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아집과 신념 (2) (7/18)

* * *

방문객들이 떠나 잔잔해졌던 황녀의 응접실은, 오찬이 시작되기 직전 새로운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자신이 걸칠 숄의 색깔을 결정하던 세실리아는 새 방문을 알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딱히 일정은 없었을 텐데.

“누구니?”

“휴스턴 후작가의 블랑슈 휴스턴 후작 영애십니다.”

왜 왔는지 모를 수 없겠군.

적어도 이 방에서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눈은 전부 희망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들라 하렴.”

세실리아는 숄을 내려놓으며 방문을 허락했고.

“언니.”

곧이어 블랑슈가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피서 때도 느꼈지만, 블랑슈의 복장은 나날이 파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오늘의 옷은 레이스 소매를 자랑하는 연녹색 남성용 정장이었다.

‘저런 색으로 정장을 만들 수도 있구나.’

두 눈을 부릅뜨고 금방이라도 기절하려는 비에라 백작 부인과는 달리, 세실리아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어머, 블랑슈. 옷 너무 예쁘다.”

옷 색과 눈동자 색을 맞춘 걸까. 너무 예쁜데?

‘잘 어울리기도 하고.’

사교계에서 수많은 영애가 블랑슈에게 고백을 퍼부은 덴 다른 이유 없다니까.

‘저렇게 멋있는데 누가 고백을 안 해.’

아무렴, 아무렴.

쟌느 비에라 백작 부인이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세실리아는 적당히 못 본 체했다.

“감사합니다, 언니…… 휴스턴의 장녀 블랑슈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예 차리기엔 늦지 않았니?”

“늦더라도 차리는 게 안 차리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그렇긴 해.”

세실리아는 선선히 긍정하며 팔을 벌렸고, 블랑슈가 쏜살같이 달려와 품에 폭 안겼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진짜 인사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언니이.”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로 블랑슈가 작게 속닥거렸다.

“으응?”

“단둘이 점심 좀 먹읍시다.”

“지금 결투장 내미니?”

“반쯤 그 심정이에요.”

블랑슈에게 이야기를 흘린 범인이 누굴까.

알렉시스는 아닐 테고, 아무래도 어머니?

‘아님 키리?’

세실리아는 슬쩍 수석 시녀를 돌아보았다.

칼리아가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세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키들거렸다.

“키리, 오늘 후식으로 방울토마토를 먹는 거 어때?”

“……죄송합니다, 전하.”

칼리아가 냉큼 항복하며 사죄를 읊조린다.

“오늘 후식 메뉴는 크림 브륄레란 말이에요, 전하. 용서해 주세요.”

“그래, 그래. 크림 브륄레 두 개 먹도록.”

“사랑합니다.”

고백이 너무 쉬운 거 아니야, 키리?

세실리아는 다시금 짧은 웃음을 터뜨리다,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힘에 겨우 집중을 돌렸다.

블랑슈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관심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와 블랑슈는 오찬을 따로 할게. 양해해 줘……. 어디서 먹을래, 블랑슈?”

“다 괜찮습니다. 상관없어요.”

“그렇담 정원에서 먹자. 장미가 전부 지기 전에 여름을 즐겨야 마땅하지.”

“네, 언니.”

블랑슈의 대답을 이어 시녀들과 유모가 줄지어 인사했다.

맛있는 점심 드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정원에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등등.

세실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화답하고는 블랑슈를 한 차례 꼭 끌어안았다.

* * *

퐁레프의 정원사들은 여느 때처럼 심혈을 기울여 걸작을 꾸며놓았다.

그녀와 블랑슈가 앉아 있는 곳은 바로 노트르 정원.

계절마다 다양한 꽃들을 자랑하며 화폭 같은 풍광을 보여주는 퐁레프의 명소였다.

색색의 여름 장미가 멋들어진 자태를 자랑하며 시야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달짝지근한 향이 공기에 맴돌면서 향긋한 바람을 만들어 낸다.

저 장미들이 억새꽃과 코스모스, 그리고 다른 가을꽃들로 바뀔 날도 머지않았다.

블랑슈가 화병에 꽂힌 노란 장미를 톡톡 만지작거리는 동안, 세실리아는 잠자코 식전주를 홀짝였다.

“네가 가장 좋아하던 장미가 노란색이었지?”

“기억하시네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눈 대화잖니.”

“보통은 첫 만남이라 더욱 기억 못 하지 않나요?”

옳은 말이다. 첫인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니…….

하지만 블랑슈와의 만남은 어린 세실리아에게 여러모로 상당한 충격이었던지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잊기엔 어린 네가 너무 귀여웠어.”

“헉, 저도요. 잊어먹기엔 언니가 너무 예뻤어요. 지금도 아름다우시지만.”

“……황녀와의 만남을 잊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언니가 황녀가 아니더라도 기억했을걸요.”

“그래, 그래. 나 예쁜 건 나도 잘 안단다.”

세실리아는 작게 키들거리며 다시금 샴페인을 홀짝였다.

차와 꽃으로 유명한 롤랑 지방에서 새로이 개발한 술이라더니, 확실히 꽃향기가 가득했다.

입 안 가득 꽃을 머금은 기분.

세실리아는 더 마시려다 단호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잠을 적게 잔 여파인지, 아님 술의 도수가 생각보다 높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취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적당해 마셔야 추태를 안 보이겠지.

“블랑슈, 나도 네가 휴스턴 후작 영애나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기억했을 거야.”

“정말요?”

“응.”

태어난 날은 장미의 날. 팔뚝에 새겨진 건 장미의 문양.

살짝 달아오른 뺨의 넌 장미를 빚은 듯 너무 사랑스러웠거든.

그때 분홍색 장미꽃을 한 아름 건네받았더랬다. 그 꽃다발을 받으며 곱씹었던 감상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말 똑같다.’라고 생각했었지.

책 속의 여주인공 블랑슈와 실제 블랑슈 휴스턴은 너무너무 닮았었던지라…….

그때부터 그 ‘책’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을 들러 찾고, 찾고, 또 찾으면서.

이제는 알고 있다.

그 책 자체가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 어딘가에 자리한다는 진실을.

아무리 황궁 도서관을 뒤져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어쩌겠어.’

기억을 되찾는 시도 자체를 포기한 만큼 더 곱씹어 봤자 탈력감만 증폭될 뿐이다.

세실리아는 느리게 눈을 깜박여, 눈앞에 있는 장미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원사들에게 장미 꽃다발을 손질해 놓으라 이를 테니, 나중에 받아 가렴.”

“감사합니다……. 언니.”

“응, 왜?”

블랑슈가 용기를 긁어낸 듯 입술을 벌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모이를 기다리는 종달새 같아 못내 귀여웠다.

옷차림으론 파격을 고집하면서 성격으론 여전히 소심한 면을 보여주곤 한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길어지자 블랑슈의 얼굴이 수심에 잠겼다.

세실리아는 먼저 화제를 끄집어내어 도와줄까 하다가, 울먹울먹하는 표정이 사랑스러워 내버려 두었다.

‘아이가 울 걸 알면서도 장난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세실리아는 고개를 이리 까딱, 저리 까딱 기울이며 엷게 미소했다.

“언니─!”

“왜애.”

“왜 약혼하신다고 하셨어요?”

세실리아는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고, 다음 순간 블랑슈가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악, 망할 놈의 귀족식 화법!”

뤼셍의 사교계 예법상, 화제를 처음부터 끄집어내는 건 금물이었다.

어떻게든 빙빙 돌리다가 적당한 시점에서야 화두를 입에 올리지.

블랑슈가 테이블보를 거의 먹을 듯해, 세실리아는 혀를 끌끌 찼다.

“나와 있을 땐 괜찮지만, 블랑슈, 다른 영애들과 있을 땐 어떡할래? 휴스턴의 영애가 무례하다고 소문이 다 퍼지겠어.”

“그땐 입을 안 열죠.”

“그것참 과격한 해결법이구나.”

“그래도 알아서 대화가 잘 굴러가던데요?”

눈을 가늘게 떴다. 자못 엄격한 표정을 짓자, 블랑슈가 시무룩해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조심하라는 소리야.”

“네, 그럼 지금은 언니랑만 있으니까. 그래서 왜 약혼하신다고 하신 거예요?”

화제 돌리기 실패했군.

세실리아는 식전주를 마시지 않으려 노력하며 유리잔의 대를 매만졌다.

“……내 삶에 조금 변화를 주고 싶었단다. 그뿐이야.”

“그럼 옷차림을 바꿔보시는 건? 저처럼?”

“유모가 눈 뜨고 기절할걸.”

블랑슈가 상당히 진지한 음성으로 받아쳤다.

“지금도 눈 뜨고 기절한 심정이실 걸요, 백작 부인께선.”

“틀린 말은 아니구나.”

세실리아는 선선히 인정했다.

“조금 더, 뭐랄까, 확고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내 삶을 뒤틀고 싶었을 뿐이야.”

“…….”

“내 생각엔 그게 약혼이었고. 너도 알다시피 난 거의 퐁레프에 갇혀 살다시피 했잖니.”

생각해 보니 더더욱 그랬다.

부모님이나 알렉시스와 함께가 아니면, 생-뢰크의 시가지를 돌아다닌 적도 손에 꼽았다.

퐁레프 자체가 워낙 넓으니 지금껏 불만은 없었다만.

“갇혔다는 표현은 과격하니 수정할게. 어쨌든 예법도 조금 내려놓고, 그러고 싶었어.”

“언니는 어떤 직위를 가지든 예법은 철저히 지킬 것 같은데요.”

“아니야, 아니라고.”

블랑슈가 픽 웃더니 다시 골똘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 찰나 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고, 반강제적으로 침묵은 이어져야 했다.

물러나는 소년들에게 세실리아는 생긋 웃어주었다.

“고맙구나.”

“저, 희의 영광입니다, 전하.”

그들이 쑥스러운 얼굴로 물러나자마자 블랑슈가 냅킨을 펼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얼굴로 그렇게 웃어주면 반칙이에요, 언니. 어린 애들이 불쌍해졌잖아…….”

“얘가 뭐래?”

“잘 먹겠습니다아!”

오늘도 단순한 블랑슈는 호화스러운 요리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말하고 싶은 내용을 깜박하고 홀린 듯이 식탁 위를 쳐다보고 있어, 세실리아는 잽싸게 틈을 찾았다.

‘대화를 틀어봐야지.’

블랑슈에게까지 ‘약혼’을 주제로 달달 볶이고 싶지 않다고.

빵에 버터를 바르던 그녀는 문득 꽤 괜찮은 주제를 떠올려 냈다.

“블랑슈, 내가 입양되던 날, 기억하니?”

블랑슈가 입을 다문 채로 눈을 크게 떴고.

“너 오기 전에 프랑수아즈랑 니콜라가 다녀갔거든.”

“네네.”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내가 정확히 언제 입양되었는지가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맘때쯤 기억이 희미하단다.”

“언니가 입양된다고 기사가 나왔을 때요? 아니면 언니가 정말 입양되었다고 기사가 나왔을 때요?”

세실리아는 담담히 미소했다.

둘 다 알려달라는 무언의 답을 알아챈 블랑슈가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그, 뤼셍이 실제로 입양을 시도한 적이 없어서, 맨 처음에 입양된다고 기사가 떴을 때 모두가 뜬소문으로 취급했었을걸요.”

충분히 상상이 되는군.

“뤼셍에 그, 후계자가 없던 것도 아니니까요.”

“…….”

“그리고 3개월인가? 4개월인가? 지났을 때 실제로 입양했다고 기사가 떠서 좀 시끌벅적했었죠.”

정치적 잡음이 많았으리라 생각하긴 했다.

세실리아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뤼셍이 그녀 때문에 견뎠어야 할 손해를 가늠해 보았다.

나한테 사랑을 요구할 거면서, 왜 날 입양하고자 했을까.

……이 자리에 없는 남자한테 질문해 봤자 답이 들려올 리 없지.

익숙한 체념을 씹어 삼키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정확히 며칠인지는 기억해? 몇 월인지라도?”

블랑슈가 눈을 열심히 굴리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한 손에 포크를 든 채로 골몰히 회상에 잠겼다가, 답을 찾은 듯 예쁘게 눈을 반짝였다.

“언니가 실제로 입양되신 건 가을이에요! 그때 제 동생 자시─ 아니, 동생의 생일 전날이었거든요.”

“아, 그랬어?”

“걔가 자기 생일인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울었어요.”

블랑슈가 휴스턴 후작가의 장녀고, 그 아래론…… 남동생 둘이 있지.

실상 작위 계승 서열이 복잡해질 뻔했지만, 블랑슈가 마력을 발현하면서 둘째가 후계자 자리를 얻게 되었다.

“둘째? 아니면 막내?”

“둘째 놈이요.”

“휴스턴 소후작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렴.”

“전 못해요, 언니. 저 그때 박수 치며 걔 우는 모습 구경했거든요.”

어이구. 난처한 웃음만 머금을 수밖에.

세실리아가 조용히 미소 짓자, 블랑슈가 어쩌겠냐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그럼 블랑슈, 소후작의 생일이 언제니?”

“…….”

“…….”

