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추락의 빛깔
예쁘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샤르텐의 여름 정원은 청량한 빛을 머금었다.
오색찬란한 비눗방울이 동동 떠다니며 상큼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반투명한 마법 생화들이 피어나며 생동감 있는 정경을 완성했다.
파빌리온 위로 드리운 오묘한 빛깔의 무지개와 솜씨 좋은 정원사들이 길러낸 색색의 덩굴장미, 투명한 이슬을 머금은 짙은 녹색의 풀밭까지.
여름의 가장 완벽한 조각들을 모아 놓은 순간이었다.
그 찰나를 만끽하던 프란츠 사르디에 백작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르디에 백작 각하.”
“오페르 자작 영애.”
황녀의 수석 시녀, 칼리아 오페르가 그를 향해 정중히 무릎을 숙였다.
“<광야>의 작곡가께서도 참석하신 건…… 전혀 놀랍진 않군요.”
“황녀 전하의 부름이시니까요.”
“역시.”
세실리아 뤼셍이 프란츠 사르디에의 뮤즈라는 사실을 뤼셍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는 없을 터.
제아무리 은둔하는 천재 작곡가라 한들, 영혼을 울린다는 뮤즈의 부름엔 못 이기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각하. 샤르텐까지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애.”
“세상에, 프란츠! 설마하니 그대가 올 줄은 몰랐는데!”
새롭게 끼어든 음성에 칼리아와 프란츠는 눈만 흘끗 돌렸다.
프란츠의 친우인 스벤 파비앵이 손을 신나게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다들 화려하시더군, 봤어? 신문 단골들이 많이 계셔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칼리아가 새초롬히 입을 다무는 동안, 프란츠는 느긋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기 저어어어쪽에 외제니 리빌 남작 영애가 계시고.”
열둘의 나이로 등단하여 문학계를 들썩였다는 천재 시인 말이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 앳된 여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어어어쪽으로 가면 레니앙 공작 전하와 블리츠 후작 영식을 만나 뵐 수 있지.”
빅토르 레니앙과 프레데릭 블리츠. 각각 공작가의 소년 가주와 학술원의 수석 입학자 아니신가.
정치계와 학술계의 기둥이 되실 거물들.
프란츠는 제 머릿속 인물 도감을 뒤적여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맞다, 맞다, 프란츠. 그대 이번 피서에 새 뮤즈를 찾을 수도 있어!”
“음?”
“‘가브리엘 베스텐’도 왔다고 들었거든!”
지금 오페르 영애의 이마가 구겨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오랜 벗의 눈치가 바닥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바닥일 줄은 몰랐는데…….
친구의 둔한 신경에 감탄하며 프란츠는 샴페인에 담긴 딸기를 베어 물었다.
가브리엘 베스텐. 현재 최고로 손꼽히는 프리마 돈나.
“황궁 속 고고히 핀 꽃도 아름다우시지만, 우리가 당장 닿을 수 있는…….”
“스벤. 영애 앞이라네.”
칼리아가 서늘히 웃는다.
뒤늦게서야 그 냉랭한 호선을 알아차렸는지, 스벤이 화들짝 놀라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싸늘한 기색이 꽤 오래 유지되는 바람에 녀석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그를 구해 준 건 모순적이게도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가브리엘 베스텐 본인이었다.
정원 한쪽이 술렁이더니, 도도한 외양의 미인이 들어서며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당당하고도 오연했다.
쏟아지는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모두의 관심이 당연하게도 자신의 것이라는 듯.
풍만한 몸매를 강조하는 드레스는 과해 보이기는커녕 완벽했으며, 숨 막힐 만큼 그녀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매끈한 입꼬리에 얹힌 미소는 관능적이었고 새하얀 어깨 아래의 몸 선은 고혹적이었다.
손짓 하나로 수천의 관중을 홀렸다는 진정한 디바의 자태.
“이야…….”
스벤이 재차 요란한 탄성을 내뱉는다.
“이야, 진짜…….”
프란츠는 바보 같아 보인다는 충고를 하려다 말았다. 스벤이 두어 번 요란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뤼셍의 사교계를 최대한 잘 압축한 것만 같구먼.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고 말이야. 황녀 전하께서 이번 여름 내내 사교를 정말 열심히 하시려는 모양이야.”
아, 그의 벗은 진짜 눈물 나게 눈치가 없구나, 프란츠는 재차 깨달았고, 칼리아의 표정엔 ‘뭐 저런 바보 등신이 다 있지’가 여과 없이 노골적으로 쓰여 있었다.
프란츠는 저도 모르게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방향을 흘끗 쳐다보았다.
오페르 자작 부인이 바로 곁의 귀부인 한 명과 얘기하다 말고 딸을 향해 눈에 불을 켜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의 사나운 시선을 직감했는지 칼리아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힘내십시오.’
프란츠는 입 모양으로 속닥거렸고, 칼리아가 어쩌겠냐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러니까.
성인식에 인접한 나이의 청춘남녀들이, 그것도 보호자들의 참석 아래,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존재 자체로 싱그러운 이들이 함께 있으니 어째 아침 햇살마저 더 화사해지는 느낌마저 들지.
이런 착각까지 이는 이곳은 바로…….
정답. 바로 결혼 시장이다.
그의 아름다우신 뮤즈께서 아아아아주 작정하시고 거대한 맞선자리를 만드신 것이다.
‘브라보!’
그리고 이 모든 게 누굴 위해 열린 건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스벤은 제외하고─전부 눈치챘을 터.
프란츠는 고개를 들어 하늘 저 높이, 가장 고고히 떠 있는 태양을 눈에 담았다.
생-뢰크의 태양처럼 샤르텐의 태양 역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오만하며 압도적이었다.
자연스레 신문 기사 속의 남자가 떠오를 수밖에.
가히 경이로웠던 흑발 청년의 외모는 사교계를 들썩이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실제로 프란츠 사르비에가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는 뮤즈의 부름이라는 이유가 첫 번째요, 미래의 태양이 궁금하다는 속된 욕망이 두 번째이니, 말 다 했다.
“백작 각하, 파비앵 씨.”
어느새 시종들이 황급하게 돌아다니며 텅 빈 샴페인 잔을 수거하고 있었다.
“전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칼리아가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에, 프란츠와 스벤은 얼른 그녀를 향해 짧게 고개 숙였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영애.”
“나중에 봬요, 영애.”
“그럼 나중에 다시 뵐게요. 두 분께서도 부디 찬란한 여름 보내시기를.”
작별 인사를 남긴 그녀가 사람들을 조심스레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황녀의 수석 시녀인 만큼 이제 곧 도착할 이들을 저 앞에서 기다려야 할 터였다.
본래 자리를 찾아간 그녀가 곁에 선 이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기립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차츰 잡담이 그치었다.
활기에 가득 찼던 분위기가 가라앉더니, 고요하면서도 긴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별궁에서부터 걸어 나온 시종장이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불새의 축복 아래 영원토록 고귀하실 팔레티나의 직계, 마탑의 수호자이자 뤼셍의 태양이신 황후 폐하와 제국의 귀보이자 영원한 자랑인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약속한 듯 다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공손히 예를 표하는 사이, 흑발의 청년이 어머니와 누이를 에스코트하며 천천히 등장했다.
마침내.
드디어.
심장 빠르게 뛰는 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동안, 놀이동산을 방문한 애라도 된 것처럼 기대감에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의 실물을 보고 싶어 흥분이 요동쳤다.
……황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든 프란츠 사르비에는, 가장 처음으로 ‘보랏빛’을 목격한다.
정결한 황혼의 결. 고귀한 서녘 별의 광채였다.
드넓은 풀밭, 꿋꿋하게 피어난 여린 들꽃의 색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안락한 온실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라일락의 색이기도 했다.
차가운 빛인 걸까, 따뜻한 빛인 걸까.
감히 헤아릴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로 허덕이며…….
겨우 정신을 차려, 옆의 친우를 흘끗 응시한 프란츠는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가브리엘 베스텐의 등장 때만 해도 오두방정 떨었던 스벤은 지금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비단 그들뿐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외모에 익숙한 이들을 제외하곤 전부 굳은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니.
경외. 찬미. 동경. 흠모. 갈망.
해바라기처럼 피어난 시선들이 담뿍 담고 있는 감정들.
사람들이 붙박이처럼 넋을 놓은 채로 서 있던 바로 그때였다.
“어머.”
산들바람의 장난 속, 황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꽃장식이 제자리를 벗어나 사뿐히 날아갔다.
연보라색 수련이 하늘하늘 멀어지는 동시에 검은빛이 여인의 허리 쪽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짙은 밤처럼 장엄하게. 그보다 더 역동적으로.
그렇게 명화 같은 장면들이 연출되었고, 관람객들은 그 아름다움에 더 깊게 잠겨야 했다.
태연한 이들은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돌아보는 세실리아 뤼셍과 더 멀리 날아가려는 꽃을 날렵하게 낚아챈 알렉시스 뤼셍뿐.
동생이 신사답게 건네준 꽃을 여인이 생긋 웃으며 받아 들었다.
“고맙구나.”
“별말씀을.”
어떤 의미에선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이었다.
꽃을 주고받는 풋풋한 행동쯤으론 사교계에서 흔하디흔한 스캔들조차 나지 못할 터인데.
하지만 이 순간을 만들어 내는 배우들의 인물이 워낙 출중해서일까.
꽃이 날아가고, 그 꽃을 남자가 낚아채고, 여인이 웃으며 남자가 건넨 꽃을 받아 드는 그 모든 게 어째 오묘하게 아찔해 구경꾼들은 전부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럼, 여러분.”
찰나의 마법을 깨뜨리는 영롱한 음성.
어여쁜 미소를 지은 상태 그대로, 황녀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쥔 채 몸을 돌렸다.
“잠시.”
머리 모양을 다시 가다듬으러 떠나는 모양이다.
세실리아가 어머니와 동생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별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칼리아가 눈치 빠르게 그녀를 뒤쫓았다.
두 여인이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가로지르는 사이, 사람들은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작게 소곤거렸다.
“간만에 눈이 호강했네요.”
“두 분 전하께서 저토록 아름다우시니…….”
“하긴, 신문 볼 때마다 행복하다니까요.”
“이제 두 배의 행복이 되겠구먼.”
가볍게 수런거리는 소리 속에서 프란츠는 용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는 황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들 사뿐사뿐 멀어지는 발걸음을, 샌들을 신은 새하얀 발목을, 청량한 여름을 품고 아른거리는 치맛자락을 흠모하듯 쳐다보는 와중에도 그는 한 남자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떠나가는 이를 완전히 등진 상태였다.
고집스레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에서 그보다 더한 집요함이 읽힌다.
프란츠는 숨을 죽였다. 제 심장 뛰는 소리가 저 기민한 남자의 귀에 들릴까 걱정하면서.
위화감이 손을 칭칭 휘감는다.
온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이 긴장감을, 누구라도─심지어 스벤일지언정─느꼈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리 없겠지.
이건…… 보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엿보는 것 같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훔쳐보는 사이, 황태자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고는 그 손으로 흐트러지지 않은 제 크라바트를 더욱 단정하게 고쳐 맸다.
꽃을 건네주었던 손이었다.
‘신이시여.’
뇌리를 강타하는 깨달음에 프란츠는 순간 휘청일 뻔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확신이 너무 짙었다.
‘……아닐 리 없다.’
저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뇌리를 두들겨 패던 상념이 가라앉고 나서야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세상이 빙글 돈 건 아닐까, 했건만 샤르텐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쾌활했으며 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프란츠는 작게 속삭이며 결론을 내렸다.
그럭저럭 상황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뤼셍의 황태자에겐 반려를 택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실리아 뤼셍은 입양된─지독할 정도로 아름다운─황녀였다.
제국 전체가 반대하긴 하겠지만…….
프란츠는 황후의 곁에 서 있는 청년을 흘끗 응시했다.
승리의 뤼셍. 그 수식어에 맞게 강건한 남자였다.
모든 건 그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의 반려도, 혼사도, 인생도.
당장 그를 위해 열린 거대한 결혼 시장인 이 피서조차도.
프란츠 사르디에는 문득 자신에게로 날아왔던 초대장을, 종이와 봉투에 은은히 배여 있던 향을, 끝을 장식하고 있던 동글동글 어여쁜 서명을 떠올렸다.
저런…… 황녀 전하.
그는 자신의 뮤즈를 향해 진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아무래도 여름은, ‘전하’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모양입니다.
* * *
다각 관계 속 미쳐 돌아가는 치정극!
참다못한 황태자 전하의 폭발과 고백을 들은 황녀 전하의 경악!
진실을 알게 된 황후 폐하의 기절!
이렇게 재밌는 장면들을 상상했건만, 프란츠 사르비에는 예상외로 지루하디 지루한 피서를 견뎌야 했다.
‘망할…….’
대체 언제 고백하실 겁니까, 전하? 각인하셔야 하잖아요!
프란츠는 실망한 기색으로 황태자 쪽을 흘끔거렸지만, 알렉시스 뤼셍께서는 여느 때처럼 고고할 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반려를 찾아야 하는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그에게 연애의 기회가 없던 건 절대 아니었다.
쟁취욕을 자극하는 미남인 만큼 수많은 여인이 접근했다.
소꿉친구라는 블랑슈 휴스턴 후작 영애를 제외하고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미녀들은 전부, 그에게 한 번쯤은 다가갔더랬다.
서쪽의 장미라는 별칭을 지닌 엘자 일리스 백작 영애부터 시작해서 최고의 디바인 가브리엘 베스텐까지.
고전적인 수법에서 주변이 쑥덕거릴 만큼 파격적인 수법까지 다채롭게 유혹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담백한 반응을 내비쳤다.
그가 그나마 유의미한 반응을 선보인 건, 남편과 열린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로테인 남작 부인이 그의 크라바트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부인.’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다.
분노도, 경멸도, 짜증도, 혐오도 없는 평온한 목소리는 마냥 온화했다.
얼핏 들으면 기분 좋은 식사를 즐긴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로테인 남작 부인은 그 자리서 얼어붙었고, 방에 있던 다른 이들은 전부 뻣뻣하게 굳은 채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분위기를 살벌하게 바꿔놓았으면서 청년 홀로 태평했다.
그는 잠깐 침묵한 뒤, 손을 물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여자를 향해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적당히.’
그리고 끝이었다.
그가 독서를 재개하는 사이, 주위의 암묵적인 재촉 속에서 남작 부인은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갔다.
