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마지막 선물(2)
춘희가 편지 봉투에 적힌 글씨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 설마…….”
춘희가 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인데 경애는 오죽하랴.
경애의 떨리는 눈동자가 손에 들린 편지와 눈앞에 놓인 차에 번갈아 닿았다. 혼란과 왠지 모를 불안감에 편지를 뜯는 손에 떨림이 묻어났다.
천천히 뜯어낸 봉투 안의 하얀 편지지에는 적힌 말이 몇 줄 없었다.
하지만 경애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기엔 충분했다.
“너, 너 출근 언제 했어.”
기웃거리며 정신없이 차를 구경하던 춘희가 눈을 위로 굴리다 대답했다.
“한…… 사장님 오시기 오 분 전 쯤?”
춘희가 대답을 마치기가 무섭게 경애가 손에 편지를 든 채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사장님!”
불러보지만 경애는 달려갈 뿐이었다.
[경애 누나에게]
경애는 달려갔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준비 해 봤어. 낡은 차를 몰고 다니는 모습이 늘 마음이 아팠거든.]
석주가 늘 서서 바라보던 곳으로.
[누나에게 한 잘못들이 이걸로 무마되지는 않겠지만.]
석주의 시선이 느껴졌던 곳으로.
[그래도 뭐라도 해주고 싶었어.]
석주가, 있었던 곳으로.
[그동안 많이 미안하고, 또 고마웠어.]
하지만.
[이제 다시는 누나랑 선혜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거야.]
석주는 없었다.
[안녕. 잘 지내. 건강히.]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
태준과 함께 수호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길.
선혜는 경애와의 통화를 마친 뒤에도 안심하지 못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선혜의 손 위로 태준의 커다란 손이 덮어졌다.
“금방 연락 오겠죠.”
“그렇겠죠.”
그래야 할 텐데.
주말 내내 석주와 연락이 닿지를 않아서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렇게 보기 싫을 땐 자꾸 눈에 띄더니 막상 밥 한 끼라도 하려니 연락조차 닿지 않다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자, 도착했습니다.”
태준의 말에 선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눈 팔고 있는 동안 벌써 회사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 출근하기 싫다.”
태준이 좌석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중얼대다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선혜의 손을 감은 손이 깍지를 껴왔다.
“날도 좋은데 같이 땡땡이나 칠까요?”
실없는 농담에 선혜는 피식거릴 뿐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차에서 내렸다. 태준 또한 차에서 내려 선혜의 옆에 따라붙었다. 걸어가다 문득, 동시에 출근하는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를 나누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따가 끝나고도 수호 같이 데리러 갈래요?”
태준의 말에 뒤에 서 있는 직원들이 순간 신경 쓰였지만 대수인가 싶었다.
지난번에 수호를 회사에 데리고 온 뒤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었다. 어차피 다들 알고, 몰라도 앞으로 알게 될 거, 눈치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러자고, 선혜가 대답하려는 때였다.
“풉.”
느닷없이 뒤에서 터진 웃음소리에 선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웃음소리의 당사자는 황급히 웃음기를 갈무리 지었으나 입꼬리는 씰룩거리고 있었다. 태준의 뒤를 힐끔거리면서 말이다.
얼굴에 떠올라 있는 명백한 비웃음. 저를 바라보는 선혜에게 스치듯 닿는 경멸의 시선. 눈이 마주치자 사라지긴 했지만, 선혜의 뇌리에는 선명하게 박힌 뒤였다.
선혜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은 고개를 기울인 채 선혜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선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대답했다.
“그래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선혜는 태준과 함께 나란히 올라탔다. 뒤에 있는 직원들도 뒤 따라 올라 탔다.
직원들의 시선이 선혜와 태준에게 힐끔힐끔 꽂혔다.