“…….”

“블랑슈?”

“잠깐만요. 제가 쓸데없는 것들은 기억에서 지우는 성향이라.”

동생의 생일이 ‘쓸데없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세실리아는 현명하게 지적하지 않았고, 블랑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간 고민하더니 흔들리는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9월 15일이요.”

“확실해?”

“84.7%의 확률로요.”

“나머지 15.3%의 확률은…… 아냐, 네 말을 믿을게. 50%는 넘는구나.”

애초에 84.7%의 확률이 어떻게 계산되었는지가 궁금한걸.

의미 없이 내놓은 수일 것 같았지만, 블랑슈라면 어쩌면 진짜 계산해서 의미 있게 내놓은 수일 수도 있어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계산되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 네.

‘계산은 장부 처리할 때만 해도 충분하지.’

세실리아가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거린 순간, 블랑슈가 그녀의 동작을 오해했는지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다.

“이게 보통 남매 사이예요. 제가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래, 그래.”

“모두가 두 분 전하처럼─”

말이 툭 끊긴다.

다소 기묘한 정적을 만들어 내면서.

실리아는 불길함을 직감하며 포크를 고쳐 잡았고, 블랑슈가 약간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사이 좋지는, 않으, 니까요.”

“우리 블랑슈가 왜 말을 더듬을까?”

버터와 치즈를 뿌린 가재 요리를 소리 없이 써는 동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 썰고 한 조각을 포크로 쿡 찌르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블랑슈가 밀랍 같은 얼굴로 고요히 앉아 있었다.

“내가 너한테 화낸 적 있었니?”

“……아니요.”

“편히 말하렴.”

이미 난 최악을 각오했으니.

세실리아는 가재의 살과 함께 속내를 씹어 삼켰다. 부드러운 풍미가 입 안에 가득 퍼지며 혀를 달랜다.

“블랑슈, 음식 식겠다.”

얼른 먹으라고 신호하자 블랑슈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사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아신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세실리아는 또 누가 알고 있을지 열심히 고민을 해보았다.

‘칼리아는 모르는 눈치였고. 유모……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눈치는 어떨 땐 무던하면서도 또 어떨 땐 유령처럼 빨랐으니.

칼리아가 알렉시스 뤼셍을 잘 모르는 것과 달리, 쟌느 비에라는 알렉시스 뤼셍을 충분히 잘 알았다. 그래서 더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담 블랑슈는?’

블랑슈 휴스턴은 세실리아 뤼셍도 잘 알았으며, 어떤 면에선 세실리아 뤼셍이 알렉시스를 아는 것 이상으로 알렉시스 뤼셍을 잘 알았다.

아무리 그녀가 태생적으로 둔하고 눈치 없다고 한들…….

“그, 언니가 약혼하시려는 이유가…….”

블랑슈가 작게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 때문이신 것 같아서요.”

빙고.

세실리아는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말없이 샐러드에 소스를 뿌리는 동안에도 묵직하고 독한 침묵은 이어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 섞인 장미 향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천천히 시선을 들어 중앙의 노란 장미를, 그 너머의 블랑슈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잔잔히 웃으며 말을 건네자.

“언니는 왜 그렇게 웃어요……. 그 새끼가 나쁜 짓을 했을 리는…….”

“말조심.”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블랑슈가 이리저리 볼을 부풀리더니, 결국 한숨 내쉬며 항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셨어요?”

“…….”

“……언니, 음, 언니가, 답을 안 해주시면, 전 아무것도…….”

“고백했어.”

세실리아가 깔끔하게 인정하자, 블랑슈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확신과 함께 나타난 감정은, 분명…… 안타까움이다.

누구를 향한? 나, 아님 알렉?

“거절하신 거군요.”

“남매잖니. 입양되었을지라도.”

입양되었으니 괜찮지 않냐, 라는 망발을 지껄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입양 가정에 대한 모독이다.

아르망과 마리사는 그녀를 직접 낳지 않았을지언정 보호자로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아니지. 모독은 아니네.’

세실리아는 텁텁해진 뒷맛을 삼키고 싶어 기어이 식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꽃 향이 입 안에서 퍼져나가며 씁쓸함은 덜었지만…….

애초에 이 경우는, 입양 ‘가정’에 대한 모독이라 칭할 순 없겠다.

그러기엔 그녀는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을 부모님으로, 알렉시스 뤼셍을 남동생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은혜를 갚아야 하는 너무나도 감사한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했지.

‘모든 게 내 문제군.’

가족 행세를 하되 가족이 아닌. 진짜처럼 굴되 진짜가 아닌 가짜인.

언제나 세실리아 뤼셍이 문제였다.

이기적인, 받기만 하는 그녀가 문제였다.

“황태자 전하를 피하고 싶으셔서 약혼하시는 건…….”

블랑슈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어, 그러니까, 언니. 황태자 전하는 결코 언니가 싫어하는 짓은 못할 사람이에요.”

그래, 그 망할 새끼는 선을 건드린 적은 있어도 확 넘진 않았다.

“굳이 약혼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언니가 꼴도 보기 싫다고 하시면 전하께선 제국 순찰이라도 돌고 오실걸요.”

“그래, 그래.”

“정말로요.”

“나도 알아들었어. ……블랑슈, 너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블랑슈가 샐러드를 와앙 씹어 삼키는 동안 세실리아는 식전주를 계속 홀짝였다.

눌러놓았던 취기가 스멀거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술이 없이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연녹색 눈동자가 그녀의 손에 딱 꽂힌다.

그만 마시라 잔소리하는 대신 블랑슈는 덤덤히 답해 주었다.

“저는 마법사라서요.”

여름 바람이 불며 연갈색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느긋해진 햇볕 속에서 연녹색 눈동자가 여름 녹음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찬연한 빛 한가운데에 자리한 건 걱정, 수심, 미묘한 체념과 잔불 같은 희망.

“그래서 황태자 전하의 절박함을 더 이해합니다.”

“…….”

“물론 언니의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철저하게 ‘마법사’의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고 있으며, 아무래도 저희들은 사회 관념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니까요.”

블랑슈가 잠시 입을 다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생각해 보세요, 언니. 뤼셍 제국을 비롯한 현 세계 모든 나라는 즉결 처형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지요.”

“…….”

“하지만 마법사들만은, 여전히 즉결 처형 대상이죠.”

알고 있다.

광기에 물든 마법사가 특정수 이상의 피해자를 만들어 낼 경우, 몽테-페르트 마탑의 감시하에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

이런 법도 있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세계와 평범한 이들의 세계가 비슷한 듯 정말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되, 과연 실감하긴 했을까?’

취기 때문인지 고민 때문인지 두통이 일었다.

세실리아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블랑슈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전 그냥 두 분이, 뭐랄까,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시든 떨어져서 바라보기로 결정했었어요.”

블랑슈가 머쓱한 낯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물론 이번 ‘약혼’의 경우엔 언니가 조금 격해지신 듯해서 놀라 달려왔지만.”

“……그랬구나.”

“언니께서 약혼하시기로 고집하신다면, 막말로 두 분 폐하와 원인 제공 당사자 빼곤 누가 말리겠어요?”

“언제부터 눈치챘니?”

다소 대뜸 나온 질문이었지만, 블랑슈는 정확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예쁘기만 하던 얼굴에 신랄함이 내려앉았다.

“어─엄─청 오래전부터요. 아니, 언니. 어렸을 때부터 걔, 아니, 전하께선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뭐만 하면 언니 얘기만 했어요.”

“…….”

“못 알아채면 등신일 정도로.”

부아가 치미는지 붉은 입술을 연신 삐죽거린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나한테만 그랬네! 알아채라고 나한테 시위했어, 망할!”

“저런.”

“언니, 근데 괜찮아요?”

“어…….”

사실, 안 괜찮은 것 같아.

블랑슈가 황급하게 손을 뻗기 직전, 세실리아는 앉은 채로 휘청이며 이마를 짚었다.

‘식전주 역시 너무 많이 마셨나?’

취기가 완전히 올라오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 *

“제가 취하게 만든 거 아니에요.”

유유히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블랑슈는 재빠르게 변명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안 물어봤는데 왜 말 거냐’는 기색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보통 때라면 욱했겠지만, 이번만은 그 눈빛을 잠자코 마주했다.

“얼굴 많이 상하셨네요.”

곱게 그린 듯한 검은색 눈썹이 삐딱하게 들렸고.

“언니…… 그래도 전하 얼굴 좋아하시니까 관리하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블랑슈는 대담하게 조언을 건네었다.

침묵 속에서 시선이 짙어졌다.

어색함을 참아내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맹렬하게 무언가를 먹어댈 수밖에 없었다.

가재 요리도, 빵도, 샐러드도, 미리 준비된 케이크도 한 입씩 먹어 치운 찰나였다.

“……넌 누님 편을 들어야지.”

한참 만에 나온 말이 그거라, 블랑슈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껏 편들어 줬더니 하는 말이 저거라니.

뭐, 딱 ‘알렉시스 뤼셍’다운 말이라 전혀 놀랍지 않긴 했다.

“언니 울리지 마세요.”

“글쎄.”

블랑슈의 눈초리가 뾰족해지든 말든, 남자는 느리게 중얼거렸다.

“원체 쌓아두고만 사는 사람이라.”

언젠간 터뜨려야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울지 않고 사는 사람은 웃을 수도 없을 테니.

“그럼 잘 돌아가라, 블랑슈 휴스턴.”

“행운을 빌어요, 전하.”

두 악우는 처음으로 원만하게 헤어졌다.

* * *

알렉시스 뤼셍은 취한 여인을 안아 든 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누이의 술버릇에 대해서 모르기엔 그는 이미 마탑에서 몇 통의 편지를 받았었다.

얌전히 잠들었던 여자가 불현듯 눈을 번쩍 떴다.

“알렉.”

뜨거운 이마가 그의 가슴팍을 짓누른다. 풍성한 속눈썹이 의문을 품고 깜빡이는 걸 마주하며 알렉시스는 천천히 대답했다.

“왜 불러요, 주정뱅이.”

“나 주정뱅이 아닌데?”

“그래요, 주정뱅이가 꼭 그런 말을 하더라.”

“나─빠─”

세실리아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이번엔 손을 더 높이 들어 그의 뺨을 콱 꼬집었다.

알렉시스는 이대로 방에 데려다줄까 고민하다 말없이 발을 돌렸다.

시녀들에게 추태를 보였다며 세실리아가 두고두고 울먹일 미래가 보여서.

‘……어쩌겠나.’

숨겨줘야지. 사실 혼자서만 보고 싶다는 독점욕이 기저에 없다 하면 거짓말이리라.

“부드러워.”

사람 뺨이니까.

“근데 잘 안 잡혀.”

볼살이 없는 편이라서.

알렉시스는 제 불쌍한 뺨을 구출하기보단, 술 취한 이가 갖고 놀도록 허락해 주었다.

가냘픈 손가락이 이번엔 그의 목과 그 주변을 더듬거렸다.

‘편지에서 들은 주사와는 확실히 다른데.’

술 취한 채 다른 새끼 몸을 만지작거렸다는 내용이 있었다면 마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왔겠지만…….

‘실제’가 눈앞에 있으니 주사가 이렇게 바뀌는 건가.

알렉시스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런 꼴로 계속 돌아다니다간 누군가가 분명 목격할 터.

그리고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그는 퐁레프 안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직계였다.

이동 마법을 써 그의 침실로 자리를 옮기자, 세실리아가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이 녹았어.”

“이동했습니다.”

“아냐. 순간 세상이 녹았어.”

“그래요. 그런 거로 합시다.”

손을 다시 까딱여 침실 문을 잠갔다.

주정뱅이를 조심스레 소파에 앉히자, 자신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도 모르고 세실리아가 말갛게 웃었다.

“왜 웃어요?”

“얼굴 내려봐, 알렉.”

여자에게선 꽃향기가 풀풀 났다. 입 안 가득 고이는 침을 느리게 삼키며 알렉시스는 가만히 얼굴을 내려주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두 뺨이 손에 잡히는 결말을 예상했으면서도.

맨 처음엔 입술이 삐죽 튀어나올 정도로 우악스럽게 눌렀던 주제에, 세실리아는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감탄 가득한 눈으로 요리조리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키도 커졌고 잘생겨졌어. 아, 원래 잘생겼었나?”

“그래서 좋아요?”

“아아니. 동생이 멋져 봤자 쓸데없지!”

“좋다는 소리네.”

“응.”

알렉시스는 결국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휘었고, 취한 이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 끝부분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좋아.”

“그래요?”

블랑슈 휴스턴이 얼굴 관리하라더니.

알렉시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황금빛 눈이 느리게 깜박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맞다, 알렉. 나 부탁이 있어.”

“무엇이죠?”

“편지 답장 보내줘…….”

커다란 눈에 울상이 가득 깃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던 알렉시스는 그의 입술을 찰싹 때리는 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손버릇이 험하시네.’

그가 잠자코 충격을 소화하는 동안, 주정뱅이는 제멋대로 알아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아, 마탑 때문에 못 보내지…….”

“내가 그리웠어요?”

“응. 그럼 안 그리웠겠냐!”

