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대한 마력과 어마어마한 광기를 자랑하는 이는.

시엘샤는 이를 악물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카밀, 베르뉴.’

아직 관제탑을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기록을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확신했다.

감히 뤼셍 제국에서 황제를 ‘살해’할 만큼 미친놈이 더 있겠는가.

“지금 책상, 내 얼굴이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와 시엘샤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검은 옷을 입은 황녀가 등을 꼿꼿하게 편 채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황녀의 뒤로는 세 명의 사람들이 함께했다.

“어머니께선 여전히 혼절해 계셔. 그래서 내가 왔어. 괜찮나?”

“……영광입니다.”

시엘샤는 잠자코 고개를 숙여 상복을 입은 황녀를 맞이했다.

그들이 이렇게 만나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알렉시스 뤼셍의 마력은 불안정하다.’

이 간단명료한 진실 때문이다.

모든 불안정한 마법사는 몽테-페르트 마탑의 소관이었다.

그들에겐 미친, 혹은 미쳐버린 마법사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으므로.

하지만 뤼셍 제국에겐 현재 후계가 필요하니 둘의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시엘샤의 맞은편에 스르륵 앉은 황녀가 조곤조곤 소개를 시작했다.

검은색 베일이 드리워 아름다운 얼굴을 감췄기에, 청아한 목소리만이 연신 울려 퍼진다.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도 지독하게 예쁘긴 하군.’

시엘샤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조금 기가 찼다.

하지만 순간 현실마저 잊을 정도로, 황녀는 참, 뭐랄까, 지독했다.

지독히 아름다웠다.

“이쪽은 궁내부관인 니콜라 세르크 경, 이쪽은 황실 대변인인 프랑수아즈 밀레 경. 이쪽은 그쪽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리베의 수장인 율리케 경이지.”

“네.”

황녀는 고개를 짧게 끄덕인 뒤 침묵했고, 시엘샤는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다 한쪽 손을 들었다.

‘세상에.’

황태자인 알렉시스 뤼셍보단 대하기 쉽지 않을까 했더니.

그녀의 착각을 박살내려는 듯, 황녀는 황태자 못지않게 어려웠다. 어떤 면에선 더 어려웠고.

“저…… 저희의 입장부터 말씀드릴까요?”

“부디.”

‘부디’라고 부탁하시는데 부탁이 아닌 듯합니다, 전하.

시엘샤는 종알거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 각인에 성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테지요.”

왠지 모르게, 황녀와 함께 온 세 명의 시선이 순간 황녀를 동시에 쳐다본 느낌이었다.

‘착각인가?’

시엘샤가 갸웃한 동안, 황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 두드려 계속 말하라 신호했다.

“황태자 전하의 마력량과 안정도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건대, 그분을 내버려두면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퐁레프에서 황태자 전하와 황후 폐하만이 마력을 쓸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

“그리고 외람되오나 하나 말씀드리자면…… 황후 폐하의 마력은 이제부터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에게 마력을 나눠주고 있던 아르망 뤼셍이 서거했다.

그러니 마리사의 마력은 증대되었던 양에서 그녀가 본디 갖고 태어났던 만큼으로 돌아갈 터.

“뤼셍의 직계가 아닌 이의 마력량과 뤼셍의 직계가 갖고 있는 마력량은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

“황후 폐하께선 황태자 전하를 저지하실 수 없습니다.”

황녀가 다시금 고개를 까딱인다.

말을 이으라는 몸짓에 시엘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힘들게 제 주장을 펼쳤다.

“제가 한 제국을 다스리지 않아서 정확히 모르지만, 즉위하신 후 황태자 전하께선 어마어마한 업무량과 그 이상의 피로에 시달리실 테지요. 상당히 빠르게 불안정해지실 겁니다.”

“…….”

“상상해보세요. 그분께서 폭주하신 순간을. 퐁레프에서 그분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학살당하는 대참사만이 벌어지겠죠.”

알렉시스 뤼셍은 손속에 자비를 베풀지 않을 터다.

그 사람의 본디 성정이 냉혹해서가 아니라…… 그냥 광기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다.

사람을, 짐승보다 더 끔찍한 괴물로 만들지.

시엘샤 듀페르가 제 직업을 ‘사냥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동생 분을 아끼십니까? 그럼 그분께서,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 말했나?”

