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프러포즈
현철은 로비를 떠나 곧장 레어미디어 대표실로 향했다. 안 그래도 기주가 갑자기 밥을 먹다 뛰쳐나가는 바람에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던 대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현철을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별로 안 바빠 보이는데. 잠깐 얘기 좀 할까.”
감히 토를 달 사람이 아니었기에 대표는 황급히 현철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비서를 시켜 차와 간식거리를 내오라 시켰다. 하지만 현철은 손도 대지 않았다.
“…….”
다만 대표를 뚫어지게 쳐다만 볼 뿐.
노려보는 눈빛이 아님에도 온몸이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자네라며.”
현철이 입을 열었다.
“레어미디어 한 팀장에게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전달한 게.”
대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을 바삐 굴리던 그는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다른 사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대표라는 사람이 말이야.”
현철이 말했다.
“그럼 쓰나.”
대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평소에는 잘 돌아가던 머리가 현철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고장난 기계처럼 삐거덕거렸다.
“자네, 은퇴까지 얼마나 남았지?”
대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하며 쳐다보는데 현철이 싱긋 웃었다.
“나도 올해 퇴직인데 나란히 같이 퇴직하면 좋겠군.”
“회, 회장님!”
“그런 줄로 알겠네.”
말을 마친 현철이 일어섰다. 현철의 뒷모습을 보던 대표가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쯧.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릎 꿇는 사람이 많아.”
현철은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릎 꿇은 대표의 모습이 무색하게도, 현철은 대표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표실을 나섰다.
기회 같은 건 필요 없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
현철은 황망한 표정인 대표를 내버려 두고 망설임 없이 척척 걸어 나갔다.
*
현철은 회사 게시판을 통해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과글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선혜와 관련된 질 나쁜 소문에 대한 해명 글을 올렸다. 작은 협박도 덧붙였다.
이 소문에 대해 언급하는 이가 있다면 법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할 거라는. 명예훼손에 관한 법률 내용 또한 추가되어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는 법이며, 소문은 다른 소문으로 덮어지는 법.
그날 로비에서 있었던 일은 사원들 사이로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고은이 없기에 졸지에 주동자가 되어버린 지민과 민영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선혜가 받았던 경멸 어린 시선들이 모두 두 사람에게 향했다. 특히나 지민은 로비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범이라며 싸잡은 덕택에 민영보다 배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견디지 못했는지 지민과 민영은 얼마 안 가 사무실을 말도 없이 뛰쳐나갔다.
기주도 점심시간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덕분에 사무실에는 희재와 선혜 둘뿐이었다.
다행히 당일 업무량이 많지 않았기에 일을 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퇴근 시간 전에 모든 업무가 끝이 나 할 일이 없었다.
“윤선혜 씨.”
희재가 부르는 소리에 선혜는 고개를 들었다.
“잠깐 차 마시면서 얘기 좀 할까?”
뜻밖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선혜는 곧 알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사무실 중간에 놓인 작고 동그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따듯한 커피에서는 김이 솟아오르고 희재는 말없이 솟아오르는 김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피식 웃었다.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희재와 마찬가지로 커피잔을 보기만 하던 선혜가 고개 들어 그녀를 보았다.
“미련한 곰인 줄로만 알았더니, 여우 같은 면이 있더라?”
칭찬인지 욕인지. 갈피를 못 잡는 때였다.
“칭찬이야.”
꼭 속을 읽어낸 것처럼 덧붙인 희재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그동안 윤선혜 씨 하는 거 보면 답답했거든. 미혼모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거 보고 내심 기대를 했는데 하는 짓이 영.”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인상을 쓴 희재가 지그시 선혜를 보았다.
선혜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만사에 무관심해 보였던 희재가 자기한테 이토록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거기에다가.
“근데 아까 로비에서는 다르더라.”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 줄도 미처 몰랐다.
“많이 놀랐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던데, 어떻게 저렇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겨울이 다가오며 해가 짧아져 창밖은 어스름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사무실 바닥으로 기울어지는 노을 빛을 바라보던 선혜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눈을 들어 창밖 풍경을 보았다.
“가끔은 미친 척 부딪혀 보라고.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지 말고.”
“…….”
