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5. 사랑의 형태 (9/18)

5. 사랑의 형태

널찍한 책상엔 서류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보통 때라면 딸아이가 찾아와 한바탕 잔소리를 하고 서류를 정돈했겠지만, 그 애는 찾아오지 않았고 덕분에 책상은 혼돈이었다.

서류 한 더미를 또 갖고 등장한 시종장 미카엘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아르망 뤼셍은 잔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고는 때마침 책상 끝에서 떨어질 뻔한 손거울을 정확하게 낚아챘다.

‘아깝군.’

한 번쯤 요란하게 깨져봐야 저분도 제때 정리하시든 할 텐데.

시종장이 말 못 할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는 사이, 아르망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거울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심각해.”

“……최근에 일이 밀리셨긴 하죠.”

“마리사가 보고 울겠어!”

어제도 부부 침실에서 무지갯빛 시간을 보내시지 않으셨냐고.

시종장은 사실을 짚어주는 대신, 조금 더 잔혹한 사실을 끄집어올렸다.

“설마요, 폐하. 황후 폐하께선 폐하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전부 사랑해 주시잖습니까.”

“그래서 다행…… 칭찬 맞아?”

“물론입니다. 뤼셍의 태양은 모름지기 인간적이어야지요.”

이럴 때만 눈치 빠르셔라.

시종장이 시치미를 뚝 떼는 동안, 아르망은 눈을 가늘게 뜨다 말고 손거울로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반들반들한 은빛 표면이 말랑해지더니 중앙에서 쪽지 하나가 휙 튀어나왔다.

곱게 접혔다기엔 표면이 다소 꾸깃꾸깃했다.

대수롭잖게 종이를 펼쳐 들던 아르망은, 다음 순간 무섭도록 섬뜩하게 얼굴을 굳혀버렸다.

“폐하?”

“잠시 자리를 비키도록.”

시종장은 예를 표한 뒤 재빨리 방을 나갔다.

아르망은 입가를 두어 번 손으로 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려 해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통창에서 쏟아지는 빛에 갑자기 한기가 섞인 느낌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안온한 금색 계열로 보였거늘, 지금은 마냥 서늘한 푸른빛으로 와닿으니.

그는 불안정한 손짓으로 책상을 톡톡 치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불─”

아니지. 말을 끝내지 말자.

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마법이니.

아르망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다독이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알렉.”

아무래도 이건 아내보단 아들이 먼저 알아야 할 사항 같으니.

“알렉시스 뤼셍.”

그의 부름이 끝나자마자 문가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허락하자, 아들 녀석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전달받지 못한 티가 역력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달해야 하는 아르망으로선, 꽤 죽을 맛이었고.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어어…… 그래.”

“무슨 일이시죠?”

아르망은 의자를 향해 손짓했고, 알렉시스가 천천히 앉으며 그를 올곧게 마주했다.

“오랜만…… 이라고 하기엔 어렵구나.”

“사흘하고 여덟 시간 만입니다, 아버지.”

계산해달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아르망은 미간을 문지르며 화두를 어떻게 떼야 할지 고민했다. 알렉시스가 자세를 고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습니다.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예법을 따지려고 머뭇거리는 거 아니란다…….”

알렉시스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고, 아르망은 손 안에 들린 쪽지의 무게를 실감했다.

잔잔한 저 표정이 어떻게 구겨질지 미래가 선연하여.

그래서 그는 일단 우회를 선택했다.

“마뉴엘 공국에서 곧 대공이 방문하는 건 준비하고 있지?”

“‘곧’이라고 하기엔 거의 한 달 뒤 일인데요, 아버지.”

“외교 행사에선 처음이잖니.”

“거기다 누님도 도와주실 테죠.”

하긴.

공과 사의 구별이 철저한 세실리아는 지금 무슨 감정을 품고 있든 간에 업무에 철저할 터다.

그 성정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아르망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철저하게 준비하고.”

“예.”

흔한 잔소리, 그보다 더 흔한 대답.

심드렁한 어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음성이다.

그리고 이젠 진정한 용건을 가르쳐줘야 하는 찰나였고.

아르망은 결국 이를 한 번 사리물었다 풀었다. 턱에 천천히 힘을 빼며 아들의 무료하고도 나른한 낯을 마주했다.

“에샹 감옥이 무너졌다.”

알렉시스는 처음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응시만 할 뿐.

그러다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느릿느릿 되물었다.

“제가, 잘못 들었습니다?”

“똑바로 들었어. 에샹 감옥이 무너졌다. 방금 몽테-페르트 마탑에서 전갈을 주었고, 범인은 카밀 베르뉴로 확인된 상황이야.”

“아하.”

고개를 짧게 끄덕인 녀석이 입을 굳게 다물다, ‘그렇군요’─라고 짤막하게 흘렸다.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이라 아르망이 놀라던 찰나.

콰르릉─!

창밖에 보랏빛 벼락이 하나 떨어지더니 마른하늘에 웬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흠칫한 아르망이 개입할 틈을 놓쳐버린 사이, 격분한 청년이 이를 까득 갈며 뇌까렸다.

“하여간 무능한 것들.”

“…….”

“분명 지금도 바로 연락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연락했겠지.”

연거푸 이어지는 굉음.

벼락이 한 세 개는 떨어진 듯했다.

적당히 분노를 표출했을 테니 슬슬 말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알렉시스가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인의 심정을 담아내려는지 검은색 머리칼 끝이 삐죽삐죽하게 솟아 있었다.

그, 그래도 낙뢰와 천둥이 멈춘 걸 보면 진정하는 것 같은데…….

“약연을 피우는 건 어때?”

아르망은 조용히 권했고, 알렉시스는 계속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 상태였다.

“나중에 피우겠습니다.”

“……그러렴.”

이윽고 알렉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언제 화냈냐는 듯, 차분하고도 담담한 표정에 깨끗하고 맑은 시선까지 보여준다.

그의 입매엔 아주 흐릿하게나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너머에 숨겨진 분노를 아르망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마리사가 화낼 때와 똑 닮은 자세였으니.

사랑하는 연인을 닮은 아들의 모습에 아르망은 심장이 잠깐 옥죄이는 걸 느꼈다.

지끈거리는 통증 속에서 그는 가족을 향한 애정을 곱씹었다.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심장을 쥐고 있는 아내.

그리고 그 아내가 낳은, 그와 그녀의 아들. 혈육이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딸까지.

그들을 웃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는 기꺼이 목숨마저 바칠 수 있으리라.

가장이어서가 아니었다.

남편이어서,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그저 마땅히 사람으로서 그러고 싶었다.

그의 육신이 전부 갈릴지언정 사랑하는 이들이 햇볕 아래 찬연한 행복을 만끽할 수만 있다면.

손바닥 위에 놓인 쪽지가, 정확히는 그 쪽지에 적힌 이름이 점차 묵직해져 가고 있었다.

화인처럼 쓰라린 느낌에 아르망은 잠자코 숨을 골랐다.

“네 마력은 어떻니? 네가 동요하면 할수록 폭주가 빨라지는 건 알고 있지?”

“……아직은 괜찮습니다.”

“고비는 최대한 만들지 마. 네가─”

각인할 때까지, 라고 무심결에 내뱉을 뻔한 아르망은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마무리 못 한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알렉시스가 엷게 웃는다.

세실리아의 ‘약혼’ 때문에 이미 한 차례 고비를 견뎌야 했던 아들이다.

리베 연무장 네 개를 박살 내며 마력을 흘려보내, 어떻게든 무마한 것 같지만.

동요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폭주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고…….

아르망은 아들 쪽으로 못마땅하게 눈을 흘겼다.

“세실이 약혼을 취소해서 망정이지, 아님 넌─”

“위태로웠을 겁니다.”

알렉시스가 순순히 인정했다.

뭐, 사실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어쩔 거냐?”

열심히 재촉하자 알렉시스가 삐쭉 솟은 제 머리칼 몇 가닥을 잡아당기며 질문했다.

“몽테-페르트가 베르뉴를 쫓고 있지 않습니까?”

“있지. 그치들이 네 말마따나 무능한 건 어쩔 수 없다만.”

피식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편 아르망은 못마땅한 심경을 가득 담아 혀를 차야 했다.

“네가 잡았던 인형까지 베르뉴가 수거했다던데.”

“그랬겠죠. 안 그러면 왜 에샹 감옥까지 무너뜨렸겠습니까. 광기에 물들었어도 지능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따라가서 잡을 거냐는 질문에 알렉시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더니, 연거푸 날벼락을 떨어뜨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생-뢰크의 전형적인 여름 하늘이 쾌청하게 펼쳐져 있다. 청명한 쪽빛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

“날이 좋네요.”

“날씨 좋으니 잡으러 가겠다고?”

“……베르뉴는 반드시 안식을 취할 겁니다. 제 손에서든, 마탑의 손에서든.”

알렉시스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선언했다.

‘카밀 베르뉴’는 죽어야 했다.

그가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너무나 큰 피해를 줬기 때문도 아니며, 그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그리고 그들 가족에게 크나큰 위협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해서도 죽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광기에 탈출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오늘은 아닐 겁니다.”

“네 멋대로 쫓아가지 마라.”

아르망이 엄하게 경고하자, 알렉시스가 유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야! 추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건 알겠지만 넌 지금 위험한 상태다. 잘 알고 있지?”

“예.”

“까딱하면 정말 폭주 직전 단계로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굴뚝같지 않아요.”

“뭘 알고 있…… 응?”

아르망의 반문에, 녀석이 평온한 표정─그런데 어째 조금 해맑아 보이는 느낌이었다─그대로 선언했다.

“오늘 저녁 누님이랑 오페라 극장 가기로 했거든요.”

“……어?”

“그래서 못 갑니다.”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배부르게 포식한 뒤 노닥거리는 고양이까지 연상시켜, 아르망은 순간 말문을 잃었다.

조금은 억울하다는 심정까지 들고 있었다.

저 녀석이 어릴 적, 온갖 비싼 장난감이며 선물이며 바리바리 갖다 바쳐 품에 안겨주었을 때도 저런 음성은 한 적이 없는데.

……뭐, 뤼셍에게 ‘반려’란 그런 의미긴 했다.

아르망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 문득 씁쓸해졌다.

‘젠장.’

아내와 데이트마저 못 즐길 만큼 일에 치여 죽는 자신의 처지가 상기되어서.

“데이트 잘하거라.”

이왕이면 순조로이 모든 게 풀려서 최대한 빨리 각인해 주면 좋겠구나.

황제 자리 떠넘기고 마리사랑 놀러 다닐 상상을 펼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아르망이 펜을 다소 힘차게 다잡는 동안, 알렉시스가 나직이 정정했다.

“데이트는, 음, 아직 아닙니다.”

“어어…… 그래. 그렇구나.”

상황 파악을 잘하는 건 좋은 거지.

그렇게 덧붙이려던 아르망은 늦지 않게 꿀꺽 삼킬 수 있었다.

데이트라고 표현조차 못 하는 무언가로 기뻐하는 아들을 보니 참…… 착잡하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옛날엔 데이트 언저리조차 못 꿈꿨을 테니 대단한 발전이라고 평해야 할 수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파져 아르망은 손사래를 쳤다.

“준비하러 가라, 가!”

“네.”

얼굴에 공 좀 들이고!

‘마리사가 널 아주 반반하게 낳아줬는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안 되지!’

물론 성의 없이 돌아다녀도 네가 잘생긴 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만…….

이라고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아르망은 저 녀석의 얼굴이 묘하게 광택이 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요즘 들어 세실리아의 얼굴이 조금 핼쑥해진 것과 달리, 알렉시스의 얼굴은 윤기가 나다 못해 눈까지 부실 지경이었다.

‘아. 미인계냐?’

정말 미인계인 거야?

아르망은 눈을 두어 번 끔벅이다 문가로 총총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렉.”

“네?”

문을 향해 걸어가다 말고 알렉시스가 뒤돌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들 녀석의 말간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아르망은 짧고도 오랜 침묵 끝에 진심을 건네었다.

“행운을 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아버지.”

“……오냐, 너도.”

알렉시스가 정중하게 인사하며 방을 나섰고, 그는 말없이 턱을 괸 채로 떠난 이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제로서 황태자의 각인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

그뿐일까.

그는 황제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부모로서 자식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미친 헛소리지.

그런 만큼 그는, 그와 마리사는 세실리아와 알렉시스의 사이가 못내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몇 발짝 뒤에서 그저 바라보아야 한다는 진실 역시도 뼈저리게 깨우치고 있어…….

‘잘 되어 가니?’라는 단순한 질문을 끝내 삼켜버렸다.

* * *

아버지께서 하려 했던 진짜 말을 알렉시스 뤼셍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기엔 아버지의 눈빛 한가득 염려가 가득하였거든.

대충 ‘각인에 성공할 수 있겠냐?’라는 질문이거나 ‘괜찮겠니?’라는 물음이겠지.