그날 저녁부터 황태자에게 다가가는 여인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레 피서가 지루하게 변해 버린 것이지…….
프란츠 사르비에는 소파 위에서 흐느적거렸다.
* * *
공감 능력이 오묘하게 박살 난 천재 작곡가는 몰랐겠지만, 알렉시스 뤼셍은 충분히 긴장감 가득한 피서를 보내고 있었다.
누이의 초대장이 도착했을 때 남자는 애완견과 놀아주고 있었다.
줄곧 풀 죽어 있던 흰색 강아지는, 샤르텐에 온 뒤 처음으로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댔다.
분명 봉투에 묻은 주인의 향을 눈치챘기 때문일 터.
맹렬한 앞발 공격 속에서 펼친 편지에는…….
내일 아침 9시.
물빛 정원에서 식사.
마지막으론 예쁜 글씨의 서명. 그리고 끝.
“……화나셨군.”
여자를 잘 알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남자는 정확히 짚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물빛 정원에 도착한 알렉시스는 곧장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버드나무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누이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새하얀 리본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여인은 마찬가지로 깨끗한 흰색의 여름용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하얀 장미가 어여쁘게 도드라진다.
길고 여린 목선은 역시나 완벽했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습까지 훑은 알렉시스는 그제야 발을 옮겨 야외 식탁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있던 여인이 기척을 눈치챘는지, 미미하게 자세를 틀었다.
“알렉.”
“좋은 아침입니다, 누님.”
의자에 등을 기대고선 제대로 맞은편을 마주한 순간, 세실리아가 예쁘게 웃었다.
드디어 그녀를 쳐다봐주냐는 듯. 그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다림이 그 기다림이 아니겠지만, 순간의 착각은 지독히도 달콤하여 그녀가 건네는 독이라면 기꺼이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게, 오늘도 날씨 좋네. 피서는 잘 즐기고 있니?”
“재밌게 즐기고 있습니다. 누님께서 완벽히 준비해 주신 덕분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세실리아가 빙긋 웃으며 청포도 한 알을 물었다.
입 안에 슬쩍 밀어 넣고선 혀로 이리저리 굴려본다. 발그레한 뺨이 연신 귀엽게 볼록거렸다.
포도알의 움직임을 묘하게 견딜 수 없어, 알렉시스는 결국 먼저 화두를 꺼내었다.
“……누님. 로테인 남작 부인의 일이라면 저도…….”
어쩔 수 없었다?
원만하게 대응한 것이다, 라고 표현해야 하나.
문장을 뭐라 끝내야 할지 몰라 그는 단어를 열심히 골랐다.
“그녀가 왜? 으음, 혹시 네게 또 다가갔니? 남작 부인이 그 정도로 용감한 이는 아닐 텐데.”
“그건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세실리아가 엷게 미소하며 포도알을 베어 물었다. 톡 새어 나온 과즙이 여인의 붉은 입술을 더욱 촉촉하게 만들었다.
“앗. 궁금해서 묻는 건데, 부인을 좋아하기라도 하니?”
그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현명해. 그녀는 너와의 사랑보단 하룻밤을 꿈꿨을 테니까.”
“…….”
“다만 남작 부인을 응징하고 싶은 거라면 말릴게. 그녀가 네게 ‘실질적으로’ 뭘 한 건 없다고 들었거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담 되었어.”
“저는…….”
알렉시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분명 왜 여자들을 안 만나냐는 둥, 그들에게 신경이라도 써야 할 것 아니냐는 둥, 저 얄밉고 예쁜 입술로 복장 터지는 소리를 속삭이리라 예상했는데.
“누님이…… 보다…….”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잘 알지 못하면서 잘 아는 여자가 웃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네게 여자 문제로 잔소리할 거로 추측했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뭐, 너도 네 각인엔 간절할 거잖니. 그런데도 네가 미지근한 건, 호감 가는 상대가 없다는 방증이겠지.”
아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뭔가 누님이라면 제 속을 더욱 세게 헤집을 거라…….
“네게도 언젠가 한눈에 끌리는 상대가 나타나리라 믿어.”
역시나.
어째, 원만하게 끝낸다 했었다.
알렉시스는 침묵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끝내 비꼬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언제나 세실리아 앞에선 애새끼처럼 심술궂게 변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누님치곤 지나치게 낭만적인 결론이시네요?”
“그야 난 몰라도, 넌 살아 있는 낭만이니까?”
상대가 응해 줘야 낭만이 되지 않을까요.
그는 결국 심술을 담아 가늘고 긴 손가락에 들린 포도알을 뺏어갔다.
“내 포도!”
“흥.”
세실리아가 다른 포도알을 집어 그에게 휙 던졌고, 알렉시스는 날렵하게 낚아챘다.
두 번, 세 번 열심히 시도해 보던 여인은 결국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가 포도알을 베어 먹는 걸 지켜보다 나붓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으니.
“어쨌든, 조심은 해. 내가 말했지? 처음 보는 여자들한테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말라고.”
“예?”
“뒤늦은 집착은 매력 없다고 가르쳤잖니.”
……아. 어릴 적 듀블렌 숲에서 하신 말씀 말인가.
여름의 신록이 가득했던 숲 속, 그녀의 무릎을 벤 채 부드러운 손길을 만끽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7년 전, 어린 그와 어린 그녀는 참 화목하면서도 다정했었는데.
‘우애’란 거짓말로 참 많은 걸 포장했기 때문이겠지.
기억 속의 소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가다듬는다.
현실 속의 여인이 평온한 낯을 한 채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알렉시스는 눈꺼풀을 한 차례 여닫은 뒤, 오래전의 대꾸를 똑같이 끄집어냈다.
“그렇담 저도 같은 답을 드리면 되겠군요.”
“…….”
“일찍부터 집착하면 되겠지요.”
“집착하는 상대는 있고?”
알렉시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세실리아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마리사를 목격하고는 마찬가지로 일어섰다.
“어머니.”
“좋은 아침이에요, 어머니.”
시녀인 디엘라 백작 부인과 함께 다가온 마리사는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의 부부 싸움을 목격한 자식의 표정이 저러할까.
그녀는 아들과 딸을, 그들 사이의 분위기를 살핀 뒤에야 느릿느릿 자리에 앉았다.
“너희 나이가 몇 살인데…… 내가 지금도 싸우지 말라고 잔소리해야 하는 건 아니지?”
“저희가 어렸을 때도 그 잔소리는 안 하셨습니다.”
알렉시스가 야무지게 짚는 것에 마리사는 끙 신음을 흘렸다.
“어쨌든…… 싸우지 말렴.”
“예, 어머니.”
“맨날 말은 잘하지!”
“말이라도 잘해야지요.”
둘의 실랑이를 듣던 세실리아는 결국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간만의 가족 식사였다.
* * *
마뉴엘 공국과의 회담, 올랭 요새의 이전, 보트렐리 회사의 후원 등 무거운 안건에 대한 논의가 끝난 건 디저트가 준비되었을 때였다.
마리사는 화색이 된 얼굴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산딸기 타르트를 두 입 냠냠 먹어 치운 뒤, 자식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각자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니?”
“전 방에서 <모래의 시간>을 마저 읽으려고요.”
뤼셍 제국의 철학사 전부를 담았다는 3,000pg 넘는 장서.
익숙한 제목을 알아들은 마리사는, ‘이제 방에서 나와 사교 좀 하지 그러니’라는 잔소리를 그만 포기해 버렸다.
“……힘내렴. 알렉, 너는?”
“저는 레니앙 공작과의 다과회가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밤엔 야유회에 참석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고요.”
“아, 그 야유회 재밌겠더라. 리빌 남작 영애의 낭송과 베스텐 양의 독창이 있다며?”
“그런가요?”
“그렇대. 시간이 되면 나도 참석할 건데, 세실, 너도 참석하지 그러니?”
“저는 괜찮습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대답. 기이할 정도로 망설임 없는 거절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아해할 수밖에.
알렉시스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으며, 마리사는 딸아이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그들의 깊어진 시선 속에서 여인은 천연덕스레 웃을 뿐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이.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진심으로.
……언젠가의 듀블렌 숲에서, 블랑슈 휴스턴을 구해준 뒤 보여주었던 바로 그 미소였다.
누님.
바로 튀어나올 뻔한 호칭을 억누르며 알렉시스는 이를 사리물었다.
이제는 다정한 미소 몇 번에 속는 10대 초반의 애새끼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위화감이 경보를 울려대고 있었다.
무엇이지?
저 미소는 대체 어떤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지?
그는 태연한 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알렉.”
세실리아가 다소 부자연스럽게나마 화제를 돌리려 노력한다.
맞장구쳐줄지, 아니면 어떻게든 파고들지 고민하던 알렉시스는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이 정확한 때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 누님?”
“아니, 별 건 아니고…….”
세실리아가 우물쭈물하더니 포크로 제 초콜릿 푸딩을 통통 쳤다.
탱글탱글한 디저트가 여인의 손길 아래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쁜 건 알지만, 일정 사이에 만약 시간이 나면…….”
“예?”
설마 자기와 같이 놀아달라는 달콤한 제안은 아닐 테고.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알렉시스는 잠자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고, 마리사 역시 호기심이 일었는지 몸을 슬쩍 기울였다.
“……알리샤 산책시키라고.”
“아.”
“‘아’는 무슨 ‘아’야? 우리 알리샤가 얼마나 똑똑한데! 산책 안 시켜주면 직접 문을 따서 뛰쳐나간단 말이야.”
그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애완견 주인께서 파르르 열을 올리시기 시작했다.
“거기다 아주 활기가 넘쳐서 있는 곳 없는 곳 다 헤집고 다녀. 물론 똑똑이니까 돌아오는 길은 잘 기억해서 잘 돌아오긴 하는데…….”
“…….”
“근데 알리샤에게 알레르기가 있다고? 샤르텐에 얄레 풀꽃이 없다는 확답은 들었지만, 행여 다른 풀꽃 알레르기가 있으면 어떡해? 만약을 대비해서 네가 직접 산책을 시켜야지!”
“……예.”
“앗, 그리고 혹시나. 강아지에게 초콜릿 먹이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 우유도 주면 안 돼!”
“알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가 아니라 ‘알겠습니다’라는 답변에 세실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라는 답이 맞긴 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정정하는 대신 누이의 폭탄 같은 잔소리를 감내했다.
도저히, 정말, 이해가 안 가서.
저 정도로 강아지를 애지중지하시는 분께서 왜 단 한 번도 강아지를 보러 오지 않으셨지?
알리샤가 그의 방에 머무른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날 만나기 싫어서?’
그렇담 차라리 처음부터 강아지를 자신이 맡겠다고 하면 되지 않았나.
세실리아 뤼셍이 그 쉬운 대책을 생각하지 못할 리는 없을 테고.
……상당히 모순적인 태도인걸.
“알렉, 듣고는 있어?”
“알리샤가 상당히 영리하다고 하셨습니다.”
“탈출을, 정말, 골치 아플 만큼, 잘한다고!”
“지금처럼 말이지요?”
“컹─!”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저 멀리서부터 강아지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실리아가 황급히 돌아본다. 깨져 버린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새하얀 강아지가 정원 저 끝에서부터 경쾌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건지 꼬리를 요리조리 신나게 흔들며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강아지의 순한 눈망울이 누구에게 고정되었는지 확연하여, 알렉시스는 피식 실소했다.
“컹컹─!”
다시금 요란하게 짖은 강아지가 포물선을 그리며 뛰어오르더니 이번엔 제 진짜 주인의 발치에 안착했다.
몸을 들어 상체를 그녀의 무릎에 척 올려놓는다.
“알리샤!”
그래, 고게 내 이름!
그렇게 말하려는지 알리샤가 경쾌하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애완견을 내려다보았고, 알리샤가 스르륵 무릎에서 내려가더니 주인의 구두를 두들겨 팼다.
타닥타닥.
다소 현란한 앞발 공격.
그러더니 이번엔 몸을 번쩍 치켜들어 다시 앞발을 주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알리샤…… 샤르텐에 있는 동안 알렉이 네 주인이라고 했잖니.”
찰싹. 새하얀 앞발이 무릎을 내려치는 소리.
절대 안 간다는 듯 강아지의 얼굴 위로 심술이 잔뜩 떠올랐다.
하지만 알리샤에게 다행이면서도 불행이었던 점은, 그녀의 주인이 다름 아닌 황녀라는 점이다.
만만찮게 오만한 고집불통인 세실리아 뤼셍이 화사하게 웃으며 못 박았다.
“안 돼. 돌아가.”
“컹커어엉…….”
주인 만난 기쁨에 쫑긋 솟았던 귀가 풀썩 가라앉았고, 알리샤는 꼬리까지 내린 채로 낑낑거렸다.
애처로운 그 모습을 보면서도 세실리아는 머리만 쓱쓱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컹…….”
강아지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인 듯, 그렁그렁해졌다. 이번엔 제 주인의 다리까지 꼭 결박하듯이 끌어안았고, 이빨로 아주 살짝 주인의 리본을 오물오물 물어뜯기 시작했다.
절대 안 떠나겠다는 듯. 당신이 너무 좋다는 듯.
녀석이 새하얀 머리를 세실리아의 무릎 위로 살포시 문질렀다.
마리사가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알렉시스는 제때 그녀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세실리아의 표정이 점차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올려다보는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간절히 꼬리를 흔들어대던 몸짓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던 고집이 무너져 내렸고, 세실리아는 몸을 숙여 알리샤의 목을 끌어안았다.
“……언니가 그렇게 좋아?”
“컹─!”
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강아지가 재빠르게 짖는다. 여인이 피식 웃으며 마침내 녀석이 바라고 바랐을 답을 내주었다.
“알았어.”
“…….”
“…….”
“……언니랑 함께 가자.”
“컹컹─!”
강아지가 기쁨에 날뛰며 정원을 누비는 동안, 세실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초콜릿 푸딩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행복한 결말인 게 마음에 드는지 마리사 역시 빙긋 미소하고 있었다.
“미안해, 알렉.”
“예?”
갑작스러운 사과에 알렉시스는 멈칫했다.
“네 의견을 먼저 물어야 했는데. 알리샤를 내가 도로 데려가도 될까?”
“물론입니다.”
“고마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내는 완전히 헝클어져 엉망이었다.
내가. 당신은.
