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 눈부신 여름 (1/18)

1. 눈부신 여름

[그러게 왜 짐승 새끼를 오냐오냐 곱게 키우셔서.]

세실리아는 제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예상치 못한 표현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하여, 숨을 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짐승’이라니.

그런 천박한 말을 입에 올린 남자야말로 그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이이기에 놀랐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비천해질지언정 홀로 고귀할 존재가 바로 그였다.

[은혜도 모르고 달려들도록 허락하시는지.]

눈을 몇 차례 깜박였지만 여닫히는 시야 사이로 남자는 여전히 굳건하고도 선명했다.

어둠을 집어삼킨 듯한 흑발과 아스라한 저녁 하늘의 자안.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체구는 어둠 속에서도 탄탄한 골격을 그려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비틀자마자 집요한 시선이 내다 꽂혔다. 수렁보다 깊은 눈빛.

그 속의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탓에 입 안이 말랐다.

외면해야지.

남자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하는 것엔 도가 텄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구나.”

오연한 듯 더욱 단단하게 대꾸했거늘, 남자의 야트막한 웃음소리가 귀에 내려앉자마자 긴장감이 척추를 따라 내달렸다.

발끝이 옹송그려지고 솜털이 쭈뼛 솟는 생경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다.

안 돼.

그녀는 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내려오렴.”

[싫습니다.]

“그럼 한평생 그러고 있게?”

[흠, 그럴까요?]

그녀의 얼굴 바로 옆을 딛고 있는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희고 곧은 손끝이 어깨 위의 리본 끝부분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원피스를 고정하기 위해 단단히 묶여 있는 바로 그 리본.

손길이 잔악해질까.

그가 끝부분을 잡아당겨 옷을 풀어 헤칠 수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체력이 된다면 그리하든지.”

[…….]

“알아서 해.”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자, 그가 입꼬리를 당겨 비뚜름히 웃었다.

강인한 남자가 찬찬히 그녀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서늘한 이마가 쇄골에 닿으며 검은빛 머리칼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양팔에 단단히 가두어졌기 때문일까.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문득, 아주 문득, 이 모든 감촉이 너무 위험한 것 같아서─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 * *

그렇게 세실리아는 침대에서 화들짝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자연스레 벽난로 위의 시계로 향했다.

오전 10시 5분 전.

“망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바람에 골이 울렸다. 세실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작게 신음했다.

꿈속에서 대체 왜 위험한 느낌이 드나 했더니, 그녀의 일정이 위험했다.

“내가 미쳐.”

어젯밤 조금 뒤척였다고 늦잠을 바로 자버리다니.

더 자책할 시간도 없어, 세실리아는 서둘러 이불을 젖히며 일어나 슬리퍼를 꿰신었다.

급히 설렁줄을 잡아당기고는 대충 빗질을 시작하자, 시녀들이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

“안녕히 주무셨나요?”

“평온한 밤 보내셨기를!”

다양한 색채의 눈동자들이 비슷한 채도의 감정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귀하신 분께서 소풍하러 가시는 날!

그리고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세실리아 옐리자베타 마리사 르 뤼셍은 오늘도 찬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녀들로서는 어여쁘신 분을 한껏 꾸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소리였다.

세실리아에게로 포로록 다가간 시녀 하나가 장난 섞인 어조로 투정했다.

“아이참, 빗질은 저희에게 맡기시라니까요?”

“아, 응. 미안. 내가 늦잠을 자서 먼저 하고 있었어.”

세실리아가 순순히 빗을 넘겨주자, 훨씬 능숙한 손길이 빗질을 이어받았다.

“전하, 옷을 골라왔어요!”

“맨 오른쪽으로 할게.”

“액세서리는요?”

“앰버로 부탁해.”

“네에!”

방금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침실은 금세 소란으로 가득 찼다.

퐁레프 황궁의 가장 화려한 방을 종종 돌아다니며 몇몇은 황녀의 옷차림을 준비했고, 몇몇은 침대를 정돈했으며, 또 몇몇은 차와 함께 아침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손톱까지 다듬고 나서야 세실리아는 다소 진하게 우린 홍차를 들 수 있었다.

설탕과 우유 대신 레몬을 넣어 씁쓸하게 마시는 건 황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전하께서 어쩐 일로 늦게 일어나셨네요.”

따스한 찻물에 황녀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확인하며, 유모 쟌느 비에라 백작 부인이 놀리듯이 말을 건넸다.

“으응, 미안. 잡꿈 때문에.”

“전하. 표현.”

이 정도 표현은 괜찮지 않나, 세실리아는 작게 꿍얼거리다 유모의 날카로운 눈길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 경박한 어휘를 쓰시다니, 이 유모는 남사스러워서 고개도 못 들 거예요! 벌써 열일곱 생일이 코앞이신데…… 설마 데뷔탕트에서 그런 표현을 쓰시는 건 아니시겠죠?”

우리 유모가 왜 갑자기 괴수로 변했지?

“전하아?”

손수건으로 눈가까지 찍는 연극적인 자세에 세실리아는 곧바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내가 그럴 리가…….”

“그럼요, 울 황녀님께서 얼마나 사려 깊으신데. 뤼셍의 금지옥엽을 엉망으로 키웠다는 불명예를 제게 선물하진 않으리라 믿어요.”

뤼셍 제국의 성인식은 열일곱 살에 치러졌다.

그리고 그 성인식을 화려하게 기념하기 위한 연회가 바로 데뷔탕트.

그렇게나 의미 있는 날인 만큼, 데뷔탕트에서 어휘를 잘못 썼다간 유모의 눈물에 잠겨 죽을 터였다.

“황녀 전하의 데뷔탕트는 제국 전체의 축제라고요.”

“알고 있어. 조심할게.”

세실리아의 깔끔한 대꾸에 백작 부인은 한 발짝 물러섰다.

세실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돌봐왔던 덕분에 지금쯤 잔소리를 그쳐야 할 때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애지중지 키워온 소녀를 눈으로 보듬었다.

이제 곧 ‘소녀’라는 표현을 떨쳐낼 테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검은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콩콩 달려오던 아이가 이렇게나 아리땁게 컸다.

깜박거리는 황금색 눈망울, 장밋빛의 발그레한 뺨, 앙증맞게 쥐던 주먹까지 전부 또렷한데.

벌써 이렇게, 흑…….

“유모.”

“네?”

주책없게 훌쩍거린 모양이었다.

예법대로 다소 느릿하게, 빵 조각을 우물우물 삼킨 세실리아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나 아직 생일도 아니고 데뷔탕트도 안 치렀고 결혼도 안 했고 어디 떠나지도 않아.”

“알고 있어요. 근데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너무 빨라서, 흑.”

“유모, 어제도 그 소리 했어…….”

“애 키워보세요, 그런 소리 안 나오나!”

물론 애를 키워본 적 없는 세실리아는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양손으로 꽃받침을 한 채 눈을 깜박였다.

팔랑팔랑 나부끼는 검은색 속눈썹이 주변에 빛을 흩뿌렸다.

“그래도 유모의 세실리아는 예쁘게 자랐잖아?”

보는 이의 심장에 파동을 선물하는 몸짓이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미모가 저러할까, 바삐 돌아다니던 시녀들마저도 순간 멈칫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백작 부인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어 결국 흐뭇하게 웃어버렸다.

“당연히 어여쁘시죠.”

그녀는 힘주어 강조했다.

“그 누구보다도.”

가히 지독한 미모였다.

소녀와 여인의 경계 사이에 접어든 황녀는, 그 나이대 특유의 불안정함마저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고 있으니.

고고한 품위와 서늘한 오만. 보는 이의 경외를 끌어내는 기품.

저 아름다움은 세실리아 뤼셍이 ‘진짜 황족’으로 받아들여지는데도 한몫했으리라.

기실 황녀는 현재 황제와 황후 부처의 소생이 아니었다. 피 한 방울 통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머나먼 방계였을 뿐.

하지만 그녀는 기적적으로 ‘흑발’을 지니고 태어난 바람에 황족으로 입적되어, 황제 부처의 입양 딸이 되었다.

퐁레프 황궁의 보물. 제국이 귀애하는 황녀. 대륙 최고의 미인.

전부 세실리아 뤼셍을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그리고 제 무기를 잘 알고 있는 여자는 어느새 새치름한 표정으로 돌아가, 우유 셔벗을 한 스푼 뜨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걸어온 길을 회상하는 대신, 부인은 부드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꿈자리가 매우 사나우셨나 봐요, 전하.”

“그랬나? ……어, 좀 그랬네.”

꿈속에서 그녀는 남자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아차렸던 것 같다.

세실리아는 슬쩍 미간까지 찌푸리며, 그가 누구였는지 생각해 내기 위해 집중했다.

대체 누구였담?

미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던 건 확실한데.

그녀 주변에서 소설 속 주인공 수준으로 잘생긴 남자는─

‘우선, 알렉을 빼면.’

세실리아는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자의 정체를 규명하려 했던 호기심은 뒤이어 밀려 들어온 생각에 완전히 침몰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세실리아는, ‘세실리아 뤼셍’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이야기가 어딘가에 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 * *

‘인생은 하나의 이야기며, 세상은 그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무대’라는 낭만적인 비유 따위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언젠가의 어린 세실리아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상세 설정을 비롯하여 제목마저도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들의 이름과 대략적인 설정만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의 여주인공은 ‘블랑슈’. 대망의 남주인공 이름은 ‘티에리’, 그리고 서브 남주인공 이름은 ‘알렉시스’였다.

그나마 또렷하게 기억나는 전개를 소개하자면.

1. 햇살 같은 성격의 여주인공은 까칠하고 냉정한 남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한다.

2. 그녀는 남주인공에게 열심히 애정 공세를 퍼붓지만, 천성적으로 무심한 그는 여주인공의 사랑을 가차 없이 쳐낸다.

3. 하지만 결국 함락 당한다.

4. 물론 중간에 둘의 사랑이 위태로운 시기가 한 번은 꼭 온다. 여주인공의 곁을 언제나 지켜주는 다정한 소꿉친구 ‘서브 남주인공’ 때문에.

5. 그 ‘서브 남주인공’은 아주 오랫동안─실은 첫 만남 때부터─여주인공만을 일편단심으로 쳐다보는 순애보를 지니고 있다.

6. 순정을 간직하면 무엇 하나.

서브 남주인공은 남주인공의 질투를 부추기는 도화선 역할만 충실하게 하다 마지막 부분에 홀로 쓸쓸하게 사라져 버린다.

이렇거든.

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지.

그러니 책 제목이고 등장인물의 성이고,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마저 다 잊어먹을 수밖에.

세실리아가 언제 어디선가 읽었을 그 책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소설 속 여주인공, 블랑슈와 처음 만났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일곱 살의 아이가 또랑또랑하게 인사하며 무릎을 굽혔다.

‘휴스턴 후작가의 블랑슈라고 합니다.’

소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차려입고서 장미꽃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발그레한 뺨과 분홍색 장미가 너무 잘 어울려, 세실리아는 약간의 경탄 속에서 블랑슈가 건네주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휴스턴 후작 영애. 고루한 칭찬일 수도 있겠지만 영애는 장미를 닮았네.’

‘아니에요, 칭찬 너무 감사드려요!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장미거든요. 저 팔뚝에도 장미 문양이 있고 생일도 장미의 날이에요.’

‘오, 정말? 문양까지도?’

‘네. 새긴 게 아니라 갖고 태어났어요.’

마법사 중엔 문양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다더니 참말이구나.

대수롭잖게 생각하던 세실리아는 머리칼을 정리하다 말고 멈칫했다.

태어난 날이 장미의 날. 팔뚝에 있는 장미 문양.

……어라, 어떤 소설의 여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는데.

‘황녀 전하?’

‘혹시 휴스턴 영애, 영애는 영애의 이름처럼 새하얀 장미를 가장 좋아해?’

‘아니요. 전 노란색이 가장 좋아요! ‘블랑슈’라고 해서 하얀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요오, 전하.’

아이의 귀여운 투덜거림에 세실리아는 멋쩍게 웃어주었다.

‘와, 진짜 너무 똑같다’라는 감상만을 곱씹으면서.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동생인 알렉시스와 블랑슈가 만나는 순간을 긴장 속에서 지켜보았다.

소설 속 서브 남주와 이름이 똑같았던 그녀의 남동생 알렉시스의 설정은 분명 여주인공의 다정다감한 소꿉친구였다.

첫눈에 반해 눈물겨운 순애보를 품…… 기는 무슨.

다정다감은 얼어 죽을, 알렉시스 뤼셍과 블랑슈 휴스턴은 첫 만남부터 서로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싸웠다.

그 상황을 고스란히 목격한 세실리아는 ‘소설과 현실이 비슷하네’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렸었다.

* * *

“전하!”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세실리아는 시선을 까딱 움직였다.

“켈리에 경이세요, 전하.”

“들여보내.”

시녀가 냉큼 열어준 문틈 사이로 한 중년 남성이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모노클을 연신 추어올리는 몸짓이 너무나 다급해 보여 안쓰럽다.

전혀 좋은 아침을 보내는 것 같진 않았지만, 세실리아는 일단 살갑게 인사해 주었다.

“좋은 아침이야, 켈리에 경.”

“전하, 전하, 도와주세요!”

“알렉이 또 무슨 사고를 쳤어?”

“치실 것 같습니다!”

황자의 가정교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지었고, 세실리아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녀의 소소한 일과, 즉, 남동생 알렉시스 뤼셍이 치는 사고를 수습하는 것을 처리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뤼셍 제국의 수도, 생-뢰크의 심장에는 제국의 위상을 증명하는 퐁레프 황궁이 자리해 있다.

지배 가문인 뤼셍 황가의 일원이 대대로 나고 자란 곳.

하나뿐인 안식처이자 가장 포근한 요람.

방문하는 모든 이를 압도할 정도로 장엄하면서도,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줄 정도로 다정한 장소였다.

퐁레프가 간직한 다섯 개의 정원 중에서 황족에게만 허락된 곳이 바로 ‘세레인’이다.

꽃들이 사시사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낙원이자, 정원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꾼 예술 작품.

바로 그 세레인의 한복판에 정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황자 전하…….”

황궁의 수석 정원사인 쟝은 울상을 참으며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보라색 눈이 무료함을 품은 채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표정만은 참으로 순진무구해 보여 지켜보는 이들만 속이 썩었다.

“조, 조심하셔야 해요.”

“알았다니까.”

텔리아 꽃은 매일 10시 45분부터 정확히 1분간 24℃의 온수를 뿌려줘야 하는 까다로운 품종이었다.

그리고 하필 지금 물을 뿌리는 마력 기계가 고장 나, 정원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알렉시스 황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와 황후 부처가 아침 일찍 자리를 비워, 황궁에 남아 있는 마법사가 황자뿐이었기 때문이다.

“1분 남았습니다!”

“응.”

마력 조절이 아직 미숙하실 텐데…… 행여 텔리아 꽃들을 다 뽑아버리시면 어떡하지?

정원사들이 내심 괴로워하든 말든, 알렉시스는 집요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45분에 정확히 물을 줄 것. 소년은 손가락을 작게 꼼지락거렸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아야 하는데.’

세실리아는 호오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누이가 저 까다로운 꽃을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시각 44분 45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마력에 시동을 거느라 바빠, 소년은 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52초. 58초.

그리고.