“그 말투도 오랜만이군요.”

세실리아가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여인의 위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알렉시스는 제때 손을 뻗어 소파를 짚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자, 주정뱅이께선 그에 또 삐치신 모양이다. 여인이 앵돌아진 표정을 짓더니.

“알렉.”

그의 목에 팔을 휘감고선 끌어당긴다.

끌려가지 않으려 팔뚝에 힘을 주어 버텼다. 소파를 짚은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힘줄이 도드라졌다.

미치겠군, 하고 작게 탄식한 찰나.

옅은 숨이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그 안에 가득한 알딸딸한 향에 그의 정신까지 위태로웠다.

금방 무너져내릴 듯 약해지는 인내심에 이를 까득 갈 수밖에.

오묘하게 맑은, 동시에 혼몽하기도 한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담고 있었다.

“눈 예뻐…….”

“…….”

“나 보라색 좋아하는데.”

“참아요. 뽑아드릴 순 없으니까.”

“안 되는 거야? ……나 가질 수 없어?”

이거 위험한 분일세.

알렉시스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쪽 손을 소파에서 떼어냈다. 검지로 이마를 살살 밀자 세실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왜 그래!”

“잠이나 자요. 깨어나서 머리 뜯지 말고.”

“안 버둥거려. 나 애 아니야!”

“애는 아니지만 주정뱅이긴 하지. 그러니까 제발 잠이나 자.”

“베개가 없어. 내 베개…… 내 베개!”

알렉시스는 한숨을 쉬며 침대로 걸어가 베개 한 개를 건네주었다. 냉큼 끌어안은 세실리아가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베개가 하나밖에 없어…….”

가지가지 한다 진짜.

알렉시스는 주정뱅이를 위해 하나를 더 제물로 바쳤고, 세실리아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이제 두우우 개 됐어!”

V자를 그리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애?”

“……또 드릴까요?”

“또 있어?”

“…….”

“주─세─요.”

술 취한 이는 베개를 다섯 개 끌어안고 나서야 만족하고는, 편안하게 뻗어 잠이 들었다.

가히 탐욕스러운 주사였다.

세실리아가 눈을 떴을 때, 알렉시스는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선지 방엔 작은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에 개의치 않는지, 그는 독서용 안경을 쓴 채로 종이를 조용히 넘겼다.

그러다 문득 기척을 감지했는지, 천천히 시선을 든다.

세실리아는 한쪽 뺨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말없이 눈빛을 받아들였다.

술 취한 그녀가 너무나도 갖고 싶어 했던 보랏빛.

어둠에 젖은 그 색은 더 예쁘면 예뻐졌지 덜 예쁘진 않았다.

“몸은 어떠신가요?”

“……괜찮아. 숙취는 없는 편이라.”

알렉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이렇게 태평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블랑슈랑 난 정원에 있었는데.”

“누님께서 취하셨습니다.”

“응. 그건 기억나.”

“그래서 제가 데려왔고요.”

“네 방으로?”

알렉시스는 빙긋 미소 지었고, 세실리아는 길게 날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알렉시스 뤼셍은, 선을 깔짝거릴지언정 절대로 넘지 않는 남자였으니.

‘차라리 선을 휙 넘어버린다면 가차 없이 미워했을 텐데.’

그가 그녀에게 다정하다며 원망하듯이, 그녀 역시 그에게 차라리 못되게 굴어달라 애원하고 싶은 판국이었다.

‘시궁창이군.’

세실리아는 깔끔하게 요약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뺨에 눌린 자국이 남았을 것 같아 조금은 수치스러웠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내가 술 취한 상태에서 뭔갈 했다면…… 사과할게.”

보랏빛 눈이 가늘어진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암시하는 의미─‘술 취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의 진위를 의심하는 시선.

세실리아는 천진한 낯을 꾸며내었고, 알렉시스는 턱을 괸 채로 가만히 관찰했다.

연기는 자신 있으니 들킬 리…….

“속아드릴까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의 베개를 주섬주섬 치울 수밖에.

“……부탁할게.”

“그래요, 그럼. 사과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눈치챘담?

세실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머리를 다시 가다듬었다.

알렉시스가 말없이 서류를 치우고선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세실리아는 움츠러드는 대신 덤덤히 올려다보았다.

그가 소파 뒤로 돌아가, 손을 뻗어 머리 정돈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머릿결 사이로 느껴지는 길고 유려한 손가락. 담백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동작.

“숱이 워낙 많으셔서…… 가끔은 무겁겠네요.”

“가끔이 아니라 ‘언제나’지. 티아라까지 쓰면 더 무거워져서, 어떨 때는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해봤었어.”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뒷덜미 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통증 때문인지 접촉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말아쥐어야 했다.

알렉시스가 다른 곳도 두어 번 누르더니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의 손에 들렸던 머리카락이 제 무게를 되찾았다.

천천히 때, 알렉시스는 어느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계단 쪽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세실리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리퍼를 찾아 꿰어 신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집요한 시선이 붙었지만, 이번만은 올곧게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좋은 하루 보내렴, 알렉.”

“누님께서도.”

“……오늘, 전부, 고마워.”

“어젯밤을 갚는 것뿐입니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남자와 그의 침실이 사라졌다.

황궁 계단에 홀로 서 있었다.

보는 눈이 없는지 재차 확인한 뒤, 세실리아는 떨리는 손을 들어 난간 위에 얹었다.

머리칼과 목덜미엔 접촉의 감각이 질기게 남아 있었다.

코끝에도.

하필 베고 잤던 베개가 그의 것인지라, 특유의 체향이 머릿속에 각인될 듯 강하게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발을 움직여 계단을 올라갔다.

모든 걸 밀어내고 싶었다.

* * *

원래 소문은 빠르게 도는 법이다. 퐁레프 관련 소문은 더욱 빠르게 돌았고.

거기다 호사가들의 기본 특징이 ‘눈치’인지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생-뢰크는 새로운 이야기를 수군거렸다.

‘황녀가 약혼을 한다네!’

누가 그 말을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전부 난리가 났다.

‘제국 전체에게서 사랑받는 황실의 꽃이 약혼을 한다니!’

누가 그 빌어먹을 도둑—축복받은 놈—이 될 것인가, 언제 약혼식이 열릴 것인가.

누이를 지극히 아끼는 황태자의 반응은 어땠더라, 황제와 황후 폐하께서는…….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결혼이 더 급하지 않나?’

누군가는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하기도 했고.

‘그래도 순서대로 보내야지, 순서대로.’

또 누군가는 합리적인 답을 내놓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들이 전부 동의하는 점은 하나였다. 아름답고 부유한 데다 심지어 황녀인 여자와 결혼한다니, 그 상대는 역대 최고의 행운아임이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더 열정적인 호사가들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미혼 영식들의 목록을 들추며 누가 물망에 오를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뤼에 백작 영식이 유력하지 않나?’

‘둘째? 아, 둘째가 외모는 괜찮았지. 확실히 황녀 전하와 나란히 서면 눈이 호강하겠구먼.’

‘샤를 그뤼에? 후계자 자리에 야심 있지 않았나.’

‘그러니 더욱 전하와의 결혼을 꿈꿀 수도.’

‘아냐, 내 생각에는 르텔 백작 영식이 더 가능성 있어 보이네.’

그들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그 가벼운 추측들이 어떤 결말을 내놓을지는.

블랑슈 휴스턴이 다녀간 지 이틀째 되던 아침, 세실리아 뤼셍은 새로운 방문객을 맞이했다.

“전하, 그뤼에 백작가의 샤를 그뤼에 백작 영식께서 방문을 요청하십니다.”

장부를 확인하고 있던 세실리아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샤를 그뤼에’라…….

모르는 이는 당연히 아니다.

바네사 그뤼에 백작 영애와는 다과회도 여러 번 가졌으며, 가끔은 오페라 극장에서도 마주치곤 했었으니.

‘무도회에서 봤었나?’

바네사 영애를 에스코트해 준 이였을까?

아니지, 그 사람은 그뤼에 소백작, 샤를의 형이었다.

‘무도회에서도 거의 본 적 없다는 소리인데.’

펜을 내려놓으며 엷게 웃었다.

그녀와의 만남을 거의 갖지 않았던 이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칼리아에게 흘끔 시선을 던지자, 미간이 적나라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거절하세요, 전하.”

날 선 목소리. 단호하면서도 깔끔한 조언에 세실리아는 펜을 까딱였다.

“나는 아직 내 약혼자를 고른 적이 없는데…….”

“무례한 치입니다.”

“내 부모님께서도 아직이실 텐데. 사교계에서 떠들고 있는 걸까?”

시녀들을 찬찬히 둘러보자, 그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한꺼번에 쏟아내었다.

“샤를 그뤼에 백작 영식이 강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긴 합니다.”

“르펠 백작 영식도 꼽혔어요.”

“뷰디어 소남작도 있습니다.”

“어머, 리나의 오빠 말이지?”

세실리아가 엷게 웃으며 반문하자, 칼리아가 손으로 큰 X자를 그렸다.

“안 됩니다, 전하!”

“그래, 그래.”

“리나의 혈육이니 나쁜 이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성심껏 고려하셔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알았다니까.”

세실리아는 손을 휘저어 모든 잔소리를 끊어냈다.

방문객을 보고한 시종이 여전히 난처한 얼굴로 서 있어,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쪼르르 달려온 소년에게 초콜릿을 하나 안겨준 뒤 질문했다.

“그대로 돌아갈 눈치더니?”

“……외람되오나 계속 기다릴 눈치였습니다.”

“그렇구나. 놀랍지 않네.”

그 영식의 성격을 고려하면 말이지. 세실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모름지기 귀족 가문의 아들 중 맏이가 아닌 이들은 ‘결혼’을 잘해야 하는 법이었다.

딸들이야 가문의 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막대한 지참금을 얻을 수 있었고, 장자는 장자대로 작위와 재산 대부분을 상속받는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그들은─새로운 진로를 찾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통해 살길을 찾아야 했다. 사교계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으면서.

사교계를 관리하는 세실리아 뤼셍이 샤를 그뤼에의 얼굴을 모른다는 건…….

‘영식이 사교계 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둘째인데, 그것도 결혼이 중요한 둘째인데, 사교계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건 무엇을 암시하냐고?

그는 형을 제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렇게 후계자의 자리를 거머쥐기를.

세실리아는 시종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네었다.

“널 곤란하게 만들 순 없지. 가서 들어오라 하렴.”

“전하.”

칼리아가 깜짝 놀라 부르는 목소리. 세실리아는 천천히 독서용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키리. 자격 없는 자에게 황금을 내어줄 생각 따윈 더더욱 없어.”

“…….”

“마땅한 욕심인지 과한 탐욕인지 궁금해서 부르는 거야.”

“후자에 걸겠습니다.”

칼리아가 딱 잘라 대답했고, 세실리아는 키득거리며 서류들을 전부 치웠다.

확실히.

황녀가 약혼자 후보를 추리기도 전에 달려오는 행동은 어리석으면 어리석었지 현명하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발을 옮겨 중앙의 소파에 앉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등장한 샤를 그뤼에는, 일단 호남형이긴 했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외모에 적당히 큰 체격, 맵시 있는 옷차림과 부담스럽지 않은 예절까지.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청년을 관찰하며 세실리아는 눈을 잠깐 가늘게 떴다.

“뤼셍의 별을 뵙습니다.”

“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어, 그뤼에 백작 영식.”

“만나주셔서 영광입니다. 허락해 주실 줄 몰랐었거든요.”

“글쎄, 거절하면 콜린이 애먹을 듯해서.”

그녀는 눈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콜린이 문을 지키는 시종이라는 암시를 알아차렸는지, 백작 영식이 어설픈 웃음을 머금었다.

“그 정도 노력이 없으면 만나 뵐 수 없을 것 같아서……. 과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을 당사자가 난 아니지 않을까.”

샤를 그뤼에가 뭐라 더 반문하기 전, 세실리아는 손짓으로 침묵시켰다.

“콜린에게 사과는 나중에 나가면서 하도록. 어쨌든, 이렇게 갑자기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

“잠시 주변을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칼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으며 다른 이들의 얼굴은 새파랗거나 새빨갰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질문하는 걸까?’

세실리아는 손끝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맞은편 남자를 뜯어보았다.

말간 낯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으며, 시선은 꽤 진중하고도 묵직했다.

‘그리고 저건 가면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략을 꾸미는 연기.

“내 방에, 영식과 내가, 단둘이 있게 해달라고?”

“긴급 사항이라…….”

“내 시녀들은 입이 무거워야 할 때와 무겁지 않아도 될 때를 잘 구분하는 이들인데.”

“위험 부담이 없길 희망합니다.”

“샤를 그뤼에 백작 영식.”

세실리아는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대는, 내가 추문을 감당할 만큼 궁금한 이가 아니야.”

“궁금해하셔야 합니다. 전하를 입양하기 위해 뤼셍은 많은 부담을 졌으며, 전하의 결혼을 위해 또 다른 부담을 질 테니까요.”

“…….”

“저한텐 그 모든 걸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이 있습니다.”

시녀들의 숨소리는 이제 경악을 넘어선 격노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잠자코 무릎을 계속 톡톡 두드렸다.

