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년은 자라
온유한 여름 바람 속, 가장 일찍 깨어난 나이팅게일이 부드럽게 노래했다.
그 매혹적인 지저귐을 뚫고서 한 남자가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화려함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퐁레프마저도 남자의 존재감을 누르지 못했다.
자연스레 몸에 두른 기품은 남자의 고고한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었으니.
이른 아침, 정원을 꾸미려 바삐 움직이던 정원사들은 숨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남자의 보라색 시선에 그들은 허둥지둥 예를 표했다.
작년에 들어온 풋내기 정원사만이 의아해하다, 남자의 머리카락 색을 알아보고선 뒤늦게 경악하며 허리를 숙였다.
세상에.
“누님은?”
수석 정원사인 쟝을 알아본 남자가 발걸음을 멈춘 채 질문했다.
소년의 앳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남자의 음성만이 남아 있다.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모습이 낯설어 쟝은 말을 더듬었다.
“노트르 정원에서 강아지와 함, 께 산책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군. 알려줘서 고마워.”
귀궁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는 유유히 멀어졌다.
이 화려한 장소를 헤치는 발걸음이 오만했지만 누구도 질타할 수 없을 터였다.
정원의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남자의 입매에 문득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강아지가 짖는 소리 뒤에 여자의 작은 잔소리가 따라 들려오고 있었다.
“알, 그렇게 뛰면 내가 힘들다고 했지!”
“컹!”
강아지의 까만 눈망울이 순간 그를 올곧게 담았다.
영민한 종이라고 하더니, 7년 전에 만났다가 헤어진 남자마저 알아보는 모양이다.
새하얀 애완견이 꼬리를 흔들며 그에게로 휙 달려왔다.
“알리샤─!”
여자의 목소리가 쨍 울려 퍼졌고, 그제야 남자는 바로 뒤에 연못이 존재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런.
그는 혀를 가볍게 차며 자신을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오는 강아지를 피하는 대신 받아 안았다.
연분홍색의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수면이 요란하게 깨졌다.
재회하자마자 홀딱 젖게 만든 쾌거를 자랑한 알리샤가 신나게 짖는 동안, 남자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연못가로 헤엄쳤다.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환히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여전했다.
원숙해진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의 쇄골을 타고 흑발이 흘러내린다. 지독하게 황홀하여 정신이 아찔해지는 자태였다.
“……알렉.”
그리고 붉은 입술을 타고 흐르는 이름. 그의 이름.
알렉시스는 즐겁게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그에게 발목이 잡힌 세실리아가 꺅,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고.
참방!
균형을 잃은 여인이 연못으로 시끄럽게 떨어졌다.
알렉시스는 자신의 품 안으로 뛰어들다시피 쓰러진 세실리아를 받아 안았다.
“알렉!”
장난스레 가라앉다 다시 위로 떠 오르자마자, 여자가 질책을 섞어 불렀다.
알렉시스는 가는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키득거렸다.
그의 발이 매끈한 발목을 스치는 접촉에 팔 안에 안긴 허리가 뻣뻣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대로 복사뼈를 문지르며 장난쳤고, 여자가 발을 물렸다.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반응을 고스란히 내비치면서.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고개를 미미하게 갸웃거리는 몸짓과 천진하게 올려다보는 시선이 한없이 어여뻐,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젖어버린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오랜만이네요, 누님.”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흠칫 물렸다.
동생의 손이 닿는 부분이 유난히 뜨거웠다. 아침 연못의 물은 매정할 정도로 서늘하거늘, 이마 부분만 화끈거려 기분이 오묘했다.
더듬더듬 시선을 들었다.
다채롭게 반짝이는 제비꽃색 눈동자와 색정적으로 젖어 있는 검은색 머리칼.
반투명해진 천 안의 탄탄한 몸매가 도드라지며 시선을 잡아챘다.
그에 눈을 황급히 돌리자, 시야의 구석으로 짓궂은 입매가 어른거렸다.
……알렉이 뭐라 했더라?
‘오랜만이네요, 누님.’
존대를, 했어.
내게 존댓말을 하고 있어. 그래서 이렇게나 어색한 걸까.
세실리아는 애써 목소리를 긁어내야 했다.
자신에게로 드리운 저 그림자를 피하고 싶은 이유를 도무지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야, 알렉.”
진정해, 세실.
그녀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위화감을 가라앉혔다.
눈앞에서 턱을 괸 자세로 유유히 웃는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알렉시스 뤼셍이었다.
그녀의 남동생. 그녀와 함께 자란, 하나뿐인 동기.
드디어 퐁레프로 돌아온 아이, 아니, 동생을 박대할 수는 없지 않나.
다행스럽게도, 평정을 되찾자마자 반가움에 흠뻑 젖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곱게 휘며 타박했다.
“오늘 돌아온다고 얘기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마중 나갔을 텐데.
투정 섞인 말에 알렉시스가 비뚜름히 웃었다. 반항적이라 더욱 매력적인, 엷고도 시원한…….
‘못 본 사이 정말 어른이 되었는걸.’
언젠가 동생을 내려다보지 못하고 올려다보는 시기가 올 거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 순간이 다가오자 가슴이 뛰었다.
“제가 언제쯤 도착할지 확신하지 못했거든요. 누님 성정엔 절 기다리기 위해 밤을 지새울 수도 있어서.”
“당연하지!”
알렉시스가 대꾸하는 대신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수면이 다시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아침 햇살 속에서 잔뜩 젖은 남자의 육체가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의 전속 시녀들이 볼을 붉히며 고개를 떨굴 수밖에.
그들이 수줍어하든 말든, 알렉시스는 태평하게 몸을 굽혀 세실리아를 연못 속에서 건져 올렸다.
알리샤는 알아서 자연스레 연못을 탈출하고선 파닥거리면서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옷이 젖어 추운지 그녀가 자연스레 팔에 안겨 온다.
이 상태 그대로 궁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인 동작.
하지만 그는 성실하게 마법을 시동해서 그녀와 그의 몸을 동시에 말렸다.
“마력 운용이 섬세해졌네?”
“많이 굴러서요.”
“뭐어?”
세실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무시하자, 그녀가 포로록 품에서 벗어나며 꼿꼿하게 섰다.
예의 그 우아하고도 곧은 자세만큼은 변함없으시고…….
“굴러? 구르다니?!”
“…….”
“뤼셍 제국의 황태자를, 아무리 마탑이라도 굴릴 수가 있는 거야? 몸 상한 건 아니지? 응?”
걱정 가득한 질문을 종알거리는 입술처럼. 그의 뺨을 부드럽게 잡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는 손가락처럼.
“알렉, 대답 안 해줄 거야?”
알렉시스는 뾰족해진 목소리를 음미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습니다.”
“……응?”
“결국엔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선을 또렷하게 긋는 대답이다.
눈치 빠른 여인의 표정이 점차 어색하게 변해 간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아연하게 올려다보는 그 모습마저도 지독하게 어여쁘고도 그리웠어서.
“그러니까, 누님.”
천천히 손을 움직여, 새하얀 목덜미에 붙어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 한 가닥을 떼어주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련의 동작 동안 여자는 멍하게 굳어 있다.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 음. 그, 그래.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렇지요.”
“부모님 만나 뵈러 가야지? 인사는 드렸니?”
다소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며 세실리아가 먼저 몸을 돌린다. 그녀의 손짓에 알리샤가 컹컹 짖으며 쫄래쫄래 다가온다.
“아직 안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온실에서의 아침 만찬은 어때? 오랜만에 가족이 전부 모였는데.”
“좋아요.”
세실리아가 고개를 짤막하게 끄덕인 뒤, 손목에 걸린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새하얗게 드러나는 목덜미를 햇빛이 집요하게 핥기 시작했다.
그 풍경을 말없이 감상하며 알렉시스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릴 적엔 옆에서 함께 걸으려 손을 달라 칭얼거렸는데.
이젠…….
집요하게 내다 꽂는 눈초리를 느끼는지, 가냘픈 몸이 살짝 움찔했다.
알렉시스는 말없이 그와 여자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았다.
* * *
요란하게 짖는 알리샤의 손, 아니, 앞발을 꼭 잡은 채 세실리아가 조곤조곤 잔소리를 중얼거렸다.
“언니가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너무 방을 어지럽히면 안 돼.”
“컹─!”
“함부로 물어뜯지 말고.”
“컹컹─!”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저번엔 찾느라 힘들었단 말이야.”
알렉시스는 문가에 기대어 선 채, 세실리아가 성실하게 훈계하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하나는 명확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저 개, 그러니까, 제 누이에게 준 그의 선물이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
세실리아가 앞발을 잡아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주 행복해 죽겠는지 알리샤는 꼬리를 붕붕 흔들어대고 있었다.
“누님.”
알렉시스는 지켜보다 못해 성큼 걸음을 옮겨 끼어들었다.
“알리샤는 얌전하게 있을 겁니다.”
“너는 얘가 얼마나 사고뭉치인지 몰라서 그래. 어릴 적 너보다 더하다고?”
내 비교 대상이 왜 하필 개지?
알렉시스는 서늘하게 알리샤를 내려다보았고, 그 시선을 느낀 알리샤가 조금 얌전해졌다.
세실리아가 일어서며 그의 발등을 콱 짓밟았다.
“알한테 못되게 굴지 마!”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했어.”
눈치도 빠르셔라.
자신의 억울함을 성토하는 대신 알렉시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려 다가오는 손이 미미하게 주저함을 품고 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미묘한 떫은맛이 느껴질 것만 같다.
세실리아는 시선을 살짝 떨었다.
널찍한 방을 메운 분위기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다.
‘내 탓……이려나.’
아니야. 아닐 거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
세실리아는 주저를 누그러뜨리며, 자신을 굳건하게 받아드는 알렉시스의 팔을 붙들었다.
컹, 열심히 짖으며 배웅하는 알리샤를 두고 둘은 복도로 나섰다.
황자가 마침내 귀궁했다는 소문이 일찌감치 퐁레프를 휘돈 모양이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궁인들이 전혀 놀라지 않으며 익숙하게 예를 표하는 걸 보면.
알렉시스가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많이 힘들었던 걸까.’
세실리아는 흘끔 시선을 들어 동생의 표정을 헤아려 보았다.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엔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 대한 감흥 하나 없었다.
알렉시스가 없는 동안 마리사와 세실리아는 한 세 번쯤 황궁을 정돈했었다. 한번은 꽤 큰 공사까지 동반했으니 분명 바뀐 점을 알아볼 터인데.
예를 들면 저기 천장 위의 프레스코화도 바뀌었고, 복도에 전시된 도자기 진열장도 새로 들여왔다.
실제로 알렉시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그림과 진열장에 각각 멈춘 것 같았지만 끝내 별다른 감상을 내놓진 않았다.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긴 해……. 그래도.’
옆을 계속 알게 모르게 흘끔거리느라 세실리아는 유리 온실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멍한 상태로 계속 걸어가는 황녀를 시종들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누님.”
알렉시스가 손을 뻗어 붙들었고,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린 세실리아는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이내 다시 새침한 하얀색으로 변했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까지는 감출 수 없어, 연녹색 에메랄드 귀걸이 위의 피부가 어여쁜 복숭앗빛을 띠고 있다.
알렉시스는 색이 변한 부분을 향한 시선을 물리고는 시종에게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여느 때처럼 녹음이 아름드리 드리운 풍경이 펼쳐졌다.
조용히 나풀거리는 나비와 흐드러지게 핀 여름꽃들.
천창으로 쏟아지는 살구색 햇살이 바닥 위로 다양한 나뭇잎 무늬를 그리며 놀았고, 어디선가 솔솔 들어온 바람이 꽃봉오리를 소리 없이 흔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두 분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녀의 질문에 시종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알렉시스의 손을 붙잡은 채 세실리아는 온실 안으로 들어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첫 번째 돌 위로 사뿐하게 내디뎠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알렉.”
“네, 누님.”
역시 존댓말은 익숙하지 않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녀는 돌들을 차례차례 밟아나갔다.
어린아이가 개울가에서 노닥거리는 걸 지켜보는 어른처럼 알렉시스는 세실리아의 손을 굳건하게 맞잡은 상태로 돌들을 전부 밟아나가도록 도와주었다.
‘이래서야 누가 더 연장자인지 모르겠네…….’
세실리아는 작게 키득거리다 말고, 허리를 단정하게 폈다.
동생에게만 보여주던 천진한 모습을 거두고 기품 있는 황녀의 자태를 되찾으면서.
“깜박 잊고 말 안 한 게 있어.”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질문은 참 많았다.
차고 넘쳤다. 사흘 밤낮을 새며 쏟아부어도 궁금증을 전부 해갈하지 못할 수도.
알렉시스와 그녀는 7년 동안 전혀 만나지도 못했고.
겨우 만난 동생은 너무 훌쩍 커버려 그녀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투정 부리지 말아야지.’
알렉시스는 이제 그녀의 동생이기보단 뤼셍의 황태자니까.
혀끝에서 넘실거리는 말들을 삼키며 세실리아는 빙긋 웃었다.
“퐁레프로 돌아온 걸 환영해. 정말 그리워했어.”
“감사합니다, 누님.”
알렉시스가 단조로이 대꾸했다.
끝내 자신도 그리워했다는 대꾸는 덧붙이지 않아 서운했지만, 세실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로 참아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속 나아가다 보니 이윽고 온실의 중앙이 나타났다.
가족 만찬을 즐기는 대리석 식탁에선 아르망과 마리사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매가 나타난 걸 보자마자 둘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렉─!”
마리사가 팔을 뻗으며 불렀고, 알렉시스는 얌전하게 다가가서 어머니의 손에 붙들렸다.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마리사는 손으로 얼굴을 잡고선 돌려보았다.
“합격.”
“……어머니.”
마리사가 농을 건네며 마무리했고, 이번엔 아르망에게로 아들을 떠넘겼다.
힘차게 아들을 끌어안은 아르망이 눈을 반짝이며 마리사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왜 내게 반했는지 알겠어!”
“꿈 깨, 알렉은 내 노력으로 젊을 적 당신보다 더 잘생겨졌어.”
“…….”
“아니야?”
마리사가 손으로 꽃받침을 하며 질문했고, 알렉시스는 어머니 앞에선 언제나 바보가 되어 버벅거리는 아버지의 팔에서 겨우 풀려났다.
세실리아가 엷게 웃으며 의자에 앉는다.
아르망과 마리사, 그리고 알렉시스까지 전부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줄지어 입장해서 아침 식사를 차려주기 시작했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아들…….”
“7년이 길었지, 진짜.”
세실리아를 의식했는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아르망이 ‘다시는 사고 치지 말라’는 엄격한 눈총을 쏘아 보냈다.
이런.
그건 장담해 줄 수가 없는데.
어정쩡한 미소로 얼버무리자 아르망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다 말고 피식 웃었다.
기뻐하는 아버지와 즐거워하는 어머니, 그리고 마냥 반가워하는…….
“알렉, 세실이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긴 해?”
“드디어 전부 참석한 가족 만찬이네요.”
의자에 앉던 알렉시스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가족의 시간을 마주하며 상념에 젖었다.
‘가족이라.’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식전 빵이 파작, 반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진다.
가족. 좋지.
하지만 지금 이 형태는 바로잡혀야 하지 않겠어?
가족 셋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전부 그에게로 꽂혔다. 버터 바른 빵을 한 입 베어 물려다 말고 알렉시스는 눈썹을 까딱였다.
“알─렉.”
마리사가 탄산수를 홀짝이며 불렀다.
“네, 어머니?”
이어 대수롭잖게 빵을 한 입 베어먹은 청년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편안한 자세만을 보면 그가 오랜만에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는 걸 눈치챌 수 없을 터였다.
