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그림자의 정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김 주임. 윤선혜 씨 아들이 왜…….”
“카페 직원이 들었대요. 윤선혜 씨 아들이 이사님한테 아빠라고 하는 거.”
“뭐라고?”
민영의 입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흥미를 담고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눈으로 지민을 채근하기에 이르렀다.
“정말이야? 진짜로?”
“네.”
“그럼 신 주임은 뭐야?”
“저도 모르죠. 뭐가 뭔지.”
지민은 한숨을 푹 내쉬다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문득,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친하지는 않지만 오며 가며 회사에서 한 번쯤 본 얼굴. 다른 부서의 한 여직원이었다.
여직원은 지민이 한 말을 들었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보고 있다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물러갔다.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다른 부서원들이 몇몇 모여 있었다.
오늘 야근을 한 다른 부서 사람들이었다. 멍한 표정의 여직원에게 부서원들이 말을 거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직원이 지민의 눈치를 보다가 다른 직원들에게 속닥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둘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표정들.
지민은 소문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으나 이내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 되었다.
한편 민영의 머릿속에서는 막장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완성된 터.
“세상에. 미쳤다, 진짜.”
연신 저런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중이다.
다른 부서 사람들도 민영과 비슷한 전개를 펼쳤는지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소문은 그렇게 발 빠르게 퍼져가고 있었다.
당사자들만 모르게 말이다.
*
태준의 핸드폰은 태준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야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내일 점심시간에 핸드폰부터 바꿔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켜지자마자 뜨는 부재중 전화 목록.
태석이 남긴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회사에 다녀갔댔지. 태석은 선혜를 통해 연락하라는 말을 전했다.
태준은 태석의 연락처를 꾹 눌렀다.
- 야. 너는 왜 연락을 이제야 해?
신호음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태석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핸드폰이 고장이 나서 지금 켜졌어. 형 오늘 회사 왔었다면서?”
- 그래. 너랑 제수씨 밥이라도 사줄까 찾아갔는데 둘 다 야근했다더라?
“응. 월요일부터 바쁘네.”
- 목소리가 지쳐 보이네. 야근해서 피곤한가 보다?
“당연하지. 야근해서 안 피곤한 사람도 있나.”
- 하긴. 나도 야근하고 나면 집에 오자마자 뻗고 그랬는데.
태준은 태석과 자잘한 대화를 나누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 스케줄 보니까 이번 주는 힘들 것 같고. 다음 주 중으로 한번 시간 내서 갈게. 셋이 밥이나 같이 먹어.
“그래. 형 편할 때 와. 괜히 서프라이즈니 뭐니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태준의 말에 태석이 키득키득 웃었다. 가만 보면 장난기는 자기보다 더한 형이었다.
- 그래. 알았다. 잘 쉬고.
“형도.”
통화를 마치려고 하는 때였다.
- 태준아. 요새 회사에 별일 없지?
태석이 물었고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은. 아무 일도 없어.”
*
선혜는 수호와 함께 목욕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야근을 한 자신도, 그런 자신을 기다려준 수호도 피로를 풀 겸 말이다.
오랜만에 샴푸로 서로의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그러다 목욕이 마무리될 때쯤 하품을 하는 수호에게 선혜가 물었다.
“수호야. 오늘 회사에서 엄마 기다리느라 지루했지.”
“아니?”
수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엄마 일하는 거 보니까 좋았어.”
“그랬어?”
“응. 엄청나게 멋있었어.”
엄지까지 들어 추켜세워주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랑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서 엄마가 제일 이뻤어.”
“정말?”
“응. 우리 엄마 최고!”
선혜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수호와의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왔을 때였다. 협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들어보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그새 또 고장이 나서 전원이 꺼졌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선혜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일 아침에 수호 데리러 갈게요. 핸드폰이 자꾸 고장이라 내일 바꿀 예정! 핸드폰 또 멀쩡해지면 연락할게요. 잘 자요. 사랑해요.]
부랴부랴 보낸 것 같은 메시지 끝의 달콤한 고백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요. 내일 봐요.]
