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각성
태준과 수호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선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도 좀처럼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먼저 자라니까.”
“싫어요. 엄마 기다릴 거예요.”
태준은 수호의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시계를 쳐다보았다. 선혜가 황급히 집을 나간 지 어느덧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설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준도 연락이 없는 선혜 때문에 내심 불안하던 차였다. 점점 빠르게 떨리는 다리가 그 증거였다. 결국 태준은 불안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엄마 찾으러 가자.”
“어디로요?”
“할머니네 가게로.”
집을 급하게 뛰쳐나가기 직전 통화한 상대는 경애로 보였다. 경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수호를 데리고 현관으로 향하는 때였다.
삑삑삑삑. 도어락 눌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선혜가 힘없이 현관으로 발을 들였다.
반짝 불이 들어온 센서등 아래 선혜의 얼굴이 드러나자 태준과 수호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수호가 단숨에 현관으로 달려가 선혜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엄마.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선혜의 두 눈이 눈물에 절어 퉁퉁 부어 있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뺨 곳곳에 선연했다.
수호를 보며 애써 웃으려 했지만 완전히 가시지 않은 슬픔 탓에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호를 보자 수호를 구해주려 몸을 던졌던 석주가 떠올라 울컥하고 말았다. 말라가던 눈물샘이 다시금 젖어들었다.
“엄마, 울지 마, 응? 울지 마아…….”
울지 말라며 선혜를 달래던 수호의 눈에도 덩달아 눈물이 맺혔다. 선혜는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허리를 숙여 수호를 꼭 끌어안았다. 수호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선혜의 등을 꼭 붙들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는 모자에게 태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팔을 뻗어 둘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울지 마라 다독이는 손길과 넓은 품이 한없이 따듯했다. 선혜는 그 안에서 다시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
울다 지친 선혜와 수호는 금방 잠이 들었다.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잠든 선혜와 수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태준은 손을 뻗어 두 사람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자초지종은 춘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한참 울다 집에 들어간 선혜가 걱정되어 전화한 춘희는 선혜 대신 전화를 받은 태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침대 옆 협탁에는 선혜가 석주에게 받은 편지, 놀이동산 입장권, 그리고 생명보험 증서가 놓여 있었다. 태준은 생명보험 증서를 바라보다가 문득 기침하다 객혈하던 석주를 떠올렸다.
많이 편찮아보이시던데. 아픈 몸을 끌고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
저절로 입 밖으로 한숨이 새어나가는 때였다.
꼭 감긴 선혜의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가느다랗게 흘러내렸다. 슬픈 꿈을 꾸듯 잠든 얼굴이 처연했다. 태준은 손을 뻗어 선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선혜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내가 찾아줄게요.’
선혜 씨가 더는 슬퍼하지 않도록.
더는 아파하지 않도록.
그리고, 더는 후회하지 않도록.
결심을 굳힌 태준은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아침. 태준은 밤새 잠을 못 이룬 탓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출근 준비를 시작할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시계를 보고 허둥거리며 일어나 침실을 나왔다.
수호와 선혜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태준은 현관을 막 나서는 선혜와 수호를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침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둘 다 태준 쪽을 돌아보았다.
“일어났어요?”
태준이 현관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니, 왜 나는 깨우지도 않고…….”
“너무 곤히 자길래요. 오늘은 내가 수호 유치원에 데려다줄게요. 태준 씨는 출근 준비하고 곧장 회사로 가요.”
태준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선혜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이따가 회사에서 봐요.”
수호가 손을 흔들고 곧 현관문이 닫혔다.
태준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선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수호 또한 울어서 눈이 조금 부어 있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여상한 태도였다.
‘근데 오늘따라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하지만 잠결에 얼핏 봐서 그런지 정확히 집어낼 수 없었다. 태준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 지각하겠네.”
그러고는 부산스럽게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수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옆에 선 엄마를 힐끔 바라보았다.
“엄마.”
“응?”
수호가 물끄러미 선혜를 보다 물었다.