‘저치는 무슨 생각일까?’

누군가에게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면, 그 누군가의 눈에 잘 보이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나?

적어도 밉보이려 들진 않을 텐데.

하지만 샤를 그뤼에는, 자신이 내뱉는 모든 말에 진심을 담고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지? 뭘 믿고 저러는 거람?

‘……아니, 정말 대체 뭐가 잘났다고?’

알렉시스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그녀의 눈이 지나치게 높아진 걸까?

“전하, 믿어주십시오.”

세실리아는 맞은편 청년의 자세를 눈여겨보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 자상함은 무슨, 자격 없는 교만이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이들은 여럿 보았지만…….’

그들은 귀엽기라도 했지. 저 무뢰배는.

이거 원, 귀엽게 봐줄 수도 없는걸.

“두 분 폐하께 더는 부담을 주실 순 없으시잖습니까.”

그녀의 아픈 부분을 찔러서 더 짜증 나는 것일까.

세실리아는 손끝으로 무릎만 계속 두드렸고, 샤를 그뤼에는 계속 설득—제 딴엔 설득이다—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즉위 직전 정치적 부담을─”

“이런, 나도 모르는 충신이 여기 있었네.”

샤를 그뤼에가 펄쩍 뛴 것과는 달리, 세실리아는 무료한 낯으로 쳐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네게 들어오라고 했었니?”

“제게 허락이 필요했습니까?”

그건 아니긴 했다.

퐁레프의 다음 주인께서 허락이 필요할 리가…… 가 아니라 허락이 필요하긴 하지.

‘내가 방주인이잖아!’

세실리아가 속으로 씩씩대든 말든 알렉시스는 태평하게 소파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그뤼에 백작 영식께선, 아까와는 달리 굉장히 긴장하기 시작하셨다.

꼴사납네.

“도로 나갈까요, 누님?”

“아냐, 괜찮아. 네 말대로 허락이 필요한 사이는 아니지.”

세실리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확실히, 침대까지 내어 준 주제에 이제 와 허락 운운하는 것도 웃기긴 해.’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당사자가 나타났네.”

“…….”

“그뤼에 백작 영식, 영식의 주장에 대해서 내 동생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까?”

아둔한 이의 얼굴이 새파래지든 말든, 세실리아는 알렉시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틀 만에 다시 보는 이를.

그의 침실에서 볼 때만 해도 얼굴이 약간 까칠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어째선지 극상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온 힘을 기울여 가꾸고 가꾼 걸까?’

저 수려한 외모에 분명 익숙해졌다고 믿었거늘……. 신뢰가 모조리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잠깐 시선을 떼었다가 다시 쳐다보았다. 또다시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네 번 시선을 돌렸다가 쳐다봐도, 빌어먹게도 매번 정말 살벌하게도 잘생겼다.

비속어 섞인 탄식이 저절로 나올 만큼.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있던 알렉시스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하필 자세가 비슷해서일까.

술에서 깨어나자마자 본 모습이 떠올랐다. 안경을 쓰고 서류에 집중하던 그 자태가.

어둠 속에서도 오묘한 빛으로 반짝이던 눈, 열심히 집중하던 표정,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그에 들려 있던 만년필까지.

알렉시스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느릿느릿 기울였다.

때마침 햇빛이 얼굴 위로 드리우며, 안 그래도 조각 같은 외모에 몽환적인 음영을 선물했다.

‘망할.’

시야가 밝아졌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왜 쟤는 멋대로 남의 눈을 높여놔서.

“어떤 주장입니까?”

덤덤하고도 차분한 질문.

알렉시스가 손을 까딱였을 뿐인데 괜스레 그녀의 머리칼 끝이 쭈뼛했다.

저 손가락이 어떻게 그녀의 머리를 만졌는지, 뒷덜미를 눌렀는지 감촉이 전부 살아나 버려서.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츠렸다.

때마침 무뢰배가 멋대로 입을 열며 처음으로 도움을 내준다.

“황태자 전하. 제가 드리려던 말은─”

“내가 영식에게 질문했었나?”

관조하는 이까지 움찔하게 되는 서늘한 일갈.

“입 다물어.”

그뤼에 백작 영식이 말문을 잃은 사이, 세실리아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러니까, 알렉. 지금 그뤼에 백작 영식이 뭐라─”

“전하, 제가 방금 어휘 몇몇을 잘못 선택하였습니다.”

샤를 그뤼에가 서둘러 말을 쏟아낸 순간.

아까보다 훨씬 살벌해진 공기가 백작 영식의 목을 틀어쥔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분위기.

멍청한 남자를 향한 시선들에 차갑고 서늘한 날이 깃들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세실리아는 천천히 등을 젖혀 소파에 기대었다.

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알렉시스 쪽을 흘끗 바라보자, 그가 잠자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껏 해보라는 뜻.

“전…… 하……?”

샤를 그뤼에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고.

“이게 어디서 내 말을 끊어?”

세실리아는 한숨 섞어 쏘아붙였다.

이어지는 꽤 오랜 침묵.

다른 이들은 속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알렉시스는 마냥 평온한 표정이었다─그녀 홀로 미약한 자괴감과 환멸에 휩싸여 있었다.

이렇게 권력으로 누군가를 깔아뭉개는 건 언제나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저 남자가 자격 없는 교만이라면 그녀는 자격 없는 권위였다.

리빌 남작 영애를 상대할 때의 창백한 햇빛이 되살아난 느낌이라,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녀를 향한 알렉시스의 눈길이 한층 짙어져 있다.

마음속 고뇌를 전부 꿰뚫는 시선에 세실리아는 고개 돌려 외면했다.

그 와중에도 샤를 그뤼에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녀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영식.”

“……그, 전하. 전 무례를, 저지르려는 의도가─”

“그게 아니지.”

세실리아가 한 차례 긴 한숨을 내쉬자, 샤를 그뤼에가 드디어 눈치를 챙겼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저지른 모든 무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만─”

샤를 그뤼에가 당황한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며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세실리아가 그런 추태를 담담하게 지켜보는 동안,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튕겨 오른 알렉시스가 날렵하게 그뤼에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사냥감을 향해 쇄도하는 매처럼 정확하고도 유려한 동작이었다.

“황녀에게 감히 신체적 위해를 가할 생각은 아니었겠지, 영식?”

담담한 어조였지만 속는 이 없으리라.

그 안에 가득한 건 매섭고도 사나운 추궁이니.

“아, 아, 아닙니다! 그건 맹세코 아닙니다! 전, 그, 그저─”

“그뤼에 백작 영식.”

알렉시스에게 놓아주라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세실리아는 게으르게 중얼거렸다.

“그대는 그대가 영리하다고 생각하지?”

“……전하.”

“세상 사람들은 다 허술하고 멍청한 것 같고?”

샤를 그뤼에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참 선명하게도 보였다.

세실리아는 시선을 내려 왼손의 손톱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다 보여. 그대가 잘 숨긴다고 생각하지 마.”

“…….”

“잘 알다시피 우리의 세상은 수많은 거짓과 속임수로 이루어져 있고, 그대의 가면은 조잡하면 조잡하지 절대로 정교한 건 아니거든.”

그대에겐 퍽 불행히도 말이지.

“적당히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그대의 속셈과 의도를 얼추 맞출 수 있다는 소리야.”

“…….”

“그리고 퐁레프에 적당히 눈치 빠른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샤를 그뤼에의 낯에 불만이 가득 피어나든 말든, 세실리아는 이번엔 다른 손의 손톱을 살펴보며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었다.

“없어.”

“…….”

“전부 눈치가 굉장히 빨라서.”

“…….”

“예를 들어볼까. 난 내 동생을 이 자리에 부른 적 없어. 누가 불렀을 것 같아?”

청년이 눈을 홉뜨더니 이리저리 굴렸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시녀들의 얼굴을 연신 황망하게 훑기 시작했다.

청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추측했는지 알렉시스가 시야 밖에서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입매엔 아주 흐릿했지만 분명한 미소가 그려져 있다.

한편 황녀의 시녀들은 엄숙한 낯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맞춰봐, 그대.”

“제가…….”

“맞추면, 내 동생과 동석이라는 조건으로,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그러니 마음 편히 맞춰봐.”

열정을 부추기기 위해 미끼를 대롱대롱 흔들었다. 역시나, 당혹에 젖어 있던 눈빛이 한결 예리해졌다.

“오페르 자작 영애 같습니다.”

“흠, 그래?”

“아, 아님, 콜린이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세실리아는 손톱을 살펴보던 손을 내리고선 활짝 예쁘게 웃었다.

“샤를 그뤼에 백작 영식.”

“예, 전하.”

“내가 불렀어.”

“……네?”

뒤따라 오려는 단어들을 삼키며 아주 부드럽게, 아이 대하듯 상냥하게 가르쳐주었다.

“황태자에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겠어?”

“하, 하지만 전하께선, 분명, 부르신 적 없다고…….”

아둔한 이가 알아서 말을 멈춘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내다 꽂히는 배신감 어린 눈빛을 무시하며, 세실리아는 평온하게 매듭지었다.

“가면 쓴 사람이 어디 그대 하나일까.”

그러니까 말했잖아, 샤를 그뤼에.

이 세상은 적당한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물론 진실이 없는 건 아니지.

다만 수많은 거짓 속에서 진실을 정확히 구분해내는 것이야말로 출세를 위한 당연한 역량일 텐데, 그대에겐 없을 뿐.

그래. 요약하자면 야망은 있되 뒷받침할 재능이 없다.

청년이 입술만 계속 달싹이다, 결국 말을 끄집어내지 못한 채 다물었다.

미끼에 낚여 파들거리는 물고기가 연상되는 꼴이었다.

……퍽 가련하지 않나.

본인이 본인을 ‘흰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라고 믿는 것과는 달리, 타인의 눈엔 ‘늑대의 탈을 쓴 검은 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니.

그래도 지켜보던 이들은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었다.

아무도 비웃지 않았거든.

반쯤 넋 나간 청년이 마침내 방을 떠나자, 알렉시스가 자연스레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세실리아는 칼리아에게 손짓해 다과를 내어달라 부탁했다.

“안녕, 알렉. 오랜만…… 은 아니구나.”

“제가 그리우셨나 봅니다.”

“‘동생’은 언제나 그립지.”

알렉시스가 피식 웃으며 대수롭잖게 말 속의 뼈를 넘겼다.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여느 때처럼 다정했다.

방금 사태에 관해 뭐라 말을 얹지 않는 걸 보니, 결말이 퍽 흡족하신 모양이다.

그녀와는 달리.

“히비스커스 티와 버터 비스킷입니다, 전하.”

“고마워, 키리. 고생했어.”

칼리아에게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한 뒤 세실리아는 천천히 비스킷에 손을 뻗었다. 반으로 쪼개자 부스러기와 함께 바삭한 단면이 드러났다.

비스킷을 또다시 반으로 쪼갠 뒤 작은 조각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뤼에 백작가에게 죄를 묻진 않으리라 믿어.”

“글쎄요, 언질을 줄 수는 있겠지요. 둘째의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니까요.”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것 같던데.”

알렉시스가 마찬가지로 비스킷에 손을 뻗더니, 반으로 부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쟈크 그뤼에가 혈육에겐 관대한가 봅니다.”

“첫째 그뤼에?”

“예, 소백작이요.”

자크, 샤를, 바네사.

이렇게 삼남매인가 보군. 아니다, 막내딸도 있었나…….

조만간 귀족 도감을 다시 외워야겠어.

“혈육이니, 귀엽게 여기는 것일 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럼 넌 소백작이 정말 관대하다고 생각해?”

잠깐의 적막 끝, 둘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고요가 암시한 답이 지독하게 명백하여.

후계자 자리를 넘보려는 동생을 관대히 넘기거나 귀엽게 여길 귀족은 없다.

아마 쟈크 그뤼에는 이런 속셈이었겠지.

직접 피를 묻혀 평판을 망치느니.

동생이 알아서 자멸하도록 내버려 두겠다.

한평생 봐왔을 만큼 동생의 성정은 잘 알았을 테고…….

만약 동생이 진정한 위협이었다면 어떻게든 제어하려 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니 샤를 그뤼에의 역량이 대단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제 위치를 모르는 것만큼 비극은 없지요.”

“…….”

“제 위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다만. 아니, 어쩌면 이게 더한 비극일 수도.”

“그러게.”

리빌 남작 영애가 끝내 파멸한 것과 달리, 그뤼에 백작 영식은 수치심만 얻고 무사히 돌아갔긴 했다.

두 결말의 차이를 곱씹어 보던 세실리아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무언가 입에 담고 있지 않으면 질문을 고스란히 내뱉을 것 같았다.

……그렇담 알렉.

나는 내 위치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 * *

오후 무렵 열심히 집중하여 장부를 살펴본 덕택에, 저녁엔 약간의 휴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세실리아는 소리 내지 않으려 조심조심 침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하얀 강아지는 장난감 한복판에서 아주 행복하게 쿨쿨 잠에 빠져 있었다.

꿈에서도 뭔갈 먹고 있는지 가끔 입맛을 다신다. 오늘 하루 열심히 먹고 열심히 놀았나 보지.

