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너구나
태준을 발견한 재민은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곧장 자신이 들고 있는 비닐 봉투를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그러더니 냅다 도망치기 시작한다.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거기 서……억!”
그런데 편의점을 박차고 나가기가 무섭게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두 사람 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 진짜…….”
태준은 아린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신경질적으로 부딪힌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상대를 알아본 태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
이 사람은.
“……장인 어른?”
“자네…….”
부딪힌 사람은 다름 아닌 석주였다.
이분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는 건지. 태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석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태준을 보고 석주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퍼뜩 정신을 차리며 태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더니만 허무함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
이마를 짚고 탄식을 뱉어내던 석주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지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힘을 주어 일어나려고 하는 때였다.
석주의 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커다랗고 듬직한 손.
태준의 손이었다.
“잡으세요.”
석주가 바라보기만 하자 태준이 말했다. 몇 번 망설이던 석주는 태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는지 약간 절뚝거리자 태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병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네. 쉬면 나아.”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석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준이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말을 하다가 문득, 석주가 여기 올 만한 이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석주의 얼굴을 살피며 태준이 물었다.
“선혜 씨 만나러 오신 거예요?”
하지만 석주는 외려 의아한 표정이었다.
“선혜라니?”
“여기 저희 회사 근처거든요.”
그래서 선혜를 만나러 오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여기가 선혜가 다니는 회사 근처라고?”
석주가 눈에 힘을 주고 묻자 태준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다소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헛웃음을 치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태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누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미 멀리 도망친 재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앞을 돌아보는 때였다.
“혹시 선혜가 사는 아파트, 서초동에 00아파트야?”
“아, 네. 맞아요.”
태준이 대답하자 석주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석주는 이내 태준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때였다. 가던 석주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태준을 돌아보았다.
“…….”
무언가를 말하려고 망설이다가 다시 몸을 돌려 멀어진다.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걸음걸이로 빠르게.
“편찮으셔서 휴가 내고 병원에 가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석주가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태준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앞에 선 그가 혀를 짧게 찼다.
“다 불었네.”
그사이 퉁퉁 분 라면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다가 버리긴 아깝다 싶어 한 젓가락 크게 집었다.
그대로 입에 집어넣으려는 때였다. 라면을 먹기 직전 태준이 멈칫했다.
천천히 라면을 내려놓는 그의 미간이 잔뜩 좁혀져 있었다.
태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석주가 멀어진 방향으로.
방금 전 석주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 흘러갔다.
‘여기가 선혜가 다니는 회사 근처라고?’
마치 금시초문인 듯했던 반응. 그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CCTV에 찍힌 검은 그림자와 같은 날 가게 앞에서 붙들린 석주.
그리고 방금 보았던 재민의 차림새.
선명해지는 CCTV의 장면 속 그림자.
다시 떠오르는 재민의 모습.
그 둘이 천천히, 겹쳐지기 시작한다.
“설마…….”
설마.
태준의 떨리는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시선 끝에 재민이 던지고 간 담배가 닿았다.
재민이 던지고 간 담배에는 불씨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
열심히 일한 덕에 태준과 선혜 두 사람 다 오늘은 가까스로 야근을 피할 수 있었다.
오붓하게 셋이서 집에서 밥을 먹고 과일을 먹는 중.
수호는 태준의 새 핸드폰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태준은 과일을 깎는 선혜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요?”
오늘따라 시선이 집요하다 싶어 선혜가 과일을 깎다가 물었다.
턱을 괴고 선혜를 바라보고 있던 태준이 선혜의 질문에 무안한 얼굴로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예뻐서요.’라는 말로 실없게 웃게 만들 사람인데.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게 할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사과 깎는 걸 멈춘 선혜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말없이 추궁하는 걸 눈치 챈 태준이 헛기침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수호가 들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수호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수호는 금방이라도 핸드폰에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심취해 있었다.
“요즘은 그런 거 없죠?”
“그런 거요?”
“그니까.”
조금 목소리를 줄인 태준이 말했다.
“누가 지켜본다던가, 하는 거요. 저번처럼.”
선혜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요?”
“네. 왜요?”
“아니 그냥, 어제 야근도 하고 좀 걱정이 돼서.”
선혜는 과일을 칼로 예쁘게 조각내며 말했다.
“요샌 진짜 없어요.”
사실 스토킹에 대해서는 예민한 편인 선혜였다.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주차장에서의 일 이후로는 더욱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다. 최근 아버지가 휴가를 냈다는 사실을 듣고는 더욱이.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에요.”
다시 과일을 깎기 시작한 선혜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만약 또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요. 알았죠?”
선혜가 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뜸 그의 입에 사과를 밀어 넣었다.
다짜고짜 들어온 사과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태준을 본 선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점점 불퉁해지는 태준의 얼굴을 보는 선혜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선혜의 웃음소리에 수호가 선혜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태준을 보고는 풋 웃음을 터트린다.
“아빠 햄스터 같아.”
어이없는 얼굴로 수호를 보고 있는 것도 잠시뿐. 태준은 자신의 볼 안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 자랑이라도 하듯 사과 조각을 마구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러다 목에 걸려 콜록거리기 시작하자 선혜가 물을 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못 살아, 진짜.”
“아빠, 괜찮아요?”
자기를 보고 웃는 두 사람을 보며 태준 또한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요.”