“괜찮은 거야?”
선혜가 엷게 미소지었다.
“그럼.”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어제 엄마는, 아주 많이 아파보였는데.
무엇보다 선혜가 오늘따라 뭔가 다르다는 건 수호도 어렴풋이 눈치 챘다.
평소와는 뭐가 다른지 곰곰이 살피던 수호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선혜의 눈이 평소보다 서늘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엄마의 손을 꼭 부여잡는 때였다.
“수호야.”
선혜가 수호를 불렀다.
“응?”
“요즘에도 유치원에서 아빠 없다고 놀리는 애들 있어?”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나 싶어 수호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선혜가 내려다보자 고개를 저었다. 입학 초반에는 그런 무리들이 있기야 했지만 수호의 무신경함에 질려 아이들이 놀리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없는데.”
“수호야 앞으로 누가 너 또 괴롭히고 그러면.”
선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이받아.”
수호는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박였다.
“뭐든 너 괴롭히려고 하는 애들 있으면, 앞으로는 그냥 들이받아버려.”
“전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무시하라고 그랬잖아.”
“그랬지. 근데.”
선혜가 빙긋 웃었다.
“이제 안 그래도 돼.”
수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엄마가 갑자기 왜 이러지.
오늘따라, 꼭 다른 사람 같았다.
*
출근을 하자마자 태석은 김 비서를 통해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점심 약속이 취소됐다고?”
“네. 대표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고 합니다.”
점심에 약속을 잡아 놓았던 대형 서점 대표가 약속을 취소한 것이다. 말이 점심 약속이지 실상은 미팅이나 다름이 없었다. 밥 먹으면서 일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태석이기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어버린 점심시간에 뭘 할까 하다가 문득 태준과 선혜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가 밥을 사주려던 계획이 흐지부지된 적이 있었지.
오늘이 만회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석은 곧장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끊기고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나야 태준아. 회사야?”
- 응. 이제 막 도착했어.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오늘 형이 점심에 시간이 뜨는데 너랑 제수씨 밥이나 사 줄까 해서. 저번에 너무 다짜고짜 찾아가는 바람에 못 사줬잖아.”
- 그래. 알겠어. 선혜 씨랑 시간 비워 놓을게.
“그래.”
용건을 마치고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였다.
- 형!
다급한 태준의 목소리에 태석이 얼른 핸드폰에 귀를 갖다 댔다.
- 미안한데,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 무슨 부탁?”
의아하게 되물은 태석은.
- 나 사람 하나만 찾아줘.
예상 밖의 부탁에 눈을 깜박였다.
다짜고짜 사람을 찾아달라니. 언뜻 데자뷔가 일었다.
“야. 너는 무슨 형이 흥신소 직원인 줄 아냐. 옛날에도 그러더니 또 사람을 찾아달래.”
마치 그때와 같았다. 프랑스에서 부랴부랴 돌아와 선혜를 찾아달라고 했을 때와 말이다.
- 부탁할 사람이 형밖에 없어서 그래. 부탁 좀 할게.
“누굴 찾아 달라는 건데?”
- 선혜 씨 아버지.
“뭐? 제수씨네 아버지 안 계시다고 하지 않았어?”
- 그게, 말하자면 복잡해. 최대한 빨리 찾아줘. 좀 급하거든.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하니 있는데 태준이 석주의 이름 세 글자를 말했다. 태석은 알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매만지다가 앞에 서 있는 김 비서를 보았다. 김 비서는 이미 통화 내용을 듣고 내려지지 않은 업무를 미리 알아챘다.
“찾으실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태석이 입을 열었다.
“윤석주. 최대한 빨리 좀 부탁해.”
지시를 받은 김 비서는 고개를 깍듯이 숙이고는 이사실을 나섰다.
*
태준은 태석과의 통화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 그의 입술 밖으로 한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부디 찾았을 때 너무 늦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걱정을 하는 때였다.
퍽! 누군가가 등을 거세게 후려쳤다. 느닷없는 공격에 놀라 돌아보니 형주가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뭘 아침부터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어. 기운 빠지게.”