언제 빠졌냐는 듯, 그는 가족이 만들어낸 화폭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만큼 조금의 위화감도 없었다.
마리사가 뭐라 덧붙이지 않자, 알렉시스는 재촉하는 대신 태평하게 빵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버터나이프로 빵의 끝 부분까지 꼼꼼하게 버터를 채우는 버릇은 여전했다.
아르망과 마리사, 그리고 세실리아는 일단 그가 빵 한 조각을 먹을 때까진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전부 해치우고 나서도 끝내 그 얄미운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아니…….
말도 없이 돌아온 것까진 어찌어찌 이해한다고 하자.
하지만 보통이라면 어떻게 지냈는지, 힘들진 않았는지, 아니면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등등 몇 마디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빵 맛있네요. 퐁레프의 제빵사들은 여전히 일을 잘하는 모양입니다.”
잠자코 구경하던 셋은 잠시 말문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마침내 돌아온 탕아를 응시하며 제각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누굴 닮아서…….’
‘7년이었다고, 아들아…….’
‘빵이 중요하긴 한데, 중요하지, 음…….’
점차 따갑게 변하는 눈총 속에서도 알렉시스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고의로 입을 다문 게 맞다.
아르망과 마리사는 한숨을 쉬며 체념했고 세실리아는 말없이 그린 페퍼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누님.”
예전 습관 그대로 청년은 페퍼를 듬뿍 뿌린 스크램블드에그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정말 이 모습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아서, 놀라울 정도로 얄미웠다.
10분쯤 기다렸을까.
세실리아는 결국 알렉이 화두를 열길 바라는 기대를 포기하고 아침 식사에서의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집에 돌아오신 이 자리의 주인공께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경청했을 뿐이었다.
그 끝이 없는 보랏빛 시선에 세실리아는 머리칼 끝을 어설프게 매만졌다.
발을 동동 흔들며 까르륵 웃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 모호한 미소를 머금은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알렉.”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보일 듯 말 듯 한 엷은 미소가 입술 위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먼저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는 동생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깊고도 서늘한 눈매, 오만을 품은 유려한 콧대와 풍성하고 긴 속눈썹.
예술가들이 탐해 마땅한 섬세하고도 화려한 아름다움은 여전했고.
달라진 건…….
볼살이 사라져 드러난 날카로운 턱선. 천진함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 메운 원숙한 여유.
너른 어깨와 훤칠해진 키로 인해, 마냥 청량하던 소년의 분위기는 강건하게 바뀌어 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
저도 모르게 얼버무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놓여 있는 그와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세실리아는 가만히 동생과의 거리를 재어보았다.
* * *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와 황후에게 편지를 내민 건 그녀가 프로슈토를 얹은 무화과를 두 개째 집어 들었을 때였다.
어제 읽던 시집에 관해 얘기하던 세실리아는 슬쩍 입을 다물었고, 마리사는 무화과를 도로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보통 급한 일이 아니라면 황족들의 조찬을 방해할 리 없을 테지.
특히나 황자가 오랜만에 귀궁한 지금은 더더욱.
편지를 펼쳐 드는 황후의 손길이 못내 급해졌다. 눈치 빠른 시종은 일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마리사?”
남편의 나직한 부름에 마리사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레니앙 공작 대부인이 날 급히 찾는다네.”
“가보시지요.”
알렉시스가 깔끔하게 권했고, 마리사는 매정한 건지 사려 깊은 건지 모르겠는 아들놈을 향해 지그시 시선을 던졌다.
“전 괜찮습니다. 그분께선 어머니의 대모님이시잖아요.”
“……그래, 기억해 줘서 고맙구나.”
후자인 모양이다.
하지만 7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앞에 두고 쉽게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녀는 여전히 망설여야 했다.
주저하는 어머니를 향해 알렉시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저도 곧 리베로 가야 하니까요. 대부인의 연세도 연세인 만큼 어머니께서도 찾아뵈시지요.”
“리베 아카데미로? 아, 마력 측정 때문에?”
“예. 오늘 잠깐 임시로는 해야 해서요.”
“……통과하겠지?”
“물론입니다.”
그 말에 겨우 마음을 굳힌 건지, 마리사가 냅킨을 내려놓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럼. 이번 주에 꼭 티타임 같이 하기야!”
“예.”
그녀는 허리를 굽혀 아들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이번엔 딸내미를 돌아보았다.
연신 깜박거리는 황금색 눈에선 걱정이 물씬 배어 있다.
“어머니, 저도 같이 갈까요?”
“괜찮아, 괜찮아.”
최대한 자연스레 만류한 마리사는, 손을 뻗어 세실리아의 풍성한 머리칼을 쓱쓱 넘겨주었다.
“세실, 너도 티타임 곧 같이하기로 한 거 기억하고. 오늘 괜찮다면 엄마 일 조금만 도와줄 수 있을까?”
“예, 그럴게요.”
“언제나 고맙구나.”
마리사는 다시 허리를 숙여 이번엔 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얌전히 제 차례를 기다리던 남편의 입술에 짧게 키스해 주고는 마침내 온실을 떠났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온실에선 흑발의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세실리아는 비어버린 의자 쪽을 돌아보았다.
‘어머니께서 일을 부탁하셨으니까.’
황실 대변인 프랑수아즈에게 알렉이 돌아왔다는 언질을 주고, 알렉의 사교계 활동 시작에 대해 논의하고…….
도서관 증축에 관한 오후 회의에 참석하면 되겠구나.
“그나저나 알렉, 리베에 가면 블랑슈를 만날 수 있겠다. 블랑슈도 이번 여름엔 리베에 있거든.”
세실리아가 불쑥 건넨 말에 알렉시스가 눈을 깜박였다.
“아, 흰─”
“알렉!”
“……실언, 이었, 습니다.”
“휴스턴 후작 영애 말이지?”
위험을 직감한 아르망이 잽싸게 끼어들며 질문했고, 세실리아는 알렉시스를 향해 경고의 눈빛을 던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버지.”
“영애는 안정화 방법을 찾았나? 석 달 전만 해도 못 찾은 거로 기억하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영애도 슬슬 급해지겠는걸.”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성년의 나이를 기점으로 몇몇 마법사는 광기와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조절하는 것에 애를 먹곤 했다.
블랑슈가 그 경우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야겠지.
“블랑슈도, 최대한 빨리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세실리아는 느릿느릿 대답하다 건너편의 청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르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뚫어질 듯한 두 쌍의 눈길에도 알렉시스 뤼셍은 태연할 뿐이었다.
그의 기름한 손가락이 유리잔 테두리를 느리게 쓸어내린다.
세실리아는 남자의 붉은 입술에 닿은 유리를 타고 투명한 물이 넘어가는 모습과 그리하여 빛줄기 속에서 도드라진 목울대가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알렉.”
그가 물을 참 달게 마셨기 때문일까.
어째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어 세실리아는 본인의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도움이요?”
의아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 거의 천진한 느낌마저 묻어 나오는 반문에 세실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을 끝내 입에 올렸을 땐, 이상하고 기이하게도, 남동생에게서 시선을 뗀 상태였다.
어쩐지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거나. 좋은 사람인지 궁금하다거나. 아니면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거나.”
“…….”
“로제네츠 덕분에라도 난 뤼셍의 거의 모든 영애와 친분이 있으니 네가 궁금해하는 영애를 내가 알 수밖에 없지.”
“참 사려 깊으시군요. 감동했습니다.”
“미안한데, 얘들아. 나도 그만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아르망이 다소 화려하고도 커다란 목소리로 자신의 퇴장을 선언했다.
허겁지겁 도망가는 태도였지만 신경조차 안 쓰는 듯했다.
하긴, 남매 싸움에서 부모님은 완벽한 중립을 지키거나 아예 빠지거나 둘 중 하나가 낫긴 했다.
아르망은 후자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예법이고 나발이고 빵 조각 두 개를 한꺼번에 물며 일어난 아르망은 할 말 참 많다는 눈으로 둘을 응시하다 슬슬 뒷걸음질 쳤다.
“어디 가세요, 아버지?”
알렉시스가 평온하게─지나치게 평온해서 실은 살벌하게 느껴졌다─묻기 전까지.
단번에 고장 나버린 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들 역시 천천히 일어섰다.
세실리아는 시선만 가만히 들어 올려, 알렉시스가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럼 누님. 기대하겠습니다.”
“…….”
“오늘도 부디 찬연한 하루 되시길.”
“그래, 너도. 아버지도 좋은 하루 되세요.”
“고맙구나, 세실.”
아르망은 그녀와 뺨을 맞대며 인사해 주었지만, 알렉시스는 그저 정해진 거리를 지키는 듯 손등에 입을 맞췄다.
더없이 정중한 태도긴 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을 대하는 느낌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행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그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춰주길 바라지 않아서.
꼭 닮은 부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세실리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목을 젖혔다.
드러난 목덜미에 닿는 여름 바람이 유난히 서늘했다.
“……비아냥이었지?”
눈치 빠른 녀석이 굳이 ‘반문’한 까닭이 따로 있을까. 분명 비꼬기 위해서일 터.
가족도 아닌 ‘타인’이 중매를 선다는 것이 같잖아서……의 느낌은 아니었는데.
세실리아는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리며 제 혼란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밝아진 시야에 잡힌 건 오늘도 화려한 온실의 천장이며, 드높은 유리 돔 중앙에 그려진 건 뤼셍의 문장이다.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의 지배 가문을 상징하는.
세실리아는 제가 만지작거리던 머리칼 끝을 열없이 던졌다.
있지, 알렉. 변한 네가 아무리 날 ‘타인’으로 대할지언정…… 일단 지금의 난 흑발이고 온실 안에 있어.
……아직도.
게으른 아침 햇살이 노닥거리던 게 바로 직전 같은데, 어느새 불그스름한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맞은편의 수석 사서가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공손히 예를 표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너야말로. 분명 일이 늘어났을 텐데, 괜찮겠어?”
“어쩔 수 없지요. 물의가 터진 회사를 계속 끌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본디 책장 제작을 맡기기로 했던 업체는 서부 아르틸 지방의 도넘 회사였다.
하지만 최근의 도넘은 장부 조작 의혹에 물감 속 유해 물질 함유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쐐기를 박는 격으로 사장의 불륜 스캔들까지 터져 마리사가 업체를 바꿀 것을 지시했었다.
세실리아는 느릿느릿 고개를 까딱였다.
때마침 서류 정리를 마무리했는지 사서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서다, 여전히 앉아 있는 그녀를 의아한 눈길로 돌아보았다.
“전하?”
“아, 난 책 좀 빌리고 가려고.”
“찾는 걸 도와드릴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너도 퇴근해야지. 빌려도 되는지만 물어보고 싶었어.”
그녀의 질문에 사서가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황녀를 대놓고 비웃는 모양새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입꼬리를 가누려는 것 같았지만, 어이없어하는 속내는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황궁의 모든 것은 기실 뤼셍의 소유 아닙니까.”
“…….”
“이 도서관이 퐁레프 안에 있는 한 도서관에 있는 모든 장서는 황녀의 것이지요. 두 분 폐하께서 반대하시지 않는 한, 전하께선 그 어떠한 책이든 마음껏 가져가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세실리아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옅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사서가 힘주어 재차 강조했다.
“물론 저희는 퐁레프의 그 모든 장서를 열심히 관리하고 있고요.”
“그래, 고마워.”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간도 크게 감히 책을 빼돌린 새, 놈, 사람이 있다면…….”
“아니야 아니야, 추궁하려고 한 질문 절대 아니야.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세실리아는 당황하여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서류를 책상 위에 다시 내려놓으려던 사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요?”
“정말로. ……벌써 여덟 시 가까이 되었는데 얼른 퇴근해, 쟌느.”
“헉, 벌써 여덟 시예요? 내 정신 좀 봐!”
사서가 시계를 보고 소스라치더니, 허둥지둥 예를 표하고는 도서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잰걸음으로 떠나는 여자의 뒤를 기다란 그림자가 배웅했다.
그렇게 세실리아는 웅장한 책의 향연 속에 홀로 남겨졌다.
노을에 물들어 붉은빛을 띠고 있는 서적들은 장엄하고도 엄숙하여, 막막했다.
참 많기도 했다.
그게 도서관의 본질이겠지만.
세실리아는 불그스름한 책등을, 마찬가지로 붉어진 책장을, 핏빛을 띠는 바닥의 그림자를 차례대로 훑다 말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없겠지.”
오래전부터 찾던 책이 하나 있었다.
앞날을 예언하는 건지, 이 세상이 책 속의 세계라 주장하는 건지 모르겠는 그 기이한 서적을 찾으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지만 오늘 이 순간까지도 세실리아는 찾지 못했다.
또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나 그녀는 찾으려 노력할 테고, 오늘도 역시나 그녀는 찾지 못할 터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그 속에 어쩌면 블랑슈의 마력 안정화 방법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알렉시스의 반려가 누군지도.
이쯤 되면 당연한 의혹이 들긴 한다.
제가 읽었던 게 과연 맞을까. 아니면 그녀의 어설픈 망상이 만들어 낸 착각일까.
“정신 차려, 세실.”
세실리아는 반짝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축 처져 음울함에 잡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럴 바에야 책장을 하나라도 더 훑는 게 낫지.
애초에 그녀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바로 끈기 아니었나.
제법 어둑해진 도서관의 마법 등을 켜고선, 세실리아는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너덜너덜해진 몸과 텅 빈 손으로 도서관을 나왔을 땐 시침이 10에 가까워져 있었다.
배 속이 꽤 요란하여 세실리아는 따듯한 우유만 한 잔 마시기로 결정했다.
곧 있을 공식 행사를 위해서라도 체중 조절에 들어가야 할 터.
이 시각에 뭔가를 먹으면 나중에 행복하지 않은 일이 많이 생길 게 뻔했다.
예를 들면 드레스가 안 들어간다든지, 시녀들이 운다든지, 유모가 불호령을…….
으윽.
‘역시 저녁은 건너뛰어야겠네.’
세실리아는 뻐근한 뒷덜미를 쓸며 흘끗 시선을 굴렸다.
통유리 너머 여름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채려 넘실거리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그늘이 마냥 짙었다.
그대로 발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는 싫어하는 색을 품은 밤을, 그림자를, 그리고 제 머리칼을 둘러보았다.
“……쓸데없어.”
지쳐선지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인 생각들이 꼬리 물고 이어질 것 같다.
이대로 내버려 두다간 정말 시작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 세실리아는 제때 흐름을 끊어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번엔 단호하게 발을 옮겼다.
* * *
침실로 돌아왔을 땐 우유를 정말 마셔도 될지 고민할 정도로 늦어져 있었다.
세실리아는 제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으며 포기하곤, 거추장스러운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다음으로 설렁줄을 잡아당기려다 말고 문득 방 한구석을 돌아보았다.
평상시라면 쌕쌕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을 애완견이 오늘은 흰색 꼬리조차 비추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방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본 세실리아는, 강아지께서 또 멋대로 탈출을 감행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오늘 아침 앞발을 붙들고 분명 간곡하게 부탁한 것 같은데 말이지.
‘……찾으러 가?’
‘굳이?’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르긴 했다.
퐁레프에서 황녀의 애완동물을 건들 만큼 간 큰 놈이 과연 있을까.
보랏빛 눈의 싸하게 변한 놈 하나가 떠올랐지만, 세실리아는 설핏 웃는 낯으로 후보를 지워냈다.
녀석은 제멋대로 괴롭히진 않을 터다.
그에게 있는 욕, 없는 욕 다 하던 블랑슈를 줄곧 봐준 걸 생각해 봐도 그렇지.
‘으음.’
적어도 7년 전만 해도 그랬단 소리다.
세실리아는 뻑뻑한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건 그 변해 버린 녀석을 못 믿는다기보다는…… 그냥 오늘 무언가 하나는 찾는 데 성공하고 싶어서, 라고 하자.
