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과거사
니스의 한 식당 안.
선혜는 맞은편에 앉은 태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기 전 들른 공항 서점에서 호감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왔던 남자. 그 남자였다.
우연히 마주친 것도 모자라, 낯선 외국인이 치근덕거리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게 되었다.
‘고마우면, 저 밥 한 끼만 사 주세요.’
그렇게 말해서 어쩌다 같이 밥을 먹으러 오긴 했는데.
이제 겨우 두 번 마주친 남자랑 동석이라니. 그것도 겸상.
‘선순가?’
그런 생각이 들어 빤히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수줍게 웃는다. 한없이 순진하고 무구한 표정이다. 저렇게 웃는 걸 보면 선수 같지는 않은데.
“여기 맛집이에요?”
선혜의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준은 서툴게나마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을 걸고 있었다.
선혜는 반쯤 포기한 얼굴을 했다.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뭐하고. 기왕 온 김에 밥이나 맛있게 먹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뇨. 모르겠네요. 그냥 보여서 들어왔는데.”
태준은 선혜의 심드렁한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미리 알아본 거 아니고요?”
“네.”
“여자들은 막 맛집 찾아다니면서 먹는 거 좋아하지 않나?”
“어딜 가나 다 똑같죠, 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맛집 같은 데 안 가보고 싶어요? 바닷가에 분위기 좋은 데 많던데.”
태준의 질문에 선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슬쩍 눈만 마주쳐도 반응을 보이는 태준은 그 빤한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뻔뻔하게 밥 사달라고 요구할 땐 언제고 쳐다만 봤는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선혜의 눈이 그의 붉어진 귓불에 가 닿았다.
얼굴은 하얀데, 부끄러우면 귀가 붉어지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귀랑 얼굴색이 따로 노는 게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가 자연스럽게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며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뭐 먹을 거예요?”
“음. 그냥 대충 아무거나. 양 많은 걸로요.”
“배 많이 고픈가 봐요?”
“아뇨. 그냥 원래 좀 많이 먹는 편이라.”
선혜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태준이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꺼냈다.
“운동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기초대사량이 좀 높아서 많이 먹는 편이에요.”
“아.”
그래서 몸이……. 선혜의 눈이 그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배 쪽을 훑었다. 티셔츠 한 장으로 가려져 있지만 단단하고 건강해 보이는 몸이었다.
다시 시선을 들어올리자 눈이 마주쳤다. 다시 봐도 참 예쁜 눈동자였다. 사람 눈동자가 어떻게 저렇게 맑고 깨끗한지.
그래서 그런가. 그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를 향한 호기심과 호감. 그리고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 느끼는 쑥스러움까지도.
태준이 선혜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물컵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선혜가 문득 생각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나 따라다녔어요?”
줄곧 느껴지던 시선의 주인공이 이 남자일까 싶어 혹시나 물었는데 웬걸.
“콜록!”
반응이 적나라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다. 정곡을 찔렸는지 사레가 제대로 걸린 태준이었다. 연신 기침을 해 대는 그를 쳐다보는 선혜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 모습을 본 태준이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니거든요?”
태준이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이미 늦었다.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선혜의 눈에 담긴 의심은 더욱 커질 뿐이다. 태준이 눈을 빠르게 깜박이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그게, 따라다니려고 따라다닌 건 아니고요. 그냥…….”
우연히 선혜를 발견하고 반갑기는 했다만, 공항에서 경계하던 모습이 떠올라 일부러 거리를 두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럴 때마다 또 다른 곳에 함께 있었다.
인파 속에서도 태준은 선혜를 잘도 찾아냈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여서 그런지 금방금방 눈에 들어왔다. 더구나 그녀가 나타났다 하면 주변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선혜는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관광지에 있는 남자들이 죄다 그녀를 훔쳐보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동양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전부 다. 음험하게 중얼거리며 키득거리는 놈들도 간혹 있었다.
그런 놈들에게 괜히 엄한 짓이라도 당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따라다녔다.
감이 좋은지 선혜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휙휙 돌아볼 때면 재빨리 벽 뒤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 숨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방금 외국인 남자에게 붙들려 곤란해하는 선혜를 보고 만 것이다. 태준은 난처해보이는 선혜에게 다가가 그 외국인이 했던 말을 통역해주었다.
통역해 준 내용이 틀린 해석은 아니었지만 집요한 걸로 보아하니 다른 음험한 속내도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더 이상 숨지 못하고 나서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들을 할까 하다가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자니 스토커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괜히 뜨끔하여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분명 겨울인데 왜 이렇게 더운 건지. 아무래도 점점 따가워지는 선혜의 눈초리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겨우 같이 있게 되었는데 식당을 박차고 나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선혜는 그저 새침하게 태준을 노려보다가 메뉴판을 쳐다볼 뿐이다. 잔머리를 살짝 귀 뒤로 쓸어넘기면서.