하루 끝의 떫은맛을 없애주는 평화로운 풍경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실리아는 잠자코 구경하다가 다시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다시 시계를 확인한 건, 편지 두 통을 작성하고 시집 일부의 필사까지 마무리한 뒤였다.

‘오후 8시네.’

잠들 때까지 이젠 무얼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문득 소파를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알렉시스 뤼셍이 앉아 있던 자리를.

오후의 대화가 다시금 머릿속을 휩쓸며 가라앉아 있던 상념과 번민을 헤집는다.

끝내 내뱉지 못한 질문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녀는 제 위치를 모르는 것일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눈 감고 있는 게 나아.’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였고.

‘언제까지 회피할 거야?’

또 다른 목소리 역시 속살거렸다.

세실리아는 펜대를 규칙적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니콜라와 그뤼에의 말로 유추해 보면, 뤼셍 황실은 그녀를 입양하기 위해 ‘부담’을 감수했다.

어떤 부담이었을까.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이상하긴 해.’

알렉시스는 그녀가 입양되기 전부터 좋아했다고 확답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애정은 투명한 물결과도 같아서,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명백하게 보이는 법이다.

아르망과 마리사 뤼셍이 과연 어린 알렉시스의 애정을 몰랐을까.

‘글쎄.’

그렇다면 그들은, ‘알렉시스 뤼셍이 세실리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양하기로 동의했다는 소리다.

이런 파국이 날 줄 예상했을 텐데도. 이런 날이 오리라 각오하면서도.

세실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껏 그녀의 입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긴 했다. 그런 행위 자체가 두 분께 죄스러운 느낌이었기에.

그런데 이제 와 고민하니.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해서.

‘날 왜 입양하신 거지?’

머리까지 염색시키면서 뤼셍의 호적에 들이느니, 다른 가문에 입적시키는 게 훨씬 평화로운 결말 아닌가.

황제의 명이라면 앞다투어 입양하겠다고 나설 귀족들이 널려 있을 텐데.

특히나 ‘황자’께서 직접 관심을 가진 여자애라면 말이지.

세실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순간.

상념의 폭포 속에서 가려졌던 목소리가 다시금 속살거렸다.

‘감당할 순 있겠어?’

……알려 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터.

본디 모르면서 지내는 것과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의 무게는 천지 차이였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빠진다. 손가락을 걸쳐만 놓은 상태로 문에 이마를 기대었다.

차디찬 감촉에 정신이 얼얼했지만, 곱씹고 있는 물음은 하나뿐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대체 어떡해야 하나.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면 비극이 온다는 사실엔 심히 동의하는 바였다.

실은, 그녀의 결말이 비극일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제국을 속인 사기꾼의 끝이 초라하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나.

‘마땅한 업보지.’

다만 걱정은, 그 비극이 그녀를 넘어서서…… 알렉과 부모님까지 덮칠까 봐.

무섭다. 두렵고.

그녀로 인해 주변이 찢어질까 두려웠고, 모두가 망가질까 무서웠다.

‘그래서 또 도망칠 거야?’

또 다른 목소리가 나타나서 질책한다.

세실리아는 눈을 감고선 말없이 숨결을, 마음을, 정신을 가다듬었다.

마음속에선 부질없는 소원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언제까지고 이 순간에 멈춰 서 있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렇게 아무런 일도, 비극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 영원히 안주할 수만 있다면.

“정답을 모르겠어.”

아버지.

당신께선 답이 내 안에 있다고 조언하셨지만 저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계속 속이면서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마땅한 파멸일까요?’

물론 이 마음을 고스란히 내뱉으면 아르망은 크게 슬퍼할 테지.

흐릿한 어둠만이 남아 있던 한밤, 비통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을 떠올렸다. 당황을 숨기며 그녀를 오롯이 보듬던 어머니의 손도.

세실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자세를 곧추세웠다.

그렇게, 힘주어 손잡이를 돌렸다.

늦은 저녁의 도서관에선 야간 근무를 하는 사서들만이 남아 있었다.

어슴푸레한 등불 속에서 그들은 트롤리를 끌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전하.”

사서 중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예를 표했다.

“안녕, 좋은 저녁이야.”

“포근한 어둠이 전하를 감싸시길. 좋은 저녁입니다. 어인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바빠? 바쁘면 그냥 돌아갈게.”

어쩌면 찾지 말라는 신의 계시─

“전하를 위해서라면 없는 시간도 내어드려야지요. 성심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는 무슨. 핑곗거리가 완전히 바닥났다.

사자 아가리에 목을 처넣는 기분으로 세실리아는 방긋 웃었다.

“12년 전의 신문을 찾고 싶어서. 9월 중순 무렵의 신문을 전부 찾아 읽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사서는 망설임 없이 거대한 도서관을 가로질렀다. 세실리아는 주변의 인사를 받아주며 황급히 따라갔다.

문 두어 개를 열고 들어간 방에는 거대한 서랍장이 길게 진열되어 있었다.

사서가 서랍 하나를 열자 수많은 신문이 가지런히 모습을 드러냈다.

“12년 전 9월이라고 하셨지요?”

“응. 신문들을 전부 보관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전국의 신문사들은 매일 발행한 신문 한 부를 퐁레프에 보내지요. 그리고 퐁레프는 보관 마법을 건 뒤 해당 날짜의 서랍 칸에 넣어둡니다.”

“없는 신문이 없겠네?”

“당연하죠.”

사서가 고개를 당당하게 치켜들면서 대답했다.

말간 낯 가득 서린 자부심이 귀여워 세실리아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때 신문은…… 아.”

“알다시피 내가 기억이 없잖아.”

“기억을 되찾고 싶으신 건가요?”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반드시 찾겠다─ 이런 건 아니고, 그냥 어렴풋이라도 윤곽을 잡아 놓을까 해서.”

사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봐, 세실리아는 안심하라는 듯 열심히 손사래를 쳐주었다.

“아이참,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니까. 난 괜찮아, 괜찮아. 그냥 궁금한 것뿐이야.”

“지금껏 안 찾으시던 분께서 갑자기 찾으시니…….”

걱정되어서 그러지요, 라는 말은 사서가 걸음을 우뚝 멈추는 바람에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녀가 서랍장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9월의 신문입니다, 전하. 같이 찾아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사서가 쭈뼛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안내해 줘서 너무너무 고마운데, 음.”

“…….”

“혹시 괜찮다면, 잠시 내게 혼자만의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세실리아는 맹한 낯의 가면을 쓴 채로, ‘난 정말 괜찮다’라는 기색을 폴폴 풍겨주었다.

성실한 사서는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관찰하고 나서야 안심했는지, 그녀가 정중히 무릎 굽혀 예를 표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고마워.”

사서가 뒤돌아서 소리 없이 방을 나섰고, 세실리아는 챙겨온 안경을 쓰며 소매를 걷었다.

블랑슈는 분명 동생의 생일이 9월 15일이라고 했었다. 그렇담 14일 전후로 살펴보기 시작하면 될 터.

‘일단 9월은 확실해.’

12년 전 9월이라는 반응에 사서 역시 정확한 반응을 내비쳤으니까.

세실리아는 손가락으로 서랍들을 덧그리며 날짜를 찾아 나갔다.

……8일…… 12일…… 13일 그리고 14일.

14일.

‘찾았다.’

그녀는 힘주어 서랍을 덜커덩 열었다.

세실리아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스물일곱 번째 서랍을 열었다.

적어도 다섯 번의 시도 안엔 기사들을 찾을 수 있겠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지금 스무 번째 시도를 하고 있었다.

신문들을 모조리 꺼내 들췄다.

‘없어.’

괘종시계가 밤 11시를 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세실리아는 안경을 벗고 눈가를 지압했다.

‘날벼락 맞은 기분인데, 이거…….’

9월이 아닌가?

세실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며 남은 9월의 서랍들을 전부 뒤졌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30일자의 신문들을 차곡차곡 서랍에 집어넣고선 서랍장에 이마를 쾅 박았다.

요란한 소리만큼 아팠지만 도무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정말 없어.’

그녀의 입양에 대한 언급이, 단 하나의 신문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문 자체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기사가 없었다.

‘왜 없지?’

블랑슈의 기억이 잘못된 걸까?

아니. 동생이 울어 젖혔다는 그 상세한 기억까지 있으니 9월 중순인 건 확실해.

그렇담 휴스턴 소후작의 생일이 9월 15일이 아니라는 소린가.

‘그럴 수는 있긴 한데…….’

9월에 발행된 생-뢰크 일보를 전부 모아볼까.

세실리아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서랍마다 한 부씩 신문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닥에 놓인 서른 부의 신문을 보던 그녀는.

“하.”

작은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9월 14일자 신문과 9월 1일자 신문을 집어 들었다.

맨 위에 적힌 날짜와 정면에 걸린 사진만 다를 뿐…… 기사는 글씨 한 토씨도 빠짐없이 똑같았다.

복제된 것처럼.

그래, 정교히 조작한 것처럼.

무엇이 가짜인지는 고민 안 해도 명백했다.

9월 14일자 신문이, 완벽하게 바꿔치기 되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그랬겠지.’

세실리아는 신문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제 머릿속의 생각도 정돈했다. 충격으로 인해 상념들이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런 곳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무엇을 숨기고 싶으셔서?’

무엇을 감추시려고? 그녀가 입양되었다는 사실 자체? 아니면.

아니면.

세실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열려 있는 서랍들을 소리 없이 닫았다.

가족들에게 섣불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순 없었으나, 지나친 위화감이 전신을 휩쓸고 있었다.

너무 동요하지 말고…… 그래.

‘일단 내일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에 가자.’

그곳에서 다시 9월 14일자 신문을 확인한 뒤, 생각하는 거야.

세실리아는 잠깐 6월의 서랍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포기했다.

니콜라와 프랑수아즈의 말에 따르면 ‘입양하겠다는 언급’ 자체가 나온 건 6월이었지만, 6월의 기사가 과연 멀쩡할까?

그럴 리가.

‘그것도 조작되었을걸.’

세실리아는 반쯤 확신하며 서랍장에 기대어 섰다.

발끝 아래에 일렁이는 달빛처럼, 이젠 위화감을 넘어선 기시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옛날에도 이랬는데.’

분명 있어야 하는 자료들이 없어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중요치는 않아, 찾는 것 자체를 포기했었지.

‘무엇이었더라.’

세실리아는 머리를 감싸 쥐며 기억을 더듬었다. 뜨끈한 연기가 올라올 정도로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하나둘씩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였지?’

스물? 스물은 아닌데. 알렉이 그땐 퐁레프에 있었나?

아. 있었던 것…….

“카밀 베르뉴.”

세실리아는 손으로 뺨을 감싸며 느릿느릿 정답을 내뱉었다.

그래. 그랬었다.

광기에 미친 마법사들의 명부에서 카밀 베르뉴만은 찾지 못하여, 당황했던 적이 있었지.

카밀 베르뉴가 완전히 삭제된 것처럼, 그녀의 입양 관련 기사 역시 완전히 도려져 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당연한 인과인가.

‘당연한, 인과라면…….’

세실리아는 스르륵 주저앉은 채로 눈만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 마음속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조롱하고 있는 듯했다. 감당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환청처럼 울려 퍼진다.

“속단하지 마.”

세실리아는 서랍장을 짚으며 어떻게든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래, 아직은 밝혀진 게 없었다.

그 무엇도.

* * *

다음 날 아침, 티에리 에스디어와 함께 호출된 블랑슈 휴스턴은 사랑스러운 황녀의 까칠해진 낯을 보며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언니─!”

“어, 제때 왔네.”

“언니, 세상에, 얼굴이─!”

“호들갑은. 난 이래도 예뻐.”

그건 그렇지만.

당연하게 수긍하던 블랑슈는 최상의 외모가 아파 보인다는 점에 통한을 금치 못하였다.

슬퍼하는 그녀 옆에서 티에리 에스디어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대수롭잖게 블랑슈를 끌어 안아준 황녀가 그에게로 손을 내민다. 기사의 예를 갖춰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둘 다 따라와.”

“어디로 가십니까, 전하?”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 치고는…….

더없이 비장한 음성이었다.

마치 전쟁을 선포하는 듯한 목소리라, 블랑슈와 티에리는 동시에 멈칫하고선 황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측근에서 모신지 몇 년 되었지만 저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전하.”

티에리가 쭈뼛쭈뼛 소심하게 부르자, 세실리아가 한쪽 눈썹을 휘며 돌아보았다.

“황태자 전하도 부르시…… 윽.”

블랑슈는 제때 눈치 없는 기사의 발을 밟아 응징했다.

대충 ‘이 인간은 곰을 형상화한 것도 아니고 어쩜 이렇게 둔하담’의 심정을 팍팍 담아서(보통 때는 블랑슈의 눈치가 더 심각하다는 게 문제지만).

티에리가 신음을 삼키며 억울한 표정을 짓든 말든, 세실리아는 평온하게 대답해 주었다.

“안 부를 거야.”

그제야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챈 걸까.

바랜 금발의 기사는 한층 더 머쓱해진 낯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고, 세실리아는 말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만약 지금 멈춰 선다면 외출 자체를 엎을 것 같았다.

