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00화 (100/109)
  • #100. 죗값

    “이 자식이! 어떻게 지현이를 두고 네가!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

    기주는 눈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태석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고 멱살을 잡아 흔드는 그에게 김 비서가 달라붙었지만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경비와 경호원들이 오고 나서야 기주는 태석에게서 떨어졌다.

    태석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술에 묻어난 피를 닦아냈다.

    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을 같은 사람에게 겪은 적이 있었다.

    태연과 함께 지현에게 줄 프러포즈 링을 고르러 귀금속 매장에 들른 것을 길 가던 기주가 보고 단단히 오해했던 것이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달려들었었다.

    기주의 눈빛은 그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아리송하기만 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뭘 오해하는지 태석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화도 나고.

    “태석아!”

    여러 감정이 들어 복잡한 눈으로 기주를 쳐다보는데 멀리서 시연이 부르며 달려왔다. 현철도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태석은 눈썹을 찡그렸다. 일이 커지겠군.

    “아이고. 갑자기 이게, 이게 무슨 일이니!”

    태석의 얼굴을 안타까이 더듬던 시연이 기주를 홱 돌아보았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기주에게 시연의 호통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이 자식아. 네가 어떻게 지현이를 두고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일로 와! 내가 아주 반 죽여놓을 테니까!”

    다짜고짜 때린 주제에 적반하장인 모습을 보며 태석도 욱하여 기주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때였다.

    “그만.”

    그 사이를 현철이 가로막고 섰다. 아버지가 어깨를 잡는 손길 한 번에 태석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현철은 태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기주 쪽을 응시하였다. 기주는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다가 저를 돌아보는 현철을 보고 움찔하더니 하던 걸 멈췄다.

    현철이 눈짓하자 경호원들이 기주를 풀어주었다.

    기주는 씨근덕거리며 태석을 노려보다가도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현철의 눈빛에 압도당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 레어미디어 한기주 팀장이 아닌가.”

    “…….”

    “신 이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는 거지?”

    “아버지.”

    태석이 끼어들었다.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어머니랑 식사하러 가보세요. 어머니 배고프시겠어요.”

    시연이 배고프겠다는 말에 현철은 시연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밥이 중요하니?”

    하지만 시연은 잔뜩 성난 얼굴로 씩씩댈 뿐이었다. 배고픈 기색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얘기나 들어보고 밥 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현철이 앞장서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기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 거로 우리 아들 팬 거라면.”

    그의 눈이 전에 없이 서늘했다.

    “각오하게.”

    *

    네 사람은 회장실에 딸린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기주는 현철과 태석, 그리고 시연의 앞에서 회사에 퍼진 소문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태석은 기주의 이야기를 듣더니 자괴감이 가득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고 현철과 시연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소문만 믿고 우리 아들한테 주먹을 날린 거라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조카 사진을 그렇게 애지중지 갖고 있는 건데요.”

    “태석아. 너 정말로 수호 사진 갖고 있는 거 있니?”

    시연이 물었다.

    태석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나 있어요.”

    “수호 사진을 네가 왜?”

    “……그게요.”

    태석이 머뭇거리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태준이 선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서 선혜를 뒷조사했던 일들. 그러다 알게 된 수호의 존재.

    눈치 빠른 김 비서는 태석이 말을 하는 동안 문제의 사진을 태석의 사무실에서 갖고 왔다. 태석이 사진을 응접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잘 나온 사진이어서 보관을 한다는 게…….”

    태석이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태석의 말대로 액자에 끼워진 수호의 사진은 버리기 너무 아까울 정도로 잘 나온 사진이었다.

    사진을 바라보던 현철은 한숨을 내쉬며 태석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동생을 아낀다 해도 뒷조사는 너무 과한 행동이었으므로.

    “새 아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네. 불러서 얘기했었어요.”

    “그럼 태석이 너, 수호에 대해서 진작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네.”

    시연의 손바닥이 태석의 등짝을 후려쳤다.

    어쩐지. 저번에 수호의 존재를 전화로 알렸을 때 파안대소를 하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진을 새 아가한테 주지 그랬니.”

    “아.”

    그럴걸.

    왜 명쾌한 깨달음은 이토록 늦게 찾아오는 것인지.

    태석은 헛웃음을 치며 시연에게 맞은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기주와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기주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있었다. 그러다 태석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그 헛소문이겠죠.”

    기주는 멍하니 테이블 위에 놓인 수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점차 사라져 회색빛이 되었다.

    아.

    망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뭘 잘못 알고…….”

    세 명 다 쳐다보고만 있자 기주는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예요? 우리 아들 얼굴 이거 어쩔 거예요?”

    “피해 보상해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시연은 기주를 노려보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태석은 씁쓸하게 웃다가 입술이 따가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무심코 현철 쪽을 보았다.

    태석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현철은 무릎 꿇은 기주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뿜어내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

    화나셨네. 아주 많이.