아마도.
* * *
숄을 걸쳤는데도 밤의 세레인은 꽤 쌀쌀했다. 세실리아는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며 정원 앞 깊숙한 곳을 시선으로 헤집어보았다.
밤이 보이는 것만큼 무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손을 휘저어 마법 등을 켜기보다는 어둠 속의 산책을 선택했다.
어릴 때부터 노닐었던 정원인지라 발걸음엔 망설임은 없었다.
어디에 장미 나무가 있는지, 또 어디에 산딸기 덤불이 있고 톡 튀어나온 돌들이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몸을 단정하게 편 채로 느긋하게 산책했다.
밤이 어둑하게 내려앉은 정원에선 풀벌레 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막 피어난 여린 풀이 발목을 간지럽혔고, 선선한 바람을 따라 여름꽃 향기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퐁레프가 매일 밤 짓는 화폭 같은 정경은 오늘도 역시 숨죽이게 아름다웠다.
그림자들이 엉기성기 기워진 오솔길 하나를 들여다보며 세실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강아지?”
달려 나와 그녀의 발을 신나게 타닥타닥 때렸을 사모예드가 나타나지 않는다.
배은망덕한 애완견님께선 그녀의 부름에 단번에 응답한 적이 거의 없으셨긴 했다.
‘산책이 꽤 길어지겠어.’
세실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오늘 정말 실패의 연속이 되는 건 아니겠지.’
딱히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기왕 정원까지 나왔으니, 꼭 찾고 싶은 열의는 있다고.
세실리아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성실하게 정원을 훑기 시작했다.
밤인 만큼 새하얀 털은 유독 눈에 띌 터다. 아무렴.
그러니 빨리 찾아서 데려가야지……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수색에 수색을 거듭해야 했다.
그 바람에 어느덧 넓은 정원의 중앙까지 다다라 있었다.
마법으로 설치된 커다란 호수가 은은히 빛을 발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수면을 구경하려 세실리아는 발을 멈췄다.
황금빛 시선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호수에서 그 위를 가로지르는 유리 다리에게로, 반투명한 다리에서 그 끝에 자리한 고즈넉한 정자에게로.
텅 비어 있으리라 생각한 정자에 누군가가 고요히 서 있었다.
다가오는 그녀를 지금껏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을 사람.
그 인영이 어쩐지 믿기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눈꺼풀을 여닫았다.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붉은 점과 그 끝에서 피어오르는 은빛 연기가 유달리 선명했다.
누구려나.
생각이 둔하게 흘러간다.
당연한 답이 마음속에서 떠올랐지만, 빠르게 인지할 수 없었다.
멍하니 그의 모습을 눈으로 덧그릴 뿐.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바람이 장난스레 헤집은 검은 머리칼과 나른하게 풀어진 보라색 눈동자.
정확하게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남자의 입가에 걸린 비뚜름한 미소가 더욱 휘어졌다.
알렉시스가 입술에 물린 담배를 빼내며 산뜻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누님.”
정말 찾아야 할 건 못 찾고 정작 엉뚱한 것만 찾고 있어…….
자신이 ‘엉뚱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긴 할까.
알렉시스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 덕분에 떫은 분위기에서 겨우 탈출한 세실리아는 머리칼 끝을 습관적으로 매만지기 시작했다.
얄미울 정도로 태평한 저놈과는 다르게 그녀의 머릿속은 꽤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기대하겠습니다.’
비꼬았던 그 어조.
낮에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손가락이 미끄러질 뻔했다. 세실리아는 손을 더 끌어 올려 이번엔 뒷덜미를 매만졌다.
‘어쩐담.’
이대로 못 본 척 돌아가는 것도 상당히 웃기지?
다행히 남아 있는 상식과 이성이 그녀의 가장 충동적인─그리고 매력적인─후보지를 삭제했다.
7년이라는 세월이 그들 사이의 간극을 넓힌 건 확실했다. 어떻게 좁히느냐, 상대에게 과연 좁힐 의지가 있느냐가 문제인데.
“안녕.”
“…….”
“좋은 밤이네.”
늦지 않게 인사를 건네며 세실리아는 숄을 추슬렀다.
새삼 옷차림을 가다듬고선 다시 눈을 들었을 때.
턱을 괸 채로 남자는 지그시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손을 멈칫한 상태 그대로 담담히 올려다보았다.
예상하였기에 동요는 심하지 않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보랏빛은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고도 정교한 감옥이었다.
아스라이 빛나는 수면과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코끝을 간질이는 들장미의 향을 잊을 정도로 막막한.
시간의 흐름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그래, 망망대해에 홀로 표류하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어와 숄을 빼앗으려 들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리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었겠지.
숄을 고쳐매는 동작 덕분에 그 기이한 순간이 깨졌다.
이번엔 다소 어설프게 알렉시스의 시선을 피하던 세실리아는, 뒤늦게야 기다란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목격했다.
은빛 연기를 한 줄기 허공으로 뱉고 있는 물체에 당황하여 눈빛이 삐꺽거릴 수밖에.
끝내 고장 나버린 그녀의 평정을 눈치챘는지 알렉시스가 작게 키득거렸다.
“올라오시지요.”
쟤가 지금 몇 살인데 벌써 담배를─!
세실리아는 머릿속에 열이 나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거의 뜀박질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황급히 달려와 정자 아래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알렉시스가 벌써 성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으며.
두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땐 담배를 피우는 그 동작이 능숙하다는 것을 포착했고.
세 번째 계단을 밟으면서 연기의 색이 살짝 독특하다는 것까지 눈치챘다.
일반적인 담배 연기와는 달랐다. 보다 광택 있고 반짝거리는…… 은색 연기.
그리하여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왔을 때 세실리아는 우울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온전히 정자 위로 올라서자, 알렉시스가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 재떨이에 비비려 했다.
“아냐, 괜찮아. 피워도 돼.”
“그러시다면.”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난간 위에 재떨이를 놓았다.
세실리아는 길고 곧은 손가락에 감긴 담배의 끝부분이 입술 사이로 물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연기 한 줄기가 여름밤 사이로 퍼져나가고 톡 쏘는 듯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정신이 얼떨떨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약연입니다.”
갑작스레 떨어진 설명에 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약연?”
“조금, 생각을 둔하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감정을 가라앉히는 안정제로 탁월하죠.”
“마력 폭주를 방지하려고?”
어쩐지 눈매가 느슨하게 풀려 있다 했다. 말꼬리도 미미하게 늘리고 있고.
“예.”
난간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있던 알렉시스가 고개를 까딱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의 얼굴 주변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던 세실리아의 눈은 결국 가느다란 연기를 타고 흘러내려, 다시금 입술로 안착했다.
그러자 기울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꼬리가 더욱 매끈하게 당겨졌다.
장난꾸러기 아이가 지을 법한 짓궂은 웃음.
전체적으로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제에 미소만은 천진난만한 건 반칙이었다.
세실리아는 손끝을 움찔했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미소라서.
순식간에 그리움이 몰려들며 위화감을 누그러뜨렸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멀어진 간극이 어떻게든 다시 좁아지길 바라는 맘으로.
알렉시스가 허락만 해준다면, 그녀는 정말 좋은 누이가 되고 싶었다.
좋은 누이의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언제고 닥쳐올 그 끝의 끝까지, 부디 그렇게 예쁜 모습만 보여줄 수 있다면.
세실리아는 애써 목소리를 긁어냈다.
“……그러니까, 알렉.”
“예?”
얼른 대답해 줘야 하는데…….
하지만 어색함에 목이 멘 듯 도저히 말을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잘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가 그녀 앞에 서 있다.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 * *
알렉시스 뤼셍이 리베 아카데미에 돌아온 건 태양이 적당히 기울어 있는 네 시, 바람마저도 조금 게으르게 휘도는 시각이었다.
바로 누이를 보러 가려 했던 황자는 시종장이 갖고 온 전갈에 발목이 붙들렸다.
집무실로 와라.
간결한 명령을 끝으로, 제국 황제의 서명이 유려하게 휘갈겨져 있다.
요리조리 뜯어보아도 변하지 않는 그 이름에 알렉시스는 나직이 체념하고는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부르셨…….”
“전하! 세상에, 이토록 장성하시다니!”
“…….”
“혹시, 전하께서 절 못 알아보시는 건…….”
“오랜만이야, 켈리에 경.”
학술원 최고의 수재로 손꼽혔던 그의 가정교사, 뱅상 켈리에 백작.
그가─어떤 감정에서 기인한 건지 모를─눈물을 줄줄 흘리며 서 있었다.
알렉시스는 손잡이를 잡은 상태 그대로 경직해 있다 뒷걸음질 쳐버릴까, 라는 사악한 고민을 곱씹었다.
아버지의 따가운 눈총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내키지 않는 발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도도도 가까이 달려온 켈리에 경이 손수건에 코를 휑 풀면서 연신 눈물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절 기억해 주시는군요!”
“7년인데, 뭐. 아주 어렸을 때 헤어진 것도 아니고.”
“역시 정말 멋지게 자라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러실 거라 믿었고요!”
“……으응, 그래…… 고마워…….”
나 어릴 적 당신 위에 구멍 세 개는 낸 것 같았는데.
‘양심적으로 고백하자면 말이야.’
속 썩였던 시절은 알아서 미화해 준 건지 그의 가정교사가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아르망은 턱을 괸 채로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손으로 입매를 가리고 있으니 비웃고 계실 터.
망할.
뺨이 슬쩍 씰룩거리고 있는 만큼 확실했다.
알렉시스는 눈꼬리 끝을 사르륵 접으며 웃었고, 아들의 불길한 미소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아르망은 근엄한 얼굴로 개입했다.
아들내미고 딸내미고 저런 웃음은 사고 치겠다는 암시였거든.
“자, 자, 켈리에 경. 눈물겨운 상봉은 이만 끝내도록 해. 이제 알렉의 제왕학 수업에 대해 논의해야 할 시간이지 않나.”
그 말에 콸콸 흘러내리던 눈물이 당장 그치었다.
맹한 낯에서 엄정한 표정으로 바뀌는 변화는 객관적으로 무서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신박한 묘기를 선보인 뱅상 켈리에가 자세를 단정하게 가다듬더니, 이번엔 대체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는 종이들을 둘둘 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오늘을 위해! 제가 7년간 뼈를 갈고 갈아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아르망은 눈빛으로 애도를 표해 주었고, 알렉시스는 아까부터 얄미운 태도를 골라 보여주는 아버지를 무시했다.
“자, 그러니까 전하! 집중해 주세요!”
“……하고 있어.”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그래…….”
더는 10대 초반의 애새끼도 아니고 스승의 위에 구멍을 내줄 수도 없는 터라, 알렉시스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시선을 잠자코 견뎌주었다.
* * *
스승과 오랜만에 저녁 만찬을 함께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배웅까지 끝냈을 무렵엔 여름 노을이 늘어뜨린 그림자들이 밤에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다 씻고 나오자 어둑한 하늘에 별이 한가득 수 놓여 있었다.
피로가 선득하게 엄습했다.
몽테-페르트 마탑에서부터 쉴 새 없이 돌아왔고, 그 직후 바로 일정을 소화했으니 당연할 수밖에.
마탑에 있는 동안 밤을 지새우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터다.
하지만 그래봤자 잠을 쉽게 못 이루리라는 사실을 알아, 알렉시스는 묵직한 눈꺼풀을 붙든 채로 정원으로 나섰다.
아직 잠들지 못하는 퐁레프가 밤을 맞이하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 사이로 들리는 건 그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소리.
선선한 바람 사이로 풀이 흔들리는 소리, 연못의 수면이 일렁이는 소리…… 네 개의 발이 어디선가 타닥타닥 움직이는 소리.
그 모든 화음이 어우러져 밤의 적막을 간지럽히는 것에 귀 기울이며 알렉시스는 정자로 걸어갔다.
물 내음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청량하면서도 시원했다.
약연은 하루에 한 개 이상 피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가느다란 은색 연기가 솟구치자마자 온 정신이 나른해졌다.
수면 아래로 하염없이 가라앉는 것처럼, 그저 끝없이 꿈속으로 침잠하는 것처럼, 의식이 몽롱해져만 갔다.
약연을 피우는 건 하나의 충동에 불을 지핌으로써 다른 감각을 전부 꺼뜨리는 행위였다.
그렇게나마 어떻게든 광기를 가라앉혀 보겠다는 서글프고─어떤 면에선 조금 처절한─발악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알싸한 향과 입 안 가득한 매콤한 맛 때문이 아니라, 그냥 끝에서 피어오르는 은빛 연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은빛을 연상시키는…….
바스락.
알렉시스는 느릿느릿 시선을 내렸다.
누군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그는 답을 깨닫는다.
세레인이 황족에게만 출입 가능한 정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어떤 소리 하나가 불규칙적으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역시나.
“안녕하세요, 누님.”
꿈결이 그려낸 자태로 여자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예쁜 얼굴이 당황으로 얼어붙어 있다는 건 확연했다.
미미하게 경련하는 시선이 그와 담배를 엉망으로 훑고 있다는 사실도.
알렉시스는 엷게 웃음을 베어 물었다.
저런.
마냥 어렸던 동생이 사라졌으니 세상 무너지는 기분을 만끽하고 계시겠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어린 동생 노릇을 좀만 더해 줄까. 라는 심술궂은 생각까지 일 지경이었다.
올라오라는 제안에 그녀가 소리 없이 발을 옮겼다.
슬리퍼를 신고 있으면서도 사뿐한 걸음은 변함이 없다.
숄의 벌린 틈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얇은 치마가 감겨 있는 얇은 종아리.
밤안개에 젖은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
알렉시스는 연기를 짧게 내뱉으며 시선을 떼었다.
특히 약연을 피우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아찔한 풍경이었다.
그가 눈을 돌린 틈을 타서 여자가 발을 재게 놀린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정자 위로 올라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세 걸음.
멀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절대 친밀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거리.
동시에 언제든지 앞으로 내디뎌 걸음을 좁히기 쉬운 거리다.
알렉시스는 가냘픈 손목을 쳐다보며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세실리아가 앞으로 내디디는 것이 빠를까, 그가 손을 뻗어 끌어당기는 것이 빠를까.
결과야 자명했다. 거리는 좁혀진다.
중점은 그의 의지로 인한 건지 그녀의 의지로 인한 건지일 뿐.
‘무엇 때문이려나.’
그가 알게 모르게 웃었을 때, 세실리아가 불쑥 앞으로 내디뎠다.
“알렉.”
“예.”
세실리아가 말을 찾으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고, 알렉시스는 비스듬히 앉은 채로 그녀를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하루의 피로가 내려앉아선지 여인의 미모는 이젠 뇌쇄적인 면모를 띠었다.
커다란 눈동자 속의 황금빛 역시 마냥 온유하기보다는 따스함과 서늘함이 뒤섞인 오묘한 색감이었다.
그리고 쨍하게 맑다.
알렉시스는 황금빛에 너무 깊이 빠지기 전, 약연을 천천히 물었다.
모든 감각이 뿌옇게 변하는 와중에도 여자 홀로 선명했다.
그를 오롯이 담고 있는 깊디깊은 시선.
또 평정을 되찾으셨군. 어색함을 묻어버리고.
저 차분함은 오만함과 비슷한 결이긴 했다. 살짝 다른 점이 없잖아 있긴 해도…….
일단은 여인의 오만함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어, 알렉시스는 몸을 뒤로 젖혔다.
첫날부터 그녀의 잔잔함을 일그러뜨리겠다는 계획은 없으니.
“누님?”
“아. 미안, 정원엔 뭐 하러 왔니?”
“저야…….”
알렉시스는 가볍게 손가락 사이의 약연을 까딱였고, 세실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께선?”