“저는 옳은 사람이니까 당당해도 된다고. 제 편은 있을 거니까.”
“아버지가 맞는 말만 하셨네.”
“네.”
“돌아가서 오늘 있었던 얘기해 드려. 좋아하시겠다.”
순간 선혜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더는 아버지가, 그 자리에 없으니.
어둡게 가라앉는 선혜의 얼굴을 보던 희재의 입가에서 천천히 미소가 가셨다.
“선혜 씨.”
선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던 희재가 서둘러 휴지를 건네주었다. 선혜 또한 자기도 모르게 흐른 눈물에 놀라며 황급히 닦아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선혜는 가까스로 눈물을 삼켜냈다. 애써 웃어보지만, 희재의 얼굴은 침통하다. 사연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희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파우치에서 리무버에 적신 화장 솜을 건넬 뿐.
눈화장을 닦아낸 선혜가 문득 희재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듯 웃었다. 희재가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생얼도 예쁘네, 윤선혜 씨는.”
희재다운 시니컬한 말투에 선혜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웃는 선혜에게 희재가 그렇게 좋냐며 핀잔을 주었다.
좋았다.
질투도, 시기도, 부러움도 담기지 않은 그 예쁘다는 말이.
같은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웃어본 선혜였다.
*
태준은 오늘도 선혜의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다.
“아빠 집 먼지 쌓이겠다.”
“좋으면서 괜히 투덜거리긴.”
새초롬한 수호의 뺨을 태준이 장난스럽게 잡아 늘였다. 밥을 먹는데 뭐 하는 거냐며 성을 내는 수호를 태준은 실실 웃으며 바라보았다.
선혜 또한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밥을 먹었다. 문득 태준과 수호의 눈이 동시에 선혜를 향했다. 둘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는가 싶더니 태준이 자연스러운 척 입을 연다.
“밥 먹고 잠깐 나갔다 오지 않을래요?”
“지금요?”
“네. 소화도 시킬 겸. 한강 다녀와요, 우리.”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바람을 쐬며 심란했던 하루를 마무리 짓는 것도 좋을 것 같았으니까.
선혜를 보며 태준과 수호는 서로 은밀하게 눈을 맞췄다. 부자는 똑같은 얼굴로, 똑같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혜는 추운데 겨울옷을 꺼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할 뿐이었다.
.
.
.
밥을 먹은 뒤 세 사람은 한강으로 향했다. 날이 꽤 추운데도 불구하고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태준과 수호는 반짝반짝 빛나는 장난감을 하늘로 날리며 신나게 놀았다. 스틱형 불꽃놀이도 갖고 노느라 여념이 없다. 중간중간 편의점을 오가며 사 온 간식거리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체력들도 참 좋지. 온종일 일하고 유치원을 다녀온 건 같은데 저 둘은 어떻게 저런 체력이 남아도나 싶다. 여하간 보기는 좋았다.
반짝이는 야경. 그 속을 유영하는 유람선. 사이좋게 노는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스틱 끝이 허공에 반짝이는 그림을 그리는 풍경을 선혜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새삼스럽게 행복했다. 모처럼 마음이 편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웃다가 문득 몸이 시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수호와 놀던 태준이 그런 선혜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다가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덮어주었다. 옷깃을 여며 준 태준이 장난스럽게 선혜의 입에 입을 맞췄다.
수호가 보는데.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며 수호를 바라보면 수호는 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뿐이다. 엄마 아빠 뽀뽀하는 걸 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익숙하기만 한 광경이었다. 매번 부끄러워하는 엄마가 오히려 이상할 뿐이다.
“추우면 이만 갈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더 놀다 가요.”
“잠깐 여기 있어요. 따듯하게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그렇게 말한 태준은 곧 지갑을 챙겨 자리를 떴다. 허공에 스틱을 휘두르며 놀던 수호가 선혜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수호, 안 추워?”
“응. 하나도. 엄마는?”
“엄마도 괜찮아.”
선혜가 수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태준의 외투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아늑하고 따듯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무언가를 확인한 수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선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엄마.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자.”
“응?”
갑자기?
“나 가고 싶은 데 있단 말이야.”