앗. 익숙한 기척에 소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마법이 슬쩍 흔들리며, 안온한 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소나기가 순식간에 세레인을 뒤덮었다.

작은 빗방울 사이로 꽃향기가 거칠고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물기 머금은 여름 바람이 달큼한 내음을 흩뿌렸고, 순간 촉촉해진 생화들은 강렬한 색채를 선보였다.

한순간 살아 움직이는 듯이.

아찔할 정도로 다디단 생동적인 풍경.

“누나!”

투명한 여름비 속, 맨발의 소년이 더없이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 흰색 와이셔츠가 흠뻑 젖어 안이 비치든 말든, 아이는 즐겁게 제 보랏빛 눈을 휘었다.

시원한 그 미소가 얼얼할 정도로 상큼했다.

어느새 소나기가 그치었다.

비가 멈춘 정원, 쾌청해진 하늘 아래 쏟아진 빛줄기 속에서 아이가 웃음을 터뜨린다.

소년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세실리아는 가만히 다가가, 잔뜩 젖은 포옹을 받아주었다.

“조심해야지, 감기 걸릴라.”

다정한 타박에 알렉시스는 제 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고작 누이의 가슴팍까지 왔었지만, 이제는 열심히 따라잡아 거의 같은 키였다.

몇 해만 더 흐르면 내려다볼 수 있겠지.

‘빨리 자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이마에 어느새 부드러운 손길이 올라와 가볍게 톡 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는 손길에 알렉시스는 더 방긋방긋 웃었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좋아서 웃어?”

“누나 보는 게?”

“별게 다 좋다, 얘.”

어이없어하는 핀잔마저도 그는 마냥 좋았다.

제 핀잔에도 더 환해지는 표정이 의아한지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누나.”

“그럼 우리 이제 곧 소풍 떠나야지? 준비 안 할 거야?”

“지금 마저 하러 갈게. 준비하는 중간에 나온 거야!”

“그래.”

“진짜야! 아…… 혹시 흰, 아니, 걔도 와?”

세실리아가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그는 서둘러 호칭을 고쳤다.

‘흰둥이.’

진짜 이름은 블랑슈 휴스턴으로, 휴스턴 후작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자 마법 아카데미 동기다.

일곱 살 때부터 알고 지낸 동갑내기인 만큼 ‘소꿉친구’라고 표현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안 해. 안 합니다. 안 할 거야. 내가 왜!’

그가 블랑슈를 친구라고 부르는 일에 질색하는 만큼 블랑슈 녀석 역시 질색하리라는 걸, 알렉시스는 자신의 양팔과 양다리 전체를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응, 같이 가기로 했잖아.”

알렉시스는 단박에 시무룩해졌고, 세실리아는 혀를 끌끌 차며 남동생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으로 응징했다.

“아악!”

“얼른 준비하렴.”

“알았어. 근데 누나도 젖었는데 갈아입어야…….”

“네가 말려줘야지?”

……아무렴 그래야지요.

알렉시스는 마법으로 순순히 누이의 옷을 말려준 뒤, 울상 범벅인 켈리에 경과 함께 정원을 나섰다.

그렇게 소년의 새하얀 뒤꿈치가 사라지자마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살았다는 듯한 감사의 탄식.

정원사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땅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하다, 황녀가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황궁의 보물을 뵙습니다.”

애정을 담아 부르는 그 호칭에 세실리아는 엷게 웃어주었다.

“안온한 아침 보내고 계시는지요, 황녀 전하?”

“응, 덕분에. 세레인은 오늘도 예쁘구나.”

정원사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뿌듯함으로 반짝였다.

황자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인지라 세실리아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차별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차별은, 저들이 알렉시스를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아이가 바로 마법사라서.

마력과 광기가 붙어 다니는 만큼 마력을 지닌 이들은 광기 역시 감내해야 했다.

그 광기를 안정화하는 방법을 찾지 않는 한, 모든 마법사는 나날이 미쳐갔다.

강한 마법사일수록 더욱 심하고 더욱 빠르게 미쳐갔고.

알렉시스는 현재 안정화가 되어 있지 않은 마법사였으니 일반 사람들의 눈엔 시한폭탄에 지나지 않을 터.

본디 갖고 태어난 마력량도 어마어마한 만큼 단순한 폭탄도 아닌 아예 재앙 그 자체로 보일 수도…….

세실리아는 가만히 제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정리했다.

“그런데 말이야.”

“예?”

세실리아는 저들의 두려움을 공감하지 못할지언정 이해는 하고 있다.

특히 10년 전, 미친 마법사 카밀 베르뉴가 남부의 대도시 에르티아를 처참하게 붕괴시킨 이후로 마법사를 향한 적대감이 심해졌었다.

일방적인 공포, 노골적인 차별, 철저한 외면과 본능적인 경계.

마법사와 보통 사람을 갈라놓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

미쳐 버린 마법사가 일반인 몇백, 몇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뿌리째 뽑을 수 있는 정서도 아니었다.

눈앞의 정원사들에게 화를 내봤자 화풀이에 지나지 않을 테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세실리아는 모진 소리는 절대 할 수 없었지만…….

“알렉이 너흴 도와주곤 있었잖아. 감사하다는 인사쯤은 해줘.”

“송구합니다, 전하.”

“알렉시스는 현재 안전 등급이기도 하고.”

끝끝내 쓴소리는 남겨 버리고 말았다.

“아, 그리고 표정을 갈무리 좀, 조금만 더 열심히 해주길 바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부탁할게.”

세실리아는 더욱 힘주어 당부한 뒤 몸을 돌렸다.

알렉시스처럼 그녀 역시 소풍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뛰어가야 했다.

* * *

세실리아는 왜 이렇게 늦었냐는 시녀들의 아우성 속에서 겨우 소풍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감사를 표하는 손 키스를 흩뿌리고 황궁 1층의 대합실로 향했을 때.

“내가 못 살아.”

세실리아는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아직 대합실까지는 한참 남았는데도, 저 멀리서부터 소란이 들려오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소녀의 목소리와 짜증 섞인 소년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걸 보아하니 알렉시스와 블랑슈가 또 싸우는 모양이었다.

저 둘은 일곱 살의 첫 만남 때부터 열두 살인 지금까지, 5년 내내 안 싸운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세실리아는 잠시 그 경이로운 사실을 곱씹어 보았다.

‘저런 악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어.’

대합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살짝 열린 문을 일부러 두어 번 두들겼다.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가 기민하게 알아듣고는 몸을 홱 돌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봄볕을 박은 듯 초롱초롱 반짝였고, 붉은 입술 위에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휴스턴 후작가의 장녀 블랑슈 휴스턴은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웠다.

“언니!”

세실리아는 도도도 달려오는 소녀를 익숙하게 끌어 안아주었다.

“언니, 언니!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저 황자 자식은 안 보고 싶었고! 대체 눈치도 없이 왜 있는지 모르겠고!”

“즈응흐 흐르(조용히 해라).”

알렉시스가 이를 악문 채 쏘아붙이든 말든, 블랑슈는 얄미울 만큼 완벽하게 무시했다.

세실리아는 소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였다.

“표현 조심.”

불과 한 시간 전 유모에게서 표현 지적을 받은 그녀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세실리아는 적어도 이 두 사고뭉치 앞에선 뻔뻔해질 수 있었다.

“황자 자식이라니, 블랑슈. 습관 되어서 밖에서도 그러면 어떡해.”

“알겠어요오. 조심하겠습니다아.”

“와, 귀여운 척 좀 봐.”

알렉시스가 빈정거리자마자 블랑슈가 고개를 돌려 눈을 번득였다.

죽고 싶으냐는 질문을 담은 몸짓에 소년은 어깨만 으쓱였다.

죽일 테면 죽여봐라……라는 답변이려나.

‘미운 열두 살.’

하여간 말 지독하게 안 듣지.

둘이 또다시 한바탕 싸워대기 직전, 세실리아는 한숨을 쉬며 개입했다.

“우리 슬슬 출발할까? 그렇게 계속 싸우면 나 혼자 간다?”

유치한 협박에야 아이들은 겨우 얌전해졌다.

* * *

셋이 향하는 소풍 장소는 생-뢰크의 외곽에 있는 듀블렌 숲이었다.

간만에 숲까지 말을 타고 가기로 했는데, 승마를 즐기기 좋은 날씨라 다행이었다.

세실리아는 아이들에게 각각 손을 내어주고는 퐁레프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녀의 왼쪽에선 알렉시스가, 오른쪽에선 블랑슈가 손을 꼬옥 잡은 채로 콩콩 뛰며 따라온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마구간 앞의 널찍한 공터에서 마구간지기들이 말들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시녀가 준비해 준 승마용 장갑을 끼고는 채찍을 받아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황녀 직속의 호위 기사들이 엄중한 표정으로 각자의 말 옆에 서 있었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할게.”

정중하게 부탁하는 말에 그들이 전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번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두 사고뭉치를 돌아보았다.

알렉시스와 블랑슈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오’라는 천진한 표정으로 서 있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걱정 마, 누나. 오늘 하루는 사고 안 칠게.”

“정말이에요, 언니.”

“그래, 그래 주면 고맙겠다.”

그런데 말이야, 얘들아……. 너희들이 건네는 약조를 곧이곧대로 믿기엔 너희 과거가 너무 화려하단다.

약조를 건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려나?

세실리아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노력하며 말 위에 날렵하게 올라탔다.

부드러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백마가 경쾌한 울음을 내뱉곤 힘차게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우와.”

배웅하던 시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제국에서 가장 말을 잘 타는 기수라고 칭송받는 황녀답게 세실리아 뤼셍의 승마는 섬세한 명화였다.

풍성한 흑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아스라이 휘날린다.

생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금빛 눈과 바람결에 달아오르는 발그레한 뺨, 고삐를 사뿐히 붙든 길고도 우아한 팔까지.

동작 하나하나가 촘촘하게 이어지며 강의 유려한 흐름을 연상시켰다.

폭포의 깊은 곳에 숨은 요정이 저리도 사랑스러울까. 거친 야생을 빚어낸 듯, 자유로운 자태에 넋을 잃을 수밖에.

“어떡해, 너무 예쁘시다…….”

그녀의 감탄을 들은 건지 세실리아가 문득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시녀가 움찔한 순간, 황녀가 눈웃음을 치며 손으로 입맞춤을 날려 보냈다.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은 시녀는 완벽하게 체감했다.

미인의 유혹을 보면 없는 욕이 다 튀어나온다는, 참으로 쓸데없는 진리를.

그 미소를 목격했더라면 누구나 공감했을 깨달음이다.

* * *

복잡한 대도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듀블렌의 자연은 변함없이 순수했다.

인적 드문 곳에 자리해선지, 작은 숲은 맑은 시내를 품은 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숲의 초입에 도착하자마자 두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조심하고.”

“네!”

“물론이야!”

대답은 잘하지.

세실리아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짓다, 한 박자 늦게 눈에 힘을 풀었다.

같이 따라온 하녀 둘이 재빠르게 담요를 깔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준 덕분에 늦지 않게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오후 세 시.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진 않았지만 가장 더운 시각.

연녹색 여린 잎사귀들이 실바람 속에서 노곤한 몸을 뉘는 때였다.

천방지축 블랑슈는 통통 튀는 성격 그대로 숲으로 통통 튀어 들어갔다.

“블랑슈, 조심해!”

세실리아는 뒤에서 습관상 외쳤지만,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곳에 소풍을 왔으니 지리야 잘 알겠지.

이 작은 숲에서 설마 길을 잃을까.

거기다 함께 온 호위 기사들이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알았어요, 언니. 걱정 마세요!”

그뿐이랴. 블랑슈 휴스턴은 알렉시스와 마찬가지로 마법사였으나, 광기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적인 수준이었다.

신나게 뛰어 들어가는 아이의 연갈색 머리카락만이 아스라한 잔상을 남겼다.

“흰둥이 갔어, 누나?”

“알렉.”

“아싸, 드디어 갔네.”

담요 위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던 알렉시스가 냉큼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눕혔다.

그 말투에 요 작은 머리통에서 머리칼을 확 뽑아버릴까, 세실리아는 진지하게 고민하다 동생의 외모를 위해 포기했다.

“흰둥이라 부르지 말랬지. 설마 블랑슈 앞에서도 그렇게 부른 적 있니?”

“응.”

아주 당당한 태도라 기가 찰 수밖에.

세실리아는 무릎 위 새하얀 이마를 꾹꾹 누르며 응징했다.

“블랑슈가 뭐라던?”

“내 팔뚝을 물던데?”

블랑슈, 대체…… 너 혹시 강아지니?

그녀의 얼굴에 가득할 시름을 외면하려는 듯, 알렉시스는 천연덕스레 눈을 감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눈을 또록 또로록 굴리다 비교적 원만한 조언을 끄집어냈다.

“숙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렴.”

“걔가 솔직히 말해 숙녀는 아니지 않…….”

“언젠가 네가 좋아할 사람을 위해서라도 하는 말이란다.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데.”

나중에 진짜 후회하면 어쩌려고 이런담. 특히 네 녀석한테 ‘사랑’이 좀 중요한 것도 아니면서.

“아니, 아니. 누나.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엄청 친절하게 잘 대해 줘.”

알렉시스가 억울했는지 눈을 반짝 떴다.

보라색 눈동자가 억울함으로 반짝거리는 것에 세실리아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가 안 믿는다고 생각하는지 알렉시스가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다.

“아니, 누나. 나 진짜로…….”

“믿어. 잘 대해 주겠지, 좋아한다면.”

당장 우애 좋은 누나인 그녀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엄청 다정다감하고 살가우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람이 한눈에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란다. 본디 사랑이란 건 의미가 없었던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거잖니. 그리고 넌 네게 의미 없는 사람에게 차갑게 대하는 편이고.”

“…….”

“차갑게 대했다가 나중에 사랑에 빠져 후회하면 어쩔 거야? 뒤늦은 집착만큼 매력 없는 건 없는데.”

“일찍부터 집착하면 되지.”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라 할 말이 없군.

세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든 말든, 다시금 제 무릎에 몸을 눕힌 알렉시스는 아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심술을 담아 동생의 머리를 무릎에서 떨궈 버렸다.

* * *

마지막으로 듀블렌에 왔던 건 작년 가을이었다.

나무들이 따듯한 색채의 잎들을 떨어뜨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시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숲만큼 시간의 흐름을 잘 담아내는 곳도 없을 터였다.

블랑슈는 스쳐 지나간 계절들을 헤아리며 안으로 찬찬히 걸어 들어갔다.

다양한 채도의 신록이 바람결에 정답게 손을 흔들었다. 나무들 특유의 묵직한 내음이 알싸하게 코를 스쳤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요리조리 누비던 소녀가 멈칫한 건 바닥의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였다.

“어라.”

용케 깨지지 않는 새알이 발치에 놓여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 위에 둥지 하나가 탄탄하게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어떻게 올려준담? 이 나무는 타기 어려워 보이는데 아무래도 마법을 써야겠지?

블랑슈는 조심조심 도식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뒤, 휙 날아올라 둥지 위에 새알을 무사히 올려놓았다.

그렇게 다시 바닥에 안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갑자기 크르릉, 들려오는 사나운 울음소리를.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건…….

“꺄아아아아아악!”

성이 가득 난 채 발을 치켜든 곰이었다.

“어, 어, 어…… 어떻게…….”

곰이 여기에 있는 거야, 라는 질문을 끝낼 수도 없다.