    태석은 차마 한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자네는 그 소문을 어디서 들은 건가.”

    현철이 조용히 물어왔다.

    “그, 그게……. 대표님께서…….”

    “대표.”

    대표라.

    짧게 중얼거린 현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석에게 말하기를.

    “네 엄마 식사 좀 네가 챙겨 줘라.”

    “여보. 어디 가시게요?”

    현철이 넥타이 안쪽에 손가락을 넣어 느슨하게 만들고는 말했다.

    “레어미디어에 좀 가 봐야겠어. 오랜만에.”

    말릴 새도 없이 현철은 비서를 대동하여 회장실을 나섰다.

    *

    비슷한 시각.

    선혜는 태준과 회사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선혜는 운전 중인 태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통 말이 없다. 간간이 헛기침하는 그의 귓가가 붉었다. 비밀을 들킨 걸 정말 노골적으로 티를 내고 계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선혜 쪽을 돌아본 태준이 물었다.

    “왜 갑자기 웃어요?”

    “그냥요.”

    애매한 답이긴 했지만, 선혜가 웃는 이유를 태준 또한 알고 있었다. 구레나룻 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린 태준이 큼큼, 전보다 커진 헛기침을 내뱉는 때였다.

    선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꺼내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것도 지민에게서.

    [식사하시고 1층 로비로 잠깐 올래요?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선혜의 미간이 단숨에 좁아졌다. 이게 대체 뭔지.

    할 말은 아침에 다 끝냈다고 여겼기에 지민의 연락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무시할까 했지만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비장함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태준 씨, 회사 건물 앞에서 잠깐 세워 줄래요? 1층에서 김 주임님이 잠깐 보자고 하는데.”

    “김 주임이요?”

    “네.”

    선혜를 괴롭힌다는 팀원인 지민이 선혜를 따로 불러내는 게 떨떠름했다.

    “같이 가 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선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태준이었지만 지하에 차를 주차하고 1층으로 가볼 심산이었다.

    곧 회사에 도착하고 선혜는 태준의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갔다. 로비로 향하자 지민이 보인다. 그런데 로비에 있는 건 지민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민영도 있었다.

    선혜가 가던 걸음을 멈추는데 민영이 선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지민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선혜를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둘이나 왔나 궁금하기까지 했다. 선혜는 발걸음을 두 사람 맞은편으로 옮겼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자리에 앉아 선혜가 묻자마자 민영이 나섰다.

    “김 주임한테 얘기 들었어. 두 사람 아침에 일이 좀 있었다면서.”

    민영이 지민을 툭 치며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우리 김 주임이 좀 까칠하고 표현이 서툴러.”

    표현이 서툴다고. 너무 노골적이어서 탈 아닌가.

    “그래서 아침에는 제대로 사과가 안 된 것 같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어떻게든 선혜 씨 마음 풀어주고 싶대. 그래서…….”

    민영이 눈짓하자 지민이 슬그머니 커다란 쇼핑백을 꺼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 유명한 회사의 로고가 쇼핑백 위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지민이 쇼핑백 안에서 장난감을 꺼내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흔히 갖고 놀 수 있는 블록 놀이 세트였다.

    지민이 쇼핑백을 밀며 우물쭈물 말했다.

    “아드님 갖다 주세요.”

    “이걸 왜 주시는데요?”

    “그야……!”

    태연한 반문에 순간 발끈한 지민은 민영이 허벅지를 찌르자 입을 꾹 다물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지민이 입을 열었다.

    “그, 소문 때문에 아드님도 피해를 보셨으니까…….”

    “김 주임님.”

    “네?”

    선혜가 말했다.

    “우리 아들, 이거 있어요.”

    지민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선혜는 손으로 쇼핑백을 지민 쪽으로 밀었다.

    명백한 거절의 표시였다.

    지민의 눈가와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분노로 인해서.

    저게 진심으로 사과하려는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애쓰실 필요 없어요, 김 주임님.”

    “뭐라고요?”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급한 불부터 끄고 보겠다는 생각 아니에요?”

    허를 찔린 지민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민영이 나섰다.

    “왜 그렇게 넘겨짚어, 선혜 씨. 그래도 정성인데 받아보기라도 하지.”

    “사과하려고 하신 분이.”

    선혜가 일그러진 지민의 표정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표정이 왜 저런지 모르겠네요.”

    지민은 분에 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굴이 흡사 야차와도 같았다. 선혜의 말대로 사과를 하려는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황하여 지민을 보고 있는 민영에게 선혜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사과하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않나요? 굳이 만나는 장소를 사람 많은 로비로 정한 것도, 사람 많은 곳에서 선물 안겨주고 이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게 해서 끝내려는 속셈인 게 너무 빤히 보이는데요.”

    이번에 허를 찔린 건 민영이었다.