그가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네고 나온 이유는…….

알렉시스는 그가 몇 번이고 곱씹고 돌아갔던 찰나를 떠올렸다.

여름의 끝자락이 머물러 있던 그 밤을. 기적의 초입을.

이유는 모르겠어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감각이 유독 생생했었다.

자리를 비켜야 하는 별들은 여전히 찬란했으며, 저물어가는 꽃들의 향은 아련하기보단 짙디짙었다.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던 결 좋은 머리칼을 기억한다.

혼돈으로 떨리면서도 끝내 강인하게 올려다보던 시선도.

그 시선 위로 드리운 풍성한 속눈썹도.

여자는 늘 그렇듯 명화처럼 풍경을 완성하고 있더랬다. 아무리 더럽고 추악한 장소더라도 그녀가 서 있으면 고결하고 신비롭겠지.

‘내가 졌어.’

여자는 패배를 시인하며 되레 승리했다.

‘내가 졌어, 알렉.’

분명 그가 내기에서 이긴 건 확실할 텐데…….

하지만 그 말을,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알렉시스 뤼셍은 철저하게 무력해졌다.

새삼스러운 진실이 다시금 그를 덮쳤었다.

‘난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을 못 이기겠구나.’

당신만은, 절대 못 이기겠구나.

알렉시스 뤼셍은 세실리아 뤼셍 앞에선 언제나 초라한 패배자이리라.

존재 그 자체가 승리인 여인은 패배하더라도 늘 승리할 테고.

이 현실이 씁쓸하지 않다고는 못 하겠다.

좁혀지지 않는 듯한 감정의 차이가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부서지는 기분이긴 해서.

동시에 참으로 모순적인 건, 그는 딱히 이 무정한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더 사랑하는 쪽이 늘 그이더라도 괜찮았다.

언제 어느 순간 여인이 그에게 닿아주기만 한다면.

알렉시스는 느릿하게 발을 움직이며 회상에서 걸어 나왔다.

저녁으로 접어드는 퐁레프의 복도는 여느 때처럼 호화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자의 빛으로 가득했다.

흠뻑 쏟아져 내리는 금빛을 헤치며 알렉시스는 곰곰이 생각을 이었다.

패배를 인정하며 여인은 당연하게도 대가를 내겠노라 약속했다.

‘승리자에겐 마땅한 전리품을.’

여자가 가볍게 덧붙였던 말.

다시금 생각하지만, 내기의 포상으로 여자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짓이었다.

만약 그러했다면 세실리아는 약속대로 그를 사랑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알렉시스는, 사랑과 낭만에 미쳐 사는 혈족의 직계는 잘 알고 있었다.

노력한다고 해서 사랑이 따라올 리가 없다는 것을. 언제 어느 순간 깨달아보니 사랑일 뿐.

그러니 여자의 노력은 통할 리 없었다.

세실리아는 노력하고 노력하다, 끝내 그를 사랑하는 척 가면을 쓰고 연기하기 시작할 터.

그렇게 되면 알렉시스 뤼셍은 결국 달콤한 거짓을 택하며 추락할 테지.

태양을 쫓다 끝내 추락했다는 가여운 소년처럼.

여자가 연기와 거짓말을 잘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말이다.

알렉시스는 느릿느릿 침실로 들어서며 거울을 살폈다.

세실리아가 왜 갑자기 불쑥 오페라 얘기를 끄집어냈는지 잘은 모르겠다.

그녀의 성정상 ‘연인의 데이트’를 하자는 제안은 절대로 아닐 터.

세실리아는 대중에게 ‘둘이서 도란도란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체통을 버리고 유치하게 싸우는 모습’을 선택할걸.

알렉시스는 혀를 차며 크라바트를 고르기 시작했다.

절대로 데이트가 아니라고, 아버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여러 번 타이르는 주제에 뛰는 심장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하겠다.

“……한심하군.”

그런 자신이 아둔하고도 바보 같아 결국 피식 웃었다.

‘뭐 어쩌겠어.’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니……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 * *

약속된 시각보다 살짝 일찍 내려간 알렉시스는,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세실리아를 목격할 수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곧장 다가가서 질문하자.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세실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답해 주었다. 곁에 서 있던 칼리아 오페르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야 아침부터 준비하셨으니까요.”

“아침부터 재촉했다고 성내는 거야, 키리?”

“설마요, 전하. 신선했답니다. 전하께서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외출 복장을 고르시는 건 꽤 간만이었으니까요.”

“아─니─거─든.”

세실리아가 다소 뾰로통한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칼리아는 모르는 척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제 기억을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전하. 정말로 데뷔탕트 이후 처음이었다고요.”

“아니야. 아니라고, 키리.”

“설마하니 ‘레네이드의 자수정’까지 꺼내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크고 무겁기만 하다고 한동안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두셨잖아요.”

세실리아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칼리아의 옷소매를 붙들었지만 수석 시녀는 열심히 고발을 이어나갔다.

“저랑 비에라 백작 부인이 예쁘다고 제발 꺼내 달라 했을 땐 못 들은 척 그저 웃기만 하셨으면서.”

“아냐, 나 그땐 진짜 못 들었어.”

“제가 속을 줄 아세요, 전하?”

세실리아는 시녀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어대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런 충동이 울컥울컥 묻어 나오는 옆얼굴을 보며 알렉시스는 웃음을 참았다.

그의 뺨이 미미하게 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세실리아가 결국 칼리아를 요리조리 흔들어댔다.

시녀는 바람 아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오늘은 아침부터 치장하자고 하시더니 저 무거운 보석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야무지게 착용하시고. 티아라까지 꺼내시지 않은 게 신기하─”

“자, 봐, 키리. 내가 전부 ‘납득’ 가능하게 설명해 줄게.”

세실리아가 시녀를 흔들어대는 손길을 멈추고 비장하게 말했다.

“저 얼굴을 봐, 응?”

칼리아의 눈길이 흠칫 알렉시스를 향했다가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황궁 생활을 꽤 오래 한 칼리아 오페르는 황태자의 얼굴을 지나치게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는 예법은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다.

“까딱하다간 내가 밀리잖아. 그렇지 않아? 그런 위기의식이 안 들어?”

“…….”

“…….”

“난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한 것뿐이야.”

“전하.”

칼리아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냥 황태자 전하와의 데이트가 기대되었다고 하세요. 오랜만에 두 분끼리의 나들이잖습니까.”

“아냐, 난 정말 진심으로 내 얼굴이 걱정되었어.”

“……아, 네.”

칼리아의 심드렁한 대꾸에, 세실리아가 그대로 침몰했다.

잠깐 삐쳐 있던 그녀는 뾰족뾰족한 눈길을 남자에게로 휙 돌렸다.

물론 알렉시스는 ‘데이트란 말을 부정하진 않네’라는 식의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게,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의 뺨이 귀엽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지어 풍성한 귀밑머리 뒤에 숨겨진 귓불마저도.

그 전부를 포착한 알렉시스는 더듬더듬 진실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수런거리는 심장이 가까스로 참아낸 탄식을 부채질했다.

멍해진 시선을 받아내던 세실리아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렉시스는 숨어버린 얼굴 대신 날렵한 턱선과 유려한 목덜미를 관찰하며 믿을 수 없는 결론을 곱씹었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오늘 밤을 기다린 사람이, 그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땅거미가 밀려들며 황혼이 시작되었다.

낮과 밤이 닿은 시간이기 때문일까, 마차 안엔 따스한 어둠이 휘돌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조용히 눈을 들어 여인의 쇄골 부근에서 번쩍이는 큼지막한 자수정 알을 바라보았다.

‘보랏빛이 어울린다고 그러더니…….’

정확했다.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여인께선 심미안도 타고나신 모양이지.

검은 머리칼, 새하얀 목덜미와 보라색 보석이 세련되고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알렉시스는 칼리아 오페르가 왜 투덜거렸는지 알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평상시에도 아름다운 여인은 힘을 주어 꾸미니 홀릴 정도로 아름답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던 걸까, 세실리아가 팔을 교차하며 그녀의 목덜미를 슬쩍 가렸다.

“왜 계속 쳐다봐?”

“참 커다란 보석이긴 하구나, 싶어서요.”

“네가 선물했잖아.”

“그랬었죠.”

그땐 크면 다 좋은 줄 알았지.

거는 사람의 목에 부담 갈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가 이기적인 새끼이긴 한 모양이었다.

여자의 목도, 귀도 아파 보인다는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세실리아에게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얼굴 다음으로 보석이라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얼굴을 보겠지.’

이건 그 어떤 보석을 걸쳐도 당연한 일이니 포기하겠다.

하지만 얼굴을 본 뒤에는 그가 선물한 목걸이를 볼 터. 그다음으론 귀걸이를 볼 테고.

어쨌거나 여자에게서 눈에 띄는 게 자신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뿌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세실리아가 살짝 불안해한다는 걸 알긴 하는지, 알렉시스는 느긋하고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돈 많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요?”

“어…… 그렇긴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니.

세실리아가 어설프게 긍정하자, 남자의 입매에 깔린 희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녀가 만약 은빛 머리칼로 돌아간다면 진주나 다이아몬드도 어울릴 터.

길고 곧은 목인 만큼 목걸이 역시 화려해도 괜찮으리라.

수백의 바로크 진주와 수백의 페어 컷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목걸이면 세실리아의 미모를 받쳐주기엔 충분하겠지.

물론 그렇다 해서 눈앞 여인의 아름다움이 가려질 리 없다는 건 알렉시스 뤼셍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가려지면 좋을 텐데.’

저 아름다움을 그 홀로 만끽할 수 있도록.

알렉시스의 시선이 목덜미 주변에서 방황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교차했던 세실리아의 손이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눈빛이 머무는 자리를 어떻게든 가리려 하는 몸짓에 알렉시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왜 가리세요?”

“……그렇게 좀 보지 마.”

“보여주려고 착용하신 거잖아요?”

“그, 렇긴, 한데.”

오늘따라 눈앞의 여인은 솔직함을 택하시는 모양이다.

평상시의 거짓 평정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러워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으니.

안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청년의 머릿속은 결국 돌아버릴 정도로 열이 올랐다.

‘잡아채서 입을 맞출 수만 있다면.’

그렇게 숨결을 빼앗고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만 있다면.

그렇담 여인의 붉은빛은 더욱 짙어지며 입술 사이로 원망과 분노를 쏟아낼 테지.

아니, 어쩌면…… 쏟아내지 않을 수도.

‘희망 사항에 불가하겠지만.’

이지러진 금빛을 상상하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흠뻑 젖은 얼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에서 허덕이는 몸짓.

여인의 진솔한 반응을 생각할수록 눈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렉.”

톡.

어느새 여자의 구두가 그의 발 사이로 들어와 복사뼈를 가볍게 건드린다.

알렉시스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다, 잇따라오는 불순한 상상을 막기 위해 잠시 숨을 정지했다.

멈춰. 상상하지 마.

더는 위험하니.

“알렉?”

“예, 누님.”

어느새 그의 누이께선 예쁘디예쁜 가면을 다시 쓰신 모양이었다.

부끄러움마저 능숙히 감춘 여인은 새침하고도 도도한 낯을 꾸며내고 있었다.

저 표정을, 저 얄밉게도 차분한 표정을 망가뜨리고 싶다는 심술이 치밀었다.

치기 어린 애새끼에선 졸업했다고 믿었거늘.

“말씀하십시오.”

여인의 발끝에서부터 풍성한 치맛자락으로, 다시 새하얀 빗장뼈와 그사이에 자리한 목걸이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여인의 눈을 다시 마주하자 세실리아가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설마 오늘 계속 그렇게 쳐다볼 건 아니겠지?”

“안 됩니까?”

“안 돼!”

“아깝군요.”

세실리아가 그에게 눈을 흘겼고, 알렉시스는 키득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인을 계속 쳐다보는 행위는 그에게도 위험하긴 했다.

휘몰아치는 심술과 충동을 가라앉히려 부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오페라를 같이 관람하자며 초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스텐 양이 초대했어.”

“……계속 연락하시는 줄은 몰랐는데.”

“황녀의 미덕이자 의무란다.”

알렉시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흘끗 밖으로 굴리며 지나가듯 질문했다.

“베스텐이 저도 초대했었나요?”

기실 답이 명백한 질문이었다.

가브리엘 베스텐이 아무리 인기 절정을 달리는 최고의 프리마돈나라고 한들, 미혼의 황태자에게 감히 초대장을 날릴 수는 없었다.

황태자의 누이를 통해서라면 더더욱.

자칫하면 왜곡된 해석이 곁들어질 수 있을 만한 행동이니까.

세실리아는 입을 새초롬히 다물었고, 알렉시스는 더욱 즐거워졌다.

여인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나만 초대했어.”

역시.