“집, 아니, 방 나간 강아지 찾으려고.”
“…….”
“도와주겠어?”
그는 대답 대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자에 오르기 전 네 개의 발이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으니, 알리샤는 분명 정원에 있을 터였다.
역시.
흰색 강아지 녀석은 정원에 있었던 듯 곧 컹컹, 경쾌하게 짖으며 화답했다.
알렉시스는 걸터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새하얀 털 뭉치가 밤을 뚫고 달려오는 걸 바라보았다.
“맙소사, 몇 년간 입히고 먹이고 재워준 주인이 찾을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입히기도 하셨어요?”
“아니, 그건 뺄─ 알리샤!”
세실리아의 경악.
눈동자만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알렉시스는 한발 늦게 다시 시선을 움직였다.
제 주인을 알아본 강아지가 기어코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꼬리를 붕붕 흔들며 달려오다 말고 곧바로 연못으로 뛰어들었으니.
헥헥거리며 열심히 헤엄쳐 온 강아지는 정자 위로 도약하려 낑낑거리다, 결국 실패하고는 시무룩해졌다.
축 처져 있는 귀와 경직해 버린 꼬리가 처량하게까지 보였다.
‘저거…… 영민한 것 맞나?’
알렉시스는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다, 마법으로 불쌍한 애완견을 구제해 줘야 했다.
컹컹 짖어대는 저 소리를 멈추기 위해서라도.
재떨이에 약연을 비벼 끄며 강아지를 들어 올린 뒤, 말끔하게 말려서 주인에게로 넘겨주었다.
세실리아가 팔을 뻗어 낑낑거리는 알리샤를 끌어안았다.
배은망덕한 애완동물께선 앞발로 타닥타닥 제 주인의 슬리퍼를 내리치고 있었다.
박자 정확히 맞추는 걸 보니 영민한 애는 맞네.
“언니가 얌전하게 있으라 했잖아.”
“컹─!”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7년 동안 아주 오냐오냐 대해 주셨나 보지.
알렉시스는 삐딱한 대꾸를 도로 삼키며 흰색 강아지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걸 관찰했다.
이리저리 방정맞게 꼬리 흔들던 사모예드는 다음 순간 난간을 넘더니─왜 넘어, 대체!─다시 호수로 뛰어들었다.
‘기껏 말려줬더니 왜 또 뛰어들어!’
그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는 동안, 저 아래선 강아지가 요란하게 뛰놀기 시작했다.
멍멍 컹컹 짖어대며 아주 수면을 박살 내고 계신다.
세실리아가 난간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선, 턱을 괸 채로 뇌까렸다.
“알리샤, 진짜 너 닮았어.”
“너무하시네요.”
“너도 하벨 강에 무턱대고 뛰어든 적 있었잖니.”
……아. 데뷔탕트 때.
‘아무리 그래도 그거랑 이거랑 다른 취급해 주면 안 되시려나.’
알렉시스는 한숨을 삼키며 연못 쪽을 내려다보았다. 유유히 헤엄을 마친 알리샤가 연못가로 올라와 요란하게 물기를 털고 있었다.
그러더니 빨리 안 오냐는 듯 두어 번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애완견의 재촉을 못 이기겠는지, 세실리아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에스코트를 청하자 숄을 여민 손이 부드러이 그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금빛 나비가 꽃술 위로 내려앉듯 한없이 사뿐한 동작이다.
계단을 내려오도록 도와준 알렉시스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었다.
알리샤는 앞에서 뛰어가다 말고 빙빙 돌다, 그들 쪽으로 다시 달려오는 둥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알렉.”
“예.”
“리베에 간 건 어떻게 되었니?”
“일단 안정으로 판정이 나왔지만, 정밀 검사를 위해 또다시 방문해야 합니다.”
“아하.”
짧게 대꾸한 세실리아는 코앞까지 달려온 알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허리를 숙였다.
“혹시, 블랑슈는 만났고?”
“아니요.”
“…….”
“다음번엔 누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응? 어디로? ……리베로?”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나’, 라는 작은 음절을 만들어 낸다.
그는 확답하듯 재차 단호히 끄덕여 주었다.
“누님께서 휴스턴 후작 영애를 매우 그리워하시는 것 같으니.”
“어…… 그리워하기야 하지만…… 나야 2주 전에 만났는걸?”
알렉시스는 잠자코 쳐다보았고, 세실리아가 눈을 이리 또로록, 저리 또로록 굴리다 선선히 대답했다.
“좋아, 같이 가자. 나야 리베엔 한 번도 못 가봤으니 좋은 기회지.”
“좋습니다.”
여자가 나른히 웃는 모습을 향해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시선에 시선이 얽매인다.
눈동자에 서로의 상이 새겨지며 상대의 변한 모습에 익숙해지라 재촉하고 있었다.
한쪽의 시선은 고요했고, 또 한쪽의 시선은 열없었다.
한쪽은 숨기는 것에 능했으며, 다른 쪽은 작정하고 숨기고 있었다.
여자가 발을 물렸다.
가까워졌던 거리가 다시 멀어지는 것에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선다.
그녀에게 그의 신형이 드리우도록. 그녀의 시야에서 정원이 완전히 가려지도록.
놀란 여자가 눈을 깜박이자, 이내 시야를 제외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여름 들꽃 향을 누르며 휘도는 남자의 체향.
풀벌레 소리 사이로 강렬하게 존재하는 심장 박동 소리. 닿지도 않았건만 느껴지는 남자의 포근한 온기.
건조해진 입 안으로 침입한 이 순간의 기이한 떫은맛.
세실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여닫히는 눈꺼풀 사이로도 알렉시스는 숨 막히게 또렷했다.
“그렇담, 누님. 부디 좋은 밤 보내시기를.”
“……고마워. 너도 좋은 밤 보내렴.”
다시금 뒤로 물러서려던 세실리아는 슬리퍼가 벗겨지는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그리하여 보인 건 살짝 드러난 그녀의 맨발과…….
“아침의 복수.”
짓궂게 속삭인 그가 놓아주고선, 정자를 향해 휘적휘적 되돌아갔다.
약연을 다시 피우는 건지 은빛 연기 하나가 가느다랗게 위로 솟구쳤다.
달빛이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한 풍경.
세실리아는 어둠 속 남자의 뒷모습을 덧그리다 발을 돌렸다.
* * *
황실 대변인 프랑수아즈 밀레가 황자의 귀궁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소문의 진위를 긍정한 만큼, 뤼셍의 사교계는 시끌벅적한 활기에 휩싸였다.
그 까칠했던 소년이 원숙한 청년이 되어 있더라, 라는 소식에 기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탑에서 돌아온 황자는 사흘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퐁레프 안에만 머무르며 제 일정을 소화했을 뿐.
그 기가 막히게 훤칠해졌다는 낯을 도저히 보여주질 않았다.
화제성이 사그라질까 걱정해선지 프랑수아즈 밀레는 셋째 날, 두 번째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가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황위 계승이 굳어졌다는 것에 놀라는 이는 없었다.
손위 누이라 할지언정 마력을 발현하지 못한, 그것도 입양된 황녀와 마력을 발현한 뤼셍의 직계 황자 중 누가 제위를 이을지는 명백하였으니.
사람들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화제의 주인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그 순간까지.
* * *
선남선녀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하객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신랑은 프레지어 백작가의 데릭 프레지어 영식, 신부는 뷰디어 남작가의 엘레이나 뷰디어 영애였다.
유서 깊은 두 명문가의 결합인 만큼 참석하는 하객들 역시 굉장히 화려했다.
도착하는 마차마다 익숙한 문장을 뽐내었고, 마차에서 나타나는 이들 역시 전부 신문에 익히 등장하는 얼굴들이었다.
심심할 때마다 사진 찍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기자들이 새벽부터 진을 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
다름 아니라, 엘레이나 뷰디어 남작 영애가 바로 세실리아 뤼셍 황녀의 수석 시녀였기 때문이다.
황녀는 예법상 결혼식까진 참여하진 않겠지만, 분명, 분명…….
“도착하셨다.”
누군가의 속삭임을 시작으로, 작으면서도 큰 술렁임이 군중 사이로 퍼져나갔다.
길의 끝에서 황가의 문장을 단 검은빛 마차가 소리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밤처럼 짙고, 죽음처럼 고요하게.
존재만으로도 묵직한 위압감을 뽐내는 모습은 제국민에게 자연스레 지배 가문의 이명을 연상하게 했다.
‘승리의 뤼셍.’
그들을 위해 가장 영광된 가치를 쟁취해 줄 군주. 저 위에서 군림할 하나뿐인 고귀한 태양.
어느새 사람들은 전부 입을 다문 채로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경외 섞인 정적 속에서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었고, 마부가 뛰어내리더니 문을 열었다.
기자들이 홀린 듯이 카메라를 들었을 때, 흑발의 청년이 마차에서 여유롭게 내려섰다.
제게 시선이 쏠릴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긴장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그 주목이 당연하다는 듯 입매에 빙긋 걸린 미소는 담담하기만 했다.
미혹.
그래. 관능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힘겹게 머리를 굴려, 남자의 다른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청년은 진리를 깨우쳤다는 현자의 눈을 가려 현혹하고 굴종을 끌어낼 만큼 수려했다.
검은 머리칼 아래로 보랏빛 눈꼬리가 짓궂게 굽이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신나게 사진을 찍어내는 동안, 황태자는 유유히 몸을 돌려 마차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나타난 황녀는 동생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작게 속삭이는 것에 황태자가 몸을 숙인다.
그러더니 짤막한 웃음을 터뜨리고, 황녀가 눈썹을 휘고.
황태자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황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것에 웃음을 터뜨리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두 인물이 움직이고 있었다.
참 신기도 하지.
분명 그들 전부 같은 생-뢰크의 여름 햇살을 만끽하고 있을 터인데, 왜 저들 있는 곳만 더 빛나 보이는 건지.
한 줄기 맑은 빛줄기가 둘 주위를 아른아른 맴돌고 있는 것만 같다.
몇몇 이가 의문을 곱씹는 동안, 황족 둘은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고는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남은 건 압도감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적막이다.
물론 그 고요는, 두 흑발이 사라지자마자 탄성으로 요란히 깨질 수밖에.
* * *
둘이 신부 대기실에 나란히 들어서자, 엘레이나 뷰디어가 허둥지둥 일어서려 했다.
세실리아와 알렉시스는 동시에 손을 뻗어 만류했다.
“괜찮아, 리나.”
“괜찮아.”
그들의 기억 속에서 엘레이나는 참 많이 넘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절대로 일어나게 만들고 싶을 리가…….
무사히 입장하길 바라, 리나. 진심으로.
세실리아와 알렉시스는 똑같이 기원해 주었다.
주변 이들이 황급히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하는 동안, 신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커다란 눈이 놀람과 반가움을 머금은 채로 열심히 깜박거렸다.
“황자, 아니, 황태자 전하시구나!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응.”
“언제 이렇게 크셨어요!”
“7년 동안.”
알렉시스는 당연한 대답을 내어주었다.
다소 삐딱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음성에도 신부는 배를 잡고 웃었다.
퐁레프에 오래오래 머무른 이들이라면 알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사교계 평판과는 꽤 다른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오늘 여기서도 사고 치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남의 경사에서 사고 치는 성격은 아니야…….”
“아무렴요.”
그녀의 무례할 법한 농담도 잘 넘겨주시는 걸 보면 각이 나오지 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하.”
“그래, 너도 결혼하는 거 축하하고. 잘 살아.”
“네에. 그러겠습니다아.”
알렉시스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고, 이번엔 세실리아 차례였다.
세실리아가 팔을 벌리자 엘레이나가 포로록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저어어언하아아아아!”
“그래, 그래.”
“가끔 남편이 속 썩이면 일러바쳐도 돼요?”
“그래.”
같이 욕은 해줄 수는 없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세실리아의 엄숙한 약속에 엘레이나가 다시 웃었다.
시종일관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정략결혼’이라는 소문치고 정말 행복해 보여 다행이었다.
위기는 되레 그들이 선물을 건네주었을 때 찾아왔다.
짙은 화장을 했으면서 엘레이나는 눈물을 글썽였고, 세실리아는 그녀를 웃게 해주기 위해 재치를 열심히 긁어내야 했다.
그리고 결혼식이었다.
참석하지 않는 게 도리임을 알기에 둘은 늦지 않게 식장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는 순간까지도 참석 객들의 속닥거림과 이목은 끊이지 않았더랬다.
* * *
마차에 타자마자 세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제 평판을 망치던 황태자 전하께선 오늘은 무서울 정도로 훌륭하게 사교계 복귀를 선언하며 제 존재를 빛내셨다.
‘……완벽했어.’
마탑까지 다녀온 불안정한 마법사.
분명 이러했던 알렉시스의 이력은 본인의 화려한 외모와 황태자라는 압도적인 지위, 완벽한 혈통과 고아한 기품으로 묻혀 버릴 터다.
황태자를 흘끗거리는 눈빛엔 분명 경외와 선망이 똑똑하게 새겨져 있었다.
물론, 알렉시스가 아직 ‘안정화’에 성공하지 않은 만큼 그를 무서워하기도 할 테지.
그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본디 군주는 필요할 때 공포를 끌어낼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 만큼 적당한 무서움의 대상이 된 것도 마냥 나쁘진 않을 테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누님.”
애초에 뤼셍 사교계는 돌아온 황태자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리라.
황태자가 혼인 적령기에 이른 만큼, 그의 안정화를 위해서 사교계 전체가 합심하여 그의 반려를 찾아주는 게 당연하디당연한 관습이었다.
황태자의 선택이라면 결혼 사흘 전의 영애라도 파혼하여 황태자와 결혼해야 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욕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누님?”
제 새끼손가락을 톡 두드리는 손길에 세실리아는 시선을 까딱 움직였다.
건너편의 좌석에서 알렉시스가 잠자코 응시하고 있었다.
저 눈길 속에서도 생각에 빠져 있었다니, 어지간히 집중한 모양이다.
“응. 무엇이니?”
그녀는 머리 끝부분을 열없이 매만지다, 그제야 마차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라.
‘무슨 일이람?’
조심조심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침엽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빽빽이 꽂힌 산자락이 곧바로 시야를 강타했다.
리베 아카데미로 가는 길의 초입인가.
그들은 결혼식 다음 일정으로 리베 아카데미로 향하기로 했었다.
때마침 블랑슈와 티에리 경도 오늘은 확실히 리베에 있다고 한 만큼 최적의 날짜였다.
“리베에 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가는 것과 순간이동?”
그녀가 던진 추측에 알렉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리베는 순간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땐 퐁레프와 더불어 리베가 전쟁 본부가 되거든요.”
전쟁?
“마법사들 사이의 전쟁은 리베가, 마법사들이 없는 전쟁은 퐁레프가 지휘를 맡습니다.”
마법사간의 전쟁과 일반인간의 전쟁으로 나뉘나 보네.
“요새 역할도 하다 보니 외곽의 산속에 지어졌지요.”
“아하, 그렇구나.”
마법과 관련된 분야는 거의 배우질 않은 만큼 생경한 지식이군.
“그래서 리베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은…… 마차를 타고 가는 것과 날아가는 것이 있는데, 무엇을 선택하실래요?”
“어떻게 날아가는데?”
알렉시스가 생긋 웃었다.
악동이 대형 사고를 치기 직전 보이는 눈웃음과 똑 닮아 있어 세실리아가 불안함을 느끼기도 잠시, 그가 순순하게 대답해 주었다.
“제 품에 안겨서요?”
“마차.”
“후회하실걸요.”
“마차.”
“멀미가 심하실 텐데?”
“마차.”
“정말로?”
세실리아는 들고 있던 파우치를 동생 머리통에 집어 던질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처연하고 속상한 척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낯짝이 가증스러워서.
