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사이다
한편. 태준은 수호를 데리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 많이 늦는대요?”
“밥만 먹고 온다고는 했는데.”
밥먹는 상대가 문제였다.
이복동생이라던 카페 아르바이트생. 선혜에게 함부로 굴었던 것이 생각나 걱정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회사 분위기 이상하던데.’
태준도 하루 종일 느꼈다. 이상하리만큼 따갑던 사람들의 시선. 늘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동정이 깃든 시선으로 저를 보더라. 그게 참 이상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어? 엄마다.”
고개를 갸웃하던 태준은 수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수호가 반가운 얼굴로 차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큰 도로변에 있는 레스토랑. 그곳에 선혜와 고은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분위기가 제법 심각했다.
둘이 뭔가 대화를 나누는 듯 선혜가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고은의 태도가 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혜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팔짱을 끼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선혜를 바라보는 눈빛이 잡아먹을 듯 형형했다.
태준은 초조하게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핸들을 굳게 부여잡더니 수호에게 몸을 살짝 기울였다.
“수호야.”
차창 너머로 엄마인 선혜를 빤히 쳐다보던 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저기 가서 밥이나 먹을까?”
“엄마 있는 데서요?”
“응. 대신.”
태준이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엄마 몰래.”
“왜요?”
“그냥.”
수호는 의아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수호의 머리를 태준이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곧 파란 불이 켜지고 태준의 차는 선혜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
“너라며. 헛소문 꾸며낸 거.”
선혜의 말에 고은은 팔짱을 끼며 가볍게 실소했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한참을 웃다가.
“무슨 소문?”
발뺌을 한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여전하다, 너는.”
비아냥 섞인 말에 고은이 금세 정색을 하며 휙 돌아보았다. 선혜는 형형한 고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 안에 이전과 같은 체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고은이 아는 선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과 관련된 헛소문에 나서기는커녕 묵인하고 종내에는 체념해 버린 인간이었는데.
자신의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간인데.
자신이 알던 선혜와 다른 모습에 심히 당혹스러운 고은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물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선혜는 태연한 척을 가장하는 고은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우습다.
이렇듯, 조금만 건드려도 동요하고 틈을 보이는 너인데.
지금까지 참아온 게 바보 같이 느껴져서 말이다.
하지만 이젠 참지 않으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과, 그 아들만큼이나 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소문을 꾸며낸 너를.
도저히 가만둘 수가 없으니.
이이제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알아봤는데.”
선혜가 입을 열자 고은이 고개를 들었다.
“김지민 주임이 그러더라고. 그 소문의 출처가 너라고.”
“그거 확인하려고 부른…….”
“아니. 확인이 아니라.”
선혜가 냉소적인 투로 덧붙였다.
“따지려고 부른 건데.”
그와 동시에 핸드폰으로 녹음기를 켰다.
*
“저, 손님.”
주문을 받으러 온 레스토랑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태준을 보고 있었다. 손님에게 주문을 하라며 메뉴판을 줬더니 얼굴을 가리고 한 곳을 유심히 쳐다보기만 할 뿐, 하라는 주문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문, 안 하세요?”
직원이 재촉하듯 묻자 태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안한 얼굴로 웃으며 메뉴판을 들여다보았지만 금세 시선은 메뉴판 너머 선혜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직원이 한숨을 내쉬는 때였다.
“아저씨. 저는 함박 스테이크 세트 하나 주세요.”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수호가 직원에게 메뉴를 주문했다. 잠시 얼떨떨해하던 직원은 수호의 야무진 눈빛을 보고 서둘러 주문서에 적힌 메뉴를 체크했다.
“그리고 저희 아빠는 여기서 양 제일 많은 걸로 주세요.”
“양이 제일 많은 거?”
“네. 저희 아빠 엄청 많이 드시거든요.”
“그…… 아드님이 말씀하신 메뉴로 준비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손님?”
직원이 태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준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마치고 나서도 수상쩍은 티를 잔뜩 내며 선혜 쪽을 힐끔거리며 귀를 기울이는 태준이다. 그 모습을 보던 수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빠.”
“어, 어?”
“그러지 마요, 좀. 들키겠어요.”
태준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던 수호는 선혜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슬그머니 고개를 빼 돌아보는 솜씨가 태준보다 나았다.