그 미소는 정말이지─
뚝뚝 끊기는 생각을 이으려다 말고, 물끄러미 눈앞 여인을 관찰했다.
세실리아는 시선을 내린 채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예쁘게 말린 속눈썹의 끝에서 햇살이 부서졌다.
지금 순간 저렇게나 황홀하게 반짝거리는데도, 알렉시스는 그 모습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여인이 강아지를 끌어안던 그 짧은 찰나로 계속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때 그녀가 보여준 미소가 심장에 틀어박혀, 머릿속 전체가 곤죽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렇게 슬퍼하고 있었다.
* * *
왜?
빅토르 레니앙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그의 뇌리를 둥둥 떠다녔던 질문.
세실리아 뤼셍은 왜 슬퍼하고 있었을까? 애완견이 좋아 죽겠다고 표현해 주는데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애초에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토록 아끼는 강아지를 왜 맡긴 거지?’
세실리아 뤼셍은 알리샤를 아낀다.
7년간 정말 지극정성으로 돌봤으리라고 알렉시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그녀의 성정에서 나온 확신이 아니라.
알리샤의 견종이 그렇거든.
그 녀석들은 주인을 ‘간택’한다. 자신들을 진정 아끼고 사랑해 줄 사람들만 주인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왜 서러워해.”
대체 왜.
결국 씹듯이 내뱉어 버렸던 알렉시스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잣말을 엿들은 이가 있을까 저어되어서.
다행히 주변은 야유회 직전의 활기에 달아올라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들은 각자의 무리 속에서 떠들 뿐, 맨 앞 귀빈석에 홀로 동떨어진 황태자에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새삼스레 제 크라바트를 정돈했다.
공사다망하신 어머니께서 ‘나 결국 참석 못 하게 되었어’라고 전갈을 남기신 만큼 오늘 이 자리는 그가 독차지하게 되었다.
“미래의 태양을 뵙습니다. 영원토록 찬연하시길.”
한 여인이 다가와 그에게 사뿐히 인사한다. 홀터넥 드레스를 차려입은 이를 알아본 그는 고개를 짧게 까딱여주었다.
“베스텐 양.”
“전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저 끝에 서 있어도 될까요? 남작 영애의 낭송 이후 제 독창인지라, 무대에 오를 준비를 미리 해야 할 것 같거든요.”
베스텐의 눈이 가리키는 곳은 귀빈석 끄트머리의 구석 자리였다. 사교계의 구설수에 오르기엔 한참 부족한 곳.
알렉시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허락했고, 가브리엘 베스텐은 환히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별것 아닌데 뭐.”
기계적으로 대답하다 말고 휘어진 입술의 끝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미소.
세실리아 뤼셍과 가브리엘 베스텐은 얼굴 하관이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미소가 살짝 비슷하게 느껴져, 알렉시스는 속이 뒤틀렸다.
“전하?”
“……아무것도. 나중에 좋은 무대 기대하지.”
“영광입니다.”
베스텐이 공손히 예를 표하고 멀어졌다.
알렉시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 와인을 홀짝였다.
입안의 여린 살을 너무 세게 짓씹었는지 비린 맛이 미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가브리엘에게 세실리아의 미소에 대해 질문을 던질 뻔했다.
안 한 게 다행이지.
해서 애꿎은 소문이라도 났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팠을 테고…….
무엇보다 그가 모르는 세실리아를, 가브리엘 베스텐이라고 알까.
‘절대 모를걸.’
느리게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일곱 번의 종 치는 소리를 감상했다.
요란한 박수 사이로 오케스트라가 등장하여 야상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세실리아.
……세실리아.
느리고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선율을 들으며 그는 누이의 새하얀 발이 나풀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저물어가는 황혼 속에서 그녀가 강아지와 노닥이는 모습을.
이번 여름 샤르텐에서 그는 여인의 설움을 읽을 것이다.
반드시.
오케스트라 연주가 끝났을 때, 다시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알렉시스는 따라 박수치며 이번엔 외제니 리빌이 조심조심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딘가서 울려 퍼진 휘파람 소리에 영애가 뺨을 살짝 붉힌다.
“귀엽네.”
가브리엘 베스텐이 작게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알렉시스는 와인잔의 대를 만지작거렸다.
“시, 시작하겠습니다.”
외제니 리빌이 작게 속삭이더니, 이번엔 목소리를 한층 높여 낭송을 시작했다.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낭랑한 목소리가 여름 바람을 따라 울려 퍼졌다.
단 두 구절이었다.
채 식지 못한 침대가 어지럽다.
당신이 태운 남자를 기억하곤 계신가?
단 두 시구로 좌중이 싸늘해졌다. 정녕 저 단어들이, 대중의 앞에서 나왔는가 싶어서.
다시 여자를 상상하려 하던 알렉시스는 충격 속에 이마를 짚어야 했다.
내가 미친다, 진짜.
술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지옥 같은 고요가 주변을 으깨었다.
외제니 리빌만이 태연하게 자신이 지은 시를 계속 읊어댈 뿐.
밤이슬 젖은 구두가 노래한다.
모두 보시오, 여길 보시오!
내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건 남의 남자라오!
알렉시스는 이마를 짚은 손가락을 천천히 내려 이번엔 그의 미간을 짚었다.
황당함과 노여움 사이에서, 어떻게든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이상입니다.”
제정신이냐고. 미친 게지.
행여 어머니나 세실리아가 참석했다면 어쩌려고 저딴 천박한 시를 읊고 있어.
끝내 이를 갈며 고개를 쳐들었다.
외제니 리빌은 무대 가운데서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으며,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취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다리를 길게 꼬며 뇌까렸다.
“명성답게 어휘력은 풍부해, 응?”
“과찬이십─”
“이게 칭찬으로 들려?”
“…….”
“행간 읽는 능력은 눈물겹네.”
어설픈 미소가 떨리든 말든, 커다란 눈에 물이 고이든 말든 싸늘하게 일갈했다.
“꼴같잖으니 내려가.”
이번엔 가브리엘 베스텐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멈칫해야 했다.
저 미친 소녀는, 분명 시를 통해, 한 ‘미인’을 저격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하며, 취향이 갈릴지언정 누구나 미인이라 인정할 만큼 압도적인 미모를 지닌 오만한 ‘지배자’를.
그뿐이랴.
남자 경험이 풍부하다는 조건까지 있는 만큼, 암시하는 대상이 명백할 수밖에.
‘오페라의 여왕’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레이스 장갑 안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눈치채어 알렉시스는 한숨을 쉬어야 했다.
“베스텐.”
“……예, 전하.”
“그대가 원하면 난 이만 들어갈 수 있어.”
황태자가 샤르텐에 들어가 버리면 야유회는 자동으로 파한다.
가브리엘 베스텐이 눈을 크게 떴다가, 작게 미소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다소 크게 높여 선언했다.
“적어도 그 구두는 제 구두가 아닌 것 같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남의 손을 탄 적 없는 남자랍니다. 가르칠 맛이…….”
“입 다물고 올라가. 궁금해한 적 없어.”
가브리엘 베스텐이 시무룩해진 채 무대에 올라갔고, 알렉시스는 귀를 씻고 싶은 심정으로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그냥 처음부터 야유회에 참석하지 말걸.
수많은 이들이 천사 같다 찬양한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거듭 후회했다.
세실리아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 * *
독창이 끝나자마자 거센 박수와 함께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베스텐이 열렬한 반응에 화답하러 또 다른 노래를 시작하든 말든, 알렉시스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하면 충분히 자리를 지켰다.
그에겐 세실리아 뤼셍이 부족했고, 지금 바로 채우러 가야 했다.
하지만 잰걸음을 놀려 찾아간 누이의 방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강아지 짖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으니.
‘……산책하러 나갔겠군.’
정확하게 추측한 그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샤르텐 별궁에 있는 정원은 셋.
물빛 정원, 별빛 정원, 새벽빛 정원.
그중에서도 강아지와 함께 산책할 만한 정원은 어디려나.
알리샤가 수영을 특히 좋아하는 만큼 연못이 있어야 할 테지만 물빛은 강아지가 노닥거리는 걸 감시하기엔 지나치게 조형물이 많았다.
“새벽빛.”
알렉시스는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샤르텐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엔 황족만이 입장할 수 있는 특별 구역이 자리하고 있다.
문 너머에서부터 강아지 짖는 소리가 요란하여 알렉시스는 옳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컹컹─! 컹─!”
엇박자로 아주 경쾌하게 짖어댄다.
‘신나셨어, 아주.’
그는 피식 실소하며 들어섰다.
달빛 장막에 덮인 정원이 여름밤의 향긋한 정취를 자랑한다.
‘새벽빛’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곳곳에 피어난 은방울꽃들은 오묘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동트기 직전의 냉기를 머금은 듯 차갑게 느껴지면서도, 새로운 하루를 알리려는 듯 희망찬 빛깔이었다.
알렉시스는 느른히 시선을 굴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인을 찾아냈다.
그녀는 달려오는 강아지를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강아지.”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
심장에 그저 새길 수밖에 없는 음성.
“빨리 뱉어. 은방울꽃 입에 넣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르르─!”
“내가 못 살아요, 정말. 그러게 언니가 다른 곳으로 가자 그랬지.”
“그릉!”
“얼른 이거 놔.”
“으르르!”
“뱉어 빨리. 언니 말 잘 듣기로 하지 않았어?”
여러 번 실랑이를 벌이던 알리샤가 결국 은방울꽃을 뱉은 모양이었다.
세실리아가 열심히 칭찬한 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산딸기는 왜 가져 왔어? ……언니 먹으라고?”
“컹컹─!”
“어이구우, 고마워. 말만 좀 빨리빨리 잘 들으면 진짜 이쁠 텐데.”
은방울꽃을 아무렇게나 멀리 집어던진 세실리아가 이번엔 녀석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니다. 지금도 이쁘지.”
희고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오래오래 살아, 건강하게……. 알았어, 강아지?”
알리샤가 화답이라도 하듯 맹렬하게 꼬리를 흔들어댄다.
까슬한 혀로 주인의 얼굴을 열심히 핥으려 들었고, 세실리아가 피하려 노력하면서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런 그림자 없는, 맑고 깨끗한 희소였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우뚝 선 채로 말없이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다.
……언제였더라.
‘강아지,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한다니까?’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세실리아와 알리샤의 산책을 엿보았던 때가 있었다. 보슬비 내리는 정원에서 여인은 애완견을 열심히 어르고 달랬더랬다.
위화감이 또 한 송이 개화한다.
강아지.
‘알리샤’라는 이름이 아닌, ‘강아지.’
알렉시스는 손으로 눈을 덮었다.
왜 당신은, 알리샤와 단둘이 있을 땐─
“알렉!”
갑작스러운 부름에 그는 황급히 여인을 마주했다.
우연히 뒤돌아본 건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정돈했다.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한번 했으면서도.
“……좋은 밤입니다, 누님.”
“좋은 밤이 아니라, 왔으면 얘기 좀 해주지 그러니!”
“죄송합니다.”
그는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놀랍게도 세실리아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걱정 가득한 금빛 눈이 그의 얼굴을 세세히 훑는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미안할 필요는 없고…… 그냥 내가 좀 놀랐어.”
“죄송─”
“미안할 필요 없다니까. 괜찮니?”
알렉시스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미소는 매끈했으며 웃음은 자연스러웠다. 기민한 여자를 속이기엔 충분할 정도로.
어쩌면 이게 그들 관계의 문제점이면서도 재미있는 점일 수도 있겠다.
그들은 눈치가 빨랐지만, 속이는 연기를 잘했고, 당연히 서로를 잘 아는 동시에, 이상하게끔 서로를 몰랐다.
“누님을 봐서 좋네요.”
“……뭐라는 거니?”
“제 솔직한 심정?”
“그래봤자 지금 산딸기는 못 줘. 이거 씻어 먹어야 한단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마법으로 만든 물줄기가 나타나 산딸기 전체를 휘리릭 꼼꼼하게 헹구고 사라진다.
열심히 구경하던 세실리아가 돌아보자마자 알렉시스는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켰다.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산딸기를 그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특유의 달콤함을 씹으며 알렉시스는 이번엔 직접 산딸기를 먹여주었다. 열심히 오물거리던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상평을 내놓는다.
“내일 아침 디저트는 산딸기 타르트로 하겠어.”
“그러시지요.”
“너는 계속 산책할 거니, 알렉?”
“아마도요……. 같이 벤치에 앉아 있다 가실래요?”
“네가 원한다면.”
“부디.”
산딸기 한 알을 더 받아먹은 뒤, 그녀와 함께 근처의 벤치로 향했다.
알리샤는 그들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면서 정원을 헤집고 있었다.
그래도 주인의 경고는 똑똑이 새겨듣긴 했는지, 은방울꽃은 앞발로 툭툭 치기만 할 뿐 입에 담진 않았다.
그들은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벤치를 골랐다. 달빛 아래의 윤슬과 고요한 물결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위치였다.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알렉시스는 천천히 목을 젖혔다.
바로 옆에 앉은 존재 덕분일까,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들이 시끄럽긴커녕 자장가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크라바트 풀지 그러니? 답답해 보이는데.”
“답답하긴 하네요…….”
짧게 뇌까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자, 그의 어리광을 읽었는지 세실리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애가 되었어?”
대답하는 대신 침묵으로 졸랐다.
여인이 결국 그의 크라바트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는 몸을 숙여주었다. 고른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이걸 듣기 위해 내가 그것들을 견뎠었나.’
그는 새까만 머리칼을,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살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의 밤이면서 그의 낮이었다.
빛나는 태양을 볼 때마다, 광활한 밤하늘을 볼 때마다, 삶의 어둡고 찬란한 순간마다 그는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제 목 조르지는 마시고요.”
“쳇.”
어째 크라바트를 오래 붙들고 있다 싶었지.
알렉시스는 부드럽게 웃음을 터뜨렸고, 세실리아가 뚱한 얼굴로 크라바트를 쓱쓱 풀어주었다.
스르륵 풀어진 크라바트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손길이 우아하고도 유려했다.
“누님.”
내친김에 그는 세실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가 어리광을 부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오늘 밤의 여인은 다정해지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별다른 타박은 들려오지 않았으니.
“어깨 좀 빌려주세요.”
“빌리고 나서 묻는 건 뭐지?”
“양심 불량의 태도?”
“알면 되었다…….”
세실리아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이어 엄한 어조로 당부를 덧붙였다.