쟨 왜 저리 잘생겼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남동생이 잘생긴 건 정말 쓸데없는데.
“알렉, 나 안아 들고 날아갔다간 네가 후회할 거란다. 무거울 거니까.”
“예?”
“쓸데없는 곳에 힘 빼지 말고 난 마차 타고 갈 거야. 넌 날아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렴.”
알렉시스가 떨떠름해지든 말든.
“……누님께서 무거우실 리가 없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세실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객관적으로 무거울 리 없었다.
물론 키 때문에 어느 정도 무게는 나가겠다만, 알렉이 못 들 정도는 아닐 것이다.
못 들면 저 녀석은 허우대를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내 코르셋과 드레스와 파우치와 목걸이와 귀걸이는 꽤 나간단다.”
“…….”
“다신 여성용 장신구의 무게를 무시하지 말고, 마부에게 출발하라고 이르렴.”
알렉시스가 반쯤 뾰로통하고 또 반쯤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들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실리아는 후회했다.
그냥 알렉시스의 팔을 떨어져 나가게 할 걸 그랬나, 사람은 역시 좀 이기적으로 살아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마차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마차가 어떤 방향과 어떤 길을 가는지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줄은…….
모퉁이를 도는 것과 비탈길을 올라타는 것, 바퀴가 울퉁불퉁한 표면을 견디는 것까지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머리카락 끝까지 전달되는 듯한 진동에 두통이 인다.
‘아이고, 맙소사.’
승마에 익숙한 몸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벌써 구역질하는 추태를 보였겠어.
세실리아가 뻣뻣하게 굳은 눈꺼풀을 애써 움직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차가 다시 모퉁이를 돌려는 조짐을 보였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려 들었다.
‘마음의 각오가 상당히 필요한…….’
딱.
경쾌하게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순 모든 흔들림이 사라졌다.
세실리아는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려 평온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선을 이리 또록, 저리 또로록 굴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아. 그녀가 좌석 위에서 살짝 떠 있었다.
공중 부양이라도 하듯.
구두 역시 마차 바닥이 아닌 허공을 살짝 밟고 있었으며, 드레스 자락 역시 아래로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게요, 누님. 멀미가 심하다고 했잖습니까.”
마차 안의 마법사가 태연하게 타박했다.
다리를 길게 꼰 그 역시 공중으로 약간 떠 있는 상태였다.
세실리아는 발을 가볍게 까딱여 보았다가, 조심조심 뻗어 동생의 구두코를 톡 쳐 보았다.
허공에 부유해 있기 때문인지 그의 발이 마치 시계추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멈추었다.
남자가 입술 사이로 작은 실소를 흘렸다.
“……알렉. 그렇다면 말이야.”
“예.”
“내 코르셋이랑 드레스랑…… 그런 게 무겁지는 않겠네?”
어차피 다 마법으로 띄웠을 거잖아.
세실리아의 지적에 그가 느릿느릿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이라도 제 품에 안겨 가실래요?”
“…….”
“누님께서 그런 열의를 갖고 계신다면, 저야 언제든지…….”
“미안해. 사양할게.”
세실리아는 재빠르게 사과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알렉시스가 더 크게 웃었고, 그녀는 뻔뻔한 가면을 장착해야 했다.
눈앞 남자의 품에 안겨 도착하는 건…… 글쎄.
거기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고통이 사라진 지금은 더더욱, 마차를 포기할 이유가 없지.
“어쨌든 알렉, 고마워.”
“별말씀을.”
뒤늦은 감사 인사에 깔끔한 대답이 들려온다.
세실리아는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준 뒤, 창밖으로 잽싸게 시선을 피신시켰다.
온통 초록이었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상록수가 만들어 낸 풍경은 커다란 변화가 없어, 구경하기 지루할 정도이긴 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나름 흥미롭다는 표정을 꾸며내며 창밖에 고집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맞은편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일념이었다.
정경을 감상하는 척하는 동안 그녀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쪽으론 다과회에 참석할 영애들의 명단을, 다른 쪽으론 그 영애들의 자리 배치도를 구상했다.
마차가 도착한 건 두 개의 명단을 완성하고 한 개의 명단을 폐기했을 때였다.
내릴까요, 손을 내밀어준 알렉시스에게 그녀는…….
‘로테인 남작가와 시에너 자작가를 절대 같은 다과회에 초대하지 않을 거야’라는 쓸데없으면서도 귀중한 깨달음을 자랑할 뻔했다.
세실리아는 어깨를 단정하게 펴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래된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고성이 첨탑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운동장 중앙에 서 있는 건 아카데미의 상징이라는 ‘자유의 분수.’
아카데미에 다니는 모든 학생이, 광기에 부디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뤼셍의 초대 황후가 선물한 조각이라고 했더랬다.
한쪽 팔을 위로 뻗고 있는 여자 조각상은 한없이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손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가 오묘한 빛을 발하며 분수대 전체를 휘감는다.
아픔 없는 세상.
분수대 맨 아래에 새겨진 글씨가 진부하기는커녕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아픔’이 이곳에선 처절한 현실이기 때문일 테지.
여름 볕 아래 청명한 빛을 발하는 물줄기를 응시하며 세실리아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부디 저 분수의 뜻대로 모두 자유로워지기를.
아픔 없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를.
불가능하여 덧없는 소원이라고 한들, 기원하는 마음마저 볼품없진 않을 테니.
뻑뻑해진 눈꺼풀을 여닫았다.
“들어갈까?”
사뿐히 발을 옮기려던 그녀를 알렉시스가 제지했다.
손길에 붙들려 얼떨결에 뒤로 물러나자, 위에서부터 누군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언니이이이이이이─!”
점프슈트를 입은 갈색 머리의 미인이 팔을 뻗으며 헤실거렸다.
쾌활한 연녹색 눈엔 봄이 가득했고, 어릴 땐 인형처럼 오밀조밀했던 이목구비는 성장하면서 더욱 날카로워져 섬세한 비율을 완성했다.
여느 때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블랑슈는 세실리아의 품에 뛰어든 채로 고개를 돌렸다.
흑발의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남자 하나가 그녀를 흘겨보고 있다.
서늘한 눈매와 못마땅한 눈초리. 삐딱하게 휘어진 입술.
‘말도 안 돼.’
블랑슈는 깜빡깜빡깜빡 눈을 요란하게 깜빡였다.
남자는 여전히 굳건했다.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블랑슈는 빼액 요란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앙아아아아아아아아악! 쟤가 왜 여깄어─!”
“‘쟤’?”
“블랑슈.”
서늘한 날이 깃든 반문과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타박이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알렉시스가 못마땅하게 째려보는 눈초리와 세실리아가 엄격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어 블랑슈는 입술을 달싹였다.
네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 저, 전하께서 왜 여기에 계실까요오오…….”
“돌아왔으니까?”
“……귀궁으으을, 축, 하, 드립니다아아.”
“네가?”
알렉시스가 기가 찬다는 듯 반문했고, 세실리아의 품에서 얼굴을 떨어진 블랑슈가 씩씩거리며 방방 뛰었다.
“아, 돌아온 건 기뻐요!”
“그래, 믿어는 줄게.”
“진심이라고! 아깐 놀랐을 뿐이라고오오!”
“귀 아파.”
“아아아악! 전하께선 대체 어떻게 사셨기에 성격이 더 처참해지신 거예욧!”
“귀 아프다는데 고함 지르는 너보단 낫지 않을까……. 넌 예의도 없고 양심도 없더니 이젠 어떻게 배려도 없냐.”
얘넨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구나.
체념하기도 귀찮아져 세실리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둘 사이에서 빠지려는 그녀를 눈치챘는지 블랑슈가 얼른 고자질했다.
“언니, 황자 전하가 저 괴롭혀요!”
“황태자란다. 그리고 둘 다 똑같아 보여…….”
“언니!”
“저기요, 누님?”
세실리아는 열없이 손을 휘저었다.
듣지 않겠다는 신호에 둘 다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블랑슈의 장밋빛 발그레한 뺨을 아주 살짝 꼬집어 늘렸다.
아야야야, 아픈 척 엄살을 부리며 블랑슈가 발을 동동거렸다.
세실리아는 그제야 볼을 놓아주고선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알렉시스가 훌쩍 큰 것처럼, 블랑슈 역시 소녀의 태를 벗고 어른으로 완연하게 성장했다.
이지러지는 연녹색 눈빛엔 반가움과 애정이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잘 지냈니, 블랑슈?”
“네! 언니는요?”
“나도. 알렉도 귀궁했잖니.”
세실리아는 짧게 덧붙이고선 동생을 향해 눈웃음쳤다.
사르륵 풀어지는 눈매가 솜사탕처럼 다디달아, 불시에 공격받은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내가 귀궁하여 당신이 잘 지냈다고?’라는 반문도 머릿속에 뒤엉켜 나오지 못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휘말릴 수밖에.
정신이 얼얼했다.
여인의 눈이 그를 향해 어떻게 휘어졌는지, 그 웃음이 얼마나 청아했는지, 머저리처럼 계속 떠올릴 뿐이었다.
“알렉?”
“전하?”
두 여인의 부름에 알렉시스는 뒤늦게 이성을 되찾았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정문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돌아보며, 얼어붙어 있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갑니다.”
빌어먹을.
알렉시스는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소리 없는 한탄을 짓씹었다.
* * *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서자, 티에리 에스디어가 쏜살같이 튀어나오더니 다시 도망치려는 블랑슈를 꼭 붙들었다.
이마에 십자 표시가 새겨진 듯한 기사는 표정 전체로 분노를 풀풀 흩뿌리고 있었다.
이어 사고뭉치의 이마 위로 꿀밤 여러 대가 야무지게 내려앉았다.
블랑슈가 울상을 지으며 여러 번 꿈틀거렸지만, 티에리의 응징은 굳건하기만 했다.
갖가지 소란으로 위경련을 하루에 네 번 이상 겪어야 했던 기사는 인내심을 팔아먹은 지 오래였다.
“고귀하신 황녀 전하를 드디어 뵙는군요.”
둘을 구경하던 세실리아는 발을 사뿐히 돌려, 꼿꼿하게 선 중년 남성을 마주했다.
그녀가 내민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춘 그가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리베를 이끄는 율리케라고 합니다.”
뤼셍의 마법사들을 교육하는 리베 아카데미.
30년 전부터 이 학교를 지켜온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교장을 향해 세실리아는 웃으며 화답했다.
“만나서 반가워, 율리케. 내가 퐁레프 안에서만 머무르는 바람에 그대와 진작 사교할 기회를 놓쳤군.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아쉬운걸.”
“두 분 폐하께서 퐁레프의 보물을 제게 쉽게 보여주실 리가 없지요. 이제라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전하. 황자,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율리케가 경탄이 서린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한때 아카데미의 온갖 사건, 사고를 책임졌던 양대 산맥 중 하나는 천연덕스럽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멋지게 성장하셨군요.”
“……네가 그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저도 몰랐습니다.”
세실리아가 빤히 쳐다보았지만, 알렉시스는 누이를 절대 돌아보지 않는 현명함을 발휘했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따가운 눈총을 거두어 주었다.
그제야 그는 빙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그럼 누님.”
“응?”
“휴스턴 후작 영애와 함께 리베 아카데미를 둘러보시겠습니까? 저는 그동안 안정성 검사를 받고 있겠습니다.”
“유감이지만 황태자 전하, 그건 불가능합니다.”
율리케의 개입에 알렉시스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검사에서 전하를 상대할 사람이 바로 블랑슈 졸업생이라서요.”
“아아아아악─ 율리케 경! 잠시만요! 잠시만! 제게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블랑슈의 처절한 비명을 예상했는지 율리케는 일찌감치 양쪽 귀를 꽉 막은 상태였다.
숨을 훅 들이켠 티에리의 낯엔 안쓰러움이 깃들어 있었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든 알렉시스의 표정은 그저 건조할 뿐이었다.
세실리아는 머리칼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심상하게 질문했다.
“……그럼, 알렉. 나 혹시 네 검사 지켜봐도 될까?”
“네?”
“안 되는 거니?”
알렉시스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울먹이는 척하던 블랑슈도.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티에리도.
귀를 꽉 막은 시늉을 했던 율리케도 어쩐지 어설프다 못해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위화감에 사로잡히다 못해 목이 졸릴 것만 같다.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세실리아가 입술을 달싹이던 때.
알렉시스가 매끄럽게 대답했다.
“누님께서 원하신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단다. 부담 주고 싶진 않으니.”
괜스레 아집으로 주변을 난처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세실리아는 부드럽게 제안을 물리려 했지만, 알렉시스는 이미 율리케를 돌아보고 있었다.
“괜찮겠지?”
“오히려 그러는 편이 더 낫겠군요.”
그가 선선히 대답하더니, 알렉시스와 블랑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퍽 의미심장한 시선이었다.
스승의 눈길이 닿자마자 블랑슈가 움찔하며, 큰 눈을 또록 또로록 굴렸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듯이.
그녀가 티에리의 뒤로 꾸깃꾸깃 몸을 숨기려는 모습을 율리케가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안정성 테스트가 원만하게 끝날 테니까요.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별말을. 내 쪽에서 고맙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답은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이나 매끄럽게 나왔다.
고작 한 표현으로 분분하게 변한 마음속과는 다르게.
……‘원만하게’라.
알렉시스가 다시 자연스럽게 에스코트를 시작했다. 동생과 보폭을 맞춰 걸으며 세실리아는 스쳐 지나가는 분수를 흘끗 응시했다.
양각으로 조각된 글씨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각인지라 햇빛이 잔뜩 여물어 다정해야 할 텐데, 어째 그 찰나만큼은 볕이 차갑고도 투명했다.
서늘한 물방울이 튀었다.
무자비하게. 피할 수 없이.
* * *
분수를 지나쳐 운동장을 가로지르자, 흑색 사암으로 지어진 건물이 주변의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지상으로 5층, 지하로 10층인 건물은 마법사들의 폭주를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강건했다.
제국이 건국되었을 때부터 생-뢰크의 외곽을 지킨 교육 기관.
오랜 역사를 생생하게 간직한 마법사들의 본거지를 향해 세실리아는 경외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이 정답이었는지, 아카데미 사람들의 얼굴엔 자부심의 꽃이 피어 있다.
율리케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심사가 펼쳐질 장소인 지하 5층으로 향했다.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통창 너머로 대련장이 펼쳐지는 걸 볼 수 있었다.
티에리 곁에서 달음박질하던 블랑슈가 먼저 대련장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황태자 전하.”
“응.”
“블랑슈 졸업생이 상대인 이유는 그녀만큼 전하의 마력에 대해 잘 아는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치고받고 하던 사이니.
동생의 사뿐한 긍정을 들으며 세실리아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환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야에 들어온 건 반쯤 무너진 형태의 폐건물 속이었다.
반으로 잘려 너덜너덜해진 건물은 제 볼품없는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먼지, 엉망으로 바닥에 널려 있는 가구들.
실밥이 뜯어진 인형과 끝이 지저분하게 풀린 양탄자.
서랍이 닫혀 있지 않은 옷장과 이끼가 덮인 창문턱, 바닥에 푸르스름하게 돋아난 이끼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버섯까지.
희뿌연 햇살 속에 드러난 풍경에 세실리아는 숨을 죽였다.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채 폐허가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외면 속에서, 그래도 자신이 한때는 누군가의 포근한 잠자리였다는 과거의 영광만 곱씹으면서.
손끝이 움찔거렸다. 느릿느릿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을 침습한 동정이 동질감으로 바뀌기 직전, 세실리아는 감정을 치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가듯 감정도 흘러간다.
사람도 변해 가며 그렇게 누군가는 버리고 무언가는 버림받을 수밖에.
더없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정 원망하고 싶다면, 시간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유한하게 태어나버린 본질 자체를 원망해야겠지.