“너는 내 초대지. 나만 가는 게 아니라 우리 둘이 함께 가면 베스텐 양에게도 좋을 테고─”

“제가 좋은 장신구군요?”

좋은 액세서리 역할이라면 더없는 영광이지. 그녀 옆에 머무를 수 있다는 소리인데.

불쾌해하기보단 즐거워하는 알렉시스의 모습에 세실리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미약한 한숨을 내쉬더니 정정했다.

“좋은 것보단 과한 것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야.”

“이런, 좋다고 해주세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주인을 가리면 과한 거지. 아니면 과분한 것일 수도.”

“누님.”

세실리아가 실없는 웃음을 흘려내며 제 머리칼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밖의 어둠이 완연히 농익어, 마차의 창은 창문이 아닌 거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새삼스레 제 얼굴을 살피는 모습에 알렉시스는 한숨을 참았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꾸며도 누님은 못 가린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

“그러게, 누가 그렇게 열심히 꾸미래?”

세실리아가 원망스레 질문했고.

“꾸민 보람은 있는 것 같은데요.”

알렉시스는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왜 그렇게 꾸몄─”

중간에 말이 뚝 끊긴다.

알렉시스가 부러 몸을 숙여 세실리아에게로 제 얼굴을 휙 가까이 갖다 댄 탓이다.

그녀가 당황으로 눈을 또록 또로록 굴리더니, 이내 작게 씨근덕거리며 노려보기 시작했다.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자마자 여린 손이 그의 입술 위에 턱 얹혔다.

어떻게든 얼굴을 밀어내려는 노력을 하기 위하여.

알렉시스는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비틀어 손바닥 위에 입술을 묻었다.

질척한 혀로 핥아 올리는 접촉.

오묘한 소리에 여인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파드득 경련했다.

“야─!”

“누님.”

거짓된 평정은 결국 다시 깨져 버렸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여인의 얼굴을 보며 알렉시스는 저열한 충족감을 만끽했다.

그가 그녀를 저리 만들었다.

그만이, 그럴 수 있다.

“예뻐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버둥거리던 손이 멈칫했고, 세실리아가 멍하니 쳐다보다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밖에선 이러지 말아주라…….”

안에선 이래도 된다는 소리인가?

알렉시스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질문을 영리하게도 내뱉지 않았다.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재빨리 손을 거둔 세실리아가 자세를 반듯하게 펴며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었다.

“정신 차려, 곧 도착이야.”

어느새 창밖의 풍경이 휘리릭 바뀌어 있었다.

호화스러운 황립 오페라 극장이 점점 더 커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알렉시스 역시 제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누님.”

“……또 왜?”

불안하게, 라는 뒷말을 꿀꺽 삼키며 세실리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경계 서린 금빛을 향해 알렉시스는 느릿느릿 질문했다.

“저를, 왜 초대하셨습니까?”

“그러고 싶어서.”

“…….”

“마차 멈췄어. 빨리 나가.”

때마침 마부가 문을 열었고, 알렉시스는 불만을 능숙히 감추며 마차 밖으로 나가야 했다.

순식간에 카메라 찰칵거리는 소리가 세상을 메운다.

쏟아지는 집중과 환호를 익숙히 받아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에 한층 더 커지는 함성.

이번엔 마차를 향해 손을 뻗자, 세실리아가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까진 시끄러웠던 주변이 냉큼 고요해진다.

갑작스러운 적막이 암시하는 감정은 하나.

경탄이다.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조차 잊은 채, 지켜보던 관중들은 소리를 지르는 것조차 잊은 채, 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을 바라보았다.

황홀했다.

그 모든 신 중에서도 최고의 미를 자랑한다는 죽음의 여신이 저렇게나 아름다울까.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눈부신 광경들을 하나로 빚은 듯했다.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미모가 주변을 압도해 현실을 잊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맥을 못 추는 동안, 알렉시스만이 홀로 제정신을 유지하며 입을 삐죽였다.

“장신구는 역시나 패배했습니다.”

“꾸민 보람이 있네.”

“…….”

“이렇게라도 이겨봐야지.”

세실리아가 새침하게 받아치고는 열심히 인사하기 시작했다.

* * *

오페라 극장에 황녀뿐만이 아니라 황태자까지 등장했으니, 주변이 시끌벅적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2층의 귀빈석에 앉아 있던 청년은 결국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느긋이 책장을 넘기던 손은 멈춘 상태였다.

그는 1층의 관중들을 살피다 이번엔 바로 옆의 동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어찌 된 일이냐’라는 질문을 품은 채로.

줄곧 구경하고 있던 바네사 그뤼에는 첫째 오라비의 눈길에 어깨를 으쓱했다.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셨어.”

“아하.”

쟈크는 말없이 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저기 계시네, 귀빈석에.”

여동생의 턱짓에 그는 발코니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바네사가 가리킨 방향을 쫓자, 흑발의 두 남매가 나란히 앉아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황족임을 알려주는 머리칼 색이 유독 선명했다.

쟈크는 책을 탁 덮으며 계속 관찰했다.

황태자가 덤덤하게 미소 짓는 것과는 달리, 황녀는 어둠마저 밝힐 정도로 환하게 방긋방긋 웃어주고 있었다.

팔뚝이 유난히 얇은 탓일까.

연신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저러다간 팔이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시답잖은 감상까지 일었다.

“예쁘시네.”

황녀로 태어나서 망정이지, 평민, 아니, 어쩌면 하급 귀족 여성으로 태어났더라 해도 그녀는 저 외모 때문에 인생을 말아먹었을 거다.

심지어 나라까지 말아먹었을 수도.

‘황녀로 입양된 게 여러모로 홍복이군.’

자못 신랄한 감상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쟈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세실리아 뤼셍을 새삼 다시 뜯어보았다.

정말이지…… 한평생 어여쁘다는 소리는 달고 살겠다.

그게 황녀의 행운인지 불운인지는 모르겠어도.

보자마자 떠올린 첫 번째 감상처럼, 두 번째 감상 역시 ‘예쁘긴 진짜 예쁘네’라니.

여자의 미모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알 수 있어 쟈크는 고개를 저었다.

“샤를, 그 한심한 새끼가 왜 이불에 얼굴만 파묻고 있는지 알겠는걸.”

“원래 샤를 오라버니는 한심했어.”

바네사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한심하여 구경감으론 좋았지.”

“오라비가 둘이나 있는데 한쪽은 성격이 나쁘고 다른 한쪽은 지능이 나쁘다니……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네가 졸라서 여기까지 따라왔잖니, 바네사 그뤼에?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쟈크의 으름장에 바네사는 입만 삐죽여야 했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오라비의 곁으로 총총 다가가, 마찬가지로 황족 남매 두 분을 바라보았다.

둘째, 그러니까 ‘샤를 그뤼에’는 유독 공작새 같은 면모가 있었다.

안 그래도 허세가 가득한 놈인데, 세실리아 황녀 앞에선 얼마나 허세를 부리려 했을지.

소문에 따르면 그는 황태자와 황녀 전하 앞에서 면박을 받았다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렇게나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수모를 당했으니…….

‘지금까지도 이불에 얼굴만 파묻은 채로 멍청히 있는 꼴이 이해가 되지.’

꼴사납긴 하지만 꼴 좋기도 하여 바네사는 다시금 코웃음을 쳤다.

혈육에게 지나치게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만…….

멍청한 놈이 똑똑한 척하는 꼴을 10년 넘게 바라보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법이다.

“전부 착석하여 주십시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오페라가 시작될 시각이었다.

안내해 주는 음성에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에 앉았고 두 명의 황족은 약간의 커튼을 쳐 자신들의 모습을 가렸다.

바네사는 쟈크를 반쯤 끌다시피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아, 빨리 앉아. 곧 베스텐 양 나오신단 말이야.”

“나오‘신’단 말이야? 지금─”

“그분은 신이셔. 그러니까 존대해야 마땅하지. 앉아. 당장!”

뭐라 더 말을 하려던 쟈크는 여동생의 박력에 눌려 얌전히 착석해야 했다.

오라비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바네사는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공연될 오페라는 <물망초의 눈물>.

초반부터 살해된 여주인공 ‘엘레아노르’가 죽은 뒤 다른 영애에 빙의하여, 본래의 사랑을 찾고 복수까지 마무리하는 내용이다.

자극적인 만큼 재미가 보장된 이야기지.

여주인공에 의해 극이 주도되는 만큼, ‘엘레아노르’ 역을 맡은 오페라 가수의 역량이 강조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위대하신 가브리엘 베스텐께선 바로 이 역할로 데뷔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알렸었지…….

생각해 봐라.

압도적인 능력과 압도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신인 가수가 등장하여 무대를 휩쓰는 모습을.

‘그리고 난 그걸 못 봤었지! 하필 그! 오페라를! 놓쳤어!’

언젠가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다린 지 어언 3년.

그 후로 다양한 역할을 전전하던 분께서 드디어 이 ‘엘레아노르’로 돌아오셨으니 미쳐 날뛸 일만 남았다.

쟈크가 뭐라 입을 열려 해, 바네사는 조용히 경고했다.

“오페라 보는 동안 한 마디만 더 해봐.”

“허…….”

“미친개를 보게 될 줄 알아.”

쟈크는 얌전히 닥쳤다.

* * *

최종 막이 내려지고 가수들이 여기까지 온 두 황족에게 예까지 표한 순간, 바네사는 북받치는 감정에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옆에서 쟈크가 괴이한 표정으로 구경하든 말든, 그녀는 황급히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두드렸다.

망할.

‘이렇게나 아름다운 공연을 놓쳤었다니!’

언젠가 보면 그만일 거라 위안했거늘, 오늘 공연을 보니 놓쳐 버린 과거의 공연들이 생각나 속이 쓰렸다.

‘그때 왜 정신을 빼놓고 살았담?’

바네사는 코를 훌쩍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위대한 신에게 바칠 꽃다발을 찾아 안고서는 뒤늦게 함께 온 ‘덤’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진 않을 거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어……. 그래. 그럴게.”

‘같이 오려고 해봐 죽는다’라는 암시를 당연히 눈치챘나 보다.

하긴, 교활하면 교활했지 아둔한 인간은 아니니까.

쟈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사래 쳤고, 바네사는 더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귀빈석을 나섰다.

모든 게 완벽한 예상대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만 대기실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리라 예상하진 못했지.

구불구불한 검은색 머리칼이 밤의 숨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머리핀들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상냥하고 우아한 말씨, 유려한 몸짓과 세련된 옷차림까지.

취향의 벽을 무너뜨리는 미인은 존재 자체로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찰나, 바네사는 냉큼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뤼셍의 별을 뵙습니다.”

“어머. 오랜만이야, 그뤼에 백작 영애. 반가워.”

“어…… 손님이 찾아오셨나요?”

황녀의 뒤에 있던 가브리엘 베스텐이 모습을 드러냈고, 바네사는 눈을 번쩍이며 황홀경에 젖었다.

그 ‘가브리엘 베스텐’이 그녀의 앞에 서 있다니! 직접 만나 뵙고 있다니!

“저, 저, 저는…….”

더듬거리며 인사를 끄집어내려다 결국 고장 나버렸다.

그리고 고장나 버린 가련한 추종자를 위해 세실리아가 나섰다.

“베스텐 양, 이쪽은 바네사 그뤼에 백작 영애야. 그뤼에 백작 영애? 이쪽은 오늘의 주인공이었던 가브리엘 베스텐 양이고.”

“과찬이십니다, 전하. 전하께서 계시는데 어떻게 제가 주인공이겠습니까.”

바네사는 뭐라 벙긋대고 싶었지만, 그녀의 신을 오래오래 보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목숨을 아껴야 하는 법이었다.

감히 황족 모독죄를 저지를 수 없어 그녀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세실리아 뤼셍만이 빙긋 웃었을 뿐.

“그대의 노래를 듣자마자 모두 날 잊어버렸을 걸?”

“맹세코 아닐 겁니다.”

베스텐이 재빠르게 부정하자, 세실리아 황녀가 마냥 싱그러운 미소로 상황을 넘겼다.

그녀의 어여쁜 금빛 눈이 다시금 바네사에게로 꽂혔다.

‘꽃다발.’

그녀가 소리 없이 속삭여, 바네사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저, 저, 베스텐 양?”

“네, 영애.”

가브리엘 베스텐이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고, 바네사는 덜덜 떨며 꽃다발을 휘릭 바쳤다.

허리를 숙인 채 팔만 길게 뻗은 우스꽝스러운 자태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 따위는 없었다.

“부, 부, 부디, 받아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꽃다발을 거둬가는 손길이 느껴져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간접 접촉이 아니다.

‘난 모든 걸 이뤘어…….’

죽어도 여한은 없, 이 아니라, 많긴 하네.

“그리고 영애, 부디 하대하십시오.”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가브리엘이 어설픈 미소를 머금고 나서야 바네사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확실히 사회적인 시야로 보면 되게 뜨악한 대화긴 했다.