    “정 그렇게 사과하고 싶으시면 받아드릴게요. 대신.”

    선혜가 덧붙였다.

    “이런 선물 말고 어떤 소문을 어떻게 내셨는지, 왜 소문을 내고도 바로잡기는커녕 즐기셨는지 설명하고 진심으로 사과해 주세요.”

    “아, 진짜!”

    그때였다. 무너지는 자존심에 화가 폭발해 버린 지민이 벌떡 일어난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내가 진심인지 아닌지 선혜 씨가 어떻게 아는데요. 그리고 사람이 두 번이나 사과를 하면 받아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쩜 그렇게 사람이 매정해요?”

    “그러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너무한다, 선혜 씨.”

    민영도 이번에는 지민을 말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아니꼬운 표정으로 선혜를 보며 한마디 거들 뿐.

    “아니, 까놓고 말해서 내가 소문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그냥 술집에서 임 대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새어나갔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나 비굴해질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여기 회사 사람들 다 공범이죠! 다 선혜 씨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고.”

    갑자기 지민이 모두를 싸잡자 다들 불쾌한 눈으로 지민을 보았다.

    선혜 또한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지민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때였다.

    지민의 뒤에서 대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무심결에 그쪽을 바라본 선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애쓸 필요 없다고 했죠? 그래요! 나도 안 해! 안 한다고! 더럽고, 치사해서 진짜…….”

    “더럽고 치사하다라.”

    소리를 빽 내지른 지민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민영이 빠른 속도로 지민의 팔을 쳤다. 돌아본 그녀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뭔가 싶어 천천히 뒤를 돌아본 지민은.

    “……!”

    “…….”

    무표정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현철을 보고 가슴이 쿵 떨어지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까지 쳤다.

    “회, 회장님.”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직원들도 일제히 합죽이가 되어 로비가 순간 싸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꽤 선명했다.

    “더러운 소문이 우리 아들이랑.”

    현철이 말을 하다 말고 선혜 쪽을 보았다.

    “새아가랑 손주까지 엮었다고 해서 주동자를 색출하려고 왔는데.”

    현철이 지민을 보며 생긋 웃었다.

    “덕분에 고생을 좀 덜겠군.”

    “그, 그게요 회장님. 그런 게 아니라…….”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그게…… 아니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현철은 뒷짐을 지고 지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왜 그랬지?”

    지민이 대답하지 않자 현철이 다시 물었다.

    “왜 그랬나.”

    지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우리 새아가가 자네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했나?”

    “……아뇨.”

    “그랬는데 왜 그랬지?”

    “그러게요. 나도 궁금하다.”

    눈앞의 광경에 집중이 쏠려 있던 선혜는 다가온 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따듯한 손이 선혜의 손을 감싸왔다. 태준이었다.

    “왜 그랬어요, 김 주임님?”

    이번에는 태준이 물었다.

    “왜 우리 선혜 씨 뒷담화 하고.”

    “…….”

    “일도 몰아 주고.”

    “…….”

    “소문의 진위를 파악도 하지 않고 입을 함부로 놀리셨어요?”

    지민은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민영은 구석에서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봐서 말리는 척을 하며 빠질까 하고 타이밍을 재고 있는 때였다.

    지민이 눈을 들어 민영을 보았다.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인가 싶어 짠하게 쳐다보는데 어째 눈빛이 달랐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찰나.

    “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설마.

    “나만 선혜 씨한테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저 미친…….

    민영이 발끈하여 지민에게 뭐라고 하려는 찰나.

    태준과 현철의 서늘한 눈동자가 민영을 향했다. 민영은 억울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파닥거렸다.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선혜에게도 SOS를 요청하지만, 선혜 또한 눈빛이 서늘했다.

    민영은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왜 그래, 선혜 씨. 난 그래도 선혜 씨 많이 챙겨 줬…….”

    선혜는 민영이 모른 척하려고 하자, 현철이 등장한 탓에 못 했던 말을 했다.

    “임 대리님. 저 그때 다 들었어요.”

    뭘?

    “우리 엄마 가게 화장실에서 임 대리님이 하신 말이요. 저 그때 화장실에 있었거든요.”

    민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너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제가 벗고 달려들어서 태준 씨 마음이 약해졌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선혜의 말에 기억이 팟 하고 떠올랐다. 그 바람에 민영은 자기도 모르게 반박할 타이밍을 놓쳤다.

    “뭐라고요?”

    태준의 분노 어린 시선이 민영에게 꽂혔다.

    뒤늦게 오해라고, 잘못 들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순간 선혜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분까지 들었으니 부정해봤자 소용은 없을 것이었다. 괘씸죄만 더해질 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얄 뿐이었다.

    어버버 하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의 사원증을 번갈아 본 현철이 말했다.

    “김지민 주임. 그리고 임민영 대리.”

    힘을 실은 현철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잘 기억해 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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