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02화 (102/109)
  • #102. 다시 만난, 우리 아빠

    레어미디어에 크나큰 인사이동 바람이 분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가장 큰 변화는 레어미디어 대표가 바뀐 것이다. 예정보다 일찍 은퇴를 선언하며 그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다른 곳에서 발령된 CEO가 그 자리를 채웠다.

    지민은 며칠 뒤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사원들의 쑥덕거림과 은근한 눈짓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민영은 직위가 대리에서 주임으로 강등되어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민영 또한 얼마 가지 못해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사직하기 전 옮긴 부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왕왕 들려오긴 해서 어느 정도 예상한 행보였다.

    설렁했던 디자인 팀 사무실은 본사 디자인 팀에서 파견 온 두 사람이 채워 주었다.

    그리고.

    “윤 주임님.”

    선혜는 회식 자리에서 기주가 말했던 대로 무사히 주임으로 승진했다.

    “식사하러 가셔야죠.”

    “아, 저는 약속이 있어서요.”

    “신 대리님이랑요?”

    태준 또한 대리로 승진했고.

    “네.”

    “에이. 서운해. 다음엔 저희랑도 먹어 주시는 거예요? 아셨죠?”

    새로 파견 온 두 사람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선혜에게 농담을 걸 정도로 가까워졌다.

    “네. 다음엔 꼭 같이 먹어요.”

    선혜가 나간 뒤 새로 파견 온 두 사람이 아쉬운 눈으로 문 너머를 미어캣처럼 쳐다보며 저들끼리 얘기했다.

    “윤선혜 씨 엄청 도도하고 까칠하다고 하지 않았나?”

    “내 말이. 소문이랑 너무 다른데?”

    오히려.

    “예쁘다.”

    “응. 예의도 바르고, 일도 잘하고.”

    “너무 예뻐.”

    “맞아. 진짜 예뻐.”

    선혜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하는 두 직원을 멀리서 희재가 바라보다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 기주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기주가 태석에게 주먹질을 했다는 소문 또한 사내에 파다하게 나 있었다.

    기주가 잘릴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였건만 모두의 예상을 비껴가며 기주만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직서를 냈는데 오히려 반려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진실은 본인만이 알 터.

    희재는 자기도 모르게 턱을 괴고 기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기주는 희재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눈을 피하고 있었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희재의 입가로 얼핏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희재는 무심결에 달력을 확인했다.

    어느덧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

    “사장님. 올해 연말에 쉬는 거 맞죠? 그쵸?”

    춘희가 경애에게 매달리며 앙탈을 부렸다.

    경애가 테이블을 닦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쉬긴 뭘 쉬어. 일할 거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아, 사장니임! 진짜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우리도 좀 쉽시다, 예?”

    경애는 대답 없이 묵묵히 일을 할 뿐이다. 힘주어 테이블을 행주로 박박 닦는다. 더 닦을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요즘 들어 생긴 버릇이었다. 덕분에 테이블이 아주 반질반질 윤이 날 지경이다.

    한참 그렇게 테이블을 닦았을까. 경애는 뻐근한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그러다 무심결에 가게 창밖을 보더니 뭘 본 건지 뛰쳐나간다.

    창밖으로 경애가 낯선 남자를 잡아채는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을 보던 춘희가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또 저러시네.”

    김 씨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운 정이, 저래서 무서운 거야.”

    “저게 미운 정으로 보여요?”

    춘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정이지.”

    경애는 낯선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가게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손이 빨갛게 얼었다. 날이 그새 많이 추워졌다는 반증이었다.

    경애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빠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늘 석주가 서서 바라보던 곳을 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게 못내 가슴 아팠다.

    *

    선혜와 태준은 나란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젠 꽤 날씨가 추워져서 두 사람 다 옷을 두껍게 차려입고 있었다.

    선혜의 손은 태준의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따로 난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주머니 속은 태준과 선혜의 온기가 얽혀 따듯했다.

    간간이 눈을 마주하며 웃고,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근처 우동집.

    새로 연 우동집은 맛도 좋지만 아늑하고 조용하여 두 사람이 찾는 단골 가게가 되었다. 가끔 수호를 데리고 저녁에 오기도 했다.

    “우리 미남 미녀 커플 오셨네?”

    오늘도 사모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자주 오는 두 사람에게 사장님과 사모님은 넘치게 서비스를 주고 있었다. 세 곱빼기는 시키는 태준에게 추가 요금을 더 받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다.