어색하게 늘어지는 침묵을 깨뜨려준 건, 여러모로 구원자이신 황녀 전하셨다.

“영애가 베스텐 양을 엄청나게 좋아하나 보네~ 구애를 받아주는 게 어때, 베스텐 양.”

“좋아하진 않고 그저 사랑합니다…….”

“그렇대.”

“정말이에요…….”

그제야 조금 상황이 웃겼는지, 가브리엘이 미미하게나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황녀를 슬쩍 흘겨보며 속삭였다.

“전하께서 살짝 짓궂으신 분이실 줄은.”

“어머, 내가?”

“네. 지금 상황을 즐기고 계시잖습니까.”

“그야,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니.”

세실리아 뤼셍이 엷게 웃으며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선다. 그렇게 바네사는 눈부시고도 또 눈부신 그녀의 신을 영접할 수 있었다.

꿈이라 해도 믿을 순간이었다.

* * *

작별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섰던 세실리아는 호다닥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네사 그뤼에가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양손을 공손히 맞잡은 채로 질문을 던졌다.

“전하, 잠시 얘기가 가능하실까요?”

세실리아는 엷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슨 주제로 얘기하고 싶은지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이야, 영애. 가면서 얘기할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네사가 허리를 깊게 숙였고, 세실리아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어린 영애는 옆에서 총총 걸으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두 분께서 참석하실 줄은 몰랐어요.”

“으응, 우연히 좋은 기회를 얻었지. 베스텐 양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어.”

“베스텐 양께선 너무너무 노래를 잘하시니까요.”

“맞아.”

“네!”

힘차게 외치던 바네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주제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녀가 재빠르게 수습했다.

“사실 전 전하께서만 오실 줄 알았는데,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셔서 살짝 놀랐답니다.”

“아하, 그랬어?”

“네, 두 분께선 소문처럼 정말 사이좋으시더라고요. 두 오라버니를 둔 여동생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솔직히 부럽답니다.”

매끄러운 화술이다.

그녀가 어떻게 주제로 진입하려는지 보여 세실리아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뤼에 소백작이 영애를 나름 아낀다 들었는데.”

“……누가요?”

“아, 아닌가? 내가 잘못 들은 것이려나?”

“누가 그랬었습니까, 대체?”

바네사가 진심으로 기겁해 버려, 뭔지 모를 미안함까지 치솟을 지경이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백작이 아닌 모양이네. 그렇담 둘째 그뤼에 백작 영식 얘기였을 수도…….”

“잘못 들으신 듯합니다, 전하. 둘 다 절 못 잡아먹어 안달이거든요.”

“어머, 그렇구나. 내가 헷갈린 모양이야.”

“음. 쟈크 오라버니는 수상쩍고요, 샤를 오라버니는…….”

바네사가 말을 뚝 끊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세실리아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영애와 눈을 마주쳐주었다.

“제 오라버니께서, 전하께 폐를 끼쳤다 들었습니다.”

세실리아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금 입꼬리만 더욱 끌어 올렸다. 바네사가 깊게 무릎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뤼에 백작가의 일원으로 대신 사죄드립니다, 전하. 부디 자비를 베푸시길.”

“너무 걱정하지 말기를, 영애. 그뤼에 백작가는 이미 충분히 뜻을 표했으니까.”

샤를 그뤼에가 수모를 받고 떠난 다음 날, 쟈크 그뤼에는 세실리아 뤼셍에게 최고급 비단 여러 필을 바쳤다.

부디 노여움을 풀길 바란다는 간접적인 부탁이었다.

어차피 그뤼에 백작가에겐 화를 낼 생각도 없어 세실리아는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

머지않아 클라우드 마뉴엘 대공이 방문하는 만큼, 시기적절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미 비단은 황실 재봉사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리다.

지금쯤이면 예쁜 드레스로 가공되고 있겠지…….

“그러니 너무 과하게 미안해하거나 성의를 표할 필요는 없어.”

“전하 덕분에 아둔한 이가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저 감사할 수밖에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다만.”

이런. 백작가에서 둘째의 위치가 어땠는지 보이는걸.

마음이 조금도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세실리아 뤼셍은 성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무례하게 군 남자의 속사정까지 다 헤아려주기엔 그녀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가기도 벅찼다.

세실리아의 미소가 약간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바네사가 못을 박듯 덧붙였다.

“행여 전하께서 마음이 쓰일지라도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제 위치를 모르던 이가 알게 되었으니 진정한 비극은 피한 셈 아닙니까.”

하긴.

샤를 그뤼에가 멋모르고 계속 후계자의 자리를 노렸더라면, 첫째인 쟈크가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세실리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지, 피한 셈이지.”

“예. 그런 의미에서 그뤼에는 전하께 한없이 감사해야 하는 법이지요. 돈과 권력 앞에선 혈연도 소용없다지만…….”

그뤼에의 막내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고 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누가 핏줄 간의 다툼을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확실히 바네사도 골치가 꽤 아팠겠어.

세실리아는 눈앞 영애의 심정을 가늠하며 느릿느릿 인사를 건네었다.

“여러모로 내 입장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영애. 오늘 밤의 행복이 그대에게 이어지길 바랄게.”

“감사드립니다, 전하. 전하께서도 언제나 찬연한 밤만 보내시길…… 앗.”

“응, 뭐가 문제일까?”

“괜찮으시다면 질문을 하나 더 드려도 될까요?”

영애가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해,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네사가 그녀에게 궁금할 게 뭐가 있지? 샤를 그뤼에의 이야기는 끝난 듯한데.

“무엇일까, 영애?”

“곧 퐁레프에서 황태자 전하를 위한 무도회가 열린다 들었습니다.”

“응, 그럴 거야. 귀가 밝구나.”

클라우드 마뉴엘이 정식으로 방문하기 직전 무도회를 개최할 작정이었다.

형식상의 무도회였다.

아르망도 마리사도 세실리아도 알렉시스도, 무도회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전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연회를 빠르게 열고 빠르게 끝내기로 동의한 참이었다.

“혹시 주제라도 따로 있는지……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바네사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멋대로 질문드려 불쾌함을 안겨드렸다면 그럴 의도는 절대 아니랍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아니야. 괜찮아, 영애.”

세실리아는 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꾸며내며 뺨을 긁적였다.

바네사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기다렸고, 그녀는 재빠르게 머릿속을 정돈한 뒤 답을 내주었다.

“사실 주제가 여럿 있긴 한데, 당사자의 의견을 우선시하면서도 영애들의 선호까지 고려하느라 결정이 늦어지고 있네.”

“그렇군요.”

“오래 기다리게 했다면 양해를 구할게.”

“아니에요, 전하. 제가 섣불리 여쭤본 듯하여 죄송합니다.”

바네사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밤의 축복과 영원히 함께하시길. 그럼 그뤼에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야말로 즐거운 시간이었어, 영애. 내가 기쁨을 받은 만큼 그대 역시 달가운 시간이었기를 바라. 행복한 밤 보내길.”

“감사합니다.”

바네사가 몸을 곧추세우고선 콩콩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브리엘 베스텐을 찾아가는 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녀 가문의 마차로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겠지.

‘……기사 없이 홀로 다니는 건 위험할 텐데.’

세실리아는 바네사가 극장으로 무사히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뒤돌았다.

황족들만이 다닐 수 있는 대로 양옆에선 사람들 몇몇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습관적으로 인사해 주었고, 그들은 헉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탄성들이 줄지어 들려온다.

너무 예쁘다는 의례적인 칭찬까지도.

세실리아는 답례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몇몇 이들에게 놀람을, 또 몇몇 이들에겐 감탄을 안겨주며 계속 걸어가자 알렉시스가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선지 얼굴은 평온하고도 담담했다.

물론 저 가면 뒤에는 무료하기 짝이 없다는 진심이 숨어 있겠지만. 차분했던 낯은 그녀를 보자마자 파삭 깨졌다.

입꼬리가 완연하게 들렸고, 알렉시스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로 한 걸음 내디뎠다.

“누님.”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괜찮습니다. 그대가 돌아온다면 기다림마저도 기쁨이니까요.”

오랜 시구를 인용하며 알렉시스가 그녀의 한쪽 장갑을 스르륵 벗겼다. 맨 손등 위에 입맞춤을 남기고는 손수 마차 문을 열었다.

남아 있던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들으며 세실리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귀궁할 시간이었다.

* * *

밤이 내려앉든 말든 생-뢰크의 시가지는 아름답겠지만, 사방이 어둑한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세실리아고 알렉시스고 창밖을 바라보기보단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목걸이를 쳐다보며 나직이 질문했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무겁긴 해. 내버려 두렴, 목에 걸고 있어야 안 잃어버리니.”

“그것참, 득보다는 실이 많은 방법 같은데요.”

“결과가 확실하니 좋은 방법이지……. 어쨌든. 오페라는 어땠니?”

알렉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았습니다, 무난하다 못해 색깔 없는 감상평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저런 반응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바네사 그뤼에가 안다면 경악하겠지만…….’

가브리엘 베스텐이 노래하든 말든, 한 막이 시작하고 끝나든 말든, 알렉시스 뤼셍은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엔 아무도 모르게 그의 무릎을 때리고 옆구리를 꼬집던 세실리아는 막판엔 포기했었다.

저 녀석이 오페라의 줄거리라도 알면 놀랍…….

“남주인공이 피에르였나요. 그가 생각보다 답답하여 어이가 없더군요.”

알곤 있네.

하긴, 예술을 향한 예의를 지키긴 하던 녀석이었다.

“으응. 엘레아노르를 마지막에야 겨우 알아본 건 내가 봐도 너무했어.”

“그렇지요.”

“사랑한다면 조금 더 빨리 알아봐야지.”

“보자마자 알아봐야지요.”

알렉시스가 부드럽게 정정하여, 세실리아는 자세를 고치다 말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가 대수롭잖게 덧붙였다.

“사랑이 그런 것이니까요.”

“그래?”

“네, 그렇습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다, 다시 맞은편의 남자를 퍼뜩 돌아보았다.

남자의 수려한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윤곽을 자랑하고 있었다.

높은 콧대와 날렵한 턱선이 그림자마저 벨 듯 선명하다.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붉은 입술이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빙긋 휘어졌다.

“저한테 시험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시지요.”

“……시험하고 싶은 건 아닌데.”

“정정하겠습니다. 증명할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주십시오.”

애초에 증명 자체가 필요하긴 할까.

알렉시스가 그녀만을 바라본다는 건 이젠 그녀도 질릴 정도로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 뤼셍은 세실리아 뤼셍을 사랑한다.’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지금 순간만큼은 절대적인 명제.

다만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그 사랑이 과연 영원할까’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세실리아는 잠자코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떤 모습을 하든 알렉시스가 단박에 알아본다면…….’

그의 눈을 가리더라도 끝끝내 알아본다면. 그렇다면, 그건 꺾을 수 없는 사랑이란 소리 아니려나.

오페라를 봐서 그녀가 말랑해진 탓인지 아니면 빌어먹을 낭만에 반쯤 항복한 탓인지 자포자기에 가까운 결론이 들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조용히 속삭였다.

“얼떨결에 무도회 주제가 정해졌는걸.”

“고전적이네요.”

알렉시스가 평했고.

“고전적이지.”

그녀 역시 동의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퐁레프는 가면무도회를 개최했다.

드넓은 연회장엔 터키석과 아콰마린으로 장식된 샹들리에들이 배열을 맞춘 채 반짝였다.

그렇게 천장을 살펴보다 양옆의 벽을 보면 연푸른빛 마법 등과 함께 위풍당당한 휘장들을 목격할 수 있다.

휘장에 수놓인 무늬는 하나.

퐁레프의 주인이자 이 연회의 개최자인 뤼셍 황실의 문장이다.

이번엔 휘장을 따라 시선을 내려 연회장을 둘러보면, 불투명한 푸른색 유리로 만들어진 동물 조각상들이 가장 먼저 보인다.

핑거푸드가 정갈하게 배치된 식탁들.

푸른색 계열의 수국과 물망초로 꾸며진 화병들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흔들리는 연하늘색 레이스 커튼까지.

누가 보아도 이 무도회의 코드가 오묘한 푸른색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터다.

가을이 슬금슬금 찾아드는 밖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색상이었다.

이 방, 이 연회만큼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신비로운 꿈속의 세상 같았다.

‘바다 속 같네.’

칼리아 오페르는 샴페인 잔을 한 바퀴 돌리며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갈색 머리의 여성들이 전부 가면을 쓴 채, 외딴 섬처럼 거리를 지키며 서 있다.

가면의 색상은 다 다를지언정 드레스는 거의 비슷한 흰색이나 푸른색 계열이었다.

‘놀랍지도 않군.’

칼리아는 담담히 평하며 그들을 계속 관찰했다.