선혜의 마음이 단번에 약해지는 말이었다. 따듯한 걸 사러 간 태준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금방 돌아오면 될 터.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호를 따라나섰다.
수호가 선혜를 데리고 간 곳은 유람선이 정박하는 곳이었다. 텅 빈 유람선 하나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타자고?”
“응.”
“아빠 오면 같이 타지.”
“싫어. 엄마랑 둘이 탈래.”
선혜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준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수호가 워낙 완강했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고 선혜는 태준에게 문자를 보내고 제 손을 잡고 질질 끄는 수호를 따라갔다.
올라타기 직전 얼핏 배의 시간표를 보았다.
마지막 운행 시간은 아홉 시. 지금은 아홉 시가 넘은 시각. 타도 되나 싶은데 직원들이 탑승을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와준다. 아니, 우리 티켓도 없는데?
어안이 벙벙한 사이 둘은 유람선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배가 떠나기 시작했다.
수호는 선혜의 손을 붙들고 척척 나아갔다. 유람선이 분명 처음일 텐데 처음이 아닌 것처럼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게 이상했다. 미심쩍게 바라보는데 수호가 선혜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엄마.”
“응.”
“눈 감아 봐.”
“응?”
갑자기 눈을?
“빨리. 응?”
수호가 보채는 바람에 선혜는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수호는 눈을 감고 있는 선혜에게 신신당부했다.
“내가 눈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눈 뜨면 안 돼. 알았지? 실눈도 안돼?”
“알았어. 엄마 잘 데리고 가야 해? 넘어지지 않게.”
“응! 당연하지.”
당차게 대답한 수호가 눈감은 선혜를 이끌고 어디론가 간다. 바람이 부는 걸 보니 갑판 위로 나온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강바람을 타고 향긋한 내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차단된 시각을 제외한 다른 오감을 곤두세우는 때였다.
“엄마. 이제 눈 떠도 돼!”
눈을 뜸과 동시에 맞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선혜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노란빛 조명이 갑판 위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때 아닌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여기저기를 수놓고 바람에 흔들리며 향기를 흩뿌린다.
향기와 불빛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자리에는 선혜가 주인공처럼 서 있었다. 선혜는 제 주위를 둘러싼 조명과 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때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혜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태준이 서 있었다.
“예뻐요.”
그리고.
“아를에 있던 카페테리아 같아.”
태준이 미소 지은 얼굴로 다가와 섰다. 선혜의 손을 살며시 잡아 온다. 연신 주위를 구경하고 있던 선혜는 고개를 돌렸다가 제 손에 끼워지는 반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앞으로도 이렇게 예쁜 곳 많이 데려다줄게요.”
고개 들어 태준을 보았다.
“예쁜 것만 보게 하고.”
한없이 따듯한 태준의 눈빛 때문일까.
“예쁜 것만 듣게 하고.”
계절은 겨울을 향해 가는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수 있게 해 줄게요.”
이곳만큼은 봄 같았다.
“선혜 씨 옆에서 선혜랑 수호 평생 지켜줄게요.”
따듯하고 찬란한.
“우리 이제 같이 살아요.”
나만의 봄.
참 이상한 일이다.
“엄마. 울어?”
왜 눈물이 날까.
선혜는 촉촉한 눈으로 태준과 수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아들, 그리고 남편.
나의 가족.
“대답은요?”
태준이 눈물을 닦으며 답을 보챈다. 선혜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고 대답하는데 목이 멘다. 태준을 바라보니 태준도 눈가가 촉촉했다.
“아빠는 또 왜 울어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물어오는 수호 덕택에 훌쩍이던 둘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다 동시에 수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따듯한 빛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수호는 서슴없이 다가가 안겨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때.
펑- 퍼엉!
멀리서 폭죽이 터져 밤하늘을 장식했다.
아름다운 빛깔이 수없이 하늘을 수놓는다.
“우와!”
감탄하며 소리치는 수호를 바라보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었다.
깊고 따듯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다가갔다.
천천히 감기는 눈, 맞닿는 입술.
수호는 엄마 아빠의 진한 입맞춤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태준과 선혜가 그런 수호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한 세 가족의 웃음소리가 갑판 위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유람선은 그렇게 오래도록 한강 위를 떠다녔다.
행복을 담은 노란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