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소문의 시작
“안녕하세요.”
선혜는 태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받은 태석이 수호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수호는 회사에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선혜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유치원에서 오늘따라 맡아줄 수 없다고 해서요. 야근 있는데 빼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야근? 야근이 있어요?”
“네.”
“이런.”
예상치 못한 변수에 태석이 혀를 짧게 찼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이 저녁 먹고 카페에 가거나 간단히 술이라도 걸치면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아. 사실은.”
태석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윤선혜 씨랑 태준이 퇴근하면 셋이서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했죠.”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서프라이즈.”
태석의 장난기 어린 얼굴에 태준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 때문인지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한편 고은은 음료를 만드는 중간중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호야. 큰아빠한테 인사 안 해?”
태석이 무릎을 살짝 굽혀 수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이구. 이뻐라.”
태석이 사랑스러워죽겠다는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아빠, 라. 그 호칭으로 하여금 선혜의 아들이 태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고은은 커피가 내려오는 포터 필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러니까. 그때 니스로 도망가서 만난 남자가, 신태준 그 남자였단 말이지.
그리고 그 남자를 회사에서 다시 만났다고.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라고.
‘……우연이겠지.’
고은은 안다. 선혜가 애 아빠가 누군지 알아보고 우연을 가장하여 접근할 만큼 치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제가 좋아했던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선혜의 운명이라서.
‘너는 왜.’
안 그런 척하면서 내가 갖고 싶은 건 모두 가져가 버리는 걸까.
꿈도, 재능도, 사람들의 관심도 남자도.
그리고……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사랑조차.
포터 필터에 담긴 커피 가루를 버리는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 쿵 소리가 났지만, 태석과 선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태준이 얘는 왜 전화를 안 받나 모르겠네.”
“바쁜 모양이더라고요. 태준 씨도 오늘 야근이라던데.”
“와. 봐주지 말랬더니 진짜 우리 동생 빡세게 굴려주시는구나, 한 부장님. 하긴. 나도 야근은 밥 먹듯이 하긴 했었는데.”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태석이 선혜에게 말했다.
“그럼 셋이 밥 먹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네. 신경 써 주셨는데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그럼 다음에 봅시다. 태준이 녀석한테 내가 헛걸음하고 갔다고 좀 전해 줘요. 연락 좀 받으라고 하고.”
“네.”
태석이 수호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수호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작게 덧붙이기를.
“……큰 아빠.”
그 호칭이 뭐라고, 태석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어났다.
태석은 수호에게서 좀처럼 눈을 못 떼다가 손을 한 번 더 흔들어 보이고는 카페를 나섰다. 때마침 잠깐 자리를 비웠던 매니저가 카페로 발을 들였다. 멍하니 멀어지는 태석의 뒷모습을 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
수호를 보더니 순간 멈칫 섰다.
“주문하신 음료랑 케이크 나왔습니다.”
선혜는 수호를 데리고 커피랑 케이크를 받았다. 손이 모자라서 수호에게 케이크는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수호는 흔쾌히 케이크 박스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선혜의 손을 잡고 총총 카페를 나갔다.
.
.
.
매니저는 걸어가는 선혜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저 옆에 있는 애, 저 여자 아들이래?”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근데…… 되게 닮지 않았어?”
“누구랑요?”
고은이 되묻자 매니저가 작게 말했다.
“그 본사 이사님 말이야. 방금 나가신.”
자신은 태준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태석을 먼저 보고 수호를 나중에 본 매니저는 태석과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매니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고은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눈이 형형해지는 게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슬쩍 주위를 둘러보는데 때마침 카페로 들어서는 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던 고은은 연기를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숨기고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매니저가 들을 수 있게 혓소리를 가미하면서.
예상대로 매니저가 혓소리를 듣고 돌아보더니 고은의 표정을 보고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미심쩍게끔 무언가 숨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매니저가 고은의 팔을 잡으며 눈을 빛냈다.
“뭐야. 왜 그러는데.”
“사실…….”
고은은 목소리를 줄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지민의 귀에까지 들릴 수 있도록.
“아까 언니 아들이 이사님한테 아빠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매니저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뭐라고?!”
“……뭐라고요?”
매니저의 경악 서린 외침보다는 조금 늦게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높낮이만 다를 뿐. 매니저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눈동자가 속절없이 떨린다.
“……아.”
고은은 뒤늦게 말실수를 한 사람처럼 당황한 얼굴로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손이 가린 입가는 히죽거리고 있었다.
*
걸어가던 선혜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저를 멍하니 쳐다보는 매니저와 지민이 보인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리는 매니저와 달리 지민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친다. 바라보는 시선에 분노와 혐오감이 담긴다.
갑자기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추가 주문을 한 건, 내가 아니라 팀장님인데.
지민은 기주가 추가 주문을 시키는 바람에 내려왔다고 했다.
애까지 챙겨 오는 선혜의 손이 모자랄 것 같다고 자신을 시켰다며 지민은 선혜 앞에서 대놓고 투덜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수호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었지.
그런 지민에게 이따가 보자고 인사를 남긴 뒤 걸어가다가, 왠지 모를 찝찝함에 돌아봤더니 저렇게 쳐다보고 있다.
“엄마.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수호의 손을 고쳐 잡은 선혜는 걸음을 옮겼다.
*
“…….”
디자인 팀이 간식을 먹는 테이블 위는 조용했다. 다들 간식을 먹으며 수호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수호가 사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이어진 반응이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수호는 그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으며 얌전히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기주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 바람에 기주는 빨대로 흡입한 커피가 목에 걸리고 말았다.
쿨럭쿨럭 기침을 요란하게 하던 그가 선혜를 흘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기주가 무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서, 선혜 씨 애가 생각보다 크네? 몇 살이야?”