열두 살의 소녀보다 몇 배는 더 큰 체구의, 기이할 정도로 푸른 눈빛을 번득이는 맹수가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어서.

곰이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그 기세에 눌린 블랑슈는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흉포한 푸른 시선이 감옥처럼 그녀를 단단하게 가두고 있었다.

다시, 다시…… 어……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이대로, 죽, 는 건가?

겁에 질려 손톱 아래서 피가 나는 줄도 몰랐다.

블랑슈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술을 애써 벌렸다.

어떻게든 비명을 긁어내려 숨을 내뱉었지만, 턱이 덜덜 경련하는 바람에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 어…….

한 걸음.

곰이 쾅, 발을 옮기는 것에 머리가 울렸다.

난 죽기 싫은데. 움직여, 소리라도 내란 말이야!

말 좀 들어 먹어!

또 한 걸음.

“오지, 마…….”

힘겹게 긁어낸 목소리는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며 생존 본능이 요란하게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멍청한 몸은 덜덜 경련만 할 뿐 움직일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발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실패.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마저 실패.

아, 나, 이렇게…….

“블랑슈!”

바로 그때,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찢으며 내리꽂혔다.

눈을 커다랗게 홉뜬 블랑슈는 전부 볼 수 있었다.

기어코 코앞까지 다가온 곰이 앞발을 난폭하게 휘두르는 것과 때마침 달려온 세실리아가 그녀를 껴안은 채 옆으로 몸을 날리는 것까지.

전부.

문제는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제 목표물을 잃은 곰이 날뛰며 다시 제 발을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흉기의 이번 목표는.

“언니─!”

소녀를 보호하려 꼭 껴안고 있는 여인의 등이었다.

안 돼. 안 돼! 이대로 언니는……!

블랑슈가 있는 힘껏 버둥거려도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팔은 흔들림 없이 굳세었다.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가려주려, 덮친 듯이 끌어안은 자세에선 반드시 보호해 주겠다는 강한 의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괜찮아, 블랑슈.”

나직하게 다독이는 목소리에 눈물이 차올랐다.

뭐가 괜찮아! 안 돼,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곰이 흉흉한 앞발을 내려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희뿌옇게 변한다.

온통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블랑슈는 숫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언니는 정말…….

떨고 있는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바닥에 엎드린 세실리아는 보지 못했다.

두려움에 질려 울먹이느라 눈물이 가득 번진 블랑슈 역시 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곰의 왼쪽 눈을 정확하게 맞힌 것을.

포효하던 맹수는 몸을 사납게 털면서 다시금 공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하늘을 요란하게 찢으며 나타난 보랏빛 낙뢰가 정통으로 곰에게 내려꽂혔다.

깔끔하고도 무자비한 그 공격을 짐승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흉수는 수차례의 경련 끝에 절명했고, 풀썩 쓰러진 사체 옆에는 홀라당 타버린 풀만이 남아 있었다.

‘끝, 났나.’

세실리아는 몇 번 짤막한 날숨을 토해냈다.

환한 보라색 빛에 알렉시스가 도착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곰이 무사히 처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장으로 가빠진 숨결이 뚝뚝 끊긴다. 손이고 무릎이고 발이고 덜덜 떨리는 건 덤이었다.

알렉시스가 제때 와서 구해 줄 거라고 믿었어도, 거대한 맹수의 공격 앞에선 긴장할 수밖에 없어서…….

이젠 끝났어. 무사해. 블랑슈도, 그녀도.

세실리아는 블랑슈를 풀어주며 몸을 일으키려다 흠칫했다. 뒤에서 알렉시스의 다급한 외침이 따라 들려왔다.

“눈을 가려, 아직 안 늦었어!”

연녹색의 빛이 소녀의 몸을 뱀처럼 휘감은 채 파드득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초점이 사라진 블랑슈의 눈동자에선 평상시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괴하게 뒤틀린 시선만이 불똥처럼 튀고 있었다.

이지가 사라지는 자리를 광기가 좀먹어간다.

“눈을 가려, 누나!”

생각보다 본능이 더 빨랐다.

블랑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세실리아는 냉큼 손을 뻗어 아이의 눈을 단단하게 가려주었다.

가려진 시야가 답답한 건지, 블랑슈가 이까지 드러내며 무엇이든지 물어뜯으려 했지만…….

“괜찮아.”

단호히 어르는 세실리아의 음성에 광기에 사로잡힌 연녹색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세실리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재차 끌어안았다. 누그러지는 마력은 이내 얌전해져, 다시금 제 주인의 몸속으로 얌전하게 들어갔고…….

“블랑슈?”

“……네.”

간발의 차로 폭주를 참아낸 아이가 지친 듯 그녀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손을 떼어냈어도 블랑슈는 눈을 계속 감은 상태였다.

반듯한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격한 운동이라도 끝낸 듯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아이가 더듬더듬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괜찮아?”

“네, 괜, 찮아, 요.”

본능적으로 제 보호자를 찾아 드는, 그렇게 품 안을 파고들려는 모습에 세실리아는 더욱 안정적으로 안아주었다.

블랑슈의 호흡이 진정되고 나서야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걱정스레 응시하고 있는 알렉시스, 옆에 엉망으로 쓰러져 있는 빌어먹을 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예상치 못한 새로운 얼굴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당신은……?”

나뭇잎 무늬의 빛줄기 속에서 남자의 바랜 금발이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을 속 밀밭의 풍경을 담은 색채였다. 슬프게 찬연하고 눈부시게 쓸쓸한.

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건 따로 있었다.

수려한 이목구비 중 가장 서늘한 빛을 띠고 있는 회색 눈동자.

폭풍우가 몰려올 듯한, 그런 냉철한 잿빛. 하지만 마냥 차갑다고 표현하기엔 화톳불의 재처럼 따듯한 것 같기도 했다.

널찍한 어깨와 촘촘하게 짜인 근육을 자랑하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를 보며 세실리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세상에.’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누이를 대신하여 알렉시스가 차분하게 대화를 이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아?”

담담했던 짙은 회색 눈이 격동적으로 움직였다.

남자는 흑발의 소년을, 똑같은 머리 색을 지닌 여인을,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녀를 둘러보았다.

“승리에 물든 밤의 빛을 모를 수 없지요.”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부복한 뒤,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에스디어가의 장자인 티에리 에스디어가 제국의 귀보들을 뵙습니다.”

……역시.

역시 이름이 ‘티에리’였군.

세실리아는 다소 착잡해지는 기분을 숨기려 노력했다. 흘끗 눈을 들어 살펴본 남자는 과연 소설 속 설명 그대로였다.

바랜 금발과 회색 눈을 지닌 냉담한 기사.

숨을 크게 내쉬었다. 눈꺼풀이 유난히 뻑뻑했다.

심호흡을 크게 두어 번 하고서야 세실리아는 마음속이 어떻게 헤집어지든 평온하게 입을 뗄 수 있었다.

“작년에 아버지께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았어? 어린 나이에도 무위가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전하.”

“나야말로 아끼는 동생을 구해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정말 위험할 뻔했어. ……블랑슈? 블랑슈?”

소녀가 고개를 끼릭 들더니 혼몽한 눈을 연이어 깜박였다.

정신이 나가버린 게 명확하게 보여, 세실리아는 티에리를 향해 양해를 부탁하는 미소를 지었다.

티에리도 개의치 않는 건지 부복한 자세에서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감, 감사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블랑슈가 허겁지겁 인사를 건넸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티에리는 동요 하나 없는 목소리로 무심하게 대꾸했다.

자신을 향한 소녀의 연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블랑슈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거리는 것을 눈치챈 건 덤덤하게 행동하는 티에리도, 소녀의 뒤에 있던 세실리아도 아닌 주변 상황을 넌지시 지켜보던 알렉시스였다.

소년은 누이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미묘한 기분을 곱씹던 차였다.

곰을 최종적으로 처리한 것이 그의 마법일지라도, 티에리 에스디어가 곰의 눈을 찌르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벌 수 없었을 터.

세실리아와 블랑슈가 현재 무사한 건 티에리의 공이 컸다.

고마웠다.

세실리아가 행여 다친다는 상상만 해도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데, 위험에서 구출해 준 기사가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마냥 감사함만 느낀다고 표현하기엔 감정이, 뭔가, 음. 미묘한걸.

‘무엇 때문이지?’

알렉시스는 삐죽 튀어나온 제 앞머리를 느릿느릿 잡아당겼다.

저 친구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악우인 흰둥이가 폭주할 뻔한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서인가?

아니면…….

‘아.’

소년은 그림처럼 앉아 있는 흑발의 여인과 어느새 일어서 있는 금발의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분명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런가.

그 때문인가.

소년은 저도 모르게 정색하다, 블랑슈 휴스턴 녀석이 잡아먹을 듯이 기사를 쳐다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제삼자인 그마저도 흠칫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열렬한…….

‘모르는 척하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에스디어 경.

그렇게 소년은 자신과 누이의 은인인 기사를 빠르게 포기했다.

그에 정색은 금세 녹아내리고, 그 자리엔 죄책감만이 소복하게 얹혔다.

황자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르는 티에리는 무덤덤히 곰에게로 다가갈 뿐이었다.

맹수의 눈에 꽂힌 창을 쓱 회수하던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그게, 분명 곰의 눈은 푸른색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검은 눈이라…….”

대답을 들은 황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소년이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하더니 이번엔 작디작은 숲을 둘러보았다.

소란이 사라진 숲에선 나직한 여름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냇물이 맑게 종알거리는 소리, 산새가 잔잔히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짓궂게 노닥거리는 소리, 잎사귀들이 주변을 톡톡 치며 장난을 거는 소리…….

아른거리는 햇볕 속에서 찬연하게 반짝이는 찰나가 내려앉는다.

숨을 죽이고 오래오래 감상해야 할 법한, 슬프리만치 완벽한 순간이.

알렉시스는 잠시 세실리아의 검은빛 머리칼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곰을 내려다보았다.

“푸른색 눈이었다니, 확실히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

“그렇지요.”

“마법이 도사리고 있는 땅이니 무슨 현상이 일어나도 놀랍진 않지. 그러니 함부로 넘겨짚진 않으려 해.”

“신중한 생각이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의구심을 접은 듯한 티에리와는 달리, 알렉시스는 발끝을 내려다보다 근처의 작은 돌을 톡 찼다.

듀블렌은 대대로 황족들이 나들이를 즐기던 작은 숲이었다.

그만큼 안전이 보장된 곳이었는데, 이곳에 곰이 나타났다고?

‘……마법사의 소행.’

소년은 자신의 이성이 자연스럽게 도출해 낸 결론을 요리조리 곱씹었다.

하지만 보랏빛 눈 속 점차 뚜렷해지던 살기는, 가까이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에 곧바로 자취를 감췄다.

“알렉.”

소년은 콩콩 뛰어갔다.

누이의 품 안에 쏙 안기려다 말고, 팔을 감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틀었다.

그늘에 반쯤 잠긴 그 어여쁜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누나, 괜찮아?”

“응. 때마침 와줘서 고마워.”

다정다감한 목소리.

소년은 안도하고 또 안도하다, 이어 들려온 질문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다치진 않았고?”

“난 당연히 괜찮지. 누나는?”

그 질문이 방아쇠였다.

하마터면 곰이 세실리아를…….

알렉시스는 자신이 주입받았던 황실 예법을 떠올리며 감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무용했다.

어떻게 갈무리할 수가 있어. 하마터면 누나가 곰에게!

“누나.”

소년은 결국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어린아이처럼 따지는 듯한 어조였지만, 그래서 뭔가 부끄러웠지만, 도무지 참아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참아야 하는데.

머릿속 한구석이 불에 태워지듯 뜨거워서…….

“누나, 대체 무슨 생각이었어?”

그의 누이는 마법사가 아니다. 곰을 막아낼 어떠한 힘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분통이 터져 알렉시스는 따져 묻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심술을 담아 꽉 끌어안았지만, 세실리아는 아픔 속에서도 옅게 키들거릴 뿐이었다.

“글쎄……. 네가 제때 구하러 와줄 거라는 믿음?”

“하지만 위험했잖아.”

“그랬지.”

“내가 행여 늦었다면? 경이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그래요, 그래. 나도 잘 알고 있답니다.”

“정말, 누나, 까딱했다면…….”

세실리아가 대답 대신 엷게 웃었다.

깃털처럼 가벼이.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진심으로.

그 웃음에 뭐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세실리아가 팔을 뻗어 그를 꼭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흐드러졌던 위화감은, 등을 토닥이고 머리칼까지 헝클어뜨리는 그 다정한 손길 속에서 점차 시들기 시작했다.

“알렉, 나도 알아. 내가 위험했던 거.”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

……하지만 누나, 알고도 그랬다면.

‘알고도 그런 거라면.’

알렉시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다물었다.

내뱉지 못한 질문이 비수처럼 남아 있었어도, 그는 자신이 내뱉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 오늘처럼 당신의 위험은 내가 막으면 그만이거늘.

빨리 커야지. 젠장.

세실리아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상태로 속살거렸다.

“미안해. 많이 놀랐지? 조심할게, 화 풀렴.”

“…….”

“그리고 너도 조심해야 해. 알았어?”

알렉시스는 다소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스럽게 조이고 있던 팔에 힘을 빼자, 그제야 풀려난 세실리아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럼 돌아갈까, 알렉?”

“으응.”

“기사들에게는 얘기하지 말자.”

“흥. 누나가 위험했던 건 사실이잖아.”

“저들이라고 곰이 나타날 줄 알았겠니.”

“그건 그래.”

황녀가 다칠 뻔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호위 기사들은 전부 울며 통곡하겠지.

감히 직무 태만이라는 죄를 저지른 자신들을 파면해 달라고 난리를 칠 수도 있고.

‘뭐, 이건 좀 예외적인 상황이니까.’

알렉시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다 함께 숲을 나서 소풍 장소로 돌아갔다. 기사들은 새로이 등장한 티에리를 보며 놀랄 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그렇게 남은 소풍은 비교적 안온하고도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 * *

퐁레프로 돌아왔을 땐 여름의 사양이 온 세상을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

때마침 마차에서 내린 세실리아는 한껏 짙어진 그늘 속에서 티에리 에스디어와 블랑슈 휴스턴이 서로를 마주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소녀가 연신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감사 인사를 건네는 모양이었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만남이라…….’

그녀는 미미하게 경련하는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이 겹치고 또 겹쳐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황궁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던 과거들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쉴 틈이 날 때마다 계속, 그렇게 헤집고 다녔어도 끝내 그 소설을 찾지 못했었다.

그 책이 예언서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곳이 책 속의 세상일 수도 있겠지.

……명료한 판단을 내릴 수 없던 탓에 세실리아는 일단은 잠자코 지켜보았었다.

책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여, 먼저 전개를 뒤트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뒤에야 ‘어어어라, 잠깐, 소설도 이랬던 것 같은데’ 아니면 ‘이 부분은 좀 다른데’ 식으로 반응할 수 있었을 뿐.

알렉시스와 블랑슈는 같은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건 소설에 서술된 대로였다.

마법 취향이 비슷한 건지, 거의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도 전해 들었다. 이 역시 소설과 똑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 아이는 정말 질릴 정도로 싸워댔다.

소설 속 핵심 설정이 알렉시스와 블랑슈의 뜨뜻미지근한 관계였던 만큼, 이는 무시 못 할 차이점이었다.