영애 몇몇은 부채를 꼭 쥐고 있었으며, 또 몇몇은 그녀처럼 태평하게 술을 홀짝이고 있었고, 또 몇몇은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대체로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지긴 했다.

‘나만 이 시간이 무료한 건가.’

칼리아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팍의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르겠는걸.’

그녀를 비롯해 방 안의 모든 여인은 전부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한 상태였다.

그들 전부가 착용해야 하는 바로 이 마법 브로치의 효과였다.

탐스러운 붉은빛 머리칼을 자랑하시는 서쪽의 장미 ‘엘자 일리스’ 백작 영애께서도 오늘만큼은 갈색 머리일 터.

브로치를 착용하지 않는다면 연회에 참석할 수 없는 만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같은 머리색과 눈 색을 지닐 수밖에.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어내고는 유심히 관찰했다.

백금과 푸른 토파즈로 장식된 장신구는 뤼셍 황실이 영애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인 동시에 기념 선물이었다.

나뭇가지 모양의 일회용 마력 충전 장치로써 12시간 동안 착용한 이의 외양을 바꿔주며, 마력이 다 소모되면 더는 사용할 수 없다고 들었다.

충전도 불가능하니 그저 평범한 브로치가 된다고.

‘예쁘니 좋지 뭐.’

칼리아는 뺨을 긁적이며 샴페인을 더 홀짝였다.

갈색 머리의 여자 한 명이─아, 물론 갈색이겠지!─그녀 옆을 부드럽게 지나쳐 딸기 카나페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은 밭게 달려 어느새 연회의 시작에 가까운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또 한 잔 더 마실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칼리아는 갈색의 향연에 슬슬 머리가 아팠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보자마자 기가 질려 떠나시는 것 아니냐고.’

저도 모르게 황후 폐하와 황녀 전하 사이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 브로치들을 생각하신 분은, 다름 아닌 황후 폐하셨다.

‘기왕 정체 가릴 거면 완벽하게 해야지.’

황후 폐하께서 다소 심술궂게 말씀하시며 브로치들을 제작하라 하셨고.

‘……잠, 잠깐만요. 너무 과한 것 아닐까요?’

황녀 전하께서 당혹해하시며 모후를 말리려 하셨다.

‘아니야, 세실. 내 아들이지만 여러모로 운도 좋고 머리도 좋고 능력도 짜증 나게 좋은 애라, 만약 숨길 거면 완벽하게 숨겨야 해.’

‘어머니.’

‘가면무도회의 취지를 지켜야 해!’

마리사 뤼셍이 주먹을 불끈 쥐며 비장하게 외쳤으며, 세실리아 뤼셍은 덤덤히 바라보다 포기했다.

잠자코 어깨를 으쓱한 뒤 서류로 시선을 돌렸으니까.

칼리아는 눈을 또록 또로록 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면무도회의 취지를 아주 완벽하게 살린 연회긴 했다. 참신하다고 표현한다면 표현할 수 있겠지만…….

‘지루해!’

샴페인 거의 전부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누가 누군지 모르니 도무지 사교도 할 수 없고 무료함에 속이 터져나갈 기분이었다.

내가 이래서 엄마에게 참석 안 한다고 했는데!

‘해. 두 번 말 안 한다, 키리.’

친애하는 오페르 자작 부인께선 엄하게 못을 박으셨지.

‘아, 황태자 전하께서 날 선택할 리 없다니까, 엄마!’

그렇게 외쳤더니.

‘혹시 아니~ 낭만적인 만남이 될지?’

‘그럴 리 없어!’

‘꿈은 자유롭게 꾸는 거야!’

등짝을 연거푸 두 대 맞은 이상 참석하겠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칼리아는 코웃음을 삼키며 두 번째 샴페인 잔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그을쎄.

‘이 많은 갈색 머리 여성 중에서 알렉시스 뤼셍이 선택할 사람이 있긴 할까?’

지금껏, 황태자 전하께서 신경 쓰신 혼인 적령기의 귀족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황실과 친한 호사가들이 ‘어느 날 불쑥 평민 여성을 데려오지 않길 바란다’라며 걱정을 내비쳤을까.

기실 황태자 전하께서 신경 쓰셨던 여인은…….

‘황녀 전하뿐이시지.’

사이 좋으시다니까.

황녀 전하께선 간혹 부정하시지만.

두 번째 샴페인을 홀짝이자, 상큼한 포도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온몸을 노곤하게 만들 정도로 기분 좋은 향기다.

‘블랑슈가 좋아하겠네.’

벗의 취향을 떠올리던 칼리아는 다시금 블랑슈가 너무너무 부러워졌다.

무도회에 참석해 배를 채우고 시간만 죽이는 그녀와는 달리, 블랑슈는 지금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을 터.

‘같이 가자.’

이렇게 꼬셨건만, 녀석은 아주 칼같이 거절했다.

‘나 애인 있어.’

‘아…….’

‘그러니 못 가.’

어떻게든 친구를 꾀어보려던 칼리아는 간명한 이유 앞에서 패배해야 했다.

차마 더 꼬시려고 했다간 그녀가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이유였으니.

그러고 보니, 무도회가 열린다는 얘기에 블랑슈가 보였던 반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열려?’

이게 첫 번째 반응이었고.

‘오…… 되게 질질 끌겠네.’

이게 두 번째 반응이었으며.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묵념한다.’

이게 마지막 반응이었지.

아마 블랑슈 휴스턴도 칼리아와 똑같이 예상했을 터다.

알렉시스 뤼셍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끌리라는 미래를.

‘아, 진짜 도망치고 싶다.’

칼리아는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프란츠 사르비에에게 딱 하루 간 연인 역할을 해달라고 제안하는 건데.’

그렇담 그녀에게도 무도회를 빠질 수 있는 합법적인 이유가 생기는 거 아니냐고.

프란츠의 반응도 블랑슈만큼 꽤 재밌긴 했다.

‘그게 열려요?’

첫 번째 대꾸.

‘정말 열린다고요?’

두 번째 대꾸.

‘진짜, 여셨다고요?’

이게 마지막 대꾸.

되게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적였었지.

칼리아는 샴페인을 더 홀짝이려다 말고 손을 멈칫했다.

‘이상하네.’

블랑슈도 프란츠도 둘 다 뤼셍 제국의 신민으로서 황태자가 빨리 각인 상대를 찾길 기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기엔 둘은…….’

더 곰곰이 생각하려다 말고 포기했다.

사실 그녀도 무도회가 진짜 지금 이때 열릴 줄은 몰랐다.

열리더라도 아무 늦가을이나 초겨울쯤에 열리지 않을까 생각했었지.

무도회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시간이 지나치게 촉박했다.

그러니까 이 호화스러운 연회는, 마리사 황후 그리고 특히 세실리아 황녀가 정말 미친 듯이 일한 산물이라는 소리다.

황녀께선 책상 앞에 앉은 채로 곯아떨어지실 만큼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셨었다.

‘지금 푹 주무시고 계시겠지?’

모시는 이를 향한 걱정으로 칼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실은 저기 위의 방에서 황족들이 모여 연회를 지켜봐야 하겠지만─황태자의 폭주 위험 때문이다─, 황녀께서는 부디 침실에서 편안하게 주무시기 계시길.

데엥.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있던 그녀는 때마침 들려온 거대한 종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연회장 정면에 걸려 있던 시계가 비장하게 시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데엥, 데엥, 데엥.

이어 세 번 더 울려 퍼지는 종소리.

그렇게 시계가 정각 7시를 알려주었을 때, 연회장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방 안 모든 사람의 집중 속에서 한 청년이 유유하게 등장한다.

알렉시스 하인리히 아르망 르 뤼셍.

뤼셍 제국의 황태자이자 이 자리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알렉시스 뤼셍 황태자 전하께선 가면을 쓰고 계시지 않았다.

조각 같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며 제 가치를 뽐낼 뿐.

어렸을 때부터 외모로는 찬양받았던 만큼, 성장한 모습 역시 충격적인 외모를 자랑했다.

수려하고 준수한 얼굴에 쳐다보던 이들은 숨을 죽였다.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몸짓과 온몸에 두른 오만 섞인 여유가 청년의 기품을 완성했다.

냉랭한 한기가 섞인 외양.

비정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묘한 벽이 느껴지는 분위기. 담백하면서도 금욕적인 낯.

보는 이의 발길을 끌면서도 멈추게 만드는 요소들이지.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몇몇이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쳤고, 또 몇몇은 어설프게 머리칼을 정돈하고 있었다.

손가락들이 저절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황태자가 느리게 주변을 훑다 묵묵히 안으로 들어섰다.

차디찬 인상을 지닌 것과 달리 가히 태양 같은 존재감이었다. 분위기를 휘어잡아 자신에게로 끌고 간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긴장과 설렘이 피어났다. 파동처럼 일렁이며 마음을 건드리고 영혼을 흔든다.

보랏빛 시선이 닿은 곳에선 영애들이 멋쩍게 미소하거나 시선을 피하곤 했다.

‘누구를 선택하시려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질문.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이윽고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한 여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고요한 탄성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모두의 부러움 섞인 시선 속에서, 선택받은 여인은 잠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뼈대가 가늘기 때문일까.

다소 큰 키인데도 여려 보이는 체구였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하관과 턱선이 섬세하고도 어여뻤다.

신이 공들여 붓질한 것처럼 유려한 외양이었다.

분명 미인이리라.

곧바로 그렇게 추측하던 이들은 잠시 후 생각을 고쳤다.

모르지.

저 정도 미인이 사교계에 숨어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가면을 벗는 순간 조화가 깨진 이목구비가 드러날 수도.

추측이 휘몰아치는 속에서 여인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황태자를 올곧게 마주할 뿐이었다.

새하얀 가면 뒤에 감춰진 눈동자는 분명 갈색이겠지만, 본디 색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지는 찰나였다.

황태자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여인의 입술이 휘어지며 흐릿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침묵과 침묵으로. 미소와 미소로. 그렇게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모를지언정, 차마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 모두 직감하고 있을 터.

그러니 계속 훔쳐볼 수밖에.

얼굴은 아직 모르겠어도 전체적인 실루엣은 정말 예쁜 여인이었다.

몸의 곡선이 호리호리하면서도 우미했다.

빗장뼈를 비롯해 목까지, 팔꿈치를 넘어선 손목까지 레이스로 전부 가린 드레스는 답답하게 보이긴커녕 주인의 정갈한 자태를 강조했다.

곱고 청아했다.

고결하고 영롱했다.

……그래. 여인은 마치 진주를 빚어낸 듯했다.

투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 그대로의 깨끗하면서도 맑은 느낌을 자랑하는 보석.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제 몸을 꼭꼭 숨긴 신비로우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여인에게도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손을 들어 황태자의 손 위에 겹쳤다.

둘이 걸음을 맞춰 무도회장의 중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길고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 위로 샹들리에의 불빛이 쏟아져 내린다.

눈부시게 찬연한 빛이었다.

* * *

알렉시스의 손에 이끌려 중앙으로 걸어가는 길은, 꿈을 꾸듯 사뿐하기만 했다.

폭신한 구름에 둘러싸인 것처럼.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손길마저도 녹아 사라질 사탕처럼 느끼지는 순간이었다.

세실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알렉.’

맞은편에 서 있는 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지만, 제 목소리를 내면 들킨다는 자각 역시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알렉.’

알렉시스 뤼셍.

현실은 혼몽했고 상념은 두서없이 흘렀다.

세실리아는 생각이 이리저리 흐르도록 내버려 두며, 알렉시스가 그녀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그녀 역시 늦지 않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고…….

이어 악사들이, 로렌시아 왈츠곡 2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곡이기 때문일까, 아님 모든 사람 앞에서 둘이 춤을 추고 있다는 똑같은 상황 때문일까.

데뷔탕트 때의 무도회가 떠올랐다.

알렉은 그녀를 위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돌아왔었지.

‘돌아온 널 보며 정말 놀랐었는데.’

그녀만을 올곧게 바라보던 보랏빛 눈을 마주하며 어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깊디깊었던, 어린 소년치고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을 마주하면서.

‘네가 정말 어려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해.’

그때처럼 차분하고도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녀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겠어도, 지금만큼은 저 기저에 깔린 감정들을 캘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돋았다.

‘있지, 알렉.’

……생각이 흐트러진 만큼 단어들이 깨진 채로 솟아나고 있었다.

마음속 다양한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언성을 높였고, 세실리아는 그녀를 지탱하는 손을 다소 힘주어 맞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다리에도 힘을 주자, 힐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선명했다.

세실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굴려 그들을 쳐다보는 다른 시선들을 의식했다.

누구도 빠짐없이 전부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알렉시스가 아주 작게 속삭였고, 세실리아는 답하지 못하여 그저 웃었다.

이 춤이 끝난 이후엔…… 뤼셍의 직계는 제가 선택한 이의 가면을 벗겼다.

