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95화 (95/109)
  • #95. 너라며

    선혜가 자신의 메시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지민은 키득거리며 메시지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희대의 사기꾼이야 윤선혜는.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일 수가 있는 건지. 애나 엄마나 똑같이 영악해서는.]

    그런데 메시지를 잔뜩 보낸 지 수 분. 분명 읽은 표시가 나는데 답장이 없어 의아해하던 지민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헉!’

    자신이 메시지를 보낸 대상이 민영이 아닌 선혜라는 것을. 저번에 의도적으로 잘못 보낸 척을 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로 헷갈려버리고 만 것이다.

    놀란 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잘못하다 걸린 사람답게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뒤 슬그머니 고개 들어 파티션 너머를 바라보았다. 선혜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깐 채로 있었다. 이전에 그랬듯 별 동요 없는 모습에 지민은 안도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괜찮겠지.’

    자기가 싫어하는 내색을 팍팍 낼 때도, 실수인 척 뒷담화를 메시지로 보내며 눈치를 줬을 때도, 거기에다 아버지를 통해 뒷담화한 내용을 들었을 텐데도 가만히 있던 선혜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안심하는 때였다.

    맞은편에서 선혜가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본 지민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선혜의 눈과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런데 일을 하는 척 타자를 두드려도 선혜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야. 이번에도 아무 말 못 할 거면서 뭘 저렇게 쳐다 봐?’

    아니꼬워 입술을 불퉁하게 내미는 때였다.

    선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티션이 둘린 테이블을 벗어나기에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는 줄 알았다. 속이 꽤 쓰릴 테니 혼자 바람이라도 쐬고 오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테이블을 반 바퀴 돈 구두 소리가 멈춘 곳은 지민의 옆이었다. 선혜의 그림자가 지민의 위를 덮었다. 업무 시간에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의 옆에 다가선 선혜에게 팀원들의 관심이 하나둘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르는 척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지민이 옆에 선 선혜를 힐끔 돌아보았다.

    “뭐예요?”

    새침하게 묻자 선혜가 입을 열었다.

    “김 주임님.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선혜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지민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금 업무 중이라 바쁜데요?”

    “잠깐이면 돼요. 제가 상담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니…….”

    그때였다.

    “별로 바쁘지도 않은데 잠깐 나갔다 와요.”

    거절하려는 지민의 말 허리를 자르고 희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그래. 상담 드리고 싶다는데 잠깐 시간 좀 내 줘.”

    상사인 희재와 기주까지 저렇게 말하니 지민으로서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담실은 저쪽이야.”

    창고로 이용되다시피 하는 상담실을 기주가 검지로 척 가리켰다. 왠지 모르게 흐뭇한 얼굴이었다.

    “……네.”

    지민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선혜와 함께 상담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상담실에 들어가자 기주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팀원들 소통이 아주 활발하구만. 팀장으로서 아주 뿌듯해.”

    기주의 혼잣말에 속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영은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닫힌 상담실 문을 바라보았지만 잠시뿐. 이내 꺼림칙한 얼굴로 시선을 뗐다. 엮이기 싫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희재는.

    “제법이네.”

    의외라는 눈빛으로 닫힌 상담실 문 쪽을 바라보다 뜻 모를 말을 짧게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답지 않게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

    “나랑 무슨 상담을 하겠다는 건데요?”

    떨리는 속을 다잡기 위해 지민은 애써 거만한 척 굴었다. 턱을 치켜들고 팔짱을 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신인 선혜를 올려다 봐야 해서 속이 상했다.

    선혜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다 핸드폰을 내밀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까 지민이 보낸 메시지 창이었다. 지민은 뻔뻔한 척을 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이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아무래도 저랑 관련해서 헛소문이 퍼진 것 같은데 당사자가 김 주임님이신 것 같아서요.”

    거두절미. 노골적일 정도로 본론만 말하는 선혜의 태도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얼굴 근육이 경련하며 파르르 떨려왔지만 태연스러움을 가장하며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네? 생사람 잡는 거예요, 지금?”

    “생사람 잡는 건지, 아닌지는 알아보면 알게 되겠죠.”

    “와, 나 진짜 어이가 없네? 나 아니거든요?”

    “그럼 임 대리님께 여쭤봐도 상관없는 거죠?”

    “아, 당연히……!”

    지민은 말을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지민이 파악한 민영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민영은 지민의 사수였다. 살갑게 대해주는 데다가 회사 내 정보통이기도 하고 해서 가깝게 지내는 편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불리할 때 편을 들어줄 만큼 가깝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종종 지민이 실수할 때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얌체처럼 혼자 쏙 빠져나가 모르는 척을 하기가 일쑤였다.

    선혜가 소문에 대해 물어본다면 민영은 지민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사람이었다.

    “저도 소문 들어서 알고 있어요. 제가 이사님의 아이를 신 주임님 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들 한다죠. 그러니까 김주임님도 저더러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칭하셨을 거고.”

    “그게…….”

    지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당황으로 머릿속이 새하얗다.

    아니, 그동안 매번 얌전히 당하고만 있다가 갑자기 왜. 변한 선혜의 태도가 의아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민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근데 우리 애는 왜 영악하다는 거예요?”

    선혜가 엄마라는 사실.

    “나는 몰라도 왜 우리 수호까지 욕하시는 거죠?”

    메시지에서 수호와 관련된 내용을 보자마자 차가운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었다.

    나는 몰라도.

    “우리 수호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 애는 건드리면 안 되지.

    엄마는 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선혜가 거침없이 부딪쳐오자 당황한 지민이 어버버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소문의 근원지가 김 주임님이니까 묻는 거예요. 우리 수호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런데 그때였다.