“누나? 왜 그래?”

세실리아는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뚝 멈추었다.

천천히 손을 미끄러뜨려 이번엔 제 머리칼 끝을 무의식적으로 정돈했다.

‘찾아야겠어.’

불현듯 그 책에, 알렉시스와 블랑슈의 마력 안정화 방법이 적혀 있으리라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다면 찾아야지.’

반드시.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아이들을 위해 그녀가 마땅히 해 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알렉시스와 블랑슈가 진실로 행복하길, 그리하여 예쁜 삶을 살길 그 모든 것을 바쳐 기원하고 있으니까.

블랑슈가 폭주할 뻔했던 상황이 재차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안 돼.’

다시는 안 된다. 절대로.

“누나?”

다소 커진 목소리. 그제야 세실리아는 동생의 음성을 알아듣고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평온을 가장하는 어조엔 미묘한 날이 서려 있었다.

“저 기사를 신경 쓰는 거야?”

“음? 아니? 내가 왜? ……내가 바라보는 방향엔 에스디어 경뿐만이 아니라 블랑슈도 있단다, 알렉.”

“아, 그래?”

알렉시스가 심드렁히 어깨를 으쓱했고, 세실리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블랑슈가 몇 시간 전에 폭주할 뻔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렴, 알렉.”

“이제 멀쩡하잖아.”

매정하다 못해 얼어 죽겠다, 얘.

하지만 예상했던 터라 세실리아는 재차 잔소리하진 않았다.

동생의 손을 잡고선 기사와 소녀를 향해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티에리 에스디어를 퐁레프까지 초대한 만큼 성대한 대우를 해줘야 마땅했다.

* * *

새로운 이를 환영하기 위한 저녁 만찬은 해가 완전히 기울고 나서야 끝이 났다.

세실리아는 티에리에겐 기사들을 위한 별실을, 블랑슈에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쓰던 귀빈실을 내주었다.

둘은 각각 감사를 표한 뒤 안내해 주는 시종을 따라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곁에 지키는 건 작게 하품하고 있는 알렉시스뿐이었다.

세실리아는 꽤 늦은 시각까지 남아준 동생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헤집었다.

“너도 방에 돌아가야지?”

“누나는?”

“원래는 춤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버티려면 체력이 필수였다.

숨 쉴 틈새도 없이 밀려들 춤 요청을 최대한 다 받아줘야 했다. 무도회의 주인공인 만큼 먼저 자리를 뜰 수도 없을 테고.

소풍을 다녀와 지친 몸으로 춤을 추면 데뷔탕트 그 극악의 환경을 연습할 수 있겠다는 속셈이었지만, 문제는…….

“귀찮아졌어. 그래도 출까?”

“누나가 편한 대로 하는 거지.”

“춘다면 누구랑 출지도 문제야.”

“저요, 저요, 저요, 저요, 저요,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라며?”

새침하게 반문하자, 손을 번쩍 들며 난입한 알렉시스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동생의 머릿속에 굴러가는 생각이 보이는 것만 같아 세실리아는 웃음을 흘렸다.

“그으럼 알렉, 갤롭 추는 거 어때?”

빠른 템포를 자랑하는 춤곡인 갤롭.

소풍을 다녀와 지친 몸으로 갤롭을 추면 누구나 녹초가 될 터였다.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는 짓궂은 제안에 보랏빛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누나가 얼마나 열심히 추는지 지켜보겠다는 시선이라 세실리아는 쳇, 가볍게 혀를 찼다.

놀려먹으려 했더니.

“……왈츠 추자.”

이번엔 알렉시스가 웃음을 터뜨렸고, 세실리아는 천연덕스럽게 동생의 손을 잡아끌었다.

단둘이서 추는 것인 만큼 대연회장까지 갈 필요는 없을 터였다.

2층의 음악실로 들어가자, 달빛이 커튼처럼 아스라이 드리웠다.

세실리아는 마법 등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말고 알렉시스를 돌아보았다.

“불 켤까? 충분히 밝긴 한데.”

“아니, 안 켜도 괜찮을 것 같아. 누나의 선택은 로렌시아 왈츠곡 2번이지?”

“응.”

힘 있고 폭발적인 3번이 인기가 가장 많긴 했지만, 세실리아는 지루할지언정 잔잔한 2번을 선호했다.

알렉시스가 그녀의 취향을 다 안다는 게…… 놀랍진 않네.

“근데 네가 원하는 것으로 해, 알렉. 춤까지 같이 쳐주는데 네가 즐거운 곡으로 해야지.”

“나도 2번이 좋아.”

“그래, 그럼.”

오르골이 열리며 2번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3/4박자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선율 속에서 알렉시스가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몸을 숙였다.

왈츠의 시작을 선언하는 그 인사에 세실리아도 무릎을 굽히며 화답했다. 가까이 다가온 소년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고, 세실리아는 그 손을 붙든 채로 스텝을 밟아나갔다.

춤 교사의 목청 터지는 강습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팔은 우아하게, 발은 정교하게. 몸엔 최대한 힘을 빼고 마치 가벼운 장난을 치듯이.

춤을 배우는 이들이 시작할 때 꼭 듣는 말.

그리고 무엇보다, 세실리아 뤼셍의 춤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말.

알렉시스 뤼셍은 그의 곁에서 사뿐사뿐 돌고 있는 누이를 보며 꽃 사이를 아른거리는 나비를 떠올렸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달빛 아래 춤추는 여인은 가장 완벽한 환상이었다.

그의 팔을 스치고 떨어지는 우아한 손길.

예의 그 장난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빙글빙글 돌 때마다 만개하는 치맛자락까지…….

곡이 끝나가는 줄도 몰랐다.

발을 멈춘 세실리아가 다시 무릎 굽혀 인사했고, 알렉시스 역시 늦지 않게 정신을 차리고는 허리 숙여 마무리했다.

“아, 끝났다.”

세실리아가 구두를 벗어 던지더니 바닥에 휙 누워 버렸다.

그녀의 유모인 비에라 백작 부인이 본다면 곧바로 뒤로 쓰러질 모습이었다.

알렉시스는 잔소리하는 대신 곁에 털썩 주저앉았고, 눈을 감고 있던 세실리아가 한쪽 눈을 떠 그를 본 뒤 다시 감아버렸다.

“누나, 그러다 잔다.”

“어떻게 알았어? 나 잘 거야.”

“추워, 침대 가.”

“여름인데 무슨. 나무 바닥이 얼마나 시원한데……. 너도 누울래?”

“됐습니다.”

“…….”

“진짜 자?”

“…….”

“누나?”

많이 피곤했나 보네.

세실리아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본 알렉시스는 그녀가 정말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에 세실리아가 깊은 단잠에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년은 깨우는 대신 삐딱하게 몸을 튼 자세 그대로 내려다보았다.

적막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여름밤의 침묵은 왈츠의 선율보다 우아하고도 장엄하며, 짙었다.

잠시 망설이던 알렉시스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바닥에 부채꼴처럼 퍼진 흑색 머리카락 한 가닥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었다.

여자의 머리칼에 남아 있는 염색 마법이 일시적으로 해제될 때까지 계속.

그리하여 드러난 건 달빛보다 더욱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이다.

그는 입꼬리를 설핏 휜 채로 손안 가득 담긴 빛을 응시했다.

은색이었다.

흑색이 아니라.

제국의 눈에 ‘세실리아 뤼셍’은 기적적으로 흑발을 발현한 황족의 머나먼 방계겠지만…….

실상 세실리아 뤼셍은 황족의 핏줄조차 아니었다.

황후 마리사는 매달 딸에게 염색 마법을 걸어주며 세상을 속였더랬다.

“누나.”

알렉시스는 작게 속삭였다. 여전히 깨지 않는다.

다만 달빛이 내려와 저와 비슷한 색의 머리칼을 보듬고 속눈썹을 어루만졌다.

평화로운 여름밤, 빼곡히 박힌 별,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와 어슴푸레한 방.

나무 바닥에서 편안하게 잠든 여인이 명화를 완성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 황홀한 그림을 오래오래 기억 속에 새겨 넣었다.

‘세실리아.’

문득 누이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지만, 소리 내어 내뱉진 않았다.

그녀가 깨어나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하는 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세실리아는 제 머리칼의 진짜 색이 은색인 건 모를 수는 있어도, 자신이 황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진짜 이유는…….

‘아직은 아니야.’

제멋대로 속삭이려는 입술을 사리물고선 아쉽게 손을 떼어냈다.

은빛이 다시 검은색으로, 뤼셍의 색이자 그의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머리카락이 어떤 색이든 누이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리고 퐁레프에 있지. 그의 곁에, 그의 황궁에, 그의 안식처에.

새삼스레 ‘지배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책임’을 강조하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가 제국의 태양으로 불리는 이유는 태양으로서 모두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이.

알렉시스는 엷게 웃으며, 들릴 듯 말 듯 여리게 속삭였다.

그래. 그는 알렉시스 뤼셍이니.

“잘 자, 누나.”

퐁레프에 머무르는 생명은 전부 그의 것이지.

* * *

아침부터 지저귀는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에 세실리아는 눈을 반짝 떴다.

새로운 아침은 맑고 깨끗했으며 이불에는 햇빛 냄새가 났다.

‘……좋네.’

단잠을 자고 일어난 뒤의 나른함이 온몸을 녹이고 있다.

졸리진 않아도 저절로 게을러지게 되는 기분이라, 그녀는 이불에 폭 안긴 채로 가만히 눈을 굴렸다.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하기 싫었다.

‘자, 그럼. 여긴 어디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천장 명화였다.

익숙한 그림은 현재 누워 있는 곳이 음악실이 아닌 그녀의 침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친애하는 남동생께서─마법을 썼든 직접 업어서 옮겼든─어떻게든 여기까지 운반해 준 모양이다.

버리고 오지 않아 줘서 고마워, 알렉.

이제 두 번째 질문.

‘화장은 지웠나?’

눈을 깜빡였어도 속눈썹이 뻑뻑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기절’해 있는 동안 시녀들이 열심히 씻겨주었나 보다.

아무것도 덧칠해져 있지 않은 그 뽀송뽀송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또 화장해야 하잖아?

‘아이고, 귀찮아라.’

세실리아는 베개 한 개를 전리품으로 야무지게 챙긴 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오늘은 아침 일정도 없으니까, 아침 한 끼쯤은 굶어도 되겠지, 뭐.

하지만 그녀의 유모는 엄격하고도 매정했다.

감히 황녀의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쟌느 비에라 백작 부인은 척척 걸어와 이불을 빼앗았다.

세실리아가 우는 소리를 내며 바동거리는 모습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유모 나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훌쩍거리자 그녀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곧 성인식까지 치르실 분께서 웬 어리광이세요?”

“오늘은 누워 있고 싶단 말이야…….”

“안 돼요, 황실 조찬에 꼴찌로 참석하실 거예요?”

“으응?”

세실리아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 어라, 예상치 못한 단어 하나가 질문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찬이라니? 부모님께선 내일 귀궁하시, 헉. 설마.”

“네.”

비에라 백작 부인은 황녀의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를 향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두 분 폐하께서 오늘 아침 일찍 귀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휘이잉—

창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방 안에 바람이 불었다.

슬리퍼를 챙겨 신은 황녀가 욕실로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안에서부터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부리나케 준비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착하시네요, 우리 전하.”

부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황녀의 기상을 알리기 위해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입장한 시녀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두 번 깜짝할 사이에 세실리아는 완벽하게 단장되어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새하얀 어깨를 드러내는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거울 속에서 그녀를 마주한다.

목 부분이 좀 비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쪼르르 다가온 시녀들이 장신구 함을 보여주었다.

“어떤 세트를 하실 건가요, 전하?”

가장 왼쪽에 있는 건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

중앙의 세트는 루비와 자수정, 가넷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장 오른쪽 세트는 백금을 기본 골조로 하여 아쿠아마린, 오팔과 문스톤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세실리아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재차 확인했다.

아무래도 화려한 게 나을 것 같고, 옷 색이 푸른색인 만큼 중앙의 붉은색 세트와는 안 어울리니…….

“가장 왼쪽으로 할게.”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시녀가 착용을 도와주며 단장을 마무리했다.

“맘에 드시나요, 전하?”

“물론이야.”

세실리아는 부채를 건네받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아주었다.

그 모습에 시녀들이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다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자신이 완성한 작품에 감격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였다.

아름다우시니까요, 매력적이시죠, 예쁘세요, 고혹적이십니다…….

다채로운 어휘들이 한 아름 쏟아지는 속에서 세실리아는 재차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전하!”

이윽고 열띤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황제의 직속 시종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좋은 아침이야, 조나단.”

“싱그러운 아침의 축복이 전하와 함께하기를.”

입궁한 지 고작 1년밖에 안 된 소년은 아직도 고풍스러운 인사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 고지식한 면모에 세실리아는 옅게 웃었다.

“그,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디.”

녀석이 갑자기 고장 난 듯 말을 더듬더니, 삐걱삐걱 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복도 위를 아침 햇살이 어지러이 수놓고 있었다. 부서지는 빛 위로 나무 그림자 무늬가 복잡하게 그려졌다.

세실리아는 사뿐히 발을 옮기다 말고 문득 상념에 잠겼다.

황궁의 아침 조찬은 언제나 유리 온실에서 열렸다.

제국의 초대 황제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만든 선물이자, 뤼셍의 가장 고귀한 핏줄들만 입장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래, 세레인처럼.

사실 유리 온실은 세레인보다 더 폐쇄적이긴 했다.

세레인 정원은 아주 가끔 귀빈들의 방문을 허락하곤 했지만, 온실만큼은 철저히 황족들만 허락했으므로.

그러니 기실 그녀는 참석할 자격이 없지…….

세실리아는 마음이 복잡해져, 저도 모르게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누나!”

어느새 유리 온실의 문 앞에 도착했는지,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왔다.

날 듯이 달려와 포로록 안기는 남동생을 그녀는 천천히 마주 안아주었다.

“누나, 푹 잤어?”

“응, 덕분에. 안 버려줘서 고마웠어.”

“세상에, 누가 버려. 대체.”

“보통 남매는 버리고 가. 안 그래, 조나단?”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전하.”

시종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알렉시스가 어설픈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듯한 그 난처한 표정이 장난기를 부추겼다.

세실리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동생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안 버리고 가서 고마웠다는 소리야.”

“으응. 앞으로도 안 버릴 거야.”

“정말?”

“정말.”

알렉시스가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가져가 걸더니 엄지손가락에 도장까지 쾅 찍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잠자코 지켜봐 주던 조나단이 손을 뻗어, 들장미가 생생하게 조각된 온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꽃향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 속에서 이국적이고 진귀한 식물들이 그들을 반긴다.

나풀거리는 황금색 나비가 그들 곁을 가볍게 스쳐 날아갔고, 해가 길어지는 계절을 맞이하여 녹음이 아름드리 드리웠다.

천창을 통해 쏟아져 내린 햇살이 고운 흙 위에 빛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나비를 쫓으려 콩콩 뛰어가는 남동생의 뒤에서 세실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불구불한 길의 끄트머리에서 나타난 식탁의 가장 상석엔 황제인 아르망이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손을 신나게 흔들어주더니,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려놓는다.

아들과 똑같은 흑색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가 싱그럽게 반짝이며 시선을 잡아챘다.

“쉿.”

