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99화 (99/109)

#99. 기주의 뒷북

기주는 오전 업무를 하는 동안 종종 지민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래.’

원래도 까탈스럽고 순하지 않은 부하직원이긴 했지만 저렇게 심란하고 초조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작업도 시원치 않고 일을 하는 중간중간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 쥐기까지.

반차를 권유해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무심결에 희재 쪽을 바라보고 말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도도하게 업무를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기주는 황급히 회피하며 눈을 깔았다. 그런 그의 귓가가 빨갛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진짜.’

순식간에 몸에 열이 오른다. 지난번 선혜의 엄마 가게에서 회식을 한 날 희재와 실수로 밤을 보낸 이후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희재의 눈을 봤다 하면 이 지경이었다. 오죽 신경이 쓰였으면 살까지 빠졌다.

차라리 필름이라도 끊겼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더욱 또렷해져서 탈이었다.

기주는 머리를 내저으며 그날의 기억을 털어냈다.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는 찰나였다.

마케팅부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레어미디어 대표가 들어왔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로 인사를 받던 대표가 향한 곳은 기주의 책상 옆이었다.

기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표를 바라보았다. 대표는 그런 기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가볍게 턱짓으로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가리켰다.

“왜 연락을 해도 해도 안 받으십니까, 팀장님.”

기주는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했다. 대표의 말대로 대표가 보낸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내용인즉.

“우리 팀장님 오늘 저랑 점심 좀 같이 할까요.”

갑자기, 밥을 같이 먹잔다.

기주의 얼굴에 떠오른 어리둥절함이 더욱 짙어졌다.

“네? 저요?”

“네. 가시죠. 제가 살 테니.”

기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주를 데리고 나가는 대표의 시선이 흘긋 선혜 쪽을 향했다. 보이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기주가 대표와 함께 사무실을 나간 뒤 희재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르지만 다들 점심 먹고 와요.”

희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민이 벌떡 일어섰다. 민영이 호기심이 잔뜩 어린 얼굴로 그 뒤를 쫓았고 이어서 희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혜 씨는 안 나가?”

팀을 나서려던 희재가 문득 물어왔다.

“저는 조금 있다가요.”

태준에게 전달받기로는 점심에 태석과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회의가 끝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연락이 없었다.

사무실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경애 생각이 났다.

전날 잔뜩 취해 들어간 경애의 안위가 걱정된 선혜는 통화를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

.

.

선혜가 향한 곳은 비상구였다. 휴게실로 갈까 하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관두고 이곳으로 왔다.

통화를 시도하니 신호음이 얼마 안 가 경애가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엄마. 괜찮아?”

- 응…… 춘희가 아침부터 들렀다 갔어. 해장국 끓여준다고 야단법석을 떨다 갔다, 얘.

아무렇지 않은 척 투덜거리지만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숙취 너무 심하면 병원 가. 알았지?”

- 알겠어, 얘. 잔소리는.

투덜대는 경애의 목소리 끝에 한숨이 배어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선혜가 물었다.

“엄마. 괜찮아?”

앞서 물은 숙취와는 다른 이유로 힘들어하는 경애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경애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 시간이 흐르면 차차 나아지겠지.

“…….”

- 잊고 살아지겠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공허감이 가득했다. 무슨 말로 엄마를 위로해 주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경애가 말했다.

- 얼른 점심 먹으러 가. 시장할 텐데.

“응. 엄마도 끼니 거르지 말고.”

경애와 통화를 마친 뒤 선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계단 난간에 서서 작은 창 너머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비행기가 지나가는지 하늘에 흰색 실선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떠나가는 비행기를 보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신 걸까.

그러는 와중 비상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사람은 태준이었다.

“여기 있었네요?”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말한 태준이 계단을 올라와 선혜 앞에 섰다.

“뭐 하고 있었어요?”

“엄마랑 잠깐 통화했어요.”

“장모님은 좀 괜찮으시대요?”

“아직 숙취가 남아 있긴 한 모양이더라고요.”

“장모님 걱정 많이 돼요?”

“엄마도 엄마지만.”

선혜는 차마 말을 마치지 못했다. 다시 시선을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비행기는 사라지고 긴 실선이 상흔처럼 남아 있었다.

오래 바라볼 수가 없음에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먹먹하다. 자꾸만, 자꾸만.

일렁이는 속을 달래고자 심호흡을 하는 때였다. 태준이 손을 뻗어 선혜를 품에 안았다.

“이러면 좀 괜찮아지려나.”

서툴게 건네는 위로였으나 품이 가히 따듯하여 넘치게 위안이 된다.

“걱정하지 마요.”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 잘 될 거예요.”

주문처럼.

“걱정할 일 없을 거예요, 선혜 씨.”

선혜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자 태준 또한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내가 그렇게 해줄게요.”

불안으로 일렁이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정말, 태준의 말대로 다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선혜는 간절히 바랐다.

*

태석이 선혜와 태준에게 밥을 사준다고 한 곳은 고급 한정식 집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정원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하나둘 잎을 떨구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만큼 겨울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요즘 회사에 별일 없지?”

