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08화 (108/109)
  • #외전 – 과거사 2

    선혜는 쿵쿵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태준은 따라오지 않았다.

    홧김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고 하다가 말았다. 아직 목적지인 아를에 가지 못했기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행 온 첫날부터 아를로 갈걸. 시차 적응 겸 니스에 하루 머무른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선혜는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입 밖으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한국에 돌아가려던 충동적인 마음은 내려놓았다. 내일 여행 스케줄이나 새로 짜야지. 선혜는 침대에 엎드리며 가이드북을 펼쳤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상처받아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던 태준의 얼굴이 떠올라 버린 탓이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결국, 선혜는 가이드북을 내려놓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무 심했나.”

    그래도 낯선 타국에서 저를 위해 선뜻 나서 준 사람인데 너무 매정하게 굴었나 싶었다.

    조금 귀찮게 굴 뿐,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순진하게 빛나던 맑은 연갈색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버려진 강아지 같던 표정도.

    선혜는 머리맡에 있는 베개를 가슴에 끌어안고 입술을 말아 물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남자들 다 똑같지, 뭐.”

    외모 탓에 생긴 그저 호기심 어린 관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것이다. 그러니 그만 생각하자.

    스스로를 달래며 자꾸만 피어오르는 미안한 마음을 애써 모르는 척하는 선혜였다.

    *

    한편 같은 시각. 호텔.

    태준은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아까 일을 곱씹고 있었다.

    ‘퍽이나 잘 지키겠네.’

    “아, 진짜! 그딴 말을 왜 했냐 이 바보, 멍청아!”

    별안간 침대에서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꽥.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그따위로 말하는데 퍽이나 곁을 내 주겠다. 아오…….”

    후회가 막심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없기에, 할 수 있는 건 후회와 반성뿐이었다.

    다시 만나면 그러지 말아야지.

    그런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번호라도 물어볼걸. 왜 다짜고짜 같이 다니겠다고 나서서는…… 나 같아도 수상하겠다.

    점수를 따기는커녕 잃었다. 마이너스다, 마이너스. 다시 만난다고 해도 쳐다는 봐 주려나.

    자꾸만 밀려오는 후회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태준의 입 밖으로 긴 한숨이 새어나가는 때였다.

    지잉. 지잉-.

    주머니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꺼내 보니 형인 태석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 여행은 잘 하고 있냐?

    짤막하게 안부를 묻는 말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잘 하고 있냐고.

    “그냥 그래.”

    - 왜 그냥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긴.”

    여자 때문이라고 하면 분명 길어질 통화였다. 대충 둘러댄 태준은 말을 돌렸다.

    “근데 형은 이 시간에 왜 깨어 있어? 술 마셨어?”

    - 술은 무슨. 원래 후계자는 바쁜 법이야, 인마.

    한국은 현재 새벽 네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타박하는 태석의 말끝에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지는, 짙은 피로감.

    그러다 곧 태석이 누군가를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쪽- 하는 소리도. 조카들을 달래나 싶은데 ‘다녀올게, 사랑해.’ 하는 음성이 달달했다. 아무래도 형수인 지현에게 이른 아침 인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닭살이 돋아 뭐라고 하려다가 태준은 순간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꽤 골똘했다.

    - 여튼 여행 잘 다녀오고. 형은 이만 출근한다.

    “잠깐만, 형.”

    태준이 통화를 마치려는 태석을 황급히 붙들었다.

    - 왜?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 뭔데?

    “형 처음에 형수님이랑 앙숙이었다며. 형수님이 형 엄청 싫어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점수 따게 된 거야?”

    형인 태석과 형수인 지현은 사내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앙숙도 그런 앙숙이 없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결혼까지 했는지 새삼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 뭐?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그냥. 형 닭살 떠는 거 보니까 궁금해지네.”

    - 흠.

    태석은 생각에 잠겼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태준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태석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태석이 입을 열었다.

    - 그냥 지켜보다가 지현이가 필요한 순간마다 힘이 되어줬어. 그러니까 마음을 열던데.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필요한 순간에 힘이 되어준다, 라.

    태석이 한 말을 되새기는 때였다.

    - 근데 아를은 좀 어때? 네 형수가 사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계획은 원래 아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선혜를 우연히 봐 버려서 틀어진 계획이었다.

    태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를 넘어가는 시각. 꽤 긴 기차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 만에 다녀오기는 무리였다.

    “오늘 못 갔어. 내일 가서 보내줄게.”

    - 그래. 알았다. 내일 꼭 사진 보내.

    “알았어.”

    팔불출. 그 말을 애써 삼키고 태준은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도 태준은 계속해서 태석이 한 말을 떠올렸다.

    필요한 순간에 힘이 되어주니까 마음을 열었다고.

    잠깐 희망처럼 들려왔던 말이었는데 다시금 생각해 보니 막막해졌다.

    ‘만나기라도 해야 필요한 순간이 언젠지 알고 나서지…….’

    태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개를 들어 무심결에 던진 시선 끝에는 가이드북이 있었다. 선혜와 같았던.

    태준은 희망이 희미하게 깃든 눈으로 가이드북을 집어들었다. 아를에 대한 가이드가 적힌 부분을 읽으며 속으로 바랐다.

    ‘제발 다시 한번 더 만나게 해 주세요.’

    딱, 한 번만이라도 더.

    간절한 바람을 하는 태준의 두 눈은 어느덧 꼭 감겨 있었다.