“어깨는 빌려주겠지만 자진 마라?”
“이야, 매정하셔라.”
“난 살아 있는 혈액 주머니가 되기 싫단다.”
“흥.”
애초에 그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있나.
알렉시스는 진실한 속내를 숨기며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닿는 곳엔 그의 손과 세실리아의 손이 아주 가깝게 놓여 있었다.
손가락을 조금만 뒤로 젖히면 맞닿을 정도로.
그 사이를 가로막는 건 달빛 한 줄기밖에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가까이.
세실리아가 문득 손가락을 움찔하더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 손을 물렸다.
때맞춰 그 미미한 동요를 포착한 알렉시스는 못내 즐거워졌다.
‘맘껏 의식하시지요.’
도장이라도 찍듯 가냘픈 어깨에 뺨을 비볐다. 자신의 간절함이, 맹목성이, 조금이나마 여인의 심장에 닿길 기도하면서.
그리고 저 멀리 달빛 융단을 밟으며 새하얀 강아지가 활기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경쾌한 발소리에 귀 기울이며 알렉시스는 질문을 곱씹었다.
……그래서 누님.
당신은 왜 알리샤를 이름으로 안 부르실까?
* * *
칼리아 오페르가 황녀의 침실로 뛰어든 건 아침 10시 반, 세실리아 뤼셍이 아침을 마무리하고 산딸기 타르트를 공략하던 시점이었다.
“찬연한 아침입니다, 전하.”
깊게 무릎 숙여 인사하는 시녀에게 세실리아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안녕, 키리. 좋은 아침.”
기다리고 있었어, 라는 말을 꾹 삼켰다.
진심이었다.
어젯밤 알렉시스의 이상한 행동을 반추해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확실했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절대로 말 안 해줄 것 같으니 어쩌겠나.
그녀가 직접 알아볼 수밖에.
그리고 세실리아에겐 믿을 만한 말벗인 칼리아 오페르가 있지…….
“전하, 전하. 어제 무슨 일이 벌어지셨는지 아세요?”
역시나, 칼리아가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조잘조잘 화두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책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발치에선 알리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니, 글쎄! 리빌 남작 영애가─!”
“남작 영애가?”
미리 준비해 준 타르트를 쓰윽 밀어주었지만, 칼리아는 포크를 비장하게 쥐기만 할 뿐이었다.
어제의 이야기에 붉은색 달콤한 디저트는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다.
칼리아가 와르르 쏟아내듯이 어젯밤 야유회에서 벌어진 일을 풀어놓았고, 세실리아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탄식을 흘리면서 반응을 내비쳤다.
칼리아가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했을 때쯤엔 그녀는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로 커다란 눈을 깜박여야 했다.
훤칠한 키, 압도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이라…… 흠.
“상세하게 알려줘서 고마워, 키리.”
“천만에요, 전하. 어제 저희가 전하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시나요!”
“그러니?”
“네에! 아 참,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칼리아가 타르트를 챱챱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실리아는 조심스레 어휘를 골랐다.
“글쎄…… 일단 베스텐 양에게 굉장히 유감인 사태지.”
“어우, 말도 마세요.”
칼리아가 포크를 요란하게 휘두르며 ‘표정’으로 욕했다.
“진짜 제가 베스텐 양이었다면, 음……. 네. 그녀가 평민이긴 하군요.”
그리고 외제니 리빌은 귀족이지.
가브리엘 베스텐이 어떤 억하심정을 느꼈든 간에, 귀하디귀한 귀족 영애에게 손찌검 하나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세실리아와 칼리아는 어정쩡한 침묵을 유지해야 했다.
신분제의 불공평함을 욕하기엔 그들 둘 다 자신들이 기득권자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마침 알리샤가 퍼뜩 잠에서 깨어났는지,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렸다.
세실리아는 손을 내려 새하얀 귓가를 긁어주었다.
주인의 손길에 녀석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다가, 휘리릭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돌아왔네요?”
“그렇게 됐어.”
칼리아가 살랑살랑 고개를 끄덕이다, 포크를 문 채로 속눈썹을 팔랑였다.
“……전하.”
“으응?”
“오후 세 시쯤인가, 리빌 남작 영애가 그녀의 살롱에서 어제 일에 대해 해명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도 참석하실 건가요?”
“딱히.”
“그으으으럼, 전하께선 대체 언제쯤 사교 활동을 시작하실 건가요?”
싱긋 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답을 회피하려 했거늘, 칼리아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퍽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특히 초롱초롱한 시선이라 양심이 찔리는 느낌까지 드는걸.
“일단 알렉의 사교가 우선이니까. 모든 게 자리 잡으면 나도 나갈게.”
“약속이십니다?”
“응. ……키리, 너는 살롱에 가지?”
“네.”
모시는 이를 대신해서 소식을 긁어모으는 게 시녀의 역할이기도 했다.
세실리아는 고맙고도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어 보냈고, 칼리아는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따로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실까요, 전하?”
“아. 음, 잠깐만.”
세실리아는 쪽지에 무언가 가볍게 휘갈긴 뒤, 반으로 접어 칼리아에게 건네었다.
“이것 알렉에게 전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기억이 살짝 헷갈려서 그런데, 블랑슈가 내일 돌아오는 게 맞지?”
“휴스턴 후작 영애요? 네, 내일 돌아온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과회 간소하게나마 준비해야겠네.”
“예,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나 고마워.”
세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두 여인은 짧게 서로의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칼리아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지자 이번엔 알리샤가 콩콩 걸음으로 나타났다.
다시 의자에 앉은 세실리아는 애완견의 콧잔등을 긁어주며 뇌까렸다.
“……너도 불길하지?”
외제니 리빌이 무슨 생각과 무슨 성격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녀는 제국의 황태자가 참석한 야유회에서 그런 시를 읊는 패기를 선보였다.
……왜?
“짝사랑?”
세실리아는 유력한 추측을 툭 내뱉었다.
앳된 여인이 좋아했을 법한 사람은 누굴까. 뤼셍의 영애들이 연모하며 앓는 첫사랑은…….
지금이야 알렉시스가 나타났으니 판도가 바뀔 순 있어도, 어쨌든 몇 년 동안은 다정다감한 성정을 자랑하는 금발 공작 빅토르 레니앙이었다.
그리고 빅토르 레니앙과 조금이라도 염문이 있던 상대는…….
“하.”
탄식이 절로 나왔다.
행여 불길한 추측이 맞아떨어진다면, 그녀의 최우선 목표는 ‘외제니 리빌을 사지 멀쩡하게 살려는 놓는 것’이 되겠지.
때마침 칼리아가 돌아와 쪽지를 건네주었다.
오후 2시경, 온천에서 물놀이를 같이하자는 제안에 대한 알렉시스의 답장이었다.
세실리아는 긍정의 답변을 확인한 뒤 생각을 재차 가다듬었다.
블랑슈와 티에리 경은 샤르텐 별궁 주변의 마법 결계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느라 내일 오후에야 복귀한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다행히 오늘은 온종일 바쁘시지.
……부디 아니길.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아니길.
부디.
* * *
프란츠 사르비에와 스벤 파비앵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칼리아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하마터면 달려갈 뻔했다.
블랑슈 휴스턴.
갈색 양 갈래머리의 여인은 다소 삐딱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껄렁하고도 반항적인 분위기를 두른 채 사납고도 전투적인 눈빛을 쏘아 보낸다.
“블랑슈!”
“……안녕, 키리.”
복장 때문이겠지. 칼리아는 정확히 짚었다.
블랑슈는 현재 남성용 셔츠에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 조합은 확실히 귀족 영애의 정석적인 옷차림은 아닌지라, 요란한 눈총을 꽤 받았을 터.
오랜 친우의 파격을 모르는 척하며 그녀는 냉큼 팔짱을 꼈다.
“지금 막 돌아온 거야?”
“응.”
“고생했어. 많이 피곤하지?”
“아니, 딱히. 그렇게까지 피곤하진 않아. 고마워. 언. 아니, 전하는?”
“전하께선 방에 계셔. 아주 열심히 독서하고 계시지…….”
칼리아는 모시는 이의 부탁을 제때 떠올려내어 덧붙였다.
“내일 다과회 같이하자고 하셨고, 넌 지금 피곤하지 않으면 나랑 같이 살롱에 가자.”
“응? 내가 왜?”
“가면서 내가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 줄게.”
블랑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순순히 끄덕였다. 하지만 발길을 멈칫하고는 창가를 돌아보았다.
“잠시만. 난 어딜 가든 내 감시자랑 함께 가야 해서.”
“감시자?”
“티에리 경.”
“아. 응.”
바랜 금발의 기사를 떠올리고는 칼리아는 짧은 침음을 흘렸다.
티에리 에스디어.
언제나 블랑슈의 곁을 맴돌고 있는 회색 눈의 미남자다.
하지만 ‘둘이 그렇게 붙어 있는데 정분나진 않았어?’라는 농도 안 나오는 이유는 ‘감시자’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임무 도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도, 블랑슈의 낯이 더욱 까칠해진 듯하다.
한껏 날이 서린 표정에 칼리아는 조심조심 벗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괜찮아, 블랑슈?”
“아, 응. 난 괜찮고…… 저기 왔네. 가자.”
금발 한 가닥이 딱 나타난 것만 같은데 블랑슈가 휙 몸을 돌린다.
칼리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는 친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를 낮춘 채 어젯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블랑슈의 눈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어떻게 생각해?”
“……그게 미쳤나.”
황녀 전하와는 달리 여과 없는 반응.
칼리아는 소리 죽여 낄낄거렸다.
“마법사도 아닌데 왜 폭주하고 지랄이래?”
“아이고 말, 말, 말. 블랑슈. 말조심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욕은.”
“그래서 우리 지금 정확히 어디 간다고?”
“리빌 남작 영애가 어제 일 수습한대. 그래서 그 수습 어떻게 하는지 구경하러 가.”
블랑슈의 얼굴에 순간 ‘귀찮아 죽겠다’라는 기색이 스쳤지만, 칼리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속눈썹을 팔랑였다.
절대 안 놓아주겠다는 듯 팔짱 낀 팔에 힘을 주니 블랑슈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가자.”
칼리아는 신이 나서 속도를 높였다.
* * *
프란츠와 스벤, 그리고 어쩌다 합류한 블랑슈와 티에리를 데리고 살롱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어젯밤 야유회에서 외제니 리빌이 무슨 깽판을 쳤는지 삽시간에 소문이 다 퍼진 모양이었다.
하긴,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그런 시를 읊었는데.
내일, 어쩌면 모레 안에 생-뢰크의 신문 기사로 뜰지도 모른다.
미친 게지, 칼리아는 근처의 파우치에 앉으며 신랄하게 평가했다.
그녀 바로 곁에 블랑슈마저 앉자 티에리 에스디어가 연어 카나페 접시를 직접 갖다주었다.
“고마워요, 에스디어 경.”
블랑슈 녀석이 짧게 시선만 까딱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둘은 싸운 게 맞는 모양이었다.
칼리아는 친구의 뾰로통한 입술 사이로 카나페를 살살 밀어 넣고는 자신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소리가 주변의 잡음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깃털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지자 방의 한구석에 자리한 무대 위로 외제니 리빌이 올라섰다.
어젯밤에 대한 반성이라도 했을까. 그렇게 기대했건만, 앳된 얼굴은 여전히 뻔뻔하기만 했다.
그래서였다.
칼리아는 불현듯, 아주 불현듯, 강렬한 불길함을 느꼈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이 직감은 사교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 특유의 생존본능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방만했던 자세를 고쳤다.
싸늘한 예감을 느낀 게 그녀만이 아니었을까, 가까운 곳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프란츠 사르비에 역시 미미하게 자세를 고치고 있었다.
그가 길게 꼰 다리를 풀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반성문을 읊으려고 사람들을 모은 것 아니었어?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순간.
외제니 리빌이 입을 열었다.
분명 어젯밤과 똑같은 목소리일 텐데, 완전히 달랐다.
꾸밈없어 다채로운 감정과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품은 채 그녀가 새로운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외제니 리빌이 왜 천재 시인이라고 인정받았는지, 등단하자마자 제국 문학계를 휩쓸었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그 계절로부터, 난 아물지 않는 상처를 계속 내 심장에 새기고 있어요.(C'est de ce temps-là que je garde au cœur Une plaie ouverte!)1)
담담하여 더 아릿했고, 슬프기에 더 감미로웠다.
단 7줄로 된 시가 심장을 긁는다.
언어 속의 감정은 밀려드는 물결이라,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흠뻑 젖을 수밖에.
‘이게 예술이구나.’
칼리아는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꼈다.
어젯밤 너무나도 못된 짓을 한, 누군가를 조롱하며 모멸감을 안긴 여자에게 홀려 버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다하다 저런 애의 시에 마음을 뺏기다니.’
다른 이들도 그녀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외제니 리빌이 새초롬히 입을 다물고 난 이후에도, 차마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
박수 치고 싶으면서도 차마 치지 못하는 마음이 모두의 표정에 역력했다.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던 때였다.
“……정녕 미치셨습니까?”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서리처럼 차갑게, 침묵하는 좌중을 가로질렀다.
바늘에라도 찔린 듯 사람들이 흠칫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한편 작곡가는, 프란츠 사르디에는 삐딱하게 앉은 상태 그대로 소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외제니 리빌이 천사처럼 웃는다.
“당신이 저지른 짓에 책임은 질 자신은 계십니까, 리빌 남작 영애?”
“…….”
“네가 정말 정신이 나갔지?”
“백작 각하. 외람되오나…… 저희는 각하께서 남작 영애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칼리아는 눈치껏 끼어들었고, 프란츠 사르비에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각 행의 첫 글자를 따보십시오.”
맨 첫 행의 첫 글자가 C. 그리고 다음은 E. 다다음은 C…….
익숙한 이름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칼리아의 옆에서 인영이 튕겨 오르더니,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살기가 폭사했다.
아니. 그냥 ‘살기’라 표현하면 안 될 수도.
말 그대로 눈이 회까닥 뒤집혀, 어떻게든 눈앞 상대를 찢어 버리려는…….
블랑슈 휴스턴이 외제니 리빌을 낚아채려던 찰나였다. 무대 코앞에서 그녀를 따라잡은 티에리 에스디어가 그녀를 간신히 제압했다.
“놔!”
“진정 좀 해봐.”
“놔, 저년 머리채를 다 뜯어 놓을 거야!”