행복한 늦저녁의 풍경이었다.
*
금요일 아침.
수호를 데려다준 태준은 유치원 앞에서 수호와 짧은 작별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빠.”
인사를 마친 뒤 별안간 수호가 부르더니 빤히 쳐다본다.
“내일 놀이동산 가는 거 맞죠?”
“당연하지. 오늘 하룻밤만 자면 내일 짠- 하고 놀이동산에 가는 거야. 어때. 신나지?”
“응!”
수호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신나하는 아이를 보니 태준 또한 기분이 좋았다.
“엄마한테 프러포즈는 언제 해요?”
태준이 대답했다.
“불꽃놀이가 가장 화려하고 예쁠 때.”
불꽃놀이가 가장 화려하고 예쁠 때라.
“저 그때 잠깐 화장실 갔다 올까요?”
“뭐어?”
태준이 수호의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안 그래도 되거든? 자리 피해줄 생각 말고 엄마 아빠 옆에 꼭 붙어나 있으셔. 위험하니까.”
“네.”
아까 꼬집었던 자리를 태준이 손바닥으로 문질러주었다. 곧 등원 시간에 임박하여 수호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벗는데 친구들 몇 명이 다가와 물었다.
“수호 너 주말에 놀이동산 가?”
“어디 가? oo랜드? oo월드?”
수호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oo랜드!”
부러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 사이로 수호의 까르륵하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
잠깐 카페가 한산해진 틈을 타 고은은 바리스타 자격증 관련 서적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뿌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열심이네?”
“열심히 해야죠. 흔치 않은 기회인데.”
“그래.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알았지?”
“네.”
매니저가 격려 삼아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은은 열심히 책을 읽어내려 가며 입으로 중얼중얼 개념을 외워갔다.
모처럼만에 의욕에 찼다. 하고 싶은 일을 드디어 찾은 느낌에 가슴이 한껏 뛰었다.
공부에 한껏 심취해 있는 때였다.
“주문이요.”
직원을 부르는 소리에 고은이 허리를 들었다.
여직원 두 명이 카페 앞에 서서 고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은 상냥한 얼굴로 다가가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직원 둘은 테이크 아웃 카운터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 너 그 얘기 들었어? 윤선혜 씨 아들 얘기.”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두 여직원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혜와 관련된 이야기여서 고은은 음료를 만들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윤선혜 씨 아들? 그 아들이 왜?”
“그 아들이 글쎄, 신 이사님 아들이래.”
“뭐? 윤선혜 씨 신 주임이랑 사귄다며. 잘못 안 거 아냐?”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더라. 신 이사님 아들이래. 신 주임 아들이 아니라.”
“헐. 말도 안 돼.”
“근데 신 주임은 그걸 새까맣게 모른대. 윤선혜 씨랑 윤선혜 씨 아들이 작정하고 신 주임 속여먹는 거라더라?”
“와 대박…… 윤선혜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고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이와 같은 대화를 들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지난 일주일간 꾸준히도 들려오더라. 소문은 일파만파 퍼진 듯했다.
고은이 바라던 대로 말이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한참 수다를 떨던 여직원 둘이 일어나 다가왔다. 고은은 서비스라며 쿠키를 건네어주고 멀어지는 여직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때마침, 선혜가 카페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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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나온 여직원 둘은 저들끼리 소곤대며 선혜를 노골적으로 피해 걸어갔다.
선혜는 잠깐 서서 의아한 얼굴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뒤를 힐끔거리던 여직원들은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발걸음을 재촉하여 빠르게 멀어졌다.
‘기분 탓인가.’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하기에, 수호가 태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져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방금 지나간 여자들도 그렇고 다른 부서원들도 마찬가지고.
착각이 아니라면 그들 눈에 맺힌 건 분명 적대감과 혐오였다.
도대체 왜?
여직원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지만 답이 나올리는 없었다. 선혜는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발을 막 내디디려는데 때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고은과 마주쳤다. 고은은 잽싸게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를 지워냈지만 선혜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선혜는 고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카운터로 걸어와 섰다.
“주문하시겠어요?”
선혜가 말없이 보기만 하자 고은이 물었다.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뉴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고은이 쪽지를 받아들고 계산을 했다.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내미는 얼굴에 은은하게 맺힌 미소.
그 미소를 보자, 옛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교 시절에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어처구니없던 소문들.
그리고 자신이 눈치 챘을 때 고은이 짓던 회심의 미소.
지금 고은이 짓고 있는 미소는 그때와 같았다.
‘너구나.’
네가 또 이번에 뭔 짓을 한 거구나.
“손님. 카드 안 받으세요?”
고은이 선혜에게 카드를 내밀며 물었다.
선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카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음료가 나오는 카운터 앞에 섰다.
음료를 만들며 매니저와 고은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의 기억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너지. 그딴 헛소문 퍼트린 거.’
분한 얼굴로 따지는 어린 자신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아닌데? 증거 있어?’
뻔뻔한 얼굴로 반문하던 고은.
‘증거.’
그 증거라는 게 이번에도 없으니 예전처럼 고은은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었다.
선혜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문득, 고은이 펼쳐놓은 바리스타 자격증 관련 서적이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는 책장.
그 안에 담긴 고은의 열정과 의욕. 그리고 희망.
“…….”
선혜는 오래도록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
아주 오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