    “그, 근원지 나 아니에요!”

    대뜸 지민이 빽 소리쳤다.

    “나, 나 아니라고요!”

    선혜의 미간이 살며시 좁아졌다.

    “그럼요?”

    “그, 그 카페!”

    지민은 동아줄이라도 잡은 심정으로 소리쳤다.

    “카페에서 알바생이랑 매니저가 하는 얘기 들은 거란 말이에요!”

    카페.

    듣자마자 고은이 생각이 났다.

    “무슨 얘기요?”

    “그…… 윤선혜 씨가 신 이사님이랑 카페에서…….”

    지민이 입을 열어 시작한 이야기를 듣는 선혜의 얼굴이 차츰 서늘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

    “그 소문을 김 주임님은 곧이곧대로 나르신 거네요. 저한테 확인도 없이.”

    “그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운을 틔워 봤자, 말문만 막힐 뿐이었다.

    선혜는 고요한 시선으로 지민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불같이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선혜가 이 사실을 태준에게 알리면 어떡하나, 하는.

    어렵게 구한 직장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만큼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을 실컷 해댔었는데 해고라도 당하면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것이었다.

    비굴하지만 부탁이라도 하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지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 주임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김 주임님.”

    선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 전에 저한테 하실 말씀 없으세요?”

    할 말?

    그거 말고 뭐가 있지 싶어 눈을 굴리는데 선혜가 힘없이 웃으며 돌아섰다.

    상담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지민은 깨달았다.

    사과를 해야 했는데.

    이제 와 깨달아 서둘러 선혜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소용이 있을 리 없었다.

    “아, 진짜……!”

    지민은 뒤늦게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터.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지민이 할 수 있는 건, 제 탓이 고은에게 넘어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점심시간을 앞두고 카페가 한산한 틈을 타서 고은은 열심히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런 고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주 시험, 자신 있지? 나 추천서 엄청 신경 써서 썼다고, 고은 씨.”

    고은이 생긋 웃었다.

    “그럼요.”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비로소 꿈을 찾았다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말이다. 고은이 뭔가를 해낼 기미를 보이자 엄마인 예진도 좋아했다.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훈훈해졌음은 물론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는 요즘이었다.

    하지만 그중에 제일 좋은 건 떠나기 전 선혜 엿 먹이는 데 한 몫 톡톡히 했다는 것이다.

    고은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아, 고은 씨 점심 뭐 먹을래?”

    점심때가 다다라 매니저가 물었다. 매니저와 배달 어플을 들여다보며 메뉴를 상의하고 있는 때였다.

    또각또각. 거침없는 구두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워졌다. 손님이 오는 소리였다.

    고은은 허리를 들어 카운터 너머를 보았다가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손님이 다름 아닌 선혜였기 때문에.

    왜 기분 좋을 때 와서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나. 고은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고는 카운터에 다가와 선 선혜에게 말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니.”

    늘 모르는 척 존댓말을 쓰던 선혜의 말이 유독 짧았다. 고은도, 옆에 서 있던 매니저도 놀라 선혜를 쳐다보았다.

    선혜는 고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눈빛에 고은이 슬슬 위화감을 느끼려는 찰나.

    “점심 아직이지.”

    선혜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고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선혜가 말했다.

    “아직이면 나랑 먹자.”

    “내가 언니랑?”

    “응. 내가 너한테 할 말도 좀 있고.”

    “할 말?”

    “응.”

    고은과 매니저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고은이 선혜와 가버리면 혼자 밥을 먹어야 하기에 매니저도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지금 말고 퇴근하고 나서는 어때?”

    의외로 선혜는 쿨하게 대답했다.

    “그래. 퇴근하고 여기서 만나.”

    “응. 주문은 안 하고?”

    “응.”

    짧게 대답한 선혜는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은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매니저가 고은에게 바짝 붙어 씨근덕거렸다.

    “뭐야. 할 말이 뭐길래 갑자기 만나재?”

    “글쎄요. 저도 잘.”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지만 고은은 사실 알고 있었다.

    일파만파 퍼진 소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려나.

    ‘해명은 무슨.’

    내가 해명을 할 것 같아. 어차피 증거도 없는 거 발뺌하면 그만이지.

    고은은 속으로 씩 웃었다. 겉으로는 걱정하고, 겁먹은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

    매니저가 그런 고은을 보다가 물었다.

    “혼자 가기 그러면 내가 같이 가 줄까?”

    “아니에요. 언니랑 오랜만에 둘이 밥이라도 먹죠, 뭐. 별거 아닐 거예요.”

    고은의 말에 매니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퇴근 후 선혜와 고은은 카페 앞에서 만나 회사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선혜는 밖이 잘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고은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먹자고 한 거니까 네가 사는 거지?”

    아까 카페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선혜가 피식거리며 고은에게 말했다.

    “카페 취업 말고 연기자를 하지 그래?”

    “뭐?”

    자신이 카페 취업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데 무엇보다도 말투가 신경에 거슬렸다.

    윤선혜가 저렇게 비꼬는 투를 쓸 줄 알았던가.

    “내가 살 테니까 시켜.”

    고은은 선혜를 흘기고는 메뉴판을 휙 가져갔다. 선혜의 의중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과하게 많은 음식을 시켰다. 그것도 비싼 것만 골라서.

    그 모습을 보며 선혜는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곧 직원이 식전 빵을 가지고 왔다. 배가 고팠던 고은이 식전 빵에 손을 뻗는 때였다.

    “너라며.”

    고은이 손을 멈추고 눈만 들어 선혜를 보았다.

    “헛소문 꾸며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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