    “늘 먹던 거로 주세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단골다운 주문을 하고 우동을 기다리는 동안 태준은 선혜의 다른 손을 잡아 비벼주며 호호 입김을 불어주었다. 가까이에서 입김을 불어주느라 입술이 닿기도 했다. 간지러워 선혜가 웃으며 손을 뺐다.

    “이제 다 녹았는데.”

    “손 언 건 핑계죠. 몰랐어요?”

    태준의 능글맞은 언사에 선혜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태준의 손을 만지작대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그리고 무심결에 창밖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선혜의 눈이 순간 커졌다.

    창밖을 지나가는 남루한 차림새의 남자.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릴 새도 없이 가게를 나서더니 누군가를 붙들어 세웠다.

    돌아보는 그 짧은 순간에 가슴이 기대를 담고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나.

    “누구쇼?”

    돌아보는 남자는 낯선 사람이다. 아버지인 석주가 아니라. 선혜는 맥이 빠져 옷자락을 붙든 손을 놓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의아하게 쳐다보던 남자는 이내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황망한 얼굴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따듯한 온기가 어깨 위로 덮어졌다. 어느새 다가온 태준이 선혜의 어깨 위로 코트를 덮어주고 있었다.

    “장인어른인 줄 알았어요?”

    “네.”

    선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가 사라진 지 어느덧 보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에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지 길게만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일주일도 안 되어 사람을 찾아내던 태석은 연말 행사와 더불어 업무가 폭풍처럼 몰아치면서 바빴고 바쁜 태석을 닦달하기 뭐하여 태준은 손수 흥신소와 사립 탐정 등을 고용하여 석주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태준이 그사이에 차갑게 언 선혜의 손을 잡고 우동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때마침 나온 우동 두 그릇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혜는 한숨을 내쉬다 이윽고 말없이 우동을 먹기 시작했다. 태준 또한 그런 선혜 옆에서 얌전히 우동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진동하자 퍼뜩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다.

    일을 맡긴 사람들에게 온 연락인 줄 알았는데.

    메시지를 보낸 건 엄마인 시연이고, 메시지는 새로운 정장을 입고 서 있는 수호의 사진이었다. 오늘은 개원 기념일이라 유치원이 쉬는 날이어서 수호는 시연의 집에 가 있었다.

    “이거 봐요. 엄마가 수호 옷 또 샀나 봐요.”

    음울한 표정을 짓던 선혜가 수호를 보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안도하다가도 빨리 석주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대체 어디 계시길래 이토록이나 찾기가 힘든 건지.

    한숨을 내쉬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 당연히 시연이겠거니 생각하고 핸드폰을 꺼낸 태준은 메시지 내용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찾았습니다.]

    놀란 선혜가 우동을 먹다 말고 태준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아, 그게.”

    그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방금 메시지를 보낸 것과 같은 번호. 고용한 사립 탐정이었다.

    태준은 가게를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찾으셨다고요? 어디 계신 겁니까?”

    -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계세요. 근데.

    근데. 그 말이 어째 불안하다 싶은 찰나.

    - 상황이 좋지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중환자실에 있다가 며칠 전에 겨우 나왔어요.

    중환자실이라니. 태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 많이 편찮으시기라도 한 거예요?”

    - 모르셨어요?

    사립 탐정이 말했다.

    - 이분 폐암 말기시던데.

    태준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 항암 치료하다가 쇼크가 와서 중환자실에 가셨었어요. 겨우 회복해서 나와서 현재 병동에서 치료 중이신데 전보다 호전되긴 했어도 상태가 많이 안 좋더라고요. 알아보니까 얼마 남지 않았어요. 삼 개월에서 반년 정도.

    태준은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암담한 현실에 눈앞이 다 아찔할 지경이었다.

    답답하여 한숨을 내쉬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쳤다. 창문 너머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선혜와.

    - 사진 보내 놓을 테니까 맞는지 확인하세요.

    사립 탐정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준은 탐정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

    아니길 바랐는데.

    사진 속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분명 석주였다.

    ‘어떻게 말하지.’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뿐.

    선혜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다.

    분명 많이 속상해할 텐데. 많이 울 텐데. 많이 마음 아파할 텐데. 후회도, 많이 할 텐데.

    상상만 해도 가슴이 저민다.

    제 머리를 손으로 헝클이던 태준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태준 씨, 왜 그래요?”