1층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던 사람들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몇몇 눈치 없는 사람들은 선혜와 태준 쪽을 슬쩍슬쩍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복도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
날아와 꽂히는 시선들. 입가에 스쳐지나가는 비웃음. 그리고 눈 속에 담긴 경멸과 혐오.
잊고 있었던 익숙함이 불쾌감과 함께 발끝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쟤가 걔래. 친구 남친 뺏은 애.’
‘와, 어떻게 유부남 선생을.’
‘김 교수님이 쟤 스폰이라며? 어쩐지. 유달리 예뻐하더라.’
선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기분 탓이 아니야.
내가 예민한 탓이 아니었어.
“선혜 씨?”
뭔가가, 잘못 되고 있었다.
명백히 잘못된 방향으로.
선혜의 주먹이 힘주어 꽉 말아졌다.
*
사람들의 시선은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혜는 출근 이후부터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을 마시러 휴게실도,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업무에 집중 또한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문이 퍼져 있는 걸까.
선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악의 소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전에 태석이 불러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뒤늦게 밀린 양육비라도 받고 싶었던 겁니까?’
태석이 그랬던 것처럼, 뒤늦게 아이를 내세워 이득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내비쳤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선혜 씨.”
생각에 깊게 잠겨 있던 선혜는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자 언제 온 건지 희재가 옆에 서 있었다. 멋스럽게 파티션에 한 팔을 기댄 채 빤히 선혜를 내려다보던 희재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맡겼던 디자인, 끝났어?”
선혜는 찬물이 끼얹어진 듯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선혜가 고개 숙여 사과를 한 뒤에도 희재는 자리에 서서 계속 선혜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거라고는 시선의 머무름이 길다는 것.
“빨리 해요. 급하니까.”
검지로 툭 파티션을 친 희재가 사무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줄곧 희재를 주시하던 기주가 황급히 눈을 피하고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디 가, 손 실장?”
“휴게실이요. 목이 말라서.”
시니컬하게 말한 희재는 사무실을 나섰다.
희재가 사무실로 나간 뒤 선혜는 업무에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손에 땀이 차서 자꾸만 펜이 미끄러졌다.
‘손이라도 씻고 와야겠다.’
선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
.
.
화장실에 들어선 선혜는 수도꼭지를 세게 틀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손을 다 씻은 선혜는 티슈로 손을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꼴이 말이 아니다.
얼굴이 이게 뭐람.
선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정신 차리자.’
별거 아냐. 무시하면 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흐려질 소문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까 쫄지 말고 당당하자.
애써 어깨를 펴고 거울 앞에 섰다. 씩씩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완전히 굳건해지지 않은 속내는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선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점심시간. 그 전에 실장님이 주신 일 마무리 짓자.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을 막 나서려는 때였다.
“진짜? 그래놓고 오늘 그렇게 뻔뻔하게 출근을 했다고?”
화장실 밖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낯선 목소리가 선혜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아침부터 아주 둘이 알콩달콩, 난리도 아니었대. 둘이 같이 출근했다던데?”
“뭐야. 진짜 살림 합치기라도 했나 보네?”
“진작 합쳤겠지.”
자신과 태준의 이야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와, 부럽다. 매일같이 신 주임님 같은 남자랑 부대끼면서 살다니.”
“신 주임님만 불쌍하지, 뭐.”
“하여간 진짜 윤선혜 씨는 여우 끼가 타고 났다니까. 어쩜 그렇게 사람이 뻔뻔…….”
나불대던 주둥이는 화장실로 들어서다 선혜를 마주치자 꾹 다물어졌다.
화장실로 들어서던 다른 여직원은 선혜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동공이 동서남북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아주 홍길동을 뺨친다.
자신의 뒷담을 까는 이가 같은 공간에 들어서는 경험은 부지기수로 하긴 했지만 당할 때마다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선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가다듬었던 표정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자신을 욕한 사람 앞에서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저기…….”