아침 일찍 귀궁하느라 피곤한지, 황후 마리사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세실리아와 알렉시스는 침묵을 지켜주며 아르망이 꽃으로 아내의 머리칼을 장식하는 걸 구경했다.

잠에 빠져든 여인의 붉은색 머리칼 위로 분홍색과 하얀색 장미 꽃잎들이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안 깨는 아내를 본 아르망은 한술 더 떴다.

퐁,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관을 조심스레 씌워주려던 그는 붉은색 속눈썹이 두어 번 깜박이는 걸 목격했다.

졸음으로 혼몽했던 시선에 차츰 초점이 돌아온다.

“안녕, 마리사?”

아르망이 천연덕스럽게 인사하며, 아내의 녹색 눈이 가느스름해지는 것에 헤실헤실 웃어주었다.

“웃지 마, 정들어.”

“정들라고 하는 건데…….”

남편이 풀 죽은 얼굴을 하든 말든, 마리사가 딸에게로 팔을 뻗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애정 어린 신호에 세실리아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폭 끌어안았다.

뺨에 두어 번 입을 맞추자, 마리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우리 딸이 최고야.”

“아버지 들으시면 우시겠어요.”

“맞아! 나 울 거야!”

“울어. 구경은 해줄게.”

반항을 시도하던 아르망은 매정한 반격에 그대로 침몰했다.

그는 식탁 위로 철퍼덕 엎어졌고, 세실리아와 알렉시스는 모르는 척하며 나란히 착석했다.

가족들이 인사를 나누도록 기다려주던 시종들이 접시를 든 채 줄지어 입장했다.

아르망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비켜준 자리에 호화스러운 아침 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마리사가 냅킨을 무릎 위에 펼치며 먼저 화두를 던졌다.

“나흘 동안 잘 지냈니? 소풍은 어땠어?”

세실리아는 핑거볼에 손을 잠시 담그고는, 빵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잘 지냈어요. 소풍은 잘 흘러갔고……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소풍 도중에 에스디어 경을 만나는 기회를 얻어, 황궁에 초대했습니다.”

‘곰의 습격’은 완전히 빼버린 말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뭉뚱그린 이야기에 알렉시스의 시선이 세실리아에게 꽂혔다.

소년의 보랏빛 눈이 가늘어지든 말든,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친애하는 동생님께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성정이 아니시지.

……역시나.

그녀가 빵을 오물거리는 동안 알렉시스는 결국 오렌지 주스만 홀짝일 뿐, 입을 열진 않았다.

“에스디어 경을 만났다고? 그랬구나. 잘했어.”

마리사가 칭찬한 것을 이어 이번엔 아르망이 질문했다.

“데뷔탕트 준비는 잘 되어가니?”

“으윽, 그 질문은 반칙…….”

세실리아가 심장을 움켜쥐는 척 신음했고, 아르망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더니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그럼 그건 나중에 질문하도록 하마. 알렉?”

빵을 큼지막하게 베어 먹던 소년이 제 차례인 줄 몰랐는지 펄쩍 뛰었다. 아버지를 빼닮은 보라색 눈이 요리조리 굴러간다.

자신이 무슨 사고라도 쳤는지 되짚어보려는 듯이.

“아카데미에서 연락받았는데…….”

“윽, 그 질문은 반칙…….”

“질문 시작도 안 했거든, 아들?”

알렉시스의 얼굴이 뚱해지든 말든, 아르망은 꿋꿋하게 질문을 마무리했다.

“마력 등급 다시 재야지?”

순식간에 주변을 짓누르는 적막.

화목함 속에 가려졌던 진실이 단박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안정화 방법을 찾지 못한 모든 마법사는 결국엔 살아 있는 폭탄일 뿐.

그 잔혹한 진실은 설령 알렉시스가 이 거대한 제국의 황태자라 할지라도 변함이 없었다.

알렉시스가 오렌지 주스를 마저 홀짝이는 동안, 세실리아는 느리게 눈을 굴렸다.

마리사의 가느다란 손목이 새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왼쪽 손목은 말끔하기만 했지만…… 오른쪽 손목엔 ‘Armand’라는 반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터.

아르망의 왼쪽 손목에 ‘Marisa’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듯이.

마법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뤼셍이 대대로 이 거대한 제국의 지배 가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흑발을 지니고 태어나는 뤼셍의 혈족들은 전부 마법사였으며 그들의 마력 안정화 방법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뤼셍의 핏줄이 사랑을 확인한 반려에게 ‘각인’하는 순간.

둘의 공통된 신체 부위 어딘가에 서로의 이름, 즉 ‘네임’이 새겨지는 동시에 마력이 안정화된다.

마력이 반려에게 공유되는 건 덤이었고.

이렇게 방법이 알려진 건 뤼셍의 혈족이 유일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개개인의 다른 마력 안정화 방법을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살았다.

그전에 미쳐 버리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

끝내 방법을 찾지 못하여 폭주해 버리는 마법사들이 존재하는 만큼, ‘각인’이라는 명확한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건 강력한 이점이 아닐 수 없으리라.

“알렉?”

아르망의 재촉에 괜스레 그녀의 등골이 오싹했다.

세실리아는 초점이 안 맞는 듯한 시야를 다시 말끔하게 만들려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그녀답지 않게 손끝이 차가웠다.

뻣뻣해진 손을 오므리며 시선을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줄곧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은, 차분하여 더 깊은 보랏빛 시선과.

순간 세실리아는 저 눈이, 저 맑은 보랏빛 눈동자가 진정 광기가 머무를 수 있는 눈인가, 하고 생각해 버렸다.

그 정도로 깨끗해서 오히려.

“알렉?”

아르망이 다시 재촉했고.

“알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등교하면 받으러 갈게요.”

알렉시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제야 그녀에게서 눈을 떼어내 아버지를 응시해, 세실리아는 동생의 눈빛이 선물했던 기이한 순간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상대의 잔잔한 시선 속 그녀의 심장만 수런거리는 기분은, 글쎄…….

‘뭐랄까…….’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져 있어 그녀는 쭈뼛쭈뼛 다시 손을 폈다.

그러고는 더 깊이 생각하는 대신, 동생에게 후추통을 건네주었다.

알렉시스는 언제나 스크램블드에그에 그린 페퍼를 곁들여 먹었다.

녀석이 냉큼 받아 들고는 신나게 챱챱 뿌리기 시작했다.

천진하면서도 발랄한 그 태도가 지켜보는 이의 마음에 돌멩이를 퐁당 던진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망이 손을 뻗어 아들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헝클어뜨렸고.

“아, 왜요. 갑자기─”

알렉시스가 투덜거리며 아버지의 손을 피하려 들었다. 둘의 살가운 모습 위로 마리사의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내려앉는다.

가족의 화목함이 덧칠해지며 어둑한 현실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러난 건 노을 진 호수의 윤슬처럼 따스하고도 찬란한 순간들일 뿐.

세실리아는 기꺼이 지켜보았다.

* * *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머무를 즈음이었다.

황녀의 지시에 따라 마차를 대령한 마부는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을 보고 속으로 긴장했다.

설마 저 두 분만 태우고 가는 건 아니겠지? 황녀 전하도 같이 가시는 거겠지?

퐁레프의 마부들은 종종 알렉시스 황자 전하와 휴스턴 후작 영애를 단둘이 태우고 가느니 마차를 개울로 처박겠다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순수한 농담이 아니라는 게 슬픈 부분이지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마부는 세실리아 황녀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해 버렸다.

“알렉, 블랑슈?”

그때, 황녀가 허리춤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아카데미까지 싸우지 말고 가. 알았지?”

“알았어.”

“네, 언니!”

“나중에 확인할 거야, 너희 둘!”

“알았어……. 안 싸운다니까.”

“……네. 알겠어요.”

다행히 황녀께서 으름장까지 놓아주셨다.

퐁레프의 귀보 만세!

부디 영원토록 반짝이시길.

인성은 몰라도 외모만은 완벽한 아이들이 나란히 마차에 올라탔고, 마부는 두 아이가 전부 착석한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바로 곁에선 황녀께서 어여쁘게 웃어주고 계셨다.

“언제나 고마워. 만약…….”

엄지로 마차 안으로 똑바로 가리킨다.

“저 두 사고뭉치가 싸우면 바로 얘기해 줘. 알았지?”

“네, 전하.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진심을 섞어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윽고 말들의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돌돌 굴러가기 시작했다.

세실리아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인사하자, 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알렉시스와 블랑슈 역시 손을 마주 흔들었다.

배웅해 주는 여자의 미소에서 다정함이 잔뜩 묻어 나온다.

아이들을 태운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세실리아는 그 자리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 * *

“지금 방학인데 아카데미에 가야 한다니!”

블랑슈의 투덜거림에 알렉시스는 대수롭잖게 받아쳤다.

“너나 나나 누나 데뷔탕트에 참가하려면 가야지. 검사받긴 해야 하잖아.”

“그건 그래요.”

블랑슈가 좌석에 벌러덩 누운 채 발을 동동 흔들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분명 못 보셨겠지만 전 언니 드레스 디자인을 알고 있답니다아~! 데뷔탕트 때 언니는 진짜 어마무시하게 예쁘실 거야!”

몽롱해지는 연두색 시선을 보아하니 데뷔탕트 드레스를 차려입은 세실리아를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예쁜 거 최고! 나는 봤지!”

연갈색 머리의 소녀가 불쑥 팔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자랑하는 모습이 못내 얄미워, 알렉시스는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누나가 싸우지 말라고 했으니.’

참자, 참아.

창밖으로 시선을 휙 돌려 버렸다.

어느새 퐁레프를 빠져나온 건지, 화창한 하늘 아래 여름 생-뢰크 특유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제가 한평생 나고 자란 도시가 온유한 볕 아래서 반짝이는 것을 감상했다.

생-뢰크의 일상적인 여름날이었다.

녹색 원피스를 입은 부인이 양산을 든 채 바삐 걸어가고, 아이들이 솜사탕을 손에 든 채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포플러나무의 잎사귀는 어여쁜 연녹색이었으며 도시를 감싸는 하벨 강 역시 늘 그렇듯 맑고 푸르렀다.

잔잔한 수면 위의 윤슬이 아스라이 빛을 발했다.

“근데 전하, 전하는 등급 유지할 자신 있으세요?”

마차가 다리 위를 가로지를 때였다.

알렉시스는 흘끗 시선만 돌려, 이젠 똑바로 앉아 있는 블랑슈를 응시했다.

저 녀석이 마치 남 일처럼 질문하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모든 마법사는 폭주할 뻔했다가 안정되면 일시적으로 마력이 줄어들거든…….

그러니까, 블랑슈 휴스턴은 현재 ‘마력 검사’를 통과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부럽긴 하네.’

알렉시스는 솔직한 속내를 숨긴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교관님 말로는 전하 마력량 또 증가했다며요. 기록적인 수준이라던데.”

“지금까진 괜찮았어.”

“…….”

“그러니 나쁘지 않게 나오겠지.”

그는 주저하다, 결국 살짝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쩔 수 없이 굳어진 입매를 숨기지는 않은 채로.

블랑슈 역시 침묵했다.

함부로 깐족거릴 화제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눈앞 소년의 긴장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당장 마력이 위험 등급으로 떨어지면 마탑이 예의주시하며 감시한다.

외출이 엄격하게 금지되는 것도 모자라 독실에 갇혀─감금 맞다─지내야 할 수도 있었다.

아주 심각한 경우엔 해당 마법사의 시력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다고도 들었다.

시력을 앗으면 폭주 가능성이 일시적으로 줄어든다는 명분을 들면서.

‘……으. 정말 괜찮으시겠지?’

황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어도 그가 어딘가에 감금당하는 것까진 원하지 않는 터라, 블랑슈는 장본인보다 더 긴장해 버렸다.

그래서일까.

리베 아카데미에 도착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릴 때까지도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발목을 삐끗하며 그녀는 요란하게 휘청였고.

“조심하셔야지요.”

무뚝뚝한 걱정의 목소리와 함께 구출되었다.

그녀의 팔을 붙들어 무릎이 깨지는 사태를 막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티에리 경!”

블랑슈는 눈을 번득이며 외쳤다. 알렉시스 뤼셍의 얼굴에 떠오른 ‘불안’이라는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숲속에서 본 블랑슈 휴스턴의 얼굴은 분명, 음, 그러니까, 음, 한눈에 빠진, 음, 음, 읍.

“우린 역시 운며어…….”

“미쳤냐!”

알렉시스는 냅다 친구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 자리서 끌고 도망쳤다.

블랑슈가 읍읍거리며 바동거리든 말든, 매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인적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미친 망아지를 놓아주었다.

연갈색 머리의 폭탄이 푸하, 숨을 크게 내쉬며 씩씩거렸다.

“아, 왜 막아요!”

“너 방금 뭐라 하려 했는데?”

알렉시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내려다보았다.

평생 머리 뜯으며 괴로워할 것을 막아준 건 알고 있냐?

‘은혜도 모르는 흰둥이 같으니라고.’

블랑슈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운,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하려 했어요!”

“그걸 거짓말이라고 하고 있어?”

“네!”

“내가 등신 같아?”

“네! 아. 음. 본심이…….”

블랑슈가 어물거렸고, 알렉시스는 이마를 짚었다. 이걸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속아주랴?”

“부디.”

“그래, 그럼.”

애초에 네게서 ‘운명’이라는 단어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속으로 구시렁거린 바로 다음 순간, 소년은 온 마음을 담아 절망했다.

“너 좋을 짓을 내가 왜 한 거지?”

“도와주고 욕먹고 싶으세요, 전하?”

“솔직한 심정이야, 망할…….”

“와, 도움받았는데 하나도 안 고마워! 이 망할 황자 새끼야!”

“황족 모독죄로 잡혀가십니다, 휴스턴 후작 영애.”

블랑슈는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려, 차분한 얼굴의 티에리 에스디어를 발견했다.

그들 사이의 대화를 전부 들었는지는 모르겠어도 일단 그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티에리 경께선 여기에 왜 계세요?”

최대한 사근사근한 음성을 내어 질문하자마자 옆의 빌어먹을 동갑내기가 뜨악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우와.

황족 모독죄고 나발이고 진심으로 세게 한 대 걷어차고 싶어지는데.

블랑슈는 충동을 꾹 눌러 참으며 티에리의 대답을 경청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미처 말씀을 안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이번 여름부터 리베 아카데미의 교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요?”

“예, 그렇습니다. 두 분께선 일단 들어가시지요. 율리케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티에리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블랑슈는 얼른 총총걸음으로 뒤따랐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둘의 뒷모습을 구경하며 기가 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흰색 강아지 꼬리가 살랑거리는 착각까지 보이는 것 같은데 눈을 찌르고 싶다, 진짜…….

‘누나, 너무너무 보고 싶어.’

그는 다소 처량하게 세실리아를 찾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아카데미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뚝 선 건물의 그림자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잠깐의 소동으로 망각했던 현실이 다시 어둑하게 내려앉는다.

긴장으로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알렉시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느릿하게 발을 떼었다.

* * *

……검사 결과가 나온 건 그로부터 정확하게 세 시간 뒤였다.

알렉시스는 몸에 익힌 황궁의 예법대로 평정을 유지한 채, 리베 아카데미의 교장인 율리케가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러니까, 전하. 등급이…….”

한 귀로 흘려들으며 소견서를 펼쳤다.

다급하게.

그리고 더없이 간절하게.

Risque.