    선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입이 더욱 열리지 않는다. 입이 열리기는커녕 눈시울이 붉어진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눈자위가 촉촉해졌다.

    “태준 씨……?”

    선혜는 놀라 그런 태준을 바라보다가 안아주었다. 태준은 그런 선혜를 꼭 끌어안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

    “환자분. 환자분?”

    통증에 지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석주는 저를 흔드는 손길에 겨우 눈을 떴다.

    “괜찮으신 거예요?”

    의식이 뒤늦게 돌아오며 흐렸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눈을 뜨기가 무섭게 통증이 몰려왔다.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는다. 마지막 진통제를 맞은 게 겨우 한 시간 전인데.

    “많이 아프세요? 진통제 좀 놔 드릴까요?”

    안쓰러운 듯 말하는 간호사의 말에 석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나간 뒤 한 환자가 다가왔다.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석주와 같은 폐암 말기 환자였다. 석주와 마찬가지로 연고지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포장지에 싸인 알약을 주었다.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마약성 진통제였다.

    “이거라도 빨리 먹어요. 일 터져서 저번처럼 간호사 늦게 올 수도 있잖아요.”

    “저번에도 이러셔서 간호사 선생님께 혼나시지 않으셨어요?”

    “지금 간호사한테 혼나는 게 중요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통증 조절이 제일 중요한데.”

    힘없이 바라보자 환자가 포장지를 뜯어서 억지로 손에 약을 쥐여 주었다. 석주는 마지못해 약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물을 먹으려다가 손이 삐끗해 물병을 쏟고 말았다. 쏟아진 물이 석주의 소맷자락을 축축하게 적셨다.

    “아이고. 이걸 어째.”

    환자가 당황하며 근처에 있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러다 손목에 딱딱하게 뭔가 걸려 소매를 걷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석주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낡은 가죽 시계는 물을 먹었기 때문인지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거 고장난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고장난 거.”

    석주의 손끝이 시계를 매만졌다. 애틋한 손길이었다.

    선혜가 고등학교 시절 선물해 주었던 시계. 차마 아까워서 차지 못하고 보관했다가 고장이 나버린, 이제는 너무 낡아버린 시계.

    “괜찮아요.”

    석주는 힘없이 대답했다. 환자는 자기가 물을 떠오겠노라 하며 물병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석주는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눈을 감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노라면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경애와 선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두 사람.

    날이 추워지는데 잘 지내고는 있을지. 모전여전이라고 둘 다 추위에 약한데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지 걱정이다.

    그리고 암은 유전이라는데. 훗날 선혜에게 이 몹쓸 병을 물려주게 될까 봐도 걱정이었다.

    선혜가 이처럼 아프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 애비가 병까지 물려주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겠는가.

    경애와 선혜 생각을 하다 문득 보고 싶어졌다.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딱 한 번이라도 더.’

    그런 생각을 하는 때였다. 빠른 걸음이 침대로 가까워졌다.

    간호사나 물을 뜨러 간 환자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그런데.

    “……?”

    보고 싶은 마음이 불러온 환각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꿈?

    눈앞에 선혜가 서 있었다.

    믿기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선혜……?”

    그래서 불러보았다. 그런데 부르기가 무섭게 선혜의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석주는 알았다.

    눈앞의 선혜가 꿈도, 환각도 아닌 현실이라는 걸.

    석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혜는 흐느낌 없이 눈물만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석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갑작스러운 선혜의 등장에 통증도 잊었다.

    당황하여 눈을 굴리고 있는데 발갛게 언 선혜의 손끝이 눈에 들어온다. 어렸을 때부터 손발이 유독 찼던 선혜가 떠올랐다.

    석주는 자기도 모르게 선혜의 손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내가, 이럴 자격이 있나.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손을 거두려고 하는 때였다.

    선혜가 손을 뻗어 석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너져내려 울기 시작했다.

    아프게.

    “아빠, 아빠…….”

    아이처럼 그렇게, 한없이 부르며 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하고 꼴도 보기 싫었던 아빤데.

    아픈 모습을 보니 눈물부터 났다.

    마음이 너무 미어졌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석주가 머뭇대다 선혜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감싸 쥐며 석주가 말했다.

    “선혜야. 울지 마.”

    아이를 달래듯.

    “아빠가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라. 응?”

    서른 된 다 큰 자식이라도 부모의 눈에는 한없이 어린 아이이며.

    “아빠가 다 잘못했다…….”

    우는 자식 앞에서 부모는 늘 죄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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