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03화 (103/109)

#103. 해묵은 겨울이 지나고

경애는 헐레벌떡 병원으로 들어섰다. 계절에 맞지 않은 얇은 옷차림에, 가게 앞치마까지 그대로 두르고 온 경애에게 병원 사람들의 시선이 우르르 쏠렸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경애는 힘빠진 다리로 휘청이면서도 빠르게 걸어갔다.

‘장모님. 장인어른 찾았어요.’

태준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는 경애의 눈시울이 붉었다.

찾았다는 말에 순간 들떴던 것도 잠시.

‘장인어른 지금 병원에 계세요.’

병원이라는 말에 한 번.

‘폐암 말기셔서 치료 중이십니다.’

암 말기라는 말에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았다.

‘얼마 남지 않으셨대요.’

남은 시간이라고는 고작,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다시 떠올리자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경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겨우 들어선 호흡기내과 병동.

태준이 알려준 병실로 들어서는데 병실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했다.

간호사 둘이서 침대 하나를 정리 중이었다. 시트를 걷어내고 침구를 한데 모아 놓았다. 벗어놓은 환자복도 눈에 들어온다.

침대에서 빼내는 종이 팻말에는 ‘윤석주’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텅 빈 침대를 보자 가슴이 쿵 떨어졌다.

“저, 저기…….”

경애는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는 간호사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다.

“왜 그러세요?”

“여기, 여기 있던 환자 어디 갔어요?”

“아, 여기 계시던 환자분이요?”

“네. 윤석주. 윤석주 어디 갔어요?”

대답하려던 간호사가 의아한 듯 경애를 보았다.

“실례지만 환자분하고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관계. 그 단어에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땅히 내세울 관계의 명칭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인이라고 하기엔 가깝고, 친구나 애인으로 치기엔 너무 멀다.

우리 애 아빠, 라고 답하기에도 뭐하다.

허탈함에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때였다.

“혹시 윤석주님 아내분이세요?”

다른 간호사의 질문에 경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내.

그 말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경애는 울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쩐지. 따님이랑 너무 닮으셨더라.”

친절하게 웃은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윤석주 님 보호자분이 요청하셔서 1인실로 옮기셨어요. 10호실에 계세요.”

경애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빠르게 병실을 나왔다.

저 멀리, 10호실이 보인다.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발갛게 언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짐을 정리 중인 병실 문은 열려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다인실보다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병실 내부가 보인다. 침대 하나, 소파 하나. 응접용 테이블 하나.

소파에 앉아 걱정스럽게 핸드폰을 보고 있던 태준이 경애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모님.”

태준의 옆에 있던 선혜도 경애를 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엄마.”

경애는 선혜와 태준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태준에게 석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게를 뛰쳐나와 달려오면서도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이었다.

네가 왜.

네가 왜.

네가…… 왜.

“……누나.”

하지만 석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누가 봐도 죽음을 앞둔 환자의 모습이라는 걸.

벌어진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몸. 한눈에 보아도 좋지 않은 혈색.

현실을 너무나 또렷하게 직시한 경애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경애는 손목으로 입을 틀어 막았지만,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눈망울.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

차마 다가가지도 못하겠다.

어깨를 떨며 서 있는 경애에게 먼저 다가온 건 석주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가까이 온 석주의 눈시울도 붉었다. 선혜가 울 때는 울지 않던 그였는데 경애가 우는 모습을 보며 차마 눈물을 참을 수 없음이다.

“너는…… 어떻게 매번 사람을 이렇게 미치고 환장하게 만들어…… 어……?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구…… 흑…….”

경애의 주먹이 아프지 않게 석주의 가슴을 때린다. 앙상한 체구가 손끝으로 전해지자 울음이 더욱 거세졌다.

석주는 경애의 주먹을 움켜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을 안타까이 응시하다가 팔을 뻗어 경애를 품에 안았다. 가능한 한 힘껏.

경애를 품에 안은 순간, 뜨거운 한숨이 석주의 입 밖으로 흘렀다.

“미안.”

무거운 한마디. 그 한마디를 남겨놓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미안함 뿐만 아니라 고마움 또한 함께 담긴 눈물이 흘렀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

선혜와 태준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급하게 반차를 내서 시간이 있기야 했지만 예정보다 일찍 병원을 나섰다.

음악도, 라디오도 켜지지 않은 차 안은 조용했다. 선혜는 말없이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응시 중이었다.

“괜찮겠어요?”

태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뭐가요?”

“장인어른이랑 같이 안 있어도 괜찮냐구요.”

