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과거사 3(完)
사람이 몰린 포룸 광장은 제법 북적이고 있었다. 지도를 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길을 조금 헤맸는지 목적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기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초조함에 선혜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는데 어느 한 곳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노랗게 물든 천막도 언뜻 보였다.
저기다.
선혜의 눈이 이채를 띠고 반짝거렸다.
선혜는 사람들을 헤치고 카페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심장이 뛰었다. 시야에 노란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커튼처럼 선혜의 눈앞에 있던 사람 두엇이 양옆으로 사라지고 카페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소음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시야를 지배하는 노란 불빛. 카페 앞에 놓인 ‘밤의 카페 테라스’ 그림. 그 그림의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충동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이 광경을 보러 여기까지 온 것 치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따듯한 노란 불빛이 위로하듯 선혜를 어루만졌다. 노란 불빛이, 꼭 희망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팔려가듯 무뢰한과 결혼하게 될 미래, 무서운 경험을 하고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들어간 집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외면, 새어머니와 고은의 비아냥. 저항할 수 없어 겨우 이곳으로 도망친 자신.
맞닥뜨린 현실에서 희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모두 물에 녹듯 사라졌다.
선혜는 눈 깜박하는 순간마저도 아쉽다는 듯이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까만 눈동자에 노란빛이 스미고 번져들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붙들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기에 선혜는 내버려두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곳에서는 실컷 울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때였다.
툭. 투둑.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혜는 비를 피하지도 않고 카페의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새 그쳤나 싶었지만 눈앞에는 비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멍하니, 그렇게 내리는 비에 젖어드는 광경을 눈에 담는데 어깨 위로 점퍼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온기와 함께 체향이 피어올랐다. 한번 맡았을 뿐인데 익숙하기만 한 시원한 체향이.
가슴이 뛰었다. 저절로.
“나 참 모른 척을 하려고 해도.”
눈앞에 태준이 있었다.
*
외국인 할아버지가 가리킨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으나, 선혜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혜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날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낭만적인 풍경으로 주위가 물들어갔지만 태준은 거기에 신경 쓰지 못했다.
무릎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심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통증이 찾아왔다는 건 곧 비가 온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오늘 기상 예보에도 비가 온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아까 본 선혜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지 않았다. 들고 있던 가방은 우산이 들어가기엔 턱없이 작은 크기였고.
걱정이 되는 가운데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준은 야속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우산을 펼쳤다.
‘우산들 때문에 더 안 보이면 어떡하지.’
태준은 입술을 짓씹으며 아까보다 더욱 초조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우산을 쓰거나, 우산이 없어 머리를 손이나 가방으로 가리고 뛰는 사람들 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서서.
비를 맞고 있는 처연한 그 모습은.
마음 아프게도, 눈에 정말 잘 띄었기 때문에.
그때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모르고 있을 두 사람의 첫 만남. 엉망진창인 몰골로 도로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그 모습이.
우산을 쥔 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그가 선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전처럼 뒤가 아닌 앞으로 다가가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을 적신 게 빗물이 아닌 눈물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눈시울이 붉었으니까.
하지만 눈치채면 민망해할 테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나 참 모른 척을 하려고 해도.”
그래서 반가운 척만 했다.
“한국 간다면서요.”
“…….”
“여기가 한국입니까.”
비가 오는 아를의 포룸 광장.
태준은 그렇게 선혜와 다시 만났다.
*
우산을 한 손에 든 태준이 앞으로 다가와 점퍼 앞섶을 여며 주었다.
“한국 간다면서요.”
“…….”
“여기가 한국입니까.”
조금 화난 것 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선혜는 떨리는 눈으로 앞에 서 있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선혜는 노란 불빛을 등지고 있는 태준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이 남자는 왜 이런 순간에 눈앞에 나타났을까.
괜히, 기대고 싶게.
“나, 따라왔어요?”
선혜가 물었고 태준은 대답했다.
“네.”
망설임 없는 뻔뻔한 대답에 선혜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선혜가 웃었음에도 태준은 웃지 않았다.
이 여자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괜히, 안아주고 싶게.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주고, 품에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달래느라 우산을 잡은 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준은 선혜의 눈물을 모르는 척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나마 저를 보고 웃어서 다행이라고, 태준은 생각했다.
비는 계속하여 쏟아졌다. 인적이 드물어진 광장의 도로 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한 폭의 그림처럼 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비가 오는 바람에 연착된 기차 탓에 둘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니스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니스로 돌아가는 기차 안은 조용했다. 선혜와 태준은 서로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선혜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고 태준은 복도 쪽에 앉아 있어 살짝 엇갈린 위치였다.