“빨리 메뉴나 골라요.”
태준은 선혜 몰래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요. 아무래도 가이드북이 똑같잖아요? 그래서 일정이 겹친 게 아닐까…….”
“메뉴, 고르라고요.”
“……넵.”
태준은 얌전히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몇 개를 고르면 되냐는 태준의 질문에 선혜는 먹고 싶은 만큼 고르라며 아량을 베풀었다. 태준은 신이 나서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능숙한 불어를 구사하며 메뉴를 시켰다.
선혜가 신기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가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어 잘하네요?”
태준은 선혜의 질문에 신이 난 얼굴로 술술 대답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아아. 선혜는 작게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불어 회화 몇 개 가르쳐드릴까요?”
정작 프랑스에 오긴 왔는데 선혜는 불어를 할 줄 몰랐다. 영어면 통할 것이라 생각하고 가이드북에 있는 회화 파트를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다들 영어로 물으면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몇 개 배워놓으면 나쁠 것 같진 않아 선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태준이 씩 웃었다. 의미심장한 그의 미소에 눈을 깜박이는데 그가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어 몸을 살짝 숙였다. 그리고 느리게 그 예쁘고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그 일련의 순간들이 느리게, 하지만 선명하게 다가왔다.
“Je m'appelle Taejoon Shin.”
알아듣지 못한 선혜가 눈을 깜박거렸다.
“제 이름은 신태준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태준이 근사한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태준이에요, 내 이름.”
신태준.
그의 이름 세 글자가 뇌리에 박혀들었다.
깊고, 선명하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눈을 계속 마주할 수가 없어 선혜가 태준의 눈을 피하려는 찰나.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혜가 숙이려던 고개를 들고 다시 쳐다보았다.
회화를 가르쳐 준다더니, 제법 머리 좋게 수작을 부린 셈이었다. 영악하기 그지없다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선혜가 대답이 없자 태준이 머쓱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검지로 살짝 긁적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치를 살살 보며 또 줄줄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름 하나 정도는 알아 놓고 싶어서.”
그녀를 길에서 붙든 남자들은 다짜고짜 무례하게 남자친구의 유무를 묻고 번호를 묻고 그 뒤에서야 그녀의 이름을 묻고는 했다. 이렇게 이름부터 물어본 남자는 처음이어서 생소했다.
선혜는 제 이름을 얘기해 주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느 순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곧 입을 열었다.
“혜교라고 불러요.”
가짜 이름을 말하는 혀가 바늘이라도 돋아난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거짓말을 한 가슴이 묵직해졌다.
“혜교.”
그녀의 가짜 이름을 입에 굴리다 환하게 웃는 그를 보자 더욱이.
하지만 진짜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은 끔찍한 짓을 하려 했던 약혼자와, 돈 때문에 그런 사람과 약혼시키려고 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왔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혜교 씨라고 부를까요?”
“마음대로 해요.”
때마침 점원이 음식을 내어오기 시작했다.
“근데. 회화 알려주겠다고 하더니.”
막 포크를 집어 들던 태준이 멈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맑은 눈동자로 선혜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Vous etes tres jolie.(당신 참 예쁘시네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태준이 설명도 안 하고 포크로 파스타를 뒤적거렸다. 그의 양쪽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귀가 뜨거운지 태준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매만진다.
그 반응을 보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칭찬 고마워요.”
선혜의 말에 태준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선혜는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쏟아진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일이다.
예쁘다는 소리는 정말 질리도록 들었는데.
다른 나라 언어로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니스에 벌써부터 봄바람이 살랑거려서 그런 걸까.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
하지만 그런 설렘도 잠시.
선혜는 제법 당황한 얼굴로 비워지는 접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탁. 점원이 치우는 접시가 이번이 몇 개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섯 개, 여섯 개? 아니, 그보다 많을지도.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선혜는 식사 중인 태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좀 많이 먹는 편이라더니. 이건 좀이라고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배…… 많이 고팠어요?”
선혜가 묻자 열심히 구운 닭 다리를 뜯던 태준이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해졌는지 닭 다리를 내려놓고 멋쩍게 웃으며 냅킨으로 대충 입을 닦아냈다.
“원래 아침을 먹는 편인데 늦잠 자서 못 먹었거든요. 시차 적응 좀 하느라고.”
태준이 선혜의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저기, 제가 너무 많이 먹어서 화났어요?”
원래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정신없이 시키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만큼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선혜랑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 때문도 있었다.
조심조심 물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때였다. 선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며 위로 올라갔다.
태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평생 무표정할 것만 같았던 여자가, 웃었다.
무표정한 얼굴도 예쁜데 웃으니까 수십 배는 예뻐 보였다. 그저 입술 끝을 치켜올리는 희미한 실소일 뿐인데도 가게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이 죄다 선혜의 얼굴에 쏠린 것 같이 빛이 났다.
