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마지막 선물(1)
석주가 찍은 사진들은 사실 합당한 증거로서는 무리가 있었으나 재민의 입을 열게 하는 효과를 톡톡히 발휘했다.
재민의 진술은 이러했다.
우연히 마트에서 선혜와 태준, 수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너무 행복해 보였다고.
자신은 가진 것을 다 잃고 처참하기 짝이 없는데 행복한 그들의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고. 자기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선혜 탓이었기에 어떻게든 보복을 하고 싶었다고.
처음에 목표는 선혜였다고 한다.
하지만 옆에 태준이 딱 붙어 있어 접근이 어려웠기에 경애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고. 그런데 경애 옆에는 또 석주와 춘희가 붙어 있어 어려울 것 같아 가장 만만한 수호로 목표를 최종 변경하기에 이르렀다고 진술했다.
범죄 수법은 치밀한 듯 보였지만 단순했다. CCTV와 블랙박스의 사정거리까지 확보하여 동선을 짜면서도 수호와 같은 유치원 친구 하나를 초콜릿으로 회유하는 방법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재민이 유치장으로 끌려가는 걸 보던 태준이 기가 막힌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두드려 패고 싶은데 꾹 참느라 주먹이 꽉 쥐어졌다.
수호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도 그렇지만.
‘내 프러포즈.’
재민이 한 뻘짓 때문에 프러포즈 계획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프러포즈를 할 수도 없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심란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려던 태준은 문득 하던 걸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태준의 옆에는 경애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모님?”
태준이 부르자 경애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괜찮으세요?”
“어? 어어.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하지만 말과는 달리 속은 괜찮지 않았다.
처음에는 재민이 선혜의 전 약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뭐 저딴 놈이랑 엮이게 했나 싶어 화가 났었다. 그러다가 재민의 진술을 들으며 차츰 석주가 했던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누가 누나를 쫓아다닌단 말야. 스토킹하고 있다고!’
그건 진짜였다.
진심 어린 호소였다.
다른 꿍꿍이를 숨긴 게 아니라 자신을 지켜주고 싶은 오롯한 마음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소금을 뿌리고 면박을 주기까지.
만약 그때 석주의 말을 믿었더라면 수호가 납치당할 뻔한 상황까지는 다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석주가 그렇게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친 석주의 몰골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속이 갑갑해지는 때였다.
경찰서 문이 열리고 선혜와 수호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둘만 경찰서 안으로 들어설 뿐, 석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혜에게 물었다.
“늬 아빠는?”
선혜가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가셨어.”
“뭐? 갔다고?”
“응.”
“아니, 가긴 어딜 가? 그 꼴을 해서는.”
“모르지, 나야.”
“아니…….”
왜 그냥 보내냐는 원망 섞인 말이 선혜의 얼굴을 보자 도로 삼켜졌다.
“왜. 아버지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엄마?”
“할 말은 무슨. 아무것도 아냐.”
말을 얼버무린 경애가 괜히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다음 주까지 일하기로 했는데 그 꼴로 일이나 할 수 있나 모르겠네.”
다음 주. 선혜는 그 말을 되새겼다.
그래. 아버지가 일하기로 한 기간은 다음 주까지였다.
그러니 오늘 그 모습이 마지막 같은 건 괜한 기우이리라.
선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왠지 모르게 그렇게 믿고 싶었다.
*
태준은 선혜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선혜와 수호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라도 함께 있고자 했다.
가장 큰 걱정은 수호였다. 납치라는 험한 일을 겪을 뻔한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남지는 않을까.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수호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선혜의 품 안에서 잠든 그 모습이 편안해 보여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선혜와 태준은 수호와 같이 자는 걸 택했다. 넓은 침대 위 나란히 누운 두 사람 사이에서 수호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수호와는 달리 선혜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덧 새벽 한시를 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척이는 기척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곤히 잠든 수호와는 달리 선잠을 자고 있던 태준에게는 뚜렷하게 느껴졌다. 결국 잠들지 못한 선혜가 침대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침실을 나섰다.
자리에 누운 채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태준은 옆에 있는 수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없이 양해를 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물을 따라 마시던 선혜는 따라 나오는 기척에 놀라 돌아보았다.
다가오는 태준에게 선혜가 변명하듯 말했다.
“자다 깼는데 목이 말라서.”
“그게 아니라 계속 못 자던데요.”
태준의 말에 선혜가 입을 다물었다. 태준은 선혜의 손에서 컵을 가져가 정수기로 다가갔다. 선혜가 마시던 찬물에 따듯한 물을 적당히 섞어 미지근하게 만들어 다시 건넸다.
“찬물보다는 미지근한 물이 좋대요.”
“고마워요.”
“고마우면 무슨 생각하는지 좀 알려줄래요?”
물을 마시려던 선혜가 멈칫하고 태준을 바라보았다. 선혜의 손에서 물컵을 가져가 식탁에 내려놓은 태준이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혹시 알아요? 나한테 말하고 나면 잠이 잘 올지.”
선혜는 잠깐 망설이는 눈치였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동자가 가만히 떨렸다.
태준은 선혜를 식탁에 데리고 가 앉혔다. 선혜의 손을 잡은 채 잠자코 선혜의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꾸.”
달싹거리기만 하던 입술이 제대로 열렸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지요?”
“네.”