두려움으로.

알고 싶지 않다는 너절한 발악으로.

한없이 도망만 치고 싶은 초라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황실 마차가 매끄럽게 포장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시가지를 감상하며 세실리아는 잠깐의 여유를 즐기었다.

길가의 카페에선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근처에선 아이들이 공을 던지고 잡으며 즐겁게 뛰놀았다.

규칙적으로 치솟는 분수의 물길은 햇볕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인다.

마찬가지로 눈부신 윤슬을 자랑하는 하벨 강, 그 위에서 느긋하게 노닥이는 보트, 녹음을 드리우며 우거진 가로수들까지.

찬연한 여름빛 속에서 그녀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고만 있었다.

어제 거의 잠을 못 이루었기 때문일까.

세실리아는 제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스멀거리는 어둠을 반추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렵지?’

어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곱씹었던 생각이라 답은 쉽게 나왔다.

그녀와 ‘카밀 베르뉴’가, 제국 역사상 가장 흉악하다는 미친 마법사가, 어떠한 관계라도 있을까 봐.

그래서 두렵다.

‘관계가 있다면…….’

항상 생각은 거기서 끝난다.

공포와 불길함이 족쇄처럼 발목을 붙들어, 뭐라 추측을 더 하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알렉은 답을 알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물어본다고 한들 그가 순순하게 답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지금껏 수많은 질문도 적당하게 회피한 녀석이, 퍽이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겠어.’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께 여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키워온 입양 딸이 갑자기 ‘이 남자와 저는 무슨 관계예요?’라고 물으면 속상해하시지 않을까.

세실리아는 결국 눈을 굳건하게 내리감았다.

그녀가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들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뭐 하러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는 생각을 곱씹고 있는 건지.

바보처럼.

참 한심하게도.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정신과 마음은 들어먹질 않아 어젯밤부터 계속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었다.

톱니바퀴가 끝도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싫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무너지고 한없이 침잠하기만 하는 그녀가 참 싫었다.

“……언니?”

“전하?”

문제는 그 심정을 고스란히 내뱉어 버렸다는 점.

블랑슈와 티에리가 나란히 기겁하여, 세실리아는 천천히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미안, 혼잣말이야.”

“…….”

“…….”

“그냥 답답해서 중얼거려봤어.”

블랑슈가 초조하게 입을 벙긋거렸고, 입 모양을 정확히 알아들은 세실리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블랑슈.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알렉 때문은 아니란다.”

“네…….”

다시금 창밖을 향해 눈을 돌렸다.

정오가 가까워졌는지 볕이 유난히 뜨겁고 밝았다.

세실리아는 손을 들어 차양처럼 만든 뒤 밖을 계속 구경했다. 마침 마차가 멈춰 서는 바람에, 몰래 훔쳐보기엔 딱 좋은 시간이었다.

어느 버드나무 아래에서 금발의 소녀가 고양이와 놀고 있었다.

긴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자, 고양이가 하악거리면서도 가지를 쫓아 열심히 발톱을 휘둘렀다.

지금이 못내 즐거운 모양이다.

아이가 허리를 반쯤 숙이며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먼발치니 들리지도 않을 텐데, 솜사탕처럼 다디단 웃음이 귀청을 간지럽히는 느낌이었다.

세실리아는 숨을 죽인 채로 계속 지켜보았다.

……소녀와 고양이를 향해, 한 어른 남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를 안정적으로 받아 안았다.

휙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워주자, 소녀가 계속 들고 있던 가지를 흔들며 까르륵 웃었다.

고양이는 저 아래에서 계속 껑충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끝내 심술이 치밀었는지, 새하얀 앞발을 들어 남자의 다리를 쾅 때렸다.

‘아빠와 딸이구나.’

부드러운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미련 없이 몸을 물리며 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커튼을 쳐도 될까? 슬슬 햇볕이 뜨거운데.”

“넵.”

“그러십시오, 전하.”

다소 어이없는 이유에도 블랑슈와 티에리는 냉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실리아는 고맙다고 중얼거린 뒤 커튼을 새삼스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닫았다.

방금 목격한 풍경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 앞에 도착하자, 도서관장이 날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낯에 초조함이 가득 깃들어 있어, 세실리아는 자못 미안해졌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생-뢰크의 아름다움을 오늘도 빛내주시는군요.”

누가 들어도 긴장 가득한 목소리.

“저는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의 관장인 디안 세비르라고 합니다. 이쪽은 부관장인 시몬 뤼프라고 하고요.”

덜덜 떠는 것치고는 원만한 인사였다. 세실리아는 활짝 웃으며 손등을 건네주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야말로 외출이 뜸해 오늘에야 그대들과 만나게 된 게 미안한걸.”

“아닙니다, 전하. 저희는 만나 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시몬이 손등 위에 정중히 입맞춤을 남기며 화답했다.

세실리아는 방긋방긋 웃다, 사람들이 몰려들려는 낌새에 잽싸게 제안했다.

시민들을 대하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부담이긴 했다.

“우리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

“물, 물론입니다.”

디안이 후다닥 움직이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세실리아와 블랑슈, 그리고 티에리는 나란히 그를 따라갔다.

물론 세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사받은 사람들은 멍하니 굳은 채로 눈만 깜박였지만.

도서관에 들어가는 초입에서 그들은 여러 차례 요란한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지금 내가아아아아악!”

구경꾼들이 뒤늦게야 깨닫고 나서 내지른 함성이었다.

차를 거절한 세실리아는 잠깐 소소한 잡담을 나눈 뒤 용건을 끄집어냈다.

“9월 14일자의 신문 기사요?”

“응. 있는 것 전부 보고 싶어.”

블랑슈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블랑슈.

‘너 짚이는 구석 있다는 거 나도 잘 안단다.’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에 세실리아는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고, 블랑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도로 돌려야 했다.

무언의 대화를 지켜보던 시몬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전부 갖고 올까요, 아니면 안내해드릴까요?”

“안내받을게. 블랑슈, 티에리 경. 혹시 여기서 기다려줄 수 있겠어?”

블랑슈가 눈을 홉뜨며 뭐라 황급히 반박하려 했다.

티에리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고개를 저었고, 세실리아가 선선히 웃으며 고맙다고 하려던 찰나였다.

“안 됩니다, 전하.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호위는 늘 함께해야 합니다.”

아, 그렇네.

여긴 퐁레프가 아니지.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저기요, 티에리 경? 절 혼자 두시겠다고요? 제가 폭주하면 당신이 제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충 나도 데려가라는 소리다.

티에리 경은 고개를 슬쩍 비틀어 연갈색 머리칼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맹랑한 소녀를 마냥 귀여워하는 듯한 눈빛.

그 시선에 블랑슈가 움찔하며 시무룩해졌고, 티에리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연갈색 머리칼을 헤집어놓았다.

“괜찮습니까, 전하?”

왜 난 저 간단한 동작에서 그 너머까지 읽어내는가.

알렉시스 때문인가…….

세실리아는 초점을 흐리기 위해서 노력하다 포기했다.

“적정 거리는 계속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부탁할게.”

세실리아는 평온한 낯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친애하는 티에리 에스디어 경에게 용건도 생겨버렸으니 둘이서 가는 게 낫겠군.

“언니, 저는요! 저도 데려가셔야죠!”

블랑슈가 너무하다면서 방방 뛰었고, 세실리아는 짐짓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응, 블랑슈. 너도 나중에 나 좀 보자꾸나.”

“……네?”

“나 좀 보자고.”

“잘 다녀오세요, 티에리 경.”

블랑슈가 깍듯하게 인사하고선 곧바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티에리 경이 어설프게 웃든 말든, 잿빛 눈이 난처해지든 말든 세실리아는 더욱 환히 웃어주었다.

“그럼 경, 같이 가볼까?”

시몬이 앞서 걷는 동안 세실리아와 티에리는 천천히 뒤쫓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고, 그렇다 해서 못 쫓아가진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서관 내부의 비밀 통로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통로 내에는 아무도 없을지언정 벽 너머에선 확연한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불현듯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일까?”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티에리 에스디어다운 대답이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딱 떨어지는 답변.

세실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굴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통로라 그림자 하나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야 자체는 환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마법을 사용했을 터…….

“올해 여름이군.”

세실리아가 툭 내뱉었고.

“정확하십니다.”

티에리는 선선히 긍정했다.

그래, 여름이면 뭐. 둘 다 성인인 만큼 뭐라 할 수 있겠어.

“휴스턴가는 알고 있나?”

“소백작은 절 걱정하더군요.”

“보통 남매답네.”

세실리아는 잠깐 건조하게 웃었고, 티에리 에스디어는 재빠른 답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진실을 암시했다.

그녀는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려 기사의 난처한 낯을 목격했다.

이를 까득 갈 수밖에.

“동네방네 다 알고 있어, 대체.”

“그건 아닐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요.”

세실리아는 대답 대신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금발의 기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침묵으로 그녀를 달래었다.

순간 무너졌던 평정을 가다듬으며 본디 주제로 돌아갔다.

“상대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그대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고.”

그에 따른 제약, 불안정함, 차별 및 부담 역시도 이 남자가 그녀보다 더 잘 알고 각오했을 터다.

‘두 성인의 연애에 말을 얹는 것도 웃긴 법이니…….’

세실리아는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울리지만 마.”

“예.”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두 사람이 연애한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놀라우면서도 감흥이 없었다.

둘이 부디 끝의 끝까지 함께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일 뿐.

‘잘 어울려.’

그럼 되었다.

세실리아는 마음속 기이한 감정—왠지 모르게 마리사의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을 무시하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중에 후작 영애에게 너무 잔소리하진 마십시오.”

“응?”

“아닙니다.”

“뭐, 감싸고도는 자세는 좋지.”

세실리아는 맥없이 대꾸해 주었다.

시몬이 왼쪽으로 방향을 꺾고 있어, 그들 역시 걸음을 살짝 재촉하여 모퉁이를 돌았다.

“전하, 외람되오나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지?”

“전하의 입양에 관련된 기사를 찾으시는 걸까요?”

“응.”

티에리가 잠자코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세실리아는 계속 끈질기게 침묵을 지켰다.

굳이 이유를 설명해 주고 싶진 않았다.

오묘한 잿빛 눈이 그녀를 관찰하다 눈꺼풀 뒤로 스러진다.

다시금 내려앉으려는 묵직한 침묵을 깨고, 이번엔 세실리아가 질문했다.

“경, 그대는 블랑슈보다 더 정확한 기억이 있겠지. 나이가 더 많았을 테니.”

“……그렇겠지요.”

“황실이 날 입양하고자 한다고, 처음 발표했던 날짜는 언제지?”

“6월 1일이었습니다.”

못을 박는 듯 빠른 답변이다.

확답에 가까운 목소리라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기억하네?”

“제국 전체가 발칵 뒤집힌 날인데 기억하지 않을 수 없지요. 북부의 금광이 무너졌다고 한들 그보다 더 술렁이진 않았을 겁니다.”

“나로 인해 뤼셍이 져야 했던 부담이 있었나?”

“여론이 나빴습니다. 레니앙에서부터 유라이언, 황후 폐하의 친정인 벤힐까지. 유력 귀족 가문은 전부 반대했다고 보면 됩니다.”

잠시 침묵하던 티에리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그런데도 두 분 폐하께선 정말 완고하셨던지라 말이 더욱 많았습니다.”

가감 없는 설명에 되레 안심된다.

세실리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티에리가 위로하려는 듯 조용히 덧붙였다.

“상심은 마십시오, 전하.”

“무엇을?”

“뤼셍은 전하를 입양함으로 득을 보면 봤지 실을 보진 않았습니다.”

세실리아는 설핏 웃으려다 멈칫했다.

발끝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들자, 시몬이 앞쪽에서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럼 경.”

“예.”

“지금은? 내 약혼으로 뤼셍이 져야 하는 부담이 있나?”

티에리가 뭐라 말하려다 다문다.

입술을 달싹이며 주저하는 모습에 세실리아는 덤덤히 종용했다.

“괜찮으니 말해.”

“전하의 약혼이 꽤 큰 정치적 변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건 인지하고 계실 겁니다.”

“난 결혼하면 생-뢰크를 떠날 계획인데? 그런데도?”

수도에 머무르지 않는 가문은 힘을 얻지 못한다. 중앙에 권력이 밀집해 있는 뤼셍 제국의 특성상 그러했다.

즉, 생-뢰크를 떠난다는 소리는 정치적인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

티에리가 뺨을 긁적이더니 대놓고 모호한 표정을 내비쳤다.

세실리아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선 올려다보았고, 기사가 제 앞머리를 잡아당기다 결국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전하, 제가 황실 대변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응.”

“전하께서 입양되실 때, 레니앙과 벤힐을 비롯한 가문들이 분명 제약을 걸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약? 내게?

“전하께선 늘 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는 제약이었습니다.”

“…….”

“유력 가문들이 거의 생-뢰크에 모여 있으니, 전하께서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생-뢰크에 머무르셔야 한다는 소리지요.”

“…….”

“뭐, 그들도 몰랐을 겁니다. 자신들이 걸었던 제약이 이렇게 발목을 붙들 줄은요.”