“일단 진정 좀─”
블랑슈가 있는 힘껏 반항하며 이를 갈았지만, 등 뒤에서부터 누르는 힘엔 변함이 없었다.
“놓으랬지, 티에리 에스디어!”
와장창창─!
살롱의 유리창이 단번에 깨졌다. 이번엔 방 안 유리잔까지 모조리 흔들리자, 티에리 에스디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놓으라고, 망할 개새─”
커다란 손이 엄격하게 시야를 가린다. 갑작스러운 암흑에 놀란 여자가 얌전해진 사이, 티에리는 냉큼 그녀의 뒷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바닥에 축 늘어진 블랑슈를 그가 최대한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저…… 감, 사합니다.”
자신이 하마터면 즉사할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보다.
외제니 리빌이 쭈뼛거리며 건넨 인사에 티에리 에스디어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회색 눈엔 노여움과 경멸, 그리고 한심함만이 가득했다.
“글쎄요. 제가 원해서 당신을 구한 건 아닙니다. 당신이 좋아서 구한 건 더더욱 아니고요.”
“…….”
“당신은 선을 지나치게 넘었습니다.”
기사는 폭풍 휘몰아치듯 방을 떠나버렸다.
남겨진 사람들이 진실을 마주하도록, 이 기가 막힌 상황을 곱씹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러니까, 어젯밤 외제니 리빌은 천박한 시를 읊었다.
그리고 오늘 저 망나니께선 새로운 시를 낭송하면서, 어젯밤 시의 주인공이 ‘세실리아 뤼셍’이라고 공표했다.
방 안의 시선은 이제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황녀의 수석 시녀인 칼리아 오페르 쪽을 쳐다보고 있었으며─분명 그녀가 언제 방을 떠나 모시는 이에게로 향하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다른 한쪽은 외제니 리빌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철없는 영애가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지껄였다.
“어차피 그녀는 입양된 황녀잖아요.”
자신을 향한 아연한 눈빛들을 알고는 있을까.
방 안 한구석에서 리빌 남작 부인이 끝내 기절했지만, 누구도 깨우려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에겐 의식보단 무의식 상태인 게 나을 터였다.
“그녀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이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 있나요?”
외제니 리빌이 항의라도 하듯 다시 질문한다.
그렇지, 모르는 이 없지.
사람들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저 한심하디한심한 여자가 모르는 게 또 있다.
황녀가 기억을 잃은 채 입양되었던 건 엄연한 사실.
하지만 그녀가, 제국 황제와 황후의 딸로서 그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는 것 또한 엄연한 진실이다.
심지어 황태자조차도 제 누이를 싸고도는데 그녀를 건드려?
미쳤다고?
입양된 황녀가 정통성 없을지언정 그녀를 아끼는 이들은 권력이 넘쳐난다고, 이 돌은 망아지야!
“베스텐 양.”
외제니 리빌의 부름에 한쪽 구석에 있던 가브리엘 베스텐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프리마 돈마로 향하는 사뿐사뿐한 발걸음.
“어젯밤, 오해를 떠안겨서 죄송했어요.”
외제니 리빌이 배시시 웃었고.
“정말이에요. 진심은 아니었답니다.”
가브리엘 베스텐은 그야말로 ‘보름달 아래 춤추는 미친년’ 보듯이 응시해 주었다.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흘러간다.
누군가의 운명이 짧아지는 소리였다.
* * *
콰쾅─!
밖에서 들려온 굉음에 세실리아는 창가로 달려갔다. 나무가 그대로 뽑혀 날아가는, 표현 그대로 기함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블랑슈?”
너 내일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왜 티에리 경과 싸우고 있어?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기가 무섭게 선득한 예감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신이시여.’
세실리아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외제니 리빌의 살롱이 일찍 열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 블랑슈는 참석했을 테고, 거기서 분명…….
“강아지!”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알리샤가 경쾌하게 짖으며 등장했다.
세실리아는 커튼을 휙 내리곤 침실 가운을 벗어 던졌다.
“우리 5분 뒤에 놀러 나갈 거야, 알았어?”
“커엉!”
“준비해!”
“컹컹!”
알리샤가 알겠다는 듯 다시 짖었고, 세실리아는 슬리퍼를 벗으며 우당탕탕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스루 원피스까지 후다닥 갈아입고선 대충 머리카락도 손가락으로 휙휙 빗었다.
알렉은 지금 방에 있겠지? 설마 눈치채고 살롱으로 간 건…….
“안 돼.”
만약 외제니 리빌이 한 짓을 알렉시스가 알게 된다면…….
조금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만, 세실리아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시게 되는 것보다도 알렉시스가 알게 되는 게 가장 두려웠다.
알렉시스가 아직 안정화하지 못한 마법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그러니까…… 그냥.
알렉시스가 알면 외제니 리빌은 반드시 죽는다는 확신이 들어서.
논리적인 근거가 없기에 더더욱 강렬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막 데뷔탕트를 치른 앳된 영애를 죽이는 모습을 보이는 건, 미래의 군주로서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하는 모습이다.
외제니 리빌이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세실리아는 방문을 열고 알리샤와 함께 튀어 나갔다.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가느라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알렉시스의 방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렉!”
형식상 문을 두어 번 두드린 뒤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간 응접실이 비어 있어 불안이 치솟았다.
“컹컹!”
알리샤가 경쾌하게 짖더니 곁에 딸린 방문을 향해 돌진했다. 애완견을 따라 그 방으로 쳐들어갔던 세실리아는…….
“미안!”
곧장 돌아서야 했다.
용케 비명을 지르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며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알렉시스는 침실에서 탈의하고 있었다.
커튼에 가려진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도 형상은 확연했다.
군살 하나 없는 상체가 어떠했는지, 잔근육이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 있었는지,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골격이 어떠했는지 전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는 소리였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잊어, 세실.’
그녀는 열린 문을 통해 강아지가 도로 나가 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몸이 너무 완벽해서…….
‘잊어, 세실. 잊어.’
셔츠를 마저 입은 남자가 등 뒤로 다가온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러니까, 다시금 말했다시피 그 상체가…….
‘아니, 잊으라고!’
남동생의 몸이었다.
그리고 남동생의 몸이 완벽한 것만큼 쓸데없는 건 없다.
그제야 세실리아는 담담함을 되찾으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찰칵. 문이 잠기는 소리.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알렉시스가 팔을 뻗어 문을 닫아버린 모양이다.
옷은, 입고, 있네.
강건한 팔과 그 팔을 가린 새하얀 천을 바라보던 세실리아는 문득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실감했다.
그녀를 한 번에 끌어안을 정도로…… 그녀의 그림자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다란 체격의 남자를.
그녀 역시 나름 키가 큰 탓에 이렇게나 체격 차가 날 줄은 몰랐다.
세실리아는 가만히 남자의 소매 끝을 노려보았다.
나란히 서 있기 때문일까. 실제론 어디도 닿아 있지 않거늘, 온몸으로 남자의 열기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까딱하면 품 안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그렇게 결박당해…….
헛소리.
등 뒤의 남자는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뒤가 보이지 않기에 하는 바보 같은 상상이다.
목이 타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이 움찔거리는 것까지 전부.
남자의 눈빛이 움직이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뒷덜미를 헤집으며 귓불을 훑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다.
예의 그 보랏빛 눈이겠지. 심연보다 깊고 나락보다 어둑했던.
그리고 지금 그의 다른 손은 어쩌면…….
‘그만.’
그만, 세실. 거기까지.
아슬아슬한 무언가가 딱 부러지는 것 같은 순간, 세실리아는 참을 수 없어 휙 몸을 돌렸다.
줄곧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알렉시스가 느른히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가깝다. 지나치게.
“갑자기 쳐들어와서 미안한데…… 조금만 떨어져 줄래?”
“약속 시각은 지금이 아니었을 텐데요.”
“조금 더 일찍 놀고 싶었어.”
알렉시스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세실리아는 할 수 없이 뒷걸음질 쳐 문에 바싹 붙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혀 자비를 내주고 싶지 않은 건지 그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다가왔다.
“정말로?”
“……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누님께서 이 차림으로 나오셨다고요?”
“내 옷차림이 어때…… 엉망이네.”
세실리아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하도 급하게 나오느라, 시스루 원피스 위에 침실 가운을 걸치고 나오는 걸 깜빡했다.
‘망할.’
안의 굴곡이 훤히 다 보이는 것에 볼이 다 화끈거렸다.
알렉의 방까지 오는 길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무엇보다 유모나 키리가 알았더라면 당장 뒤로 넘어갔겠어.
그녀의 긍정이 기가 차는지, 알렉시스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세실리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녀는 일단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척하다가, 퍼뜩 뒤돌아보았다.
“나 근데 이 상태로 다시 나갈 수도 없잖아.”
제비꽃색 눈이 가늘어졌고, 세실리아는 방긋방긋 웃었다.
“네 옷 빌려주라아아, 응?”
“…….”
“제국 황태자까지 되어서 쩨쩨하게 안 빌려주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그 차림으로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이 누구시죠?”
“미안…….”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노라니, 알렉시스는 결국 봐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손짓하는 것에 세실리아는 냉큼 곁으로 달려갔다.
그가 건네준 흰색 셔츠를 입자마자 시원한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그녀를 포근히 덮는 이 익숙한 향을 모를 리 없었다.
알렉의 체향.
살짝 후회되긴 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옷을 챙기러 간 사이, 알렉시스가 행여라도 정황을 눈치채고 외제니 리빌을 잡으러 가면 안 되었으니까.
……알렉, 아직 모르는 것 맞지?
“그럼 이제 가볼까요?”
세실리아는 제게 에스코트를 청하는 남동생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강아지를 챙기는 청년의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누이와 오랜만의 물놀이를 정말 고대하는 듯 들뜬 것 같기도 했고.
다행히도, 아주 다행히도, 아직은 모르는 것 같다.
“응.”
세실리아는 감사 기도를 올리며 동생에게 손을 건네었다.
하지만 그들이 별궁의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온천이 있는 별빛 정원으로 가기 위해 발을 돌린 세실리아와는 달리, 알렉시스는 우뚝 멈춰 섰다.
“알렉?”
그가 잠자코 그녀를 내려다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눈빛으로.
남자는 막막해 보이기도 했으며, 절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실리아는 겁을 덜컥 먹었다.
“……알렉?”
그 부름이 무슨 신호라도 되었던 걸까. 알렉시스가 자유로운 다른 손을 끌어다 느릿느릿 제 얼굴을 가렸다.
까득, 이 가는 소리가 선연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
“미치겠습니다, 진짜.”
그가 짓씹듯이 내뱉은 말.
“알…….”
휙 손을 빼낸 알렉시스가 발을 휙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세실리아는 반쯤 뛰다시피 따라잡아야 했다.
“알렉, 알렉……!”
거듭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데도 그는 매정하게끔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살롱에 도착한 알렉시스가 쾅 요란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무례한 침입에 안에 있던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흑발의 청년을 본 순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올 사람이 마땅히 왔을 뿐이었다. 정신 나간 영애는 이제 완전히 끝났을 뿐이고.
“외제니 리빌.”
황태자가 명령한다.
평상시의 건조하고도 나른한 음성과는 완전히 달랐다.
로테인 남작 부인의 유혹을 저지할 때 들려주었던 평온한 어조와도 완전히 달랐다.
상대를 그대로 짓씹고 싶어 하는, 목을 비틀어 뜯어버리고 싶다는 듯한 분노가 마디마디 처절하게 날뛰고 있었으니.
냉기 가득한 목소리가 죄인을 도륙했다.
“나와.”
그리고 외제니 리빌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몸이 덜덜 떨려 움직이지 못했다.
창백하게 질린 채 경련하는 영애를 향해 알렉시스가 매끈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젠 황태자의 명령마저 무시하나…….”
분위기가 한층 더 싸늘해진다. 세실리아는 얼른 동생의 옷 소매를 붙들었지만, 그는 신경조차 안 쓰는 듯했다.
“하긴, 황녀에게 그런 모욕까지 하는 정신머리인데 황태자의 명령쯤이야 우습겠지.”
지금 나가, 멍청아!
지금 나가야 살아는 남아!
사람들이 전부 철없는 망나니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충고를 던졌다. 그러나 외제니 리빌은, 불행히도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들의 종용을 읽지 못하였으니…….
몇 분간 밖에서 기다려 주던 황태자의 인내심이 드디어 끊겼다.
그가 누이의 손길을 떨쳐내고 유유히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몇몇 이들은 눈을 내리감았다.
어디선가 단두대 칼날 떨어지는 환청이 들린 탓이었다.
“알렉.”
그리고 동생을 부르는 황녀의 목소리.
참 기이하게도, 황녀는 황태자를 말리는 듯했다. 본인이 어떤 모욕을 받았는지 분명 모르진 않을 텐데도.
사람들의 눈빛이 순간 칼리아 오페르 자작 영애에게로 쏟아졌고, 황녀의 수석 시녀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자신이 제 본분을 다했음을 알렸다.
‘……그럼, 대체 왜 말리는 것이지?’
관람객들은 다시금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려 남매의 실랑이를 지켜보았다.
동생의 소매를 꼭 붙든 황녀의 새하얀 손은 간절하고도 애처로웠지만, 황태자는 강건하기만 했다. 매달리는 누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으니.
황녀 역시도 결국 반강제로 끌려오다시피 방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거침없이 발을 옮긴 황태자가 무대 위로 올라가 외제니 리빌을 내려다본다.
공포를 못 이긴 여자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간간이 정적을 깨는 소리가 시끄럽고도 비굴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빈정거리는 미소도, 조롱하는 비웃음도 날리지 않은 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죽음 같은 보랏빛 눈으로.
죽음을 알리는 선득한 시선으로.
아까 블랑슈 휴스턴 후작 영애의 난동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황태자의 건조한 표정은 살의를 감추지도 않은 채 그대로 쏟아붓고 있었다.
차갑다.
지친 병사의 발가락을 얼려 그대로 떨어지게 만드는 참혹한 겨울처럼. 맹아들이 추위에 전부 얼어 죽어, 봄이 와도 꽃은 피지 못할 듯이…….
자비 없는 계절이었다.
“네가.”
마침내 입술을 가르고 튀어나온 건조한 목소리.
버석한 음성에 절망까지 묻어나와, 지켜보던 이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
“알고 있나, 리빌?”