새하얀 종이 위에 한 단어가 유려하게 적혀 있다.

위험 등급이라는 결과를 알려주는 바로 그 단어가.

알렉시스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내려앉았는데도 의외로 감흥이 없었다.

뭐, 폭주 직전 등급이 안 떴으니 다행인가, 라고 빈정거릴 수도 있을 만큼.

‘어쩐담.’

세상이 뒤틀리는 것 같았어도 일단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어느새 진정됐고, 스스로의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착각까지 일고 있다.

“전하.”

난 과연 퐁레프에 감금되는 걸까? 아니면 이곳, 리베 아카데미에?

“전하.”

몽테-페르트 마탑까진 가고 싶진 않은데 설마 거기로 보내지려나?

……마탑에 갇히면 누나를 못 만나잖아. 언제 나오는지도 모르는 건 당연하고.

“전하!”

율리케가 요란하게 외치고 나서야 알렉시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년은 천진한 표정을 지은 채 적반하장의 자세로 타박했다.

“왜 그렇게 비명을 질러? 진짜, 멀쩡한 심장이 떨어질 뻔했네.”

“……즌흐(전하).”

“나 귀 안 먹었어.”

멀뚱히 바라보는 얼굴이 정말 쓸데없이 잘생겨서 얄밉다.

율리케는 기가 막혀 한숨을 푹푹 내쉬다, 어깨를 처연히 늘어뜨렸다.

교육자로서 반평생을 헌신하면 인내심을 단련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어쨌든 뭔데?”

알렉시스 뤼셍의 현재 등급은 폭주 직전 정도의 위험한 등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녀의 데뷔탕트’라는 공식 행사에 참석하기엔 불안정한 등급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순 없었다.

율리케는 허리를 단정하게 폈다.

“마력을 안정화하기 위하여, 임시방편으로나마 마력을 흘려보내시는 건 어떠하신지요?”

“그게 가능해?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

“누나의 데뷔탕트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그건 이기적이잖아.”

소년이 시무룩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율리케는 풀죽은 그 모습에 공연히 죄책감까지 들어 외모의 위력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저 말간 얼굴에 어떻게든 미소가 다시 꽃피길 바라게 되니.

그는 반은 희망에, 반은 초조함에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며 느릿느릿 입을 뗐다.

* * *

두 사고뭉치를 태운 마차가 저 멀리 사라진다.

세실리아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배웅하고서야 천천히 돌아섰다.

황궁의 거대한 그림자가 여느 때처럼 굳건하게 주변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흠. 블랑슈는 분명 안정성 검사를 쉽게 통과하겠지만, 알렉은…….

“통과할 거야.”

세실리아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검사를 받는 동안, 그녀 역시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다음 일정은 궁내부관인 니콜라 세르크 경과 짧은 티타임.

……대략 1시간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황녀 전하.”

서둘리 걸어 황궁 도서관 제1관에 도착하자, 앉아 있던 사서들이 냉큼 일어섰다.

그들이 줄지어 인사하는 모습에 세실리아는 앉으라 손짓했다.

“전부 편하게 있어. 뭐 좀 잠시 찾아보러 온 거니까.”

“저희가 뭐라도 도와드릴 수 있을지요?”

“아니, 괜찮아. 정말이야.”

세실리아는 고개를 까딱이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황족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금서가 보관된 비밀 통로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안에 감춰져 있다.

그녀는 주변을 흘끔 살펴본 뒤에야 조심스레 입장했다.

마법을 통해 통풍과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되는 곳은 오늘도 쾌적했다.

고서적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향수를 자극했다.

아주 어렸을 적엔 그 ‘문제의 책’을 찾으려 이 서가를 미친 듯이 떠돌아다녔었지…….

“역시나 오늘도 없군.”

문득, 조용한 걸음에 맞춰 책들을 훑어내리던 손가락을 멈칫했다.

때마침 검지가 머무른 책장엔 폭주한 마법사들의 이름을 모아 놓은 명부가 연도별로 꽂혀 있었다.

세실리아는 시계를 흘끔 확인하고는 명부를 뽑아 들었다.

이레나 카터. 프랑수와즈 세르뇽. 지르마 그레이엄. 헬레나 필스워드. 유리엔 클리터. 자크지센 에방스. 타라 셉투어리. 피네카 켄트-밀리건.

잠깐.

명단을 다시 스르륵 훑었다.

분명 여기엔 ‘카밀 베르뉴’라는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텐데?

제국의 세 살배기도 알고 있을 거라는 그 ‘공포의 대명사’가 명단에 없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 없지? 다른 곳에 있나?

그녀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재촉하며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카밀 베르뉴’에 대한 정보를 찾느라─묘하게도 끝내 찾지 못했다─ 하마터면 다음 일정을 놓칠 뻔했다.

예법을 무시한 채로 달음박질친 덕에, 세실리아는 다행히도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녀 전용의 응접실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사람은 깐깐한 인상의 궁내부관이 아닌 담담한 얼굴의 알렉시스였다.

“돌아왔어, 알렉?”

벌써?

그렇게 생각하던 세실리아는 남동생의 복장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을 가늘게 뜨자, 녀석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음, 누나. 일단 결과론 위험 등급 나왔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알렉시스가 되레 더 당황하며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누나! 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폭주 아니야!”

“……정말?”

“정말! 폭주까진 아니고, 그냥 좀 불안정한 것일 뿐이야. 거기다 임시방편으로 안정화할 방법이 있다고 해서.”

저도 모르는 새 손가락을 괴롭히고 있었나 보다. 알렉시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나서야 깨달았다.

세실리아는 잡혀 버린 손을 내려다보다 느릿느릿 질문했다.

“방법이…… 뭔데?”

“잠깐 여행 좀 떠났다가 돌아올게. 티에리 에스디어 경이랑 함께 가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어디로 가는데? 뭘 해야 하는데? ……말해줄 수 없는 거야? 위험한 건 아니지?”

“아니야. 오히려 간단하다면 매우 간단할걸.”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사하라’ 산맥이었다.

매년 여름마다 마력 폭풍이 불어오는 ‘제국 서부의 등줄기’. 해발 고도 6,748m로 뤼셍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마력 폭풍으로 인해 사람이 거의 살 수 없는 척박한 산이었다.

특히 마법사들이 그 산맥에 접근했다간 방향 감각을 잃어 길치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 폭풍 속에서 100시간 정도 버티고 돌아오면 마력이 일시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지.

폭풍이 마력을 빨아들이며 흐트러뜨린다나…….

어쨌든 간에 ‘사하라 산맥’이란 단어만큼은 세실리아의 앞에서 꺼낼 수 없어, 알렉시스는 퍽 능숙하게 둘러댔다.

“그러니까 괜찮아, 누나.”

“간단한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잖아.”

“정말 괜찮아.”

“하지만.”

알렉시스가 성큼 다가와 세실리아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침의 그 시선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어느새 자라 그녀의 손보다 확연하게 커진 손이 뺨을 감쌌다.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하게.

그보다 더 조심스럽게.

흠칫 놀라긴 했어도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그저 가만히 손의 온기를 느꼈다.

“기다려 줄 거야?”

“언제나.”

소년의 얼굴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말끔하게 거둬졌다.

녀석이 담담히 손을 내렸고, 세실리아는 멀어지는 소매를 무의식적으로 붙들었다.

“데뷔탕트 전에 돌아올게.”

장난스러운 목소리, 그보다 더 확고한 어조.

깨져선 안 될 약속이었다.

* * *

데뷔탕트까지 정확하게 일주일 남았을 때, 알렉시스가 떠났다.

그리고 데뷔탕트 당일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을 줄은 몰랐지.

세실리아는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그녀의 속이 어떻게 헤집어져 있든 간에 데뷔탕트는 완벽하게 시작해서 완벽하게 마무리되어야 했다.

세실리아 뤼셍이 제국의 황녀인 이상, 그녀의 성이 뤼셍인 이상, 데뷔탕트는 단순히 그녀와 가족의 행사가 아닌 제국 전체의 경사였다.

당장 생-뢰크의 상점가를 방문하면 그녀의 얼굴을 본떠 조각한 카메오 브로치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 터였다.

당장 황제인 아르망 뤼셍의 책상에도 상아 브로치가 올려져 있으니 말 다 했지.

“전하, 잠시만요. 머리 좀 기울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렇게?”

“네, 네. ……배고프시죠?”

“응, 약간은.”

황녀의 데뷔탕트는 총 사흘에 걸쳐 치러지는데, 이 사흘 중에서 가장 힘을 주고 만반의 준비를 가해야 하는 것이 첫째 날의 무도회인 ‘프리마 벨’이었다.

그런고로 새벽 일찍부터 준비하느라 세실리아는 아무것도 못 먹고 있었다.

알렉에 대한 걱정으로 허기를 깜박 잊고 있었거늘.

공복을 자각하자,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파졌다.

세실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뱃가죽이 등허리까지 닿을 것만 같은걸.

“참으세요, 전하!”

비에라 백작 부인이 맹수의 눈을 한 채 호령했다. 머리를 빗겨주던 시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전하?”

몰래 갖다주겠다는 걸까?

세실리아는 희망을 품은 채 열심히 머릿속으로 음식 리스트를 작성했다.

“초콜릿 녹아내리는 쿠키, 우유에 찍어 먹고 싶어.”

“그리고요?”

“음, 산딸기 코디얼이랑, 괜찮다면 블루베리 타르트도. 무화과 셔벗이랑…… 아, 코디얼 말고 얼음 동동 띄운 애플 사이다랑…… 폭신한 달걀 샌드위치도 맛있을 것 같아.”

“네, 그럼 그것들 전부 잘 외워두셨다가 사흘 뒤에 드세요.”

콰르릉. 벼락에 맞는 기분이었다.

“……난 속았어. 배신자.”

세실리아는 풀이 죽어 투덜거렸고, 시녀가 작게 키득거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땋기 시작했다.

음식들을 실제로 떠올리기까지 하니 위가 더 요란하게 신음했다.

그녀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의식은 곧장 한 이름만을 끄집어냈다.

‘알렉.’

알렉, 알렉, 알렉.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는, 무사한 건 과연 맞는지 속이 타들어 가게 만드는 그녀의 남동생.

거울 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시녀가 머리칼을 거의 끝까지 땋아가고 있는 상태였다.

반복적인 수작업이기 때문일까, 쳐다보는 것만으로 격했던 감정의 풍랑이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숨을 골랐다.

마법에 관련된 일이니만큼 그녀가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하나는 확실했다.

알렉시스는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그녀의 데뷔탕트에 ‘안전한 상태’로 참석하기 위하여. 데뷔탕트 때까지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괜찮으려나.

‘정말 괜찮은 것 맞지?’

연락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심하게 고생하는 건 아니면 좋겠다…….

다 타버린 걱정은 이제 잿더미로 바뀌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연기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꾹꾹 눌러 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주변에서 술렁이지도 않건만, 끝도 없는 소리를 귓가에 흘려 넣는 기분이었다.

“거의 다 끝나가요, 전하.”

“응.”

“머리 손질 끝내고, 마지막으로 화장만 한 번 더 점검한 뒤에 진짜 진짜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지금까지 다섯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음, 그래도 시계를 보니 이번엔 진짜로 끝내야 할 시간이긴 했다.

세실리아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손 아래에 잡혀 있는 치맛자락은 오묘한 보라색이었다.

황궁 전담 디자이너가 오랜 연구 끝에 겨우 개발한 색채로, 황족의 고귀함을 상징한다고 말해줬었다.

태풍 오기 직전의 하늘이나 비가 많이 내린 뒤의 하늘이 띨 법한 빛깔.

아니, 그보다 비슷한 색은 그 아이의 눈동자 색일 터.

간혹 서늘하고 또 간혹 다정한, 말간 그 눈빛.

“……알렉.”

끝내 참지 못한 그녀가 이름을 입술 밖으로 흘려보낸 순간.

“왜 불러?”

심드렁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 숨은 장난기만은 완전히 감출 수 없어 청량했다.

세실리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머리를 만져주고 있던 시녀 역시 놀랐는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항의하는 대신 마찬가지로 몸을 휙 돌렸다.

꿈이었나 싶었는데…… 진짜.

진짜로 알렉시스 뤼셍이었다.

소년은 반항기를 상징하듯 문가에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입매에 걸린 싱그러운 호선이 시선을 붙들었다.

“알렉!”

“응, 왜 불러?”

알렉시스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채 커다란 부케를 들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어?”

“아니, 연락을. 아니, 아니, 아니. 난 네가 못 올 줄 알고!”

“데뷔탕트 전까지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황자가 안으로 훌쩍 들어서는 모습에 방 안의 시녀들이 서둘러 예를 표했다.

비에라 백작 부인이 얼른 부케를 받아 들었고, 머리 손질을 해주던 시녀가 다가가 보라색 들꽃을 집어 들었다.

요즘의 유행을 살려 생화로 머리를 장식하려는 모양이었다.

“안 믿어준 거야?”

“아니, 아니. 믿었는데, 근데 어…… 투정 부리려는 건 아니고, 그냥 네게서 연락이 없으니까.”

“연락이 잘 안 되는 지역이었어. 급히 움직이기도 했고.”

“다친 곳은? 많이 피곤해? 뭘 못 먹지는 않았지? 괜찮아?”

“완벽하게 괜찮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알렉시스가 그녀의 손을 붙들더니, 손등 위에 짤막하게 입을 맞췄다.

자색 눈동자가 자신과 비슷한 색의 드레스를 가벼이 훑었다.

채 숨기지 못하는 만족감이 입꼬리 근처에서 아른거렸다.

“예뻐.”

“다들 열심히 꾸며준 덕택이지.”

“아니에요, 저희가 뭘 했다고요. 전하께서 워낙 아름다우신 덕분이죠.”

그녀의 머리칼에 꽃을 고정해 주던 시녀가 웃으며 화답했다.

“잠깐 전하, 이쪽을 봐주시겠어요?”

입술 부분을 붓이 짧게 훑고 떨어졌다.

그사이 알렉시스가 자신의 손가락을 붙들고 놀도록 허락하며 세실리아는 시키는 대로 눈을 깜박여주었다.

“……끝났습니다.”

마무리를 선언하는 말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훌쩍이고 있는 유모를 보고는, 종종 뛰어가 안아주었다. 울먹이는 소리가 한 층 커졌다.

“안 돼요, 백작 부인! 울음을 멈추세요! 행여 전하의 화장이…….”

“전하! 늦으시겠어요!”

박수 치던 시녀들이 경악하며 호들갑을 떨어, 세실리아는 황급한 손길을 따라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유모, 울지 마. 다녀올게.”

“네네, 크흡, 끕.”

“잘 다녀오세요, 전하!”

“열일곱 번째 생신 축하드려요!”

세실리아는 정중하게 감사의 예를 표하고는, 그때까지 기다려 주던 알렉시스와 함께 방을 나섰다.

드디어 데뷔탕트였다.

* * *

티에리 에스디어는 유유한 걸음으로 황궁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입구 쪽 검사를 철저히 하는 탓에 아직도 입장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보통 때의 퐁레프라면 황족들을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수 없도록 결계가 쳐져 있었겠지만, 지금 시기가 황녀의 데뷔탕트인 만큼─아마 다양한 볼거리를 위해서라도─결계를 푼 모양이었다.

그러니 보안이 철저해질 수밖에.

가까이 다가온 시종이 건네준 딸기 샴페인을 받아 들었다.