늘.

관습이었다.

그러니 이 춤이 끝나면 알렉시스 역시 그녀의 가면을 벗길 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영애는 그녀를 알아볼 터였다.

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내비치려나.

황족들의 어처구니없는 소동으로 넘길까, 아니면 그들 사이를 의심하며 몰아세우기 시작할까.

“얼굴을 온전히 감추시리라 믿었습니다.”

알렉시스가 잠깐의 침묵 끝에 덧붙여, 세실리아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윤곽 자체를 바꾸는 마법도 있으니까요.”

“네가 못 찾을 거라 안일하게 여긴 건 아니야.”

“그렇습니까?”

“응.”

넌 알렉시스 뤼셍이고, 넌 네가 원할 땐 언제나 이기니.

세실리아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뭐라 덧붙이려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침묵을 지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재밌지 아니한가.

그녀가 그의 곁에 온전히─안온하게─걱정 없이 서 있을 수 있는 건, 이렇게 무언가를 가렸을 때뿐이라는 게.

얼굴을 가리든 머리색을 가리든, 무언가 하나 숨기고 나서야 그녀는 알렉시스 뤼셍의 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새삼스럽네.’

세실리아는 눈을 한 차례 깜박이며, 그저 앞으로 닥쳐올 순간을 각오했다.

알렉시스가 그녀의 가면을 벗기고 세상에 진실을 드러낼 순간이 두렵긴 했다.

처음부터 각오해 왔으면서도, 감정은 어쩔 수가 없어서…….

‘하지만 견뎌야지.’

반드시 닥쳐올 미래니 견뎌야지.

지금껏 줄곧 알렉시스가 증명하고 다가왔다면, 이젠 그녀가 무언가 마땅히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실리아는 용기를 그러쥐며 제 손을 쥔 이를 올려다보았다.

청년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 * *

……세실리아 뤼셍의 예상대로, 알렉시스 뤼셍은 전부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제 눈앞에서 어룽거리는 가면을 지그시 응시했다.

‘네가 못 찾을 거라 안일하게 여긴 건 아니야.’

그녀가 작게 속삭인 말.

그가 그녀를 찾아내리라 믿었고, 그리하여 제 정체가 까발려진다는 사실을 각오했으면서도, 부러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래.

세실리아 뤼셍은 ‘각오’했다.

하지만 각오했다는 사람치고는…… 그의 손까지 미세한 경련이 노골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감정을 늘 숨기고 산 여인인지라 지금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알렉시스는 끝내 이를 사리물었다.

여자를 원했다.

오롯이 그녀 본인의 뜻으로 그의 곁에 머무르기를, 그리하여 그를 사랑해 주길 원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바뀌지 않았던 욕망.

그리고 기원.

기원은 기원이 되어 그를 이루었고, 알렉시스는 타들어 가는 갈망 속에서 말라 죽을지언정 가야 할 방향을 혼동하진 못하였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렇게 살 것이므로.

“아니에요.”

“응?”

세실리아가 혼란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당신의 각오를 원했던 게 아닙니다.”

알렉시스는 담담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필요하잖아.”

“이렇게는 아닙니다.”

이렇게 제단에 올라가는 희생양 꼴의 당신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

단두대 계단에 올라가는 모습의 당신을 보고자 함은 아니었다고.

어느새 음악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당황 섞인 시선 속에서, 알렉시스는 차분하게 결론 짓고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잠자코 화답한 세실리아는 경황이 없는 듯 우뚝 서 있기만 하여, 그가 천천히 다가갔다.

‘알렉.’

여자가 소리 없이, 입술로만 그의 이름을 뇌까린다.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내린 이 결정을, 이 찰나를, 평생 후회할 테지.

동시에 후회하지 않을 테고.

주변의 탄성과 웅성거림 속에서 알렉시스는 느리게 손을 뻗었다. 진주로 장식된 새하얀 가면을 기어이 벗겼을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암흑이 무도회장을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곳곳에서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무슨 일이야?”

“모두 진정하세요! 움직이지 마시고─”

“아악! 악! 악! 내 발!”

요란한 비명이 연거푸 귀청을 뚫었을 무렵, 무도회장에 불이 다시 들어와 영애들은 그제야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들과 덤덤한 낯으로 서 있는 황태자를.

소란스러웠던 직전과는 다르게 얼음장 같은 침묵이 휘몰아쳤다.

황태자 바로 옆의 여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경계와 긴장, 혼란 가득한 시선을 황태자에게로 던졌다.

하지만 그는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빈자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옆얼굴이 어째 쓸쓸해 보여, 뭐라 질문할 뻔한 영애들은 도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스산하게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알렉시스 뤼셍은 가만히 몸을 숙여 가면을 집어 들었다.

조잡한 가면이었는지, 어설프게 붙어 있던 진주들이 끝내 바닥으로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절대 울지 않는 여자의 눈물 같았다.

* * *

눈을 뜬 세실리아는 아주 익숙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뤼셍의 문장이 새겨진 돔이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가족끼리 조찬을 즐길 때마다 보던 풍경인지라 이곳이 어딘지 단박에 알 수밖에 없었다.

‘퐁레프의 유리 온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방금의 상황이 화폭처럼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느리게 다가오던 유려한 손가락. 가면을 벗기던 다정한 손길. 가면은 끝내 벗겨졌어도 그녀의 정체는 끝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가면을 벗겼던 것과는 다르게 알렉시스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지?’

내가 또 그 애를 아프게 했을까.

‘이번만은,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세실리아는 울컥하며 눈을 떴다.

어느샌가 나타난 금빛 나비가 눈앞에서 나풀거리다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아련한 자취를 쫓아보던 세실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정확히 온실의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선 도통 방문하질 않아, 보기만 하고 한 번도 누워본 적은 없던 소파에.

방금까지 베고 있던 푹신한 쿠션을 콕콕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미치겠다.”

세실리아는 엷은 탄식을 내뱉으며 주먹으로 쿠션을 내리쳤다.

‘각오했었는데.’

정말로, 온갖 용기를 다 긁어모아 각오했었는데.

그녀는 쿠션을 여러 차례 내려쳤다.

처절했던 각오가 허사로 돌아간 것에 대한 허탈함에. 뭔지 모를 허망함에.

그리고 처절하게 정신이 깨질 상황을 뒤로 미뤘다는…….

지금 느끼는 감정에 안도가 없다고 할 순 없어 스스로에게 환멸이 일었다.

‘분명 각오한 것 아니었냐고, 세실리아 뤼셍.’

그녀는 쿠션을 제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있는 힘껏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찰싹,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질 정도로 힘껏.

때마침 온실로 허둥지둥 들어서던 마리사가 흠칫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인기척에 돌아본 세실리아와 당황하여 굳은 마리사의 눈이 서로 부닥쳤다.

“……계속하렴?”

마리사는 상냥하게 제안했고.

“아악!”

세실리아는 쿠션 위로 머리를 박았다.

수치심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 *

마리사가 규칙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동안, 세실리아는 몸을 웅크린 채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릎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가련한 모양새였지만 마리사는 너그럽게도 지적하지 않았다.

“괜찮니?”

한참 만에 끄집어 올린 질문에 세실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알렉은요?”

“무도회장에서 아르망과 함께 수습하고 있겠지.”

영애들이 퍽 놀라긴 했다.

우왕좌왕하다 다들 얼어붙어 버리는 찰나를 마리사는 똑똑히 목격했다.

아들이 가면을 주워 올릴 때까지 그녀 역시 경직해 있었으니 영애들의 당황을 이해 못 하진 않았다.

“어떤가요?”

세실리아의 손이 동그랗게 말리고 있었다. 귀엽게 움켜쥔 주먹을 못 본 체하며 마리사는 답을 고민했다.

‘알렉시스가 어떻냐고?’

한 겨울밤 눈 내리듯 고요하고 차분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수롭잖은 표정과 여느 때처럼 느긋한 움직임은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무덤덤했었다.

동시에 마리사는, 그 가장된 평온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단 아들의 참을성을 더 믿었다.

‘속이 헤집어져 있겠지.’

그 헤진 속을 전부 참고 있을 테고.

그녀는 미간에 빗금을 그리며 최근 리베 아카데미에서 받은 보고서를 떠올렸다.

알렉시스 뤼셍은, 분명 올해 여름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겨울 끝자락까진 안전하다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녀석의 인내심은 여러 번 닳고 닳아 위험한 시기를 부쩍 앞당기고 있었다.

이젠 겨울 초입이려나. 잘 쳐 봐야 겨울 중후반?

“어머니?”

“세실, 너는 너 자신을 더 신경 써야 한단다.”

마리사는 늦지 않게 답해 주었다.

세실리아가 냉큼 일어나 앉으며 항의하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처럼의 반항기 가득한 낯에 마리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어머니.”

“응.”

“…….”

“알렉시스가 걱정 안 되는 건 아니야, 세실.”

마리사는 손을 뻗어 세실리아의 가슴팍에 여전히 달려 있던 브로치를 빼내었다.

갈색으로 물든 머리칼과 눈동자가 본디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금빛 눈이 돌아왔고…….

세실리아가 불현듯 고개를 떨궈 제 머리칼 색을 확인했다. 은빛을 목격한 순간 커다란 눈이 더욱 휑뎅그렁하게 커졌다.

휘영청 뜬 달처럼 어여쁜 빛깔.

만월의 가장 맑고 매혹적인 빛을 뽑아낸 듯한 색감에 마리사는 조용히 덧붙였다.

“예쁘구나.”

“…….”

“‘내 딸’은 원래 예뻤지만.”

세실리아가 황망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고개를 들지 않은 상태 그대로 침묵했다.

마리사는 손을 뻗어 결 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르망과 난 그저 너희 둘이 둘만의 매듭을 지을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을 뿐이야.”

“…….”

“그러는 이유는 너나 알렉 둘 중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참으로 묘하게 꼬이긴 했지.

마리사는 선선히 인정하며 입술 사이로 실없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너희 둘 다 너무나도 걱정되어서 그냥 지켜보는 거란다. 우리의 개입이 있다간 개운한 끝을 맞이하지 못할 테니까.”

“…….”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너희 둘이 끝내 둘 다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밖에 없어.”

“어려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세실.”

세실리아가 울상을 짓다 말고 다시 그녀의 무릎 위로 얼굴을 박았다.

마리사는 천천히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물들일 때마다 생각하지만, 검은색으로 감추기엔 지나치게 예쁘고 몽환적인 빛깔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 염색하는 대신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행복하길 바란단다’라는,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는 소원을 담아서.

세실리아가 이리 쭈뼛 저리 쭈뼛거리다 말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알렉은 절 이동시키지 말았어야 해요.”

마리사는 그저 침묵했다.

“방금이 사실 최선의 기회 아니었을까요?”

“그 아이에겐.”

하지만 세실리아에겐 아니지.

만약 밝혔더라면, 여론이 세실리아에게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연회에 정체를 숨기고 나타난 건 세실리아 본인의 결정이었다.

그러니 ‘세실리아 뤼셍’은 어쩌다 동생까지 홀린 요부가 아니라 동생을 홀리기 위해 ‘작정’한 요부가 되어버렸을 터.

무도회장에 심지어 제 발로 입장하였으니.

알렉시스가 여기까지 판단했을지 안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녀석은 예상대로 오롯이 세실리아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늘 그랬듯이.

제 심장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바보 같아요.”

세실리아가 속삭였고.

“바보 같을 수도.”

마리사는 긍정했다.

“하지만 그게 사랑이란다.”

딸아이에게선 더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 *

알렉시스 뤼셍이 유리 온실로 들어선 건 세실리아의 숨결이 잔잔해지고 난 뒤였다.

가면무도회를 준비하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운 탓인지, 아니면 극도의 긴장이 풀려 버린 탓인진 몰라도 세실리아는 결국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마리사는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들었다.

유유히 다가온 알렉시스가 눈으로 세실리아를 보듬는다.

“고생했어.”

소리 죽여 속삭이자, 알렉시스가 엷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재밌는 장난을 꾸미셨더군요.”

“놀랐니?”

“전부 갈색의 여인이었으니까요. 솔직히, 네.”

그 정도로 철저하게 꾸밀 줄은 몰랐다는 시인에 마리사는 피식 웃었다.

“세실리아만 숨겼더라면 넌 알아보았겠지.”

“그렇긴 했을 겁니다.”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녀석이니, 염색 마법도 당연히 알아볼 터.

염색하지 않은 수많은 여인 속에서 홀로 염색 마법을 쓴 여인은 단박에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리사는 부러 시험의 강도를 더 높였다.

그렇게 해도 아들이 단박에 통과하리라는 걸 믿어서.

지켜보는 세실리아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파동을 선물하길 바라는 마음에.

마리사는 물끄러미 딸아이를 그리고 다시 아들 녀석을 쳐다보았다.