요란한 딸꾹질이 이어진다. 앳된 여자는 숫제 숨이 넘어가 질식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푸르죽죽하게 변해 가는 낯짝을 향해 거침없이 경멸을 꽂아 넣었다.
“내 누이를 조롱할 땐 거침없더니, 내 앞에선 입을 참 잘 다물고 있어?”
“…….”
“몇 시간 만에 혀가 잘린 건 아닐 테고.”
“…….”
“입 열어. 내가 열기 전에.”
“알렉.”
줄곧 동생의 소매에 매달려 있던 황녀가 마침내 끼어들었다.
아까의 당혹은 갈무리한 건지, 귀한 분께선 느긋하면서도 평온한 자태를 되찾은 상태였다.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리는 손짓은 미미한 권태감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 잠시.”
동생의 셔츠 소매를 놓아준 황녀가, 이번엔 황태자와 외제니 리빌 사이로 천천히 끼어들었다. 선득한 시선으로부터 여자를 정확하게 가리는 위치였다.
제 발 뻗을 곳을 직감한 죄인이 다급히 황녀의 뒤로 몸을 숨겼고, 영악함을 목격한 황태자의 눈에서 선득한 낙뢰가 쳤다.
“진정 좀 하고─”
“비키십시오.”
그래도 누이를 향한 말이어선지 어조는 부드럽다.
세실리아 뤼셍이 단정한 자세로 동생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겨울의 다른 결을 머금고 있는 황금색과 보라색이 맞붙으며 주변을 얼렸다. 오만과 오만이 충돌했고, 고집과 고집이 뒤엉켰다.
“누님.”
남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탁했다.
온갖 감정이 들끓고 있어도, 일단은 꾹꾹 눌러놓았다는 게 티가 나는 어조.
고삐가 망가진 순간 그대로 폭주해 버리겠지.
그럼에도 황녀는 말없이 턱을 살짝 들었을 뿐이었다.
“당신께서 이렇게 안 하셔도, 리빌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결정을─”
“제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헷갈리지 마십시오.”
“…….”
“누님 뒤에 숨은 저 영애가 결정했지요. 자기 입으로. 직접.”
황녀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편, 그녀 뒤에 숨어 있는 외제니 리빌이 헐떡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동정심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가련한 연기였지만…….
물론 역효과였다.
황태자의 눈이 완전히 돌아 더한 난폭함을 머금었으니.
“세 번째 말씀드립니다. 부탁드리건대.”
황태자가 한 발짝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어둑한 그림자가 여자와 소녀를 탐욕스레 집어삼켰다.
저에게 드리운 그늘 속에서 황녀는 고개를 더욱 젖혀 동생을 마주해야 했다.
황태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내려다보았고, 황녀는 오연히 고개를 치켜든 채로 올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평행선이 팽팽하게 그려지고 있다.
절대 서로를 향해 굽어지진 않더라도, 언제까지고 서로를 지켜보고 있을…….
“부디.”
적막에 푸르른 날이 섰다.
속내를 파악하고 진의를 해부하기 위해 더욱 날카로워진 침묵이었다.
그리하여 무언으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저 둘만 알 수 있을 터.
황태자가 누이를 향해 느리게 몸을 숙였다. 위압감이 더해졌을 텐데도 황녀는 여전히 심상했다.
“비켜주세요.”
“안 돼.”
“‘싫어’도 아니고 ‘안 된다’라.”
상체를 여전히 드리운 채로 황태자가 피식 실소했다. 맥빠진 웃음엔 조롱의 기색 하나 없다.
“누님.”
그렇게 돌아온, 안온한 부름. 봄바람 살랑이듯 부드럽고 꽃이 피어나듯 다정한…….
황태자가 도로 몸을 젖힌 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자, 지켜보는 이들은 전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대로 물러나시려는 건가?’
정말로?
하지만 외제니 리빌이 친 건 그야말로 대형사고─
“제가 제 권위로, 당신의 권위를 찍어 누르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부디, 작게 덧붙이는 황태자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기색까지 품고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칼바람 몰아치는 듯 단단하게 변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까요. 비키세요. 당장.”
“내가 피해자야.”
“그래서─”
“그러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의 우선권은 내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당신 뒤에 있는 저 미친 여자애를 곱게 놓아주시게? 그 자리에 안 계셔서 제대로 실감 못 하실 수도 있겠지만.”
어젯밤 적나라했던 시를 떠올린 탓일까, 황태자는 끝내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날렵한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주먹도 꽉 쥐고 있던 건지 푸르스름한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알렉.”
황녀가 옅은 한숨을 내뱉더니, 조심조심 팔을 뻗어 동생의 손을 톡 건드렸다.
새가 정겹게 부리로 한번 쪼는 듯한 동작.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가벼운, 친밀한 접촉이었다.
황태자가 경직하며 손끝을 움찔할 수밖에.
솜씨 좋게 동생을 고장 내버린 황녀가 어깨너머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도 알아, 네가 얼마나 속상해하는지도.”
“하…….”
“다만 난 네 생각만큼 그렇게 물러터지진 않았단다.”
‘당신이?’라는 표정이 황태자와 엿듣는 구경꾼 모두에게 퍼져나갔지만, 황녀는 꿋꿋하게 무시했다.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선 서늘한 눈빛을 덮어쓴다.
“리빌 남작 영애.”
황녀의 목소리는 황태자의 것만큼 서슬 푸르진 않았지만─확실히 살의는 없었다─듣는 이를 주눅 들게 할 정도로 충분히 싸늘했다.
“방에 돌아가 자숙하도록. 영애는 내게 세 개를 빚졌어.”
“……하지만.”
“하지만?”
외제니 리빌이 뭐라 종알거리려던 찰나, 황녀가 느리게 돌아섰다.
금빛 시선 속 가득 박힌 귀찮음에 망나니는 숨을 훅 들이켰다.
차라리 경멸과 짜증이 더 나은 반응이었을 수도 있겠다.
황녀는 그녀를 아예, 아예…….
세실리아 뤼셍은 그 망할 입을 닥치게 만들며 덤덤히 뇌까렸다.
지루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은 음성은 다른 의미로 냉혹했다.
“날 모욕했고, 내가 초대한 귀빈들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며, 무엇보다 내 동생을 화나게 했지.”
“…….”
“내일 내가 불렀을 때 이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가져와야 할 거야. 내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지 못한다면…….”
한쪽 입꼬리가 매끄럽게 당겨진다. 조소도 희소도 아닌 미소가 어여쁜 입술 위에 곱게 얹혔다.
“글쎄. 유감이겠어.”
* * *
유감의 대가는 그녀가 치르는걸…….
세실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앞의 남자를 흘끔거렸다.
잘생긴 낯 한가득 불편한 심기가 너울거렸다.
살롱에서 벗어나, 온천 옆 파빌리온에 도착할 때까지 알렉시스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간간이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살벌한 침묵이었다.
“어디 가니?”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녀석이 불현듯 일어서더니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세실리아는 냉큼 붙들었고─궁 안으로 돌아가 외제니 리빌을 털어버릴까 두려웠다─알렉시스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까딱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 약연이 끼어 있었다.
“여기서 피워도 돼.”
“그러시다면.”
알렉시스가 다리를 길게 꼰 채로 약연을 물었다.
곧이어 끄트머리에서 어슴푸레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구불구불한 은빛 뒤에선 보랏빛이 여전히 집요하게 일렁였다.
그렇게 심연이, 그녀를 가둔다.
옴짝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깊게. 빠져나올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아득하게.
밀도가 빽빽한 눈빛에 숨이 막혔다. 담배가 아니라 그녀를 태우는 것 같다.
세실리아는 살갗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버티지 못하며 시선을 끌어내렸다. 남자의 도드라진 목울대를, 너른 가슴팍을, 유려한 손가락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바로 그때, 나직한 욕설이 들려왔다.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볼 수밖에.
알렉시스가 불현듯 신경질적으로 약연을 비벼 껐다.
크라바트를 더욱 단정하게 고쳐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알렉?”
그를 쫓으려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남자는 온천 앞에 도착해서야 발을 멈췄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날렵하게 몸을 던진다.
그는 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수면 위로 재등장했다. 물 밖으로 나온 뒤 젖은 머리를 대충 쓱쓱 정리한다.
온몸에서 물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파빌리온으로 돌아온 알렉시스는 세실리아의 바로 앞 탁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 사이에 그녀를 가둬 버렸다.
“그럼, 누님.”
알렉시스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형체를 허락받지 못한 채 들끓는다.
“얘기 좀 합시다.”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눈동자 속의 열기가 훨씬 확연하게 느껴졌다.
뺨은 물론이고 얼굴 전체가 타오르는 듯하여,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물렸다.
그래봤자 남자의 다리 사이에 여전히 갇혀 있을 뿐이었지만.
“무슨, 얘기?”
저도 모르게 말이 뚝 끊겼다.
세실리아는 소파로 몸을 깊숙이 묻으며 동생을 마주했다.
‘빌어먹을 저 눈.’
알렉시스가 먼저 욕을 했기 때문일까, 그녀 역시 천박한 표현을 떠올려 버렸다.
“뭐겠어요?”
“리빌 남작 영애는 막 사교계 데뷔를 치뤘단다, 알렉. 그녀는 아직 어려.”
“어리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단언컨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고요.”
아이고, 머리야.
“누님께서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르신다고 믿고 싶지 않은데.”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세실리아는 미간을 지압했다.
“어린 나이라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미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입니다. 그 정도 나이면 책임을 모를 리 없습니다.”
“…….”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져야 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도리고요.”
“…….”
“누님께선 당연히도 그녀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습니다. 날 데리고 이곳으로 오려는 게 아니라.”
도도도 이어지는 폭격 속에서 세실리아는 겨우 답변할 틈을 찾았다.
“알아, 알렉. 알고 있어.”
“아, 그러셨군요.”
“비꼬지는 말아주렴.”
세실리아가 담담하게 속삭이자, 잔뜩 젖은 남자의 눈빛이 사납게 이채를 번뜩였다.
그녀를 짓누르듯, 감정들이 내다 꽂히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 나는 모든 사람의 성장 속도가 다 다르다고 생각한단다. 우리야 책임을 일찍 배웠겠지만 리빌 남작 영애는─”
“누님.”
“응.”
“재차 말씀드리지만, 제발 나이를 변명으로 쓰지 마십시오. 가장 치졸하고 어이없는 핑계입니다. 저는 저 나이 때 마탑에 있었습니다. 마탑에서 전.”
알렉시스가 말을 끊었고, 세실리아는 잠자코 고개를 기울였다.
비스듬한 각도에서 바라본 남자의 얼굴이 미미한 짜증으로 물들었다.
“마탑에서 넌?”
“……제가 누리는 모든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는 아는 나이였습니다.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요.”
“그래서 마탑에서 넌 도대체 뭘 겪었는데?”
말을 돌리지 말라고 지적하자마자 알렉시스가 입을 다물었다.
세실리아는 이번엔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무언으로 종용했다.
답해, 알렉. 제발 대답해 줘.
내가 널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남자는 완전히 넘어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젖은 손으로 그녀의 무릎을 감싸 쥐며 고집스레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마치 그녀에게서 무슨 해답이라도 찾는 것 같았다.
세실리아는 눈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여전히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는 보랏빛은 여유로우면서도 절박했다.
따스하고도 냉정했으며, 절망적이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금방 미쳐 날뛰겠다는 낯빛을 하면서도.
알렉시스는 알고 있을까.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되레 그녀가 절망스럽게 변한다는 것을.
모든 게 막막하고 아득해지는 느낌에 하는 수 없이 눈을 계속 맞춰야 했다.
그가 그녀를 샅샅이 뜯고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누님.”
알렉시스가 작게 속삭였을 때였다.
어디선가 컹컹 경쾌하게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원 깊숙이서 알리샤가 나타났다.
주인의 위치를 눈치챈 강아지가 망설임 없이 파빌리온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알리샤!”
세실리아가 손을 흔들었을 때, 알렉시스가 나직하게 정정했다.
“‘강아지’겠죠.”
“…….”
“누님께서 저 강아지랑 단둘이 있을 때마다 이름을 안 부르고 ‘강아지’라고 부르시는 걸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세실리아는 삐꺽이는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달싹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목도하면서도 남자는 냉정하게 쐐기를 박아넣었다.
“뭐, 2년 뒤면 저 녀석도 더는 ‘강아지’라고 못 불리겠지만.”
“그런, 적, 없어.”
“연기 잘하시잖아요, 누님. 기왕 하시려면 완벽하게 하세요. 방금 거짓말은 눈물겨운 수준이었습니다.”
냉혹한 평가에 세실리아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무릎을 계속 쥐고 있는 남자의 손에 떨림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것처럼 까발려지는 제 동요에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그래서 누님. 당신께선 대체 왜 알리샤를, 이름으로 안 부르실까?”
“녀석을 혼내려고 한 모양…….”
“거짓말하실 거면 완벽하게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실리아는 참지 못하고 잘생긴 상판을 노려보았다.
분노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눈초리에도 남자는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알리샤를 싫어하나? 그것도 아니지요. 저 강아지 아끼시는 거 다 티가 나던데.”
“알렉.”
“그런데 왜 단둘이 있을 때면 이름으로 안 불러주시는 거지?”
“제발 입 다물어. 조용히 해!”
“정이라도 떼려는 듯이.”
세실리아는 이를 다물었다.
분노를 머금고 번득이는 황금색 눈동자에도 알렉시스는 마냥 태평할 뿐이었다.
그녀와 싸우려고 작정한 것일까.
도저히 참지 못한 세실리아는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서려 했지만, 무릎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망치지 마세요.”
“…….”
“그토록 아끼는 강아지의 이름을 안 불러주시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럼 넌 마탑에서 대체 무엇을 겪었는데?”
쏘아붙이자마자 알렉시스가 작게 탄식했다.
“너는 아무것도 얘기 안 하고, 나는 다 털어놓아야 하고?”
“…….”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니? 네가 아무리 다 가지는 게 익숙한 위치라고 해도? 적어도 너부터 답을 해야 내가 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
남자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주눅 들기엔 눈앞의 남자가 ‘알렉시스 뤼셍’이라, 세실리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거침없이 분노를 드러냈다.
“내게 질문하기 전에 너부터 대답하렴. 넌 대체 마탑에서 무엇을 겪었는데?”
지금껏 그녀를 잘 몰아가던 입술이 딱 다물렸다.
세실리아는 그게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차서, 결국 하늘을 향해 눈을 굴렸다.