선혜는 태준의 점퍼를 여전히 어깨에 걸친 채로 창밖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준은 그런 선혜에게 시선을 계속하여 두고 있었다.
물에 젖은 머리와 화장기가 씻겨 내려간 맑은 얼굴을 눈에 담다가, 창백해진 입술을 본 그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저기, 혜교 씨.”
조심스럽게 선혜의 가짜의 이름을 부른 태준이 물었다.
“춥진 않아요?”
“……괜찮아요. 따듯해요.”
조금 사이를 둔 선혜가 선선한 투로 대답했다. 어두운 창문에 비친 선혜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한국은 언제 돌아가요?”
“몰라요.”
“왜요?”
“…….”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요.”
태준은 선혜가 말이 없자 그렇게 말했다. 선혜에게 줄곧 두고 있던 시선을 앞으로 돌리는 그때였다.
“도망쳐 온 거거든요.”
태준이 선혜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선혜가 말했다.
“나, 도망친 거예요. 여기로.”
도망쳤다는 그 말에 실린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근데 이제는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
“많이, 괜찮아져서.”
그렇게 말한 선혜가 태준을 돌아보았다. 엷은 미소가 입가에 그려져 있었다. 태준이 무어라 말하려는 때였다. 선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스로 돌아가면 밥 한 끼 같이할래요?”
“…….”
“우산 씌워준 거랑 점퍼 빌린 값으로.”
태준은 선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멍하지도 않았고 넋이 나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녀를 동정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 그 시선을 오래 마주하는 게 힘든 쪽은 선혜였다.
“……싫으면 말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때였다. 태준이 선혜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스듬히 엇갈려 있던 전과 다르게 완전히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였다. 선혜의 눈동자가 다시 태준을 향했다.
“싫다고 안 했는데.”
“…….”
“좋아요.”
좋아요. 그 말을 하는 태준의 눈을, 선혜는 피하지 않았다.
“사 주세요. 밥.”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는 니스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
“그래서?”
손으로 만든 꽃받침 위에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니스라는 곳에 돌아가서는 뭐 했는데?”
“니스에서 둘이 같이 술 마시고…….”
말을 잇던 선혜는 순간 멈칫했다. 그 뒷일을 다시 떠올리자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가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손에 느슨하게 턱을 괸 채 나른하게 쳐다보는 그와.
괜히 입이 말라 물을 마시는데 수애가 더 얘기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그다음에는? 술 마시고 그다음은? 왜 말 안 해 줘?”
“아, 그게…….”
선혜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굴리는 때였다. 태준이 손을 뻗어 수애의 머리 위를 지그시 눌렀다. 수애의 눈동자가 태준을 향해 갔다.
태준이 고개 숙여 수애의 눈을 마주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뭐야, 그게!”
수애가 토라진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수애가 귀여운지 태준이 키득거리며 수애의 머리를 헝클이고 작은 실랑이가 부녀 사이에 이어졌다.
덕분에 선혜는 민망한 대답을 할 뻔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안도한 선혜는 화젯거리를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메뉴판에서 디저트 메뉴 쪽을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감탄을 자아낸다.
“와아. 수애야, 이거 봐라. 초코 아이스크림 무지 맛있겠다. 그치?”
“우와. 수애야, 저거 봐. 진짜 맛있겠다.”
태준도 덩달아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수애는 뾰로통한 얼굴로 볼을 부풀릴 뿐이었다. 더했다가는 제대로 삐질 기세였다.
어떡하나 고민하던 선혜는 수애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되, 최대한 아홉 살짜리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수애야, 그러니까 그날 엄마랑 아빠는 서로 한눈에 반해서…….”
“서로? 여보도 나한테 그때 반한 거였어?”
그런데 순간 태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순간 선혜는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린 수애만큼이나 반짝거리는 태준의 눈빛 탓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
한편 수애는 이야기가 끊어지자 답답한 얼굴로 선혜의 옷깃을 잡아 흔들어댔다.
“한눈에 반해서 술 마시고 그다음은? 응? 엄마, 빨리 이야기해 줘-.”
“아니, 그게.”
“진짜? 당신도 그때 나한테 반한 거예요?”
자꾸만 조르는 딸과 남편 사이에서 선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뻘뻘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선혜와 그런 선혜에게 따발총처럼 질문을 해대는 태준과 수애.
수호는 턱을 괸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행복하게 웃고 말았다.
‘여동생.’
엄마 아빠가 결혼하던 날 꿈꾸었던 모습.
그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