아니면 태어났다는 현실 자체를 원망하거나.
깔끔한 결론으로 상념들을 정리했다.
그것들은 참 부질없어, 있어 봤자 마음을 곪게 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물고 뜯느니 가만히 체념하는 편이 나았다.
동요가 새어 나오기 전에 꺼뜨려 버려 다행이었다.
그녀가 온전한 평정을 되찾았을 땐, 알렉시스와 율리케가 여전히 테스트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상대를 제압하되, 부디…….”
“다치게 하지 말라고?”
“네. 명심하십시오.”
“알겠어. 대련장에 상해를 가하는 건?”
“그건 상관없습니다.”
알렉시스가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로 돌아와 손을 조심조심 맞잡았다.
“그럼 누님. 다녀오겠습니다.”
“다치지 말고.”
세실리아는 대련장 쪽을 돌아보며 느릿느릿 속삭였다.
“이기고 돌아와.”
그 말이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알렉시스가 소리를 억누르며 키득거렸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여줄 때까지 계속해서.
이윽고 웃음을 그친 녀석이 그녀의 넷째 손톱 끝을 가벼이 눌렀다.
손끝을 움찔거리기도 잠시, 그가 정중하고도 예의 바른 태도로 손등 위에 입맞춤을 남겼다.
“황녀의 분부대로.”
눈웃음만큼이나 짓궂은 인사였다.
찰칵.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테스트가 시작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자세를 단정하게 편 채 평연한 낯으로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창 너머에선 알렉시스가 크라바트를 풀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문득 멈춰 서더니, 장갑 끝을 이로 물었다. 천 자락이 느리게 벗겨지며 새하얀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갑작스러운 파공음이 귀청을 강타한다.
율리케를 비롯한 마탑 사람들이 그 자리서 펄쩍 뛰는 사이, 세실리아는 한쪽 눈썹을 까딱이는 것으로 놀람을 표현해 주었다.
……율리케 경이 왜 ‘원만하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겠는걸.
‘시작부터 거실 가구의 반을 날려 버릴 줄은.’
알렉시스의 공격을 날렵하게 피한 블랑슈가 2층으로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거세네.”
“마력 고갈 걱정은 안 하시는 걸까요?”
“고갈은 무슨, 역대 황족 중에서도 마력량이 기록적인 수준인데. 바닥날 리가 있겠냐?”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것이겠군요.”
사람들이 흥분하여 떠드는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뤼셍의 다음 태양이 궁금하여 몰려든 사람들이 열심히 분석하며 내어놓는 추측들이었다.
세실리아는 그들의 대화에 가만가만 귀 기울이며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빠르게 오가는 공방을 숨죽인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연일까.
때마침 보랏빛 눈이 그들을 흘끗 응시하는 것에 누군가가 탄식했다.
“이야, 여유 부럽다…….”
“다른 건 몰라도 마력 조절은 최상으로 찍으시겠구먼.”
마력 분배와 전개식, 방향 조절 등 전문 어휘가 대련장을 한 차례 휘돌았다.
그 와중에도 블랑슈는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알렉시스가 대수롭잖다는 듯 손을 휘저어 막았다.
두세 번의 공방 끝, 소용돌이 계단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파편이 어지러이 휘날리고 굉음이 여러 차례 울리며 신경을 긁어댔다.
저를 부수지 말라는 것처럼 폐허의 신음은 처절하고도 끈질겼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시끄럽게 콰르릉 쾅쾅 울려 퍼진다.
위층에 있던 블랑슈가 쏙 숨는 동안, 아래층에 있던 알렉시스는 몇 번 발을 구르는 것으로 유유히 파편들을 피해 나갔다.
나풀나풀 움직이는 남자의 자태가 마치 꿈과 현실 경계를 헤맨다는 나비 같았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미미하게 치켜들었다.
긴장을 지나치게 한 탓인지 턱에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그녀는 굳어버린 표정을 풀기 위해 입꼬리를 느슨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탑에서 참 많이 바뀌어 오셨군요.”
티에리의 음성.
바랜 금발의 기사는 제 성정을 그대로 담은 어투로, 느리면서도 차분하게 제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황녀의 노골적인 관심을 눈치챘는지 그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
황녀가 입을 열었기 때문일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완연히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티에리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회색 눈은 대련장 속 두 마법사의 자취를 여전히 끈질기게 쫓고 있었다.
“전하의 전투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일순 창 너머에서 섬광이 폭사했다.
빛이 두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화려하여,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조여졌다.
안 그래도 뻐근했던 손아귀가 더욱 아릿해지는 느낌.
등골이 서늘해진 세실리아가 재빠르게 대련실 쪽을 돌아보는 사이, 티에리가 잠자코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말씀드리는 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황녀 전하. 하나의 추측에 불과합니다. 부디 이 점은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황태자 전하의 예전 방식은 결투에 가까웠습니다. 공격의 방향과 의도가 명확하게 보였지요.”
조곤조곤 제 의견을 피력하는 음성.
“의도하셨든 의도하지 않으셨든, 황태자 전하께선 의중을 고스란히, 한 치의 가감 없이, 드러내셨지요.”
결투에선 맨 처음을 제외하곤 참가자들은 서로를 마주 본다.
총을 들어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그 순간까지 제 공격을 전부 상대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솔직하고, 대담하며, 또 어떤 면에선 미련하지.
“그런데 지금은.”
블랑슈가 3층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몸을 날려 다급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한편 알렉시스는,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상태로 유유히 걸음을 옮긴다.
콰직.
그의 발아래 유리 조각이 바스러지며 비명을 토했다.
녀석이 큰 조각 중 하나를 심드렁히 발로 차서 치워내더니, 아직 멀쩡한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내려갔다.
잽싸게 날아오는 마법을 쳐내고는…….
“어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서 그대로 한쪽 벽 전체를 폭파했다.
기존과는 규모 자체가 다른지, 시야가 점멸했다.
한순간에 새까맣게 변한 앞이 조금씩이나마 밝아졌을 때 보인 건 매캐한 연기와 잘게 흩날리는 돌 파편.
어마어마한 양의 먼지와 너절하게 계속 부서지고 있는 건물…….
짜작.
견디지 못한 유리창이 결국 스스로를 포기한 채 무너져 내렸다.
제 일부를 잃어버린 가구들은 이미 균형을 잃어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낙뢰가 비처럼 내리꽂혀도 저런 풍경이었을까.
소름 끼치는 파괴음들이 감각 전부를 집어삼킨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기사에게도 꽤 충격적인 장면인 모양이었다.
“어, 음…….”
어물거리며 결국 입을 다문 티에리와는 달리, 세실리아는 여전히 심상한 낯을 지켜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더니 아우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말, 말도 안 돼…….”
“저거, 지금─”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찌나 충격을 받으신 건지 누군가는 말을 더듬었고.
누군가는 말을 끊어냈으며.
또 누군가는 음절씩 겨우 내뱉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티에리의 곁에서 세실리아는 머리끝을 매만졌다.
‘그렇게까지 공포와 충격에 빠질 필요는 없을 텐데.’
알렉시스 뤼셍은 멍청하지 않다.
아둔하지도 않았으며 더더욱 어리석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녀석은 ‘실패’할 리 없었다. 초라하게 실패하는 모습을, 심사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줄 리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는 특히.
“블랑슈 졸업생은 무사하나?”
“확인되지 않습니다. 현재 시야가 너무 흐릿해서─”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만약 전하께서 폭주하신 거라면…….”
“폭주하신 거라면…….”
그러므로 블랑슈는 안전하다.
알렉시스 역시 폭주하지 않았고, 심사는 무사히 마무리되겠지.
황급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고요한 채 세실리아는 고개를 느릿느릿 기울였다.
사실, 마지막의 그 붕괴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마차 안에서 그녀를 허공에 두둥실 띄워 주던 마력이 폐가를 무너뜨리는 저 마력과 정녕 동일한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더 솔직해지자면, 세실리아는 그녀 자신의 참석이 알렉시스에게 어떠한 변화를 끌어내리라 반쯤 기대했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원만하게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아주 자극적이고 강렬한 모습만 골라서 보여주고 있었다.
‘대체 왜?’
세실리아는 원인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의 시선 자체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이려나…… 아니면 일부러,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 것일까.
무엇을 위하여?
“전하.”
율리케의 초조한 음성에 세실리아는 습관적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빙긋 휘어지는 입꼬리에 율리케가 어정쩡히 입매를 일그러뜨려, 그제야 그녀는 지금이 웃을 상황은 아니라는 걸 되새겼다.
변명하는 대신 질문했다.
“무슨 일이지?”
“어, 그러니까. 조금 뒤에, 좀, 폭력적인, 모습이, 나올, 수 있어서……. 괜찮으시다면 전하, 혹시 자리를 피해 주시겠습니까?”
“음? 알렉이 폭주했을까 봐?”
“……예.”
“안 했어.”
그녀의 상큼한 부정이 기가 막히는지 율리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뭘 알기에’라는 듯한 눈초리가 얼굴에 팍팍 꽂혔다.
이런, 경.
확실히 내가 당신보다 마법은 모르지만 ‘알렉시스 뤼셍’이라는 남자는 잘 알고 있다고.
“알렉은 처음부터 부수고 들어갔어.”
“전하.”
“가구의 반도 날리고 계단도 날리고 참 여러 군데 망가뜨렸지? 하지만 폐가는 멀쩡했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꼴을 하고 있는데도.”
“…….”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전한 부분만 정확히 골라 부쉈다는 소리야.”
예를 들어 소용돌이 계단을 무너뜨린 그 마법.
그 마법이 조금이라도 각도가 틀어졌더라면 기둥에 꽂혔을 테고, 폐건물은 순식간에 붕괴했을 터였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블랑슈의 마법을 휘어잡으면서까지 마법 두 개를 계단으로 명중시켰다.
그러니까.
“줄곧 머릿속으로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싸운 녀석이니 괜찮아.”
그녀가 맺은 결론에 율리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선과 미소 둘 다 살짝씩 일그러지며 기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음. 딱히 내 추측이 틀리진 않았을 텐데.
세실리아가 담담히 침묵을 지키는 동안, 율리케가 문득 안경을 매만지더니 찬찬히 내려썼다.
안경이 콧잔등에 걸쳐진 바람에 나타난 연륜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오롯이 담았다.
그리하여 전부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이 경악으로 커지고, 초점이 충격으로 경련하며, 시선이 끝내 부서지는 장면의 연속이.
율리케의 당황이 지나쳐 세실리아는 되레 놀랐다.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리며 어설프게 웃을 수밖에.
“음. 저기, 율리케 경? 무슨 일이야?”
“전……하.”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
애써 힘껏 박박 긁어낸 음성은 누가 들어도 불안정했다.
세실리아는 불안을 억누르며 잠자코 율리케가 말을 잇길 기다리려 했지만.
바로 그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아득한 눈길을.
마주하지도 않았건만 빛깔을 알 수 있었다.
해진 뒤 서서히 옅어지는 석양의 색, 햇볕 아래 풍성하게 익고 있는 포도의 색, 여린 풀 사이에서 자잘하게 흔들리는 제비꽃의 색이다.
그런 안온한 색채를 지닌 주제에 시선 자체는 참…….
세실리아는 끝내 평정을 잃고선, 한 발짝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등을 타고 내달리는 긴장에 손끝이 옹송그려진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행여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저어되어 대련장 쪽을 응시할 수도 없었다.
참 가련한 꼴이었다.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사냥감 같은.
덜덜 떨리는 손을 보이기 싫어 드레스 자락을 꾹 잡았다.
안 그래도 펴졌던 허리를 더욱 반듯하게 한 뒤, 겨우 용기를 끄집어내어 고개를 든 찰나.
줄곧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을 자색 감옥에 갇혀 버렸다.
곁에 있는 티에리와 율리케를 잊은 채, 떨떠름한 감정을 곱씹으며 마주해야 했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니?’
세실리아는 소리 내어 질문할 뻔했다.
‘난 네가 분명 다정한 누이를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어?’
실제로 입술이 열릴 뻔해, 황급히 닫으려다 혀끝을 깨물었다. 찌릿한 아픔에 눈을 미미하게나마 찌푸렸다.
알렉시스가 일그러진 그녀의 눈매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다.
일순 보랏빛에 장난기가 깃들었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
그 미약한 웃음기를 정말이지, 정말 간절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하기 싫어서.
“알렉.”
이름을 내뱉어 버린 그 짧은 찰나에 섬광이 폭사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진짜로, 시야가 또 한 번 새하얗게 탈색된다.
미쳤나 봐, 왜 저러는 거야, 배려 좀, 으악 내 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욕설이 귀청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세실리아는 눈을 꼭 감은 상태로 눈꺼풀 안쪽까지 창백한 듯한 시간들을 버텨냈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 때까지.
그리하여 어둠과 색채가 순백의 세상을 다시 메울 때까지.
그녀는 눈을 뜨기도 전에 누군가의 품에 와락 끌어안겼다.
온몸을 감싸는 익숙한 온기, 코끝에 닿는 익숙한 체향을 굳이 질문할 필요는 없으리라.
어깨 위에 무언가가 훅 내려앉았다.
남자의 턱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녀석의 거친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고 있다는 것까지 자각했다.
세실리아는 반쯤 이를 악문 상태로 눈을 떠,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확인했다.
“알렉.”
“네, 누님?”
알렉시스가 작게 키들거린 탓에,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속을 저릿하게 핥았다.
그녀는 더듬더듬 한쪽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칼에 갖다 대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예상하는지 남자가 가르랑거리는 고양이처럼 기분 좋은 날숨을 내쉰다.
뭘 기대하고 있어?
세실리아는 심술을 담아, 머리칼 한 가닥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아.”
“떨어져.”
“…….”
“블랑슈는?”
“천장에 매달아 놓고 왔습니다. 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 아주 즐거워하고 있겠죠.”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는 자세가 조금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알렉시스가 고개를 들어 이번엔 정수리 위에 제 턱을 내려놓았다.
허리에 칭칭 감겼던 팔이 이젠 어깨를 두르고 있다.
세실리아는 손톱을 세워 할퀼까 하다 참았다.
찰싹찰싹 팔을 내리치는데도 알렉시스는 기이한 포옹을 풀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팔꿈치로 무뢰배의 옆구리를 가격해야 했다.
두어 번 세게 가격하고 나서야 녀석이 신음조차 흘리지 않으며 놓아주었다.
불만스러운 낯짝을 보이면서.
“블랑슈를 내려주렴.”
“한 10분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요?”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알렉시스가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긴 지 10초 지났을까, 블랑슈가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알렉시스 뤼셍 이 치사한 개자…….”
“블랑슈.”
세실리아는 여전히 바짝 붙어 있는 동생에게 그러했듯, 블랑슈의 머리칼도 잡아 당겨줘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녀의 엄격한 눈길 속에서 갈색 머리의 여인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언니이이이이.”
“예의를 지켜야지?”
“으앙, 쟤한테 지키느니 차라리 머리를 자를 테야!”
“내가 잘라주랴?”
알렉시스가 산뜻하게 제의했고, 세실리아는 팔꿈치로 허리 부분을 가격했다.
‘좀 아프긴 할 테지.’
다시 짤막한 신음을 내뱉은 녀석이 툴툴거리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머리칼에 숫제 얼굴까지 파묻는 듯해서 세실리아는 기분이 오묘해졌다.
맹수에게 잡힌 사냥감이 이러할까.
비록 티에리의 설명은 마무리되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눈치껏 그려낼 수 있었다.
전투 방식이 ‘결투’에서 ‘무엇’으로 바뀌었냐고.
……오랜만에 돌아온 동생은 제 꿍꿍이를 숨기는 것에 능했다.