선혜가 대답했다.

“지금은 엄마랑 단둘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서로를 안고 쉬이 놓아주지 않는 둘을 보면서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선혜의 말에는 태준도 동의하기에 침묵으로 긍정하였다.

그나저나.

‘본가로 가야 하나.’

갑자기 시간이 붕 떠버렸다. 수호를 데리러 갈까 싶었지만 선혜와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디 드라이브라도 갈까 싶어 손으로 기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때였다.

따듯한 온기가 포개졌다. 돌아보니 선혜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까지 껴서.

“고마워요.”

“손만 잡아 줄 거예요?”

뺨을 두드렸는데 선혜가 입을 맞춘 곳은 태준의 손등이었다. 어이없어 바라보다 태준은 웃었다. 선혜 또한 미소 지었고.

그 얼굴이 그동안 아버지인 석주를 볼 때마다 복잡했던 것과는 달랐다.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정리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냥 증오하는 것도, 마냥 애정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늘 어느 편에 서서 선혜를 감싸줘야 하나 혼란스러웠는데.

“우리, 자주 와서 봬요.”

태준의 말에 선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용서를 한 건 아니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선혜는 그 뒤로 종종 석주의 병실에 들르곤 했다. 경애는 거의 매일 같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석주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고. 석주는 처음에는 미안해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경애를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석주의 병실에 들른 날. 선혜가 죽그릇을 설거지하는 경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병간호가 쉬운 게 아니잖아.”

경애는 가게에 있는 시간 보다 석주의 병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석주와 별다른 대화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것이다.

하지만 선혜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엄마가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날, 눈물의 재회를 했다고 해서 과거의 앙금이 모두 내려간 것이 아닐 텐데.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마냥 편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건 결코 아니었지만 어색한 분위기에 불편해질 때가 많았다. 엉엉 울며 아버지의 품에서 눈물을 쏟았던 게 무색하게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오늘처럼 수호를 대동하여 병문안을 오기 시작했다.

석주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있던 수호는 석주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갔고 그런 수호 덕택에 어색한 분위기가 많이 나아지곤 했다. 지금도 수호는 석주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괜찮으니까.”

“힘들면 말해. 교대해 줄게.”

“교대는 무슨. 결혼 준비하느라 바쁜 애가.”

경애의 말대로 선혜는 요즘 결혼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태준과 선혜는 스몰 웨딩 형식으로 식을 올리기로 했다. 규모가 작고, 예단 예물이 오고 가지 않아 신경 쓸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드레스에, 식장에, 수호 예복에, 신경 쓸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엄마를 돕고 싶은 게 딸의 마음인지라 그렇게 말했다. 경애가 못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병실로 돌아가자 때마침 의사가 회진을 와 있었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네요. 조만간 항암 치료를 재개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경애와 선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요?”

“네. 오늘 혈액검사 결과 보고 빠르면 내일 시작하도록 하죠.”

짧게 말을 마친 의사는 곧 간호사를 대동하여 병실을 나섰다.

경애와 선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이전에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쇼크가 와서 중환자실까지 갔다온 석주였으니까 말이다.

“할아버지. 항암이 뭐예요?”

수호의 순진한 물음에 석주가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낫게 하는 약이야.”

“정말요? 할아버지 다 나으면 저랑 맨날 맨날 그림 그려요. 약속이에요?”

석주는 내밀어진 수호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수호와 약속을 하는 석주의 모습을 경애와 선혜는 말 못 할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주말인 다음 날. 선혜는 수호와 태준을 수영장에 보내고 집에 홀로 남아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간간이 시간을 확인하는 선혜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종종 엿보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도 불안함이 묻어나기는 마찬가지.

아침에 경애를 통해 석주의 혈액검사 결과가 양호하며, 항암 치료가 바로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작용이 심했던 이전 약과는 다른 약을 쓰지만 그래도 부작용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냐고 전화라도 한번 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경애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선혜는 화들짝 놀라다가 핸드폰을 한 번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서둘러 핸드폰을 주워 들고 전화를 받자 잔뜩 낮아진 경애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 선혜야. 너 오늘 시간 되지?

질문을 하는 경애의 태도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응. 왜 엄마?”

- 아니, 엄마가 가게에 급하게 가 볼 일이 생겼는데…… 너희 아빠 혼자 두고 가기가 불안해서. 너라도 옆에 있어주면 좋겠는데 가능하니?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분위기 메이커인 수호나 태준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경애의 말마따나 불안해서 석주를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도 집에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 않은가.