그런 제약이 있었다고?

……하, 하지만 난 몰랐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정치와 관련이 먼 티에리 에스디어가 알고 있다. 그렇담 다른 이들도, 프랑수아즈와 니콜라도 알고 있었겠지.

알렉시스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전부.

세실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말고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충분히 평온한 얼굴인가? 티를 내지 않으면 좋겠다.

생-뢰크에만 머무를 수 있는 게 큰 문제는, 아니긴, 하지.

‘그러니 굳이 설명할 이유도 없긴 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회색 눈이 어쩔 줄 모르는 빛을 머금은 채로 그녀를 담고 있어, 세실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저 앞에서 시몬이 도착했다며 팔을 훠이훠이 젓고 있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티에리 경.”

세실리아는 나직이 속삭였다.

“나중에 프랑수아즈에게 자세히 물어볼게.”

“……예, 전하.”

정신 차리자, 세실.

기분 내키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없다는 걸 충분히 아는 나이잖아.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처리해.’

그리고 다음 일을 차례대로 처리해나가면 되니까.

세실리아는 머리칼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결론을 곱씹었다.

그래. 지금 그녀가 퐁레프에 있는 것도 아니고, 프랑수아즈에게 달려가 질문을 퍼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재 그녀는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에 있으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세실리아는 걸음을 재촉하여 시몬을 향해 걸어갔다.

* * *

“죄송합니다, 전하.”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시몬에게, 세실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어디 그대 잘못일까.”

“제대로 보관하지 못했으니 제 잘못입니다.”

6월 1일부터 9월 31일까지, 황녀의 입양에 관한 기사가 있는지 전부 뒤졌다.

티에리 에스디어도 도와주는 만큼 보다 넓은 범위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냐고?

황녀의 입양을 주제로 한 기사만큼은 전부 없었다.

시몬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으며 티에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 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저 둘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이게 비정상적인 상황인 모양이었다.

“아냐, 정말 괜찮아.”

반쯤 예상했었으니까.

이를 악물 힘도 없군. 세실리아는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요약건대 ‘세실리아 뤼셍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다룬 기사는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이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문은 하나지.

‘뤼셍의 태양.’

즉 황실 그 자체.

부모님께선, 그리고 친애하는 그녀의 ‘동생’께선 역사를 지우려 노력하신 모양이었다.

‘내 눈을 가리려고?’

……아니면, 다른 이의 눈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퐁레프로 돌아가자.’

퐁레프로 돌아가서, 프랑수아즈에게 ‘세실리아 뤼셍’이 어떻게 입양되었는지, 입양 당시에 무슨 일과 무슨 소란이 있었는지 전부 물어보자.

그녀가 만약 순순히 답을 알려준다면, 뤼셍이 가리려던 눈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렇게 신문들을 치우기 전에 입단속부터 시행했을 테니까.’

그러니 프랑수아즈가 모든 걸 알려준다면…….

뤼셍은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눈을 가리려 드는 거겠지.

누구의 눈일까.

누구를 속이고 싶어서 이토록 번거롭게나 역사의 공백을 만든 것일까.

누구길래.

“고마워, 시몬. 너무 큰 도움이 되었어.”

“천만입니다. 전하께 아무런 도움을 못 드려 제가 너무 송구할 따름인걸요.”

“아냐, 사실 이런 결과도 각오하고 온 거라. 너무 자책하지 마.”

“……예, 전하. 다정한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몬에게 손으로 입맞춤을 날려 주었다.

길을 되돌아가며 세실리아는 티에리 에스디어를 향해 흘끗 눈길을 던졌다.

기사 역시도 생각이 복잡한지, 알게 모르게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있다.

“경.”

“예, 전하.”

티에리 에스디어는 리베 아카데미에서 오래 일했다.

미쳐버린 마법사들을 제압하는 게 업인 만큼, 광기에 물든 마법사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지. 그들이 어떤 외양을 지녔는지도.

카밀 베르뉴가 선득한 푸른 눈이라는 사실은 뤼셍에서 모르는 이 없다.

다만 세실리아가 궁금한 건…….

‘머리 색이, 은발일까.’

탄식 섞인 질문은 끝끝내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겨우 흘려보낼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초라한 변명이었을 뿐.

“괜찮습니다.”

“미안해.”

“정말입니다, 전하. 전 괜찮습니다.”

“고마워.”

무슨 정신으로 방에 돌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블랑슈를 보자마자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언니!”

포로록 달려오는 여인의 뾰로통한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고 나선,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디안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그가 거듭 허리를 굽히며 또 오라며 화답했다.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라타기까지가 난관이긴 했다.

황녀가 방문했다고 소문이 나버린 건지, 사람들이 몰려든 채로 기웃거리고 있었으니까.

블랑슈와 티에리가 잔뜩 경계하는 동안 세실리아는 구경꾼들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는 와중에도 시끌벅적한 소리는 여전했다.

“미안, 다들 고생했어. 이래서 몰래 오려 했는데.”

“그럼 언니의 얼굴을 숨기셨어야죠.”

블랑슈가 정곡을 콕 찔러, 세실리아는 약간 시무룩해졌다.

길이 막히는지 올 때보다 돌아갈 때 시간이 더 걸리고 있었다.

티에리가 옆에서 침묵하는 동안 그녀는 블랑슈와 함께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맛있는 디저트, 사교계 스캔들, 새로 나온 시집과 새롭게 출시된 향수 등등.

다양한 화제를 나눈 덕택에 무료하지 않았다.

마침내 퐁레프에 도착했을 땐, 세실리아는 평상시처럼 평화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티에리가 고개를 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티에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리자, 완만하고 느긋해진 하오의 햇빛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잔디밭이고 나무 잎사귀고 전부 금빛으로 물든 듯했다.

궁 안으로 곧장 들어가려던 세실리아는 발을 멈추었다.

시야의 끝, 금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잔디밭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청년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는 확연했다.

금빛 반짝임이 머무른 머리카락이 흑색이었으니.

이어 컹,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알리샤가 장난감을 문 채로 알렉시스에게 쪼르륵 달려갔다.

장난감을 받아든 그가 다시 휙 던졌고, 새하얀 강아지는 행복하게 내달렸다.

“언니…… 어라.”

마지막으로 내리던 블랑슈가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강아지와 놀아주는 황태자를 보자마자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다. 곁에서 지켜보던 티에리는 마냥 무감한 낯이었지만.

“오늘 만찬 함께 할래?”

“괜찮으시겠습니까?”

티에리가 반문했고.

“너희 둘은 언제나 환영이지.”

세실리아는 환히 미소하며 대답해 주었다. 시선은 남자의 뒷모습에 고정한 채였다.

셋은 나란히 선 채로 계속 구경했다.

알리샤가 두 번째로 쪼르륵 나타나, 다시금 장난감을 안겨주는 모습을.

앉으라고 명령한 건지 강아지가 앞발을 얌전히 모은 채 챱 앉는다.

알렉시스가 손을 뻗어 털을 헝클어뜨려 주었고, 기분이 좋은지 알리샤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강아지를 보듬는 손길 하나하나에 깊은 애정이 묻어 있다.

또다시 던져지는 장난감.

아까보다 더 먼 곳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자, 알리샤가 경쾌하게 짖으며 잽싸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잘 놀아주시네요.”

블랑슈가 작게 중얼거린다. 그 소리를 흘려들으며 세실리아는 계속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잘것없는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거의 처음인 느낌이었다.

‘항상 마주 보고 있었지.’

가끔 그가 시선을 비키는 바람에 옆얼굴을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대체로 정면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오래 등의 윤곽을 덧그린 건 처음이었다.

뒤에서도 확연한 너른 어깨.

부드럽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팔.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더없이 굳건해 보이는 등.

외따로 앉아 있기 때문이려나.

고독이 묻어 있는 듯해서 심장이 가빴다.

세실리아는 이번엔 정말 터질 듯이 입술을 꽉 깨물다 저번처럼 피를 볼 뻔했다.

느리게 입술을 놓아준 순간, 알렉시스가 앉은 상태 그대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붉은 사과를 먹고 있었나 보다. 그의 한 손엔 베어 문 흔적이 선명한 사과가 들려 있었고, 입술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렇게 알렉시스는 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티에리와 블랑슈가 냉큼 예를 표하는 사이, 세실리아는 팔짱을 낀 채로 그를 응시했다.

알렉시스 역시 자신에게 인사하는 이들은 내버려 두며 그녀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과를 내려다보았고, 다시 그녀를 올려다본다.

사과를 권하는 듯 손으로 내미는 동작에 세실리아는 빼액 외쳤다.

“너나 먹어, 멍청아!”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진 모르겠다.

블랑슈와 티에리에게 저녁때 응접실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긴 뒤 쏜살같이 궁 안으로 튀어 들어갔기 때문에.

‘왜 그랬어! 보는 눈이 없던 것도 아니고!’

내 체통, 내 예법, 내 평판…….

시원하게 지른 건 언제고 세실리아는 풀이 죽었다.

오늘은 특히나 높은 신발을 신었기 때문인지 발가락도 아프고 발뒤꿈치도 아팠다.

서럽다는 소리다.

다양한 감정에 매몰된 덕택인지, 그녀는 비교적 담담하게 프랑수아즈의 집무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조심조심 문을 두드리자 프랑수아즈의 경쾌한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안녕.”

프랑수아즈는 눈을 부릅뜨며 입을 딱 벌렸고, 근처에 있던 직원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실리아는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하! 어쩌다 여기까지─ 아니! 아니! 대체 왜 이렇게 얼굴이 까칠해지셨어요!”

블랑슈도 그러더니, 나 지금 정말 심각한 꼴인가?

세실리아는 진지하게 걱정하며 거울을 흘끗 바라보았다.

눈 밑 음영이 살짝 짙어졌을 뿐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물론 전하는 여전히 고혹적이시지만요.”

“어어, 고마워.”

“모쪼록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 얼굴을 오래오래 보존해 주시옵소서.”

늙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어, 프랑수아즈.

세실리아는 반박하는 대신 엷게 웃으며 손으로 입맞춤을 날려 주었다.

프랑수아즈가 행복한 얼굴로 방방 뛰더니, 그녀에게로 냉큼 다가왔다.

“무슨 용건이신지요, 전하?”

“으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요, 전하. 그게 저의 업무인걸요.”

프랑수아즈가 주변을 휙 째려보더니 옆방을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기 전, 세실리아는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단박에 환호성이 터져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채.

아니. 사실 환호성은 예상하긴 했다. 저렇게 클 줄 몰랐을 뿐.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소리가 들려와 세실리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이렇게나 인기 많은 줄 몰랐네.”

“뤼셍의 귀보께서요?”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어.”

“지금보다 더 많습니다.”

프랑수아즈가 딱 잘라 말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말씀해 주시지요, 전하. 사실 전하께서 이곳까지 행차하실 줄은 몰라서 약간 놀라는 중이랍니다.”

“…….”

“아, 차, 차. 차 드실래요?”

“아니야, 괜찮아.”

세실리아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질문을 정리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 한구석으로 질문을 정리했었는데, 어째 프랑수아즈를 보니 질문이 나오질 않았다.

‘용기를 긁어 내.’

찾아오기까지 했으면 진짜 질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프랑수아즈가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잖아.’

두어 번 깊은숨을 들이킨 뒤 목소리를 긁어내었다. 질문이 기어이 혀끝을 넘어 공기 중으로 흘러나온다.

“프랑수아즈.”

“예, 전하.”

“내가 입양되었을 때…… 나한테, 음, 어떤 조건이라도 있었을까?”

프랑수아즈가 꽤 오랫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떤 답을 내놓을까.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속으로 초조해하는 세실리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실 대변인의 침묵은 꽤 짙고 길었다.

이윽고.

“예,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해지는 답.

세실리아는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는 채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황후 폐하의 친가가 벤힐 백작가인 건 알고 계실 테죠.”

“……응.”

“전하께서 행여 불손한 마음을 품을 경우를 대비하여, 벤힐은 전하가 언제나 ‘귀족’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이 생-뢰크고?”

프랑수아즈가 간명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식 신랄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때 벤힐은 몰랐겠죠. 자신이 내건 제약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

“단승 공작위에 계승 후작위까지 챙긴 가문이 탄생하는데 심지어 본거지까지 수도라니. 미치고 팔짝 뛸 겁니다.”

“그렇게 된 거구나.”

세실리아는 멍하니 입술만 달싹여 뇌까렸다.

“그렇습니다. 아이고 꼬셔라…… 가 아니라 황후 폐하껜 비밀로 해주십시오. 꼭이요.”

“그래, 그래.”

“그냥 그때 입씨름한 기억이 떠올라서 그래요. 제가 그쪽 가문에 쌓인 게 조금 많답니다.”

프랑수아즈가 입을 삐죽거리며 안경을 재차 추어올렸다. 세실리아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섣부른 결론에 매몰되기 전, 재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만일 내가, 생-뢰크에 머무르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돼? 제약을 취소할 수는 없어?”

“불가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온 답변.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세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전하의 신변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난 더는 황녀가 아니잖아. 생-뢰크만큼은 아니더래도 치안 좋은 지방은 여럿 있고…….”