황녀가 평온하게 되물었고, 시엘샤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끄덕였다.

“그럼 내가 말할 차례군.”

“말씀하십시오.”

협상 테이블의 추가 넘어갔다. 그녀는 얌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상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현재 뤼셍에게 남은 직계는 하나뿐이야. 우리는 이미 직계 한 명을 잃었으며, 또 한 명을 잃지 않을 거야.”

“전하.”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들어.”

황녀의 단호한 일갈에 시엘샤가 움찔했다.

황녀는 그녀가 파드득 경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뤼셍의 직계가 우릴 지키는 동시에 우린 언제나 뤼셍의 직계를 지켜왔지.”

“…….”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거야. 제국은 최선을 다할 테며, 알렉시스 뤼셍은 폭주하기 전에 각인에 성공할 테니까.”

“외람되오나, 황녀 전하. 최선을 다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 사랑이 쉽나요…….

황녀가 스르륵 베일을 약간 들어 올렸다.

붉은 입꼬리 한쪽 끝이 미미하게나마 치켜올라가 있었다.

“그대, 뤼셍의 이명이 무엇인지 잊었나?”

‘승리’의 뤼셍.

시엘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기억하고 있노라는 신호를 보내자 황녀가 다시 입을 연다.

“그걸 알면서도 알렉을 의심해?”

“…….”

“생각을 해 봐, 지금껏 역대 황태자 중에 각인에 실패한 이 있었어?”

없었죠. 압니다.

정확히는 불안정한 상태로 즉위에 오른 경우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라 문제일 뿐.

“그대 말대로 사랑이 쉬운 건 절대로 아니지만, 뤼셍의 모든 황제는 그 어려운 것에 성공했어. 승리를 쟁취했지.”

시엘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순간이었다.

황녀가 다시금 빙그레 웃더니, 정말 기함할 말을 끄집어냈다.

뒤에 있는 세 명마저 놀라는 표정을 지을 정도로 충격적인 말을.

“그리고 몽테-페르트.”

“…….”

“마탑에 있다고 해서 우리의 직계가 무탈하다는 보장이 없는 것 같은데.”

“네?”

찔리는 구석이 없잖아 많아, 시엘샤는 입안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실제로 그들은 마탑의 규칙을 깨고 어린 소년을 사냥에 참여하게 만들긴 했다.

하지만 그, 뭐랄까, 그쪽 황태자께서 워낙 유능하셨다고…….

‘우리 잘못이 아니랍니다!’

그녀는 바보처럼 칭얼거리려다가 뻔뻔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든 말든, 황녀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경고’했다.

“아까 말했듯이, 뤼셍은 뤼셍의 직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

“…….”

“전하, 혹시. 제가 지금 정말 헷갈려서 질문 드리는 건데요. 설마 지금, 저희랑 혹시…….”

전쟁을 벌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몽테-페르트 마탑’과?

설마, 싶으면서도 또 다른 ‘설마’가 튀어나왔다.

시엘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동안 황녀가 그 예쁜 입술을 다시 휘었다.

“우린 언제나 승리해.”

……맙소사.

황태자는 마력 때문에 돌았다면 황녀는 그냥 돌은 건가?

시엘샤는 기가 차서 황녀 뒤에 있던 셋을 돌아보았다.

분명 처음엔 경악한 표정을 지었던 셋은,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나름 뿌듯한 얼굴로—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황녀의 선언이 너무나 맘에 든다는 듯이.

시엘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알렉시스 뤼셍이 무사히 제위에 오를 것. 그가 ‘정말로’ 폭주하기 전까지 마탑은 그에게 어떠한 알력도 가하지 않을 것. 그에게 소위 말하는 검사를 시행한다 하면서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을 것.”

“마지막은 불가합니다.”

“가능해.”

시엘샤는 천천히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녀는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마침내 한 마디 톡 쏘아붙였다.

“제가 잘못 안 건가요? 전 이 자리를 협상의 자리로 알았지 통보의 자리가 알진 않았습니다.”

“협상의 조건을 제시한 거야.”

“……네?”

“알렉시스 뤼셍이 폭주할 때까지, 나 세실리아 뤼셍은 몽테-페르트 마탑 소속 척단의 마법사들이 퐁레프에 머물도록 허락할 테니까.”