“알았어. 갈게 엄마.”

- 그래. 고마워.

“고맙긴.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친 선혜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서면서 태준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아버지한테 가 볼 일이 생겨서 병원에 가 볼게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수호랑 점심 먹고 들어와요. 별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이따 연락할게요.]

한편 태준은 수영장 탈의실에서 선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 중이었다.

“엄마 병원 간다고 우리 점심 먹고 들어오라시네.”

“할아버지한테 가는 거예요?”

“응.”

태준은 옷을 갈아입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얼굴로 수호를 돌아보았다.

“아들. 우리 둘이 데이트나 할까?”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가 점심만 먹고 들어오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태준은 병실에서 석주와 어색하게 있던 선혜를 떠올렸다. 그 어색함을 달래주기 위해 자신도 수호도 노력을 했지만 결국 둘 사이에서 해결할 문제였다.

보통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날은 더 추워져 있었고.

이렇게라도 단둘이 있게 된다면 대화를 할 기회도, 서로의 사정과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도 주어질지 모른다.

‘그 기회를 선혜 씨가 꼭 붙들었으면 좋겠는데.’

태준은 작은 바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네. 아버지랑 좋은 시간 보내요.]

**

선혜와 석주가 있는 병실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TV라도 켜져 있으면 소음으로 인해 어색한 분위기가 좀 가실 텐데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TV가 고장이 나버려 그마저도 어려웠다.

두 번째 항암제를 간호사가 걸며,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간호사가 나간 뒤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 마주쳤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때였다.

“결혼한다면서.”

석주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선혜는 고개를 들어 석주를 보았다.

“네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네.”

“언제쯤 해?”

“내년 2월쯤이요.”

“2월이라…….”

석주는 탄식하듯 중얼거리며 시선을 비스듬히 깔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슬프게 웃는다.

“드레스 입으면 엄청 예쁘겠네.”

마치 못 볼 사람처럼, 그렇게 말한다.

목이 메이고 눈시울에 열이 올랐다. 간신히 감정을 갈무리 짓고 있는 때였다.

“그때와는 달리,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선혜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예전 일을 아버지가 먼저 언급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때 많이 힘들고 아프게 해서 미안해.”

“…….”

“아빠가 많이 원망스러웠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찾아주고 곁을 지켜줘서 고맙고.”

그리고 이처럼 사과할 줄도 몰랐고 말이다.

뒤늦은 사과였다. 하지만 늦은 만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짤막하게 정적이 흐르고, 선혜가 입을 열었다.

“원망 안 해요.”

석주가 물끄러미 선혜를 보았다. 선혜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땐…… 아버지에게 나는 빚을 갚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럴 리가. 왜 그런…….”

“외면하셨으니까요.”

선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엉망이 된 나를.”

선혜가 뭘 말하는지 석주는 깨달았다. 그때를 회상하듯 석주의 눈가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땐 너무 놀라서…….”

깊은 죄책감과 분노,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너무 놀라서 그랬어.”

석주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곧장 양재민 그놈한테 전화해서 따졌었다. 술 취한 녀석한테서 제대로 된 답변은 듣지 못했지만…….”

“…….”

“네가 화장실에서 혼자 우는데…… 너무 미안해서 차마…….”

“……됐어요.”

석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석주에게 선혜가 재차 말했다.

“괜찮아요.”

“…….”

“그러니까 이제 지나간 일에 그만 미안해하세요.”

“…….”

“그만 하셔도 돼요.”

선혜가 그렇게 말한 뒤 정적이 찾아왔다. 석주는 과거를 회상하며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서는 비단 선혜의 몫뿐만이 아니었다.

석주 또한 자신의 과오를 돌이켜보고 스스로를 용서할 시간이 필요했다.

선혜는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안다. 나를 등진 그 앞에서 당신 스스로 많이 아파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당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나 또한 부족하지만 표현해야지.

“감사해요.”

어색하더라도.

“저도 죄송해요. 오해하고 원망만 해서.”

뜬금없더라도 많이 많이 표현할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많이 어색하다.

“항암 부작용은 없으세요?”

선혜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선혜의 모습에 석주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시는 거예요?”

“그냥.”

석주가 선혜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딸이구나 싶어서.”

그 안에 담긴 뜻을 선혜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이런 서툰 모습이 별수 없이 닮은 탓이다.

선혜 또한 석주가 그랬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따사로운 햇빛이 병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밖은 추운 겨울일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병실 안은 봄 같았다.

해묵은 겨울이 녹아드는, 따사로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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