선혜는 수줍은 얼굴로 짤막하게 답장을 보내고는 침대에 누웠다.
야근해서 노곤한 몸이 녹아들 듯 금방 잠에 빠져드는 선혜였다.
*
다음 날 아침.
수호의 등원 길은 오늘도 선혜가 함께하는 중이었다. 태준의 핸드폰이 고장 나 무슨 일이 생겨도 연락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수호와 짤막하게 인사를 마치고 수호가 유치원 건물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선혜가 돌아서려는 때였다.
“수호 엄마.”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돌아본 선혜는 학부모회 부회장임을 알아보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그냥 인사나 하는 거지, 뭐.”
선혜는 미심쩍은 속내를 숨기고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학부모회장인 민희와 함께 학부모회를 이끌어가는 부회장은 민희와 묘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는 사람이었다. 직책이 부회장이니만큼 별수 없이 민희를 보필한다고 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간 선혜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인사치레로 이렇듯 말을 걸 사람도 아니었고.
“얘기 들었어?”
역시나 목적이 있었다.
“무슨 얘기요?”
“민희 얘기 말이야. 자기 몰라?”
민희 얘기라니. 학부모 중에 딱히 가까운 사람이 없는 선혜가 소문을 알 리 만무했다.
“아니 글쎄, 민희 걔가 낯선 아저씨가 초콜릿 준다고 매일같이 따라갔더래. 그래서 받은 초콜릿으로 애들을 막 회유하고 그랬다나? 요새 애들 사이에서 충치가 유행처럼 번진 거 알지? 그게 다 민희 때문이었다고 하더라고.”
부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누가 지 엄마 딸 아니랄까 봐. 애가 벌써부터 사람 휘두를 줄을 알아요.”
하지만 선혜는 다른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낯선 아저씨라는 사람은 누군데요?”
부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민희 엄마 말로는 유괴범일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애를 근 한 달간 만나면서 초콜릿만 준 모양이더라고. 납치할 거면 벌써 했겠지. 여하튼 어제 민희가 이실직고하면서 알게 돼서 난리가 난 모양이더라고. 당분간 위험하다면서 유치원도 안 보낼 거래. 그래서 당분간 학부모회 회장은 내가 위임할 예정이고.”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나마 회장직을 맡아 기쁜 모양이었다.
“여하튼 조만간 학부모 회의 있는 거 알지? 바쁘다고 전처럼 빼지 말고 꼭 참석해. 알았지?”
“네.”
선혜는 대화를 마치고는 돌아섰다.
차에 올라타 집에 가는 내내 부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특히나.
‘유괴범.’
그 단어가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낯선 남자가 괜히 어린애를 붙들어 초콜릿을 줬을 리가 없다. 보통 유치원도 아니고, 부유한 집안 애들이 다니기로 유명한 사립 유치원 원생에게 굳이 그런 선행을 베풀 리가.
가히 수상쩍었다.
정말 민희를 납치라도 하려고 한 걸까? 아니면…….
순간 수호가 납치당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싹해져 선혜는 핸들을 꽉 붙들었다.
상상만 해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선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상상한 것을 떨쳐내려 애썼다.
쓸데없는 상상은 정신 건강에 해로웠으므로.
*
한편. 유치원에서는 하루의 시작과 함께 유치원 선생님의 열띤 당부가 한창이었다.
“여러분. 낯선 사람이 맛있는 거 준다고 해도 절대 받으면 안 되고, 낯선 사람을 절대 따라가서도 안 돼요. 알았죠?”
아이들이 입을 모아 ‘네- 선생님-.’하고 대답하지만, 선생님의 얼굴에서 불안이 가시지는 못했다.
민희의 결석은 단연 아이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였다.
충치가 생긴 아이들은 민희 때문이라며 투덜대고 있었다.
“흥. 진짜 싫어. 이상한 아저씨한테 받아 온 걸 왜 우리한테 줘?”
“그니까.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이상한 사람이 주는 건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우리 엄마도.”