저 멀리 창문가에선 기자 두엇과 귀부인 한 명이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벌써 열일곱이시라니.”

“그러게요, 그분께서 갑자기 등장하신 게 어제 같은데.”

세실리아 뤼셍은 황가에 열 살 때 입양되었다. 그것도 기억을 전부 잃은 상태로.

처음엔 흑발을 지니고 있더라도 방계를 어떻게 입양하냐며 반대하던 제국은, 기억을 잃은─그것도 너무나 예쁜─소녀를 보고서 서서히 침묵했다.

불행 서사는 강력하다.

불행한 처지에서 갑작스러운 행운을 받고 날아오르는 성장 서사는 더욱 강력하고.

세실리아 뤼셍은 그런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진짜 직계인 알렉시스 뤼셍마저 제치며 사랑받았다.

“그래도 오누이의 우애가 깊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황자 전하께서 성격이…….”

“부인.”

“제가 실언했군요.”

황자의 성격에 대한 악소문이 퍼질수록 황녀는 인기를 얻을 수밖에.

티에리는 말없이 샴페인을 홀짝였다.

사히라 산맥으로 떠나면서 그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다.

안 그래도 까칠한 데다가 안하무인이라는 황자가 노숙을 견딜 수 있을까, 그 화풀이를 다 받아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걱정이었다.

그들이 숲속에 도착한 건 별마저 가려진 어두운 밤이었다.

티에리의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자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1차 경악이었다─열매를 한 아름 따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바닥에 있는 나뭇잎을 긁어모아─2차 경악이었다─불을 붙였다.

적당히 커진 모닥불에 열매를 휙 집어넣자, 매캐한 연기가 용솟음치듯 솟아올랐다.

‘가까이 와, 티에리 경. 아. 이름 함부로 불러서 미안.’

‘편히 부르십시오. 그리고 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러…….’

‘여기까지 올 사람 없어, 정신머리 똑바로 박혔다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인 모르게 그는 미적거렸고, 황자는 그의 주저에 화내는 대신 흐릿하게 웃었다.

탁탁 불똥을 튀기며 타오르는 모닥불 뒤에서 소년의 미소는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떠나가는 봄이었다.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청춘의 찰나를 박제한 호선.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스러지는 순수를 빚은 웃음.

‘경, 경은 수백 명의 사람은 이겨낼 수 있겠지만 수백 마리의 모기는 못 이겨.’

‘…….’

‘살아 있는 혈액 주머니 되지 말고 그냥 가까이 와.’

노숙에 익숙하다 못해 숲 생활에 익숙해 보였었지.

마법사시면서도 사하라에서 길도 참 잘 찾으셨고.

티에리가 턱을 긁적이며 더 깊이 회상하려던 때, 시종장이 커다랗게 호령했다.

“불새의 축복 아래 영원토록 고귀하실 팔레티나의 직계, 마탑의 수호자이자 뤼셍의 태양이신 두 분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제야 기사는 과거에서 깨어나 사람이 꽉 차 있는 무도회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묵직하게 깔린 적막 속에서 계단 위의 문이 열렸다.

흑발의 황제와 적발의 황후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 주변을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고, 제국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낭만적인 열애 끝에 결혼하여 변함없는 금실을 자랑하는 부부는 제국의 자랑이었다.

그들의 허락 아래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황제 부처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

“불새의 축복 아래 제국의 귀보인 두 분 전하께서 드십니다!”

두 번째 호령이었다.

그렇게 무도회의 주인공은, 남동생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한 송이 제비꽃이 하늘을 향해 개화하는 자태로.

황녀가 무릎을 깊게 숙여 인사하는 것과 동시에 로렌시아 왈츠 2번이 울려 퍼졌다.

둘이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감상은 거의 다 비슷하지 않았으려나.

‘그림처럼 잘 어울리네.’

티에리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다 흠칫했다.

황자가 누이를 위해서 일부러 제 평판을 망치는 것 아니냐는 등신 같은 생각이 일어서.

설마.

설마, 그럴 리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반짝이는 금빛 눈을 들여다보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눈꺼풀이 묵직할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 피로를 잊게 만들 만한 광채였다.

누이의 입매에 그려진 미소가 마냥 고왔다. 보조개까지 한껏 파일 정도로 호선이 깊게 휘어져 있다.

‘……걱정했던 동생이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하는 것일 뿐이겠지.’

알렉시스는 착각하지 않으며,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영원하면 좋을 순간들은 끝내 스러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역시나 왈츠의 선율은 끝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발이 천천히 멈추었고, 그는 느릿느릿 손을 놓아줘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금방이었다.

세실리아가 인파에 겹겹이 둘러싸인 채로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동안, 알렉시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테라스로 향했다.

어차피 아무도 그를 찾진 않을 터였다. 마력이 안정되지 못한 황자에게 감히 다가올 만큼 간 큰 놈이 있을 리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념도 털어내고 열기도 식힐 겸, 알렉시스는 크라바트를 풀며 바람을 향해 나아갔다.

어둠에 깊게 잠긴 퐁레프의 정원이 난간 너머로 펼쳐지고 있었다.

여름밤 특유의 정경은 향긋하고도 평화로웠으며, 온 세상을 덮은 적막은 위태로울 정도로 두터웠다.

‘테라스의 커튼에 방음 마법이 걸려 있군.’

묵직한 눈꺼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 알렉시스는 슬슬 위태로움을 인지했다.

시끄러운 연회장으로 돌아갈까 고민한 순간, 올빼미 하나가 난간에 내려앉곤 그를 똑바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러운 푸른색 눈동자가 그를 꿰뚫을 듯 살기를 품고 번득였다.

망자의 통곡을 연상시키는 음산한 시선에 잠이 달아날 수밖에.

알렉시스는 가만히 혀를 찼다.

“눈 깔아라.”

새가 형형하게 째려보든 말든, 소년은 평온하게 크라바트를 마저 풀었다.

‘어쩔까…….’

세실리아 뤼셍의 데뷔탕트 무도회는 이제 시작했다.

시야 한구석으로 황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여자는 아릴 정도로 반짝였다.

알렉시스는 풀어헤친 크라바트에서 느릿느릿 손을 뗐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랑받고 있지.

마음 한구석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동시에 저 눈부심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초조했다.

사금이 모래알 사이로 스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자신이 맥없이 놓쳐버릴 정도로 아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득문득 너무 절박해져서.

푸드득.

갑작스러운 소음에 돌아보니 올빼미가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요란하게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저 새, 그냥 관심이 고픈 게 아닐까.’

소년은 짧게 탄식하며 손을 휘저었다.

“살려줄 때 꺼져.”

지금은 딱히 상대해 주고 싶지 않으니.

다시 푸드득 파닥파닥 꼬끼오……는 아니구나. 닭이 아니니까.

알렉시스는 새를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처리했다는 소문 자체가 안 날지 고민했고, 새는 더욱 신명 나게 날갯짓을 했다.

“네가 누구인…….”

“전하?”

“…….”

“아, 역시 여기 계셨네요.”

블랑슈가 콩콩 뛰어 들어왔다.

무도회를 위해 꾸민 건지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는 대신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모습이었다.

물론 알렉시스는 블랑슈가 머리를 태워 먹든 아예 삭발하든 신경 쓰지 않는 성정이었으며, 잘 차려입은 친구를 향해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리고 블랑슈 역시 저 빌어먹게도 성격 더러운 황자 새끼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저 잠시 여기 있어도 될까요?”

“싫은데.”

“저는 좋아요. 전하 곁에 있으면 사람들이 안 다가온단 말이죠.”

그녀가 마법사인 만큼 그녀에게도 다가오려는 사람이 없었지만, 소녀는 일단 비꼬고 보았다.

알렉시스는 얄밉게 종알거리는 친구를 지그시 바라보다 불쑥 손을 뻗었다.

목 뒷부분을 잡고 답싹 들어 올리는 손길에 블랑슈가 항의 섞어 바동거렸다.

“아, 뭔데요! 뭔 개 취급이야!”

웬일로 개 취급인 건 알고 있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블랑슈가 히에에엑─ 요란하게 숨을 들이켰다. 새파란 올빼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모양이었다.

“저, 저, 저, 저게 뭐예요?”

“올빼미긴 올빼미인데, 나도 몰라.”

“구우실 거예요?”

“아직은.”

알렉시스가 대강 손을 펼쳐 놓아주자, 블랑슈가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새를 구경하다 말고 악우를 휙 돌아보았다.

“저거 손가락으로 찔러봐도 될까요?”

“……넌 진짜 겁대가리가 없구나?”

찌르지 말라는 소리였다.

소녀가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올빼미 쪽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 이번엔 새가 기기긱 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난간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상태로, 블랑슈는 어정쩡하게 몸을 튼 상태로 그 기괴한 곡예를 구경했다.

계속 돌아가던 목은 270도 정도 꺾이고 나서야 멈췄다.

섬뜩한 푸른색 눈이 이상한 각도에서 쳐다보니 없던 웃음기마저 바닥날 수밖에.

“블랑슈 휴스턴, 진짜 저걸 찔러보고 싶냐?”

“음,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알면 됐다……. 야.”

마지막은 올빼미를 향한 부름이었다.

그것을 알아들은 건지, 새가 이상하게 비틀었던 고개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올빼미의 눈은 보통 주홍색, 회색, 검은색, 노란색이다.

한데 지금은 푸른색이지.

그래, 마치…… 듀블렌 숲의 곰처럼.

이 사실이 의미하는 걸 눈치 못 챌 리가.

그는 새에게, 정확히는 새 너머에 있을 누군가에게 느릿느릿 경고했다.

“내가 여기 있는 한 마탑은 퐁레프를 예의주시하거든.”

내가 언제 폭주할지 몰라서, 행여 폭주하면 냉큼 잡아가야 하니까.

제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선선한 바람 속에서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알렉시스는 평온하게 턱을 괴었다.

“꼬리 밟히기 싫으면 지금 튀지 그래?”

태연한 보랏빛과 광기의 푸른빛이 서로를 집어삼킬 듯 부딪쳤다.

대치가 마냥 지루하다는 듯, 황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난간을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 톡. 톡. 톡.

네 번째 소리에 올빼미는 푸드덕 소리만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 * *

“시씨 선배! 시엘샤 선배!”

무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한 부름이다.

작은 체구의 여자는 이를 갈며 멈춰 섰다.

도대체 쉴 시간도 안 주냐, 빌어먹을 몽테-페르트! 내가 바로 어제 돌아온 건 알고 있냐고!

부려 먹으려거든 휴식을 주면서 부려 먹어야……!

“카밀 베르뉴의 흔적입니다!”

“뭐!”

그녀는 바로 그 자리서 펄쩍 뛰었다.

몇십 년간 흔적 하나 남기지 않으며 도망치던 놈이 나타났다고?

“어딘데! 어디야, 야! 당장 말해!”

“뭐라고, 카밀 베르뉴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복도 방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하나같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척단의 마법사.’

광기에 폭주한 마법사들을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몽테-페르트 마탑 소속의 집단.

그리고 카밀 베르뉴는, 바로 이 ‘척단의 마법사’에 속한 모든 이의 공통된 원한 대상이자 목표물이었다.

“다 나와봐! 그 개자식 나타났대!”

“뭐? 어디? 어딘데? 야, 불어! 빨리!”

그러니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날뛸 수밖에.

시엘샤 듀페르를 중심으로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번쩍거리는 시선 속에서, 소식을 가장 처음으로 들고 온 마법사가 최대한 큰 목소리로 보고했다.

“뤼셍의 퐁레프 황궁입니다!”

* * *

데뷔탕트 이튿날의 일정은 바로 ‘로제네츠’였다.

‘로제네츠’.

황녀가 때마침 수도에 머무르는 귀족 영애들과 만나,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다과회를 일컫는 말.

황녀의 데뷔탕트를 축하하기 위해 전국의 귀족 영애가 생-뢰크로 모여든 만큼, 이번 로제네츠는 굉장히 성대할 수밖에 없었다.

……뭐, 요약하자면 이튿날도 첫째 날처럼 무사히 잘 흘러갔다.

유일한 부작용은 하도 웃어주느라 저녁 무렵엔 입꼬리가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다는 것이었을 뿐.

그리고 이제 드디어.

‘마지막 날!’

셋째 날 아침, 세실리아는 침대에 뻗은 상태 그대로 눈만 열심히 깜박였다. 이제 내일이면 음식 리스트를 하나씩 파헤칠 수 있었다.

‘알렉 꼬드겨서 같이 해치워야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침이 고이기 직전, 그녀는 얼른 생각을 틀었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아마떼.’

생-뢰크의 시내로 나가 시민들의 축복을 받는 행사.

아마떼는 보통 두 방식 중 하나로 치러졌다.

하나는 황녀가 직접 말을 탄 채 시내를 순회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조각배를 탄 채 하벨 강을 도는 것이었다.

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는 오롯이 생-뢰크 시민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이번 투표는 꽤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뱃놀이로 나왔답니다.”

유모의 말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타야 하는구나.’

조각배에 총 셋이 탈 수 있으니 알렉시스랑 블랑슈랑 같이 타면 되겠군.

하지만 연락을 받자마자 신나게 달려온 블랑슈와는 달리, 알렉시스는 아예 퐁레프에 없었다. 전날 향한 리베 아카데미에서 아직도 안 돌아온 모양이었다.

“알렉, 무슨 문제는 없겠지?”

그 사실에 세실리아는 우중충해졌고…….

“그럼요. 정오 전엔 돌아온다니 사지는 멀쩡하겠죠.”

블랑슈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일정을 늦출 순 없는 노릇이라, 세실리아는 결국 알렉시스 없이 출발해야 했다.

하벨 강의 뱃놀이가 시작되는 곳은 아제뷰 나루터였다.

나루터가 보이는 길목의 초입에서 내린 세실리아는, 시민들이 뿌려주는 꽃비 속에서 블랑슈와 함께 배까지 걸어갔다.

잔뜩 신난 블랑슈가 먼저 배 위로 폴짝 올라탔다.

세실리아가 드레스를 천천히 갈무리하며 뒤이어 올라타자, 마법 장치가 설치된 배가 돌돌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 좋다아!”

“그러게. 좋은 아침이구나.”

여름 햇볕이 블랑슈의 갈색 머리칼 위에 왕관처럼 드리웠다. 세실리아는 가만히 그 예쁜 모습을 구경하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얼른 시선을 돌려 손을 팔랑팔랑 흔들자, 강둑의 시민들이 열렬하게 화답했다.

세실리아는 가끔 성실하게 손 키스까지 흩뿌려가며 열심히 인사해 주었다.

생-뢰크를 1/4 정도 돌았을까.

노곤함을 이기지 못한 블랑슈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순간.

“꺄아아악!”

보트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면서 거칠게 강을 휘저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블랑슈의 외마디 비명 속에서 세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알렉!”

그때 알렉시스가 보트 옆편의 강물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블랑슈가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든 말든, 소년은 유유히 배에 올라탔다.

반투명하게 변한 와이셔츠 사이로 근육질의 몸매가 내비친다.

알렉시스가 얼굴의 물기를 대충 훔치더니 크라바트를 끌렀고, 그 움직임에 따라 보트의 바닥에 동그란 무늬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세실리아는 동생의 검은 머리칼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젖은 채로 돌아다니면 감기 걸리기 십상인데!’