사과라도 하려는 듯 여직원이 입을 열었지만 선혜는 듣지 않았다. 어차피 사과를 받아 봤자 표면적인 것. 진심이라곤 없을 테니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무시를 하기에는 너무나 노골적인 장면을 봐버린 터라, 그냥 지나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요.”
대체 무슨 소문이 난 건지 알아는 봐야겠다 싶어 입을 여는 때였다.
끼익.
화장실 칸 하나가 열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또각또각. 뒤를 이어 들려오는 구두소리가 세면대 앞에 섰다.
선혜는 무심코 세면대 쪽을 돌아보았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희재였다.
휴게실에 간다더니 화장실에는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선혜는 아연한 얼굴로 희재를 응시했다.
손을 다 씻은 희재는 티슈가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희재 특유의 무심한 시선이 선혜의 앞에 선 두 사람에게 향했다.
나직한 조소가 희재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여직원들은 동시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윤선혜 씨가 여우라고요?”
꽤나 서늘하게 물은 희재는 질문을 마치기가 무섭게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어이가 없네.”
그 뒤로 이어진 혼잣말.
“여우가 아니라 곰인데.”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슬쩍 좁히고 희재를 쳐다보았다.
앞담이 이런 건가.
뒷담은 많이 당해봤어도 앞담은 처음이라 심히 당황스럽다.
반면 희재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선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슬쩍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었다.
왜일까.
앞담을 당한 데다가 뒤가 아닌 앞에서 태연히 웃는 사람을 보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선혜와 희재가 대치하고 있는 사이, 사과를 빠르게 뱉어낸 여직원 둘이 잽싸게 자리를 벗어났다.
희재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다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파우치 속에서 핸드크림을 꺼내 바르기 시작했다.
선혜는 그런 희재를 보다가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때였다.
“윤선혜 씨.”
부르는 소리에 선혜가 돌아서다 멈칫했다. 그런 선혜를 향해 희재가 반걸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팔짱을 끼고 선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희재의 눈살이 가만히 좁혀졌다.
늘 무표정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희재가 짧게 선혜를 훑어보다가 물었다.
“모르는 척하는 거야, 모르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선혜의 입장으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질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희재가 기가 막힌 듯 되물었다.
“소문 난 거, 몰라요?”
소문. 선혜는 제가 짐작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신 주임님이랑 저랑 제 아들 얘기시라면…….”
“거기 하나 더 껴있는데.”
하나 더라니.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선혜가 미간을 좁히는 때였다.
희재가 입을 열었다.
“신 이사.”
신 이사라니. 태준의 형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진짜 모르나 보네.”
희재가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이윽고 열린 희재의 입에서 소문의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혜로서는 너무나,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선혜는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희재가 말해준 얼토당은 않은 소문의 내용만이 계속해서 떠오를 뿐이다.
황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수호가 태석의 아들이라니. 그런 수호를 태준의 아들로 감쪽같이 속여 불륜도 피하고, 젊고 잘생긴 총각도 얻었다나 뭐라나.
세상에 이렇게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는 또 처음이었다.
선혜가 화가 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혜 씨 아들도 영악하다고 난리들이야.’
저들은 수호도 싸잡아 욕했다. 어린 애가 엄마를 닮아 영악하기 이를 데 없다며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희재도 모른다고 했다.
선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해결을 해야 한다.
소문의 해결 점은, 근원지를 찾는 것.
고은이 떠오르긴 했지만 조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내 직원도 아니고 회사에 딸린 카페에서 일 하는 그 애가 대체 무슨 수로.
그렇다면 대체 누가.
입술을 짓씹고 있는 때였다.
컴퓨터 화면에 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이 떴다.
[임 대리님 우리가 그때 했던 얘기 회사에 쫙 퍼졌어요ㅋㅋ대박.]
지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제 윤선혜 씨 회사에서 매장 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듯요ㅋㅋㅋㅋ]
……너구나.
선혜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메시지 창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