손쉽게 블랑슈를 구석으로 몰고 갔으며 한번 잡은 건 절대로 안 놓칠 듯한 집요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탑에 있는 척단의 마법사들은 동족을 사냥한다지.
광기에 물들어 끝내 미쳐 버린 비극적인 이들을.
마탑에서, 알렉시스는 분명…….
“누님.”
“왜?”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던 알렉시스가 그녀 앞으로 손을 쓱 내밀었다.
마냥 새하얗기만 한 손바닥이 참 모순적이었다.
“상 주세요. 이기고 왔잖습니까.”
뭐래.
‘내게 상이라도 맡겨 놨니?’
세실리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눈길을 팍팍 쏘아 보냈지만, 손길은 굳건하기만 했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과 예쁘게 도드라진 마디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내놔. 상.
당장 내놔.
검은 머리칼을 정말로 한 움큼 뽑아버릴까.
본능이 꼬드겼지만 언제나처럼 이성이 이겼다.
세실리아는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황족 남매가 유치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가볍게 체념하고는, 파우치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손 위에 탁 올려놓았다.
“자, 상.”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 종종 갖고 다니던 것이었거늘, 동생의 말도 안 되는 투정 달래느라 쓸 줄은 몰랐었다.
먹고 떨어지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위에서 실소가 들려왔다.
“싫으면 말고.”
“설마요, 누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사탕을 호로록 들고 간 무뢰배 녀석이 마침내 그녀의 뒤에서 떨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오며 알렉시스가 마음껏 제 상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율리케 경.”
세실리아는 동생에게서 한 발짝 더 떨어지며 불렀다.
“아까 무슨 일이었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
“예.”
짐짓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속지 않았다.
그 정도의 경악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율리케 경.
‘잠깐.’
안경을 똑바로 쓰고 있는 교육자를 쳐다보다 말고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알렉시스가 느릿하게 입에서 사탕을 빼내었다.
살짝 젖은 입술, 불그스름하게 물든 혀가 석류 사탕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탕 쪽으로 뺏길 뻔한 시선을 수려한 얼굴에 고정했다.
알렉이 방금 율리케 경의 입단속을 시켰던 걸까?
의심으로 가늘어진 눈길 속에서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사탕을 내밀었다.
“드시고 싶으세요?”
“……됐네요, 나도 있거든.”
“언니, 그럼 저도 주세요!”
블랑슈가 콩콩 뛰어와 귀엽게 손을 내밀었고, 세실리아는 친절히 막대 사탕의 껍질을 까서 여인의 입에 물려주었다.
이번 건 솔티 캐러멜 사탕.
짜고 단 맛의 조화가 완벽한지 블랑슈의 표정이 금세 황홀해졌다.
“사 꺼 가아아아(살 것 같다아아).”
“다행이구나.”
“가아하이아(감사합니다).”
블랑슈가 방긋방긋 웃으며 귀엽게 애교를 피운다.
그 모습을 목격하자마자 질색한 알렉시스와는 달리, 세실리아는 피식 웃어주었다.
“언니, 언니!”
“응, 왜?”
“이제 아카데미 구경하실래요?”
“허가받으면.”
“괜찮습니다, 전하.”
율리케의 답에 블랑슈의 얼굴이 단번에 화사해졌다. 그녀가 쪼로록 달려오더니 잽싸게 팔짱을 끼며 자리를 선점했다.
다시, 아슬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 * *
고귀하신 황족들께서 퐁레프로 귀궁하신 건 저녁 무렵이었단다.
비서에게서 보고를 들은 율리케는 손을 뻗어 마법 등을 톡톡 두드려 켰다.
몇 시간 동안 공복이었던 배에서 잔뜩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달라 항의하고 있었다.
꼬르륵, 천둥이라도 치듯 아주 요란했다.
황태자 전하의 결과를 분석하는 것에 여념이 없던 탓에 저녁을 빼먹은 탓이다.
율리케는 식당으로 향하는 대신, 비서에게 샌드위치를 부탁하고는 찻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보글보글 기포 생기는 소리 사이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눈이 침침하구먼.”
시력을 회복해 주는 마법은 어디 없으려나.
율리케는 눈 주변을 지압하며 툴툴거렸다.
“너무 집중을 했어…….”
제자의 성장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스승의 욕망이긴 했다.
그 바람에 두통과 배고픔을 동시에 얻었어도 말이지.
율리케는 결과표를 고이 빼내 놓고는 책상 위 서류를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들어오시죠.”
문손잡이가 매끄럽게 돌아간다.
서서히 열린 문틈 사이로 어둠이 밀려들며 희끄무레한 빛을 위협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문지방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밤을 틈타 비가 내린 모양이다. 청년은 전체적으로 살짝 젖은 상태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대충 제 물기 머금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편안하게 윗단추 두어 개를 푼 와이셔츠 안에서 쇄골이 도드라졌고, 그 아래로 잔근육이 단단하고도 섬세하게 자리한 상체는 아름다운 윤곽을 자랑했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의 음영과 선명한 붉은색을 띤 입술은 확연히 어른의 느낌이었지만…….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세에서만큼은 옛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반항기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이제 저 분위기는 어린아이의 순수라기보다는 청년의 정열이다.
더는 풋풋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관능.
남자는 날카롭고도 단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채 오만을 완성했다.
‘승리의 뤼셍.’
율리케는 저절로 제국의 지배 가문을 수식하는 표현을 떠올렸다.
정확했다.
황자의 앳된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성장이로군…….
“전하.”
한 마디 내뱉은 끝에 입을 다물었다.
감동인지 어색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을 틀어막은 탓이었다.
침묵하는 이에게 황태자는 설핏 웃어주었다.
그가 천천히 집무실로 들어와 문을 닫자,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지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 껍데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전하께서 어리셨을 때도 그 껍데기는 완벽했습니다.”
그래요, 얄미우시게도 그것만큼은 완벽했지요.
우울하게 덧붙이자 황태자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느슨히 풀리며 목울대가 일렁였고, 입꼬리가 나른하게 올라가면서 조각 같은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세세한 동작들을 전부 하염없이 좇을 수밖에.
율리케는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히, 달랐다.
낮과는 기가 막히게 달랐다. 청년의 분위기고 웃음이고, 정말이지 이토록 다를 수가 있을까.
“결과 나오지 않았어, 율리케?”
“여기 있습니다.”
미리 빼놓은 결과표를 건네주자, 황태자가 턱을 괸 채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다.
“구현력은 당연히 최상이십니다. 어렸을 때보다 더욱 발전하셨지요.”
“응.”
“그리고 성장하시면서 마력이 또 증가하셨습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청년의 얼굴엔 짜증이나 절망 한 줌 없었다.
심드렁히 어깨를 으쓱일 뿐.
“마력이 늘어나신 만큼 광기 역시 비례하여 증가하셨습니다.”
율리케만이 홀로 체념하며 다음 그래프를 해석해 주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조절 능력 역시 향상하신 덕에 현재로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군.”
“‘현재’로서는요.”
이를 악물고 강조하자 심드렁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래, 최대한 빨리 각인을 하라고. 알아들었어.”
“예, 부디.”
뤼셍의 직계들은 광기를 안정시키는 방법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다.
누군가와 사랑을 이루고 그 상대와 각인하는 것.
“응, 그래. 알겠어.”
황태자가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가 어째 이리 불안한 건지.
율리케는 이마를 짚으며 걱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각인에 성공하셔야 승계도 원만하게 하시죠.”
“세상에, 그건 싫다.”
알렉시스는 짓궂게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각인에 성공하면 아르망은 냉큼 제위를 물려주고선 마리사와 함께 유람을 떠나겠지.
희희낙락 즐겁게 놀다가.
‘아들, 열심히 일해! 고생한다! 인생은 원래 그런 법이야!’
라고 얄밉게 편지 부칠 아버지를 생각하면 승계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걸.
“폐하께서 우실 겁니다.”
“우시라고 해. 내가 아버지 속 썩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일러바칠까?
율리케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알렉시스는 재차 결과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래프들의 기울기를 보니 겨울을 넘길지 의심이었다.
올해 겨울 안에 각인에 성공하지 못하면 미친 상태로 마탑에 끌려갈 터다.
‘반년 안에 운명이 결정된다라.’
그리고 그의 최후를 결정할 심판관의 말간 낯을 떠올리며 알렉시스는 결과표를 반으로 깔끔하게 접었다.
“황태자 전하.”
“응.”
명망 있는 교육자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의 주저를 이해하여 알렉시스는 다시 웃어주었다.
“편히 말해, 율리케.”
구현력을 계속 발전시키다 보면 다른 이의 마법이 스치고 지나간 ‘파편’을 볼 수 있게 된다.
알렉시스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타고났던 재능이며, 율리케의 경우 오랜 시간 갈고 닦아 갖게 된 기술이지.
아까의 테스트 때 율리케는 분명 보았다.
세실리아의 머리칼에 묻어 있는 마법의 흔적들을.
그리고 연륜 깊은 마법사는, 그 파편들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대강 알아보았을 터였다.
“머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마법일까요? 아니면 머릿결을 더 윤기 나게 만든다든지.”
율리케가 시치미를 뚝 떼고 질문했고.
“그렇다고 해두자.”
알렉시스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전하, 전하께서 하신 건가요?”
“머리를 굴려. 난 마탑에서 7년 동안 썩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가 생-뢰크에 없는 동안에도 세실리아 뤼셍은 흑발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제나 황후의 개입을 암시하는 말에 율리케가 짧은 침음을 흘렸다.
여닫히는 눈꺼풀 속 눈이 피로에 묻혀간다.
이윽고 또렷해진 시야에선, ‘침묵을 지키겠다’라는 의사가 또렷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의 교장은 정치적인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 게 원칙이니 전혀 놀랍지 않은 반응이었다.
알렉시스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좋은 밤 보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떠나려는 그를 짤막한 질문이 붙들었다.
“그럼 전하,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황녀 전하의 진짜 머리색은 무엇인지요?”
알렉시스는 매끈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마지막 대답을 율리케가 과연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믿고 안 믿고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세실리아가 기실 뤼셍의 혈족이 아니라는 비밀을, ‘율리케’가 알게 되었다는 게 중요할 뿐.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는 리베의 교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한 편이니, 함부로 발설하진 않을 터다.
그 진실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여파를 고려하면 더더욱.
다만, 율리케가 보낸 걱정의 눈길에 참 많은 게 묻어나와서…….
퐁레프로 귀궁한 뒤에도 알렉시스는 한참 동안 고심하며 세레인 정원을 맴돌았다.
밤을 틈타 내리는 보슬비는 면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상념이 그치지 않는 시간엔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고민을 정리하고서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어섰을 무렵엔, 아르망은 그날의 마지막 서류 더미를 처리하고 있었다.
“안녕, 아들.”
아르망은 대수롭잖게 인사하며 서류의 마지막 장에 서명을 휘갈겼다.
“네 엄마 보고 싶다.”
“……보러 가세요.”
“일 다 하지 않고 찾아가면 마리사가 혼내.”
“빨리 끝내세요.”
“너무 간단해서 해답이 아닌데?”
“그럼 그냥 혼나시든지요.”
알렉시스는 참을성 가득하게 대답해 주었고, 아르망은 저 매정한 자식놈을 보았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아들이 전체적으로 살짝 젖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슬쩍 찌푸려야 했다.
‘아무리 튼튼한 녀석이라지만 대체 왜 비를 맞고 다닌담?’
아버지의 걱정을 과연 알고는 있는지, 청년은 맞은편 의자에 조용히 앉을 뿐이었다.
아르망은 자신을 거푸집처럼 빼닮은 아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뤼셍의 직계다운 흑발과 그가 물려준 보랏빛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띄긴 했다.
그 때문일까, 마리사는 아들에게서 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곤 했었다.
하지만 아르망의 눈엔 아니었다.
아들이 웃을 때마다 슬쩍 휘는 눈매, 볼에 예쁘게 자리한 보조개, 특유의 우아한 손짓과 가끔은 얄미울 정도로 매정한 말투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묻어 있었으니.
어릴 적 사고 치고 나서 똘망똘망하게 올려다보던 모습까지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마리사를 닮아 있어, 끝내 엄하게 혼내지 못했었지.
여러모로 제 인생을 반추해 보던 아르망은 뒤늦은 한탄 속에서 손을 뻗었다.
“결과표 주렴…….”
“여기 있습니다.”
아르망이 꼼꼼하게 훑어보는 동안, 알렉시스는 다시금 의자에서 일어나 이번엔 통창 쪽으로 향했다.
황제의 집무실은 퐁레프에서 세레인에 가장 가깝게 위치한 방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밤의 장막이 드리운 정원이 펼쳐지며 오묘한 화폭을 그려냈다.
“겨울?”
아르망이 시기를 정확히 짚는 것에 알렉시스는 잠깐 침묵했다.
“예. 그때쯤에, 결정되겠지요.”
“마력이 거기서 더 늘면 어쩌라는 거니…….”
“늘고 싶어서 늘었습니까?”
“아이고오오.”
아르망이 한숨을 쉬면서 결과표를 곱게 접는다. 아마 나중에 부부의 침실로 가서 마리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겠지.
알렉시스는 팔짱을 낀 채로 다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여름의 상큼함이 묻어 있는 비 내음이 물씬 풍겼다.
정원을 어여쁘게 물들인 녹음 위로 물방울이 토독토독 떨어지는 정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향. 호젓한 정자에 누워, 만물이 피어나는 소리를 엿듣는 것만 같다.
“율리케 경이 세실리아 뤼셍이 실은 그 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아르망이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시야 한구석으로 아버지의 소리 없는 경악을 엿보며 알렉시스는 가볍게 유리를 손으로 톡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리베의 교장인 만큼 정치적인 일에는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요. 비밀을 발설하진 않을 텁니다.”
“그리고?”
“예?”
“들켰냐고.”
못 알아들은 척 고개를 갸웃할 수도 없겠군.
알렉시스는 한숨을 폭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라는 대답을 암시하는 그 몸짓에 아르망이 미간 사이를 느리게 문질렀다.
……제아무리 깊은 진실일지언정 얄팍한 거짓으로 가려질 수 있는 법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 얕디얕은 거짓이 사라진 순간,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소리기도 했다.
세실리아의 비밀을 알게 된 율리케는 그 너머를 읽어냈을 터.
못 알아차렸더라면 도리어 그의 눈치를 의심해야 할 수준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알렉.”
“예?”
아르망은 천천히 아들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나와 마리사는 세실의 동의 없이는 그 아이를 파양하지 않을 거야.”
“…….”
“그게 아이를 입양한 부모로서의 마땅한 도리다. 입양이라는 선택이 우리에게 있었을지언정, 파양이라는 선택은 세실에게 있어.”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깔끔한 답이라, 듣는 아르망이 기가 차버렸다. 그와 세실리아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했다며 서운해하는 기색 역시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탈적하지 않으면 알렉 저 녀석은 안정을 못 이룰 수도 있는데…….
아르망은 뭐라 더 훈수를 놓으려던 걸 그만두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알렉시스가 불현듯 팔짱을 끼더니 밖을 더욱 집요하게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세실리아가 세레인으로 산책을 나왔나.’
아르망은 제 아들의 집중을 끌어낼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어 정확히 진실을 짚어냈다.
아들 곁으로 가서 밖을 쳐다보자, 역시나 세실리아가 흰색 강아지 옆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강아지,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한다니까?”
울상과 피로가 가득한 청아한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반항기 가득한 울음소리가 컹컹 울려 퍼졌다.
배은망덕한 사모예드가 방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고집부리는 모양이었다.
“비도 내리는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컹컹─!”
“언니 옷 다 젖었어…….”
타닥타닥.
사모예드의 앞발이 주인의 슬리퍼를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 박자에 맞춰 꼬리가 살랑거렸고, 얌전히 맞아주던 세실리아가 잠옷 치마를 갈무리했다.