“내가 미친다, 진짜. 뭐 하자는 거니?”
“…….”
“알렉시스 뤼셍.”
알렉시스가 흘끗 시선을 피하더니─이게 가장 어처구니없었다─이를 악문 채로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녀석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여닫는다.
그가 시간을 쓰는 만큼 그녀에게도 시간이 주어지는 터라, 세실리아 역시 평온을 되찾아갔다.
말다툼한 게 언제냐는 듯 그들은 냉정한 낯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눈빛은 서늘하고 표정은 견고하다.
오만한 남자와 오만한 여자는 자신의 빈틈 하나 허락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넘어갑시다.”
알렉시스가 작게 뇌까린 결말에, 세실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여주었다.
어차피 그녀도 질문에 대답해 줄 용의는 전혀 없었으니까.
남자가 흘끗 눈을 돌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새하얀 강아지가 파빌리온 계단 아래서 낑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둘이 살벌하게 싸운다는 걸 눈치챘는지 올라오지도 못한 채 눈치만 살핀다.
……저, 저기, 주인아. 다 싸웠어?
“커엉…….”
조심스레 짖는 울음소리에 세실리아는 관자놀이만 꾹꾹 지압했다. 심각한 두통이 일고 있었다.
어쩐담.
들켜 버렸다.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알렉시스는, 그녀의 빌어먹게도 친애하는 남동생은, 지금 물러날지언정 절대로 잊을 성정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답을 파헤치려 노력할걸.’
……사이가 껄끄러워지겠군.
“제가 지금 무엇이 가장 미치겠는지 아십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질문에 그녀는 지압하는 손을 멈추고 남동생을 보았다.
정확히는, 노려보았다.
“누님께선 정말 알고 있으셨다는 거지. 그 영애를 용서할 필요 따윈 전혀 없다는걸.”
“음?”
화두가 도로 ‘외제니 리빌’에게로 돌아간 건가.
세실리아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에 빙빙 휘감으며 열없이 뇌까렸다.
“뭐, 맞긴 해. 내가 그 아이를 용서할 필요 따윈 없지.”
“애?”
“내 나이에 비하면 아가지.”
알렉시스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든 말든,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용서까진 안 하겠지만 참작해 주긴 할 거야. 어리잖니. 어른들은 애한테 관대해야 하는 법이고.”
“관대?”
“……난 애들한테 관대해.”
“당신께서?”
또 웬 시비야?
예상치 못한 공격에 세실리아가 노려보든 말든, 알렉시스가 태연히 코웃음 쳤다.
“제 말 믿으세요, 누님. 당신은 애새끼들 어화둥둥 달래시는 게 절대로 취향 아니십니다.”
“난. 관대한 게. 맞단다.”
“아하?”
“지금 네게도 관대하잖니, 알렉?”
지금 네가 내게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보렴.
숨겨둔 힐난을 읽어냈는지 알렉시스가 엷게 웃었다.
“글쎄요, 누님. 누님께서 언제 성녀가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알고 있는 누님은 절대 관대한 성정이 아니신지라.”
“오늘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시비 거는 것처럼 들린단다, 망할 동생아.
“누님께서 외제니 리빌을 봐주시겠다고 하는 이유를 말해 볼까요?”
“지겹도록 얘기하지만, 걔가 어리니까.”
“어리다, 어리다 자꾸 그러시는데, 누님.”
보랏빛 눈이 선연한 분노로 번득였다.
“남의 남자를 가장 좋아한다 조롱하고, 매일 밤 남자를 갈아치워 어떤 침대에서 자는지 본인도 모른다고 빈정대는, 그딴 시구를 적은 여자를 정말 ‘애’라고 표현하시고 싶으세요?”
……빌어먹을 외제니 리빌. 적당히 좀 적을 것이지.
세실리아가 이를 으득 가는 동안, 알렉시스가 무릎 쥐고 있던 손을 떼었다.
그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 쇄골 쪽으로 들어갔다.
“누님께서 걔가 어리다고 봐주신다고?”
“…….”
“아니. 누님은 그냥 진짜로 화가 안 나서입니다. 그녀가 그딴 식으로 당신을 모독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난했는데도 당신은 정말 화가 안 나셨거든.”
“…….”
“그럼 누님.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당신은 왜 화가 안 나셨을까?”
일순 남자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부서진 듯했다.
그리고 부서져 깨진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건 절망이다.
서글픔과 분노, 걱정과 애달픔.
알렉시스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언제나 고귀해야 하는 이가, 비천하게 무릎 꿇고 애걸할 것만 같았다.
자리를 피하려던 세실리아의 발목을 붙든 건 바로 그 굴종이었다.
“당신이 당신을 포기했으니까.”
“아니야.”
반사적으로 내뱉은 부정에 알렉시스가 도로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보랏빛 눈동자는 담담하여 더 오만했다.
제 속마음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기분 속에서 세실리아는 아집 섞어 주장했다.
“아니라고.”
“…….”
“난 그냥, 그러니까, 이건 내 성격이야. 어지간해선 화 안 내고 어지간해선 그냥 봐줘. 한 번 더 다정한 게 뭐가 문제인데?”
“그래서 저도 봐주고 계신다?”
“그래!”
알렉시스가 빙그레 웃었다.
곱게 휘어지는 입꼬리, 진심 가득한 듯 환한 미소에 세실리아는 녀석을 미친놈 보듯 쳐다봐야 했다.
얘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걸까.
“……그럼 누님.”
녀석이 산뜻하게 속삭이며 손을 뻗었다.
세실리아가 반응하기도 전, 그의 손이 날렵하게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를 열어젖혔다. 단추들이 통통 소파 아래로 흘러내리며 요란하게 굴렀다.
지금 얘가 무엇을─
“시험해 봅시다.”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알렉시스가 재빠르게 그녀의 슬리퍼까지 벗겨냈다.
눈을 한 차례 깜박인 순간, 그녀는 알렉시스의 너른 품에 안겨든 채 온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심장 박동, 묘하게 뜨거운 열기, 젖은 감촉에 낯 뜨거워할 정신도 없었다.
“잠깐, 알렉!”
남자가 그녀를 온천 안으로 처넣었다.
사실 ‘처넣었다는 표현’은 알렉시스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행여라도 그녀가 다칠까 걱정되었는지, 녀석은 꽤 조심스레 빠뜨리긴 했다.
누가 봐도 장난인 게 확연한 세기로.
그러니까, 갑자기 물에 빠진 그녀가 기분 더러워 처넣었다고 표현한 것일 뿐이다.
마법으로 수온이 조절되는 덕택에 온천은 적당히 시원하면서도 적당히 따듯했다.
여름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할 정도로 서늘했으며, 입수한 사람이 오들오들 떨지 않을 정도로 안온했다.
세실리아는 턱으로 흘러내린 물방울을 훔쳐냈다.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온천 밖에 고고히 서 있는 동생을 노려보자, 알렉시스가 무감한 표정 그대로 내려다본다.
아니. 무감하다는 표정은 틀렸을 수도.
덤덤하면서도 결코 덤덤하지 않은 눈빛이 물 위로 드러난 그녀의 곳곳을 헤집었다.
머리칼이 꽂힌 귓가와 물방울이 여전히 맺혀 있는 턱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덜미를 빠짐없이 더듬는다.
그리고 첨벙.
남자가 갑자기 뛰어든 바람에 물보라가 일었고, 세실리아는 예상치 못한 물벼락에 얼굴을 얻어맞아야 했다.
“너…….”
오늘 이를 간 횟수가 지난 1년간 이를 간 횟수보다 많을 느낌이군.
“예, 누님?”
모르는 척 반문하는 목소리가 천진하게까지 들렸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결국 뭐라 쏘아붙일 뻔했다. 부러 그녀를 자극하려는 의도라는 걸 잘 알면서도.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다듬었다.
20세도 못 넘긴 철없는 애새끼도 아니고, 저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이유 따윈 없었다.
눈을 흘끗 돌려 온천의 계단 쪽을 확인했다.
“먼저 나갈게.”
알렉시스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이었지만, 일단 세실리아는 천천히 물을 가로질러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온천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적당하게 힘을 준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더니, 또다시 온천의 중앙으로 던져 넣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세실리아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꼬로록 잠겨야 했다.
“대체 왜 이래!”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그녀는 거세게 항의했고.
“철없는 장난?”
남자가 뒷골이 당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
“이럴 거야?”
“뭐, 저는 지금 누님과 물놀이를 하고 싶거든요.”
“나는 하기 싫어.”
“너무하시네, 관대하신 황녀 전하께서 하나뿐인 동생에겐 박하실 줄은.”
“빈정거리지 말랬지!”
“진심입니다.”
세실리아는 분을 못 이겨 물을 휙 뿌리려다 참았다. 저 녀석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비틀려 버렸는지 떠올라서.
‘어지간해선 화 안 내고 어지간해선 그냥 봐줘.’
그녀 입으로 한 말이었다.
웬만한 일엔 화를 내지 않는다며 그녀 입으로 직접 말했다.
그러니 턱이 아릴 정도로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참아낼 수밖에.
반은 오기였고 반은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애써 들어 최대한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내 친애하는 남동생은 지금 어쩌고 싶은 거지?”
“어쩌기는요.”
알렉시스가 그녀를 들어 올리더니 다시금 물속으로 던졌다.
물론 저 망할 자식이 힘 조절한 상태라는 게─장난치고 있다는 게─뻔히 보였지만, 기분이 곤두박질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천박한 비속어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세실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어휘들을 참아냈다.
“뱉어요, 누님.”
“…….”
“제발 솔직해져 보세요.”
젖은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짓이겼다.
틈을 비집으려는 손가락에 굴복하는 대신,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잘생긴 낯짝을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계속할 거니?”
그리고 또다시 던져졌다.
이번엔 다소 온천의 끄트머리에 처박힌 터라, 세실리아는 기회를 엿보았다.
재빠르게 물 밖으로 몸을 끌어 올리려 들었지만 남자가 더 재빨랐다.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아래로 끌어내렸으니.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그녀를 돌려세우려 든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떨쳐내려 했지만, 어느새 굳건한 양팔 사이에 갇혀 너른 가슴팍을 마주하고 있었다.
와이셔츠 안으로 비치는 흰색 살결이 느리게 너울거렸다.
가깝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물방울이 어떻게 맺히는지, 그렇게 맺힌 물방울이 어떻게 안으로 굴러떨어져 사라지는지까지 전부 생생하게 보이는 거리였다.
세실리아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정확히는 눈을 휙 들어 올리다, 각진 턱선 아래 도드라진 목울대를 목격했다.
‘빌어먹을.’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던 그녀는 제 어깨의 양옆에 남자의 손이 자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알렉시스가 몸을 숙였다.
온천으로부터, 정원으로부터, 저 푸른 하늘과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가두려는 듯한 모양새로.
시야를 비롯한 감각 전체가 알렉시스로 메워졌다.
체향이 유독 짙다.
……빌어먹을.
어느새 남자가 그녀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쥐었다.
손이 유난히 크기 때문일까, 머리카락의 1/4 이상이 잡혀 버린 듯하여…….
“놓으렴.”
“…….”
“놓아줄래, 제발?”
“무엇을요?”
느릿느릿 질문하는 목소리에 머릿속의 경종이 울렸다.
세실리아는 젖은 속눈썹을 느릿하게 움직였고, 알렉시스가 천천히 되물었다.
“무엇을, 놓아드릴까요?”
잠긴 중저음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견딜 수 없는 오싹함에 세실리아는 동생의 가슴을 밀쳤고, 순순히 물러나 주는 듯했던 남자는 다음 순간 그녀를 온천 중앙으로 던졌다.
‘망할.’
이번엔 오기를 담아 떠오르는 대신 가라앉았다.
그렇게 물거품을 감상하며 힘을 쭉 빼고만 있자, 알렉시스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거칠게 끄집어냈다.
무뢰배의 뺨을 후려치려던 세실리아는 늦지 않게 제 손을 멈춰냈다.
‘참아, 세실.’
참아야 했다.
내일 사교해야 하는 녀석이었다.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한 뺨으로는 당연히 나돌아다니지 못할 테고…….
하지만 알렉시스는 그녀의 자제력에 감사하기는커녕 기가 차는지, 하늘을 향해 눈을 굴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야, 진짜 독하다…….”
“뭐?”
대답 대신 또다시 첨벙.
지금까지보다 약간의 힘이 더 실려 있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킨 세실리아가 더듬더듬 얼굴의 물기를 훔쳐내기도 전이었다.
그녀에게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알렉시스가 다시 물속으로 던져 넣었다.
뺨의 물기를 닦아내자마자 또다시. 두 발로 서자마자 또다시. 몸을 일으키자마자 또다시.
이번엔 팔만 수면 위로 뻗었는데도 건져내어…….
“그만!”
또다시 물속으로 던져 넣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지경이다.
더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젠 진심 가득한…….
허리가 낚아채였다.
구석으로 던져진 세실리아는 재빠르게 물가로 헤엄쳤다.
탁, 그녀는 강인한 손이 발목을 잡는 것에 화가 나 울분을 섞어 자유로운 다른 발로 남자의 가슴팍을 차려 들었다.
발버둥이 의외였는지 알렉시스는 순순히 놓아주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뜨겁고도 단단한 품속에 갇혀 있었다.
눈가의 물기를 거칠게 훔쳐내자마자 복잡한 표정이 시야를 강타했다.
잘생긴 낯짝 한가운데 박힌 보랏빛 눈동자는 참 아득하게 깊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런 얼굴을 하고 앉아 있어.
세실리아는 바들바들 떨다 말고 결국 손을 들었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어코 알렉시스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뺨이 붉게 부어오르며 입술이 터졌는데도 녀석은 어떠한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잠자코 굳어 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른 뺨을 내밀었을 뿐.
그 태도가 더 괘씸하여 세실리아는 참지 않았다.
두 번째 찰진 소리와 함께 빌어먹게도 잘생긴 낯짝은 이번엔 왼쪽으로 돌아갔다.
붉은 입술이 더욱 붉어지는 걸 확인한 세실리아는 겨우 파들거리는 손을 내렸다.
얕은 실소가 들려온다.
녀석이 드디어 입꼬리를 휘며 반응을 내비쳤다.
“열두 번 던져지고 나서야 겨우 뺨 두 대라…… 독하십니다.”