“물론 그때의 당신께선 황녀 전하는 아니시겠지요. 하지만 전하.”

안경 너머 프랑수아즈의 눈이 어슴푸레하게 번득였다.

연륜 가득한 눈빛이 그녀를 꿰뚫었고, 세실리아는 문득 상대에게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읽을 수 있냐’라는 질문을 던질 뻔했다.

영혼 깊은 속의 고뇌까지 전부 읽어내리는 시선이라서.

“그때의 전하께서도 여전히 뤼셍의 핏줄이시겠지요.”

“…….”

“물론 마력이 발현되진 않았다고 하나, 혹시 압니까. 다른 이들과 각인을 하면 상대의 마력을 안정화할 수 있을지.”

마리사 벤힐은 아르망 뤼셍을 만나기 전 마법사였다.

그것도 안정화 방법을 찾지 못한 마법사.

하지만 그녀는 각인에 성공했고, 연인의 마력도 안정화하는 동시에 본인의 마력까지도 안정화할 수 있었다.

“전하. 뤼셍의 ‘각인’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관점과 보통 사람의 관점은 다릅니다.”

프랑수아즈가 잠자코 안경을 추어올렸다.

“보통 사람의 눈엔 뤼셍이 각인을 통해 마력을 안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마법사의 관점에선.”

입 안이 바싹 마른다.

그녀가 대체 얼마나 마법사의 세계에 대해서 몰랐는지 실감이 되고 또 되고 있어서.

“뤼셍의 각인은, 그야말로, ‘황금 사과’입니다. 아시죠? 영생을 살게 해준다는 신화 속 사과.”

“응. 잘 알고 있지.”

“뤼셍과 각인을 하면 자신의 마력도 안정화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매력적이지 않겠어요?”

세실리아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내가 괜찮은 표정을 짓고 있긴 한가’라는 고민은 이젠 사치였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자, 프랑수아즈가 설명을 이었다.

“물론 뤼셍의 황족들은 자신을 덮치려는 마법사들 따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무래기가 덤비든 그들의 마력이 훨씬 강대했으니까요.”

딱. 손가락이 경쾌하게 튕겨지는 소리.

“당장 황태자 전하께서도 역대 최대의 마력을 자랑하고 계시고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마력도 없으니…….”

“그쵸. 마력도 없으니 자신을 보호할 순 없고, 그런데 누군가랑 각인은 할 수 있어 보이고. 조금 과하게 표현해 보자면, 좋은 먹잇감이신 겁니다.”

물론 그녀는 뤼셍의 피조차 이어받지 않았다.

그러니 뤼셍이 아닌 사람과 각인하고, 상대의 마력을 안정화해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세상의 눈에 그녀는 ‘뤼셍’이었다.

세실리아는 눈을 내리감았다.

프랑수아즈의 목소리는 귓가에 여전히 명료하게 내려꽂히고 있었다.

“전하, 벤힐이 감히 제약을 건 건 괘씸한 일입니다. 아무렴요.”

약혼하고 나서도.

“하지만 그 제약과는 무관하게, 전하께선 안전을 위해서라도 퐁레프에 계속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이곳에선 뤼셍을 제외하고 어떤 마법사도 마력을 쓸 수 없으니까요.”

지금의 생활과 거의 변화가 없으리라는 예고였다.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평정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습관적으로 미소하며 어떻게든 정신을 긁어모으려 노력했다.

한번 허물어졌더라도 결국엔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또다시 허물어지더라도 지금 당장 어떻게든 모면하면 되었다.

덕분에 그녀는, 프랑수아즈에게 담담하고도 깨끗한 웃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황실 대변인의 걱정스러운 눈길 속에서, 세실리아는 빙긋 웃었다.

“불쑥 찾아왔는데도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마워, 프랑수아즈.”

“……괜찮으십니까, 전하?”

“나야 괜찮지 뭐. 그저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야.”

“두 분 폐하야 결국 예쁜 딸을 얻으셨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세실리아가 다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랑수아즈가 마찬가지로 따라 일어났다.

그녀가 이마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미미하게 기울였다.

“전하.”

“왜?”

“니콜라에게 말해서 더 자세한 사항들을 보고 드리라 할까요?”

“이미 바쁜 사람이잖아.”

대충 프랑수아즈의 얼굴에 뭐라 쓰여 있는지 알 거 같다.

이미 바쁜 사람에게 일을 조금 더 맡겨봤자 조금만 더 바빠질 뿐 뭐가 다르냐…… 라는 표정.

니콜라가 본다면 멱살을 잡겠다며 난리 칠 법한 표정이었다.

세실리아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곱게 휘었다.

“궁금한 점은 다 풀렸으니 괜찮아.”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전하.”

“언제나 내가 고마운걸.”

세실리아는 허리 숙여 황실 대변인의 양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온 뺨을 붉히며 좋아해 주는 기색에 숨어 있던 양심이 콕콕 찔렸다.

사실 그녀가 뤼셍의 피도 잇지 않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프랑수아즈는 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속았다며 분노하려나, 가짜라며 경멸하려나.

진지하게 고민하기엔 세실리아는 이미 피로한 상태였다. 하여 그녀는, 잠자코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 프랑수아즈.”

“저녁의 기쁨이 전하께 드리우길.”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프랑수아즈의 제안이나 답변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부모님이나 알렉시스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신문까지 조작한 것 같진 않았다.

‘……아, 행여 내가 알렉시스랑 각인할 때를 대비하신 걸까.’

황태자와 각인하는 여자가 한때 제국의 황녀였다는 증거를 미리 은폐하려고?

이게 어쩌면 가장 유력한 이유일 수도.

세실리아는 걸음을 멈추고선,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퐁레프 궁의 복도를 돌아보았다.

불현듯 바라본 복도는 길게 뻗은 채 햇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 복도를 몇 번이나 걸어봤더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이 지나쳤더랬다.

저기 저 샹들리에가 네 번 교체되었던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보석을 더 추가했고, 한 번은 초를 추가했으며, 한 번은 초를 빼고 마법 등으로 교체했고, 마지막 한 번은 마법 등의 색깔을 바꾸었었지.

천천히 손을 뻗어 벽에 있는 무늬를 짚어보았다.

지독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독히 넓은 곳이기도 했다. 어쩌면 한 시골 마을보다도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을 터.

……그러니 그녀가, 퐁레프를 기실 나가지 못한다고 한들 ‘감금’되었다고 표현할 순 없으리라.

‘쓸데없는 기분 집어치우고 머리나 굴려.’

세실리아는 반쯤 이를 악물고 자신을 채근했다.

불필요한 감정 따위에 시간을 쓸 여유는 없었다.

지금 그녀를 중심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 만큼, 그 상황의 실마리라도 최대한 빠르게 잡아채야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세실.’

넌 지금 무언가를 잊고 있어.

‘차분히 생각해.’

사교계를 거치며 단련된 그녀의 직감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며 경고했다.

천천히 벽을 짚은 손을 떼어내 창가로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 위로 나른한 저녁 햇빛이 옴폭 고이며 투명한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엄지에 닿은 햇빛과 약지에 닿은 햇빛이 다른 각도와 투명도로 반짝인다.

빛무리를 움켜쥐기라도 할 듯이 손가락을 움직여보다, 세실리아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선연한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해서.

이유가 다르다.

‘퐁레프에 있는 황궁 도서관의 신문이 조작된 이유와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의 신문이 조작된 이유가 달라.’

황궁 도서관의 경우 황족들을 제외하고는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

그러니 퐁레프의 신문을 조작하신 이유는…… 둘 중 하나지.

그녀의 눈을 가리거나, 후대의 눈을 가리거나.

‘내 눈을 가리신 것 같진 않고.’

그렇담 생-뢰크 중앙 시립 도서관의 신문이 조작된 건…….

‘중앙 시립 도서관은 뤼셍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들를 수 있어.’

만약 신문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언론을 조작하려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터. 그런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신문을 조작한 건.

‘이건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지.’

누구를?

구름이 태양을 가렸는지, 새하얗게 반짝이던 손바닥이 창백한 흰색으로 돌아갔다.

세실리아는 습관적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선 추측을 이었다.

지금 그 대상이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다른 가문도 아닌 뤼셍의 황실이, 기를 쓰고 누군가의 눈을 가리려 한다는 진실이 중요하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1) 뤼셍의 황실은 누군가에게서 진실을 감추려 하고 있다.

2) 세실리아 뤼셍은 머리색까지 숨기며 황실로 입양되어, 거의 퐁레프에‘만’ 머물렀다.

3) 뤼셍의 직계가 아닌 마법사들은 퐁레프에선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런. 씁쓸한 일화 하나가 생각나는걸.

한 귀족 남자가 제 부인을 살해했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말끔한 범죄였건만, 그는 다음날 곧장 자수하고선 감옥에 갇혔다.

양심의 가책으로? 아니.

부인의 오라비가 손꼽히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감옥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분명 살해당했을 터. 그 귀족은 알아서 옥에 들어갔기에 되레 생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 역겨운 이야기가 암시하는 건 하나다.

‘갇혀 살수록 더 안전할 수 있다는 것.’

세실리아는 꼽았던 손가락을 전부 펴고선 허리까지 단정하게 세웠다.

추측을 매듭짓지 못하는 이 심정이 비겁함인지 두려움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상황, 가장 빠르게 내려야 하는 결정은 내렸으니.

……그러니 되었다.

* * *

진실과 진심을 숨기는 행위는 익숙했다.

세실리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저녁 식사를 이끌 수 있었다.

티가 나지 않는 건지 블랑슈와 티에리는 식사 자리를 어색해하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보자마자 눈을 번뜩인 그들은, 디저트까지 포식하고선 감사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한 명은 기사고 다른 한 명은 마법사이기 때문인지 둘 다 먹성은 정말 좋았다.

‘저들의 식비가 조금 걱정되긴 한데…….’

뭐, 둘 다 리베 아카데미에서 일하니까.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들을 배웅한 뒤 세실리아는 가장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침실 문을 슬쩍 열어보니, 언제 어느샌가 가출했던 강아지는 아직도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함께 놀고 있으려나.

“찾으러 가야겠네.”

부러 소리 내어 뇌까렸다.

쌀쌀해진 밤공기를 각오하며 숄을 걸쳤다.

슬리퍼 안에서 온종일 혹사당한 발이 미미하게 신음했지만, 사소한 통증 수준이라 무시할 수 있었다.

방을 나서기 전 세실리아는 자세를 정돈하며 표정도 재차 가다듬었다.

거울을 보며 방긋 웃었다.

거울 속의 여자 역시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어 보인다.

수천 번 연습하고 반복했던 미소인 만큼 전혀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세실리아는 입꼬리를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려 보았다.

‘괜찮아 보여.’

그제야 안심하고는 문을 딸깍 열고 나섰다.

너무 늦은 시각은 아니어서 몇몇 사람들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황녀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예를 표했고, 세실리아 역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흘러내리려는 숄을 더 끌어올리며 우선 밖으로 나섰다.

습관적으로 세레인을 향해 움직이려는 발을 돌려, 정문 근처에 있는 풀밭으로 향했다.

알렉시스와 알리샤가 놀고 있던 바로 그 장소.

잎사귀 무늬의 그림자가 레이스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던 곳.

조용히 길가를 둘러보았다.

분명 시야에 담긴 색채는 암녹색과 무채색뿐인데, 어째 ‘그’가 들고 있던 사과의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잔디밭에 도착한 세실리아는 알렉시스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늘한 바람이 불며 머리카락을 간지럽혔지만, 반쯤 넋을 놓은 상태로 하염없이 서 있었다.

발을 돌려 알렉시스를 찾으러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초에 왜 여기로 왔담.’

그가 계속 이곳에 있을 리 만무한데.

차라리 알렉시스의 방을, 아니면 세레인으로 갔어야지…….

“멍청이 찾으러 오셨습니까?”

꽤 신랄한 어조였지만 빈정대는 기색은 없었다. 아주 희미한 장난기가 묻어 나올 뿐.

세실리아는 느릿느릿 발을 돌려, 가장 고결한 어둠을 빚은 듯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과는?”

“네? 어어…… 갖다 드릴까요?”

붉은 입술에 처음으로 당혹이 아롱다롱 맺혔다.

알렉시스가 퐁레프를 힐끗 돌아보는 모습을, 세실리아는 물끄러미 관찰했다.

“싱싱한 건 없을 수도─”

“내가 졌어.”

패배를 시인하는 말은 생각보다 쉽고 단순했다.

한순간 쨍 굳어버린 남자가 겨우 고개를 도로 돌린다.

혼란에 젖은 눈빛이 짙디짙었다.

밤처럼. 감정처럼.

그들 사이로 바람이 소리 없이 휘돈다.

그 속에 담긴 여름꽃 향기를, 풀 내음을, 그리고 남자의 청량한 체향을 오래오래 잊을 수 없으리라.

생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순간들이 여럿 존재한다.

그리고 세실리아 뤼셍에겐 지금이 바로 그 순간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찰나를, 절대 놓지 못하여 기억하겠지.

“내가 졌어, 알렉.”

어쩐지 울고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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