그런데 그런 수호의 눈에 선혜 쪽을 빼꼼히 바라다보는 다른 사람이 눈에 띄었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그때 수호의 머릿속에 팟 하고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처음으로 가 보았던 엄마의 회사.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에 들렀던 카페.
그곳에서 나오다 마주친 사람이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저를 보았던 사람.
‘저 아줌마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멀리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카페 매니저였다.
*
매니저는 태준과 마찬가지로 서툴게 고은과 선혜가 앉은 자리를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고은이 걱정돼서 오긴 왔는데 혼란의 연속이다.
고은이 자신이 알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겸손하고 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팔짱을 끼고 헛웃음을 치는 얼굴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아는 고은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입이 자꾸만 말라서 물에 계속하여 손이 갔다. 지나가는 직원에게 물을 새로 더 달라고 한 뒤 다시 물잔을 채워 입가로 가져가는 때였다.
“그거 매니저가 잘못 들은 거야. 잘못 듣고 성화를 부리는 걸, 김지민 주임이라는 사람이 잘못 들은 거라고!”
“풉!”
별안간 들려오는 고은의 목소리에 매니저는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뭘 잘못 듣고, 누가 성화를 부렸다고?
귀를 의심하여 뒤를 휙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
이쪽을 바라보는 선혜와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에는 놀란 듯했지만 금세 차분해지는 표정. 매니저에게 잠깐 향했던 시선은 곧바로 고은에게 되돌아갔다.
“그래? 그럼 네가 아니라 그 카페 매니저에게 따져야 한다는 거네?”
“당연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매니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성화를 부리는 걸 지민이 들은 건 사실이긴 했으니.
“근데 우리 수호가 이사님을 부를 때, 매니저는 카페에 없지 않았나.”
순간 고은의 눈이 흔들렸다.
“우리 수호는 분명 네 앞에서 이사님을 불렀는데. ‘아빠’가 아니라 ‘큰아빠’하고 말이야. 우리는 매니저님을 카페 나서던 길에 봤는데.”
“……그.”
“그래도 매니저가 들었다는 게 맞다는 거지? 너는 상관없고.”
“그래.”
“그러면 나 그 매니저라는 사람한테 따져도 괜찮은 거지?”
고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말이 맞다면, 내가 따져야 할 건 네가 아니라 그 카페 매니저라는 사람이니까.”
선혜가 매니저가 있는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마침 저쪽에 계시는데.”
고은이 눈을 부릅뜨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는 매니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고개를 휙 돌리는 고은의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들었을까?
만약 듣지 않았다면 발뺌하면 그만이다. 매니저는 윤선혜한테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심리를 잘만 이용하면…….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 그거 매니저가 잘못 들은 거야. 잘못 듣고 성화를 부리는 걸, 김지민 주임이라는 사람이 잘못 들은 거라고!
고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건 분명 자신의 목소리. 심지어 자기가 방금 했던 말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선혜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목소리는 분명 선혜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럼 나 이거 저기 앉아 계신 매니저님께 들려드리면서 말해 볼게.”
“……!”
“네가 이렇게 말했는데, 사실이냐고.”
선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이었다. 고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혜의 핸드폰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짧은 팔로는 한계가 있어 무용지물. 갑자기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휘청이는 고은의 어깨를 선혜의 손이 붙들어 잡았다.
“왜 그렇게 불안해 해, 고은아.”
고개 숙인 선혜가 속삭였다.
“꼭 거짓말한 사람처럼.”
고은은 그제야 알았다. 선혜가 다 알면서도 캐물었다는 사실을.
등 뒤로 소름이 죽 끼쳐오는데 선혜가 고은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고은은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선혜도 다시 자리에 앉아 고은을 쳐다보았다. 한숨을 나직이 내쉰 선혜가 입을 열었다.
“너지. 헛소문 꾸며낸 거.”
고은이 힐끔 선혜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녹음 재생화면만 떠올라 있을 뿐 이번에는 녹음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고은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선혜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태도였다.
뻔뻔하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한 고은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선혜가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처음부터 고은과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엄마인 경애와 다 같이 살지 못한 건 속상한 일이었지만, 그 마음을 계모인 예진과 고은을 미워하는 것으로 한풀이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기왕 같이 살게 된 거 잘 지내보고 싶었는데, 고은은 처음부터 선혜에게 적대감을 가졌다. 계모인 예진도 마찬가지.