태준의 얼빵한 표정에 선혜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눈치를 보는 게 귀여워서 자기도 모르게 작게 터트린 실소가 점점 커졌다. 결국 선혜는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었다. 태준의 표정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안 웃을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게 불편할 만도 한데, 이 남자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잘생겨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순진해 보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선혜가 손을 내리고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더 먹어도 돼요. 메뉴판 갖다 달라고 할까요?”
“아뇨, 그게, 쿨럭!”
사레가 들렸는지 태준이 기침을 쏟아냈다. 선혜가 물컵을 가져다 주자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제 가슴을 탕탕 친다.
후, 하고 숨을 몰아쉰 그가 조심스럽게 고기를 베어 물었다.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먹는 게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안쓰럽기도 하고 해서 선혜는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그러자 태준이 조금 편한 얼굴로 밥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잔 너머로 태준을 바라보는 선혜의 눈이 따듯했다. 태준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마지막 접시를 깔끔하게 비워냈다.
*
식당을 나온 선혜는 줄곧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그녀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다.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서 따라오던 태준이 선혜를 따라 우뚝 걸음을 멈춘다. 위아래를 훑는 날카로운 시선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왜 자꾸 따라다녀요?”
“따라다니는 거 아닌데요?”
태준은 뻔뻔한 얼굴로 말하더니 손에 들린 가이드북을 들어 툭툭 두드렸다. 선혜의 손에도 같은 가이드북이 들려 있었다.
공항 서점에서 같이 샀던 그 책이었다. 선혜가 손에 들린 책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가이드북이 같잖아요. 일정이 겹치는 모양인데요.”
그러면서 입술을 말아 올리는 게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하. 선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더니만 그를 짧게 노려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꽤 빨리 걷는다고 걷는데도 태준을 따돌리기엔 요원했다.
키가 큰 만큼 다리가 길어서 선혜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도 그는 느긋하게 보폭을 넓혀 따라오면 그만이었다.
그런 선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태준이 빠르게 걸어 그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선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태준을 돌아보며 멈춰 섰다. 태준도 따라 멈춰 서서 그녀를 비스듬히 돌아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다녀요.”
“제가 왜요?”
선혜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더 그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괜한 초조함에 태준의 말이 빨라졌다.
“아니, 아까도 봤잖아요. 그쪽 귀찮게 구는 남자가 그 남자 하나일 것 같아요? 게다가 소매치기가 여기 얼마나 많은데. 나같이 건장한 남자랑 같이 다니면 그런 놈들 안 붙을걸요?”
선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태준을 보았다. 태준의 말이 일리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혜에게 있어 태준은 믿고 같이 여행할 만한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준 건 고마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고맙다고 해서 곁을 쉽게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선혜는 타고난 외모 때문인지 길에서 접근하는 남자들을 꽤 많이 겪었다. 저런 눈빛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들에게 틈을 주면 늘 탈이 나곤 했다. 그렇게 일어나는 탈은 항상 선혜에게 상처를 남겼다.
이래서 틈을 주면 안 됐는데. 낯가리는 성격답지 않게 금방 낯을 풀었더니 어김없이 이런 식으로 들러붙는다 싶었다.
“따라오지 마요.”
선혜는 차갑게 일갈하고 돌아서서 멀어졌다. 태준은 따라가려다가 멈칫하고 자신의 머리를 한 번 크게 헝클더니만 눈을 비장하게 빛내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대놓고 선혜의 옆에 붙어 걸었다.
선혜가 기가 찬 얼굴로 태준을 돌아보며 뭐라고 하려는 찰나였다.
“공짜 보디가드 하나 뒀다고 생각해요.”
태준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선혜도 지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키니까 신경 끄죠.”
“퍽이나 잘 지키겠네.”
다소 거친 혼잣말에 선혜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녀가 멈출 걸 알았던 것처럼 나란히 걸음을 멈춘 그가 선혜를 돌아보며 뻔뻔하게 물었다.
“다음엔 어디로 갈 거예요?”
선혜가 그런 태준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선혜가 뒤로 홱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태준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그 뒤를 쫓아가는데 그녀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다.
성큼 다가가던 태준 탓에 두 사람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훅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놀라 태준이 주춤 물러났다.
선혜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설마 내 숙소까지 따라오겠다는 건 아니죠?”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경계하는데 그러겠노라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준이 낭패감이 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잔뜩 찡그려진 눈썹의 선이 제법 독특해서 시선을 끄는 찰나. 다시 눈이 마주쳤고 선혜는 고개를 돌린 뒤 성큼성큼 걸어갔다.
태준은 그런 선혜의 뒤를 쫓아가지 않았다.
“너무 오버했나.”
괜히 발치에 걸리는 돌을 차버리는 태준이었다.
“아오, 진짜 등신 새끼…….”
제자리에 선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