감시를 몽테-페르트에서 하지 말고 퐁레프에서 하란 소리였다.

시엘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다시금 쭈뼛쭈뼛 손을 들어올렸다.

“하오나 전하, 저희는 퐁레프에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혹시 저희의 마력 사용도 허락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왜?”

너무나 뜬금없다는 반문이라 이쪽이 더 어이없어졌다.

시엘샤가 ‘네?’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황녀가 제 입매를 보여주려 들어 올렸던 베일을 스르륵 다시 내려버렸다.

“애초에 내겐 그런 자격까진 없어. 그리고.”

글쎄, 알렉시스 뤼셍은 당신 말을 참 잘 듣던 것 같은데요.

속으로 신랄하게 빈정거리던 시엘샤는 황녀의 말에 겨우 다시 집중했다.

“퐁레프에서 통신은 가능하지. 너희가 마탑과 나누는 통신을 검열하거나 막지 않을 테니 열심히 통신하도록.”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 폭주하신다면 저흰 다 죽은 목숨인데요?”

물론 폭주의 기미가 보인다면 그전에 몽테-페르트 마탑에게 연락을 취할 생각이긴 하지만.

시엘샤는 속내를 뚝 숨긴 채로 물어보았다가, 눈에 띄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가 길고 유려한 손을 뻗어, 검지로 제 수하들을 정확히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너흰 우리에게 저들의 목숨을 빚졌어.”

아르망이 그들을 구했다는 진실을 기억하라는 소리였다.

“저들은 멀쩡한데 왜 내 아버지께선……. 거기까지 질문하진 않도록 하지.”

황녀 뒤에 있던 셋의 얼굴이 일시에 흉흉해졌다.

여긴 퐁레프이니, 대마법사 율리케조차도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엘샤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질문하진 않겠지만.”

싸늘한 북풍보다 더 냉랭한 음성.

모든 걸 얼려 죽이고 싶어 하는 무자비한 추위가 깃들어 있었다.

“뤼셍은 잊지 않을 거야.”

“…….”

“그래서 시엘샤 듀페르, 너희가 지금 너희 목숨을 아끼려 드나?”

우리 앞에서?

숨겨진 뜻을 정확히 읽어낸 시엘샤는, 잠깐의 정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끌어봤자 결론이 변하지 않음을 직감하여.

처음부터 그녀에게 불리한 자리였다. 그리고 맞은편의 황녀께선 외양뿐만이 아니라 협상에도 나름의 재능을 갖추신 듯했고.

아, 외양은 ‘나름’이 아니라 ‘탁월한’이겠다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

“퐁레프엔 저희 셋이 남기로 하죠.”

“원한다면.”

시엘샤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몸을 숙였고, 황녀는 덤덤히 턱을 까딱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협상이 마무리되었는데도 황녀는 떠나지 않고 잠깐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대, 누가…….”

검은색 레이스 드레스로 둘러싸인 가냘픈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매서운 북풍을 견뎌야 하는 버드나무처럼.

나뭇가지가 낭창낭창 흔들리다가 결국 부러지는 모습까지 연상되고 있었다.

시엘샤는 눈을 느리게 굴렸다.

황후가 혼절했고, 황태자마저 불안정해진 지금 퐁레프는 황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견디는 이조차도 ‘아버지를 여읜 상태’라는 현실을 잊었는지.

……어쩌겠어.

‘군주의 숙명이긴 하지.’

뤼셍의 직계가 아니라지만 아르망과 마리사는 군주의 품격에 맞게 황녀를 키워낸 모양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조용히 격려하자, 황녀가 자세를 고쳤다. 안 그래도 반듯했던 자세가 더욱 정갈해졌다.

“살해한…….”

그 단어 하나만으로 그녀가 내민 질문을 유추할 수 있다.

시엘샤는 마른침을 삼킨 뒤, 질문을 차마 잇지 못하는 이를 대신해 답을 내어 주었다.

“관제탑을 건드리고, 그리고 대마법사까지 살해할 수 있는 마법사는 현재 한 명뿐입니다. 한 명뿐이어야 하고요.”

그런 미친놈이 둘이면 세상은 멸망할 테거든.

그래서 ‘알렉시스 뤼셍’의 폭주에 몽테-페르트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뤼셍의 황태자까지 폭주하시면 미친놈이 진짜 둘이 된다는 소리라서.