    *

    다음날.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

    선혜는 일찍부터 숙소를 나서고 있었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니스의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선혜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듯 아침 일찍 나서는 이유는 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아를에 가기 위함이었다.

    니스에서 아를은 기차로 넉넉히 왕복 6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날씨가 우중충하여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기차가 연착될 가능성이 있어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했다.

    때마침 날은 비가 올 것처럼 흐렸고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벌어두어야 했기에 선혜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선혜는 곧 니스역에 도착하여 안으로 발을 들였다.

    커다란 기차역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혜는 짧게 익힌 불어로 물어물어 표를 끊고 기차 시간을 확인하며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

    입 밖으로 하품이 길게 새어나갔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다. 이유인즉, 여행 일정을 짜는 틈틈이 태준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올라 일정을 짜는 데 걸린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짜 이름을 말한 것에도 죄책감이 몰려와 잠까지 뒤척이고 말았다.

    하여간.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였다. 선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시금 입 밖으로 한숨이 새어나갔다.

    시간이 흐른 뒤, 기차 시간이 다 되어 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걸어가다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저를 힐끔거리는 외국인들만 눈에 들어왔다.

    아쉬움이 들고 나서야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대체 뭘.

    아무래도 사람을 사귀기 쉽지 않은 성격 탓에, 이례적으로 편하게 말을 주고받은 태준과 좋지 않게 헤어진 게 아쉽기는 한 모양이었다.

    남자한테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처음이라 낯설었다. 잘생겼기 때문인 걸까.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곤 했는데 어쩐지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쓴 미소가 지어졌다. 선혜는 고개를 내저어 태준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털어버리고는 기차에 올라탔다.

    *

    아를은 흐린 날과도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날이 더 좋았으면 아름다웠을 테지만 우중충한 분위기와 적절히 어우러져 특유의 운치를 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챙기지 못했는데. 선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간간이 쳐다보곤 했지만 아직 비는 오지 않았고 덕택에 관광은 수월했다.

    아를의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고흐와 관련된 곳이었다.

    그가 자신의 귀를 잘라 들어갔다는 정신병원과 그의 그림 속에 나오는 원형 경기장도 방문했다. 고흐의 그림 속에 나오는 곳을 들를 때마다 고흐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고흐는 어떤 시선으로 이 풍경을 바라보았을까 생각했다. 시야 가득 밀려오는 진풍경에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행복했다는 고흐의 마음을, 선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종 목적지인 ‘밤의 카페 테라스’의 실제 배경지인 ‘르 카페 반고흐’는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그곳만큼은 해가 지고 나서 가고 싶었으니까.

    해 질 무렵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선혜는 발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빈티지한 분위기가 맴도는 골목을 돌아다니며 눈에 담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한국인 현지인이 안내해 준 소박한 맛집에서 끼니도 배부르게 때웠다.

    소매치기를 하려고 간간이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몇 보였으나 돈을 브래지어 컵 안쪽에 숨긴 터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속옷 속에 손을 넣어 돈을 훔쳐가는 이는 없을 테니까.

    소매치기를 제외하고서라도 돌아다니는 중간중간에 외국인 남자들이 말을 걸기도 했다.

    주로 영어로 말을 걸었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을 보고 한국인임을 알아챈 남자들은 서툰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다가오곤 했다. 그리고.

    “Vous etes tres jolie.(당신 참 예쁘시네요.)”

    어제 태준이 했던 말을 속삭이는 남자도 더러 있었다. 물론 선혜는 모두 거절하거나 무시로 일관했다. 다행히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태준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면 끈질기게 굴면서도 불쾌함을 유발하지 않은 남자는 태준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지금 무얼 할까. 선혜는 노을빛을 받아 핑크빛으로 물드는 론강 난간에 기대어 그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얼굴을,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그리고 시원하게 폐부를 가르던 그의 체향을.

    손에 턱을 괴고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뒤늦게 선혜는 주위가 어두워졌음을 알고 정신을 퍼뜩 차렸다. 어느새 끄트머리로 넘어가던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해진 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선혜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르 카페 반고흐'가 있는’ 포룸광장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난간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 옆에 있는 할아버지만 눈에 보일 뿐이다. 선혜는 씁쓸한 얼굴로 몸을 돌려 론강을 등지고 멀어졌다.

    선혜가 막 골목으로 들어서서 모습을 감춘 그때. 난간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던 젊은 남자를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외국인 할아버지가 거칠게 신문을 낚아채 갔다.

    젊은 남자, 태준은 멋쩍은 얼굴로 신문의 주인인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불어로 사과했다. 그러고는 앞을 돌아보았다.

    선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이 커지고 난간에 기대어져 있던 몸이 퍼뜩 떨어졌다. 태준의 눈이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그새 어디 갔어. 태준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그녀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던 외국인 남자들이 떠오르자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였다.

    그런데 그때.

    “Elle est parti là-bas(저 쪽으로 갔어).”

    태준의 옆에 서 있던 외국인 할아버지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더니 검지를 들어 어느 골목을 가리켰다.

    태준이 얼떨떨한 얼굴로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외국인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외국인 할아버지가 금테 안경 너머로 태준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태준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Merci(고마워요).”

    외국인 할아버지에게 짤막하게 인사를 건넨 태준이 서둘러 골목을 향해 멀어졌다.

    뒤에서는 외국인 할아버지가 신문을 든 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고 있었다.

    좋을 때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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