아들 녀석은 어느새 몸을 숙이고 여인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조심조심 떼어주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니?”

제 남편이 퍽 자주 했을 법한 질문을 마리사 역시 끄집어냈다. 세실리아를 입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

알렉시스가 흐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올곧게 응시했다.

희미한 호선 뒤에 묻은 게 피로인지라 어머니의 마음이 어그러진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 않습니다.”

청년이 작게 뇌까렸다.

“할 수도 없고요.”

“그래. 그렇구나.”

질문 하나가 저물고 다른 질문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았다.

잘 되어 가고 있니, 라는 진심 섞인 걱정.

하지만 그 물음은 끝내 목소리로 구현되지 못했다.

길게 이어지는 적막 속에서 알렉시스가 잠든 이를 오래오래 쳐다보았으며, 마리사는 그 둘을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그녀는 온실을 떠나기 직전, 그들을 돌아보았다.

세실리아는 여전히 곤히 잠든 상태였다.

바로 곁에 앉은 알렉시스는 조심스레 굽어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여인의 얼굴 바로 위를 덧그리는 주제에 한 번도 접촉하진 않는다.

마리사는 잠자코 몸을 돌려 떠났다.

* * *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난 세실리아는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유리 온실은 여전히 어둠에 잠긴 채 밤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몇 시지?’

새벽이려나?

세실리아는 황망하게 눈을 깜박이다, 고개 숙여 제 머리 색을 확인했다.

여전히…….

“예쁜 색이지요.”

예상치 못한, 어쩌면 예상한 목소리에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에 들린 약연에선 똑같은 색깔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누님.”

알렉시스 뤼셍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대체 뭐라고, 세실리아는 황급히 몸을 물렸다.

‘자면서 추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겠지?’

코를 골거나, 이를 갈지는…….

설마.

입 주변을 더듬더듬 매만지며 확인해 보았다. 아무런 흔적도 느껴지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화장도 안 지운 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설마.

‘설마, 번지진 않았겠지?’

정신이 날아갈 듯 허둥거리자 알렉시스가 다시 엷게 웃었다.

“예뻐요.”

“……너, 헤퍼.”

세실리아의 비난에 그가 못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며 머리라도 어떻게든 정돈하려 노력했다.

안 그래도 긴 머리인 만큼 귀신 꼬락서니거나 까치집일 터다.

하지만 이리저리 휘적거리다 말고 끝내 손을 내려야 했다. 그녀를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을 버틸 수가 없어서였다.

쿠션에 등을 묻고선 표정을 가다듬는 동안, 남자는 약연을 피우며 계속 바라보았다.

긴장이 척추를 내달렸다.

차가움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보랏빛은, 평상시 온화한 것과는 달리 약연을 피울 때만큼은 서늘했다.

한기 띤 시선이 그녀를 위에서부터 찬찬히 뜯어본다.

저 짙디짙은 색채가 품고 있는 게 무엇인진 명확했다.

새까만, 어쩌면 새빨간 욕망.

그대로 씹어 삼키고 싶다는 다소 폭력적인 갈망.

은빛 연기와 함께 남자의 날 것 같은 속내가 배여 나온다.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향에 머리가 어질했어도, 끈질기게 시선을 마주했다.

은밀한 불꽃은 이젠 확연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래서 알렉시스가 약연을 피우는 모습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겠다.

한없이 난해한 남자가 해석하기 쉬워지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니.

그녀가 살짝 움찔할 때마다, 자세를 미미하게 고칠 때마다 차디찬 시선은 순간의 열기를 품고 달아올랐다.

숨마저 함부로 쉬면 안 되는 압박감에 온몸이 긴장된다.

호흡이 가빠져 세실리아는 결국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긁어모아 눈앞의 남자를 돌아본 찰나,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주르륵 끌려간 세실리아는 남자의 무릎 위에 반쯤 걸쳐 누운 상태로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래서 누님.”

손가락이 느릿하게 그녀의 복사뼈를 덧그렸다.

세실리아가 움찔하며 발을 물리려 했지만, 발목을 잡아채는 손아귀의 힘은 꽤 엄했다.

“증명은 되었습니까?”

“……처음부터 필요는 없었어.”

“글쎄, 필요하지 않았나요?”

어둠 속에서 약연의 끝이 어슴푸레하게 번득였다. 남자의 아래에서 흐트러진 채, 그녀는 연기의 자취를 쫓았다.

“오고 가는 사랑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결국 다 한 철이라고.”

그래…… 그랬었지.

그녀 입으로 직접 저런 말들을 내뱉었었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며 목덜미가 떨려왔지만, 자각하지 못했다. 집요하게 내려다보던 남자만이 알아보았을 뿐.

말없이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쥐었다. 지금만큼은 유순한 여자는 얼굴이 잡힌 상태에서도 가만히 있다.

‘입을 맞춰도 가만히 받아들이려나.’

어째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남자는 결국 욕망을 접었다.

겨우 입맞춤으론 만족 못 할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그는 느릿느릿 턱선을 따라 올라가, 귓불을 만지작거리고는 머리카락을 따라 쓸어내렸다.

여자는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은 채 손길을 계속 받아들였다.

파드득 떨리는 속눈썹과 갈고리처럼 곱아드는 손가락만이 속내를 까발린다.

턱이 풀려난 순간부터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싫다면.”

“…….”

“싫다고 하셔야죠.”

그는 느릿하게 머리칼 한 움큼을 잡아 쥐었다.

여자의 입술이 뭐라 말하려는 듯 달싹였지만 끝내 어떠한 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싫다는 대답도, 싫지 않다는 대답도,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는다.

영민한 여인은 가장 나은 답인 침묵을 택하여, 알렉시스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어여쁜 은빛 색깔이 그의 색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여인의 눈동자는 그를 다시금 똑바로 담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몸을 숙이지도 젖히지도 않은 채, 딱 적당한 거리에서 감상했다.

여자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줄곧 머리칼을 붙들던 손을 떼어내자, 세실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조금 더 똑바로 앉았다.

그는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올려다보았다.

감히 이 침묵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이 팽팽했다.

이윽고 세실리아가 먼저 침묵을 깨뜨리려 한다. 여인의 붉은 입술이 위험한 말을 쏟아내기 직전, 알렉시스는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생각 정리가 필요하실 테지요.”

금빛이 툭 떨궈졌다.

“기다리겠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다리를 조심조심 치우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머물렀다가는 정말 경을 칠 테니 피신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줄곧 눈에 담고만 있던 세실리아가, 그가 떠나기 직전 나직이 속삭였다.

“싫지 않았어.”

……영민하신 줄 알았더니.

“정말이야, 알렉.”

되레 영악하셨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어쩐지 비꼬는 식으로 들렸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기엔 그의 이성이 너무 위태로워서.

알렉시스는 급히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돌아보았다.

“갈아입으실 옷은 야자수 근처에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고마워.”

“좋은 밤 되십시오.”

“너도, 알렉.”

형식상의 인사를 건넨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 온실을 빠져나갔다.

* * *

남자가 떠난 모습을 지켜보던 세실리아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알렉시스가 물들여준 흑발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먹었다. 머리 끝부분을 쓰다듬다, 끝내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젠가 이 머리칼의 진실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아닌가. 굳이려나?

세실리아는 자세를 고쳐 앉다, 손가락 부근을 열심히 찔러대는 브로치를 찾아냈다.

자연스럽게 마리사와의 다과회가 떠오른다.

별실로 들어선 그녀는 잠깐의 잡담을 나눈 뒤, 오랜 습관대로 마리사의 앞에 앉았다.

마리사는 차분하게 빗질해 주며 더없이 평온하게 말을 건네었다.

‘브로치를 할 거면 그땐 염색을 풀어줄게. 마법이 이중으로 겹치면 모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염색.

그 단어를 마리사가 직접 꺼낸 건 처음이라, 세실리아는 멈칫하며 돌아보았었다.

그래서 볼 수 있었지.

어머니의 새하얀 손에 가득 잡힌 은빛 머리칼을.

알렉시스가 처음 보여주었을 때만큼이나 두 번째 역시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제 머리칼을 한참을 바라보았고, 마리사는 잠자코 빗질만 이으며 기다려주었다.

‘……네, 어머니. 감사합니다.’

한참 만에 답인사를 끄집어내자, 마리사가 온화하게 미소했다.

다정한 호선 때문일까.

질문들이 연기처럼 솟아오르며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제 친부모님을 아시나요?

제가 누구에게서 은발을 물려받았을까요?

본디 은발이었나요, 아니면 새버린 것일까요?

어떠한 질문이든 감히 내뱉을 수 없었다. 세실리아는 잠자코 눈매를 휘며 또 다른 진심을 건네었다.

‘언제나 너무 감사드려요, 어머니.’

‘사랑하는 딸인데, 기꺼이 해야지.’

짓고 있는 미소가 어설프지 않길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부디 입꼬리가 떨리지 않길.

눈도 환히 웃고 있기를.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별실을 떠나기 직전, 마리사는 다시 말해주었다.

‘사랑해, 딸.’

이라고.

그래서 세실리아는 환히 웃으며 화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어머니.’

그녀를 경애하는 마음엔 적어도 거짓 한 톨 없었으니.

세실리아는 브로치를 더 꽉 움켜쥐며 회상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새까만 빛으로 돌아온 머리칼을 쳐다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본디 은발이라는 사실을 드러낼지 안 낼지는 그녀도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었다.

만약 알렉시스와 그녀가 이어지려 한다면 ‘파양’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을 테니.

‘굳이, 머리 색깔까지 밝히는 건, 필요 없지, 않으려나…….’

아닌가.

“모르겠어.”

소리 내어 뇌까렸다.

머리 색을 숨기는 게 그녀의 이기심인지,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의 또 다른 형태인지도.

이게 알렉시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가시가 될지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단 하나.

‘더는 남자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싶지 않다는 것.’

그녀는 ‘각오’했었지만, 그 각오는 남자의 심장을 찢었다.

더는 그러면 안 된다.

더는.

세실리아는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로 잠깐 그 상태로 있다,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새벽이 늦어져 아침이 찾아오기 전에 온실을 떠나야 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복사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감촉이 제 존재감을 자랑했다.

남자가 어떻게 붙들었는지. 그가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았는지도.

세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야자수 쪽으로 걸어갔다.

* * *

황녀의 침실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다행히도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늦은 시각이니 당연했을 수도.

무도회에 참석했던 영애들도 전부 저택에 돌아갔을 시각이었다.

세실리아는 비밀 금고에 옷을 밀어 넣고선 자세를 반듯하게 폈다.

중간에 취한 잠이 깊었는지, 딱히 졸음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거울을 흘끗 응시했다.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반사적으로 구시렁거릴 수밖에.

그녀의 꼴은 퍽 귀신같은 형상이었다.

화장이 번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창백하다 못해 선득한 느낌까지 자아내고 있었다.

화장을 꼼꼼하게 지운 뒤─다행히 멀쩡한 낯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숄을 걸쳤다.

대연회장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텅 비어 버린 그랜드 홀이 반들반들한 바닥을 자랑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무도회가 파한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벌써 청소가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마법은 참 편리하기도 해.’

세실리아는 시답잖은 생각을 곱씹으며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문이 느릿하게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가장 먼저 괘종시계가 자리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기 저쯤에, 악사들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

‘그리고 바로 이 정반대 방향에서…….’

그녀는 영애들 틈 사이에 숨은 채 알렉시스를 몰래 훔쳐보았더랬다. 남자가 유유히 등장하는 풍경을 빠짐없이 구경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그 틈으로 구둣발이, 긴 다리가 그리고 맵시 있는 정장이 나타나는 모습을 눈 깜박하지 못하며 지켜보았었다.

천천히 발을 옮겨 바로 그 자리에 다가가 섰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되풀이되는 기분이었다.

연회의 주인공께선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본 뒤,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고…….

그녀에게로 걸어와 손을 뻗었다.

그녀를 알아볼 거라 믿었었다. 알아보지 않길 바랐는지 알아보길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알아보리라 믿었다.

그런데 정작 손이 뻗어왔을 땐.

‘왜 멍청하게 굳어버린 건지.’

수많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쳐다보고, 쳐다보다, 뒤늦게야 겨우 손을 맞잡았었다.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어주던 손길, 때마침 시작되던 연주와 그들에게로 쏟아지던 시선들.

세실리아는 기억을 더듬어 알렉시스와 춤추던 장소로 이동했다.

과거의 그들이 춤을 마무리하고 서로 마주 보았던 듯이, 그녀 역시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구나.’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매는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오묘한 눈빛이 전달하고자 했던 감정은…… 씁쓸함이었을까, 아니면 달콤함이었을까.

그 자리에 선 채로 아까의 일을 하염없이 복기했다.

비단 알렉시스가 온실에서 보여준 행동 때문이 아니더라도,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었다.