선혜가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다치신 그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오네요.”
인정하고 나니까 배로 무안해졌다. 선혜는 변명하듯 빠르게 덧붙였다.
“그게, 너무 많이 다쳤잖아요. 눈도 터지고, 입술도 터지고, 여기 저기 멍도 들고, 다리도 저시고…….”
“…….”
“우리 수호 구해주려다가 그런 거니까 신경이 많이 쓰여서…….”
“많이 걱정돼요?”
걱정.
그 단어에 선혜의 말문이 막혔다.
선혜는 입을 꾹 다문 채 태준의 맑은 다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거짓말을 할 수 없게 하는 눈이었다.
선혜는 그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준은 선혜의 손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그러다 해결 방법이 생각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태준이 말했다.
“내일, 장인어른이랑 선혜 씨랑, 수호랑, 나랑 같이 식사나 한 끼 할래요?”
“아버지랑, 밥을요?”
“네. 걱정되니까 장인어른 상태도 확인할 겸, 수호 구해주신 거에 대한 보답도 할 겸요.”
태준이 선혜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선혜 씨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요?”
고작 밥 한 끼로 이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어낼 수 있을까.
“그럼요.”
태준의 눈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당연하죠.”
그 눈 때문일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 근거 없는 확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준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나한테 장인어른 전화번호 줘 봐요. 내가 내일 연락드릴 테니까.”
선혜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는데. 아버지 번호.”
태준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을 만큼 당혹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네? 아…… 그러시구나. 아, 모를 수도 있죠. 그러면…….”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아버지 번호.”
태준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눈을 빛냈다.
“아, 네. 그럼 되겠네요. 장모님은 아시겠다.”
“네.”
한층 편안해진 선혜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준이 손을 뻗어 선혜를 안아주었다. 선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팔을 뻗어 태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네.”
“그럼 이제 자러 갈까요?”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준의 품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의 얼굴 간격이 그새 가까워져 있었다. 먼저 다가간 건 선혜였다. 태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댔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며 나는 쪽 소리가 새벽 고요를 울렸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선혜의 머리칼을 쓸어 올린 태준이 선혜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다시금 선혜를 끌어안은 태준은 가만히 선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선혜는 태준의 품 안에서 안심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태준의 말대로 내일 아버지와 밥을 먹으면 이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 여기면서.
.
.
.
하지만 다음 날. 경애를 통해 알게 된 석주의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들려오는 건.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차가운 기계음성 뿐이었다.
*
월요일 아침 출근길.
“그때 핸드폰이 고장나기라도 했나 보지, 뭐.”
경애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출근에 임하는 중이었다. 차가 또 고장 나 시동이 걸리지 않아 택시를 타고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 그런가.
“그래. 오늘 출근 날이니까 내가 말 전해 줄게.”
- 응. 고마워, 엄마.
“고맙긴. 끊는다.”
- 응. 출근 잘 하고.
“그래.”
통화를 마친 경애는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석주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다.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왜 자꾸 걸어보게 되는 건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탓일까.
경애는 한 번 더 통화 시도를 하려는 손가락을 제지하고 가방 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어느덧 택시는 경애의 가게에 도착해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경애는 원래 출근 시간보다 한참 늦은 시간을 보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진짜 차를 바꾸든지 해야지.”
자꾸 고장이 나는 게 아무래도 수명이 다한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게로 들어서려는 때였다.
가게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커다란 SUV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차였다.
아직 가게를 열지 않았으니 손님 차는 아닐 테고.
‘춘희가 차를 샀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경애는 가게로 발을 들였다.
“사장님 오셨어요.”
발랄하게 인사하는 춘희에게 경애가 물었다.
“춘희 너, 차 샀어?”
“차요? 무슨 차?”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 네 거 아냐?”
“주차장에 차가 주차되어 있어요? 저 올 때는 없었는데?”
춘희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김 씨 아주머니에게 물으려고 쳐다보니 아주머니 또한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야.”
누가 가게 사람도 아니면서 멋대로 차를 댔지?
하지만 주차장 바리게이트는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면 열지 못하는 구조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였다.
가게 문이 열리며 딸랑 종이 울렸다. 손님인가 돌아보았더니 택배 배달원이었다.
“여기 김경애 님이 누구시죠?”
“전데요.”
“자, 여기. 김경애 님 앞으로 택배 왔습니다.”
“택배요?”
“네.”
택배라니. 산 것도 없고 부칠 사람도 없는데. 경애는 의아해하면서 택배를 받아들었다.
배달원이 나간 뒤 경애는 작은 상자를 흔들어보았다. 가벼운 물건이 종이박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뭐예요, 아침부터?”
춘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경애 또한 궁금한 얼굴로 상자를 뜯어보였다.
상자를 뜯자 보이는 건 포장비닐에 싸인 리모컨식 차 키.
경애는 천천히 차 키를 들어보았다. 키에 새겨진 로고를 보던 경애는 문득 가게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와 같은 회사의 로고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감이 경애를 가게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경애는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갔다. 서툴게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삐빅 하며 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꺼졌다.
“뭐야. 폭탄 설치된 거 아니에요?”
춘희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지만 경애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차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운전석 문을 벌컥 연 경애는 운전석에 가지런히 놓인 편지 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편지지를 들어 올리자 가지런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경애 누나에게]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글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석주가 보낸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