태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둘러대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출근을 앞둔 사원들이 꽤 많이 몰려 있었다.
한 번, 아니 두 번 정도 엘리베이터가 오가야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사람들이 태준을 힐끔거리다가 고개를 숙여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흥미 가득한 눈빛을 한 사람이 여럿 보였다.
“근데 오늘은 선혜 씨랑 출근 같이 안…….”
“수호 엄마요?”
태준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묻던 형주는 대뜸 태준이 언성을 높이자 눈을 끔벅였다.
“우리 수호 엄마, 수호 데려다주고 출근할 거라 좀 늦어요, 과장님.”
말은 형주에게 하고 있지만 눈은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태준이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옆에 있는 형주가 움찔거릴 정도로 거센 힘이었다.
“내, 아들! 어? 제 ‘아들’ 데려다주고 금방 올 거라고요!”
“아니, 알겠어. 근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형주는 의아해하면서도 태준의 기세에 눌려 어버버거렸다. 태준은 콧김을 쉬익쉬익 내뱉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이 미친 황소 같았다.
주위에 있는 사원들은 미친 사람 보듯 태준을 보다가 태준과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헛기침 소리 사이로 태준의 흥 하는 콧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
태준의 말대로 선혜는 수호를 데려다주고 회사로 금방 왔다. 성난 태준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라 엘리베이터 앞은 조용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건, 지민이었다. 선혜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지민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혜도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곧 지민과 선혜를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지민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유명 제과점 로고가 그려진 쇼핑백에는 고급 수제 쿠키 세트가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은 덕택에 꽤 긴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는 선혜와 지민 둘만이 있었다.
지민은 뭔가를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다가 선혜의 눈치를 보더니 손에 들린 쇼핑백을 선혜에게 내밀었다.
선혜가 의아한 얼굴로 지민을 보는데 지민이 말했다.
“받아요.”
“이걸, 왜.”
“그…….”
지민이 쥐어짜듯 말했다.
“어제 제대로 사과를 못 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샀어요.”
“…….”
“……미안했어요, 어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건네는 사과였다.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은 미안함보다 수치심에 가까웠다.
선혜는 지민의 얼굴에 눈을 고정한 채 천천히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선혜가 쇼핑백을 받아들자 지민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위층에 도착했다. 지민은 완전히 풀어진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사무실로 들어온 지민은 안심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민영이 눈짓으로 잘 해결됐냐고 묻기에 잘 해결됐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정말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퉁치면 된 거라고.
그러니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때였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선혜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선혜는 자신의 자리로 가지 않고 곧장 지민에게 다가가 섰다. 그리고 쇼핑백을 탁 소리가 나게 지민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지민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선혜를 올려다보았다.
“뭐예요? 이걸, 왜.”
“저, 안 받으려고요.”
“네, 네?”
당황한 지민이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그런 지민을 향해 선혜는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지민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지고, 벌어진 입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 그래도 사람 성의를 봐서 받아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도리어 성을 냈다. 반면 선혜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제가 꼭 그걸 받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지민이 돌처럼 굳었다.
“사과를 받는 건 제 마음 아닌가요.”
“…….”
“김 주임님도 내키지 않아 보이시는데 억지로 그러실 필요 없어요.”
“무슨…… 나는…….”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말에 뼈가 빼곡했다.
지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선혜는 그런 지민을 보다가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둘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상황을 지켜보던 기주가 눈치 없이 다가와 물었다. 지민은 제가 잘못한 게 있어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지민의 편인 것 같았던 민영은 지민의 입지가 불리해지자 발을 쏙 빼고 모르는 체를 하고 있었다.
지민의 편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선혜를 나무라는 사람 또한 없었다.
선혜는 허탈한 마음에 실소를 흘렸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몸을 사렸을까.
이렇게 부딪혀나 볼걸. 바보같이 당하지 말고. 막상 해 보니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문득 석주 생각이 났다.
난생처음으로,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