선혜는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되돌리기엔 너무 먼 길을 왔겠지만 그래도 오해가 있다면 푸는 게 서로 마음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혜의 기대를 산산이 부서뜨리듯, 고은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재수 없어서.”
“뭐?”
“네가, 너무 재수 없어서.”
댐이 무너지듯,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왜 너는 노력 없이 다 가지는 건데.”
고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도 갖고 싶었어.”
서러움에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갔다.
“외모도, 재능도, 사람들의 관심도. 그리고…….”
“…….”
“아버지의 관심도.”
고은의 말에 순간 선혜는 멍해졌다. 제가 들은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고은은 그런 선혜의 표정을 보며 섧게 웃었다.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다 가져가는 네가, 너무 싫었어.”
말을 마친 고은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황급히 손으로 닦아내 보지만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결국 고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혜는 우는 고은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동정이라고는 들지 않았다.
그저.
“하.”
웃음만 나왔다.
피해자인 양 우는 고은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근데 고은이 한 말 중에 신경 쓰이는 말이 있었다.
아버지의 관심이라니.
그 말을 곱씹는 때였다.
자박거리는 발걸음이 빠르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테이블 옆에 우뚝 섰다. 돌아본 선혜는 수호임을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얘가 여긴 어떻게?
“아줌마. 왜 아줌마가 잘못하고 울어요?”
고은이 천천히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려놓고 수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줌마가 우냐고요.”
수호는, 아주 많이.
“아줌마가 우리 엄마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잖아요.”
“수호야.”
뒤늦게 허둥거리며 달려온 태준이 수호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수호가 그런 태준의 손을 잡아 내렸다. 태준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수호가 태준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리고 나요, 우리 아빠 아들이에요.”
고은의 멍한 시선이 태준과 수호를 오갔다.
“그러니까 이상한 말 하고 다니지 마세요. 또 그러면…….”
수호가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혼내줄 거예요.”
“하!”
고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때, 수호가 검지와 중지를 올리더니 아이 투 아이를 시전했다. 지켜보고 있겠다는 듯이.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왔는지. 태준과 선혜는 망연한 얼굴로 수호를 바라보았다.
고은에게 경고를 마친 수호가 선혜를 휙 돌아보았다.
“가자, 엄마.”
그러더니 선혜의 가방을 손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선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야. 엄마 가방 줘.”
별안간 수호가 걸음을 멈추고 선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
“응?”
조금 긴장하며 아이의 말을 기다리는 때였다.
수호가 엄지를 척 하니 들어올렸다.
“내가 지금까지 본 엄마 중에, 제일 멋졌어.”
선혜의 입가가 서서히 휘어지더니 웃음이 짤막하게 터졌다.
가방을 가져가려던 손으로 선혜는 수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머리 위로 태준의 칭찬이 내려앉았다. 선혜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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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을 고은은 씨근덕거리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힐끔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매니저가 보인다.
‘못 들은 것 같지.’
그나마 선혜가 매니저에게 따져 묻는 건 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또각또각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만 매니저가 고은의 앞에 섰다.
고은은 지금 매니저를 막 처음 본 것처럼 반가운 얼굴을 했다.
“어머, 매니저님. 여긴 어떻…….”
짝! 소리와 함께 고은의 고개가 돌아갔다.
씩씩거리던 매니저가 빽 소리쳤다.
“이게 지금 어디서 약을 팔아! 뭐? 누가 뭘 어쩌고 저째? 이게 진짜!”
고은이 매니저를 휙 돌아보았다. 다짜고짜 맞아서 눈이 반쯤 뒤집혀져 있었다.
“지금 저 때리신 거예요? 이거, 폭력이에요!”
“폭력? 그럼 나는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야! 나한테 덤터기를 씌워? 한번 해 볼 테면 해 봐! 맞고소 때려버리면 그만이니까!”
느닷없는 소란에 레스토랑 직원들이 달려와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가게를 나서던 선혜는 뒤늦게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이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엄마. 왜 웃어?”
수호가 문득 물었다. 선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분이 좋아서.”
사이다를 들이켠 듯, 속이 뻥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