참 일찍도 묻는다 싶었다.
“올해 일곱 살이요.”
“일곱 살?”
민영이 놀란 얼굴로 되묻다가 입으로 가져가던 케이크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지민은.
“…….”
눈을 내리깐 채 잘근잘근 빨대를 씹고 있었다.
수호를 전에 본 적 있는 희재만이 동요 없는 얼굴이었다. 수호가 입에 묻힌 케이크나 핫초코 따위를 태연하게 물티슈로 닦아주기까지 했다. 수호는 낯설어하긴 했지만 싫지 않은 얼굴로 희재의 손길을 받았다.
“얘, 이름이 뭐니?”
민영이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수호요.”
“아, 그렇구나.”
또다시 찾아온 침묵.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호가 선혜를 보며 물었다.
“엄마. 아빠는 어딨어?”
그 질문에 민영과 기주는 동시에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응. 아빠는 다른 사무실에.”
“어디?”
“저기. 왜. 아빠한테 가고 싶어?”
“음. 아니. 그냥 여기 있을래. 아빠 바쁠 것 같아.”
“기특해라. 아빠 생각도 해 주고.”
희재가 피식 웃으면서 한 말에 수호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크를 입에 밀어 넣었다.
의외로 아이를 좋아하는지 희재는 수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기주는 그런 희재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커피가 목에 걸렸다. 침묵 속에 기주의 기침 소리가 한참 들렸다.
그러다 문득, 지민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제 자리요. 일해야죠.”
퉁명스럽게 말한 지민은 말한 대로 일을 시작했다. 지민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혜는 수호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는 신신당부했다.
“엄마 일 금방 끝낼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응. 엄마.”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선혜는 일을 시작했다.
수호는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뒤로 돌렸다.
디자인 팀 창밖.
“……?”
그곳에는 태준이 서 있었다.
잔뜩 놀란 얼굴로 수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
수호가 장난스럽게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태준은 손가락으로 수호를 가리키며 무어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호는 그런 태준을 향해 생긋이 웃고는 다시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준은 그런 수호를 보고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내젓다가 걸어갔다. 수호를 발견하고 멍하니 서 있던 성균이 뒤늦게 태준을 따라왔다.
“쟤, 쟤가 신 주임 아들이야?”
“네.”
“와. 진짜 많이 닮았네.”
태준은 성균의 말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누가 봐도 제 아들이구나 싶어 뿌듯하기만 했다.
*
업무가 끝난 뒤 태준은 지하 주차장에서 선혜와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선혜가 지하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준이 차에서 내리자 태준을 발견한 선혜가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별로 안 기다렸어요.”
태준이 수호를 보더니 물었다.
“수호 안 피곤해?”
수호는 도리질했지만 그 뒤에는 작게 하품을 했다. 태준은 그런 수호를 보며 웃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선혜 씨는 안 피곤해요?”
“네. 괜찮아요.”
“수호 데려갔는데 팀원들 별말 없었어요?”
선혜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요. 대충 눈치챈 것 같긴 하지만.”
“내 아들인 거?”
“네.”
“아까 임 대리님도 보더니 바로 눈치채시더라고요. 수호가 내 아들인 거.”
“그래요? 엄청 놀랐겠다.”
“그랬죠, 뭐.”
이야기하면서 태준은 계속 실실거렸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던 선혜가 물었다.
“태준 씨 왜 자꾸 웃어요?”
“그냥.”
태준이 수호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봐도 내 아들이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요.”
수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빠랑 나랑 많이 닮았어요?”
“그럼.”
태준이 씩 웃었다.
“판박이지, 판박이.”
*
“와. 진짜 신 주임 판박이더라.”
야근이 끝난 후. 지민과 민영은 둘이서 따로 근처 호프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둘이 여행지에서 만난 게 육 년 전쯤이랬지? 그때 생긴 건가?”
“몰라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지민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혼자 몇 잔째인지. 아무리 맥주여도 많이 마시면 취하는 법.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지민은 벌써 취한 티가 나고 있었다. 취하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민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김 주임 아직도 신 주임님한테 미련 있는 거야? 이제 애 아빠인데 미련 좀 버려.”
“……애 아빠는 무슨.”
나름 혼잣말이었는데 취기에 볼륨이 커졌다. 당연히 맞은편에 앉은 민영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민은 대답하는 대신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방금 원샷을 했기에 잔은 텅 비어 있었다.
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은 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끝에는 얼굴을 볼썽사납게 일그러뜨린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민영이 지민을 빤히 쳐다보는데 지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여시야 진짜.”
“누구 얘기하는 거야?”
“누구긴요. 당연히 윤선혜 씨죠.”
“아니, 뭐. 그것도 능력이지. 부잣집 아들 애 가져서 그 집에 눌러사는 거.”
“그게 아니라……!”
지민이 목소리를 높이다가 멈칫했다.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 뭔데 그래.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었어? 서운하다?”
민영이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민영을 보며 잔뜩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창밖에서 수호를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준이 떠오르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김 주임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누가 바보 같다는 건데?”
민영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꽤 날카로운 말투가 신경을 긁은 탓일까. 지민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신 주임님이요.”
“신 주임? 신 주임이 왜?”
“윤선혜 씨한테 완전 깜박 속아 넘어갔잖아요. 자기 아들도 아닌……!”
말을 하다가 지민은 멈칫했다. 뒤늦게 가슴이 덜컹거렸기 때문에. 퍼뜨리기 위험한 소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이미 들을 만큼 들은 민영이 몸을 바짝 숙이고 눈을 빛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신 주임 아들이 아니라니.”
“그게…….”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윤 선혜 씨 아들.”
입을 열었다.
“신 이사님 아들이래요.”