희미한 빗줄기에 젖은 얇은 잠옷은 반투명하게 비치는 상태였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지 물어봐도 돼?”
“커엉─!”
“강아지?”
사모예드가 짜증 난다는 듯 고개를 팽 돌렸다.
“언니랑 같이 안 돌아갈 거야?”
“컹컹커엉컹!”
“너무 시끄럽게 짖지 말아줘. 이제 그만 들어가자, 응?”
열심히 어르더니 설득에 겨우 성공한 모양이다. 세실리아가 알리샤를 데리고 조심조심 정원을 떠나갔다.
그래도 제 애완견을 달랜 게 뿌듯한지 돌아가는 길엔 웃고 있었다.
비 온 뒤 무지개가 곱게 걸리면 그 끝에 황금이 있다 했었나.
말 그대로였다. 포슬포슬 비가 내렸고, 여인의 붉은 입술엔 무지개가 걸려 있었으며, 어여쁜 얼굴 한가운데선 황금이 반짝였으니.
여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알렉시스는 잠자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두 아픈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보던 아르망은, 나직이 질문했다.
“……후회하니?”
세실리아를 입양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냐는 물음.
알렉시스는 자연스레 달빛 가득했던 밤을, 치렁치렁 쏟아져 내리던 은빛 머리칼을, 마녀의 저주처럼 들려왔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확답했다.
“안 합니다.”
절대로.
* * *
간밤에 비가 내렸기 때문인지 아침 햇살은 더욱 맑고 깨끗했다.
황후의 별실로 들어서던 알렉시스는 어머니의 붉은 머리칼 위로 빛줄기가 왕관처럼 얹힌 장면을 목격했다.
“알렉!”
행여 아버지께서 보셨다면 넋이 나가셨겠군.
알렉시스는 어머니의 뺨에 다정히 입을 맞춰드렸다.
“안녕, 알렉.”
어머니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세실리아에게도 인사하자, 마리사가 앞에 놓인 비스킷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펠 분수 근처의 파티세리에서 사 온 거야. 맛있더라. 가게 이름이 뭐였지, 세실?”
“아니카 파티세리요, 어머니.”
“아, 맞아. 아니카. 요즘 들어 기억력이 나쁘다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엊그제 야유회에 참석한 귀족 명단은 반 이상 기억하시잖아요.”
“그랬니?”
마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탄산처럼 청량한 희소를 들으며 알렉시스는 비스킷을 와작 베어 물었다.
다크 초콜릿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잘 살아 있어 겉보기보단 취향에 맞았다.
제 긍정적인 반응을 눈치챘는지 세실리아가 비스킷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도착하기 전에 염색한 모양이다.
알렉시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누이의 검은빛 머리칼에서 시선을 떼었다.
하마터면 긴 머리칼 곳곳에 묻어 있는 마법 파편에 어색할 만큼 오래 눈을 둘 뻔했다.
“그나저나 알렉, 결과 안정적으로 나왔다며. 축하해.”
“감사합니다, 누님.”
세실리아가 엷게 웃으며 손에 들린 펜을 빙글 돌렸다.
“샤르텐으로 함께 피서 떠날 수 있겠다. 그렇죠, 어머니?”
“응, 그렇지.”
샤르텐은 황족들이 대대로 여름 휴가를 보내는 서부의 별궁이었다.
가족 휴가 계획이 더없이 흡족한지, 마리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느긋하게 박수를 짝짝 쳤다.
“참, 세실. 알리샤도 데려갈 거니?”
“알리샤요? ……아니요, 아마 알도 샤르텐보단 퐁레프를 더 좋아할 테니까요.”
그보단 누님의 곁을 더 좋아하는 거 아닐까.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대꾸를 늦지 않게 멈추었다. 그리고 마리사 역시 똑같이 생각한 건지, 세실리아를 향해 다시 권유했다.
“그래도 데려가지? 샤르텐도 좋아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어머니, 샤르텐은 알리샤에게 위험한 식물이 있을 수도 있는 데다가 거기까지의 여행을 버티기 힘들 수도 있어요. 고작 일이 주 떠나는 건데요, 뭐.”
어제 엿보았던 세실리아와 알리샤의 실랑이가 떠오른다.
가시처럼 작게 느껴졌던 위화감이 송곳처럼 자라나, 알렉시스는 결국 입술 끝을 미미하게 비틀었다.
그래서였다.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응?”
“그러니 알리샤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불쑥 꺼낸 말에 세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놀람이 서렸던 금빛 눈은 금세 잔잔해졌고,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그러고 싶다면. 알리샤도 함께 가는 거로 하자. 자. 이제. 정말 중요한 게 남았어.”
“예?”
마리사와 알렉시스가 불길함에 반응할 새도 없었다.
세실리아가 들고 있던 펜을 다시 한 차례 빙글 돌리며 나른하게 선언했다.
“같이 갈 영애들의 명단 짜자.”
본디 황족들의 피서에 귀족들이 동행하긴 했다.
하지만 콕 집어서 ‘영애’라는 어휘를 사용한 의도는 투명하다 못해 노골적이었다.
알렉시스가 비스킷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릿느릿 씹는 동안, 마리사가 어설프게 웃으며 중재를 시도했다.
“자자, 세실. 영애들도 좋지만, 일단 다른 명단부터 짜보는 건 어떨까?”
“하지만 영애들의 명단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어머니. 알렉이 한시라도 빨리 마력 안정화에 성공하려면요.”
“…….”
“이번 피서가 알렉에게 굉장히 중요한 기회가 될 거라고 믿고 있답니다.”
“아하?”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실리아가 그를 향해 생긋 웃어주고는 쓱쓱 종이 위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번
유려한 필기체가 종이 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말이야.”
“잠깐, 세실.”
마리사가 놀랍게도 딸의 말을 끊더니 벌떡 일어섰다.
사교계에서 오래 활동하신 황후께서는 동요를 잘 감추고 계셨다.
두 자식을 키운 어머니답게 곧 이어질 남매 싸움을 예감하고 피하시는 눈치까지 선보이시는 건 덤이고.
‘브라보.’
기립박수를 쳐 드리고 싶군.
알렉시스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그게 내가…… 아르망과 상의해야 하는 안건이 갑자기 생각나서.”
“네? 아, 네.”
“영애들과 영식들의 명단은 네게 맡기마, 세실. 귀족들과 귀부인들의 명단은 나중에 함께 짜자꾸나.”
마리사가 포로록 별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예법에 맞지 않게 빨랐다는 건 안 보아도 훤했다.
……황후의 별실에 황후는 없고 두 손님만이 남은 촌극이라니.
알렉시스는 천천히 찻주전자를 끌어와 자신의 잔에 차를 철철 부었다. 그의 심정만큼이나 붉은 찻물이었다.
“자, 그럼. 네 이상형을 알아볼까. 일단 외모부터?”
세실리아가 ‘외모,’ 또박또박 크게 적은 뒤 그를 마주했다.
외모라…….
알렉시스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길게 꼬았다. 방만한 자세 그대로 차를 홀짝이는 동안 인내심 깊은 누이께선 잠자코 기다리고 계셨다.
‘질문이 왔으니 답은 돌려줘야겠지.’
알렉시스는 시선을 들어, 건너편에 있는 여인의 외모를 뜯어보았다.
뤼셍의 미, 퐁레프의 귀보, 계절의 화신이자 오래전 세상을 노닐었을 여신의 환생.
심혈을 기울여 붓칠한 듯한 섬세한 외양을 보자마자 손을 뻗어 인위적인 검은빛을 벗겨 버리고 싶어졌다.
달빛만큼 아련하게 반짝일 은색.
그 본래의 빛깔을 되찾는 순간 여인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결을 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머리칼은 겨울일 테고, 눈은 여름일 테지. 뺨은 봄일 테고 입술은 가을일 테다.
심술을 담아 눈으로 연신 지분거리던 알렉시스는 살포시 들려온 헛기침에 정신을 차렸다.
“알렉?”
“평범한 사람으로 합시다.”
“으음, 미안한데…… 평범함의 정의가 무엇일까? 나는 사실 차가운 인상이라거나, 도도한 느낌이라거나. 그런 걸 물어본 건데.”
세실리아가 떨떠름하게 질문했고, 알렉시스는 비스킷을 질겅 씹으며 대꾸했다.
“제가 압니까.”
“그렇담, 외모엔 딱히 의미를 안 둔다는 거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당신은 어찌 보아도 아름다우시니.
그의 무심한 태도에 세실리아가 눈을 또로록 굴렸다.
따박따박 잔소리하고 싶은 듯한 기색이 어여쁜 낯을 스치고 지나쳤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운 모습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열의를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당장 제 속이 헤집어지고 있는데.
이번엔 턱을 괴며 아름다운 금색을 마주하자, 세실리아가 펜으로 종이를 톡 가볍게 쳤다.
“다음으로 2번, 성격. 성격을 물어볼게. 어떤 사람이 좋니?”
“성격이라…….”
“응. 그러니까 이것만큼은 반드시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성격. 똑 부러진 사람이 좋은지, 차분한 사람이 좋은지, 정열적인 사람이 좋은지 같은 거.”
2번
종이에 휘갈겨 넣으며 세실리아가 엄중하게 경고했다.
“나 분명 후보 꽤 많이 주었다? 비슷한 선택지로 대답해 줘.”
알렉시스는 제 찻잔이 텅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로 찻물을 철철 부었다.
성격.
이번은 꽤 쉬운걸.
그는 빙긋 웃으며 눈을 예쁘게 휘었다. 천창을 통해 깃든 한 줄기 햇살 속, 고아하게 앉아 있는 여인을 향해 기꺼이 답해 주었다.
“나쁜 여자.”
“…….”
“꼬인 성정. 비틀린 성격. 잔인하다 못해 혀에 칼 문 사람.”
“…….”
“오만한 고집불통.”
그가 태연하게 지껄이는 동안, 여인의 입매에선 미소 한번 떠나지 않았다.
웃으며 계속 경청하던 여인은 마침내 한 마디 평가를 툭 던졌다.
“너랑 어울리긴 하구나.”
“그런가요?”
“응, 너 성격 안 좋잖니. 네 성질머리에 네 부인 성격이 좋길 바라면 양심도 없지?”
“……너무하시네요. 어렸을 땐 아주 오냐오냐 예뻐해 주셨으면서.”
세실리아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선 그와 비슷한 자세로 턱을 괴었다.
얼굴이 살짝 기울어진 탓인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어린애 취급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네가 원한다면 다시 해주고.”
“사양하겠습니다.”
답은 정말 빠르게 튀어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진 몰라도, 여인은 꽤 오랫동안 키들거렸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세실리아는 가만가만 제가 필기한 것 전부에 X자 표시를 쳤다.
“진지하게 답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말하기 싫다고 하렴, 알렉.”
글쎄요. 꽤 진심 가득한 대답들이었는데.
“내 간섭이 주제넘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주제넘으신 게 아니라…….”
의미가 없었을 뿐이다. 정말로.
남자는 말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그저 입술을 달싹였다.
“알렉?”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버무리는 말에 금빛 눈이 가늘어졌지만, 세실리아는 굳이 답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럼 영애들의 명단은 내가 알아서 짤게. 괜찮지?”
“그러십시오.”
“영식들은? 혹시라도 친해지고 싶은 영식이라도 있니?”
알렉시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동작으로 맘에 둔 이가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에 세실리아가 종이에 여러 이름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론 펜을 움직이고 다른 손으론 제 머리칼 끝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깐 모습이 그녀가 현재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블랑슈 휴스턴.
가장 위에 보이는 글씨.
그래. 빌어먹을 ‘영애들의 명단’을 작성하시는 모양이군.
비스킷과 함께 짤막한 욕을 짓씹던 알렉시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동시에 세실리아의 손에서 벗어난 펜이 허공에 떠 올랐고, 그는 유려한 손짓으로 펜을 낚아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보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온기가 반들반들한 펜의 표면에서 그의 손바닥으로 건너왔다.
“무슨 짓이니?”
“그러게요?”
“……펜 돌려주렴.”
알렉시스는 방만한 자세를 풀고선 의자에서 일어섰다.
테이블을 돌아 그녀에게로 걸어가자, 세실리아가 문득 흠칫하더니 긴장한 듯, 어깨를 미미하게 굳혔다.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못 알아보았을 정도로 작은 변화였다.
알렉시스는 즐거이 관찰을 이어, 여인의 금빛 눈이 반항과 오기를 머금었다는 사실까지 포착했다.
그녀의 새하얀 손은 펜을 쥐고 있던 자세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였다.
한쪽 손엔 펜을 찔러주었다.
탁자에 기댄 채 거침없이 누이의 머리칼을 걷어내자, 그녀의 기름한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이 스르륵 스치며 빠져나왔다.
도톰한 귓불과 탐스러운 귀밑머리가 온전히 드러나는데도 여인은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쳐다만 볼 뿐.
보라색과 황금색이 뒤엉켜 녹으면 무슨 색이 만들어질까, 실없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맑고 명료한 눈빛.
알렉시스는 여러 번 요동치는 감각을 만끽하며 최대한 태연히 뇌까렸다.
“블랑슈 휴스턴을 데려가실 생각이라면, 누님.”
“…….”
“티에리 에스디어도 데려가셔야 할 겁니다.”
“그렇니?”
“일행에 마법사가 있으면 그 마법사의 폭주를 제압할 수 있는 기사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세실리아가 그의 손을 찰싹 쳐내었다.
“어머니께선 절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저와 블랑슈 휴스턴을 동시에 감당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
“아버지께선 피서에 참석하지 않으실, 뭐, 못하실 테니까요. 워낙 바쁘시니.”
“그래. 알려줘서 고맙구나.”
아무랄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심드렁하고 태연한 대꾸였다.
“또?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어?”
그녀의 손과 그의 손이 닿을락 말락 놓여 있다. 이대로 몸을 숙이면 숨결과 숨결이 얽힐 터.
더 숙이면 저 얄미우리만큼 평온한 척하는 입술이 더는 평온할 수 없을 텐데…….
알렉시스는 싱긋 웃었다.
“딱히 없습니다. 그럼 명단 작성은 누님께 전부 부탁드리지요. 감사드립니다.”
“별말을.”
나른하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별실을 나서기 직전, 그는 고개를 돌려 더없이 다정한 남동생인 척 칭찬했다.
“오늘 귀걸이 예쁩니다, 누님.”
“내가 뭔들 안 예쁘겠니?”
“……그건 또 그렇군요.”
그는 키득거리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었다.
* * *
변덕스러운 남자가 떠나자마자 세실리아는 펜을 거세게 쥐고는, 다른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 아이 앞에선 유독 평정을 가장하기 힘들었다. 담담한 척하려 어찌나 노력해야 하는지, 아직도 소름이 오싹했다. 동요를 삼켜내는 게 이리도 힘들 줄은…….
손가락 사이로 한숨이 가득 고였다.
‘오늘 귀걸이 예쁩니다, 누님.’
세실리아는 손을 들어 귀걸이를 매만졌다. 진주와 에메랄드로 장식된 드롭형 귀걸이.
예쁘기만 한 귀걸이엔 아무 잘못도 없건만, 그 아이가 칭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빼고 싶다는 충동이 턱턱 치밀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침 부분을 매만졌다.
……빼, 말아.
빼. 빼. 빼.
그냥 빼버려, 세실리아 뤼셍.
실제로 귀걸이를 빼려던 그녀는 다음 순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나이 먹고 유치하지 않냐는 생각이 치민 탓이었다.
동생이 칭찬했다는 이유로 귀걸이를 빼려 들다니, 세상에. 열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귀걸이를 만지작대던 손이 결국 아래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세실리아는 찬찬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시 담담하게 이름들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