태석이 회사의 안부를 묻는 말에 태준과 선혜 둘 다 동시에 움찔했다. 태석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태준이 이실직고를 했다. 요즘 회사 내에 퍼져 있는 이상한 소문에 대해서.

태석은 불쾌하고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간 남 험담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 꼭 있지. 괜히 물 흐리게 말이야.”

태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형이 가서 뒤집어엎어 줄까?”

“아뇨. 괜찮아요.”

말을 한 건 태준이 아니라 선혜였다. 태석과 태준 모두 선혜를 돌아보았다.

“엎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제수씨가요?”

“네.”

“어떻게?”

“방법이야 있지 않을까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하는 목소리와 태도에 흔들림 같은 건 없었다. 태준은 선혜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끔벅였다. 선혜의 말에 꽤 놀란 얼굴이었다.

태석이 그런 태준을 보다가 선혜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뭐. 그럼 어디 한번 마음껏 부딪혀 봐요. 뒷일은 나랑 태준이가 책임져 줄 테니까.”

선혜는 태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태준의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다. 걱정이 되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 선혜는 안심하라는 듯 손을 잡아주었다. 지켜주겠다는 뜻도 함께 담아서 힘주어 잡아주었다.

“그나저나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진짜 난리가 나고도 남을 텐데. 다들 겁도 없다 진짜.”

그 말에 태준도 격하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철이 알게 된다면 주동자가 누구인지 샅샅이 물색하여 제대로 죗값을 받게 할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허허거리고 팔불출처럼 굴지만 화가 나면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사람이 바로 현철이었다.

곧 직원이 음식을 내어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 말고 문득, 태석이 생각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선혜는 물을 마시다 말고 뭔가 싶어 쳐다보았다. 그건 태준도 마찬가지.

혹시 선혜의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한 것에 대해 선혜에게 물을까 싶은 데에 생각이 다다랐다. 우울해하던 선혜를 겨우 달랜 게 무색해질까 싶어 태석에게 눈치를 주려는데 뜻밖의 말이 태석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태준이 이 녀석, 프러포즈 어떻게 했어요?”

“풉!”

눈치 없는 태석의 질문에 태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물이 그대로 뿜어져 나왔다.

미친 듯이 콜록거리는 태준과 눈이 동그래진 선혜를 보며 태석은 아차 싶었다.

설마.

“아, 혹시 아직…….”

기침하던 태준이 벌게진 얼굴로 태석을 노려보았다. 태석이 미안한 표정으로 허허 웃자 수저를 위협하듯 치켜들었다. 씩씩거리다가 선혜의 눈치를 보는데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겠지만 다 알아챘을 게 분명했다.

서프라이즈로 놀래 주려고 했는데 형 때문에 다 망했다.

“억!”

태준은 테이블 밑에서 태석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발로 찼다. 태석은 종아리를 잡고 끙끙거리느라 한동안 허리를 들지 못하였다.

*

한편 같은 시각.

지민은 민영과 근처 레스토랑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민은 좀처럼 먹지를 못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김 주임.”

“그래도요.”

일하는 내내 불안했다.

선혜가 태준에게 자기가 소문을 퍼뜨렸다고 이르면 어쩌나, 하고.

힘들게 들어온 회사다. 그만큼 자부심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자랑도 실컷 해 놓은 참이었다. 때문에 제 발로 나가기엔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인데 이런 복병을 마주하니 눈앞이 새하얗다.

해고 당하면 어쩌지.

지민은 최악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당하게 제 사과를 거절하던 선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당하기만 하는 바보인 줄 알았다. 도도한 척하지만 완전 숙맥이라고.

근데 아니었다.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자꾸만 났다. 식기를 쥔 손에 땀이 찼다.

지민을 달래주고 있긴 하지만 민영은 민영대로 불안한 참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 직급이 강제로 낮아졌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민과 달리 민영은 나이가 꽤 많은 편이라 이직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무엇보다 귀찮기도 했고.

그러니 괜한 불똥이 취기 전에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정 불안하면 나랑 이따가 같이 선혜 씨 선물 사러 갈까?”

“어떤 거로요?”

이미 먹히지 않은 방법이기에 기대 없이 물은 지민은.

“애한테도 미안하게 됐다면서 애 장난감이나 이런 걸 사 주는 거지. 그리고 거절 못 하게 사람들 많은 데서 건네줘. 아침에는 사람들 앞에서 돌려주기 뭐하니까 사무실에서 돌려준 것 같던데. 사람들이 많으면 민망해서라도 받을 거 아냐.”

민영의 말에 순간 눈을 빛냈다.

선혜가 아들인 수호를 끔찍이 여긴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혼자 키운 아들이니 오죽할까.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라도 선물을 마지못해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풀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이 근처에 장난감 매장 같은 거 있어요?”

“찾아보면 되겠지?”

민영이 핸드폰으로 근처 장난감 매장을 검색해서 들이밀었다. 장난감 매장 리스트를 눈여겨보는 지민의 눈이 희망을 담고 반짝였다.