어젯밤이 남자에겐 꽤 큰 상처였다는 진실을.

‘왜?’

그 이유를 도저히 짐작하지 못하는 까닭은 정작 그녀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까?

세실리아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풀려 버린 다리를 가누어 자세를 고쳤고, 이어 무릎을 꼭 끌어안으며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앞에 있지 않은 남자에게 무언의 생각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원해?

난 네가 덜 아프길, 어떻게든 아프지 않길 바랐을 뿐인데.

‘나는, 나는 그저.’

가끔 그에게로 뛰어들어 가슴팍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가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알렉시스는 가만히 받아들여 주겠지. 얼마나 아프든, 얼마나 황당하든 간에 그는 분명 그럴 것이었다.

파묻었던 얼굴을 도로 들었다.

한 쌍의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환상으로 피어났다 스러지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여기서, 바로 이 자리서 그녀의 가면을 벗겼다.

‘만약 정말로 벗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으려나.’

각오를 굳힐 때까지 수십, 수백 번 곱씹었던 상상이 지겹게도 펼쳐지기 시작했다.

영애들은 분명 그녀를 알아보았을 터.

‘놀라워하다가, 그 뒤론 욕하든 비난하든 했을 테고.’

그 눈초리를 마주한 그녀는 어쩌면…….

세실리아는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리 갸웃, 저리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켰을 땐 금빛 시선은 명료해져 있었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던 처음과는 달리, 세실리아는 한결 단호해진 걸음으로 연회장을 나섰다.

* * *

여느 때의 아침처럼 칼리아는 비에라 백작 부인과 함께 황녀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만약 황녀께서 여전히 주무신다면, 오늘만은 늦잠을 눈감아주자고 둘이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여인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독서용 안경을 쓴 채로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오래전부터 깨어 있으신 듯했다.

설마.

“좋은 아침이야.”

세실리아가 손을 팔랑팔랑 흔든 순간, 둘은 동시에 합창했다.

“전하, 설마 설마 안 주무셨나요?”

“아예 안 주무신 건 아니죠?”

“아니야, 아니야. 조금 눈은 붙였어.”

하긴. 거의 일주일 가까이 밤을 지새우신 것치고는 멀쩡하게 작동하고 계셨다.

안경 아래에 숨겨진 눈 밑의 음영은 가릴 수는 없었지만.

세실리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싱긋 미소 지었다.

“너무 피곤해선지 중간에 깨버렸거든. 나중에 낮잠이나 잘까 고민 중이야.”

“아이고, 아이고, 너무 고생하셨죠. 행여 울 전하 얼굴 상하시면 안 되는데!”

비에라 백작 부인이 열을 뿜었고.

“맞아요! 절대 안 되는데! ……나중에라도 꼭꼭 수면을 챙기셔야 해요.”

칼리아는 재빠르게 맞장구쳤다.

차라리 일을 엎을지언정 황녀 전하의 미모는 항시 빛을 발해야 했다.

아무렴, 아무렴.

“그래, 그래.”

세실리아가 작게 키들거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인은 가장 먼저 독서용 안경을 스르륵 벗었다.

다음으론 은방울꽃 모양의 백금 책갈피를 집어 들고는 책장 사이에 곱게 끼워 넣었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금속 표면에 부딪혀 반들반들 부서졌다.

마지막으론 책장을 조심스레 덮으며, 황녀는 아침 독서를 마무리했다.

“먼저 아침을 먹을까? 다들 먹었어?”

“아직입니다.”

“영광입니다, 전하.”

설렁줄 쪽으로 다가가는 황녀의 발뒤꿈치가 유독 새하얬다. 나비처럼 사뿐사뿐한 걸음을 감상하며 칼리아는 눈을 반짝였다.

오늘 아침 식사는 유독 재밌어질 예감이었다.

* * *

세실리아 눈 밑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어둑해, 비에라 백작 부인은 식사 내내 잔소리를 열심히 쏟아부었다.

“잠이 안 오신다는 이유로 지새우시진 마시고요!”

“으응.”

“따듯한 우유 한 잔을 마시고 딱 주무셔야지요!”

“알았어.”

“밤늦게 쏘다니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

“또 산책하러 나가셨죠!”

“미안해.”

진심이 있는 듯 없는 듯한 대답이 이어져, 비에라 백작 부인은 결국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엄한 표정을 짓자마자 세실리아가 손으로 꽃받침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난 그래도 예쁘지 않아?”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속눈썹까지 팔랑거린다.

굉장히 유해한 모습에 칼리아는 제때 고개를 돌려 심장을 보호했고, 비에라 백작 부인만이 씩씩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예쁘니 보존을 하시란 말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세실리아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자마자 백작 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일그러진 표정에 가득한 감정이 황녀를 향한 애정임을 모르는 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웃을 수밖에.

“유모, 사랑해!”

“됐어요.”

“아이참, 화 풀어줘~.”

“멋대로 약혼하시려 들지 않나, 제가 얼마나 속이 터졌는지 정말.”

세실리아가 시무룩해진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고, 칼리아는 어색한 틈을 타서 재빠르게 개입했다.

“백작 부인, 얼른 화를 푸세요. 안 그럼 어제 이야기 안 들려드릴 거예요?”

“맞다, 어제 가면무도회 참석했었지?”

“그랬었지요.”

비에라 백작 부인이 얼른 이야기를 풀어놓으라는 듯 눈짓으로 재촉했고, 칼리아는 황녀와 백작 부인의 눈초리 속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브로치가 진짜 대단했어요.”

“황후 폐하께서 제작하시라 한 것 말이지?”

“네네, 체구만 다를 뿐 전부 다 똑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서……. 거기다 얼굴 윤곽을 흐릿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있었던 걸까요? 어쨌든 누가 누군지 도무지 못 모르겠더라고요.”

백작 부인이 감탄하는 눈길을 보내었고, 칼리아는 가볍게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누가 참석했는지 아마 황후 폐하와 황녀 전하 아니시면 아무도 모를걸요. 심지어 황태자 전하께서도 모르실 거예요.”

“거기서 ‘선택’이 이루어지면 정말 운명인데.”

“그렇죠? 특히 가면이 크면 턱선만 살짝 보이는데, 와, 저 진짜 누가 있었는지 몰랐어요.”

칼리아가 과장한다고 생각하는지 황녀께서 잠자코 웃었다.

“심지어 유라이언 후작 영애께서도 참석하셨다던데 저 무도회 끝날 때까지 몰라뵀다니까요? 그분이랑 함께한 다과회만 20번이 넘는데!”

부드럽고 안온한 미소를 향해 칼리아는 새삼스레 강조했다.

“진짜예요, 전하.”

“응응, 어머니께서 직접 제작 과정에 관여하셨는데 효과가 아주 확실했겠지. 그래서?”

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되살렸다.

황태자 전하께선 느릿느릿 무도회장으로 걸어 들어오셨지.

각인할 반려를 구하기 위한 무도회임을 알면서도 마냥 태평하셨다. 군주의 자세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풋풋한 설렘보다 농익은 여유가 가득하여 되레 더 관능적이었다.

‘그분 얼굴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퐁레프에 지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얼굴에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그런 탐미주의자들의 마음을 아주 흡족하게 만드는 외양이시지.

“놀랍게도 그분께서 누군가 결국 선택을 하시더라고요.”

“정말?”

“어머?”

세실리아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고, 비에라 백작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입까지 떡 벌리는 모습에 칼리아는 ‘그렇지? 놀랍지?’ 하는 낯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누구였는데?”

백작 부인이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질문했다.

“키가 큰데, 뼈대는 되게 가늘어서…… 확실히 되게 예쁜 영애였어요. 얼굴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근데 몸에서 묻어 나오는 분위기나 그런 게, 네.”

“…….”

“…….”

“그리고 본인도 자신이 미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칼리아는 담담히 추측을 내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둘이 똑같은 반응을 취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어머?”

세실리아가 내놓은 작은 탄식에.

“그걸 어떻게 알아?”

비에라 백작 부인이 신기하다는 듯 질문했다.

칼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에 설탕 하나를 톡 떨어뜨렸다. 아침에 따뜻한 차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단맛이 골고루 퍼지도록 찻숟가락으로 한 차례 저어준 뒤 한 모금 홀짝였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부드러운 맛.

음. 완벽해.

“미인 특유의 그런 자신감이 있어요.”

“…….”

“…….”

“약간, 보통 사람들은 잘생긴, 그것도 보통 잘생긴 게 아니라 눈 튀어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 곁에 가면 부담스러워하거든요.”

당장 그녀 본인만 해도 알렉시스 뤼셍의 곁에 머무르라고 하면 부담에 질식해 죽을 것이다.

설령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한들.

아니, 어쩌면 가면을 반드시 사수하려 최선을 다하겠지.

“하지만 예쁜 여자는 안 그래요.”

“그, 그래?”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무조건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이 절 선택했다?”

“…….”

“그럼 전 일단 다 뿌리치고 도망부터 갑니다. 뭔가 쪽팔린다고 해야 할까요.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주저앉고 보죠.”

“키리, 넌 너무 얼굴에 진심이야.”

세실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칼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전하, 전하께선 모르시겠지만 두 분 전하께선 그냥 곁에 있으면 되게, 음,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세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어…….”

“칭찬이죠, 당연히. 물론 황태자 전하보다 제 전하께서 훨씬 아름다우시지만.”

칼리아는 ‘훨씬’이라는 단어에 온갖 강세를 다 두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정말 흠칫할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지셨거든요. 전 그분이랑 단둘이 사진을 찍히느니 레니앙 공작 대부인의 잔소리를 200번 넘게 더 듣겠어요.”

“그, 그래?”

“대부인께서 ‘체통’이란 단어를 한 번만 더 사용하시면 전 진짜 골로 가, 아니, 어쨌든…… 결론으로 돌아가면 그 영애는 아무렇지 않았단 말이죠.”

칼리아는 만족스레 차를 더 들이켰다.

“그러니 미인일 겁니다.”

“신빙성이 있는 추론인지 없는 추론인지.”

세실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비에라 백작 부인께선 있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신 모양이었다.

차만 계속 홀짝이시는 걸 보니 ‘키가 크고 미인인’ 영애들의 목록을 추리시는 듯했다.

어젯밤 내내 칼리아가 했던 바로 그 행동이기도 했다.

“누구야?”

끝내 추리하질 못하겠는지, 부인께서 관자놀이 주변을 톡톡 치며 질문하셨다.

“몰라요.”

“으응?”

“그게, 황태자 전하께서 가면을 분명 벗기셨거든요. 근데 바로 다음 순간, 그 주인공께서 갑자기 홀연히 사라졌어요.”

“뭐라고?”

“응?”

찻잔 뒤 세실리아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고, 백작 부인의 눈이 황당함을 머금고 커졌다.

둘의 집중된 시선 속에서 칼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뭐가 어찌 된 건지를 잘 모르겠어요. 사실 어제 황태자 전하께서 마력 폭주를 일으키신 건 아닌가, 그렇게 걱정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멀쩡해 보이셨고.”

“…….”

“…….”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수습해 주셨어요. 영애께서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뭐, 황태자 전하께서 선택하신 만큼 황실이 알아서 쫓지 않을까요?”

반려가 될 가능성이 큰 영애이니, 당연히 그러하겠지.

뤼셍 직계의 각인이 제국의 중대사인 만큼 그저 그렇게 넘기진 않을 터였다.

칼리아는 코끝을 찡긋하며 설탕 또 한 개를 다시 차에 퐁당 떨어뜨렸다.

사실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긴 했다.

‘그 영애는 어떻게 사라질 수 있던 거지?’

퐁레프에선 뤼셍 직계의 마력만 통하지 않느냐고. 그렇담 황태자 전하께서 선택하신 그 영애를 데려간 사람은…….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또는 황태자 전하 본인.

‘대체 왜?’라고 생각하던 칼리아는 생각을 멈췄다.

황궁에서─특히 오래─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빠르면서도 없어야 하는 법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사태는, 높으신 분들의 심리를 파헤치지 않는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전하, 전하께선 뭔가 언질을 받으셨나요?”

“아니, 실은 나도 이런 결말일 줄 몰라서 당황스럽네.”

백작 부인의 질문에 세실리아가 맹한 낯으로 대답해 주었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때마다 황녀가 지어 보이시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세실리아 전하께서도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하지만 곧 황후 폐하와 만나시긴 하겠지.

어제의 그 영애를 최대한 빨리 추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다 같은 갈색 머리와 갈색 눈으로 염색한 상황이 이런 식의 결과를 불러올 줄 누가 예상했겠느냐만.

‘뭐, 굳이 황후 폐하와 황녀 전하께서 머리를 맞대지 않으시더라도…….’

주인공께서 직접 불을 끄시지 않을까.

“황태자 전하께서 어떻게든 해결하시겠죠.”

칼리아는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본인이 가장 급하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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