블랑슈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언니랑 단둘이 데이트를 즐겨볼까 했더니.”

“그러는 주제에 졸고 앉아 있냐? 넌 실격이야. 내려.”

“아악! 어제 로제네츠 내내 긴장했다고요! 피곤했어!”

“내 알 바인가?”

알렉시스는 심드렁하게 받아치며 저 연갈색 망아지를 강물로 던져 버릴까 고민했다.

물론 세실리아의 엄격한 눈길에 시도는커녕 얌전히 착석해야 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보인 건 세실리아의 새하얀 옆태였다.

곱게 땋아 반쯤 올린 머리칼 사이로 6월의 장미가 예쁘게 꽂혀 있었으며, 귀에서부터 쇄골까지 이어지는 우아한 목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저도 모르게 더듬던 알렉시스는 블랑슈의 연두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득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쩌라고…….’

세실리아를 사이에 두고 파드득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명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한 명은 이를 바득바득 간다.

“진짜, 전하는 아시는 게 뭐예요?”

“너에 대한 거라면 아는 걸 거부할게.”

“전하를 죽이고 천국에 갈까 고민 중이에요.”

“사람 죽이고 나서 천국에 가고 싶대. 세상에, 넌 예나 지금이나 양심이 없어.”

“전하는 빌어먹을, 예의가 없잖아요! 이게 숙녀를 대하는 예의인가요?”

“누가 숙녀지?”

블랑슈가 크와아앙─ 요란하게 소리 내며 바동거렸다.

조각배가 출렁이자 강의 수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해, 세실리아는 잠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알렉시스가 제 젖은 머리칼을 쓸며 쏘아붙였다.

“무엇보다 넌 양심이든 예의든 둘 다 없잖아. 저런, 어떡하지?”

“한 판 하자는 거죠?”

“지금 누나 데뷔탕트거든? 정신 차리자?”

“아악, 그럼 속 좀 그만 긁으라고, 이 망할…….”

“거기까지.”

세실리아는 턱을 괸 채, 두 아이를 전부 외면하며 꿋꿋하게 선언했다.

“배 뒤집히면 둘 다 꿀밤이야.”

“…….”

“…….”

“그래, 착하네.”

두 아이의 조용해진 모습에 세실리아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산들바람을 따라 여름의 짙푸른 향이 주변을 휘돌았다.

인적이 통제된 곳을 지나치는 건지, 강둑에선 띄엄띄엄 선 황궁 소속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저 멀리 쾌청한 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인 파스텔 색채의 집들이 보였다.

어느 집 앞마당에선 강아지가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고, 또 다른 집 정원에선 할머니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생-뢰크였다.

평화롭고도 다정한, 온유한 햇살의 도시.

“좋네.”

작게 뇌까렸다.

황녀의 데뷔탕트 마지막 행사로 왜 아마떼를 해주는지 알겠는걸.

어느새 집이 모여 있는 마을이 사라졌고, 버드나무가 양옆으로 아름드리 펼쳐져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채롭게 반짝이는 녹음을 감상하며 세실리아는 가볍게 발을 파닥였다.

구두 굽으로 톡톡 강의 수면을 두드리자, 동심원이 퍼져나가다 강둑에 부딪혀 스러졌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품 안으로 한 아름 쏟아져 내렸다.

아직 만연한 여름이 아니어선지, 볕은 폭력적인 뜨거움보단 풋풋한 안온함을 간직한 채 바람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황녀 전하!”

“생신 축하드려요!”

“어른 되신 거 축하해요!”

그리고 다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풀어진 표정을 갈무리하고선 재빠르게 황녀의 미소를 장착했다.

알렉시스와 블랑슈 역시 손을 흔들기 시작했고, 셋은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유유히 뱃놀이를 즐겼다.

아제뷰 나루터로 되돌아올 때까지 뱃놀이는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마냥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전부 예상하지 못했다. 거대한 올빼미가 날아와 사냥이라도 하듯 황녀를 낚아챌 줄은.

* * *

소중한 이를 눈앞에서 뺏긴 소년은 망설이지 않았다.

제 이면에 감춰진 잔악함을 내비치며 폭력을 행사했을 뿐.

황자의 마법이 그대로 폭사하며 흉수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꺄아아악─!”

자유로워진 세실리아는 하늘에서 떨어지며 비명을 내질렀고, 사슬이었던 보랏빛 마력이 재빠르게 형체를 바꾸더니 폭신한 꽃잎이 되어 그녀를 감쌌다.

천공에 어여쁜 꽃들이 흐드러졌다. 장미처럼 화려한 겹잎을 가지고 동백처럼 수려한 자태를 지닌 꽃들이.

그렇게 생-뢰크의 하늘에 피어난 무수한 꽃들은 하늘하늘 송이째 떨어지며 황홀한 장관을 자아냈다.

찬란한 기적이라 표현할 수밖에.

그리하여 사람들은,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전하!”

블랑슈만이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주변에 마력으로 된 방어벽을 둘렀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늦었다.

세실리아를 눈앞에서 놓칠 뻔했던 두려움 때문인지, 실제로 곁에서 한번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황자는 그대로 폭주해 버렸다.

“……망할 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그 뒤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안타깝게 쳐다보던 블랑슈도, 무사히 땅에 안착한 세실리아도, 상황을 알아채고 달려오던 황제 부처와 때마침 생-뢰크에 도착했던 척단의 마법사들도 정확하겐 모르리라.

어쩌면 그나마 상황을 똑똑하게 인지해야 하는 알렉시스 뤼셍 역시.

소년에게서 솟구친 보랏빛 마력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괴이한 형체를 만들어가는 마력은 블랑슈의 방어벽에 부딪혀 방향을 틀긴 했어도, 지켜보던 이들은 황자가 폭주한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폭주했어, 전하께서!”

“황자 전하! 전하!”

반은 풀썩, 자리에 주저앉고 또 반은 어떻게든 사정권 밖으로 도망치려 힘이 풀린 다리를 끌고 우왕좌왕 뛰어갔다.

연갈색 머리 소녀가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할 터였다.

생-뢰크 전체가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부디. 부디…….

“전하─!”

비명을 내지르던 블랑슈는 흑발이 물결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반쯤 땋아 올린 머리칼에 꽂혀 있던 장미들이 꽃비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잔뜩 짓이겨져, 마치 핏방울처럼…….

“알렉.”

세실리아는 난폭하게 휘몰아치는 마력을 뚫고 알렉시스에게 다가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 상태 그대로 이름을 속삭였다.

“알렉.”

휘청거리는 그 몸을 단단하게 붙들며 소년의 얼굴을 그녀의 품 안으로 파묻었다.

넋이 나가 있던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서릴 때까지, 그렇게 계속…….

“알렉.”

“…….”

“알렉.”

이름을 되뇌었을 뿐.

마력이 차차 가라앉고, 멍해졌던 눈동자에 초점이 다시 서린 순간.

“다행이다.”

세실리아는 예쁘게 웃고 기절했다.

* * *

“카밀 베르뉴가 한 짓입니다.”

뒤늦게 합류한 척단의 마법사들이 내뱉은 이름에 아르망과 마리사는 이마를 짚었다.

반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고, 반은 진심으로 속이 문드러졌기 때문에.

“하.”

조소를 내뱉은 건 폭주했다가 도로 정신을 되찾은 기적을 선보인 소년이었다.

황자는 벽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로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눈동자에 가득한 짜증이 주변을 짓누른다.

“어째 짜증 난다 했었지.”

“……음, 그와 별개로, 전하.”

시엘샤 듀페르는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냈다.

대강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이번엔 목을 젖혀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목울대가 도드라지며 약점을 드러냈건만, 위태롭긴커녕 한없이 강인해 보였다.

‘뤼셍의 다음 태양이라니 제국의 미래가 밝긴 하네…….’

그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한담.

시엘샤가 조심조심 단어를 고르기도 무색하게 황자의 입술이 열리며 짤막한 단어를 내뱉었다.

“갈게.”

“알렉!”

“알렉!”

황제 부처가 나란히 일어서며 항의한다. 그들이 더 외치려는 것을 알렉시스는 손을 휘저어 막아냈다.

“오늘 아침, 율리케가 그러더군요. 이제 슬슬 벅찰 것이라고.”

“……하지만, 알렉. 차라리 각인을 빠르게 하는 건…….”

“그걸 위해서라도.”

아들의 단호한 목소리에 마리사가 처참한 표정이 되어 무너졌다.

고작 열둘이었다.

얼마나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든 간에 저 아이, 그녀의 아들은 고작 열두 살이었다.

“어차피 제가 폭주하는 걸 생-뢰크 시민들은 똑똑히 보았으니,”

“그렇게까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대응책을 요구할 건 사실입니다.”

이번엔 아르망이 입을 열었지만, 알렉시스가 받아친 말에 펜을 꾹 움켜쥐어야만 했다.

안 그래도 소문이 좋지 않은 아들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 녀석이 제 평판 깎아 먹을 때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는데.

속 터질 정도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폭주까지 벌였는데도 그냥 둔다면, 생-뢰크의 시민들은 분명 질타하리라.

장기적으로 알렉시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도 문제가 생길 터였다.

“마탑으로 가는 게 답입니다.”

소년의 음성만이 담담히 울려 퍼졌다.

* * *

“흑발, 하, 좋아, 하시네.”

흑발을 지녀 황녀로 입적했다고? 개소리.

그 아이의 머리칼은 은발이다.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달빛처럼, 찬란한.

강력한 마력을 정통으로 맞아선지 온몸이 엉망이었다. 주저앉은 채 피를 토하며, 새파란 눈의 남자는 거칠게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애새끼…….”

일단, 회복이 우선이었다.

* * *

세실리아가 눈을 다시 떴을 땐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여 붉은색 노을빛이 천장을 간지럽히는 걸 감상했다.

손을 들어 올리자, 희고 곧은 손가락 끝에 다홍빛이 너울거렸다.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알렉시스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고 손등과 손바닥이 맞닿았다. 솜처럼 보드랍게 그녀의 손을 덮은 손은 유난히 따스했다.

“알렉.”

소년이 살짝 입술을 달싹인다. 어둠을 많이 먹은 주홍색 빛 속에서 동생의 주저가 뚜렷하여, 세실리아는 엷게 웃었다.

“괜찮아?”

“응. 누나 덕분에.”

“다행이다.”

“다신 그러지 마.”

“내가 안 그럴까?”

그 말에 알렉시스가 졌다는 듯 새초롬히 입을 다물었다.

세실리아는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 자리를 만든 뒤, 얼른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소년이 짓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무시하며 뻔뻔하게 종용했다.

알렉시스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와이셔츠 윗단추 두 개를 마저 잠그고선 침대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녀석이 손을 뻗어 규칙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 우리 정원에서 산책할까?”

“너 지금 침대서 내려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응.”

“쳇. 세레인 정원?”

“응, 세레인.”

정원으로 나서자, 일렁이는 붉은빛이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태양이 세상에게 끝을 고하는 작별의 시간.

유난히 샛붉은 사양은 고결한 영혼이 세상을 떠나는 상징이라고 했었나.

“누나.”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알렉시스의 입매에 황혼 한 결을 베어낸 듯한 어스름이 배어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 생일 선물 줄게.”

“어머, 그러게. 너 지금껏 내게 안 줬네. 내놔.”

장난스럽게 요구하자 알렉시스가 피식 웃으며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세실리아의 시치미를 뚝 뗀 표정에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소년이 짤막하게 휘파람을 불었고,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솔길 위로 새하얀 형체가 등장했다.

……음. 강아지?

“컹─!”

경쾌하게 짖는 소리를 보니 그녀의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도도도 달려온 새하얀 형체가 알렉시스를 향해 달려들어 가차 없이 깔아뭉갰다.

까슬한 혀가 얼굴을 마구 핥는 것에 소년이 강아지를 떼어내려 바동거렸다.

“야, 네 주인은 이쪽이라니까.”

“컹!”

“인사해, 누나. 얜 알리샤야. 자, 알리샤? 말 잘 들어야 해.”

세실리아는 강아지에게로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거대 사모예드 종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털이 유난히 새하얗고 복슬복슬했다.

촉촉한 검은색 코와 할딱거리는 분홍색 혀가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강아지가 두어 번 짖었다.

새까만 눈동자에서 경계심이 녹아내리더니, 녀석이 손을 핥으며 친근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어머, 귀여워라.”

“이름이 알리샤야. 알았지?”

알렉시스가 다시 강조하자, 강아지가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는 듯 컹컹─ 요란하게 짖었다.

세실리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풀썩 옆에 앉았다.

“잘 부탁해, 알리샤.”

악수하듯 새하얀 발을 잡고 흔들었다.

알리샤가 화답하듯 힘차게 꼬리를 붕붕 흔들었을 때, 알렉시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둘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누나.”

갑작스러운 부름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았다.

“나 이제 마탑으로 가. 거기서 7년 정도 있어야 해.”

“……뭐?”

경악스러움에 두 눈을 부릅떴다. 온몸에 힘이 빠져 휘청거릴 뻔했다. 만약 서 있었더라면 그대로 무너졌을 정도로 충격적이라,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7년 뒤엔 돌아올 거야. 마력이 조금 많이 증가해서, 리베 아카데미가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하더라고.”

알렉시스는 정말이지, 얄미울 만큼 평온했다.

그녀 혼자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가 입술을 달싹였을 뿐.

지나치게 놀란 탓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만이 이명처럼 울려 퍼지는, 그런…….

알렉.

“하, 하지만. 그, 어. 그.”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어, 그, 그렇지만…….”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해, 어물어물 이름만 불렀다.

“알렉?”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노을 사위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짙은 침묵만이 내려앉는다. 어둠 속에서도 소년의 붉은 입술이 그리는 호선만은 뚜렷했다.

그 미소가 지독하게 아릿하면서도 목말라 보여, 세실리아는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이상했다.

분명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동생이었거늘, 왜 지금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지.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주저했다.

그녀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새하얀 강아지만이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누님.”

이상했다.

정말로. 단순히 호칭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실리아는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망연하게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려 주실 겁니까?”

데뷔탕트 전 떠났을 때와 동일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어째 이번엔 재빠르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주저를 본 소년의 미소가 오묘하게 짙어졌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웃음.

입 안이 바싹 마른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귀 뒤에 자리한 여린 살이 유난히 화끈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오래오래 침묵하는 동안, 알렉시스는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침의 그때와 같은 기분인걸.

세실리아는 한없이 혼란스러운 그 기분을 곱씹어보다, 겨우 대답을 끄집어냈다.

“……응, 기다릴 거야.”

“…….”

“당연히.”

아. 망설임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길고도 짧을 7년 뒤에 재회할 땐, 어떤 모습이든 이 관계가 달라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일 터.

아무래도 그렇겠지. 알렉시스가 지닌 ‘소년’의 모습을 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터.

손을 뻗자, 그가 자연스레 맞잡아주었다.

평상시 같은 다정함에 요란한 심장이 차츰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래.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시절이 끝나는 건 사실이지만, 7년 뒤 우리가 함께할 시간 역시도 예쁘겠지.

분명 그럴 거야. 아릴 만큼 아름다울 테니까…….

세실리아는 숨 막힐 듯이 밀려오던 위화감을 털어냈다.

최대한 환하게, 가장 예쁘게 미소하며 불안 속의 약조를 건네었다.

“진짜야. 언제고 기다릴 거야, 알렉.”

영혼이 내려앉는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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