“민희 걘 몰랐나 보지. 바보 같아.”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근데 어떤 아저씨가 초콜릿을 줬을까?”
한 아이의 질문에 다른 아이가 아는 체를 하며 나섰다.
“내가 들었는데, 새까만 아저씨랬어.”
순간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수호가 멈칫했다.
“새까만?”
“응. 모자도, 마스크도, 옷차림도 모두 새까맸대. 그래서 민희 걔도 얼굴은 잘 못 봤다고 했대.”
“헐, 대박.”
아이들은 더욱 흥이나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자도 마스크도 옷차림도 모두 새까만 사람.
‘또 보자.’
차림새가 비슷했던 그 아저씨가 떠오를 건 뭔지.
“윤수호. 왜 그래?”
수호의 표정이 대뜸 일그러지자 옆에 있던 세빈이 물어왔다.
수호는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아냐. 아무것도.”
세빈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오늘은 저 빼고 두 분만 식사하세요.”
점심시간. 태준이 일어나면서 한 말에 형주와 성균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태준이 고장 나서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핸드폰 좀 새로 개통하게요. 자꾸 고장이 나서.”
“그래. 다녀와.”
“혹시 아는 대리점 있으세요?”
“근처에 하나 있긴 한 것 같던데. 아, 본사 맞은편에 하나 있는 것 같더라고. 거기 가보면 되겠네.”
“넵. 그럼 식사 맛있게들 하십시오. 새 폰 들고 뵐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태준은 지갑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고장 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본사 건물을 나서자 형주가 말했던 대리점이 보였다.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꼬르륵.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찌나 요란한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다 돌아볼 정도였다.
태준은 무안한 얼굴로 웃으며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혼자 간단히 끼니를 때울 만한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태준의 눈에 대리점의 옆에 있는 편의점이 들어왔다. 건물 모퉁이에 있는 작은 편의점이었다.
‘오랜만에 컵라면이나 하나 먹어야겠다.’
삼각 김밥에 달걀까지 추가해서.
입맛을 다시는 동안 파란불이 켜졌다.
태준은 단숨에 편의점으로 달려가 컵라면과 삼각김밥, 그리고 훈제 달걀과 물 한 병을 샀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창밖을 보며 익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옛날 일이 생각이 났다. 수호랑 컵라면을 먹다가 선혜에게 들켜서 혼났던 일.
그때는 선혜에게 미움받는 줄 알고 마음이 졸아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어 있었다.
잔잔하게 웃으며 창밖 풍경에 무의미하게 시선을 두고 있는 때였다.
딸랑.
편의점 입구에 달린 벨이 울리며 한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무심결에 돌아본 태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인어른?’
순간 석주인 줄 알았다. 그만큼 차림새가 비슷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었다. 모자도, 마스크도, 옷도 바지도 운동화도.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석주와 달랐다.
석주가 다소 음울한 분위기라면 이 남자는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보고 있으면 절로 미간이 찡그려진달까.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줄곧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진열장에 가려져 한계가 있었다.
뒤늦게 태준은 낯선 사람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데…….’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때였다.
삑삑. 바코드 찍히는 소리가 들려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슬쩍 고개를 기울이니 계산대 위에 놓인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청테이프, 박스 테이프, 칼, 가위, 장갑.
그리고 그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 초콜릿 여러 개.
물건들을 바라보는 태준의 미간이 점차 좁혀지는 찰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00블라스트 하나 주세요. 라이터도요.”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태준이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가는데 남자가 편의점을 나섰다. 그러고는 태준이 앉아 있는 창가 앞에 서서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곧이어 마스크를 내리고 드러나는 얼굴.
“……!”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담배에 불을 붙인 남자가 그 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이윽고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굳은 남자의 입술 사이로 담배가 떨어졌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태준의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틀림없이 그때 그 남자였다.
‘내가 그 여자 전 약혼자다!’
선혜의 전 약혼자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던 그 남자.
그리고 선혜의 머리채를 잡았던 남자.
창밖에 서 있는 건 재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