“겨우 뺨 두 대를 처맞기 위해 사람을 열두 번 집어던진 네가 더 독하지 않을까?”
“…….”
“또 물에 처넣을 거니?”
대답 대신 알렉시스가 그녀 뺨에 있는 물기를 훔쳐냈다.
눈가를 깊게 들여다보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왜, 내가 울기라도 바랐어?”
“…….”
“이─”
침묵은 곧 긍정이라, 저 빌어 처먹을 동생에게 온갖 욕이 흘러나올 뻔했다.
세실리아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긁어모아 제때 입술을 깨물었다.
보랏빛 시선은 이번엔 그녀가 잘근 깨물고 있는 입술에 꽂혀 있었다.
이대로 더 있다간 뒤로 넘어갈 것 같아, 세실리아는 숨을 고르고는 마침내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발을 간지럽히는 풀의 감촉이 이토록 생경하게 느껴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어깨를 데우는 햇빛에 감사하게 될 줄도.
다리가 후들거려 한 걸음 내딛다 말고 앞으로 풀썩 쓰러질 뻔했지만, 때마침 뒤에서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지탱해 주었다.
감사하기엔 이 팔이 한 전적이 화려하지.
그녀는 기울어진 자세 그대로 재차 이를 갈았다. 이갈이하는 새끼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브라보.’
머릿속을 겨우 식히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휙 뒤돌아보자, 알렉시스가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재밌었니?”
“…….”
“한 사람이라도 재밌었길 바라는데, 진심으로. 난 정말 재미없었거든.”
“어쩌다 그렇게 되신 겁니까?”
단 한 질문이었다.
동정의 기색 따윈 없었으며, 안타까움의 낌새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무덤덤한 질문 하나로 그녀의 몸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마치 화살에 관통당한 듯이.
굳어버린 손가락을 움츠리지조차 못했다.
입술이 제멋대로 달싹이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고장 난 듯한 눈동자를 삐꺽빼꺽 돌려 동생을 마주했을 뿐.
“대체 왜 그러고 사세요?”
생각이 뚝 끊겼다.
모멸감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어떠한 이성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멍하니 남자를 응시하다 미친년처럼 달려들었다.
분명 움직임을 예상했을 텐데도 알렉시스는 피하기는커녕 그녀를 받아 안았다.
반동을 이기지 못해 뒤로 넘어질 때까지도 끌어안는 힘은 여전했다.
둘은 풀밭 위를 여러 바퀴 뒹굴었고, 마침내 멈추었을 땐 세실리아는 남자 위에 엎어져 있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감싸고 있다.
찰싹, 손을 쳐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래에 깔린 남자는 여전히 무감한 낯이라……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멱살을 쥐셔야지요, 누님.”
미친놈이 명령했다.
세실리아가 기가 막혀 탄식하는 사이, 알렉시스가 평온하게 덧붙였다.
“아니면 목을 조르시든지요.”
“네가 정말 미쳤구나?”
“열두 번입니다, 누님. 제가 당신을 물에 빠뜨린 횟수지요. 그뿐이 아니라…….”
말이 중간에 뚝 끊긴다.
남자가 이를 사리물며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고 있었다.
마침내 온전해진 보랏빛은 형형한 안광을 머금어, 고요하면서도 압도적이었다.
어느 깊은 밤 포효하는 맹수의 눈동자처럼.
덕분에 그녀의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잔뜩 헤집어져 진물까지 흘리는 듯했다.
힘 빠진 손이 끝내 옷깃을 놓쳤고, 세실리아는 제 표정을 가다듬지도 못하며 일단 일어서려 했다.
“도망치지 마시고.”
한 손이 그녀의 양 손목을 붙들어 앉히기 전까진.
졸지에 남자 위에 계속 올라타게 된 세실리아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삼켰다.
체념 섞어 고개를 떨구자, 아래에 깔린 얼굴과 정확히 같은 각도가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더 숙이지도 들지도 않은 채 가만히 경직했다.
그저 이 상황, 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누님.”
“…….”
“세실리아 뤼셍.”
“…….”
“세실.”
아이라도 달래는지, 부르는 음성이 점차 다정해져 간다.
‘웃기지도 않아.’
세실리아는 냉소하며 제 손이 붙들린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커다란 손의 엄지가 조심조심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 알렉시스는, 저 위에서 말없이 굽어보는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금빛 눈동자는 그늘에 잠긴 탓인지 더욱 경건해 보였다. 그리고 초점이 흐릿했다.
지쳐 버린 여자가 완전히 생각의 빗장 자체를 닫아버린 게 확연하여,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삼켜야 했다.
톡.
여자의 머리칼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턱으로 굴러내린 물방울이 떨어져 그의 뺨에 안착했다.
마치 눈물처럼.
마냥 건조한 금빛 눈이 아니었더라면 운다고 착각할 정도로 절묘한 흐름이었다.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새하얀 어깨를 매만졌다.
마법이 옷을 바싹 말려주는 동안에도 여자는 멍한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누님.”
단 한 번의 몸짓으로 그는 여자의 목덜미를 눌러 바싹 끌어당겼다.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하마터면 입까지 맞출 수 있을 만큼.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모르겠지만, 황금빛 눈이 당연하게도 화들짝 커졌다.
세실리아가 자신을 짓누르는 힘을 버티려는 듯 황급히 손으로 풀밭을 짚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여자의 정신을 현실로 끌고 온 모양이다.
“너 지금…….”
“다시금 질문드릴까요? 대체 왜 그러고 사세요?”
“알렉.”
“왜 그렇게 참고만 사시는데? 당신이 못 가진 게 뭐가 있어서?”
“일단, 알렉. 놓아줘.”
세실리아가 최대한 있는 힘껏 풀밭을 밀어낸다. 어떻게든 거리를 다시 벌려 보려는 애처로운 발악.
알렉시스는 그 무의미한 반항을 무시해 주었다.
“예쁘긴 지독하게 예뻐, 머리 좋아, 사교 능력도 탁월한데다가 당장 부모님께서 제국의 두 군주신데.”
“알렉.”
“솔직히 패악을 떨어도 다들 다 오냐오냐하거나 넙죽 엎드릴 상황 아닌가?”
세실리아가 작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놓으랬지. 제발.”
“왜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아서 곪아 터질 때까지 참고 있으시지?”
“대답하면 놓아줄 거니?”
여자의 시선이 마침내 선명한 냉기를 머금고 있다.
알렉시스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자, 세실리아가 이를 앙다물었다.
“제발 좀 놓으라고! 몇 번을 말해!”
“대답부터.”
“……도대체! 오늘 대체 뭐 하자는 건데? 네가 참지 않는 만큼 내가 참는 거겠지? 그 간단한 걸 왜 몰라? 지금 네가 미쳐 날뛰는 만큼 내가 감당하고 있잖아? 내가 참는 게 싫다면 네가 멀쩡하게 굴든지!”
“참지 마세요.”
간명한 결론에 되레 열이 치솟았는지 여자가 씨근덕거렸다.
벗어나려는 바동거림이 더욱 격해져, 알렉시스는 손에 힘을 더 주어야 했다.
“너 이─”
“참지 마시고, 화내고 짜증 내고 분노하고 때리고 발로 차고 다 하시라고! 이 간단한 것들을 왜 못 해? 당신이 못 하는……!”
“내가 너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너냐고!”
“그럼 우리 차이는 대체 뭔데? 그깟 황위 계승권 때문에 그 쓰레기 같은 시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황위 계승권이 그렇게 큽니까?”
“누가 황위 계승권 문제래?”
“그럼 나랑 당신의 차이가 뭔데요?”
“너는 진짜잖아!”
비명처럼 토해진 해답이었다.
예상치 못한 답안이라 뒷골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알렉시스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실리아가 씩씩거렸다.
“꼭 이렇게 말을 해야 알아들어?”
“…….”
“너는 진짜고 나는……!”
말이 도중에 딱 끊긴다.
전혀 놀랍지 않게도, 세실리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줄곧 묻어둔 진실을 자신이 직접 끄집어 올렸다는 것에 너무나도 당황한 눈치였다.
여자가 황급히 일어나 비틀비틀 뒷걸음질 친다. 알렉시스는 속을 가다듬지도 못하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세실리아 뤼셍’은 기실 뤼셍의 혈족이 아니다.
머리 색을 매번 염색해야 하는, 완벽한 타인일 뿐.
황실의 모두 세실리아가 분명 그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서 입을 올리지 않았으며, 아르망과 마리사, 그리고 알렉시스는 전부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언제고 물어보면 답은 해줘야지. 솔직하게.
각오를 다지면서도 내심 그녀가 입에 올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묻어 두었고, 그렇게 간과했다.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누님.”
세실리아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알렉시스는 서둘러 기립하여 그녀에게로 발을 내디뎌야 했다.
“……누님.”
또 한 걸음.
“제발.”
그의 애걸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어도, 세실리아가 천천히 입을 가린 손을 내렸다.
느릿느릿 깜박이는 속눈썹이 짙고 무거웠다.
그토록 연기 잘하는 여인이 이번만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혀를 꽉 깨물고 싶어 하는 표정.
여자가 솔직해지길 바라고 바랐거늘, 드디어 목격한 민낯에 심장이 뜯길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칼로 생심장을 도려내는 기분이라 알렉시스는 뭐라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어떠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나서.
“미안한데…….”
사과하지 말아요.
그가 반사적으로 대꾸하기 전, 세실리아가 한 차례 마른세수한 뒤 입매를 휘었다.
비뚜름한 미소가 고운 입술 위에 맺혔다.
“……혹시 내게, 시간을 좀 줄 수 있겠니?”
“누님.”
“지금 당장은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네게 부당한 감정까지도 쏟아낼 것 같거든.”
“쏟아내세요. 괜찮…….”
세실리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고, 알렉시스는 간절히 매달리듯 응시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
“……알렉.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
답을 원하는 어조가 아닌지라 그는 침묵했다.
세실리아가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더니, 몇 가닥을 어깨 너머로 휙 넘겼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어떤 감정과 어떤 상처를 선물할지 미리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말조심하는 것.”
“하지만…….”
“난 애가 아니라서 네게 상처 주기 싫으니까, 우리 이만 여기서 헤어지자, 응?”
“누님.”
“아무리 너라도 내 부정적인 감정 받아줄 이유는 없지?”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휘리릭 뒤돌았다.
그대로 떠나 버릴 듯한 기세에 알렉시스는 다급히 팔을 뻗어 그녀의 소매를 붙들었다.
맹목적으로. 더없이 간절하게.
짜증스레 뒤돌아보던 세실리아의 말문을 틀어막은 건 바로 남자의 표정이었다.
저를 등지고 떠나는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은 낯짝이라, 그녀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그럴 수 있습니다.”
“…….”
“저는 오히려, 정말, 기쁠 겁니다.”
알렉시스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제 말에 두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지, 짧게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님, 아시다시피 저는 약하지 않습니다. 상처 입지 않을 테고,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기꺼이 귀를 기울일 거예요.”
“…….”
“당신의 그 모든 말에.”
“아무렴 그러시겠지요, 황태자 전하.”
세실리아가 방긋 웃었다. 심지어 무릎까지 사뿐히 굽히면서.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인사에 알렉시스는 소매를 힘없이 놓아야 했고, 여자는 매몰차게 뒤돌았다.
떠나가는 발꿈치가 아릴 정도로 새하얗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강아지.”
등 뒤에서 푹푹 찌르는 시선을 무시하며, 세실리아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렉시스도 다 눈치챈 마당에 굳이 ‘알리샤’라고 부를 이유는 없을 터였다.
“강아지!”
이번엔 목소리 높여 부르자, 주인이 고생하는 동안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던 배은망덕한 강아지가 경쾌하게 짖으며 등장했다.
쪼로록 달려오더니 제 귓가를 긁어달라며 귀를 쫑긋거린다.
애완견의 모습이 살짝 얄미웠어도 그녀는 순순히 녀석의 귓가를 긁어주었다.
기분 좋게 짖는 울음소리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방으로 돌아가자.”
“컹!”
알리샤가 화답하듯 짖으며 앞장서 쫄래쫄래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려던 세실리아는, 발을 떼기도 전에 잠시 뒤돌아서야 했다.
뒤에서 뻗어온 손길이 그녀를 부드럽게 돌려세웠기 때문에.
“또 왜……!”
신경질적으로 돌아선 것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알렉시스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중히 한쪽 무릎을 굽힌 남자가 발치에 슬리퍼를 내려놓는다.
발을 이끌어 친절히 신겨주는 손은 부드럽고도 따스했으며…… 그녀의 발바닥 전체를 감쌀 정도로 컸다.
세실리아는 결국 발끝을 꼼지락거려야 했다.
손은 떠났어도 온기만은 떠나지 않으며 발 전체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다 신겨준 뒤로도 남자는 무릎 꿇은 상태였다. 머리를 숙인 채 그녀의 무릎 부근만을 계속 응시한다.
“오늘, 거칠게 굴어 죄송합니다, 누님.”
담담히 사과가 건네어진다.
사과할 필요가 없는 남자였다. 누구에게도 사과해선 안 되는 남자였고.
사과받을 줄 몰랐는데 받은 기분은, 글쎄…….
그녀는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다, 가장 평범한 반응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충격인지 짜증인지 서글픔인지는 몰라도 튀어나온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래.”
“그럼, 들어가서 편히 쉬세요.”
손을 뻗어, 동생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감정의 응어리가 풀린 건 절대 아니었다. 방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에 골이 지끈거리니.
하지만 늘 고귀해야 하는 남자가 머리 숙이고 있는 이 상황이 썩 달갑지도 않았다.
속상한 것 같기도 하여, 스스로에게 기가 찰 지경이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차라리 네가…… 미안하다는 감정 자체를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면 더 나았을까, 내겐.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사지가 물어뜯기는 듯한 느낌.
무력하게 저 아래로 침잠해 버려 다신 빠져나오지 못하고 잠겨 죽을 것만 같다.
세실리아는 잠자코 제 손에 턱이 잡힌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시원한 눈매와 오뚝한 코, 고운 입술이 그림 그린 듯 완벽했다. 손끝으로 덧그려보고 싶을 만큼.
뺨을 한 대 더 치고 싶은 분노와 함께 양립하는 감정을 해석하기 싫어.
“내게, 사과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못을 박고는 뒤돌아 떠났다.
1) 장 밥티스트 클레망Jean-Baptiste Clément, <체리가 익어갈 무렵le temps des cerises>, 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