“카밀 베르뉴입니다.”

황녀는 오래오래, 정말 질길 정도로 침묵했다.

‘카밀 베르뉴’라는 그 단어를 입안에서 연신 곱씹는 것처럼.

“그렇군.”

목이 졸리는 듯한 음성.

시엘샤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을 때 그녀가 마지막 질문을 내던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잡을 거지?”

“그게 저희의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

“그 새, 죄송합니다, 그놈을 잡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합니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만, 황녀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부디.”

세실리아 뤼셍은 여느 때처럼 더없이 고혹적인 자태로 떠났다.

* * *

황태자가 제위에 오른다는 소식에 기실 뤼셍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황녀는 직계가 아니었으며 마력 또한 발휘하지 못했다.

마법사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마법사가 많은 나라에서 ‘비마법사’가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알렉시스 뤼셍밖에 없지.

정해진 답이었다.

그가 아직 각인에 성공했든 안 했든 해결책은 하나였으므로.

그리고 알렉시스 뤼셍은 즉위식을 거절했다.

즉위는 축하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 상황이 절대로 ‘축하’할 법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동안 뤼셍 황실의 세습은 부모의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황제와 황후는 황태자가 각인에 성공하면 곧장 제위를 물려주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일에 치여 살기보다는 사랑하는 이와 낭만적인 삶을 사는 게 훨씬 더 큰 행복이었기에.

그래서 황태자는 살아 있는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제위에 올랐었다. 이번이 특수한 경우였다.

아르망 도미니크 하인리히 르 뤼셍의 장례식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가을날에 치러졌다.

붉은 단풍잎이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날.

새하얀 코스모스마저 더는 제 화사함을 뽐내지 못하는 그런 슬픈 날이었다.

뤼셍 제국의 거의 모든 귀족과 타국의 군주들까지 전부 참석하여 떠나는 이에게 마땅한 예를 표했다.

“이런 순간은…… 예상 못 했는데.”

황제의 관에 꽃을 바치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남은 분들께서 잘 버티시길 바라야지.”

언제나 평온하게 우아할 것.

이게 아무리 푸른 피의 예법이라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까지 기대할 순 없는 법이었다.

황족 셋은 변함없이 고고하면서도 제 슬픔과 비통을 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황녀가 잠시 비틀거리는 모습을, 황태자의 창백하게 얼어붙은 낯을, 기자들의 카메라는 자비 없이 찍어댔다.

저게 황족의 의무라면 참 잔혹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가장 처절한 모습을 내비친 이는 황후였으리라.

붉었던 머리칼은 잿빛으로 세어 있었다.

* * *

[부단장님, 성공했습니다.]

에드릭 셀레가 보낸 전음에 시엘샤는 짝짝 열심히 박수를 쳐주었다.

통신구 너머의 에드릭은 자랑스럽게 구슬 하나를 치켜들었다. 양손으로 치켜든 모습이 신에게 무슨 제물을 바치듯 경건하게까지 보인다.

저렇게 숭배해야지.

카밀 베르뉴의 흔적을 알려줄 귀한 마법구인데.

“수고했어.”

[아닙니다.]

아르망 뤼셍과 카밀 베르뉴 간의 전투가 격렬했음을 증명하듯, 생-뢰크의 관제탑은 처절하게 붕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폐허를 치우는데 익숙했다. 오죽하면 에드릭이 자신이 ‘척단의 마법사’인지 ‘고고학자’인지 헷갈린다고 투덜거릴 정도였으니까.

그뿐일까.

당장 최근에 에샹 감옥의 폐허를 치우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들은 성실하게 돌덩이를 치우고 또 치웠고…….

그 자리에서 그 모든 일을 기록하는 마법구를 또 하나 발굴해낼 수 있었다.

“그 새끼야?”

시엘샤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고.

[아직 안 봤습니다. 오실래요?]

“관제탑이 복구되었나?”

[어제 되었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시엘샤는 퐁레프를 부리나케 빠져나가, 에드릭이 알려준 좌표를 활용해 이동 마법을 실행했다.

돌덩이 가득한 폐허에서 에드릭이 마법구를 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켜봐.”

띠리릭.

영상이 천천히 시작되며, 비극을 재생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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