*

비슷한 시각. 기주는 레어미디어 대표와 식당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가시 방석이 따로 없다.

친한 사이도 아니니 갑자기 따로 불러낸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런데 대표는 혼자 속 편하게 밥만 퍼먹고 있다. 기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표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밥을 한술 떴다.

기주가 밥 먹는 걸 보던 대표는 냅킨으로 입을 슥 닦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 회사 많이 심란한 거 아시죠?”

기주는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요새 바쁜 철이긴 하죠.”

“그게 아니라.”

대표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기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팀장님. 부하직원 단도리 좀 잘합시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기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상한 소문으로 회사 분위기가 말이 아니에요,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묻는 겁니까?”

소문을 모르는 기주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즘 희재를 신경 쓰느라 사내에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 분위기가 어땠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가늠하듯 기주를 보던 대표가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뭐야. 진짜 모르나 봐요? 사내에 소문이 파다한데.”

대표가 입을 열었다.

“디자인 팀 윤선혜 씨 말이에요. 오너 일가랑 아주 더럽게 얽혔더라고.”

기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선혜를 좋게 보고 있던 기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대표가 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표정이 점차 변해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기주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말도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잘못 아신 게 아니실까요?”

그럴 리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태석은 팔불출기가 다분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 옛날 눈물을 머금고 지현이를 그의 옆으로 보내주지 않았던가.

“나도 말도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영 아닌 말도 아닌 것 같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봤거든. 신 이사 사무실에서.”

대체 뭘. 미간을 좁히고 바라보는데 대표가 속삭였다.

“윤선혜 씨 아들내미 사진을 말이야.”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쳐다보자 대표가 말했다.

“생각을 해 봐. 조카가 걔 하나도 아닌데 조카 딸 사진은 내가 그 사무실에 몇 번을 가도 본 적이 없거든. 근데 그 녀석 사진만 고이 액자에 끼워놨단 말이지.”

대표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이 회사, 저 회사 많이 돌아다니면서 경영해 봐서 아는데, 부자들 중에 깨끗한 족속들이 하나 같이 없더라고. 여기는 좀 괜찮나 싶었는데. 이렇게 지저분하게 엮여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어?”

“…….”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더라. 잘 나가는 프리랜서가 갑자기 입사라니. 애 키우기에는 프리랜서가 적격인데 말이야. 다들 프리랜서 하고 싶어 난리들이잖아? 뭣보다 그때 신 이사 반응이 좀 이상했어. 지나치게 좋아하더라고.”

“…….”

“미인 앞에 장사 없어, 그치?”

기주가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말아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사실을, 대표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한 팀장? 왜 그…….”

쾅!

그때였다. 기주가 벌떡 일어나 밀린 의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대표는 움찔거리며 기주를 쳐다보았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화난 기주의 얼굴이 야차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하, 한 팀장.”

“……이 x새끼가.”

나지막하게 욕을 읊조린 기주는 그대로 식당을 뛰쳐나갔다. 대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넘어진 의자를 쳐다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뭔가, 큰 사고를 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태석은 선혜와 태준과 헤어진 뒤 현성출판사 본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의 손이 종아리를 어루만진다. 아까 태준에게 맞은 부분이었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아직도 욱신욱신거린다.

하지만 인상을 찌푸림도 잠시뿐.

태준에게서 전해 들은 소문을 되짚어보던 태석의 눈가에 냉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 비서.”

“네, 이사님.”

“레어미디어에 퍼진 소문이 있다는데 그것 좀 알아봐 줘. 주동자 누군지 알아내서 나한테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대답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 현성출판사 본사에 도착했다.

태석은 기분 좋게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때마침 나란히 사이좋게 나오는 현철과 시연을 발견했다.

육십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흐뭇하게 웃던 태석이 알은체를 했다.

“어머니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늬 아버지랑 식사 좀 같이 하려고 왔지. 밥 먹고 오는 길이야?”

“네. 태준이랑 제수씨랑 셋이서 먹고 왔어요.”

“어머. 셋이 먹을 줄 알았으면 같이 먹을 걸 그랬다.”

시연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다음에 그러죠, 뭐.”

“그래. 태준이네는 별일 없다지? 둘이 대체 합가는 언제 한다니?”

태석은 헤어질 때 보았던 태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았다.

“곧 할 것 같아요.”

“그래. 아유. 바쁜데 내가 붙잡았네. 가요, 여보.”

현철이 시연에게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태석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멀어지는 부모님의 사이좋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걸어가는 때였다.

“신태석!”

태석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는데 뜻밖의 인물이 있다. 기주였다.

한기주가 여긴 어쩐 일로.

의아한 듯 바라보는데 뭔가 데자뷔가 생겨난다.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기주가 지금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변모한다. 추억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좋지 않은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라 그 위로 덮어졌다.

어, 이거. 전에도 한 번…….

하지만 태석은 생각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퍼억!

기주의 주먹이 사정없이 태석의 얼굴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꺅!

직원들의 비명이 난무하였다. 그사이로 경악한 시연의 목소리가 쨍하니 로비를 울렸다.

“태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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